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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한 나그네의 윤리(베드로전서 2장 11절~12절)

by 【고동엽】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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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그네의 윤리(베드로전서 21112)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다음 세 가지의 문제를 생각할 줄 압니다.

첫째는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의 나됨의 현주소, 나의 나됨의 본질을 먼저 생각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나이를 아는 것입니다. 나이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9012절에 보면 모세가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도 드립니다.

세상에 제 나이를 셀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 나이를 바로 아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젊은이가 늙은 척하는 것도 재미없는 일이고, 나이든 사람이 젊은 척하는 것도 주책입니다. 이래서 자신의 나이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생애의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시 말해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내가 다 가질 수 있습니까? 내가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해서 백 가지 일을 다 해낼 수 있는 것입니까? 내가 공부 좀 해서 무엇을 좀 알았다 하여 공부만 하면 무엇이건 다 알 수 있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내게 주어진 한계를 일찌감치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남이 한다고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남이 가졌다고 나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소유, 내게 주어진 지식, 내게 주어진 능력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습니다. 이 점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셋째는 본래성과 궁극성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현재에 삽니다. 그런데도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나는 본래 어떤 사람이었나, 인간이란 본래 무엇인가 ---- 이 본래성 곧 뿌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에는 어떻게 되는 일인가 곧 마지막도 알아야 합니다. 10년 후 20년 후, 아니 100년 후에는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내 운명은 어떻게 귀착하는가, 종착점(final goa1) 이 어디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평범하면서도 쉽사리 흘려보내서는 안될 심각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하고 간단 명료하게 비유해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와 행인이다 ---- 이 나그네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파로이코스'입니다.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 낮선 사람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시민권은 따로 있으면서 이민 와서 사는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한편 행인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파레피데모스'라고 하는 좀 긴말인데 '지나가는 길손'이라는 뜻입니다. 스쳐 가는 사람,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 곧 과객(過客)을 말합니다.

한 과객이 어느 동네를 지나가다가 날이 저물어 그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와집을 찾아갔습니다. "이리 오너라" 하고 문을 두드려 주인을 만났습니다. 하룻밤 유하기를 청했더니 주인이 거절합니다. "우리집은 여관이 아니오. 저기 주막집이 하나 있으니 거기 가서 쉬어 가시오."

그런데 이 과객은 제법 철학적인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한마디 묻습니다. "당신 네는 이 집에 몇 년이나 살았소?" "아주 오래요. 우리 집은 대대로 여기서 16대나 살아왔소이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그전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소?" "돌아가셨지요." "…… 그렇다면 어차피 누구나 잠깐 머물렀다 가는 집이구먼. 그러니 여관이나 진배없구료. 하룻밤을 묵든 여러 밤을 묵든 묵었다 떠나기는 마찬가지 아니요? 나도 하룻밤 묵어 갑시다." 이래서 주인은 속절없이 과객을 재워 주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내 집이 곧 여관이요, 내가 바로 과객입니다.

내 집은 내가 잠깐 머물다 가는 여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마치 영원하게라도 살 것처럼 내 집에 집착들을 합니다. 저는 제가 못살아서인지는 몰라도 으리으리한 집들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사람은 날이 갈수록 쭈그러드는 고물인데 집은 점점 더 큰집이요 새 집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집도 별것 아니고 재물도 별것 아닙니다. 분수없이 욕심부릴 것이 못됩니다. 적당하게 해서 살 일이지 넘치게 챙길 것은 못됩니다. 너무 야단스럽게 그러지들 맙시다. 가만히 보면 부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보다도 더 열심히 저축을 합니다. 가졌으면서 더 가지려고 합니다. 돈 모으는 재미에 몰두하다보니 잇속을 밝히게 되고 인색해져서 끝내는 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대체로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도 오히려 구제를 더 잘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마는 돈 많은 사람은 푼돈만 내놓아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질은 내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잠깐동안만 내 손에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지나가는 길손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명예도 물질도 다 지나가고 맙니다. 요사이는 사람이 바뀌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어제 권좌에 앉았다가 오늘 쫓겨나는 것을 봅니다. 올라앉았다고 축하할 것도 못되고 떨어졌다고 슬퍼할 것도 아닙니다. 다 지나가고 마는 일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또다시 학생들의 입학시험 때가 다가옵니다.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합격을 하면 세상을 만난 듯이 야단스럽고 낙방을 하면 상갓집 같아질 것 없습니다. 좀은 초연하게 살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요 지나가는 행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별것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것은 착각이요 망상입니다.

