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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선택받은 자의 윤리(골로새서 3 : 12-17)

by 【고동엽】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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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의 윤리(골로새서 3 : 12-17)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가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일생을 두고 공부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무엇이냐? 도대체 "" 라고 하는 이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참으로 알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하고 또한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이 오십, 육십, 칠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의 나됨을 깨닫고는 좀더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하고 후회하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더러는 천상 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격으로 나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독존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이란 역시 피조물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과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내가 있다는 생각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 두 생각의 차이와 그 거리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의미와 운명이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부모님이 계시고 내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있고 부모님이 계신 것입니까? 간혹 어떤 때에 보면 자기 주장이 지지를 못 받거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나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다며 소리를 지르는 건방진 사람을 보게 됩니다만 내가 믿든, 믿지 않든, 만나 보았든, 못 만나 보았든, 분명 부모는 있었습니다. 흔히들 쉽게 말해 사랑이 없다, 있다 합니다만 모두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랑 없이 태어난 사람도 없거니와 사랑 없이 살아남은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평생을 고아원에서 지낸다 하더라도 사랑이 있기에 내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고 형제의 사랑이 있었으며, 더불어 사는 모두의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내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 첫째가 하나님은 창조주요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함인 줄 압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있고 내가 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그리고 비로소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자기 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선과 자기의 의, 나아가서는 자기의 뜻과 존재까지도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에 믿음의 대 선배인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1:21)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그 자체, 그 본질 자체가 곧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성격과 그 본질은 주어진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고 되어져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값을 살고 되어진 바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값으로 산 것이 되었고 피의 값으로 내가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생성되어진(becoming) 내 존재를 봅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를 빌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존재 가치는 양자된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본래적인 것이 아닌 양자된 바의 자기 가치를 지니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나됨의 존재 가치를 내가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아니면 내가 아느냐? 모르느냐?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렇게 수락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알고, 이렇게 받아들이며, 이렇게 믿고 사는 사람과 이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과의 그 거리는 실로 엄청나게 먼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세 가지의 호칭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선택된 자", 또 하나는 "거룩한 자", 그리고 "사랑 받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뿌리입니다. 생의 뿌리요, 존재의 근본이며 우리의 신분증입니다. 우리는 이대로 알고, 이대로 믿으며, 이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선택받은 자"라고 할 때에 그 선택받았다는 말의 뜻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예정론을 몰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믿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사랑한 것입니다. 내가 있기 전에 그가 계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며 살았지만 그는 나를 끈질기게 붙드셨습니다. 주도적으로, 강권적으로 인도하셔서 오늘의 내가 있게 했다는 이 사실이 바로 선택의 교리입니다. 그 시작에 있어서나, 그 성격에 있어서나, 그 운명에 있어서 추호도 내가 주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주도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입니다.

