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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길을 보이소서(출애굽기 33 : 12-23)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도,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주의 사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의 그는 그렇게 훌륭한 인격자는 아니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크신 일을 감당할 만한 그런 존재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도망을 하여 도망자로 유리 방황하는 그러한 때였습니다. 그리고 은둔 생활을 한 지가 40년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에 당시의 그는 아무 용기도 꿈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지적으로 보아도 완전히 저하되었고, 심리적으로 보아도 그의 마음은 다 이지러졌습니다. 따라서 그는 사회적으로 보나, 인격적으로 보나, 종교적으로 보나, 그 어느 면으로 보아도 지도자로 나설 수 없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나이도 80세입니다. 이와 같이 처절한 형편에 있는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지도자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때에 모세는 극구 사양을 합니다. 그 사양은 단순한 겸손의 사양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말할 줄을 모릅니다" 라고 변명을 해보기도 하고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라며 자신의 지도력이 부족함을 솔직히 고백하기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을 상관치 않으시고 강권적으로 그를 붙드셔서 지도자로 삼았고 마침내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인도하게 됩니다.
자기의 능력도, 지혜도 전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친히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그 재앙에 의해서 그는 대 애굽의 바로 왕을 이겼습니다. 이제 그는 그 고집스럽고 간사하고 완악한 바로 왕을 꺾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냅니다.
한두 사람도 아닌 무려 60만 대군을, 그것도 어제오늘에 된 이야기가 아니라 430년 동안을 종살이한 이스라엘 백성을 대 애굽의 사슬에서 끌어내어 승리하게 됩니다. 참으로 대단한 승리요 성공입니다. 애굽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이겼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 이스라엘 자체의 문제가 더 복잡하고 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가는 그 40년의 생활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원망하는 이유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또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조급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보면 성격이 조급한 사람이 원망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또한 그렇습니다. 생각이 빠르고, 머리가 좋고, 능력도 있는 그런 사람이 원망이 많습니다. 워낙 자기가 둔하고 무능한 사람인 줄 아는 사람은 무능해서 그렇거니 하고 참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좀 있고, 무엇을 할 수도 있고,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의 뜻대로 안 된다 하여 이 사람 저 사람을 원망하고 부모도 원망하고, 하나님도 원망하며, 나라도 원망하는 등 원망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급한 나머지 원망했습니다.
이제 또 하나의 이유는 애굽에서의 그 극한 고생을 저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지난날 고생한 일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은 원망합니다. 생각하면 어제보다 오늘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지난날을 미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지난날의 그 고생스러움은 다 잊어버리고 그 때가 좋았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옛날이 좋았다고 하는 사람은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래도 오늘이 낫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원망이 없습니다. 특별히 과거의 고생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 한 것이 아니라 430년을 했건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 지난날의 그 무거웠던 고통은 다 잊어버리고 오히려 애굽에서의 고생을 부러워합니다. 그리하여 그 때가 좋았다고 하니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유의 고귀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노예로 오래 살기보다는 며칠이라도 자유인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며 자유와 신앙을 소중히 여기는 그 사람은 원망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없어도 자유는 있고, 그리고 그 자유로움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이 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 외의 모든 고통은 참아갈 수 있을 줄로 압니다.
이제 또 하나의 이유는 기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은 하였어도 40년 후에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미리 말씀을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 말씀은 없으신 채 오늘 가려나, 내일 가려나, 아침에 가려나, 저녁에 가려나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니 답답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도무지 기약이 없어요. 그래서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번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40년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마 모르긴 하여도 다들 애굽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큰 문제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날을 모르니 다행이지 만약 그 날을 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미리 안다면 정리할 것 다 정리하고 그리고 장례식 준비도 서두르지 않고 잘 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좋은 면보다는 나쁜 면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좌우간 그렇게 되면 죽기 전까지 방탕하겠다고 할테니까 말입니다. 그것도 큰 일이지 아닙니까? 어쨌든 기약을 모른다는 이것이 원망의 이유입니다.
