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강) 베드로의 능력 (행 9:32-43)
한동안 베드로의 행적이 나오지 않았는데 본문에서 다시 베드로의 복음 행각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본문에는 베드로가 행한 두 가지 놀라운 기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룻다에 사는 8년 동안이나 중풍으로 누워 있는 애니아라는 여인을 일으킨 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실제로 죽은 '도르가'를 살린 사건입니다.
애니아는 8년 동안이나 중풍 병으로 고생했으니 살아 있었으나 사실은 죽은 인생과 같습니다. 도르가는 실제로 죽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둘 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고침 받고 살아났습니다. /할/
하나는 침대에서 일어났고, 하나는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마비된 생명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떠났던 생명이 돌아온 것입니다.
애니아는 어떤 여인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아 교회와 이웃들에게 칭찬을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애니아를 위해서 슬퍼해 준 사람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도르가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8년 동안 중풍병자도 고치셨고, 죽었던 도르가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은 이 두 사람에게 똑같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느낍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상태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남에게 인정을 받는 인간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형편이 애니아이든 도르가이든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낫게 하신다'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 위로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동정과 사랑을 가지고 우리의 고통의 현장에 오시며, 우리를 치료하여 주시고, 살려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제목소개!▶
▶32절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때에" 어떤 때입니까? 31절에 나오는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때'입니다. 핍박자 사울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도 열심히 전도대열에 섰습니다. 교회는 날로 부흥되어갔습니다. 31절에 보면 '수가 더 많아지더라' 그러니까 교회가 수적으로도 크게 부흥될 때를 가리킵니다.
베드로의 룻다 방문이 교회가 평화롭게 성장하고 있는 그 시기에 이루어진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뜻은 어느 시점을 지칭하기보다는 주제의 전환을 위해 쓰여진 접속사로서 사울의 이야기를 접고, 베드로의 또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베드로가 무엇 때문에 두루 돌아다녔다고 생각하십니까? 박해를 피해서, 아니면 이곳저곳에 관광차 두루 돌아다녔을까요? 아닙니다. 주의 복음을 전하려고 두루 돌아다닌 것입니다.
롬10: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4복음서를 보면 자주 주님께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엡6:15절에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두루 다니라고 당부합니다. 성도의 발길이 두루 행하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되고 가는 곳마다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기 베드로가 두루 다닌 것은 복음을 전하려고,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때 베드로는 순회 전도자였습니다. 사도들이 절기 때마다 순회하면서 세례도 주고 집회도 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도 한때 순회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김익두, 길선주, 이성봉 같은 초대교회 부흥사들은 그때 순회전도자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여러 지방에 돌아다니면서 집회를 하고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여기 베드로가 순회 전도 차 룻다에 들렸습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지금의 텔아이브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하루 길쯤 걸리며 땅이 비옥하고 농사가 잘 되는 곳이었습니다. 지중해에서 약 12Km떨어진 내륙입니다.
본래는 베냐민 지파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헬라인들이 이곳에 '쥬피터' 성전을 세웠습니다. 룻다에도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스데반 박해 때 내려온 성도들이 전도한 성도들이었습니다.
▶33절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 병으로 상위에 누운 지 팔 년이라"
여기 '애니아'는 누구입니까? '칭찬 받는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써 중풍으로 8년이나 들어 누워 있는 환자입니다. '8년'이란 말은 이미 의학적으로는 고칠 수 없는 상황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애니아는 이미 육체적 기능을 상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신이 자유롭지 못하니 자연적으로 이웃과의 접촉도 끊어지고, 사회와의 접촉도 끊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여인입니다. 삶의 기대를 잃어버린, 그러니까 죽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가련한 여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의 처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년만 누워있어도 지겨울 텐데 무려 8년이나 누워있었습니다. 그동안 병원이며 약값은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만병에 효자가 없다고 집안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한마디로 가망이 없는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이 하나님의 종 베드로를 만났다는 것은 큰 축복인줄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을 날만 기다리며 절망과 고통 가운데 살아가던 애니아가 능력의 종 베드로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는 베드로를 통하여 지난 8년 동안 약이라는 약은 다 쓰고도 고침 받지 못한 애니아를 낫게 함으로 룻다에 있는 믿지 않는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아멘!/
▶34절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복음의 성격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회복케 하는 기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형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을 회복하고, 질병을 회복하고, 실패와 좌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독교의 힘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그렇습니다. 즉 회복케 하는 권능이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란 통로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베드로는 애니아를 부르고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낫게 하실 것이다. 낫게 해 주실 지 모른다.'가 아니라 '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고쳐 주겠다'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는 확신이 베드로의 명령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다'는 절대 신앙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는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아멘!'하고 일어서는 순종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때 머뭇거리면 안됩니다. 주저해도 안되고 못들은 척해도 안됩니다. 그때 벌떡 일어나면서 '아멘' 해야 합니다. /할/
지금 베드로는 마치 예수님이 바로 그 자리에 계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주님은 바로 우리의 그 고난의 현장에서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슬픔과 함께 슬퍼하고 계시며 고난과 슬픔에 함께 동참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애니아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데교회처럼 경건의 모습은 있으나 실상은 죽어버린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아닌지 모릅니다. 또한 도덕적인 무기력과 나약함으로 자기 자신의 생존만을 위하여 제자리를 뒹구는 성도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애니아는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애니아와 같이 신체적으로, 상황적으로, 신앙적으로 전적으로 무기력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일어나 제자리를 정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8년이나 누워 뒹굴었는데 무슨 재간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는 그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야 합니다. '낫게 하시니'란 말은 '단 일회적, 현재 직설형'입니다. 이 뜻은 '지금 여기서 치료하신다'는 뜻입니다. 시간과 장소와 병마를 완전히 장악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치료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 '너를 낫게 하신다'는 믿음의 선언도 중요합니다만 그 믿음의 말을 듣고 즉시 '아멘'하면서 베드로의 말에 순종으로 행동한 애니야의 믿음이 8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줄 믿습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기적의 통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오늘도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주의 종들의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기도할 때 깨달음으로, 감동으로' 우리에게 들려 집니다.