기독교인은 이중적인 의미로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이 땅 사람이 아니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삽니다. 남들은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삽니다.

남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남들이면 슬퍼할 일에도 기뻐할 줄을 압니다. 회개하고 세상 향락을 부정하며 삽니다. 이 세상을 별로 사랑하지 않고 삽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낯선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궁극이, 최종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더라고 주님께서 친히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살면서 부득이 낯선 자로, 이상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사람을 구별짓습니다. 신자와 비신자는 가치관이 다르고 궁극적 운명이 다릅니다.

요사이 보면 부부간에 이혼이 날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종교 문제로 이혼하는 경우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유대인과 프로테스탄트가 결혼을 하면 99퍼센트가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크리스찬은 이 지상을 영원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멀리 하늘나라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임시적인 삶을 사는 것이며, 나그네로 순례자로 살아갑니다. 여기, 한 나그네의 윤리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그 윤리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입니다. 제어한다는 것은 다스린다, 컨트롤한다는 말입니다.

문맥으로 보아 육체의 정욕이란 이 세상에 끌리는 마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519, 20절에서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 이것들이 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은 이런 것들을 배격하고 삽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다시 말하면 육체 주도적 인간과 성령 주도적 인간은 다릅니다. 같은 세상에서 같이 먹고 같이 살고 같이 직장 생활을 합니다마는 주도력이 다릅니다. 하나는 성령이 주도력이 되고 말씀이 주도력이 되나, 하나는 먹고 마시는 것, 육체적인 것, 세상적인 향락에 주도되어 삽니다. 하나는 시간만 있으면 주를 찬양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는 시간만 있으면 어떻게라도 술집에 갈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이 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면서 한데 모여 있을 뿐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함은 임시적이요 가변적이요 순간적인 것들을 버리라 함이요, 과거에 속한 마음과 가식적인 것과 이 생의 자랑 따위를 완전히 제어하라 함입니다. 다 시시하고 별것 아닙니다.

누군가가 어느 책에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지만 시시하지 않은 걱정이 어디 있더냐?' 그렇습니다. 곧 죽을 인생임을 생각한다면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세상 사랑하고 싶은 마음, 육체에 연연하는 마음, 이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 ---- 다 쓸데없는 것이니 제어하라고 말씀합니다. 나그네가 주인으로 행세하면 볼품이 없습니다. 곧 떠날 사람이 오래 있을 사람인 양 행세하는 것처럼 잘못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선행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임시적이기 때문에 이 생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두 가지가 원문에 나옵니다. '아가소스''칼로스'가 그것입니다.

