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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승리자의 윤리(고린도전서 9 : 22-27)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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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의 윤리(고린도전서 9 : 22-27)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철학의 바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정체! 현재적인 정체만이 아니라 미래적인 이상적 자기 정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것은 그 생을 인도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 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을 담배 연기와 같다고 한다던가, 안개와 같다, 혹은 나그네요 방랑자와 같다, 아니면 자기 자신을 학대하면서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평가하고 있다면 오늘의 그의 생이 어떻게 전개되겠습니까? 그런고로 나로서의 이상적 인간인 그 정체가 나의 생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간혹 우리는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올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쳐다보기는 해야지! 또 쳐다보지도 않는 나무를 어떻게 올라가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쳐다보지도 않고 올라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고로 내가 세운 내 생의 이상, 목표, 그 정체는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집중적으로 주시하며 그리로 치닫는 인생을 살아가야 된다고 믿습니다. 빌립보서 38-9절에 나타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배우고 얻고, 따르며 마침내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자기 자신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자기 자신으로서의 자기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자기로 자신의 정체를 세웠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사도로 평생을 살아갔습니다. 그것은 또한 자기 생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목적이요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며 십자가만을 높이고, 십자가만을 알며,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그런 선택된 인간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그는 거의 숙명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에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자신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빌립보서 312절에 의하면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러 좇아가노라"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는 그것을 내 이상, 나의 목표로 하고 오직 그것을 향해 좇아가는 하나의 경주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라고 하면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중요한 헬라의 도시입니다. 상업 도시인 이 고린도는 아덴과 멀지 않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아덴은 올림픽 경기장이 있는 곳이요 올림픽 경기의 발상지입니다. 거기로부터 서쪽으로 39마일 되는 곳에 고린도라고 하는 이 도시가 있습니다. 당시에 있어서 오락은 운동 경기가 최고이었기 때문에 이 고린도 사람들은 아덴에서의 올림픽 경기를 자주 구경했을 것이라고 보아집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지금, 운동 경기에 아주 익숙한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을 상대로 운동 경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 모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운동 경기자가 적어도 승리자가 되려고 할 때에 그 승리자의 윤리 제 1호는 목적이 분명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싸우며, 무엇을 위해 싸우고, 왜 싸우느냐? 그리고 내가 지금 어느 지점, 어느 방향으로 뛰고 있느냐 하는 이것들이 분명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저들은 썩어질 면류관을 얻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챔피언도 되어보고 유명도 했었지만 마지막에 보면 한갖 썩어질 면류관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 가지고 그렇게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 영원한 면류관을 얻기 위해 달음질하는 하나의 경기자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달음질하라, 뛰라, 상을 얻도록 뛰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은 추상적인 것이지만 목표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체적인 목표가 분명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향 없는 자 같거나 방향 감각이 없는 그런 흐리멍텅한 생을 살아서는 아니 될 것이며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허공을 치는 것 같은 헛된 수고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경쟁, 분명한 경기를 진행하여야겠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권투에서 허공을 치는 경우가 많은데 선수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처럼 힘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번 허공을 치고 나면 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일단 내가 치면 상대방이 맞아주어야 하겠는데 맞아주지도 않는 주먹을 휘두르는 것처럼 힘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정 목표가 분명하여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좋아하는 운동이 따로 없습니다만 그런대로 텔레비전을 통해서 중계되는 권투 시합은 간혹 시간이 허락되면 즐겨 봅니다. 거기에는 그런 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경기가 경기이니만큼 때때로 보기가 흉하고 끔찍할 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때리며, 죽일 것처럼 그러다가도 일단 땡하고 종이 울리면 그대로 스톱(stop)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간단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는 또 끌어안고 악수하고 하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곧 인생의 상징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상이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피투성이가 되어 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누구를 위한 싸움이며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왜 때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싸운 싸움이 이렇게 깨끗하게,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름답더라는 말입니다. 친구를 때린 것이 아닙니다. 죽으라고 때린 것도 사실은 아프라고 때린 것도 아닙니다. 다만 힘을 겨루고 있을 뿐입니다. 기술을 겨루고 있고 인내를 겨루고 있으며, 정신력을 겨루고 있을 뿐이지, 죽으라고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방향이 분명하고, 목적이 분명하고 개념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느냐? 돈을 번다고 돈 때문에 돈을 버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뛴다고 뛰기 위해 뛰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출세한다고 출세를 위해 출세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싸움의 대상이 분명하고 의미가 분명하여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최종 목표가 문제입니다. 간혹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고 물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대답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대답인즉 "좌우간 대학을 들어가야지요 뭐"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무슨 과를 들어갈 것이냐?" 하면 "들어가는 대로 들어가야지요"합니다. 눈치작전해서 들어가겠다는 것인데 이렇게 막연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대학 입학이 어떻게 감히 생의 목적이 됩니까? 정말 시원치 않은 학생은 이런 목적을 세운다고 합니다. 대학이라면 들어갔다가 중퇴를 해도 좋으니 그저 한번 들어나 가보고 죽었으면 한답니다. , 세상에 이렇게 싸구려 인간이 있더란 말입니까? 어째서 대학이 생의 목적이 됩니까? 이것은 수단 중 하나네 불과합니다. 도대체 파이널 고울(final goal), 그 마지막 목표가 무엇이냐는 말입니까? 무엇보다도 그것이 바로 맺어져야 합니다.