본문의 8년 된 중풍병자 애니야는 베드로의 말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은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다양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면서 순종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를 주목해 봐야 합니다.
베드로는 황무지와 같은 중풍병자의 마음을 갈아 기경했습니다. 소망 없어 낙심해 있는 애니아의 묶는 마음의 밭을 기경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황무지 같은 인생의 밭을 갈아 새 소망으로 열매 맺게 하는 데 쓰임 받는 농부의 삶이어야 합니다. /믿/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자녀 삼으신 것은 삶의 의미를 잃은 인생, 마음 밭이 황무해진 인생, 묶은 땅이 되어 버린 인생에게 찾아가 새 비전, 새 꿈, 새 소망 주어 살게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개인의 축복에 머무르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받은 축복을 황무한 인생들에게, 또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에 흘려 내 보내는 삶입니다. 초대교회의 능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받은 축복을 계속 흘려 내 보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굶주린 백성에게, 좌절된 인생에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강같이 흘려 내 보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이 거룩한 비전을 가슴에 품고, 그 비전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할/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아멘!/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말은 '네 침상 이부자리를 스스로 펴라'는 뜻으로 '주님이 주시는 힘을 써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는 말은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는 말이요, 예수님의 능력이 '무한하시다'는 말이요, 예수님은 병든 자를 얼마든지 일으키는 분임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또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말은 '믿음으로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곧 일어나니' 주님의 능력의 결과입니다. 애니아는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할/
여기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여러 가지 입니다. 창조방법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사는 방법도 다릅니다. 그리고 자리를 정돈하는 것도 다른 점입니다. 사람은 자기 주변이나 환경 그리고 자기 사는 곳을 정돈합니다.
도시를 정돈하고 시가지를 정돈하고 도로를 정비합니다. 집안 살림을 정돈하고 가재도구를 정돈합니다. 실내장식을 꾸미고 숟가락 젓가락도 정돈해둡니다. 옷장도 정리하고 입던 옷도 덮고 자던 덮개도 개켜 놓습니다.
그러나 개나 돼지는 정돈이라는 행위가 없습니다. 먹는 곳, 싸는 곳, 자는 곳, 눕는 곳, 노는 곳의 구분이 없습니다. 밥그릇은 정돈하는 법도 없고 잠자리를 정리하고 청소하는 법도 없습니다. 사람만 자기 정돈이 있고 주변정리가 있고 신변 정리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정리와 정돈이 철저한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죽음의 세계를 정돈하셨습니다. 내가 지은 죄를 정리해 주셨고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을 깨끗하게 씻어 정돈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나 자신을 정돈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삐뚤어지고 잘못된 내 행동을 정돈해야 합니다. 제멋대로 내뱉는 내 말도 정돈해야 합니다. 제멋대로 사는 버릇, 불순종하며 사는 버릇, 원망하며 사는 버릇, 고집스런 재 삶의 버릇도 정돈해야 합니다. /할/
우리는 하루하루 우리 자신의 자리를 정돈해야 합니다. 더러운 것은 치우고 추한 것은 버리고 나쁜 것은 쓸어내는 대 청소를 해야 합니다.
▶35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그 날 애니아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소문이 두루 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지역에 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라는 말은 '많다. 대 성황'을 의미합니다.
애니아가 8년 동안 꼼짝 못하다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온 마을이 주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론'은 룻다와 욥바의 중간지점이며 갈멜산 사이에 위치한 비옥한 농토가 펼쳐져 있는 평야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기적은 '한 사람의 병 고침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주께로 돌아가니라'라는 말은 회개하고 본래의 상태(창3장 이전)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나 자신을 향하여 몇 가지 질문을 해 봐야 합니다.
