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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참는 자의 복(야고보서 1 : 2-4,12)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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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참는 자의 복(야고보서 1 : 2-4,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시험을 참는 자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어떤 의미에서 사람은 일생 동안 시험을 치르며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민학교,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학, 대학원, 취직, 진급 등 계속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어쨌든 이렇게 시험을 칠 때마다 하게 되는 생각은 "이번 시험이 마지막 시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내 일생에 다시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해서 마지막 시험을 한번 보았습니다만 이제는 내 일생에 다시 시험 같은 것은 없겠지 하고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나서 생각하니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이 시험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것, 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시험은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고로 시험이 없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민방위라는 것 말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바쁠 때에 자꾸만 나오라는 것이 귀찮고 힘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발 하고 좀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져서 어느 날 갑자기 이제는 나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 또한 그렇게도 섭섭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나이 들어 민방위에 못 나가는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나가겠다고 하여도 안 받아 줍니다. 생각하면 이것이 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시험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젊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직도 미래가 있고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미래를 향한 출발 거기에 시험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제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끝냈다면 그야말로 정말 다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만백성을 구원하시는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려 하실 때 맨 먼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험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시험이라는 것은 생명의 의미가 있습니다. 죽은 자를 시험하는 일은 없습니다. 죽은 인격, 죽은 믿음, 그것은 마귀도 시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한다, 혹은 시험 있다, 시험 많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시험이 갖는 생명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다 더 진실한 세계로 향하는 생명의 약동이더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 무슨 핍박을 받습니까? 그때 그때 적당하게 살아 넘기는 사람에게는 핍박이 없습니다. 보다 진실하게, 보다 의롭게, 보다 바르게 살려고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야 하더란 말씀입니다.

또한 시험은 자유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직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른 선택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시험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당면한 시험 자체에 대하여 도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시험 문제가 어려웠다느니, 까다롭다느니 하며 문제 자체를 두고 불만을 표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두고 보더라도 왜 내게는 이렇게도 시험이 많은가? 아니면 나는 왜 남달리 어려운 시험만 당하게 되는가! 라며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불평할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험을 넉넉히 치를 만한 충분한 능력이 내게 있다면 무슨 시험인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떤 시험이든 이기면 이로운 것입니다. 반면에 지면 해로운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험 자체에 대해서 도전할 것도 아니요,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름 아닌 내가 그 모든 시험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그런 능력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본래 시험이란 합격자를 얻기 위한 것이지 몇 사람 낙제시키려고 치르는 시험이 아닙니다. 따라서 합격 못했다면 나 자신의 능력 때문이지 누구 떨어뜨리는 것이 본래의 목적은 아닙니다. 생각하면 모든 시험이 다 그렇습니다. 특별히 신앙적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평가에 준합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상대적 평가가 아닙니다. 그런고로 언제나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은 지적하기를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능력을 갖추어 자신만만한 사람은 오히려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인해 나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나의 나 됨을 자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고로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뻐하지 못합니까? 사실은 충실치 못하여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이지 시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편견은 스스로 "시험""시험 아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모든 것이 다 시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은 시험이다, 저것은 시험이 아니다라며 스스로 판단합니다. 이와 같이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데에 또 하나의 잘못이 있습니다. 이는 무슨 말씀이냐 하면, 흔히 우리는 성공하면 복 받았다 하고 실패하면 시험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성공이 더 큰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억울한 말을 듣고 굴욕을 받으면 시험에 들었다며 괴로워합니다. 대신 칭찬을 받으면 무조건 좋아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칭찬이 함정이요 무서운 시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건강은 축복이요, 병들면 시험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건강하기 때문에 시험에 든 것이요, 모든 죄가 건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죠지 팍스(G.Fox)"마귀도 병들면 착해진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어디까지나 건강이 말썽이요 여기에 시험이 있고,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이 자동차를 무사고로 운전하는 무슨 비결이 있으시냐며 물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제가 운전 선배로서 한 마디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푸른 신호등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인생 철학입니다. 붉은 신호등이야 다 멎을 터이니까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푸른 신호등입니다. 푸른 신호가 켜졌다고 하여 줄달음 치다가는 아주 저 나라로 직행하게 됩니다. 푸른 신호는 이제 곧 붉은 신호로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때에 조심하여야 합니다.