간혹 어떤 경우에 보면 어린애를 낳은 후 백일이 되면 귀하다고 백일 잔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는 아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음식들을 잘 차려 놓고 어른들이 먹고 즐기면서 또 아이에게는 불편하고 이상한 옷을 입혀서 울리기만 하는데 참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사실 저는 그 잔치를 얻어먹으면서도 속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굉장하게 시작하면 무엇하나 끝이 좋아야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생일이 문제입니까? 결혼식이 문제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장례식이 좋아야 합니다. 그 중간의 것들은 그렇게 요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때에 보면 유달리 결혼식을 호화롭게 하려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도 걱정스럽습니다. 이것이 무사하려나 하고요. 마지막이 좋아야 하고 그 끝을 아름답게 맺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화려한 의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목표라는 것은 결코 현재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미래적인 것이요 여기가 아니요 저기란 말입니다. 보다 더 멀리 멀리, 결국에는 최종 승리자입니다. 마라톤 경기를 보면 처음 뛸 때 1등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계하는 아나운서는 아무개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말해 줍니다. 이제 중간 지점에 가서도 아나운서는 아무개가 서두임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웬걸 5분전에 쓰러지고 말았다면 지금까지의 선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지막 결승점에서 1등한 사람이 1등이지, 처음의 것도, 중간의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최종 목표, 최종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뚜렷한 목적을 세우고, 그리고 줄달음치는 그러한 경기자, 그러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 두 번째 윤리를 반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불법적으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에 디모데후서 25절에 보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법대로 하여야 하고 파울(foul)이 많으면 아니 됩니다. 경고장을 많이 받으면 실격이 되고 맙니다. 미안하지만 경고를 너무 많이 받아서 실격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아슬아슬합니다. 이제 한 번만 더 반칙하면 실격이요. 끝나는, 그러한 위기에 사는 인격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대로 더 버티고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제 마지막 경고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정 코스로 반칙 없는 생을 살아가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반칙이 많고, 왜 이렇게 바로 살아가기가 힘드느냐? 하면 여기에는 먼저 목적만 생각하고 그 과정과 코스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바라거든 골고다의 길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정 코스입니다. 지름길로 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 받을 것에만 급급하고, 승리 자체에 너무 관심을 많이 두게 되면 반칙이 많아진다고 해설자는 말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최선을 다한 자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면류관입니다. 그런데 승리 자체에 너무 신경을 쓰고 집착하게 되면 그 운동 경기는 반칙으로 끝나게 되고 마침내는 실격이 되고 맙니다. 너무도 조급한 나머지 반칙만 계속하다가 실격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간혹 어떤 경기의 해설자가 저 선수가 저렇게 반칙을 많이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운동을 처음 배울 때에 잘못 배웠기 때문이라는 해설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처음부터 철두철미한 정 코스의 훈련을 받았어야 하는데 처음에 적당히 배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니 반칙 투성이요, 되는대로 훈련을 받은 실력으로 막상 경기장에 나가서 법칙대로 시합을 하자니 손발이 말을 들어주어야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처음부터 정 코스로 달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간혹 우리 교인들 중에서 제게 묻기를 손수 차를 몰기 위해서 운전면허를 얻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이제 운전 면허를 얻기 위해 한 달 동안 공부를 하게 되겠는데 정 코스로 철저히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는 자동차를 굴리는 것 외에 교통 법규도 배우고 구조학도 아예 몽땅 익히라는 말을 합니다. 어름어름 핸들 돌리는 것만 배워 가지고 졸업하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갖지 말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분들은 나이 들어서 배우는 길이지만 정 코스로 잘 배워서 단번에 합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핸들만 배웠지 브레이크도 배우지 않고 그저 적당히 해서 넘어 가려고 하니 열 번씩이나 시험을 보고 앉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면허를 얻었으니 이것은 위험 천만입니다. 저 죽고 남 죽이고 할 판입니다. 왜 정 코스로 할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까? 