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되기 위하여 엡4:25-32 (2000/4/30, 창립기념일)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이지요.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인가요? 좀 부담이 되시지요?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데' 하는 자책감이 들지요? 그래요.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머리로는 알아요. 하지만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살지는 못하지 않아요?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으면 벌써 배가 찼는데도 자꾸만 손이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머리는 이제 그만 먹으라고 하는데 손이 자꾸 음식으로 가지요? 이게 사람인가 봐요. 말을 조금 바꾸어서 이야기해 볼까요?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다 우리가 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착하게 살고 싶고, 정 깊은 사람으로 살고 싶지만, 세상일에 부대끼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모질고 메마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요. 아무리 새롭게 살겠다고 굳은 결심을 해보아도 작심삼일입니다. 혼자는 어려워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료들을 주십니다. 아담이 외로워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돕는 배필'로 하와를 주셨습니다. 꼭 배우자만이 돕는 배필인가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들이 '돕는 배필'이지요. 롤로 메이라는 신학자는 이런 사람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들을 가리켜 "支援共同體"라고 했어요. 가족, 친구, 동료, 이웃들은 모두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돕는 분들입니다. 교회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지원공동체입니다.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워주고, 쓸쓸한 사람들의 벗이 되어주고, 잘못된 길로 나가는 사람들은 바로잡아 주고, 믿음의 용기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면서 교회는 교회가 되어 가는 겁니다. 이게 참 중요해요. 교회를 짓고 봉헌했다고 해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날마다 이런 아름다운 관계들을 통해 세워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조화롭고도 아름다운 관계를 깨뜨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치면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들이 유념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거짓입니다(25). 거짓은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깨뜨립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파괴합니다. 거짓은 말로도 행동으로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거짓을 피해야 하는 까닭은, 거짓이 자연스러운 우리 삶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이 되었든 가식이 되었든 우리가 거짓된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상대방을 경계하며 살게 됩니다. 나의 거짓이 드러날까 두려워 마음에 보초를 세워놓고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삶을 용납할 수 없을 때 거짓에 빠집니다. 자기가 작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자기를 부풀리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허물이 부끄러울 때 거짓을 지어냅니다. 숨겨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은 거짓 속에 집을 짓고 삽니다. 하지만 거짓은 자기를 기만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모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의로운 이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은총없이 살 수 없는 존재들이예요. 그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진실의 터 위에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거짓이 우리 사이에 들어오면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의 관계는 겉돌 수 밖에 없습니다. 거짓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새 삶을 향한 길떠남이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전제입니다. 둘째, 쉽게 화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26). '화(火)를 낸다'는 것은 성이 나서 화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화(火)는 화(禍), 즉 재앙을 부릅니다. 우리 속에 화기가 있으면 속을 상하게 합니다. 속이 상하면 반드시 다른 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시어머니에게 야단맞은 며느리가 학교 가는 자식에게 소리를 지르고, 영문도 모르고 화를 뒤집어 쓴 아이는 애꿎은 고양이를 걷어찬다는 격으로 화를 화를 부릅니다. 화 잘내는 사람 옆에 있으면 우리 영혼이 다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잠22:24-25)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7:9) 쉽게 성을 내는 사람은 한 공동체를 내적으로 무너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신뢰와 사랑의 끈을 느슨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을 멀리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의 일치가 깨지는 것이지요. Paul Tillich라는 신학자는 '죄'를 '소외'라고 했어요. 소외란 누군가를 자기들의 친교 바깥으로 내모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이웃들과의 관계가 깨지고, 자기와의 관계가 깨진 것, 즉 소외의 상태는 죄입니다. 사탄은 우리 사이에 틈을 내서 갈라지게 만듭니다. 사탄의 전략은 '갈라놓고 지배하라'(divide and control)입니다. 사탄이 사람들을 갈라지게 만들 때 주로 쓰는 무기가 뭐냐하면 '거짓말'과 '분노의 감정'입니다. 서로 마음 상하지 않게 배려하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공동체 존립의 기본 조건입니다. 셋째, 도적질을 그만 두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남을 도우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28). 먼저 도적질을 그만 두라고 했는데요.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도둑질이지만, 남이 흘린 땀의 대가를 가로채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남의 명예를 가로채는 것도 그렇고요. 저는 남의 기쁨을, 그리고 성공을 사심 없이 함께 기뻐하고 인정해줄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려워요. 그 사람의 자리에 자기를 자꾸 가져다가 세우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자기가 그 명예를 얻을 수 없을 땐, 그의 명예에 어떻게든 흠집을 만들려는 나쁜 습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게 다 도둑질이에요. 기독교인의 삶의 동기는 다른 이들, 즉 함께 살라고 주신 동료들을 살 맛나게 해주는 거라 했지요? 바깥에서 일하는 남편/아내가 힘겨운 일들을 견디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잘 부양하기 위해서이듯이,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들을 도우려는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해 얻은 열매를 어려운 이웃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 삶은 한결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예컨대 무의탁노인에게 쌀 20㎏을 사드리려고 거리에 나가 빈 병을 줍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 될 겁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행복한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넷째,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의 말은 잘만 사용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나르는 수레가 될 수 있습니다. 따뜻하고 친절한 말, 진실하고 적절한 말, 꼭 필요한 말을 할 경우에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은 잘못 사용하면 한 공동체의 토대를 허물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도 인간의 죄업 가운데 '口業'이 있다고 합니다. 입으로 짓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잘 인식했기 때문일 거예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말을 하세요. 확신을 주는 말, 격려하는 말,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말을 하려고 노력하세요. 하지만 외설스러운 말, 독설, 헛된 장담, 중상모략, 비방은 자꾸 피하세요. 그런 말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말이 사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그릇된 언어와 행실은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 사실 교회처럼 말이 많은 곳도 드물 거예요. 전해서 별로 덕스럽지 않은 이야기들은 하지 마세요. 홍수에 마실 물 없다는 격으로 말이 많은 사람의 말은 믿음직스럽지 않지요? 미국 프로 농구 팀 중에 유타 재즈(Utah Jazz)라는 팀이 있습니다. 그 팀이 최근에 열린 play-off에서 두 게임을 계속 이겼어요. USA TODAY誌(4월 27일)는 스포츠면 머릿기사로 이 팀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표현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재즈, '우리' 농구의 진수를 보여주다"(Jazz playing 'we' basketball) 유타의 스타급 선수들의 나이는 마흔에 가깝다. 그러나 그들의 플레이는 무기력하기는커녕 노련하기만 하다. 이기적이기 보다는 헌신적이다. (Utah`s stars are pushing 40, but their play is more seasoned than aged, more selfless than selfish). 칼 말론이라는 선수와 존 스탁턴이라는 선수의 헌신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가 다른 후배 선수들의 귀감이 되어서, 선수 모두가 '나' 보다는 '우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더군요. 여러분, 71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교회도 이처럼 연세 드신 분들은 삶의 모범을 보이시고, 젊은 분들은 그 뒤를 잘 받쳐가면서 '우리' 교회를 이루어갔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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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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