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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와 믿을 수 있는 자(창세기 24장 1절~7절)

by 【고동엽】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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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와 믿을 수 있는 자(창세기 2417)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조그마한 배 한 척을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나서 배는 침몰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의 제자들은 평생을 갈릴리 바다에서 산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능히 이 풍랑을 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조용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겁에 질려 쩔쩔매면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들이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잠을 깨시더니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아무리 생각해도 귀한 말씀입니다.

참 평안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평안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고요한 바다입니까 능숙한 항해술입니까? 배가 좋아야 됩니까 아니면 기술이 좋아야 됩니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언제든 어느 때든 믿음이 있는 그곳에 진정한 고요함과 평안이 있습니다.

현대의 고민은 불확실성과 불안과 불신에 근거한다고 합니다.

믿지 못해 괴롭습니다. 배우기도 하고 일하기도 하고 벌기도 하고 모으기도 하고 건설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을 상실했습니다. 믿음을 잃었습니다. 믿음은 뿌리와 같고 믿음은 토대와 같습니다. 토대가 흔들리면 고층건물일수록 더 요란하게 무너집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을 수 없다면 다 끝난 것입니다. 우리 한국 청년들이 무슨 말끝에 으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 믿어도 되나요?" 미국 아이들도 같이 이야기해보니까 버릇처럼 "빌리브 미(Believe me.)" 합니다. 세상에 믿어달라고 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믿어줘야 믿는 것이지 믿어달란다고 믿게 됩니까?

믿으면 행복합니다. 전적으로 믿으면 전적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믿을 수 있을 때에, 믿어줄 때에, 내가 믿고 저가 나를 믿을 때에, 다시 말하면 진실한 믿음과 믿음의 만남이 있을 때, 거기에 행복의 극치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고 나 자신을 믿는 믿음이 있으며, 이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로 통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을 때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믿고, 내가 하나님을 믿고 나 자신을 믿을 때에야 이웃을 내 형제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교관 한 사람이 사우디로 중동으로 아프리카로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면서 외교를 하는데,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시인하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부득이 '북한은 나쁘고 남한은 좋다' 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어디 믿어줘야지요. 여러모로 궁리하다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 북한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을 안 믿어요? 교회가 없다구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 믿을 수 없지요" 하더랍니다.

과연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도 안 믿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까짓 종이쪽지에 두 나라가 싸인 한번 했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 종이쪽은 휴지조각이나 진배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그 보호와 그 긍휼을 믿을 때에라야, 그 바탕 위에서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유출되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의 기초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때에 나 자신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을 때에 진실할 수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믿을 때에 이 신앙에 근거하여 용기를 얻게 됩니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 둘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과 축복을 성취하셔서 마침내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들을 주셨다면 자부도 주시겠지요. 그것도 믿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 고향을 떠나라 하시고, 나그네 생활 평생을 지켜주신 하나님, 나를 지켜주셨으니 내 아들의 길도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 아들 주신 하나님이 며느리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으로서 하나님의 숨겨진 경륜을 믿고, 그리고 자기의 종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사람을 못 믿는다면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도 부도(不渡)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아브라함은 사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종을 불러 중요한 문제를 부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사람인 진실한 늙은 종을 믿었습니다.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들의 배필을 택하라 할 정도로 믿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대략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진실과 충성과 성실성을 믿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지혜와 능력과 판단력을 믿는 것입니다.

제가 15년 전에 처음으로 운전을 배웠을 즈음의 일입니다. 어디서 조그마한 차 하나를 빌려 타다가 집으로 몰고 왔습니다. 그리고 자랑을 했습니다. 저희 집 어린아이들이 다 달려나와서는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 탄다고 좋아라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타지 않습니다. 타라고 했더니 안 타겠다고 잘라 말합니다. 못미더워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믿지만 당신의 운전 기술은 못 믿어요" 합니다. 그 믿음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의 진실을 믿는 것과 그의 능력을 믿는 것은 별개입니다.

그러나 별개가 아닙니다. 둘 다 믿어야 믿음입니다. 하나만 믿고 하나는 못 믿겠다, 이것은 이야기가 안됩니다.

아브라함은 그 종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위탁했습니다. 믿으니까 위탁을 합니다. 다 맡겨버립니다. 그리고 자유 했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 ----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입니까? 모든 소유를 다 맡겼습니다.