아가소스는 단순한 선을 뜻하고,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칼로스''사랑 플러스 선'을 뜻합니다. 일반적인 선이 아니라 아주 아름다운 것, 매력적인 것, 사랑스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적극적인, 행동적인 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라는 것은 사랑스러운 나그네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간 맥스웰이라고 하는 분은 그곳 언어를 습득하는 데에 대단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별나게도 인도는 마을마다 언어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마을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이 언어를 습득해야만 됩니다. 한번은 어느 마을에 들어가 힌두교인 한 사람을 붙들고 말 좀 가르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내게 와서 말을 가르쳐주시오." 예수를 믿든 안 믿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말만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힌두교 인이 거절을 하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당신하고 함께 있어 그리스도인으로 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싫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이 사람하고 만나면 누구나 기독교인이 됩니다. 이 사람하고 말을 하면 누구나 이 사람과 같아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와 20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나 닮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이렇게 되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기독교인으로 어디 가서 머물든지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라고, 나와 같아지려고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저런 사람이 교인이라니, 나는 그런 종교 안 믿겠다" 라고 하는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면 참으로 볼품없는 기독교인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나그네 인생을 매력 있게 삽시다. 선하게 아름답게 삽시다. 잠깐인 인생이기에 더욱 그래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이 얼마 안 되는 시간을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하고 가장 선하게 보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을 왜 미워하며 살겠습니까? 화평하고 살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을 왜 원수 짓고 살겠습니까? 남은 시간이 짧습니다. 이제는 있는 정성 다해서 귀하게 아름답게 매력 있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라. 그리고 비방들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모로 비방 받을 것입니다 마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살아야 합니다. 옛날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별의별 비난을 다 받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입니다 마는 로마인들이 기독교인을 박해할 때에 노예라도 형제로 대우하는 기독교인들을 보고 부도덕하다고 비난했습니다. 노예는 노예이고 주인은 주인인데 노예와 주인을 같이 취급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곡해한 것입니다. 자기네가 섬기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기독교인은 무신론자다" 라고도 비난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기독교인을 식인종이라고까지 매도했습니다.

성찬식 할 때에 '이것은 내 피요, 내 살이요' 하니까 이상한 짓도 다 하는구나 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오해란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오해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저는 며칠 전에 별난 오해를 다 받아보았습니다. 어디를 가다가 잠깐 자동차를 세워놓고 쉬는데, 문득 땅바닥을 보니 신문지로 둘둘 싼 무엇이 버려져 있어요. 얼른 주워서 쓰레기통에 갖다버렸는데 웬걸,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남의 점심밥을 쓰레기통에 넣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저는 꼼짝없이 점심 값을 물어주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선한 일이라고 선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행하는 선한 일이 오해받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궁극에 가면 아름다운 일이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그 선한 일이 결과를 아름답게 꽃피울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해는 각오하되 선은 그치지 맙시다. 비난을 받아도 선해야 하고 미움을 받아도 진실해야 합니다.

옛 프러시아제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일삼아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모였다 하면 예수를 비난하는 것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예수를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듣고 있던 장군 하나가 듣다못해 대왕에게 말했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저는 전쟁에서 폐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전후 38번이나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더는 폐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비웃으시는 그 그리스도 앞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나이 많고, 이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비난하시는 예수를 곧 만나야 하겠기에 저는 지금 이 직위를 하직합니다." 그러고는 물러섰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비로소 굴복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떠나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내가 떠난 세상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인상을 심어놓고 떠나겠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버스가 굴러서 승객들이 다 죽게 되었는데, 역시 죽어가던 청년 하나가 호소합니다. "내 피는 0형입니다. 내 피를 뽑아서 다른 사람에게 넣어주십시요." "당신도 다 죽어 가는데 어떻게 피를 뽑아요?" 하고 의사가 나무라니까 청년은 "저는 불량배였습니다. 남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늘 좋은 일 한번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부탁이니 마지막 피 몇 방울이라도 남 돕는 데 써주십시오."

내가 세상 떠나기 전에, 그 마지막 순간에라도 선해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윤리입니다. 세상은 떠나야 하겠고, 주님 앞에 가야 하겠습니다. 나의 나그네길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들 모두 모였습니다마는 다음 이 시간에는 못 나올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시간시간, 하루하루, 우리는 종말론적으로 나그네 됨을 재인식하고 살 것입니다.

썩어질 육체만을 더는 위하지 말 것입니다. 어차피 떠나야 할 세상에 너무 연연하지 말 것입니다. 다 내 것이 아닙니다. 타향살이를 착하게 선하게 아름답게 해서,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한 나그네의 윤리(베드로전서 21112)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다음 세 가지의 문제를 생각할 줄 압니다.

