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강) 사울의 회심!① (행 9:1-9)
곤충들의 세계를 보면 일생동안 몇 번의 변화를 겪습니다. 처음에는 애벌레가 변화해서 곤충이 되고, 이 곤충이 다시 몇 번씩 껍질을 벗으면 나중에는 나방이 되고 나비가 되고 매미가 되어 다른 차원의 신비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곤충 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일생동안 몇 번씩의 큰 변화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사람도 이런 변화를 통해서 한 단계씩 발전하여 인격이 갖춰지고 사람다워지는 것입니다.
지존파 일당은 사형을 당해서 죽었지만 그들은 잘못된 자아를 가지고 세상을 증오하고 사람들을 경멸하다가 결국 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지내는 중에 전도를 받아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는 그들이 과거를 회개하고 마지막 사형 대 앞에서 '나는 천국으로 간다.'고 외치면서 자신들의 장기를 바치고 갔다고 합니다.
성자 '싼다씽'은 인도가 낳은 대 전도자입니다. 그는 15세 때 어려운 철학서적과 종교서적을 다 읽고 그 속에서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1904년 12월 18일, 그는 인생문제에 대하여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기독교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인생의 해결책이 없다고 단정하고 기독교에 관계된 모든 책과 성경까지도 불태우고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드디어 결단의 시간이 왔습니다. 이른 새벽 5시에 목욕을 하고 급행열차가 지나갈 때 몸을 던질 것을 각오하고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전능 자여! 힌두교이든 기독교이든 신이 계신다면 지금 이 순간 저에게 대답해 주세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입니다" 이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이한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어째서 네가 나를 괴롭게 하느냐 나는 이미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다. 이제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이다"라는 음성을 듣고 그때부터 변화되어 히말라야 산을 수없이 넘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인도의 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도 예수님을 엄청나게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새롭게 변화되어 기독교 역사를 바꿔 놓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크다, 귀하다'라는 뜻에서, 바울은 '작다, 아주 작은 자'로 바꿔졌습니다. ◀제목 소개!▶
사도행전에서 두 가지의 가장 큰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고, 또 하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이 변하여 바울 되는 사울의 회심'입니다. 사울이 회심하여 바울이 됨으로 기독교 선교의 역사가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행13장부터 이방선교가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베드로의 세 차례에 걸친 이방선교의 내용이 나옵니다. 누가는 여기서 이방선교가 베드로에 의해서 시작된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방선교가 완성되는 것은 바울에게서 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중심은 베드로가 아니라 바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행전은 '바울행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바울의 비중이 큰 것입니다.
사울은 사도행전 8장에서 등장하여 마지막 28장까지 나옵니다. 특별히 본문의 회심 사건을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모두 27권입니다. 그 중에 사도 바울이 기록한 책이 13권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서신서의 교량 역할을 하므로 사도행전을 바로 이해하면 신약 전체를 보는 안목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모르고는 복음을 바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역사에 있어 그는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1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한 마디로 말해서 사울은 기독교의 박해자입니다. 7:58절을 보면 스데반집사를 죽이는데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사람이고 8:3절을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1절에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교회를 잔멸하기 위하여 미친개처럼 날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등등하다'는 말은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는 말인데 '아주 흥분했을 때의 표현'입니다.