이를 다 합쳐서 한 마디로 말한다면 불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들어가는 줄 알고, 믿고, 기다리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어느 때에 가든, 어떻게 가든 갈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 약속을 믿지 못해서, 지금 괴로워합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이 원망의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겼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잠시 동안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금송아지를 섬기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은 배신이요, 배은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십니다. 이에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9-10)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보통 사람 같으면 다 죽는다는데 나만 살려 주신다니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32절을 보면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탄원합니다. 이 백성이 망한다고 할진대 나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이 중보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리시마던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다는 소식을 먼저 듣고 증거의 두 돌판을 든 채 산을 내려옵니다. 그런데 들었던 때의 마음과도 달리 진작 금 우상을 섬기는 그 현장! 그 처절하고, 비참한, 엄청난 사건을 보는 순간 그는 대노하여 하나님이 친히 만드시고, 친히 쓰신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고 맙니다. 그 순간은 좌우를 가릴 수가 없이 정말 화가 났습니다. 백성도 볼 것이 없고, 자신의 운명도, 심지어는 하나님의 무서운 손길도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다 망했다 하는 완전한 포기입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이제 그대로 때려부수고 맙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금 우상을 섬긴다고 하셨을 때에는 그래도 생각이 달랐습니다만 막상 직접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니 그야말로 눈에 불이 났습니다. 이래서 다 포기합니다.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마음에 그는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기도는 대단히 비참한 기도입니다. 이 절박한 현실을 두고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몹시 외로워합니다. 그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더라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그가 외롭다는 말입니다. 이 백성을 인도하라 하시면서 나 혼자서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는 너무도 절박했고 너무도 통탄스러워 달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실은 그 수종자인 청년 여호수아가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고 지키고 있었으나(출 32:11) 그 후계자를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예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외롭기만 하였습니다.
자기가 오른팔처럼 의지하던 형이요 대변론자인 아론! 바로 이 사람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주동자입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너무도 기가 차서 모세가 아론을 책망하자 그의 대답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그의 말인즉 백성들이 가져온 금붙이를 모아 불에 던졌더니 금송아지가 나왔다는 것입니다.(출 32:24) 도대체 이런 어처구니 없는 변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모세는 기가 찼습니다. 내가 이러한 사람을 의지하고 일을 한단 말인가! 생각할 수록 외로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날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라 하셨지만 함께 일할 사람을 주시기 않았습니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형 아론도, 백성도, 그 누구도 함께 갈 사람이 없습니다. 내 마음과 내 진실을 이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외롭습니다. 너무도 고독합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내가 친히 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는 것입니다. 나만 믿으라! 누구를 의지하겠다는 것이냐? 누구를 바라보겠다는 말이냐? 내가 친히 가리라! 여러분!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 관계의 것입니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입니까? 아무도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내가 친히 가리라! 오직 하나님만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베드로도 못 믿겠어요. 요한도 못 믿겠어요. 열 두 제자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리라! 이제 모세는 더 중요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모든 고민에 깊은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주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요, 주의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의 뜻을 분명히 알기만 한다면 오늘의 이 모든 고통을 참을 수 있겠습니다. 역사의 방향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의 이 사건은 종말이 어떻게 맺어질 것입니까? 내 생애는 어떻게 끝나는 것입니까? 주의 뜻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인도하신 것을 압니다. 참으로 기적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현재에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압니다. 그런데 장차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모세가 걱정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분명히 있는데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 인도하시는 것이며 어떻게 인도할 것이며, 언제 인도하시는 주의 길을 밝히 보여 주시옵소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금 모세는 아주 깊은 뜻의 세 번째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처지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 주소서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조금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금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의 돌판을 내던져 버린 그런 사람입니다. 이미 백성에게 실망하고 절망했습니다.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쳤고 아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기도입니다. 주여!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버리지 말아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참으로 귀한 기도입니다. 우상을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완악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버리지 마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백성"(출 32:9)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기도합니다.
