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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우리들의 사랑법 -고전13:4-7

by 【고동엽】 2022. 7. 3.
우리들의 사랑법
고전13:4-7
(2000/5/7)

사람과 사랑 사이
여러분 선물 받는 것 좋아하시지요? 저도 지난 수요일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청년회의 임보람 양이 '골든레몬타임'이라는 허브 화분을 가져왔어요. 학교에서 싸게 팔아서 사왔대요. 정말 행복했습니다. 화분 받은 것도 좋았지만 화분을 건네는 보람이의 미소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선물의 종류가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었던 것은 가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목표가 "세상의 선물로 사는 우리"인데, 선물 노릇 잘하고 계세요. 남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선물이 되어 그에게 다가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의례적인 선물,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하는 선물은 받는 이의 마음을 오히려 불편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스스로 다른 이를 위한 선물이 될 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여리고 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에게 선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들을 위한 선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선물이 되고, 남편이 아내에게 선물이 될 때, 부모가 자녀에게 선물이 되고, 자녀가 부모에게 선물이 되려 할 때 가정은 평화로와집니다. 사람들의 만남과 나눔은 모두가 다 선물의 교환입니다. 내 선물은 나라는 존재이고, 당신의 선물은 당신이라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선물인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이 다른 이를 향한 선물이 되는 것인가요? 한마디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말장난입니다만 '사람'을 잘 갈고 닦아, 둥글고 원만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면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ㅁ'에서 'ㅇ'으로의 변화가 곧 인간 성숙의 방향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사람이 너무 둥글둥글 해도 반편 같아서 우습기는 하지만, 너무 모난 사람보다는 두루 원만한 사람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은 사실 아닌가요? 천상병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돌아가셨는데요, 그분의 시심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몰라요. 그분의 시 가운데 [동그라미]가 있습니다.

동그라미는 여자고 사각은 남자다.
동그라미와 사각형을 두 개 그리니까
꼭 그렇게만 보여진다.

상냥하고 자비롭고 꾸밈새없는
엄마의 눈과 젖
손바닥과 얼굴이 다 둥글다.

울뚝 불뚝하고
매서운 아버지의 눈과 입,
손목과 발힘이 네 개나 된다.

물론 세상에는 아버지도 있어야 하고 어머니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들의 세계가 전쟁과 경쟁을 연상시킨다면 어머니의 세계는 너그러움과 포용을 연상시키지 않아요? 괴테는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한다"고 했어요. 때로는 모난 데도 있어야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동그라미가 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건강한가?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다로 제자들을 찾아와 베드로에게 뭘 물으셨지요? "네가 나를 믿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였습니다. 믿음도 중요하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를 위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관한 담론이 전방위적으로 쏟아져나오는 시대에 살다보니,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참 많이 퇴색한 것 같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는 몹쓸 짓을 참 많이 하며 삽니다. 요즘 컴퓨터 동호인들을 긴장시키고 있는 바이러스 이름이 뭔지 아시지요? ILOVEYOU예요. 왜 하필이면 사랑입니까? 자식 사랑만 해도 그래요.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가 겪어야 할 어려움을 다 제거해주는 부모가 있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예요. 진짜 사랑은 자식의 방황과 실패가 아프더라도 그가 스스로 경험을 통해 배우도록 내 버려두는 거예요. 방황의 여지를 주지 않는 사랑은 구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고통의 구렁텅이에 버려두실 때가 있어요. 우리가 자신의 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가는 성숙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사랑법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도버만 종의 개에게 간유를 주기 시작했다. 간유가 개에게 좋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반항하는 개의 머리를 다리 사이에 꽉 끼고 양손으로 턱을 벌리고는 간유를 목구멍에 집어넣느라 씨름했다. 그런던 어느 날 개는 주인의 손에서 겨우 빠져나가다가 간유를 바닥에 쏟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개가 돌아서서 숟가락을 핥는 게 아닌가! 개가 저항한 것은 간유가 아니라 그것을 먹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앤소니 드 멜로, {개구리의 기도2} 중에서)