잘 배워서 남 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자동차를 운전하겠다고 하면 적어도 바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펑크가 나면 갈아 끼울 줄도 알아야 하고 브레이크의 성질이 어떤지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핸들 몇 바퀴 돌려보고 면허를 얻으려 하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정 코스로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바르게, 정확하게 하지를 않고 그저 적당히 넘어 가려고 합니다. 하기야 이 사회 구조가 그렇게 되어 먹었습니다만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만사는 정 코스로 훈련을 쌓아 나가야 합니다. 원칙대로 법을 지켜서 그 법이 아주 몸에 익숙하여야 합니다. 이는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익혀야만 반칙 없는 생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말입니다.

또한 셋째 윤리는 승리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승리란 요행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연습량의 결과로 심판 받는 것이 경기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격적으로 꾸준히 공부를 해야지 빈둥빈둥 놀다가 시험 보기 전날 밤샘을 해서 날치기 시험을 보려고 하니, 시험지를 받으면 까맣게 다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생을 이렇게 살아갈 작정입니까? 시험이야 보든 안 보든 누구를 위한 공부인데 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꾸준히 해나가는 그러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인생이 필요합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되는대로 살다가 어쩌다가 철야기도 한번하고는 다음날 목사 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여기에도 정 코스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 이 경건의 생활에도 바른 코스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바른 과정으로 훈련을 쌓아 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명백한 말씀으로 지시하기를 "이기기를 다투는 자 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절제한다"는 말을 어떤 영어성경에는 "엑스싸이즈 셀프 컨츠로울"(exercise self-control), 즉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훈련으로 번역한 곳이 있습니다.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한 자는 경기에 나갈 자격이 없습니다. 어떤 때에 보면 상당한 수준의 챔피언이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방탕해 하다가 그 다음 경기에서 어이없이 참패하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가 없는 자는 경기에 나가 보나마나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기나긴 자기와의 싸움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인 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장에 나가서 경기하는 사람들도 보면 어떤 경기는 3분밖에 안 하는데 그 3분 동안에 승리자가 되어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3! 그것을 위하여 10년이 넘게 공을 들인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10년이 넘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결과로 오늘의 영광을 누리기에 칭찬할 만하고 박수를 보낼 만한 것입니다. 이 날이 있기까지 그 얼마나 많이 젊음의 정욕과 유혹으로 더불어 싸워야 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 많은 시험을 이기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영광이 어디 하루아침에 된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3분 동안의 경기입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싸움! 여기에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이기고, 감정을 이기고, 타성을 이기고, 게으름을 이기고, 나약함을 이기고, 과거로부터의 가책을 이기고, 뿐만 아니라 이기심과 허영심, 교만, 정욕, 이러한 것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자기 자신의 승리자가 될 때에 비로소 마지막 싸움에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7절에서 자기 경험에 의한 심각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노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고는 정작 자기는 버림이 될까 두렵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승리를 구경하면서 자기의 승리로 착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잘 믿는다고 해서 나까지 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훌륭한 신앙 생활을 했다고 하여 내가 따라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구원은 나의 구원이요 나의 경건은 나의 경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을 얻게 하였지만 그러나 나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힘써야겠다고 말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실격자가 될테니까 말입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말입니까? 그런고로 승리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경건을 요구합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마침내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합니다.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말은 원문상으로 보면 매우 처절한 이야기입니다.