첫째는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의 나됨의 현주소, 나의 나됨의 본질을 먼저 생각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나이를 아는 것입니다. 나이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9012절에 보면 모세가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도 드립니다.

세상에 제 나이를 셀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 나이를 바로 아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젊은이가 늙은 척하는 것도 재미없는 일이고, 나이든 사람이 젊은 척하는 것도 주책입니다. 이래서 자신의 나이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생애의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시 말해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내가 다 가질 수 있습니까? 내가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해서 백 가지 일을 다 해낼 수 있는 것입니까? 내가 공부 좀 해서 무엇을 좀 알았다 하여 공부만 하면 무엇이건 다 알 수 있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내게 주어진 한계를 일찌감치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남이 한다고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남이 가졌다고 나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소유, 내게 주어진 지식, 내게 주어진 능력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습니다. 이 점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셋째는 본래성과 궁극성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현재에 삽니다. 그런데도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나는 본래 어떤 사람이었나, 인간이란 본래 무엇인가 ---- 이 본래성 곧 뿌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에는 어떻게 되는 일인가 곧 마지막도 알아야 합니다. 10년 후 20년 후, 아니 100년 후에는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내 운명은 어떻게 귀착하는가, 종착점(final goa1) 이 어디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평범하면서도 쉽사리 흘려보내서는 안될 심각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하고 간단 명료하게 비유해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와 행인이다 ---- 이 나그네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파로이코스'입니다.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 낮선 사람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시민권은 따로 있으면서 이민 와서 사는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한편 행인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파레피데모스'라고 하는 좀 긴말인데 '지나가는 길손'이라는 뜻입니다. 스쳐 가는 사람,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 곧 과객(過客)을 말합니다.

한 과객이 어느 동네를 지나가다가 날이 저물어 그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와집을 찾아갔습니다. "이리 오너라" 하고 문을 두드려 주인을 만났습니다. 하룻밤 유하기를 청했더니 주인이 거절합니다. "우리집은 여관이 아니오. 저기 주막집이 하나 있으니 거기 가서 쉬어 가시오."

그런데 이 과객은 제법 철학적인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한마디 묻습니다. "당신 네는 이 집에 몇 년이나 살았소?" "아주 오래요. 우리 집은 대대로 여기서 16대나 살아왔소이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그전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소?" "돌아가셨지요." "…… 그렇다면 어차피 누구나 잠깐 머물렀다 가는 집이구먼. 그러니 여관이나 진배없구료. 하룻밤을 묵든 여러 밤을 묵든 묵었다 떠나기는 마찬가지 아니요? 나도 하룻밤 묵어 갑시다." 이래서 주인은 속절없이 과객을 재워 주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내 집이 곧 여관이요, 내가 바로 과객입니다.

내 집은 내가 잠깐 머물다 가는 여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마치 영원하게라도 살 것처럼 내 집에 집착들을 합니다. 저는 제가 못살아서인지는 몰라도 으리으리한 집들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사람은 날이 갈수록 쭈그러드는 고물인데 집은 점점 더 큰집이요 새 집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집도 별것 아니고 재물도 별것 아닙니다. 분수없이 욕심부릴 것이 못됩니다. 적당하게 해서 살 일이지 넘치게 챙길 것은 못됩니다. 너무 야단스럽게 그러지들 맙시다. 가만히 보면 부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보다도 더 열심히 저축을 합니다. 가졌으면서 더 가지려고 합니다. 돈 모으는 재미에 몰두하다보니 잇속을 밝히게 되고 인색해져서 끝내는 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대체로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도 오히려 구제를 더 잘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마는 돈 많은 사람은 푼돈만 내놓아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질은 내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잠깐동안만 내 손에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지나가는 길손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명예도 물질도 다 지나가고 맙니다. 요사이는 사람이 바뀌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어제 권좌에 앉았다가 오늘 쫓겨나는 것을 봅니다. 올라앉았다고 축하할 것도 못되고 떨어졌다고 슬퍼할 것도 아닙니다. 다 지나가고 마는 일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또다시 학생들의 입학시험 때가 다가옵니다.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합격을 하면 세상을 만난 듯이 야단스럽고 낙방을 하면 상갓집 같아질 것 없습니다. 좀은 초연하게 살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요 지나가는 행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별것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것은 착각이요 망상입니다.