네 마음대로 처사하라고요. 이것저것 간섭할 것 없어요. 걱정할 것도 없어요. 온전히 맡겨버렸어요.

그리고 이제 와서는 가문의 운명을 맡깁니다. 며느리 하나 잘못 들어오면 그 가문이 망합니다. 이처럼 중차대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아들이 어떻게 얻은 아들입니까? 옛말에 오십 넘어 자식을 얻어야 귀한 줄을 안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자식이 따라다니면 귀찮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어디 가려고 나서면 자꾸만 따라다니려고 보챕니다.

그러나 100세쯤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야말로 금지옥엽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아들의 아내가 될 자부를 맞는 일이 또 얼마나 더없이 귀한 일입니까? 이 막중한 일에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백지수표'를 쓴 것입니다. 깨끗이 내주었습니다. 늙은 종한테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입니다. '네가 가서 네 마음대로 처녀 하나 데려오너라!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니 네 길도 인도하실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의 진실과 그의 판단력과 그의 지혜와 그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서는 그의 최선을 믿었습니다.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서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 자유하게 했습니다.

최선을 다할 것을 알기 때문에 '네가 최선을 다한 다음에 되어지는 결과에 대해서는 나는 가부를 말하지 않겠다. 네 자유다. 잘되건 잘못되건, 실패를 하건 성공을 하건, 그 결과에 대해서는 네게 책임이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맡길 때에는 마음대로 하라고 맡겨놓고 일이 잘못되면 '네 책임이다' 한다면 불안해서 살지 못합니다. 이렇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히 자유하고 안심했습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종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이 사람은 종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행복한 종입니다. 이 사람은 종이라기보다 자유인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소유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행합니다. 그러니 자유인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신분은 종이지만 그의 위치, 그의 인권, 그의 영광은 자유인의 그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관리했고 가장 귀한 일까지 위임받았습니다.

신임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으로부터 전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2절에서 말합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 나를 신실하다고 여겨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다, 이 얼마나 귀한 일이냐? 그가 나를 믿어주었다! 결국은 그 믿어 주시는 바가 너무 고마워서 일생을 그리스도께 바칩니다.

저는 이따금 우리 한국의 가정주부들은 이 세상 여성들 중에서 제일 행복한 여성들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조사를 해봤더니 이 세상에서 자기 아내에게 돈을 맡기는 남편은 한국의 남자들뿐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라인이라는 것이 생겨서 월급날이 되어도 돈은 구경조차 못한다고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내가 나는 못 믿어도 저 사람(아내)은 믿어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아내를 완전히 믿는 것이지요.

믿어준다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어요. 반대로 의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기분 나쁜 일입니다. 오해받고 불신임 받고 의심받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행복하고, 신임 받을 때에 행복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소중한 믿음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객관적인 요인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믿을 수 있는 여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셨으니 내 아들도 인도할 것이요, 내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이니 네 길도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전부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늙은 종이 가진 신앙의 근거입니다.

또한 신임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긴 시간과 함께 많은 경험 속에서 축적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는 늙은 종입니다. 여러 십 년 동안을 두고두고 보아왔습니다.

일을 맡겨도 보았고 또한 그 결과도 보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에 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그가 처사한 것을 보고서 이만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아무쪼록 초조하게 여기지 맙시다. 성경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더 남겨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내 놓았습니다. 주인은 작은 일에 충성했기 때문에 큰 일을 맡기겠다 칭찬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한 달란트를 도로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이 그를 책망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성경에는 거기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제가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만일에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주인이여, 나에게 처음부터 다섯 달란트를 주셨더라면 나도 생각이 달랐을 텐데요. 한번 믿어보세요. 빌리브 미! 다섯 달란트를 한번 주어보세요. 내가 맹세합니다. 남겨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믿어주겠습니까? 맹세로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혈서를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긴 시간을 두고 신임이 축적되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심심해서 나무 위에 올라가 놀다가 "이리가 나왔다! 늑대가 나왔다!" 하고 소리를 질렀거든요. 온 동네 사람들이 쇠스랑이며 낫이며 들고 죄다 달려나왔습니다. 어린아이는 이것이 재미가 있어서 그 다음 날도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늑대가 나왔다!" 사람들이 그 소리에 놀라 몰려드니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정말로 늑대가 나왔습니다. "늑대가 나왔어요! 살려주세요." 소년은 소리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나왔어요!"