넓은 길이 열렸습니까? 이것이 함정입니다. 넓은 길은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히려 좁은 길, 험한 길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도요,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길이 앞에 크게 열릴 때에 그것이 무서운 시험이라는 것을 바로 그 시간에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세 번째로 또 하나의 편견은 나만 시험 당한다고 생각하는 고 독감입니다. 시험 당하는 자가 나만 시험 당한다고 생각하여 동시에 고독해 합니다.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시험을 당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죄가 많아서 당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닙니다. 의인도 시험을 당하고, 악인도 당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결코 나만이 당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이제는 시험을 당할 때에 고독해 하지 마십시다. 모든 사람이 모양은 다소 다른 것 같아도 하나같이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어느 때나, 어디서나 시험을 당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험의 보편성을 생각하며 결코 고독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30여 년 동안을 역사 하다 순교한 야고보 사도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간단한 문안이 끝나자마자 맨 먼저 다룬 것이 시험의 문제입니다.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시험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뜻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는 시험의 의미를 알라는 것입니다. 시험의 뜻을 알되 특별히 신학적 의미를 알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 안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이 사건이 진행되며,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확실한 신앙고백 위에서 시험을 이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일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계시가 이 시험 속에 나타났다고 하는 확실한 마음을 가지고 시험에 임하여야 합니다. 저는 자라날 때 저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매를 맞았습니다. 그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불평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지금쯤을 아버지가 나를 좀 때려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 아버지께서 나를 대하시는 그 모든 것이 사랑이요, 전부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일 뿐, 하나의 예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전부가 내게 향한 사랑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대할 때에 그 의미를 내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그 교과서가 바로 시험인 것입니다. 그 교과서의 교과 과정이 여러 가지 모양의 시험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으로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귀에 들려오기를 바라고 마음에 감동을 주기를 바라며, 나의 명상, 나의 환상 속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그렇게만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우리를 훈련하시고 시련 하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며, 행하게 하고, 강하게 하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모르는 자를 알게 합니다.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믿지 않는 자를 믿게 합니다. 끊지 못하는 일을 끊게 합니다. 행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게 합니다.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합니다. 넘어진 자를 일으킵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합니다. 없는 자를 있게 합니다. 전혀 쓸모 없는 자를 쓸모 있는 자로 다듬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이 많은 시험 속에서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친히 교육하십니다. 그런고로 내가 당한 이 사건, 이 시련은 하나님의 교과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로 인하여 많은 괴로움을 당하다가 마침내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듣고 들어도 귀한 말씀입니다. 이미 네게 있는 내 은혜가 족하다!는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 속의 이것이 바로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필요한 은혜, 구체적으로 필요한 은혜가 바로 그 시험 속에 계시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시험에는 초점이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을 통하여 어느 방향으로 우리를 키우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깨닫게 하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믿음의 시련을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 존재의 진실을 더하십니다. 거짓된 믿음으로 하여 참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헛된 세상의 세속적인 것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신령한 것에로 관심을 돌리도록 방향을 전환시키고, 궤도를 수정케 하십니다.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이 허무한 것에 매여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가치의 것과 영원한 세계를 생각하도록 그 방향을 바꾸십니다. 그것이 시험이요, 믿음의 시련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중인데 감독하는 선생님이 가만히 보니까 아주 공부 잘하는 학생 하나가 답안을 잘 써나가다가 딱 하나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이 애를 쓰게 되었는데 이것을 바로 옆에 있는 친구가 보고는 자기는 쉽게 아는 것이기에 손으로 꾹 찌르고는 그 답이 이것이라며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쪽 친구는 안 보겠다며 고개를 돌립니다.