기독교인은 이중적인 의미로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이 땅 사람이 아니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삽니다. 남들은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삽니다.

남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남들이면 슬퍼할 일에도 기뻐할 줄을 압니다. 회개하고 세상 향락을 부정하며 삽니다. 이 세상을 별로 사랑하지 않고 삽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낯선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궁극이, 최종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더라고 주님께서 친히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살면서 부득이 낯선 자로, 이상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사람을 구별짓습니다. 신자와 비신자는 가치관이 다르고 궁극적 운명이 다릅니다.

요사이 보면 부부간에 이혼이 날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종교 문제로 이혼하는 경우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유대인과 프로테스탄트가 결혼을 하면 99퍼센트가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크리스찬은 이 지상을 영원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멀리 하늘나라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임시적인 삶을 사는 것이며, 나그네로 순례자로 살아갑니다. 여기, 한 나그네의 윤리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그 윤리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입니다. 제어한다는 것은 다스린다, 컨트롤한다는 말입니다.

문맥으로 보아 육체의 정욕이란 이 세상에 끌리는 마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519, 20절에서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 이것들이 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은 이런 것들을 배격하고 삽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다시 말하면 육체 주도적 인간과 성령 주도적 인간은 다릅니다. 같은 세상에서 같이 먹고 같이 살고 같이 직장 생활을 합니다마는 주도력이 다릅니다. 하나는 성령이 주도력이 되고 말씀이 주도력이 되나, 하나는 먹고 마시는 것, 육체적인 것, 세상적인 향락에 주도되어 삽니다. 하나는 시간만 있으면 주를 찬양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는 시간만 있으면 어떻게라도 술집에 갈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이 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면서 한데 모여 있을 뿐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함은 임시적이요 가변적이요 순간적인 것들을 버리라 함이요, 과거에 속한 마음과 가식적인 것과 이 생의 자랑 따위를 완전히 제어하라 함입니다. 다 시시하고 별것 아닙니다.

누군가가 어느 책에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지만 시시하지 않은 걱정이 어디 있더냐?' 그렇습니다. 곧 죽을 인생임을 생각한다면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세상 사랑하고 싶은 마음, 육체에 연연하는 마음, 이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 ---- 다 쓸데없는 것이니 제어하라고 말씀합니다. 나그네가 주인으로 행세하면 볼품이 없습니다. 곧 떠날 사람이 오래 있을 사람인 양 행세하는 것처럼 잘못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선행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임시적이기 때문에 이 생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두 가지가 원문에 나옵니다. '아가소스''칼로스'가 그것입니다.

