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귀를 여소서 사50:4-9 (2000/4/16, 종려주일) 기대가 무너질 때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고요.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물론 다리가 아파서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임금의 즉위식 때 말을 타지 않고 나귀를 탔습니다. 위풍당당한 말이 전쟁을 연상시킨다면 느릿느릿 걷는 작은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겁니다. 물론 그 길은 영광의 길이라기보다는 고난의 길이지만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겉옷을 벗어 길에다 펴고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는 '도우소서. 건지소서. 구원하소서' 하는 외침입니다. 그들이 바란 구원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외세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것, 오랜 가난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신들이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는 것?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곤란한 일이 무엇인 줄 아세요? 자기의 기대를 다른 이에게 투사시켜 놓고, 그가 자기의 기대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자기들의 욕망을 투사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이가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순종적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다가 그 욕망이 좌절되면 아이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부부관계도 그렇습니다. 내 아내는 나이가 들어도 날씬하고, 현명하고, 온화하고, 지적이고, 매력적이기를 원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돈도 잘 벌고, 매력적이고, 가정적이고, 자기에게만 잘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기대가 무너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래요. 하나님이 내 기대대로 해주시기를 바라고, 한 공동체 안에 있는 교우가 나의 기대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랄 때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기대'는 '변형된 지배욕'일 수도 있거든요. 예수님을 향해 '복되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외치며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깔아드리던 군중들이 자기들의 기대가 무너졌을 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문제는 예수가 자기들의 '기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날들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어떤 소리도 예수님의 내적인 고요함을 무너뜨릴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환호를 보낸다고 기뻐하지도 않으셨고, 사람들이 비난하고 모욕한다고 해서 의기소침해지지도 않았습니다. 헨리 데이빗 쏘로우는 '어떤 사람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다른 길로 가고 있다면 그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다른 북소리, 곧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무력해 보이는 유력자 오늘 읽은 이사야 본문은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이 고난받는 종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예형을 봅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 니라.(6) 고난받는 종은 사람들 앞에서 참 무력해 보입니다. 우리는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만만하게 보이면 짓밟힌다구요. 어쩌면 우리 시대는 라멕의 노래를 마음속 빌보드 순위 1위에 올려놓고 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4:23-24) 이에 비하면 고난받는 종은 참 무력해 보입니다. 만만해 보입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력하지 않습니다.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 합니다.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를 모욕하는 이들을 이깁니다. 힘이 없어서, 비겁해서, 두려움 때문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굴입니다. 하지만 미움이나 모욕까지도 영혼의 힘으로 감싸안고 가려는 것은 진정한 용기입니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커 보이는 까닭은 그들의 영혼의 힘 때문입니다. 귀가 열린 사람들 그렇다면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뒤로 물러가지도 않는다."(5) 진정한 힘은 들을 귀에서 나옵니다.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종이란 '들을 귀'가 열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변이 온갖 소음으로 들끓어도 자기 아기의 울음소리를 가려듣는 엄마처럼, 세상의 소음 속에 살면서도 하늘의 소리를 가려들을 줄 아는 사람은 내적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 듣게 하시도다." 여기서 '학자 같이'라는 말 때문에 주눅이 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학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사실은 '제자'로 옮기는 것이 적절합니다. 제자나 학자나 다 '배우는 자'라는 뜻이긴 합니다만, 학자 하면 왠지 엘리트의 냄새가 나지 않아요? 여기서 고난받는 종은 자기 몸과 마음을 예민하게 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아침마다'. 아시겠습니까? 아침 시간은 바로 창조의 시간이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른 아침의 정적 속에서 찬송으로 새벽을 깨우고, 성경 읽기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 귀를 열어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생활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먼저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 건네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른 새벽이면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도 '아뢰는 자'인 동시에 '듣는 자'입니다. 기도는 '아룀'과 '들음'의 통일입니다. 듣는 사람이라야 제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셨다"(4) 맥이 탁 풀린 사람에게 다가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를 주신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귀가 열린 사람에게 말입니다. 저는 요즘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혼과 영을 예민하게 가다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기억하시지요? 어디에 끌려가더라도 미리 무슨 말을 할까 궁리하지 말아라. 성령께서 해야 할 말씀을 들려주실 것이다(눅21:12-15 참조). 하늘에 속한 존재의 당당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어요? 오늘 본문 7-9절은 얼마나 당당한 선언입니까?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한다면 아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온갖 시련과 모욕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고요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선거를 치르고 나서 참패한 자민련의 당직자가 우리가 얻은 한 표는 다른 당의 열 표보다 더 소중하다고 해서 제가 웃었는데요. 그걸 빌려 말하자면 온 세상의 칭찬보다는 하나님의 인정이 더 소중하고, 온 세상의 비난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꾸지람입니다. 예수님은 땅의 북소리에 발을 맞추어 사신 분이 아니라, 하늘의 북소리에 발을 맞추어 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는 어떤가요? 오늘부터 시작되는 고난 주간 동안 여러분의 들을 귀가 예민해져서 하늘 뜻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살아가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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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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