'두라고고'라는 이 헬라말은 "종을 삼는다", "종을 길들인다"는 뜻의 말입니다. 옛날에는 노예를 붙잡아 왔는데 이 우락부락한 젊은이가 붙들려 왔다고 하여 쉽게 노예로 순종해 주겠습니까? 그런고로 쇠사슬로 묶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쇠사슬을 풀어 주고도 양순한 종이 될 때까지 엄격한 훈련을 가한다는 바로 그러한 뜻의 말입니다. 사나운 말을 길들이듯이 이 더럽고 삐뚤어진 자기 인간성을 길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에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하여야 합니다. 이 몸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분들과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해봅니다만 이상한 것은 430분에 일어나도 피곤하고 어떤 때는 630분에 일어나도 피곤하고, 10시에 일어나도, 일어날 때 피곤한 것은 꼭 같습니다. 괜히 조금 더 자고 덜 잤다는 기분뿐이지 많이 잘수록 몸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무거워집니다. 아무튼 이 몸이라는 것이 고약해서 잘 길들여야지 그냥 놓아두면 엉망이 되고 맙니다. 24시간을 다 자도 모자라니까 하자는 대로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만큼 살았으면 내몸이 어떤 존재라는 것은 알만큼 알지 않습니까? 똑바르게 길들여야 합니다. 별로 좋은 육체가 없습니다. 하나같이 나약하고 다 못된 것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하겠다던 바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몸, 이 나를 다스려서, 강하게 훈련을 시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길들여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중단 없는 경기를 할 때에 경기자는 바른 자세에 있어야 하고 그리고 최후에 이기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앞에서 최후에 영광을 얻을 수 있는 매일의 승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셔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경기에 나서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아름답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의 경기에서 너무도 반칙이 많았사옵고 곁길로 행하여 실격이 된 채 지금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다시는 경기에 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에 짓눌린 부끄러운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과거는 십자가 밑에 묻어 버리게 하시고 이제는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하사 진정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진리로 내 인격을 길들여 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강하고 온전한 경기자가 되어 최후의 승리로 면류관을 얻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승리자의 윤리(고린도전서 9 : 22-27)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철학의 바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정체! 현재적인 정체만이 아니라 미래적인 이상적 자기 정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것은 그 생을 인도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 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을 담배 연기와 같다고 한다던가, 안개와 같다, 혹은 나그네요 방랑자와 같다, 아니면 자기 자신을 학대하면서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평가하고 있다면 오늘의 그의 생이 어떻게 전개되겠습니까? 그런고로 나로서의 이상적 인간인 그 정체가 나의 생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간혹 우리는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올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쳐다보기는 해야지! 또 쳐다보지도 않는 나무를 어떻게 올라가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쳐다보지도 않고 올라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고로 내가 세운 내 생의 이상, 목표, 그 정체는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집중적으로 주시하며 그리로 치닫는 인생을 살아가야 된다고 믿습니다. 빌립보서 38-9절에 나타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배우고 얻고, 따르며 마침내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자기 자신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자기 자신으로서의 자기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자기로 자신의 정체를 세웠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사도로 평생을 살아갔습니다. 그것은 또한 자기 생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목적이요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며 십자가만을 높이고, 십자가만을 알며,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그런 선택된 인간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그는 거의 숙명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에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자신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빌립보서 312절에 의하면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러 좇아가노라"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는 그것을 내 이상, 나의 목표로 하고 오직 그것을 향해 좇아가는 하나의 경주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라고 하면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중요한 헬라의 도시입니다. 