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강) 사울의 회심! ② (행 9:10-19)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이 많이 나옵니다만 구약에서는 모세를 신약에서는 사도바울을 많은 사람들이 꼽고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바울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다소 사람 사울의 회심은 기독교 역사에 큰 줄기를 이루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친히 그를 가리켜 '나의 택한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미국 서부 영화에 보면 광야에서 아무렇게나 뛰놀던 야생마를 잡아다가 길들여 가장 우수한 준마로 사용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울은 그렇게도 예수 믿는 성도들을 당차게 핍박했던 장본인인데 그가 그 날도 예수교 성도들을 잡아죽이려고 대제사장의 임명장을 가지고 보무도 당당히 다메섹 도상에 나타났을 때, 하늘에서 홀연히 빛이 나타나 사울을 거꾸러뜨렸습니다.
그렇게도 예수를 핍박했던 그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180도 인생의 행로가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오직 주를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바울의 초기에는 많은 교회를 세웠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 사울의 회심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제목소개!▶
지난 시간에 배운 사울의 다메섹 체험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가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다고 8-9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왜 눈이 멀어졌는가에 대하여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의 영안이 어두워져서 마귀의 종노릇을 했던 것을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려고 육신의 눈을 어둡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들어가 삼 일간 금식하여 자신이 예수님과 교회를 핍박한 죄를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때에 아나니아가 와서 사울에게 안수를 하니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눈이 밝아졌다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10절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 때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의 광채를 본 순간부터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사울이 눈이 먼 것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의 광채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때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 소리는 사울에게 있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어서 무덤에 묻혔고, 그의 시체는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도난 당했다는 당시의 소문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살아서 분명하고도 똑똑하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십니다. 그때 사울이 깨닫게 된 줄 믿습니다. '아 그의 제자들이 말하는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분이 저 분이구나! 저 분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 예수구나! 네 열심은 헛 열심이었구나!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가?' 3일을 금식하며 주님께 회개했을 것입니다. 본문의 '그때'는 바로 사울이 주님께 회개할 때입니다.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다메섹은 고대도시로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230Km 떨어진 도시로 삼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해발671m의 고원도시로써 그 당시만 해도 유대인들이 약 5만 정도 살았다고 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A.D. 66년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 때 약 10,500명이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 도시가 성지로 남아 있습니다.
▶아나니아란 제자에 대해 잠시 알아보겠습니다. 행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가 아닙니다. 이름이 똑같습니다만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의 이름으로 유대인들 중에 흔히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아나니아를 제자라고도 했는데 70인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보는 학자가 있고, 당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누가는 모두 제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바울은 그를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행22:12-13절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경건한 사람!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이 아주 독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성도를 다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기 위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그 말을 듣고는 다메섹을 떠나지 아니하고 열심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소식을 다 듣고 있었지만 스데반과 같이 순교의 정신으로 다메섹을 떠나지 않고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보낼 만한 종을 찾다가 환난을 각오하고 충성하여 기도하는 아나니아를 불러 쓰셨습니다. '아나니아는 환상 중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즉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바른 태도입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주여 명령하십시오! 아브라함처럼, 이사야처럼, 주여! 나를 보내소서!' 이런 자세가 정말 필요합니다. 아나니아는 무명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에 모든 의심을 버리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역할은 바울을 탄생케 하는 조연에 불과했지만 말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봉사하는 숨은 일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길을 배우고 따르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 아나니아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써 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직가로 가서 유다 집에서 기도하는 사울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직가'라는 거리는 다메섹 동문에서 서문으로 이르는 중요 도로로써 좁고 곧기 때문에 직가라고 불렀습니다. 즉 좁고 곧게 뻗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길이가 약 3마일쯤 되는 거리인데 이 거리에 유다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곳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라" 사울은 금식하면서 계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금식이 금식으로만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금식은 기도하는데 있어서 가난한 심령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금식 그 자체가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금식하면 다 되는 것처럼, 금식이 바로 능력으로 아는데 금식이 능력 있는 것이 아니라 금식을 통해서 가난한 심령이 되어 진실한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나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와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눈길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형편이 비천하고 곤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믿/ 하나님은 지금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붙여주셔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라" 여러분 하나님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을 보고 계신다는 확증의 말씀입니다. 렘29:12-13절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통 중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출3:7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의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보고, 듣고, 알고'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보고, 듣고 알고' 끝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출3:8절에 보면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할/
기도합시다. 주님은 기도하는 성도 개개인의 형편과 사정을 속속히 아시고 건지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믿/
다시 한 번 '저가 기도하는 중이라'는 이 말씀은 이제 사울이 과거의 사울이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사람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말씀입니다.
사실 기도만큼 그 사람의 신앙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의 기도를 통하여 사울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음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또 이 구절은 사울이 과거에는 기도하지 않았다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물론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금식 일을 엄격히 지킬 뿐 아니라 공중 앞에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기도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은밀한 가운데 하는 진실한 기도만을 들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도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즉 사울이 과거 유대교에 있을 때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 줄 믿습니다.