행22:3-5절에 보면, 사울 스스로의 고백에 의하면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그의 고향이 길리기아 다소였습니다. 다소는 정치 교통의 중심도시, 또 상업과 교육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런 교육도시에서 사울은 헬라 사상의 깊은 지식을 배웠으며 다소 시민권이었고, 나면서부터 그는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돈을 주고 사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로마 정부에 어떤 공헌을 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사울의 아버지가 로마 정부에 어떤 공헌을 해서 시민권을 얻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사울은 나이가 어렸지만 당시 굉장히 인정받는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투표권을 가진 정회원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베냐민지파로서 그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기스의 아들 사울' 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사울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직업인 농업과는 달리 시장에서 직물 업을 하는 상인이었습니다. 부유층의 아들로써 당시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사울은 왜 기독교를 그처럼 핍박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그가 믿고 있었던 유대교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울에게 있어서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요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절대 행위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데 '위협과 살기가 등등' 해 가지고 핍박했습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는 말은 전쟁에서 피 냄새를 맡은 군 마처럼 사울이 그리스도교의 신자들을 죽이는 피 냄새를 맡고 흥분된 살인 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위협은 경고와는 다른 의미를 같습니다. 여기서는 당장이라도 살해할 것 같은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주의 제자들'은 사울이 핍박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명칭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표현을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의 제자(2), 그 도를 좇는 사람들(10), 제자, 성도(1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14), 형제(17), 형제들(30)' 이렇게 다양합니다.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2절에 나옵니다만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간 것은 기독교인에 대한 체포권을 부여받기 위함입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70인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으로서 로마로부터 사법권과 행정권을 인정받아 산헤드린 내외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인데 로마 정부에 청탁해서 제사장이 된 사람으로써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2절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 이유'는 무엇인가? ⑴예수를 신성 모독 자로 보았습니다. 그가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했으므로 신성을 모독한 불경죄입니다. ⑵예수는 저주받은 자로 보았습니다. 모세는 분명히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신21:23)라고 했습니다. ⑶유대민족을 모욕하고 선동한 자로 보았습니다. 목수의 아들로서 '메시야'라고 했으니 민족의 수치요, 나이 33세로서 '시이저'를 반역했으니 백성을 선동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와 그의 추종세력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율법을 지키고, 유대민족을 위하여 애국하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철두철미한 유대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적 메시야의 소망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 갈릴리의 예수,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총독에게 십자가의 사형수로 못 박힘 당하여 죽은 예수'는 실로 저주의 사람으로 여겼습니다(갈3:13).
더욱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전해지는 부활의 예수에 대하여 그는 증오와 혐오를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증인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는데 그가 책임을 지고 증인 노릇을 한 것입니다(행7:58). 그리고 부활의 예수를 믿고 그 도를 따르는 무리들의 집단인 교회 잔멸 운동에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루살렘에 이어 다메섹에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법적 조치까지 취해 박해의 길을 달리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사울은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이 올바르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잠14:12절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지금 사울은 예수쟁이들을 잡아죽이려고 대제사장에게 체포권을 위임받아 다메섹으로 가는 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박해로 인해 예수 믿는 성도들이 다 흩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 흩어진 곳까지 샅샅이 뒤져 씨를 말리려는 작전이었습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2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도시로서 삼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해발 671m의 고원지대입니다. 이 거리는 안식일과 안식일 사이의 6일을 꼬박 걸어가야 하는 먼 길이었습니다.
이 다메섹에는 예루살렘 박해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피신해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다메섹은 지금도 현존하는 세계의 최고의 도시 중 하나입니다.
이곳은 아브라함 때부터 다윗 시대와 솔로몬 시대에 걸쳐 계속 언급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B.C 73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일이 있고, B.C 64년부터 로마의 지배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요세푸스는 A.D 66년에 네로 박해 때, 약 일만 오백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고 밝히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들이 꽤 많이 살고(5만) 있었음을 뒷받침합니다.
'회당'은 당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 있어서 중심 기구로서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곳으로 다메섹에도 꽤 많은 회당이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여기 '공문'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가서 다메섹의 기독 신자들을 체포할 합법적인 체포 동의서입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종교적인 업무행위에 있어서만 로마정부의 간섭이 없이 독자적으로 사람을 체포할 수 있는 종교적 권한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지금 '그 도에 도전한' 박해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여기 '그 도'는 '그 생명의 길'을 의미하는 말로써 바울이 자주 사용한 말입니다. '구원의 도, 주의 도', 등으로도 표현된 말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길', 시1:6절에서는 '의인의 길'로 표현된 것입니다.
예수 자신은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그 길'되신 예수 자신과 '그 길을 좇는 자'인 예수교 신도들을 박멸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후에 사도 바울이 된 바울이 자기를 소개한 딤전1:12절에 보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밝히면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였음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어떤 사람도 다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기념비적인 존재입니다.
죄인 중 괴수가 사도가 될 수 있었다면 다른 사람 누구도 못되겠냐는 말입니다.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가 변하여 하나님의 대 사도가 될 수 있었다면 누가 못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에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예루살렘이 교회 탄압의 중심이며, 유대인들에 대한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절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울은 당당하게 다메섹 도성 가까이 갔습니다. 이때 사울이 말을 타고 갔느냐? 걸어서 갔느냐? 분분합니다. 그런데 당시 엄격한 유대인들은 로마 이방인들이 흔히 즐기는 말타기 여행을 아주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울 일행도 도보로 여행했음이 분명하다고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써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이 빛이 무슨 빛입니까? 하나님의 빛이요, 생명의 빛입니다. 홀연히 나타난 이 빛은 계시 성을 띤 빛을 의미합니다. 이 빛은 사울을 포로 했던 빛입니다.