⑴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로 오는가 아니면 떠나는가?
⑵나 때문에 예수님이 '증거'되는가 아니면 가리워 지고 있는가?
⑶나 때문에 형제가 위로를 받는가 아니면 상처를 받고 있는가?
⑷나 때문에 교회가 평안한가? 아니면 시끄럽고 다툼이 일어나는가?
⑸나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고 있는가 아니면 부흥의 암적 구실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 우리 이런 비전의 기도제목을 갖읍시다. '하나님! 내가 만나는 한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그 영혼 변화시켜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게 하소서.' /할/
▶이제 36절 이하에는 베드로의 두 번째 능력의 사건이 소개됩니다. 베드로가 룻다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약 18Km 떨어진 곳에 욥바라는 곳에서 몇 사람이 다급하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사람이 죽었으니 빨리 와서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 죽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비다'라고 하는 여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고 믿음이 독실한 여 성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신앙을 알려주고 존귀히 여겼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향기요 신앙의 열매입니다.
▶36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욥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55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해안 도시로서 현재는 '야파'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욥바와 애니아를 치료했던 룻다와의 거리는 약 18Km 정도입니다.
다비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이고, 헬라어로는 '도르가'인데 그 이름의 뜻은 '사슴, 또는 아름다운 새끼 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여 성도에게 제자란 말을 썼습니다. 이 여인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이 다비다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슴처럼 어린 새끼 양과 같은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불리어졌습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 어떠한 여인이 아름다운 여인입니까? 얼굴이 예쁘고, 팔등신으로 쭉 빠진 균형 잡힌 몸매가 아름다운 여인입니까? 물론 이런 여인은 보기에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여인이란 많은 영혼을 소유한 신앙의 선행을 베푸는 그런 여인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벧전3:3-4절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심령이 썩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 주님이 주신 사랑의 마음을 가진 여인이 바로 다비다였습니다. 그래서 사랑스런 여인은 그 생활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딤전2:9-10절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로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다비다를 '여 제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녀는 벌써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섬기는 축복의 멤버가 된 여인이었습니다.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다는 사실로 보아 그는 상당한 재산을 가졌을 것이고, 또 믿음이 돈독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선행과 구제는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할/
▶37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다비다는 훌륭한 신앙을 가졌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도 죽기 마련입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다비다의 죽음은 특별히 과부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평소에 큰사랑을 받았던 수많은 여인들이 그녀의 빈소에 찾아와 애도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죽음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그 중에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 가슴이 뭉클 할 때가 많습니다.
모세의 기사가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의 죽음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의 광야 생활 중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불평 많고, 불순종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눈물의 중보와 온유함으로 가나안 지경까지 인도한 그였습니다.
꿈에 그리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지 아니하여, 느보산 정상을 올라가며 그의 파란만장한 중보자의 인생, 순종의 인생을 마치는 뒷모습을 상상해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에게 찢기고, 불에 타 죽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나간 순교자들의 죽음 또한 아름답습니다. 오늘 다비다의 죽음 또한 아름답습니다. 사랑과 선행으로 평생을 살아왔던 여인, 그녀가 죽었을 때 그녀를 애도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나라마다 장례 법이 각기 다릅니다.
아랍권 나라에서는 그 날로 모래사막에서 장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어서 얼굴에 화장을 하고 정장을 입혀서 입관을 하고 장례를 치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무지막지하게 외마디를 묶어서 입관을 한 다음 3일 후에 장례를 치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정통을 보면 사람이 죽으면 하루를 넘기지 않습니다. 행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그 날 장사를 치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법에는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하는 것도 금지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덤을 스치거나 시체를 보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의 다비다는 시신을 깨끗이 씻어서 누웠다고 합니다. 파격적인 행위요 이례적인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다비다를 사랑했다는 이야기요,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보다도 사람들이 이 같은 행동에는 한 가지 열망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락방에 누웠다'는 것은 구약의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왕상 17장에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야가 그 죽은 아이를 안고 다락방으로 올라가 간절히 기도할 때 살았고, 왕하 4장의 수넴 여인의 아이를 엘리사가 안고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침상에 눕혀 놓고 간절히 기도해서 살렸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죽었던 사람을 다락방에서 살려낸 사건이 있습니다. 본문의 다비아의 죽음도 이런 기적을 바라보고 주위의 사람들이 다락방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할/