누가 믿겠습니까? 남대문시장에 '순 진짜 참기름'이라고 써 붙인 참기름 가게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간판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 집 물건 믿을 수 있으려면 적어도 3년 이상의 기간은 필요합니다.

결코 하루아침에 신뢰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피아르(PR) 가지고, 말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절대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에게 젊은 청년 하나가 찾아갔습니다.

"고명하신 이름을 제가 압니다. 저도 아프리카에 와서 선생님처럼 일하고 싶습니다" 하고 청년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하고 슈바이처 박사는 장작을 패라, 물을 길어라 하고 시켰습니다. 그러자 "나는 슈바이처 박사의 그 훌륭한 일을 하려고 왔지 물길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하고 청년이 짜증을 냅니다. 딱한 청년입니다. 하루아침에 성자연(聖者然)하려 하다니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여러분, 전적으로 믿고 맡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합니다. 상당한 사건 속에서, 많은 시련 속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초조해 하지도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맙시다. 믿을 수 없다고 하지도 말고 믿어 달라고 부탁하지도 맙시다. 조용히, 말없이 믿음을 심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믿음을 축적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신임을 쌓아올려야 하겠습니다.

그 종은 아브라함의 긴 생애에 동참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도 알고 뜻도 잘 압니다. 그래서 24장을 죽 읽어 나가보면 그 종이 며느리를 택하는 장면이 참 좋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이 손님대접 할 줄 아는 가정인 걸 알기 때문에 우선 손님대접 하는 덕과 지혜가 있는 여자인 동시에 또한 신앙으로 사는 여자를 고릅니다. 고르는 기준이 멋집니다. 아브라함이 직접 이르지는 않았어도 그의 뜻을 잘 알고 그에 따라 사람을 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리고 행할 때에 내가 하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이 나를 믿을 때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맡길 수 없는 사람인데 무엇을 달라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에도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믿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의 시련과 쌓아올리는 신임이 필요합니다. 신임 받는 데에는 더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믿어야 하겠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E. 키서의 시에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밤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은 단순히 있을 수 있는 영광을 기다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은 단순히 죄로 가득찬 기쁨을 미워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은 과감한 노력이요, 장렬한 모험이요, 어떤 상황 아래서도 봉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 정말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영광과 참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와 믿을 수 있는 자(창세기 2417)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조그마한 배 한 척을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나서 배는 침몰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의 제자들은 평생을 갈릴리 바다에서 산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능히 이 풍랑을 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조용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겁에 질려 쩔쩔매면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들이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잠을 깨시더니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아무리 생각해도 귀한 말씀입니다.

참 평안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평안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고요한 바다입니까 능숙한 항해술입니까? 배가 좋아야 됩니까 아니면 기술이 좋아야 됩니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언제든 어느 때든 믿음이 있는 그곳에 진정한 고요함과 평안이 있습니다.

현대의 고민은 불확실성과 불안과 불신에 근거한다고 합니다.

믿지 못해 괴롭습니다. 배우기도 하고 일하기도 하고 벌기도 하고 모으기도 하고 건설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을 상실했습니다. 믿음을 잃었습니다. 믿음은 뿌리와 같고 믿음은 토대와 같습니다. 토대가 흔들리면 고층건물일수록 더 요란하게 무너집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을 수 없다면 다 끝난 것입니다. 우리 한국 청년들이 무슨 말끝에 으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 믿어도 되나요?" 미국 아이들도 같이 이야기해보니까 버릇처럼 "빌리브 미(Believe me.)" 합니다. 세상에 믿어달라고 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믿어줘야 믿는 것이지 믿어달란다고 믿게 됩니까?

믿으면 행복합니다. 전적으로 믿으면 전적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믿을 수 있을 때에, 믿어줄 때에, 내가 믿고 저가 나를 믿을 때에, 다시 말하면 진실한 믿음과 믿음의 만남이 있을 때, 거기에 행복의 극치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고 나 자신을 믿는 믿음이 있으며, 이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로 통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을 때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믿고, 내가 하나님을 믿고 나 자신을 믿을 때에야 이웃을 내 형제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교관 한 사람이 사우디로 중동으로 아프리카로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면서 외교를 하는데,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시인하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부득이 '북한은 나쁘고 남한은 좋다' 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어디 믿어줘야지요. 여러모로 궁리하다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 북한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을 안 믿어요? 교회가 없다구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 믿을 수 없지요" 하더랍니다.