상업 도시인 이 고린도는 아덴과 멀지 않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아덴은 올림픽 경기장이 있는 곳이요 올림픽 경기의 발상지입니다. 거기로부터 서쪽으로 39마일 되는 곳에 고린도라고 하는 이 도시가 있습니다. 당시에 있어서 오락은 운동 경기가 최고이었기 때문에 이 고린도 사람들은 아덴에서의 올림픽 경기를 자주 구경했을 것이라고 보아집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지금, 운동 경기에 아주 익숙한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을 상대로 운동 경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 모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운동 경기자가 적어도 승리자가 되려고 할 때에 그 승리자의 윤리 제 1호는 목적이 분명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싸우며, 무엇을 위해 싸우고, 왜 싸우느냐? 그리고 내가 지금 어느 지점, 어느 방향으로 뛰고 있느냐 하는 이것들이 분명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저들은 썩어질 면류관을 얻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챔피언도 되어보고 유명도 했었지만 마지막에 보면 한갖 썩어질 면류관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 가지고 그렇게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 영원한 면류관을 얻기 위해 달음질하는 하나의 경기자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달음질하라, 뛰라, 상을 얻도록 뛰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은 추상적인 것이지만 목표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체적인 목표가 분명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향 없는 자 같거나 방향 감각이 없는 그런 흐리멍텅한 생을 살아서는 아니 될 것이며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허공을 치는 것 같은 헛된 수고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경쟁, 분명한 경기를 진행하여야겠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권투에서 허공을 치는 경우가 많은데 선수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처럼 힘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번 허공을 치고 나면 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일단 내가 치면 상대방이 맞아주어야 하겠는데 맞아주지도 않는 주먹을 휘두르는 것처럼 힘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정 목표가 분명하여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좋아하는 운동이 따로 없습니다만 그런대로 텔레비전을 통해서 중계되는 권투 시합은 간혹 시간이 허락되면 즐겨 봅니다. 거기에는 그런 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경기가 경기이니만큼 때때로 보기가 흉하고 끔찍할 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때리며, 죽일 것처럼 그러다가도 일단 땡하고 종이 울리면 그대로 스톱(stop)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간단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는 또 끌어안고 악수하고 하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곧 인생의 상징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상이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피투성이가 되어 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누구를 위한 싸움이며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왜 때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싸운 싸움이 이렇게 깨끗하게,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름답더라는 말입니다. 친구를 때린 것이 아닙니다. 죽으라고 때린 것도 사실은 아프라고 때린 것도 아닙니다. 다만 힘을 겨루고 있을 뿐입니다. 기술을 겨루고 있고 인내를 겨루고 있으며, 정신력을 겨루고 있을 뿐이지, 죽으라고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방향이 분명하고, 목적이 분명하고 개념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느냐? 돈을 번다고 돈 때문에 돈을 버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뛴다고 뛰기 위해 뛰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출세한다고 출세를 위해 출세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싸움의 대상이 분명하고 의미가 분명하여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최종 목표가 문제입니다. 간혹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고 물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대답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대답인즉 "좌우간 대학을 들어가야지요 뭐"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무슨 과를 들어갈 것이냐?" 하면 "들어가는 대로 들어가야지요"합니다. 눈치작전해서 들어가겠다는 것인데 이렇게 막연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대학 입학이 어떻게 감히 생의 목적이 됩니까? 정말 시원치 않은 학생은 이런 목적을 세운다고 합니다. 대학이라면 들어갔다가 중퇴를 해도 좋으니 그저 한번 들어나 가보고 죽었으면 한답니다. , 세상에 이렇게 싸구려 인간이 있더란 말입니까? 어째서 대학이 생의 목적이 됩니까? 이것은 수단 중 하나네 불과합니다. 도대체 파이널 고울(final goal), 그 마지막 목표가 무엇이냐는 말입니까? 무엇보다도 그것이 바로 맺어져야 합니다.

