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강) 사울의 위기! (행 9:19-31)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사울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 사건은 사실 상 땅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주님의 위대한 자기 계획이었습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15절에서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엎드려진 사울의 눈은 이미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상태였고,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의 직가라 하는 동네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사울은 그곳에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다메섹에서는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숨은 제자가 있었는데 주께서 그를 환상 중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직가에 있는 유대 집에 사울이라는 사람을 소개해 주면서 그 사람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아나니아는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왜/ 사울에 대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죽이고 또 이곳으로 올 때, 대제사장에게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당황하고 놀라 떨고 있는 아나니아에게 주님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시자 즉시 주님의 섭리를 깨닫고 순종했습니다.
주님은 아나니아를 직가 유다 집에 머물고 있는 사울에게 보내어 그를 안수함으로 성령 충만케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안수하게 된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사울의 모든 불 신앙의 죄악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택한 그릇으로써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울이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고 나서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성령 충만은 바로 예수 충만이요, 예수 충만은 사죄 충만이요, 구원 충만, 은혜 충만, 복음 충만, 사명 충만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울에게 다시 보게 되는 은총이 임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았다 함은 그가 구원을 받았다 함이요, 새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할/ 그가 음식을 먹으니 육신의 건강이 돌아왔다고 19절'상'반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주에 다룬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자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적 위기를 맡고 있음같이 사울에게는 생명의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제목은 ◀사울의 위기▶입니다.
▶19절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이제 눈이 밝아졌고, 음식을 먹음으로 몸도 건강해졌습니다. 3일 동안 금식을 하고 있다가 눈이 뜨여지고 음식도 먹었으니 회복하기에는 며칠이 걸릴 것입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한 후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성도의 교제를 한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은 그가 기독교인으로써 변화되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또한 그가 다메섹의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사울은 그곳 기독교인들과 교제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귀한 것입니다. 교회는 두 기둥으로 움직입니다. '봉사'라는 기둥과, '교제'라는 기둥입니다. '봉사와 교제는 의좋은 쌍둥이'와 같습니다. /아멘!/
▶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나는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전도를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예수 믿자마자 '즉시로' 그 체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사울을 통해서 초신 자도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으면 누구나 즉시 전도할 수 있습니다.
요4장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생수의 말씀을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는 즉시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내가 만난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더니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오늘날의 전도도 특정인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누구든지 전도해야 합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사울도 예수를 믿고 즉시 전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전한다는 것은 성경을 다 알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전도는 자신의 간증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체험한 마음의 변화, 생활의 변화를 증거하는 것이 가장 힘있고, 효과적인 전도입니다.
사울의 첫 복음 전파의 장소는 회당입니다. 2절을 보면 각 회당에 예배드리는 기독교인들을 결박하여 체포하려고 이곳 다메섹까지 온 것인데 핍박하기 위해 온 회당이 복음을 전하는 장소로 뒤바뀜으로써 그의 회심이 극적으로 강조되었습니다.
'각 회당'에서 사울이 복음을 전했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 회당, 저 회당에서 그를 초청한 것 같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다메섹에는 예루살렘의 박해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많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 10명 이상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회당이 있습니다. 마을 마을마다 회당을 지어 놓고 그들은 회당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로 당시 회당교회와 비슷합니다.
본 절에서 우리는 사울이 즉시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과 오직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은혜 받자마자 즉시로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는 구원이야말로 은혜로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노력으로 왔다든지 학문을 배움으로 알게 되었다면 즉시 전도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회당에 나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산 간증을 한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잘 모르고 핍박했는데 내가 예수를 만나고 보니 그분이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실히 전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해결자'이십니다. 모든 것의 해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이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은 쫓겨나고 질병은 치료받고 모든 것이 해결 받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울은 이 복음의 핵심을 깨닫고 즉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했습니다. 요4장의 수가성의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나 구원의 확신을 얻어 물동이를 내버려둔 채,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예수가 '구세주요 메시아'임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즉시 해야 합니다. 뜸들이면 마귀가 틈타버립니다. 처음주신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 때 즉시로 봉사하고 헌신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믿/ 그러나 두 번, 세 번째 주는 마음은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21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이 성도를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그리스도)라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오늘도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 믿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유적을 통하여 기독교인들로부터 많은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지만 장사만 할 뿐 믿지를 않습니다.