이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는 말은 '번쩍이는 섬광 속에 그가 완전히 포위된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22:6절에서 '큰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태양이나 다른 피조물의 빛이 아님을 나타낸 말입니다. 22:6절에 보면 그때가 정오였다고 합니다.
이 빛은 다메섹 도성에 가까이 갔을 때 생긴 일입니다. 그 성에만 들어가기만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몽땅 체포하였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 빛으로 그를 포위해 버린 것입니다.
'싼다싱' 같은 분은 하나님께서 오후 5시까지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오후 5시 열차에 뛰어들어 죽겠노라고 기도했다는데, 그러나 본문의 사울은 전혀 그런 기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주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후에 바울은 고전15:8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소위 신비주의자들이 환상을 통해 예수를 보았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 분명한 것은 4절의 내용입니다.
▶4절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3절에 나오는 이 빛은 사울을 굴복시킨 빛입니다. 이 빛은 사울의 반 예수 운동을 정지시키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다메섹 도상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 빛 앞에 사도 요한도, 다니엘도, 에스겔도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계1:17, 단8:17, 겔1:28).
여기 '엎드러진'은 '떨어진다, 넘어진다.'는 뜻으로 쓰러지듯 엎드린 사울의 행동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반사적이면서 두려움에 휩싸인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낸 말입니다.
엎드려 있는 사울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아, 사울아'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를 때 두 번씩 거듭 부르신 일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모세야'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을 들어 찌를 때, 두 번 거듭 부르셨고, 모세는 호렙산에서 사명을 주실 때, 두 번 부르셨습니다. 지금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죽이겠다고 서슬이 퍼래 가지고 가는 그를 두 번 부르신 것입니다.
두 번 부르신 것은 사명 자를 부르신 것이요, 주께서 그를 알고 계신다는 증거요, 또 하나는 그를 사랑한다는 애정의 표시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음성은 사울의 죄를 찔러주는 음성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고 추격하여 왔느냐? 나는 너에게 죽을 수 없는 존재란 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란 말이다" 이 말씀은 바울이 행26:14절에서 다시 한 번 회상합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여러분 가시가 돋힌 막대기를 한 번 맨발로 차 보십시오, 그것은 자신을 해치는 것입니다.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울아 너는 정의감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이 사실이 옳다고 생각하여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왔지만 사실은 네 정의감이 너를 파괴하고 네 주장이 너를 망치고 네 고집과 네 철학이 너를 상처 내고 있는 것이란다.'
지금 우리 주님이 사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네가 예수를 핍박하는 일이 너의 정의감에서 너의 철학에서 하는 일이지만 그 일이 결국 가시 채로 맨발로 차는 격이 되어 네가 사망에 떨어지는 일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으로 자신의 신념으로 자신의 철학으로 인생을 살고 있지만 내가 타고 있는 배는 머지않아서 구멍이 나 갈아 앉아 버린 난파선에 불과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분, 사울에게만 이 음성을 들려준 것입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음성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줄 잘못 알고 그랬지만 우리는 알면서도 예수를 얼마나 핍박했고, 십자가에 다시 못 박았는지 모릅니다. 내 고집 때문에, 욕심 때문에, 편견, 불신, 불순종 때문에 또 게으름과 나태함 때문에 얼마나 많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를 핍박했는지 모릅니다.
본문의 사울은 그렇게도 사납고 자신 있게 당당하게 걸어갔지만 주님의 부활의 빛에 주의 음성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려졌다'는 말은 그가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고집이, 아집이, 자존심이, 불 신앙과 불순종이 깨어지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인격을 만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나게 됩니다.
주경학자 '글로악'은 '이렇게 해서 바울은 그가 계획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다메섹에 들어갔습니다. 즉 남녀신자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집어 넣는 대신 그 자신이 초라하게 되어 고통을 당하고 눈까지 먼 채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자가 되어 이끌러 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후에 바울이 빌3:12절에서 회상하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울을 잡은 주님의 손은 지금 여러분과 나를 붙잡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5절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 엎드려 있을 때, 주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주여! 뉘시나이까?" 이 말은 사울이 마음 한 쪽 어느 구석에서도 눈곱만큼도 예수님이 혹 메시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혹 당신이 예수님이십니까?'했을지 모르겠는데 뉘시냐고 물었던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준비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하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님께서 돌아보시기만 하면 완전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인간적인 준비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그보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이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울이 '주여 뉘시오니까?' 예수님이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울은 예수님이 죽었는지 알았으나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타나 빛을 비추면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할 때, 심히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여 살아 계시고 또 자기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고 불러 주신 분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으나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의 몸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은 자신이 핍박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시고 성도가 고통을 당하면 예수님 자신이 고통을 당하시는 것으로 아셨습니다.