이쪽에서는 또 보라고 합니다. 안 보겠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멀리서 모르는 척하면서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그 녀석이 척 보더니 써넣더랍니다. 그래서 선생님 마음에는 이 놈이 그만 넘어졌구나 하고 있는데, 이제 시간이 다 되어 모두가 선생님 앞에 답안지를 갖다 놓을 때 이 학생은 내지를 않고 가만히 있더랍니다. 그러더니 모두가 다 낸 다음에 와서는 선생님 저 0점 주세요 하더랍니다. 그 때에 선생님을 그 어린 학생을 끌어안고는 "네가 그것을 보고 쓰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는가를 보았다. 너는 지금이 이렇게 말하므로 크게 승리한 것이다"라며 그를 칭찬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는 합격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출세하고 못하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얼마나 진실했느냐에 문제입니다. 돈 몇푼 벌었다고 지금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데요! 이것은 크게 통회할 거리요 제목입니다. 차라리 진실하고 가난한 것만도 못한 것입니다. 성공이 무엇이며, 출세가 무엇이며, 축복이 무엇이더란 말입니까? 이런 저런 시험에 다 넘어지고 쓸데없는 것 붙들고 앉아서는 성공했다고 축하하자는 이야기입니까? 진정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험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시험을 통하여 나를 어떻게 하시고자 하시는가? 의 방향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시험은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시험은 우리를 유익하게 합니다. 겸손하게 합니다. 온유하게 합니다. 해마다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들을 보면 얼굴이 누렇게 뜨고 어깨는 축 늘어져서 한창 발랄하고 놀기 좋아할 때인데도 초죽음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엾고 불쌍할 정도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언제 그렇게 온유해졌는지, 언제 그렇게 겸손해졌는지, 언제 그렇게 믿음이 생겼는지, 그저 목사든 누구든 만나는 사람마다 "기도좀 해주세요"하고 부탁을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들도, 전화를 걸어도 그저 "기도해 주세요"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요때 요 마음 가지고 일생을 살아다오"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만 산다면 모두가 다 성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 보세요. 온유하지요, 겸손하지요, 하나님 의지하지요, 열심히 기도하지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시험은 아무래도 보기는 보아야 하겠더란 말입니다. 그럴 때 같아서야 그렇게 착한 아이가 어디에 있으며, 그렇게 온유한 부모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마음이 며칠이 못가니 걱정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시험은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온유하게 합니다. 기도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인내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합니다. 이 온전이라는 말은 완전한 성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성숙케 하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인격과 신앙을 자라게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십시다.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처럼 나약한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성장하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실패없이 일사천리로 성공했다는 그 사람은 실로 위험한 사람이요 무서운 사람입니다. 따라서 믿고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실패를 겪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깊이 깊이 그리고 넓고도 높게 성장하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본문에서의 "구비"한다는 말은 원문의 뜻대로 보면 완전 무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온전한 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적이고, 능력 있게, 유능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유능하게 하고, 온전히 성장하게 하며, 모든 것을 갖추게 하여 더 크고, 더 유효하게 쓰시려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시험에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2절을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말씀입니까? 시험을 이긴 후에, 그 후에는 기뻐할 것입니다. 시험보기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어려운 시험을 잘 보았을수록 자랑거리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몇 백대 일의 비율에서 합격을 했다며 얼마나 자랑을 합니까? 두고두고 자손 만대에 자랑을 하려고 합니다. 이제 훈장이 따로 없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시험을 이기고 승리했느냐? 하는 그것이 훈장이요, 명예요, 영광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내가 이 시험을 긍정적으로 대하고, 적극적으로 대할 때 그리스도께서 거기 함께 하시고, 성령이 함께 하시며, 말씀의 능력이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험을 시련으로, 시련을 축복으로, 이제는 축복을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성경 말씀에 우리 마음의 귀를 기울입시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께서 은혜로 주시고, 축복으로 주신 시련을 무겁다 하여, 때로는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을 탓하기도 하며,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온 그릇된 신앙과 잘못된 생각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이 시련과 시험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계시임을 확실히 믿게 하옵소서. 