주여!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그는 그래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기를 바라고, 그래도 다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32장 11절 이하에 있는 모세의 기도를 보면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본래부터 이 백성은 신통치 않은 백성이었기에 주의 큰 권농으로 인도해 내신 것인데 이제와서 어찌하여 진노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더욱 깊은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가 저들을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해 내었다 하게 하시려나이까? 사실을 말한다면 이 백성은 지금 자기 죄로 인하여 망하고 있는데 하나님과는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이 백성이 여기에서 이렇게 망한다고 하면 저 애굽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큰 권농으로 애굽 사람을 망하게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더니 그래 저 모양이 되었구나 하고 얼마나 좋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백성 망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서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그런 내용의 기도입니다. 모세의 기도는 처절합니다. 주여!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가끔 우리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잘못하게 되면, 아버지, 어머니가 꾸짖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느 한 쪽에서 때리는 것을 보게 되면 자기 자식 아프라고 때리는 것도 아닌데 몹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이 참 이상합니다. 지금 이 모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앞에 놓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모세가 엎드려 주여! 차라리 내 생명을 취해 주시고 제발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패역한 백성이라며 낙심하고 절망하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왜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내 백성을 함부로 저주하느냐고 책망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때리실 때 때리고 징계할 때 징계하면서도 계속 사랑하십니다. 주여! 이 완악한 백성! 이 목이 곧은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 주시옵소서!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시 새로운 언약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앞서 모세는 금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격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두 돌판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네가 깨뜨렸으니 이제 네가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출 34:1)고 하십니다. 그러면 거기에 내가 다시 약속의 말씀을 써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언약을 세우고 계명을 주겠으니 이 언약을 지키면 살리라! 이는 또 한번의 다른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6절 말씀에 보면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아룁니다. 생각하면 이는 얼마나 실제적인 말씀인 줄 모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과거에 축복하신 것을 압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도 사랑해 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저 앞에 약속된 가나안 땅이 있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이 백성으로 보아서는 그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요. 도저히 안 되겠어요. 아무리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이 있다 하더라도 그 축복을 받을 만한 거룩함과 정결이 없더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낙심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하나님! 이 백성이 은혜를 이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며 그 증거를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모세는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귀한 복음을 저희에게 들려주십니다. 오늘 본문 19절 하반절에 보면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는 절대적 은혜입니다. 긍휼을 입을 만하기에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자에게 사랑한단 말입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 잘되는 것을 보아 가면서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집나간 자식을 더 사랑하고, 불구 자식을 더 아끼게 됩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창조적이요, 일방적입니다.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느니라! 본래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그리고 내일도, 그 먼 훗날에도 내가 긍휼히 여길 것이니라! 여기에 창조적인 긍휼이 있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긍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다시 말합니다. "주여 주께서 친히 가시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도입니다. 친히 주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시면 우리도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통일이 좋은 것이로되 자유 없는 통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화목이 좋은 것이로되 불의한 화목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진리를 떠난 화해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더욱이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는 가나안 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주여! 주님이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가나안도 바라지 않습니다라는 이것이 모세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는 간청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듯이,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듯이,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주의 영광을 보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 영광을 보고는 살아남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직선적으로 나타난다면 그 앞에서 살아남을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그래도 실현되기를 바랍니다만 진정 하나님의 공의가 정확하게 실현된다면 그 앞에 살아남을 자가 어디에 있느냔 말입니다. 그런고로 나를 보지 못하리라! 나를 보고서는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기에 심판적 요소가 있고 동시에 긍휼이 있습니다. 이제 오늘도 함께 하시는 그 약속, 그 긍휼을 믿고,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원컨대 주의 길을 보이소서! 내가 친히 가리라!
기도
자비하신 주님! 우리들이 계속된 원망과 불신앙 속에서도 이를 용납하시고 오늘까지 은혜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이 은혜를 계속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시사 주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드리옵나이다. 절망된 현실을 보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약속과, 그 축복의 확실함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은혜에 합당한 오늘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의 길을 보이소서(출애굽기 33 : 12-23)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도,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주의 사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의 그는 그렇게 훌륭한 인격자는 아니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크신 일을 감당할 만한 그런 존재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도망을 하여 도망자로 유리 방황하는 그러한 때였습니다. 그리고 은둔 생활을 한 지가 40년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에 당시의 그는 아무 용기도 꿈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지적으로 보아도 완전히 저하되었고, 심리적으로 보아도 그의 마음은 다 이지러졌습니다. 따라서 그는 사회적으로 보나, 인격적으로 보나, 종교적으로 보나, 그 어느 면으로 보아도 지도자로 나설 수 없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나이도 80세입니다. 이와 같이 처절한 형편에 있는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지도자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때에 모세는 극구 사양을 합니다. 그 사양은 단순한 겸손의 사양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말할 줄을 모릅니다" 라고 변명을 해보기도 하고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라며 자신의 지도력이 부족함을 솔직히 고백하기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을 상관치 않으시고 강권적으로 그를 붙드셔서 지도자로 삼았고 마침내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인도하게 됩니다.