성도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인정하시고 그 고난을 대신 감당해 주신다고 했습니다(마25:35-40참조).
성도가 자기의 죄 값으로 고난 당할 때에는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힘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고난 당할 때에는 주님의 위로가 와서 마음이 시원하고 매는 맞아도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굶어도 기쁘게 해 주십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풀무 불 가운데 들어갔으나 주님이 찾아오셔서 모든 것을 다 감당케 해주셨으므로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믿/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언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원문과 같은 말로써 예수님은 구약에 모세가 만난 그 하나님과 동일하게 말씀하심으로 자기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살아 계신 예수, 부활의 예수가 핍박 자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큰 영광의 광채로 그를 포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음성으로 사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 자신의 이름과 정체를 알려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시며 그의 반 기독교적, 반 교회 적인 죄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그가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전에 선수로 먼저 그를 체포하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영광의 광채와 살아있는 인격적 음성으로 그를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예수를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살아 계신 예수를, 부활의 예수를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입에서 나오는 그의 전도에는 언제나 '부활의 복음, 부활의 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할/
▶6절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주님께서 사울은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특별히 택하셨습니다. "네가 일어나" 새롭게 변화되어 사울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다메섹 사건을 통해 사울이 새롭게 일어납니다. 사람이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깨어짐으로 하나님은 그를 니느웨로 보내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탕자가 돼지우리 안에서 깨짐으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다리가 부러지면서까지 철저하게 깨어짐으로서 20년 동안 원수로 지냈던 형과 화해를 하게 되었고, 남은 생애는 성자로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사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예수님께서 그를 자신의 제자로 지명하여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예수님이 사울을 쓰시기 위해 이미 예정된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안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7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과 함께 동행했던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2:9절에 '일행이 소리를 못 들었어도 빛을 보았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26:14절에서는 사울과 그 일행 모두가 '엎드려졌다'고 한 점으로 보아 모두가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행22:8-11절에서 그 당시를 회상하는 바울의 모습을 한번 참조해 봅시다!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멕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할/
▶8-9절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사울이 예수님을 반대했기 때문에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울의 영안이 어두워져서 마귀의 종노릇했던 것은 주님이 깨닫게 하려고 육신의 눈을 어둡게 한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들어가 3일간 금식 기도하면서 자신이 예수와 교회를 핍박했던 죄를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때에 아나니아가 와서 사울에게 안수를 하니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눈이 완전히 밝아진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영향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눈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 사흘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보낸 사건과 예수님의 3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과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상에 사흘 길을 걸어간 사건과 영적인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철저하게 지난날의 모든 죄를 회개하는 시간입니다.
변화된 후에 바울은 갈6:3절에서 "만일 누가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정말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빌3:5절 이하에 보면, 그는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베냐민 지파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로 말하면 이는 양반에 속하는 집안입니다. 또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법을 중요시 여기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던 그 당시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의로서는 흠이 없는 즉, 도덕적으로나 실력으로나 가문으로나 전혀 흠이 없고 쳐지는 것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빌3:7-9절까지에서 그의 고백을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라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 뒤에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고(엡3:8), 고전15:8-9절에서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으며, 딤전1:15절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까지 고백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
그리고 새롭게 변화되어 새사람이 된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⑴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롬8: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⑵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신을 보았습니다.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⑶그리고 주 앞에서는 그 날 주께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을 미래 인생의 극치를 바라보았습니다. 딤후4:7-8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할/
⑷왜 주님이 그를 구원하셨는가? 바로 전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다메섹 사건 후에 그의 전 생애는 마치 관제와 같이 그리스도 앞에 부음이 되는 사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롬15:15) 했으며, 행9:15-16절에 주께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가 변화한 순간, 즉 예수 편에 선 순간에 그의 처지가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 반대편에 있었을 때는 평안했지만 예수 편에서는 순간 그가 가는 곳마다 고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핍박에도 불구하고 빌3:14절에 고백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이 위대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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