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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회심 -삼상12:19-25

by 【고동엽】 2022. 7. 3.
지속적인 회심
삼상12:19-25
(2000/5/21, 웨슬리 회심주일)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야웨 하나님만이 우리 임금"(Mono-Yahwhism)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변 국가들이 왕정 체제를 굳히고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국가를 세울 때에도 이스라엘은 왕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노예로서 온갖 핍박과 착취를 당했던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평등 공동체의 이상을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백 년 동안 그들을 이끈 것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지배자라기보다는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변의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이스라엘만 홀로 섬처럼 버틸 수는 없었습니다. 오랜 外侵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침내 강력한 국가를 세워 더 이상 다른 나라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나라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국가간의 관계에서는 힘이 정의라지 않습니까? 평등 공동체의 꿈이 하나의 비전이었다면, 강력한 국가의 꿈은 현실적인 대안이었던 셈이지요.

우리에게도 왕을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 사무엘은 좀 기분이 나빴을 거예요. 왜 안 그렇겠어요? 자기가 아직 죽은 것도 아닌 데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 지도력에 대한 불신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사무엘이 하나님께 나아가 이 배은망덕한 백성에 대해 불평을 터뜨리자 하나님도 매우 불쾌해 하십니다.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삼상8:7)

사무엘은 왕을 세우기로 마음을 먹으면서도 백성들에게 왕정 체제가 얼마나 억압적일 수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이겠지요. 왕은
·아들들을 군대에 징발하여 자기의 뜻대로 부려먹고
·딸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할 것이고
·땅을 강제로 환수하여 자기 측근들에게 줄 것이고
·무거운 세금을 거둘 것이고
·급기야는 백성들을 종으로 삼을 것이다.

생각의 길이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면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 사람인가 봅니다. 그래도 백성들은 고집스럽게 '왕'을 달라고 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어야' 이 냉혹한 국제 질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명분입니다. 백성들에게 사무엘의 말은 대세의 흐름을 모르는 뒷방 늙은이의 고집처럼 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쾌했지만 어쩌겠어요? 사무엘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삼습니다. 이제 왕이 세워졌으니 사무엘은 물러가야겠지요? 오늘의 본문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 사무엘의 은퇴식이라 할만합니다. 은퇴식은 몇 가지 절차를 통해 진행됩니다.

사무엘의 은퇴식
① 공직생활 평가: 먼저 그는 하나님과 새로 세움을 입은 왕의 면전에서 백성들로부터 자기의 공직생활을 평가받습니다. 사무엘은 자기가 사사로 있는 동안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재산을 빼앗거나, 억압하거나, 뇌물을 받은 적이 있는지를 백성에게 묻습니다. 백성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결같이 증언합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습니다.

② 은퇴사: 이제 그는 은퇴에 즈음한 소회를 밝힙니다. 그는 출애굽 때부터 당시까지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 역사를 요약합니다.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졌을 때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어김없이 그들을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왕을 구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명령을 거역하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임을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③ 표징 사건: 사무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백성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때는 밀을 베는 때였는데요, 이때가 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하늘을 우러러 청하자 우레를 동반한 비가 내렸습니다. 우레와 비는 이스라엘의 불신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셨는지를 보여주는 표징이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백성들은 다 두려워했습니다. 자기들이 뭔가 크게 잘못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기를 부탁합니다. 백성들은 사울이라는 임금을 세웠지만, 위기가 발생하자 사사인 사무엘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제 서운했던 감정을 접고 백성의 위로자와 권고자로 돌아갑니다.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 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듣는 음성이 있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14:27)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4:18)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굉장한 임금이십니다. 굉장한 임금이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용서해 버리는 거지요."
조르바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그날 저녁, 내 기억에, 나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굉장한 임금님이라고 하던 그의 말은 내 속에서 틀이 잡히면서 자비심이 많고, 관대하고 전능하신 분으로 성숙을 거듭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낱낱이 들추어내고 어떻게든 벌을 주려는 분이 아니라,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조르바에게 왕으로서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하는 무정한 절대자가 아니라, 죄지은 사람들을 자비로 대하고 사랑으로 감싸안는 분이십니다.

돌이키지 말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좇는 데서 돌이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다른 이들과 우리 사이의 일치와 사랑을 깨뜨립니다. 사랑은 사람들을 가까워지게 합니다. 보세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요?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스스럼없이 가까워진 자기들의 모습을 보여주어서 탈이긴 하지만 말이예요. 그런데 사랑의 관계가 깨지고 죄가 그들 속에 들어오게 되면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슬슬 눈길을 돌리고, 바깥으로 빙빙 돌다가 급기야는 다시는 보지 않게 갈라서고 맙니다. 죄는 이처럼 소외를 만들어 냅니다. 죄는 '연대성'을 파괴해요.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그리고 생태계에 많은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은총 밖에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인정하고 우리의 참상을 시인하기만 하면 용서해주십니다.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깨어진 화목"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이거든요.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심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십니다. 용서는 한 인간 존재를 성숙하게 하고, 한 공동체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까지 살아온 내 모습을 회개하고, 아파하면서 옛 삶과 결별하는 것을 가리켜 "回心"이라고 해요. 마음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겁니다. 웨슬리가 회심했다 하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회심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 속에 들어왔을 때 그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고 했습니다. 회심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어요.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요. 하지만 은혜 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회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옛 생활이 주는 매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가나안을 향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꾸만 애굽의 종살이를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일단 큰 회심을 체험한 후에도 거듭거듭 회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확실성을 견디면서 발전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말라
돌이키지 않기 위해서는 깊은 확신이 필요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없이는 삶의 일관성을 유지하기란 난감한 일입니다. 사무엘은 그런 확신을 얻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라"(24)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이런 확신을 가지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자꾸 신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배우기 위해서는 자꾸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과 영적인 교통을 계속해야 합니다.

웨슬리의 회심을 기념하는 오늘 제 마음에는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나는 진정으로 회심했는가?" 여러분, 중요한 것은 웨슬리의 회심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의 회심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돌이키지 마십시오. 허망한 것들을 따르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우리를 두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 날마다 우리 속에서 성육신 하도록 마음을 비우고 사십시오. 날마다 우리 삶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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