자기의 능력도, 지혜도 전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친히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그 재앙에 의해서 그는 대 애굽의 바로 왕을 이겼습니다. 이제 그는 그 고집스럽고 간사하고 완악한 바로 왕을 꺾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냅니다.
한두 사람도 아닌 무려 60만 대군을, 그것도 어제오늘에 된 이야기가 아니라 430년 동안을 종살이한 이스라엘 백성을 대 애굽의 사슬에서 끌어내어 승리하게 됩니다. 참으로 대단한 승리요 성공입니다. 애굽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이겼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 이스라엘 자체의 문제가 더 복잡하고 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가는 그 40년의 생활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원망하는 이유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또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조급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보면 성격이 조급한 사람이 원망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또한 그렇습니다. 생각이 빠르고, 머리가 좋고, 능력도 있는 그런 사람이 원망이 많습니다. 워낙 자기가 둔하고 무능한 사람인 줄 아는 사람은 무능해서 그렇거니 하고 참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좀 있고, 무엇을 할 수도 있고,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의 뜻대로 안 된다 하여 이 사람 저 사람을 원망하고 부모도 원망하고, 하나님도 원망하며, 나라도 원망하는 등 원망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급한 나머지 원망했습니다.
이제 또 하나의 이유는 애굽에서의 그 극한 고생을 저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지난날 고생한 일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은 원망합니다. 생각하면 어제보다 오늘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지난날을 미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지난날의 그 고생스러움은 다 잊어버리고 그 때가 좋았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옛날이 좋았다고 하는 사람은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래도 오늘이 낫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원망이 없습니다. 특별히 과거의 고생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 한 것이 아니라 430년을 했건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 지난날의 그 무거웠던 고통은 다 잊어버리고 오히려 애굽에서의 고생을 부러워합니다. 그리하여 그 때가 좋았다고 하니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유의 고귀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노예로 오래 살기보다는 며칠이라도 자유인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며 자유와 신앙을 소중히 여기는 그 사람은 원망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없어도 자유는 있고, 그리고 그 자유로움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이 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 외의 모든 고통은 참아갈 수 있을 줄로 압니다.
이제 또 하나의 이유는 기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은 하였어도 40년 후에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미리 말씀을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 말씀은 없으신 채 오늘 가려나, 내일 가려나, 아침에 가려나, 저녁에 가려나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니 답답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도무지 기약이 없어요. 그래서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번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40년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마 모르긴 하여도 다들 애굽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큰 문제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날을 모르니 다행이지 만약 그 날을 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미리 안다면 정리할 것 다 정리하고 그리고 장례식 준비도 서두르지 않고 잘 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좋은 면보다는 나쁜 면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좌우간 그렇게 되면 죽기 전까지 방탕하겠다고 할테니까 말입니다. 그것도 큰 일이지 아닙니까? 어쨌든 기약을 모른다는 이것이 원망의 이유입니다.
이를 다 합쳐서 한 마디로 말한다면 불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들어가는 줄 알고, 믿고, 기다리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어느 때에 가든, 어떻게 가든 갈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 약속을 믿지 못해서, 지금 괴로워합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이 원망의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겼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잠시 동안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금송아지를 섬기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은 배신이요, 배은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십니다. 이에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9-10)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보통 사람 같으면 다 죽는다는데 나만 살려 주신다니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32절을 보면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탄원합니다. 이 백성이 망한다고 할진대 나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이 중보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리시마던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다는 소식을 먼저 듣고 증거의 두 돌판을 든 채 산을 내려옵니다. 그런데 들었던 때의 마음과도 달리 진작 금 우상을 섬기는 그 현장! 그 처절하고, 비참한, 엄청난 사건을 보는 순간 그는 대노하여 하나님이 친히 만드시고, 친히 쓰신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고 맙니다. 그 순간은 좌우를 가릴 수가 없이 정말 화가 났습니다. 백성도 볼 것이 없고, 자신의 운명도, 심지어는 하나님의 무서운 손길도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다 망했다 하는 완전한 포기입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이제 그대로 때려부수고 맙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금 우상을 섬긴다고 하셨을 때에는 그래도 생각이 달랐습니다만 막상 직접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니 그야말로 눈에 불이 났습니다. 이래서 다 포기합니다.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마음에 그는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기도는 대단히 비참한 기도입니다. 이 절박한 현실을 두고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몹시 외로워합니다. 그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더라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그가 외롭다는 말입니다. 이 백성을 인도하라 하시면서 나 혼자서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는 너무도 절박했고 너무도 통탄스러워 달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실은 그 수종자인 청년 여호수아가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고 지키고 있었으나(출 32:11) 그 후계자를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예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외롭기만 하였습니다.