또한 나됨의 자격도 그렇습니다. 이 모두는 그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자가 된 것이지 사랑할 만한 자격이 있어서 사랑 받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참으로 무자격합니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절대적 은혜가 작용해서 오늘이 내가 있다라고 믿는 이것을 선택의 교리라고 합니다. 김씨 성을 가지신 한 장로님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상당히 노력형의 사람이요 자수성가한 분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를 믿고 교회를 봉사하며 이제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속에는 늘 한 가지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흔히들 교만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에 보면 "왜 좀 쓸만한 사람들은 나오지를 않고 이렇게 너절한 사람들만 나왔나!" 해서 못마땅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에 수양겸, 구경 겸해서 한 산상 부흥회를 찾아갔습니다. 이제 가 보았더니 더운 천막 속에 쉰 명이 모여서는 와글거리며, 울고불고,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하면서 통회 자복의 통성기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김장로님이 이것을 보고는 "어쩌다 이런 한심한 사람들만 모였나" 하는 멸시의 마음과 함께 심지어 이런 하잘것없는 인간들이 모이는 장소에 자기가 끼어 있다는 것조차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한 시간만 참석을 하고는 얼른 뛰쳐나와 산 위에 올라가서는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나 혼자 하나님과 좀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바위 위에 앉아 기도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점점 기도의 경지가 깊어지는 가운데 사흘 동안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마지막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눈앞에 환한 빛이 보이면서 저 멀리에는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길래 숨을 죽이고 유심히 보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가까이 와서 알아볼 정도가 되었을 때에 보니까 세상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더랍니다. 게다가 세상에 원 저런 거지도 다 있나? 하고 조금 더 다가온 다음에 보니 이제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진물이 나는게 병신, 불구자이더랍니다. 그것을 보니 어떻게 불쌍한지 원 세상에 저렇게 비참한 거지가 있겠느냐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오기를 "저것이 바로 너다" 하더랍니다. 그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서 자세히 보니 정말 자기의 얼굴입니다. 그 순간부터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 순간부터 흐르는 눈물이, 잠을 자도, 잠을 깨어도, 먹어도, 쉬어도, 길을 가도 계속 흐르는데 한달 동안을 울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비참한 존재이냐?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 참으로 너무나 황송하고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한달 동안을 울고 나서 보니 이제는 아무를 보아도 다 존경스럽습니다. 모두가 다 나보다 훌륭하고 다 귀한 분들이며, 다 거룩한 분들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 장로님은 80여 세를 사시다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가셨습니다. 저는 직접 그 장로님으로부터 같은 이야기인 이 간증을 여러 번 감격해 하시며 전하시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자격한 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이제는 나의 필요, 내가 필요하냐? 안 하느냐?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목적, 나의 쓰여짐도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의 섭리와 그의 경륜에 나의 존재의 필요성이 걸려 있습니다. 또한 나의 가치, 나의 효율도 그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다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제 나는 없어집니다. 따라서 나의 주관도, 나의 판단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고로 그가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택함을 이제야 알고 그에게 감격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음 또 하나의 호칭은 "거룩한 자", "성도"라는 부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룩한 자, 이 성도라고 하는 말은 거룩한 무리라는 뜻의 참으로 귀한 이름입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기독교인의 맨 처음 이름은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 다음은 그리스도인, 또 그 다음은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됩니다. 이는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현대의 교회에 있어서는 이 "성도"라는 말을 쓰기를 꺼려하고 오히려 불편해 합니다. 그 때문에 이 아름다운 말이 점점 사라져갑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피장파장이니까 말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에서부터 욕심 부리는 것, 마음 씀씀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구별될 게 하나도 없고 보니 성도라 부르기도 어색하고 불리움을 받기도 거북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성도랄 게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다르고 생의 의미가 다릅니다. 마지막 종말론적인 운명이 다릅니다. 가는 길이 다르고 오늘을 사는 동안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땅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영원한 것을 추구합니다. 가치관이 다르듯이 행복관도 다릅니다. 가졌고 못 가졌고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총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죄와 세상, 옛 사람과 세속적 가치로부터 구별된 생을 삽니다. 진정 예수를 똑바로 믿었다면 성경 말씀 그대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할 것입니다(1 : 1). 권모 술수와 더러운 말들이 오가는 그 자리에 앉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앉아 있을 수가 없어요. 너무도 숨이 막혀서! 적어도 이 정도가 되어야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같이 협잡하고 같이 권모하며, 같이 쑥덕거리고 돌아간다면 무슨 교인이라고 하겠습니까? 교인이란 깨끗하게 하나님 편으로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요, 단적으로 말하면 산 제물입니다. 살아 있는 제물로 하나님 앞에 깨끗이 구별되어 바쳐진 존재입니다. 그의 가치관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에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거룩하게 구별된 자의 윤리요, 또한 선택받는 자의 윤리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 받는 자"라는 부름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에 사랑 받았다 하는 문제라면 이는 지식이요, 기억이며 하나의 추억이요, 역사나 이야기, 나아가 교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런 옛날 이야기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먼 미래의 이야기를 하자고 들면 이는 하나의 이데올로기(ideology), 신념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앞에 하늘 나라가 있으니 오늘은 괴롭더라도 끝까지 참으라고만 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랑은 현재적이라야 합니다. 여러분! 부부간에 사랑을 고백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이제 만약 서로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마다 "옛날 우리 신혼 여행 갔을 때 참 좋았지!" 하고 그 이야기만 자꾸 하자고 들면 되겠습니까? 그러니 지금에 와서 어쩌라는 이야기입니까? 오늘이 중요한 것인데, 그저 아들, 딸 낳고 그럭저럭 이만큼 살아왔으니 남은 생애도 그렇게 참으며 살아갑시다 할 것이면 이는 비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내가 지금은 부족하지만 조금만 참아 주면 앞으로 풍족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게 해줄 터이니 오늘은 참으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하나의 신념과 이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래에 있을 것이니 오늘은 참으라! 그것도 괴로운 것입니다. 그만큼 속았으면 되었지 더 이상, 또 참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현재적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늙어 쭈글쭈글하게 되었어도, 그래도 당산이 좋다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돈 한 푼 못벌고, 병들었어도 오늘 이대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이것을 가리켜서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사랑하기에 행복하고 그래서 나는 기쁜 것입니다.