▶그 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서신 서에 보면 기도에 대하여 많은 권면들을 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빌4:6-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무것도'라는 말은 '단 한 가지조차도'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자들이 단 한 가지라도 염려하거나 근심하거나 초조해서는 안 된다는 개념입니다.
'염려대신 기도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보면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 같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들이 처해 있는 환경을 아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단순히 형식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의식도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역사 하는 힘이 있습니다. /믿/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큰 문제를 만나고, 어려움에 닥쳐도 염려 대신에 먼저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큰 문제 큰 사건을 만나도 염려대신에 감사로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감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불평과 원망은 사단의 마음을 움직이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것에 감사합시다. 천국백성 된 것에 감사합시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속에 산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시시하게 생각하십니까? 큰 오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축복 자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한다는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시든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2절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여기서 우리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양쪽에 일치한 증거로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로 가서 안수하라고 계시를 주시는 동시에 사울에게도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아야 눈이 떠지며 성령 충만할 것이라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양쪽의 계시가 동일하게 주어졌으므로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계시입니다. 행10장에서도 기도하는 고넬료에게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했습니다. 또 그때 베드로가 지붕 위에 올라가 기도하는 중에 환상 중에 하늘이 열리어 한 그릇 같은 것이 내려오는데 다시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것에 네 발 달린 짐승과 기는 것, 나는 것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고 하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못한 물건은 제가 언제나 먹지 않았습니다.'
두 번, 세 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자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문 밖에 와서 베드로를 찾아 청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유대인으로써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위법 인줄 알다가 하나님께서 아무도 속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하신 말씀을 깨닫고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사건입니다.
본문의 배경도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는 말씀으로 직가로 가라고 하셨고, 사울에게는 이미 환상으로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음으로 눈의 떠지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은 두 번째 환상을 본 것입니다.
▶13-14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아까 까지는 그렇게 순종하며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했던 아나니아가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지시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흔들린 것입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아나니아는 사울을 직접적으로 본 일은 없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하여 사울의 악행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본문을 볼 때, 아나니아는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많은 교제가 있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따라서 아나니아에게 있어서 악명 높은 사울에게 안수하라는 주님의 지시는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눈과 사람이 사람을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깊은 곳에 있는 뿌리는 볼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경력과 현재의 모습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현재의 모습을 보시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충성심을 보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랬고, 오늘 사울도 그랬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랬습니다. 의심하는 도마였지만 주님은 그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주를 위하여 순교할 것(인도)을 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까지 그 사람이 어떤 악한 행동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시고 변화시키어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십니다. /믿/
사람은 지금, 현재를 보고 평가합니다. 사람은 지금 환경과 조건을 보면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의 간섭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악랄하게 핍박했던 사울을 깨뜨려 주님의 택하신 그릇으로 쓰시는 것을 보십시오! 지금 우리의 이 모습을 보고 평가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고 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쓰시면 개인도, 단체도, 교회도 새로워집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한 그 베드로를 보신 것이 아니라 주의 복음을 위해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당당히 순교하는 베드로를 보시고 그를 수석제자로 세우신줄 믿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 믿음을 보고 세우신 것이 아니라 목숨걸고 충성하고 헌신할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불러 세우신줄 믿습니다. /아멘!/
여기 '주의 성도'란 '구별된 거룩한 자'라는 뜻으로 누가가 그리스도인들 다양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도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 말로 누가의 표현의 절정입니다.
▶15절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다시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가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시는 명령입니다. '가라' '어디로' '세상으로 가서 죄악으로 죽어 가는 인생들을 불러 오라'는 것입니다. '썩어진 곳에, 죽어진 곳에 가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특별히 사울이란 사람을 이방사람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니 걱정하지 말고 가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은 사울의 선교 대상을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①이방인들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 예수님은 선택받은 이스라엘보다 세상 모든 나라 이방인들에`게 선교의 첫 번째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이며 유대인의 광신자였는데 지금 주님의 선교의 첫 번째 관심은 이방인으로써 사울의 신앙과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임금에게도 가라는 것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을 비롯한 세속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들이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회심시켜 왕들에게 전도사로 쓰실 것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반드시 적당한 사람을 쓰십니다. 그는 이방선교에 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어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헬라어, 히브리어, 아람어, 라틴어까지 두루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또 임금들에게 전도한다고 하였는데 사울은 원래 산헤드린 출신이니 지금 말하면 국회의원 출신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은 사회적인 신분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임금들 앞에서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 무식한 사람이라면 곤란한 것입니다.
행26장을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얼마나 말을 잘했던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너야말로 유식한데 어떻게 믿는 것은 무식한 것을 믿느냐?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느냐?'고 하면서 바울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신분을 사용하시고, 학벌도, 재능도 사용하십니다.