시험을 넘어, 저 앞에 있는 미래의 영광된 약속을 바라보면서 참고, 사랑하고, 믿으며, 인내함으로 항상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이 시험을 당하므로, 그래서 승리하고, 그 승리의 영광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험을 참는 자의 복(야고보서 1 : 2-4,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시험을 참는 자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어떤 의미에서 사람은 일생 동안 시험을 치르며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민학교,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학, 대학원, 취직, 진급 등 계속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어쨌든 이렇게 시험을 칠 때마다 하게 되는 생각은 "이번 시험이 마지막 시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내 일생에 다시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해서 마지막 시험을 한번 보았습니다만 이제는 내 일생에 다시 시험 같은 것은 없겠지 하고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나서 생각하니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이 시험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것, 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시험은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고로 시험이 없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민방위라는 것 말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바쁠 때에 자꾸만 나오라는 것이 귀찮고 힘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발 하고 좀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져서 어느 날 갑자기 이제는 나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 또한 그렇게도 섭섭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나이 들어 민방위에 못 나가는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나가겠다고 하여도 안 받아 줍니다. 생각하면 이것이 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시험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젊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직도 미래가 있고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미래를 향한 출발 거기에 시험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제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끝냈다면 그야말로 정말 다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만백성을 구원하시는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려 하실 때 맨 먼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험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시험이라는 것은 생명의 의미가 있습니다. 죽은 자를 시험하는 일은 없습니다. 죽은 인격, 죽은 믿음, 그것은 마귀도 시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한다, 혹은 시험 있다, 시험 많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시험이 갖는 생명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다 더 진실한 세계로 향하는 생명의 약동이더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 무슨 핍박을 받습니까? 그때 그때 적당하게 살아 넘기는 사람에게는 핍박이 없습니다. 보다 진실하게, 보다 의롭게, 보다 바르게 살려고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야 하더란 말씀입니다.

또한 시험은 자유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직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른 선택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시험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당면한 시험 자체에 대하여 도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시험 문제가 어려웠다느니, 까다롭다느니 하며 문제 자체를 두고 불만을 표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두고 보더라도 왜 내게는 이렇게도 시험이 많은가? 아니면 나는 왜 남달리 어려운 시험만 당하게 되는가! 라며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불평할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험을 넉넉히 치를 만한 충분한 능력이 내게 있다면 무슨 시험인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떤 시험이든 이기면 이로운 것입니다. 반면에 지면 해로운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험 자체에 대해서 도전할 것도 아니요,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름 아닌 내가 그 모든 시험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그런 능력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본래 시험이란 합격자를 얻기 위한 것이지 몇 사람 낙제시키려고 치르는 시험이 아닙니다. 따라서 합격 못했다면 나 자신의 능력 때문이지 누구 떨어뜨리는 것이 본래의 목적은 아닙니다. 생각하면 모든 시험이 다 그렇습니다. 특별히 신앙적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평가에 준합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상대적 평가가 아닙니다. 그런고로 언제나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은 지적하기를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능력을 갖추어 자신만만한 사람은 오히려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인해 나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나의 나 됨을 자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고로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뻐하지 못합니까? 사실은 충실치 못하여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이지 시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편견은 스스로 "시험""시험 아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모든 것이 다 시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은 시험이다, 저것은 시험이 아니다라며 스스로 판단합니다. 이와 같이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데에 또 하나의 잘못이 있습니다. 이는 무슨 말씀이냐 하면, 흔히 우리는 성공하면 복 받았다 하고 실패하면 시험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성공이 더 큰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억울한 말을 듣고 굴욕을 받으면 시험에 들었다며 괴로워합니다. 대신 칭찬을 받으면 무조건 좋아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칭찬이 함정이요 무서운 시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건강은 축복이요, 병들면 시험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건강하기 때문에 시험에 든 것이요, 모든 죄가 건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죠지 팍스(G.Fox)"마귀도 병들면 착해진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어디까지나 건강이 말썽이요 여기에 시험이 있고,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이 자동차를 무사고로 운전하는 무슨 비결이 있으시냐며 물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제가 운전 선배로서 한 마디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푸른 신호등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인생 철학입니다. 붉은 신호등이야 다 멎을 터이니까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푸른 신호등입니다. 푸른 신호가 켜졌다고 하여 줄달음 치다가는 아주 저 나라로 직행하게 됩니다. 푸른 신호는 이제 곧 붉은 신호로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때에 조심하여야 합니다.