사울도 믿지 않았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보니 이단자로 보였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메시야인 것을 체험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여기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사울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중들의 반응은 다 놀랐습니다. 너무나도 의외라는 것입니다. 이 반응은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울에 대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장본인이요, 예루살렘의 박해를 주도했던 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다메섹에 온 것은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을 잔해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예수 믿으라! 나는 예수를 믿노라!'고 하니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놀라다 못해 사울을 조롱한 것 같습니다. '아니 저 양반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그 사울이라는 사람인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잡아 죽인다는 사람이 오히려 예수 믿으라고 하니 어느 말을 따라야 한단 말인가?' 비방하고 조롱한 것입니다.
2절까지는 핍박을 했는데 갑자기 예수를 믿으라는 사람으로 변했으니 비방한 것입니다.
과거의 이미지는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메섹의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사울을 여전히 과거의 사울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2절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옛말에 '찌르는 소가 더 많은 일은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얌전한 소는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막 찌르던 소는 열성적이기 때문에 성질 값을 합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성격 하는 사람들이 성질 값을 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얼마나 성질이 다혈질입니까? 그는 뒤에 주님의 큰 제자가 되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순교 당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의 사울이 예수를 핍박할 때도 열심히 있었지만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나자마자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열심 있는 자가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 힘을 더 얻어"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신앙이 점점 새로워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힘을 더 얻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믿/ 힘을 더 얻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날마다 무장해야하고 기도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큰 힘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네가 너희와 함께 함이라'고 하십니다. 신앙은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새 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40: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할/
앙망은 '하나님을 바라보라!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수록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선하게 살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의롭게 살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만이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와 새 희망을 붙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18:1절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의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은 무한합니다. 그 힘이 나의 힘이 될 때, 우리는 모든 면에서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믿/
찬송가 93장에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라고 찬양했습니다. 사울이 날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바라보았더니 날마다 신앙의 힘이 더해졌습니다. 그 힘 가지고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했습니다.
증명이나 20절의 전파나 표현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같습니다. 사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것이 그의 일관된 메시지의 중심이었습니다.
사울은 후에 고백하기를 '나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증명한다'는 말은 '연결시키다'는 뜻과 함께 '논증하다, 간증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구약 성경의 여러 가지 자료들을 모아 논리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구약을 인용하여 구약에 이러한 분이 오신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러 이러한 일을 하셨으니 틀림없는 '메시야이시다'는 증명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에 약합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굴복'했다고 합니다. 사울이 전하는 말을 들어보니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분명히 예수이시니 나는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굴복시키니라'의 헬라어로는 '쉼케오'인데 '혼란케 하다, 섞다'의 뜻을 가진 말로써 사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혼란에 빠져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갑작스런 사울의 회심과 그의 설교 내용은 헬라파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이제 23절에 더욱더 확실해졌습니다.
▶23절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로 공모'했다고 했는데 여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박해 시 뛰쳐나온 유대인들이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즉 '디아스포라' 흩어진 유대인들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나타날 때, 사탄들의 역사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반대자가 극단적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했는데 지난 날 바울이 한 그대로 그들은 바울에게 행하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여러 날이 지나매" 이 말씀이 바울을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말씀이 됩니다. 이 표현은 문학적으로 보면 사울의 선교가 시작된 후 유대인들의 살인 공모가 있게 된 시점까지 상당한 시간의 경과가 있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적 간격에 대해 많은 주석가들은 사울이 아라비아로 내려간 3년이라고 말합니다. 갈1:16-17절에 보면 그가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여기 사울의 3년이 중요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훈련했고, 사울이 바울 되기 위해 3년을 아라비아에서 훈련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3년 간 제자들을 훈련시키셨는데 사울도 아라비아에서 3년을 훈련했습니다.