현재적으로 사랑 받는 자! 십자가의 그 사랑이 오늘 확증되고 있습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 내게, 소망 가운데 벅찬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한번 보세요. 선택받았습니다. 거룩한 자입니다.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남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 받으므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자식도 바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 받은 마음에서 사랑할 때만이 진정한 사랑이 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수직적인 사랑으로 수평적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긍휼이 여기라!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비하라는 것은 주는 마음이요, 넓은 마음이며, 친절과 큰마음입니다. 받은 것이 너무도 크고 엄청나기 때문에 자연히 이 친절과 이 주는 사랑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온유한 것인데 이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택받은 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낮아지고 낮아집니다. 사랑 받는 자이기에 낮아지고 또한 온유하여 굽힙니다. 더는 고집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니까 온유합니다. 이것은 억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인내란 가장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용서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택받았으니 겸손하고 온유하라! 사랑 받고 있으니 사랑하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거룩한 백성이니 인내하라! 하나님 편에서 인내하고,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라! 용서하되 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 용서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이 모든 것 이에 사랑을 더하라!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용서 못할 죄가 없습니다. 사랑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은 죤 뉴톤(J.Newton)이라는 목사님이 작사한 것입니다. 이 죤 뉴톤이라고 하는 목사님은 1725년에 태어나 82세에 세상을 떠난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한 때는 이교도였고 뿐만 아니라 탕아였습니다. 그는 극악한 노예 사냥꾼이었고 대표적인 악한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받고는 남은 생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그 감격에 살아갔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깁니다. 이제 내가 하늘 나라에 가게 되겠는데 거기에 가면 세 가지로 놀라게 될 것이다. 첫째는 전혀 하늘 나라에 올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랄 것이고, 두 번째는 꼭 와야 될 것 같은 사람인데 거기에서 못 만나게 되어 놀랄 것이며, 그리고 세 번째는 나 자신도 나 같은 죄인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그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를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 가지만 구하라 하시고 그것을 주시겠다고 하시면 나는 그 한 가지도 하나님께서 택해서 주세요"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좋은 것을 잘 알아서 주실 터이니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하나의 선택도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 받은 바 은총을 감격하여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는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

 

여러분! 선택받은 자, 그에게는 감사와 찬송이 있을 뿐입니다.