간혹 어떤 경우에 보면 어린애를 낳은 후 백일이 되면 귀하다고 백일 잔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는 아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음식들을 잘 차려 놓고 어른들이 먹고 즐기면서 또 아이에게는 불편하고 이상한 옷을 입혀서 울리기만 하는데 참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사실 저는 그 잔치를 얻어먹으면서도 속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굉장하게 시작하면 무엇하나 끝이 좋아야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생일이 문제입니까? 결혼식이 문제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장례식이 좋아야 합니다. 그 중간의 것들은 그렇게 요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때에 보면 유달리 결혼식을 호화롭게 하려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도 걱정스럽습니다. 이것이 무사하려나 하고요. 마지막이 좋아야 하고 그 끝을 아름답게 맺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화려한 의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목표라는 것은 결코 현재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미래적인 것이요 여기가 아니요 저기란 말입니다. 보다 더 멀리 멀리, 결국에는 최종 승리자입니다. 마라톤 경기를 보면 처음 뛸 때 1등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계하는 아나운서는 아무개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말해 줍니다. 이제 중간 지점에 가서도 아나운서는 아무개가 서두임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웬걸 5분전에 쓰러지고 말았다면 지금까지의 선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지막 결승점에서 1등한 사람이 1등이지, 처음의 것도, 중간의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최종 목표, 최종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뚜렷한 목적을 세우고, 그리고 줄달음치는 그러한 경기자, 그러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 두 번째 윤리를 반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불법적으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에 디모데후서 25절에 보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법대로 하여야 하고 파울(foul)이 많으면 아니 됩니다. 경고장을 많이 받으면 실격이 되고 맙니다. 미안하지만 경고를 너무 많이 받아서 실격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아슬아슬합니다. 이제 한 번만 더 반칙하면 실격이요. 끝나는, 그러한 위기에 사는 인격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대로 더 버티고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제 마지막 경고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정 코스로 반칙 없는 생을 살아가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반칙이 많고, 왜 이렇게 바로 살아가기가 힘드느냐? 하면 여기에는 먼저 목적만 생각하고 그 과정과 코스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바라거든 골고다의 길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정 코스입니다. 지름길로 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 받을 것에만 급급하고, 승리 자체에 너무 관심을 많이 두게 되면 반칙이 많아진다고 해설자는 말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최선을 다한 자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면류관입니다. 그런데 승리 자체에 너무 신경을 쓰고 집착하게 되면 그 운동 경기는 반칙으로 끝나게 되고 마침내는 실격이 되고 맙니다. 너무도 조급한 나머지 반칙만 계속하다가 실격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간혹 어떤 경기의 해설자가 저 선수가 저렇게 반칙을 많이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운동을 처음 배울 때에 잘못 배웠기 때문이라는 해설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처음부터 철두철미한 정 코스의 훈련을 받았어야 하는데 처음에 적당히 배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니 반칙 투성이요, 되는대로 훈련을 받은 실력으로 막상 경기장에 나가서 법칙대로 시합을 하자니 손발이 말을 들어주어야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처음부터 정 코스로 달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간혹 우리 교인들 중에서 제게 묻기를 손수 차를 몰기 위해서 운전면허를 얻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이제 운전 면허를 얻기 위해 한 달 동안 공부를 하게 되겠는데 정 코스로 철저히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는 자동차를 굴리는 것 외에 교통 법규도 배우고 구조학도 아예 몽땅 익히라는 말을 합니다. 어름어름 핸들 돌리는 것만 배워 가지고 졸업하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갖지 말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분들은 나이 들어서 배우는 길이지만 정 코스로 잘 배워서 단번에 합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핸들만 배웠지 브레이크도 배우지 않고 그저 적당히 해서 넘어 가려고 하니 열 번씩이나 시험을 보고 앉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면허를 얻었으니 이것은 위험 천만입니다. 저 죽고 남 죽이고 할 판입니다. 왜 정 코스로 할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까? 잘 배워서 남 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자동차를 운전하겠다고 하면 적어도 바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펑크가 나면 갈아 끼울 줄도 알아야 하고 브레이크의 성질이 어떤지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핸들 몇 바퀴 돌려보고 면허를 얻으려 하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정 코스로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바르게, 정확하게 하지를 않고 그저 적당히 넘어 가려고 합니다. 하기야 이 사회 구조가 그렇게 되어 먹었습니다만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만사는 정 코스로 훈련을 쌓아 나가야 합니다. 원칙대로 법을 지켜서 그 법이 아주 몸에 익숙하여야 합니다. 이는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익혀야만 반칙 없는 생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말입니다.