과연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도 안 믿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까짓 종이쪽지에 두 나라가 싸인 한번 했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 종이쪽은 휴지조각이나 진배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그 보호와 그 긍휼을 믿을 때에라야, 그 바탕 위에서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유출되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의 기초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때에 나 자신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을 때에 진실할 수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믿을 때에 이 신앙에 근거하여 용기를 얻게 됩니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 둘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과 축복을 성취하셔서 마침내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들을 주셨다면 자부도 주시겠지요. 그것도 믿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 고향을 떠나라 하시고, 나그네 생활 평생을 지켜주신 하나님, 나를 지켜주셨으니 내 아들의 길도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 아들 주신 하나님이 며느리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으로서 하나님의 숨겨진 경륜을 믿고, 그리고 자기의 종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사람을 못 믿는다면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도 부도(不渡)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아브라함은 사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종을 불러 중요한 문제를 부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사람인 진실한 늙은 종을 믿었습니다.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들의 배필을 택하라 할 정도로 믿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대략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진실과 충성과 성실성을 믿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지혜와 능력과 판단력을 믿는 것입니다.

제가 15년 전에 처음으로 운전을 배웠을 즈음의 일입니다. 어디서 조그마한 차 하나를 빌려 타다가 집으로 몰고 왔습니다. 그리고 자랑을 했습니다. 저희 집 어린아이들이 다 달려나와서는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 탄다고 좋아라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타지 않습니다. 타라고 했더니 안 타겠다고 잘라 말합니다. 못미더워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믿지만 당신의 운전 기술은 못 믿어요" 합니다. 그 믿음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의 진실을 믿는 것과 그의 능력을 믿는 것은 별개입니다.

그러나 별개가 아닙니다. 둘 다 믿어야 믿음입니다. 하나만 믿고 하나는 못 믿겠다, 이것은 이야기가 안됩니다.

아브라함은 그 종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위탁했습니다. 믿으니까 위탁을 합니다. 다 맡겨버립니다. 그리고 자유 했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 ----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입니까? 모든 소유를 다 맡겼습니다.

네 마음대로 처사하라고요. 이것저것 간섭할 것 없어요. 걱정할 것도 없어요. 온전히 맡겨버렸어요.

그리고 이제 와서는 가문의 운명을 맡깁니다. 며느리 하나 잘못 들어오면 그 가문이 망합니다. 이처럼 중차대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아들이 어떻게 얻은 아들입니까? 옛말에 오십 넘어 자식을 얻어야 귀한 줄을 안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자식이 따라다니면 귀찮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어디 가려고 나서면 자꾸만 따라다니려고 보챕니다.

그러나 100세쯤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야말로 금지옥엽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아들의 아내가 될 자부를 맞는 일이 또 얼마나 더없이 귀한 일입니까? 이 막중한 일에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백지수표'를 쓴 것입니다. 깨끗이 내주었습니다. 늙은 종한테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입니다. '네가 가서 네 마음대로 처녀 하나 데려오너라!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니 네 길도 인도하실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의 진실과 그의 판단력과 그의 지혜와 그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서는 그의 최선을 믿었습니다.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서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 자유하게 했습니다.

최선을 다할 것을 알기 때문에 '네가 최선을 다한 다음에 되어지는 결과에 대해서는 나는 가부를 말하지 않겠다. 네 자유다. 잘되건 잘못되건, 실패를 하건 성공을 하건, 그 결과에 대해서는 네게 책임이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맡길 때에는 마음대로 하라고 맡겨놓고 일이 잘못되면 '네 책임이다' 한다면 불안해서 살지 못합니다. 이렇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히 자유하고 안심했습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종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이 사람은 종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행복한 종입니다. 이 사람은 종이라기보다 자유인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소유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행합니다. 그러니 자유인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신분은 종이지만 그의 위치, 그의 인권, 그의 영광은 자유인의 그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관리했고 가장 귀한 일까지 위임받았습니다.

신임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으로부터 전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2절에서 말합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 나를 신실하다고 여겨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다, 이 얼마나 귀한 일이냐? 그가 나를 믿어주었다! 결국은 그 믿어 주시는 바가 너무 고마워서 일생을 그리스도께 바칩니다.