넓은 길이 열렸습니까? 이것이 함정입니다. 넓은 길은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히려 좁은 길, 험한 길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도요,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길이 앞에 크게 열릴 때에 그것이 무서운 시험이라는 것을 바로 그 시간에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세 번째로 또 하나의 편견은 나만 시험 당한다고 생각하는 고 독감입니다. 시험 당하는 자가 나만 시험 당한다고 생각하여 동시에 고독해 합니다.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시험을 당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죄가 많아서 당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닙니다. 의인도 시험을 당하고, 악인도 당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결코 나만이 당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이제는 시험을 당할 때에 고독해 하지 마십시다. 모든 사람이 모양은 다소 다른 것 같아도 하나같이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어느 때나, 어디서나 시험을 당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험의 보편성을 생각하며 결코 고독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30여 년 동안을 역사 하다 순교한 야고보 사도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간단한 문안이 끝나자마자 맨 먼저 다룬 것이 시험의 문제입니다.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시험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뜻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는 시험의 의미를 알라는 것입니다. 시험의 뜻을 알되 특별히 신학적 의미를 알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 안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이 사건이 진행되며,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확실한 신앙고백 위에서 시험을 이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일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계시가 이 시험 속에 나타났다고 하는 확실한 마음을 가지고 시험에 임하여야 합니다. 저는 자라날 때 저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매를 맞았습니다. 그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불평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지금쯤을 아버지가 나를 좀 때려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 아버지께서 나를 대하시는 그 모든 것이 사랑이요, 전부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일 뿐, 하나의 예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전부가 내게 향한 사랑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대할 때에 그 의미를 내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그 교과서가 바로 시험인 것입니다. 그 교과서의 교과 과정이 여러 가지 모양의 시험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으로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귀에 들려오기를 바라고 마음에 감동을 주기를 바라며, 나의 명상, 나의 환상 속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그렇게만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우리를 훈련하시고 시련 하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며, 행하게 하고, 강하게 하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모르는 자를 알게 합니다.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믿지 않는 자를 믿게 합니다. 끊지 못하는 일을 끊게 합니다. 행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게 합니다.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합니다. 넘어진 자를 일으킵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합니다. 없는 자를 있게 합니다. 전혀 쓸모 없는 자를 쓸모 있는 자로 다듬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이 많은 시험 속에서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친히 교육하십니다. 그런고로 내가 당한 이 사건, 이 시련은 하나님의 교과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로 인하여 많은 괴로움을 당하다가 마침내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듣고 들어도 귀한 말씀입니다. 이미 네게 있는 내 은혜가 족하다!는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 속의 이것이 바로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필요한 은혜, 구체적으로 필요한 은혜가 바로 그 시험 속에 계시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시험에는 초점이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을 통하여 어느 방향으로 우리를 키우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깨닫게 하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믿음의 시련을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 존재의 진실을 더하십니다. 거짓된 믿음으로 하여 참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헛된 세상의 세속적인 것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신령한 것에로 관심을 돌리도록 방향을 전환시키고, 궤도를 수정케 하십니다.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이 허무한 것에 매여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가치의 것과 영원한 세계를 생각하도록 그 방향을 바꾸십니다. 그것이 시험이요, 믿음의 시련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중인데 감독하는 선생님이 가만히 보니까 아주 공부 잘하는 학생 하나가 답안을 잘 써나가다가 딱 하나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이 애를 쓰게 되었는데 이것을 바로 옆에 있는 친구가 보고는 자기는 쉽게 아는 것이기에 손으로 꾹 찌르고는 그 답이 이것이라며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쪽 친구는 안 보겠다며 고개를 돌립니다.