▶38-39절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지체하지 말고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와서 보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고'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비로소 그 사람의 참 가치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다비다의 죽음, 이 죽음은 어떤 제왕이나 위대한 장군의 죽음처럼 한나라와 여러 군중을 떠들썩하게 한 그런 애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가까이 살고 있었던 자그마한 공동체 안에서는 참으로 다비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었을 때, 이렇게 울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적으로 살아간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우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울긴 우는데 모두 자신의 신세가 불쌍해서 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고 내 신세야!' 그런데 오늘 다비다의 죽음을 놓고 동네의 과부들이 모두 모여서 울고 있는 것은 그런 눈물이 아닙니다. 모두 애석해 하고 있고, 슬퍼하는 진정한 눈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①사람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폐일언하고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다비다 처럼. 그러니까 그가 죽었을 때, 그렇게 애석해 하고 슬퍼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다비다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시 그를 소생시킬 수 있을까? 해서 급히 베드로에게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얼마나 흐뭇한 광경입니까? 이것이 바로 인생의 맛입니다. 이것이 이웃이요, 우정이요, 사랑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그것은 죽을 때에 가 봐야 평가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생전에 권좌에 앉아서 부귀영화 공명을 다 누리고, 아첨의 소리를 다 들었지만 죽은 후에는 욕을 바가지 터지게 얻어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생전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아픔을 주고 불화를 일으키고, 분란을 일으키다가 일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다 가면, 사람들이 별로 애석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만큼 살아가는데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②베푸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39절에 보면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죽은 다비다가 가난한 과부들의 옷을 손수 바느질해서 입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들이 죽은 다비다를 위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되도록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나누는 삶을 살 때, 가장 행복하고 기쁩니다. 거기에 삶의 값이 있습니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베푸는 삶이 없으면 자신이 어려운 일에 처해 있을 때,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먼저 찾아가 주는 삶, 그래야 나도 어려울 때가 오면 도움을 받게 됩니다. 철저하게 심고 거두는 법칙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인생을 좋은 것을 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이고, 우정이고, 사랑입니다. /믿/
③좋은 이웃으로 살아야 합니다.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은 그만큼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한 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은 이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좋은 이웃을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또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축복입니다. 본문의 다비다는 이웃들에게 진실한 이웃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다비다가 있었기에 제 2의 다비다, 제 3의 다비다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비다는 선하게 살았습니다.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좋은 이웃으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죽음을 모두 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베드로를 초청하여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이웃들입니까? 그것은 죽은 다비다가 그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은 이웃이 되어 주니까 모든 이웃들이 다 좋은 이웃들이 된 것입니다. 그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도 감동하셨습니다.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린 것이 아니고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입니다. 왜 살려주셨는가 하면 하나님도 감동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40절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베드로의 치유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은 것입니다. 막5:40절에 보면, 예수께서 아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다 내어 보내고 살리셨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야이로를 살릴 당시 예수님이 하신 대로 배운 것 같습니다.
원래 제자는 스승을 본받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 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혼자 깊은 침묵 속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독과 침묵과 간절한 기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막9:2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기도의 능력이 다비다를 살렸습니다.
베드로는 기도를 마친 후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했습니다. 이 말은 아람어로 '달리다굼'이라는 말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 '달리다굼' 하셨습니다. 그 말은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노니 일어나라'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도 '달리다굼'하고 외쳤습니다. 그 말은 '주님이 일으켜 세우노니 일어나라!'는 명령입니다. 그랬더니 다비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은지라' /할/
다비다의 부활은 물론 영원한 부활이 아닙니다. 영원한 부활은 다시 오실 예수안에서 이루어 집니다. /믿/ 나사로는 죽어서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의 무덤 가에서 '나사로야 나오라' 주님의 외침이 있은 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수족으로 동여진 채로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이적입니다. 이 이적은 논리나 지식이나 토론과 같은 심중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얻어지는 체험입니다. /믿/
▶41절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역시 막5:41절에서 예수께서 보여준 행위를 본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과 권위로 병을 고치면서 자신의 행위 속에서 예수님의 능력이 함께 함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의 살 것을 보이니' 저는 본문을 준비하면서 너무 감격해서 울먹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역사도 있구나. 이렇게 귀한 인생에게 하나님은 은총을 내려 주시는구나' 주님의 사랑에 감격했고, 그녀의 귀한 믿음으로 인한 기적으로 감격했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이런 기적을 체험하는 기적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하나님은 다비다의 선행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주를 위한 한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은 결코 잊으시는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인생을 사랑하심은 한이 없으십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의 인생에도 다비다와 같은 선행이 가득 넘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
▶42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다비다가 죽었다가 살아난 소문이 그 지방에 퍼지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아까 애니아를 치료했던 것과 동일한 역사였습니다.
▶43절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여기 '시몬'은 베드로가 아닌 다른 사람입니다. '피장'이라는 직업은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는 직업으로써 오늘날의 피혁 제조업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피혁 제조업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기피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사람과 교제함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했습니다. 베드로가 스스로 선민의식을 깨뜨리고 당시 유대인들이 무시했던 천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호의를 보인 것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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