여기에 근거를 두고 초대교회 때, 신학교를 3년으로 했다고 합니다. 사울은 아라비아에 내려가서 3년 동안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자신을 수신한 것 같습니다. 아라비아는 광야입니다. 우리도 아라비아의 광야의 골방이 필요합니다.
▶24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하고 계교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비밀이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택한 그릇인데 그냥 죽게 두시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공모가 사울에게 알려졌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사 백성들과 이 땅의 종들을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43:1-3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할/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기를" 후에 바울이 이 사실을 고후11:32-33절에서 회고하기를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 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25절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사울을 탈출시킨 사람들을 <그의 제자들>이라고 기록합니다.
⑴이들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 예루살렘에서부터 따라온 동행인으로 보는 자가 있고
⑵다메섹에서 행한 사울의 설교에 감동되어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유대인들로 보는 자가 있고,
⑶이전부터 있었던 기독교인들로 사울을 따르며 그를 도왔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2번을 선호합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상당 기간 전도활동을 했으므로 그곳에 상당한 추종자들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밤에 광주리가 사울을 담아' 탈출했다는 것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여기 '광주리'는 끈으로 만든 광주리입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이 아나니아에게 사울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많이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수난이 첫 번째 동시에 그의 고난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비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이렇게 도망친 것은 생명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 가서 전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동네에서 핍박을 받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핍박할 때 순교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전도할 수 있을 때는 여기서 전도하다 안 되면 저 동네로 가서 전도하고 그러다 마지막 전도의 문이 다 막혔을 때, 순교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은 이때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해야 했으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비참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께서 그를 겸손의 훈련을 시킴으로서 더 철저히 주님을 의지하도록 한 것입니다.
26절은 사울이 예루살렘 모 교회에 가서 의논하고 전도하고자 했으나 반응이 좋지 않습니다.
▶26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자기 딴엔 죽을 고생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에 가면 베드로와 같은 분이 환영을 하면서 이방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느라 수고했노라'고 위로하면서 환영해 줄줄 알았는데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회심하여 첫 번째 예루살렘을 정식으로 방문한 것입니다. 사울의 예루살렘 방문은 사도들을 의지하여 제자들과 사귀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과거로 인하여 사도들까지도 마음의 문을 연 사울을 환영해 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과 왜소함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을 불러 회심케 하여 일꾼을 삼으셨는데 사도들과 제자들은 사울이 복음의 사역을 하다가 사경을 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 몰라라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귀한 인물이 나타나 사울을 도와주는데 그가 바로 바나바입니다.
▶27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도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러한 사람이 된 그 배후에는 '바나바'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유명하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자신의 몫을 잘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누구인가?
행4:36절에 보면 예루살렘교회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잘 섬겼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특별히 사람들을 잘 위로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 사람을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바나바란 '권위자, 위로자'란 뜻입니다.
⑴바나바는 '붙잡아 주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울은 예루살렘교회를 찾아가 그들과 사귀고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사울을 받아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여기 '데리고'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강하게 붙잡아 주었다'는 뜻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에 빠질 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붙잡아 주셨는데 그때 이 단어를 썼습니다(마14:31).
우리도 붙잡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험에 들고 넘어지고 무너지는 사람들을 붙잡아주는 성도가 있어야 교회는 부흥됩니다. /믿/
⑵바나바는 '이끌어 주는 사람'입니다. 여기 '데리고'라는 말은 또 '끌고 오다'라는 강한 뜻이 있는 말로 '이끌어' 교회로 데리고 오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데리고 오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할/
⑶바나바는 '사람을 잘 소개해 주는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도들에게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말하니라'는 '낱낱이 상세하게 말했다'는 말로 사울이 어떻게 예수를 영접했는가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이 말은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이 말은 예수께서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당신은 뉘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시면서 '네가 성으로 들어가면 너를 찾아와 네가 할 일을 네게 이를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등등의 말씀을 한 것을 말합니다.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했다는 말은 사울이 바로 그 다메섹에서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설교했던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바나바는 사울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말을 해 주었습니다. 이런 친절한 사람이 있는 교회는 금방 부흥됩니다.