이쪽에서는 또 보라고 합니다. 안 보겠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멀리서 모르는 척하면서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그 녀석이 척 보더니 써넣더랍니다. 그래서 선생님 마음에는 이 놈이 그만 넘어졌구나 하고 있는데, 이제 시간이 다 되어 모두가 선생님 앞에 답안지를 갖다 놓을 때 이 학생은 내지를 않고 가만히 있더랍니다. 그러더니 모두가 다 낸 다음에 와서는 선생님 저 0점 주세요 하더랍니다. 그 때에 선생님을 그 어린 학생을 끌어안고는 "네가 그것을 보고 쓰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는가를 보았다. 너는 지금이 이렇게 말하므로 크게 승리한 것이다"라며 그를 칭찬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는 합격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출세하고 못하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얼마나 진실했느냐에 문제입니다. 돈 몇푼 벌었다고 지금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데요! 이것은 크게 통회할 거리요 제목입니다. 차라리 진실하고 가난한 것만도 못한 것입니다. 성공이 무엇이며, 출세가 무엇이며, 축복이 무엇이더란 말입니까? 이런 저런 시험에 다 넘어지고 쓸데없는 것 붙들고 앉아서는 성공했다고 축하하자는 이야기입니까? 진정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험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시험을 통하여 나를 어떻게 하시고자 하시는가? 의 방향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시험은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시험은 우리를 유익하게 합니다. 겸손하게 합니다. 온유하게 합니다. 해마다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들을 보면 얼굴이 누렇게 뜨고 어깨는 축 늘어져서 한창 발랄하고 놀기 좋아할 때인데도 초죽음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엾고 불쌍할 정도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언제 그렇게 온유해졌는지, 언제 그렇게 겸손해졌는지, 언제 그렇게 믿음이 생겼는지, 그저 목사든 누구든 만나는 사람마다 "기도좀 해주세요"하고 부탁을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들도, 전화를 걸어도 그저 "기도해 주세요"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요때 요 마음 가지고 일생을 살아다오"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만 산다면 모두가 다 성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 보세요. 온유하지요, 겸손하지요, 하나님 의지하지요, 열심히 기도하지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시험은 아무래도 보기는 보아야 하겠더란 말입니다. 그럴 때 같아서야 그렇게 착한 아이가 어디에 있으며, 그렇게 온유한 부모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마음이 며칠이 못가니 걱정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시험은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온유하게 합니다. 기도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인내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합니다. 이 온전이라는 말은 완전한 성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성숙케 하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인격과 신앙을 자라게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십시다.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처럼 나약한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성장하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실패없이 일사천리로 성공했다는 그 사람은 실로 위험한 사람이요 무서운 사람입니다. 따라서 믿고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실패를 겪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깊이 깊이 그리고 넓고도 높게 성장하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본문에서의 "구비"한다는 말은 원문의 뜻대로 보면 완전 무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온전한 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적이고, 능력 있게, 유능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유능하게 하고, 온전히 성장하게 하며, 모든 것을 갖추게 하여 더 크고, 더 유효하게 쓰시려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시험에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2절을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말씀입니까? 시험을 이긴 후에, 그 후에는 기뻐할 것입니다. 시험보기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어려운 시험을 잘 보았을수록 자랑거리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몇 백대 일의 비율에서 합격을 했다며 얼마나 자랑을 합니까? 두고두고 자손 만대에 자랑을 하려고 합니다. 이제 훈장이 따로 없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시험을 이기고 승리했느냐? 하는 그것이 훈장이요, 명예요, 영광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내가 이 시험을 긍정적으로 대하고, 적극적으로 대할 때 그리스도께서 거기 함께 하시고, 성령이 함께 하시며, 말씀의 능력이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험을 시련으로, 시련을 축복으로, 이제는 축복을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성경 말씀에 우리 마음의 귀를 기울입시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께서 은혜로 주시고, 축복으로 주신 시련을 무겁다 하여, 때로는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을 탓하기도 하며,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온 그릇된 신앙과 잘못된 생각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이 시련과 시험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계시임을 확실히 믿게 하옵소서. 시험을 넘어, 저 앞에 있는 미래의 영광된 약속을 바라보면서 참고, 사랑하고, 믿으며, 인내함으로 항상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이 시험을 당하므로, 그래서 승리하고, 그 승리의 영광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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