저는 이따금 우리 한국의 가정주부들은 이 세상 여성들 중에서 제일 행복한 여성들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조사를 해봤더니 이 세상에서 자기 아내에게 돈을 맡기는 남편은 한국의 남자들뿐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라인이라는 것이 생겨서 월급날이 되어도 돈은 구경조차 못한다고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내가 나는 못 믿어도 저 사람(아내)은 믿어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아내를 완전히 믿는 것이지요.

믿어준다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어요. 반대로 의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기분 나쁜 일입니다. 오해받고 불신임 받고 의심받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행복하고, 신임 받을 때에 행복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소중한 믿음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객관적인 요인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믿을 수 있는 여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셨으니 내 아들도 인도할 것이요, 내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이니 네 길도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전부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늙은 종이 가진 신앙의 근거입니다.

또한 신임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긴 시간과 함께 많은 경험 속에서 축적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는 늙은 종입니다. 여러 십 년 동안을 두고두고 보아왔습니다.

일을 맡겨도 보았고 또한 그 결과도 보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에 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그가 처사한 것을 보고서 이만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아무쪼록 초조하게 여기지 맙시다. 성경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더 남겨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내 놓았습니다. 주인은 작은 일에 충성했기 때문에 큰 일을 맡기겠다 칭찬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한 달란트를 도로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이 그를 책망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성경에는 거기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제가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만일에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주인이여, 나에게 처음부터 다섯 달란트를 주셨더라면 나도 생각이 달랐을 텐데요. 한번 믿어보세요. 빌리브 미! 다섯 달란트를 한번 주어보세요. 내가 맹세합니다. 남겨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믿어주겠습니까? 맹세로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혈서를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긴 시간을 두고 신임이 축적되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심심해서 나무 위에 올라가 놀다가 "이리가 나왔다! 늑대가 나왔다!" 하고 소리를 질렀거든요. 온 동네 사람들이 쇠스랑이며 낫이며 들고 죄다 달려나왔습니다. 어린아이는 이것이 재미가 있어서 그 다음 날도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늑대가 나왔다!" 사람들이 그 소리에 놀라 몰려드니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정말로 늑대가 나왔습니다. "늑대가 나왔어요! 살려주세요." 소년은 소리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나왔어요!"

누가 믿겠습니까? 남대문시장에 '순 진짜 참기름'이라고 써 붙인 참기름 가게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간판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 집 물건 믿을 수 있으려면 적어도 3년 이상의 기간은 필요합니다.

결코 하루아침에 신뢰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피아르(PR) 가지고, 말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절대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에게 젊은 청년 하나가 찾아갔습니다.

"고명하신 이름을 제가 압니다. 저도 아프리카에 와서 선생님처럼 일하고 싶습니다" 하고 청년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하고 슈바이처 박사는 장작을 패라, 물을 길어라 하고 시켰습니다. 그러자 "나는 슈바이처 박사의 그 훌륭한 일을 하려고 왔지 물길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하고 청년이 짜증을 냅니다. 딱한 청년입니다. 하루아침에 성자연(聖者然)하려 하다니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여러분, 전적으로 믿고 맡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합니다. 상당한 사건 속에서, 많은 시련 속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초조해 하지도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맙시다. 믿을 수 없다고 하지도 말고 믿어 달라고 부탁하지도 맙시다. 조용히, 말없이 믿음을 심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믿음을 축적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신임을 쌓아올려야 하겠습니다.

그 종은 아브라함의 긴 생애에 동참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도 알고 뜻도 잘 압니다. 그래서 24장을 죽 읽어 나가보면 그 종이 며느리를 택하는 장면이 참 좋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이 손님대접 할 줄 아는 가정인 걸 알기 때문에 우선 손님대접 하는 덕과 지혜가 있는 여자인 동시에 또한 신앙으로 사는 여자를 고릅니다. 고르는 기준이 멋집니다. 아브라함이 직접 이르지는 않았어도 그의 뜻을 잘 알고 그에 따라 사람을 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리고 행할 때에 내가 하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이 나를 믿을 때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맡길 수 없는 사람인데 무엇을 달라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에도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믿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의 시련과 쌓아올리는 신임이 필요합니다. 신임 받는 데에는 더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믿어야 하겠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E. 키서의 시에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밤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은 단순히 있을 수 있는 영광을 기다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은 단순히 죄로 가득찬 기쁨을 미워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은 과감한 노력이요, 장렬한 모험이요, 어떤 상황 아래서도 봉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 정말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영광과 참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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