후에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사울과 동역자가 되어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이 훌륭한 인물이 된 것은 바나바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인재가 있어도 밀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인재가 쓰임 받을 수는 없습니다.
⑷바나바는 자신을 감춘 일군입니다. 사도들이 기억할 만큼 헌물을 한 후에도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훗날 교회에서 일곱 집사의 반열에 들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숨은 기도자, 전도자, 봉사자'입니다. 충성한 후에도 무명의 종으로 남은 일꾼입니다. 이런 봉사자들이 많은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가 됩니다.
▶28절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바나바의 도움으로 제자들과 교제하며 예루살렘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말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졌다는 의미이며 교회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은 기독교인으로부터 경계를 받거나 배척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9절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거기서도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여기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이란 말을 보면 이를 갈고 기를 쓰고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30절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런 형제들이 그런 상황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 사울의 고향은 다소로 보냈습니다. 다소를 가기 위해 가이샤라를 거쳐야 했습니다. 아마도 고향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사울이 바울 되어 다시 큰일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나바의 역할이 큰 것입니다. 11:25절에 보면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려 다소에 가서 만났다'고 기록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야 말로 아까운 사람이라고 하여 그의 고향까지 사울을 찾아왔습니다.
▶31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것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하신 주님의 예언 성취입니다.
여기 '그리하여'는 사울의 변화로 말미암아 이제 교회에 대한 핍박이 완화되면서 교회가 평안을 얻게 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울에 의한 예루살렘의 소동 외에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박해도 누그러진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 절에서 우리는 교회의 성장 학의 바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⑴교회 성장의 원리 중의 하나는 '평안'입니다. 여기 '평안'이라고 할 때 할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음으로 인해 오는 평안을 말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헌신하며 봉사하고, 기도하며 전도하면서 평안해졌다는 것입니다. /아멘!/
교회는 평안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서로가 한 형제 자매처럼 어우러져 사랑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평안하려면 성도 한사람, 한 사람이 자기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서로를 인정해 주고, 내가 낮아질 때, 겸손할 때 교회가 평안해집니다. 우리는 평화를 만들어 가는 성도들입니다. 눅11:17절에서 주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⑵교회는 든든히 서야 합니다. '든든히 서가고' 여기 든든히 선다는 말은 건축에 관계되는 말로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져 잘 지어져 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초가 든든해야 건물이 안전합니다. 교회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교회 기초(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전3:11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집을 세워야 합니다. '든든히 서 있는 교회!'야 말로 흔들림이 없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곧 반석 위에 지은 집과도 같습니다(마7:24-25). 바람이 불어와도,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 집을 의미합니다. 초대 교회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든든히 서 있는 교회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아멘!/
⑶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주를 경외함과' 여기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과 경건한 행위로 순종하는 삶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믿음을 가르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섬기도록 하는 영적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신전 의식!' 이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신앙은 아름답게 꽃필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의 특징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섬기며 봉사하고 헌신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징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곧 '순종의 생활'입니다. /믿/
⑷'성령의 위로'가 있는 교회는 성장합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성령의 위로는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을 성령께서 도와주십니까? 성령을 '모셔들이고 환영하고 의지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믿/
내 생각, 내 의지, 내 고집을 버리고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⑸교회는 양적으로도 부흥되어야 합니다. '수가 더 많아지니라'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할 때 결국 성령의 위로(인도)하심으로 수적 증가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부흥의 원동력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행2:47절에 보면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붙여 주실 때 교회는 부흥합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나가서 전도할 때 교회는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본 절에서 '교회 성장의 원리'를 알았습니다. 이 원리를 잘 적용하여 우리교회가 크게 부흥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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