방법이 틀리면 사랑은 구속이 됩니다. 요즘 부모님들의 자식 사랑법은 매우 공격적인 가봐요. 청년 하나가 학원에게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그가 하는 일은 학생들을 12시 넘어까지 학원에 잡아두는 거예요. 떠드는 아이들에게 겁을 줘서 조용히 시키기도 하구요. 청년은 그 일을 더 이상 못하겠대요. 자기 인성이 망가지는 것 같대요. 그래서 '아, 아이들하고 놀아주지 그래. 가겠다는 녀석은 잡지 말고.' 그랬더니 자기도 그러고 싶대요. 하지만 문제는 부모들이에요. 아이들을 12시 넘어까지 붙잡아놓지 못하면 학원에 보내지 않겠다고 한 대요. 이게 부모의 사랑 맞나요? 다 아이들 잘되라고 그런다구요? 글쎄요. 또 애들 기죽이지 않는다고, 음식점·지하철·전시 공간·기타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떠들든말든 내버려두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요? 질서와 예절, 남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상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어요?

바울에게 배우는 사랑
바울 사도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은사인 사랑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사랑을 '오래 참음'과 '온유함'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죄지은 사람들에 대해 쉽게 분노하지 않으시고, 너그러운 사랑으로 감싸안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 안에 동요가 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거든요. 살다보면 내 마음에 들지 않게 처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오래 참아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또한 그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남의 성공과 기쁨 때문에 속앓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행복이 곧 자기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비움에서 오는 것인데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또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허물 없다는 것과 무례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를 잘 볼 수 있어요. 거리 없는 사랑은 맹목이 됩니다. 거리를 둔다고 해서 사랑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의 행복을 위해 내가 누릴 수 있는 것까지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이익에 혈안이 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혼수감이 적다고 해서 다투는 이들이 있는데요, 그런 경우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또 성내지 않는다 했습니다. 성낸다는 것은 자기 속에 일어난 동요를 드러내 보이는 겁니다. 누군가가 자기 속에 있는 약함과 상처를 건드리면 사람들은 부르르 떨면서 화를 냅니다. 성 잘내는 사람은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사랑이 고갈된 사람입니다.
-사랑은 또 남에게 앙심을 품지 않는다 했습니다. 좋은 일은 쉽게 잊으면서도, 자기가 다른 이에게 받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슴 속에 새겨두는 것이지요. 그래 새겨둘 게 없어서 그런 걸 새겨둬요? 자꾸 지우세요. 앙심을 품으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자기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상처를 잊지 못하고 가슴 속에 앙심을 품고 사는 사람은 그 지점에서 영혼의 성장이 중지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남의 흠을 들추어냄으로써 우월감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이의 눈에게 기어코 티끌을 빼주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이지요. 남에게 흠이 있다는 것이 행복해 못견디겠다는 듯이 사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 속에 있는 천박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오히려 진리에 대하여 즐거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여기서 '덮어준다'는 말은 '지탱해준다'고 번역해도 무방한데요, 누군가의 허물을 덮어주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탱해주는 기둥과도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람처럼 불합리한 존재가 어디있으며, 인생처럼 복잡한 것이 어디 있어요? 때로는 덮어주고, 숨겨주고, 기다려줄 줄 아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이라는 관형사가 네 번씩이나 반복된 것을 봅니다. 이것은 사랑이 얼마나 확고한 결단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사랑은 자연스런 감정의 흐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적인 선택입니다. 참고, 믿어주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어떤 이가 비록 지금은 아름답지 못하지만 결국은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것임을 믿으면서 끝끝내 참아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은 우리 사이에 있는 벽은 자꾸 허물어내고,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 의지적인 노력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가면 여러 가지 질문을 받는데 그 중에 하나가 "월인 공덕하였는가?"입니다. '越人', 즉 사람을 건너편으로 건네주려고 노력했는가? 그래요. 여러분, 우리가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나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것입니다.

'成人'은 누구인가? '成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제대로 사랑할 줄 알아야 어른입니다. 여러분, 몸은 다 자랐지만 사랑할 줄은 모르는 영적 미숙아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가정의 달인 오월, 여러분 모두가 사랑을 새롭게 익혀, 성인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인이 되어 누구에게나 선물이 되어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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