원망도, 미움도, 원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절망도 없습니다. 이제는 오직 그 감사와 그 찬양으로 모든 시험과 죄악을 이기며 날마다 승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은총, 이 기쁨, 이 감격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여!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깨닫기조차 못하는 저들에게 끊임없이 사랑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사 그 사랑의 깊이를 알게 하시고, 이 엄청난 선택의 주권적인 사랑 가운데 나타난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깨달아 감사와 감격으로 살게 하시고, 나날이 더 깊어지는 그 은혜와 그 감사 속에서 모든 것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선택받은 자의 윤리(골로새서 3 : 12-17)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가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일생을 두고 공부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무엇이냐? 도대체 "" 라고 하는 이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참으로 알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하고 또한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이 오십, 육십, 칠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의 나됨을 깨닫고는 좀더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하고 후회하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더러는 천상 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격으로 나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독존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이란 역시 피조물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과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내가 있다는 생각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 두 생각의 차이와 그 거리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의미와 운명이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부모님이 계시고 내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있고 부모님이 계신 것입니까? 간혹 어떤 때에 보면 자기 주장이 지지를 못 받거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나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다며 소리를 지르는 건방진 사람을 보게 됩니다만 내가 믿든, 믿지 않든, 만나 보았든, 못 만나 보았든, 분명 부모는 있었습니다. 흔히들 쉽게 말해 사랑이 없다, 있다 합니다만 모두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랑 없이 태어난 사람도 없거니와 사랑 없이 살아남은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평생을 고아원에서 지낸다 하더라도 사랑이 있기에 내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고 형제의 사랑이 있었으며, 더불어 사는 모두의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내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 첫째가 하나님은 창조주요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함인 줄 압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있고 내가 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그리고 비로소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자기 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선과 자기의 의, 나아가서는 자기의 뜻과 존재까지도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에 믿음의 대 선배인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1:21)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그 자체, 그 본질 자체가 곧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성격과 그 본질은 주어진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고 되어져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값을 살고 되어진 바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값으로 산 것이 되었고 피의 값으로 내가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생성되어진(becoming) 내 존재를 봅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를 빌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존재 가치는 양자된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본래적인 것이 아닌 양자된 바의 자기 가치를 지니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나됨의 존재 가치를 내가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아니면 내가 아느냐? 모르느냐?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렇게 수락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알고, 이렇게 받아들이며, 이렇게 믿고 사는 사람과 이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과의 그 거리는 실로 엄청나게 먼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세 가지의 호칭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선택된 자", 또 하나는 "거룩한 자", 그리고 "사랑 받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뿌리입니다. 생의 뿌리요, 존재의 근본이며 우리의 신분증입니다. 우리는 이대로 알고, 이대로 믿으며, 이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선택받은 자"라고 할 때에 그 선택받았다는 말의 뜻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예정론을 몰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믿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사랑한 것입니다. 내가 있기 전에 그가 계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며 살았지만 그는 나를 끈질기게 붙드셨습니다. 주도적으로, 강권적으로 인도하셔서 오늘의 내가 있게 했다는 이 사실이 바로 선택의 교리입니다. 그 시작에 있어서나, 그 성격에 있어서나, 그 운명에 있어서 추호도 내가 주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주도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입니다.