아가소스는 단순한 선을 뜻하고,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칼로스''사랑 플러스 선'을 뜻합니다. 일반적인 선이 아니라 아주 아름다운 것, 매력적인 것, 사랑스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적극적인, 행동적인 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라는 것은 사랑스러운 나그네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간 맥스웰이라고 하는 분은 그곳 언어를 습득하는 데에 대단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별나게도 인도는 마을마다 언어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마을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이 언어를 습득해야만 됩니다. 한번은 어느 마을에 들어가 힌두교인 한 사람을 붙들고 말 좀 가르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내게 와서 말을 가르쳐주시오." 예수를 믿든 안 믿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말만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힌두교 인이 거절을 하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당신하고 함께 있어 그리스도인으로 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싫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이 사람하고 만나면 누구나 기독교인이 됩니다. 이 사람하고 말을 하면 누구나 이 사람과 같아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와 20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나 닮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이렇게 되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기독교인으로 어디 가서 머물든지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라고, 나와 같아지려고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저런 사람이 교인이라니, 나는 그런 종교 안 믿겠다" 라고 하는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면 참으로 볼품없는 기독교인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나그네 인생을 매력 있게 삽시다. 선하게 아름답게 삽시다. 잠깐인 인생이기에 더욱 그래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이 얼마 안 되는 시간을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하고 가장 선하게 보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을 왜 미워하며 살겠습니까? 화평하고 살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을 왜 원수 짓고 살겠습니까? 남은 시간이 짧습니다. 이제는 있는 정성 다해서 귀하게 아름답게 매력 있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라. 그리고 비방들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모로 비방 받을 것입니다 마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살아야 합니다. 옛날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별의별 비난을 다 받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입니다 마는 로마인들이 기독교인을 박해할 때에 노예라도 형제로 대우하는 기독교인들을 보고 부도덕하다고 비난했습니다. 노예는 노예이고 주인은 주인인데 노예와 주인을 같이 취급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곡해한 것입니다. 자기네가 섬기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기독교인은 무신론자다" 라고도 비난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기독교인을 식인종이라고까지 매도했습니다.

성찬식 할 때에 '이것은 내 피요, 내 살이요' 하니까 이상한 짓도 다 하는구나 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오해란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오해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저는 며칠 전에 별난 오해를 다 받아보았습니다. 어디를 가다가 잠깐 자동차를 세워놓고 쉬는데, 문득 땅바닥을 보니 신문지로 둘둘 싼 무엇이 버려져 있어요. 얼른 주워서 쓰레기통에 갖다버렸는데 웬걸,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남의 점심밥을 쓰레기통에 넣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저는 꼼짝없이 점심 값을 물어주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선한 일이라고 선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행하는 선한 일이 오해받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궁극에 가면 아름다운 일이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그 선한 일이 결과를 아름답게 꽃피울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해는 각오하되 선은 그치지 맙시다. 비난을 받아도 선해야 하고 미움을 받아도 진실해야 합니다.

옛 프러시아제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일삼아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모였다 하면 예수를 비난하는 것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예수를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듣고 있던 장군 하나가 듣다못해 대왕에게 말했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저는 전쟁에서 폐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전후 38번이나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더는 폐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비웃으시는 그 그리스도 앞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나이 많고, 이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비난하시는 예수를 곧 만나야 하겠기에 저는 지금 이 직위를 하직합니다." 그러고는 물러섰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비로소 굴복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떠나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내가 떠난 세상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인상을 심어놓고 떠나겠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버스가 굴러서 승객들이 다 죽게 되었는데, 역시 죽어가던 청년 하나가 호소합니다. "내 피는 0형입니다. 내 피를 뽑아서 다른 사람에게 넣어주십시요." "당신도 다 죽어 가는데 어떻게 피를 뽑아요?" 하고 의사가 나무라니까 청년은 "저는 불량배였습니다. 남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늘 좋은 일 한번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부탁이니 마지막 피 몇 방울이라도 남 돕는 데 써주십시오."

내가 세상 떠나기 전에, 그 마지막 순간에라도 선해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윤리입니다. 세상은 떠나야 하겠고, 주님 앞에 가야 하겠습니다. 나의 나그네길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들 모두 모였습니다마는 다음 이 시간에는 못 나올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시간시간, 하루하루, 우리는 종말론적으로 나그네 됨을 재인식하고 살 것입니다.

썩어질 육체만을 더는 위하지 말 것입니다. 어차피 떠나야 할 세상에 너무 연연하지 말 것입니다. 다 내 것이 아닙니다. 타향살이를 착하게 선하게 아름답게 해서,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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