③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사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롬9: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울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합당한 실력자였습니다. 왜냐하면 헬라파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히브리말을 잘 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미국에 사는 교포 가정인데 그 아버지가 워낙 애국자라 미국에서 살면서 사울을 유학 보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유학 와서 석학들에게 배웠으므로 히브리어, 헬라어를 잘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쓰시기 전에 미리 준비를 다 시키십니다. /믿/
"나의 택한 그릇이라" 선택된 그릇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으로써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입니다. 사울은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택함을 입은 그릇과 같은 일꾼이라는 뜻입니다.
그 그릇에는 주님이 피 값 주고 사신 무수한 생명, 무수한 영혼을 옮겨 놓는 사명이 맡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삶의 보람은 주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존재일 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나 같은 것을 쓰시다니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위대한 영광의 그릇에는 주님이 맡기신 고난의 아픔이 담겨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길은 험합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조소, 천대, 멸시를 받을 뿐 아니라 배신 반역 속에서 고독의 비애를 느끼며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설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분명한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믿/
▶16절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제 사울이 바울되어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수 없이 매를 맞고 헐벗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받은 핍박은 '하늘나라에서 장차 받을 상급에 대한 예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보이리라" 즉 많은 고통이 사울 앞에 놓여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어떤 개인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순전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것입니다.
본문이 단순히 미래에 있는 고난에 대한 예언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는 말속에는 여러 가지 고난을 이미 주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에 매 순간 그를 도와주고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17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역시 아나니아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 명령을 받고 곧 유다 집에 들어가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형제 사울아!" 이 말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사울은 예수 안에서 한 형제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울의 모든 악한 과거가 용서되고 이제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그가 사도 바울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쓰신다는 것입니다. 안수할 때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났습니다.
행8:17절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주의 종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합니다. 모든 성령은 꼭 안수만으로 내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힘쓰고 애써서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했습니다.
또 말씀을 듣다가 성령이 임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말씀을 들려줄 때, 성령의 역사로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습니다.
행10:44절을 보면 고넬료 가족이 베드로를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행5:32절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여기서 안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안수란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데, 이것은 어떤 능력이나 축복이나 영적 자격을 인정하는 외적 표시로써의 의미가 있습니다.
안수의 기원은 구약 족장 가운데 한 사람인 야곱에게서부터 기인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이삭에게서 축복 안수를 받았고, 창48장에서는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안수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때부터 공인된 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 때는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 부어 안수했습니다.
신34:9절에 보면, 모세가 임종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후임자 여호수아에게 자신의 직분을 위임할 때 안수를 했습니다. 또 구약 때는 제사에 쓰인 짐승에게 안수해서 인간의 죄를 전가시키는 안수를 했습니다.
막10:16절에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축복하실 때 안수 기도를 드렸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직분 자들에게 안수했습니다. 어째든 사마리아 교회에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내려와 안수 기도할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18-19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눈을 멀게 하신 주님께서 다시 뜨게 하시고 새로운 눈을 열게 하십니다. 우리의 지나온 모든 과거의 사건 속에서 바르게 보지 못하던 눈을 주님께서 멀게 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할/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니 이제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이제껏 자신이 살아오던 세상은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이제껏 눈은 떴으나 잘못 보고 살아온 자신의 생애, 가치관, 세계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는 과거를 다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눈 먼 사람들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눈은 떴으나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지식이 없으면 문맹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양심이 마비되면 눈먼 사람이 됩니다.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멀고, 성공과 출세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은 양심이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 안이 먼 맹인입니다.
사울이 뜬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는 눈이 먼 자였습니다. 어떻게 눈이 먼 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이 먼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환상의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울이 기독교 박해하는 것을 끝내고 이제는 선교사로 주의 종으로 바꾸어집니다. 자기 민족만 보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를 보는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영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므로 그의 생애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고 20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은 예수를 전하지 않고서는 못 배깁니다. 마음이 뜨거워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체험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할/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를 통하여 사울은 잃었던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동안 사울의 눈을 덮고 있던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사울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이때 눈이 완전히 치료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눈의 가시처럼 안질로 고생을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 약함을 가지고 기도하다가 '그의 약함이 곧 강함이니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영적으로 강해짐을 의미합니다.
이제 사울이 새사람 됨으로 새사람 된 증거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비늘 같은 것'의 원문에는 '마치 비늘이 벗겨지는 것 같이'로 나와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며 강권하여지니라" 주님은 인간의 몸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건강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강한 몸이, 건강한 영혼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믿/ 우리 모두 영 육 간의 강건함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이때부터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넓은 의미에서 친교가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사람이 친해 질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만은 그 중에 먹는 교제가 제일 효과가 나타납니다. 옛말에 '먹은 놈이 힘쓴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사울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울을 위한 모든 투자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사울 한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성과가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사울이 변하여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때문에 거대한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때문에 보석 같이 귀한 제자들이 양성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사도 바울 때문에 가장 귀한 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우리들도 한 영혼에 대하여 깊이 투자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전도사님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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