또한 나됨의 자격도 그렇습니다. 이 모두는 그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자가 된 것이지 사랑할 만한 자격이 있어서 사랑 받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참으로 무자격합니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절대적 은혜가 작용해서 오늘이 내가 있다라고 믿는 이것을 선택의 교리라고 합니다. 김씨 성을 가지신 한 장로님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상당히 노력형의 사람이요 자수성가한 분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를 믿고 교회를 봉사하며 이제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속에는 늘 한 가지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흔히들 교만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에 보면 "왜 좀 쓸만한 사람들은 나오지를 않고 이렇게 너절한 사람들만 나왔나!" 해서 못마땅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에 수양겸, 구경 겸해서 한 산상 부흥회를 찾아갔습니다. 이제 가 보았더니 더운 천막 속에 쉰 명이 모여서는 와글거리며, 울고불고,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하면서 통회 자복의 통성기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김장로님이 이것을 보고는 "어쩌다 이런 한심한 사람들만 모였나" 하는 멸시의 마음과 함께 심지어 이런 하잘것없는 인간들이 모이는 장소에 자기가 끼어 있다는 것조차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한 시간만 참석을 하고는 얼른 뛰쳐나와 산 위에 올라가서는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나 혼자 하나님과 좀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바위 위에 앉아 기도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점점 기도의 경지가 깊어지는 가운데 사흘 동안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마지막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눈앞에 환한 빛이 보이면서 저 멀리에는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길래 숨을 죽이고 유심히 보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가까이 와서 알아볼 정도가 되었을 때에 보니까 세상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더랍니다. 게다가 세상에 원 저런 거지도 다 있나? 하고 조금 더 다가온 다음에 보니 이제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진물이 나는게 병신, 불구자이더랍니다. 그것을 보니 어떻게 불쌍한지 원 세상에 저렇게 비참한 거지가 있겠느냐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오기를 "저것이 바로 너다" 하더랍니다. 그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서 자세히 보니 정말 자기의 얼굴입니다. 그 순간부터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 순간부터 흐르는 눈물이, 잠을 자도, 잠을 깨어도, 먹어도, 쉬어도, 길을 가도 계속 흐르는데 한달 동안을 울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비참한 존재이냐?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 참으로 너무나 황송하고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한달 동안을 울고 나서 보니 이제는 아무를 보아도 다 존경스럽습니다. 모두가 다 나보다 훌륭하고 다 귀한 분들이며, 다 거룩한 분들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 장로님은 80여 세를 사시다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가셨습니다. 저는 직접 그 장로님으로부터 같은 이야기인 이 간증을 여러 번 감격해 하시며 전하시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자격한 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이제는 나의 필요, 내가 필요하냐? 안 하느냐?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목적, 나의 쓰여짐도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의 섭리와 그의 경륜에 나의 존재의 필요성이 걸려 있습니다. 또한 나의 가치, 나의 효율도 그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다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제 나는 없어집니다. 따라서 나의 주관도, 나의 판단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고로 그가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택함을 이제야 알고 그에게 감격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음 또 하나의 호칭은 "거룩한 자", "성도"라는 부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룩한 자, 이 성도라고 하는 말은 거룩한 무리라는 뜻의 참으로 귀한 이름입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기독교인의 맨 처음 이름은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 다음은 그리스도인, 또 그 다음은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됩니다. 이는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현대의 교회에 있어서는 이 "성도"라는 말을 쓰기를 꺼려하고 오히려 불편해 합니다. 그 때문에 이 아름다운 말이 점점 사라져갑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피장파장이니까 말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에서부터 욕심 부리는 것, 마음 씀씀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구별될 게 하나도 없고 보니 성도라 부르기도 어색하고 불리움을 받기도 거북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성도랄 게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다르고 생의 의미가 다릅니다. 마지막 종말론적인 운명이 다릅니다. 가는 길이 다르고 오늘을 사는 동안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땅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영원한 것을 추구합니다. 가치관이 다르듯이 행복관도 다릅니다. 가졌고 못 가졌고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총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죄와 세상, 옛 사람과 세속적 가치로부터 구별된 생을 삽니다. 진정 예수를 똑바로 믿었다면 성경 말씀 그대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할 것입니다(1 : 1). 권모 술수와 더러운 말들이 오가는 그 자리에 앉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앉아 있을 수가 없어요. 너무도 숨이 막혀서! 적어도 이 정도가 되어야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같이 협잡하고 같이 권모하며, 같이 쑥덕거리고 돌아간다면 무슨 교인이라고 하겠습니까? 교인이란 깨끗하게 하나님 편으로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요, 단적으로 말하면 산 제물입니다. 살아 있는 제물로 하나님 앞에 깨끗이 구별되어 바쳐진 존재입니다. 그의 가치관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에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거룩하게 구별된 자의 윤리요, 또한 선택받는 자의 윤리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 받는 자"라는 부름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에 사랑 받았다 하는 문제라면 이는 지식이요, 기억이며 하나의 추억이요, 역사나 이야기, 나아가 교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런 옛날 이야기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먼 미래의 이야기를 하자고 들면 이는 하나의 이데올로기(ideology), 신념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앞에 하늘 나라가 있으니 오늘은 괴롭더라도 끝까지 참으라고만 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랑은 현재적이라야 합니다. 여러분! 부부간에 사랑을 고백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이제 만약 서로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마다 "옛날 우리 신혼 여행 갔을 때 참 좋았지!" 하고 그 이야기만 자꾸 하자고 들면 되겠습니까? 그러니 지금에 와서 어쩌라는 이야기입니까? 오늘이 중요한 것인데, 그저 아들, 딸 낳고 그럭저럭 이만큼 살아왔으니 남은 생애도 그렇게 참으며 살아갑시다 할 것이면 이는 비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내가 지금은 부족하지만 조금만 참아 주면 앞으로 풍족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게 해줄 터이니 오늘은 참으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하나의 신념과 이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래에 있을 것이니 오늘은 참으라! 그것도 괴로운 것입니다. 그만큼 속았으면 되었지 더 이상, 또 참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현재적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늙어 쭈글쭈글하게 되었어도, 그래도 당산이 좋다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돈 한 푼 못벌고, 병들었어도 오늘 이대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이것을 가리켜서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사랑하기에 행복하고 그래서 나는 기쁜 것입니다.