또한 셋째 윤리는 승리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승리란 요행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연습량의 결과로 심판 받는 것이 경기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격적으로 꾸준히 공부를 해야지 빈둥빈둥 놀다가 시험 보기 전날 밤샘을 해서 날치기 시험을 보려고 하니, 시험지를 받으면 까맣게 다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생을 이렇게 살아갈 작정입니까? 시험이야 보든 안 보든 누구를 위한 공부인데 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꾸준히 해나가는 그러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인생이 필요합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되는대로 살다가 어쩌다가 철야기도 한번하고는 다음날 목사 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여기에도 정 코스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 이 경건의 생활에도 바른 코스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바른 과정으로 훈련을 쌓아 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명백한 말씀으로 지시하기를 "이기기를 다투는 자 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절제한다"는 말을 어떤 영어성경에는 "엑스싸이즈 셀프 컨츠로울"(exercise self-control), 즉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훈련으로 번역한 곳이 있습니다.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한 자는 경기에 나갈 자격이 없습니다. 어떤 때에 보면 상당한 수준의 챔피언이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방탕해 하다가 그 다음 경기에서 어이없이 참패하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가 없는 자는 경기에 나가 보나마나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기나긴 자기와의 싸움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인 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장에 나가서 경기하는 사람들도 보면 어떤 경기는 3분밖에 안 하는데 그 3분 동안에 승리자가 되어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3! 그것을 위하여 10년이 넘게 공을 들인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10년이 넘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결과로 오늘의 영광을 누리기에 칭찬할 만하고 박수를 보낼 만한 것입니다. 이 날이 있기까지 그 얼마나 많이 젊음의 정욕과 유혹으로 더불어 싸워야 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 많은 시험을 이기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영광이 어디 하루아침에 된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3분 동안의 경기입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싸움! 여기에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이기고, 감정을 이기고, 타성을 이기고, 게으름을 이기고, 나약함을 이기고, 과거로부터의 가책을 이기고, 뿐만 아니라 이기심과 허영심, 교만, 정욕, 이러한 것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자기 자신의 승리자가 될 때에 비로소 마지막 싸움에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7절에서 자기 경험에 의한 심각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노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고는 정작 자기는 버림이 될까 두렵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승리를 구경하면서 자기의 승리로 착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잘 믿는다고 해서 나까지 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훌륭한 신앙 생활을 했다고 하여 내가 따라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구원은 나의 구원이요 나의 경건은 나의 경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을 얻게 하였지만 그러나 나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힘써야겠다고 말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실격자가 될테니까 말입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말입니까? 그런고로 승리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경건을 요구합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마침내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합니다.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말은 원문상으로 보면 매우 처절한 이야기입니다.

'두라고고'라는 이 헬라말은 "종을 삼는다", "종을 길들인다"는 뜻의 말입니다. 옛날에는 노예를 붙잡아 왔는데 이 우락부락한 젊은이가 붙들려 왔다고 하여 쉽게 노예로 순종해 주겠습니까? 그런고로 쇠사슬로 묶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쇠사슬을 풀어 주고도 양순한 종이 될 때까지 엄격한 훈련을 가한다는 바로 그러한 뜻의 말입니다. 사나운 말을 길들이듯이 이 더럽고 삐뚤어진 자기 인간성을 길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에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하여야 합니다. 이 몸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분들과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해봅니다만 이상한 것은 430분에 일어나도 피곤하고 어떤 때는 630분에 일어나도 피곤하고, 10시에 일어나도, 일어날 때 피곤한 것은 꼭 같습니다. 괜히 조금 더 자고 덜 잤다는 기분뿐이지 많이 잘수록 몸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무거워집니다. 아무튼 이 몸이라는 것이 고약해서 잘 길들여야지 그냥 놓아두면 엉망이 되고 맙니다. 24시간을 다 자도 모자라니까 하자는 대로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만큼 살았으면 내몸이 어떤 존재라는 것은 알만큼 알지 않습니까? 똑바르게 길들여야 합니다. 별로 좋은 육체가 없습니다. 하나같이 나약하고 다 못된 것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하겠다던 바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몸, 이 나를 다스려서, 강하게 훈련을 시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길들여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중단 없는 경기를 할 때에 경기자는 바른 자세에 있어야 하고 그리고 최후에 이기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앞에서 최후에 영광을 얻을 수 있는 매일의 승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셔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경기에 나서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아름답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의 경기에서 너무도 반칙이 많았사옵고 곁길로 행하여 실격이 된 채 지금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다시는 경기에 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에 짓눌린 부끄러운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과거는 십자가 밑에 묻어 버리게 하시고 이제는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하사 진정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진리로 내 인격을 길들여 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강하고 온전한 경기자가 되어 최후의 승리로 면류관을 얻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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