현재적으로 사랑 받는 자! 십자가의 그 사랑이 오늘 확증되고 있습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 내게, 소망 가운데 벅찬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한번 보세요. 선택받았습니다. 거룩한 자입니다.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남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 받으므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자식도 바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 받은 마음에서 사랑할 때만이 진정한 사랑이 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수직적인 사랑으로 수평적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긍휼이 여기라!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비하라는 것은 주는 마음이요, 넓은 마음이며, 친절과 큰마음입니다. 받은 것이 너무도 크고 엄청나기 때문에 자연히 이 친절과 이 주는 사랑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온유한 것인데 이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택받은 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낮아지고 낮아집니다. 사랑 받는 자이기에 낮아지고 또한 온유하여 굽힙니다. 더는 고집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니까 온유합니다. 이것은 억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인내란 가장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용서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택받았으니 겸손하고 온유하라! 사랑 받고 있으니 사랑하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거룩한 백성이니 인내하라! 하나님 편에서 인내하고,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라! 용서하되 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 용서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이 모든 것 이에 사랑을 더하라!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용서 못할 죄가 없습니다. 사랑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은 죤 뉴톤(J.Newton)이라는 목사님이 작사한 것입니다. 이 죤 뉴톤이라고 하는 목사님은 1725년에 태어나 82세에 세상을 떠난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한 때는 이교도였고 뿐만 아니라 탕아였습니다. 그는 극악한 노예 사냥꾼이었고 대표적인 악한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받고는 남은 생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그 감격에 살아갔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깁니다. 이제 내가 하늘 나라에 가게 되겠는데 거기에 가면 세 가지로 놀라게 될 것이다. 첫째는 전혀 하늘 나라에 올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랄 것이고, 두 번째는 꼭 와야 될 것 같은 사람인데 거기에서 못 만나게 되어 놀랄 것이며, 그리고 세 번째는 나 자신도 나 같은 죄인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그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를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 가지만 구하라 하시고 그것을 주시겠다고 하시면 나는 그 한 가지도 하나님께서 택해서 주세요"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좋은 것을 잘 알아서 주실 터이니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하나의 선택도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 받은 바 은총을 감격하여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는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

 

여러분! 선택받은 자, 그에게는 감사와 찬송이 있을 뿐입니다.

원망도, 미움도, 원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절망도 없습니다. 이제는 오직 그 감사와 그 찬양으로 모든 시험과 죄악을 이기며 날마다 승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은총, 이 기쁨, 이 감격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여!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깨닫기조차 못하는 저들에게 끊임없이 사랑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사 그 사랑의 깊이를 알게 하시고, 이 엄청난 선택의 주권적인 사랑 가운데 나타난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깨달아 감사와 감격으로 살게 하시고, 나날이 더 깊어지는 그 은혜와 그 감사 속에서 모든 것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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