자기가 오른팔처럼 의지하던 형이요 대변론자인 아론! 바로 이 사람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주동자입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너무도 기가 차서 모세가 아론을 책망하자 그의 대답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그의 말인즉 백성들이 가져온 금붙이를 모아 불에 던졌더니 금송아지가 나왔다는 것입니다.(출 32:24) 도대체 이런 어처구니 없는 변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모세는 기가 찼습니다. 내가 이러한 사람을 의지하고 일을 한단 말인가! 생각할 수록 외로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날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라 하셨지만 함께 일할 사람을 주시기 않았습니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형 아론도, 백성도, 그 누구도 함께 갈 사람이 없습니다. 내 마음과 내 진실을 이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외롭습니다. 너무도 고독합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내가 친히 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는 것입니다. 나만 믿으라! 누구를 의지하겠다는 것이냐? 누구를 바라보겠다는 말이냐? 내가 친히 가리라! 여러분!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 관계의 것입니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입니까? 아무도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내가 친히 가리라! 오직 하나님만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베드로도 못 믿겠어요. 요한도 못 믿겠어요. 열 두 제자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리라! 이제 모세는 더 중요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모든 고민에 깊은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주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요, 주의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의 뜻을 분명히 알기만 한다면 오늘의 이 모든 고통을 참을 수 있겠습니다. 역사의 방향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의 이 사건은 종말이 어떻게 맺어질 것입니까? 내 생애는 어떻게 끝나는 것입니까? 주의 뜻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인도하신 것을 압니다. 참으로 기적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현재에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압니다. 그런데 장차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모세가 걱정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분명히 있는데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 인도하시는 것이며 어떻게 인도할 것이며, 언제 인도하시는 주의 길을 밝히 보여 주시옵소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금 모세는 아주 깊은 뜻의 세 번째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처지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 주소서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조금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금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의 돌판을 내던져 버린 그런 사람입니다. 이미 백성에게 실망하고 절망했습니다.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쳤고 아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기도입니다. 주여!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버리지 말아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참으로 귀한 기도입니다. 우상을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완악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버리지 마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백성"(출 32:9)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기도합니다.
주여!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그는 그래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기를 바라고, 그래도 다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32장 11절 이하에 있는 모세의 기도를 보면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본래부터 이 백성은 신통치 않은 백성이었기에 주의 큰 권농으로 인도해 내신 것인데 이제와서 어찌하여 진노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더욱 깊은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가 저들을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해 내었다 하게 하시려나이까? 사실을 말한다면 이 백성은 지금 자기 죄로 인하여 망하고 있는데 하나님과는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이 백성이 여기에서 이렇게 망한다고 하면 저 애굽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큰 권농으로 애굽 사람을 망하게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더니 그래 저 모양이 되었구나 하고 얼마나 좋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백성 망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서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그런 내용의 기도입니다. 모세의 기도는 처절합니다. 주여!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가끔 우리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잘못하게 되면, 아버지, 어머니가 꾸짖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느 한 쪽에서 때리는 것을 보게 되면 자기 자식 아프라고 때리는 것도 아닌데 몹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이 참 이상합니다. 지금 이 모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앞에 놓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모세가 엎드려 주여! 차라리 내 생명을 취해 주시고 제발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패역한 백성이라며 낙심하고 절망하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왜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내 백성을 함부로 저주하느냐고 책망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때리실 때 때리고 징계할 때 징계하면서도 계속 사랑하십니다. 주여! 이 완악한 백성! 이 목이 곧은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 주시옵소서!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시 새로운 언약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앞서 모세는 금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격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두 돌판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네가 깨뜨렸으니 이제 네가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출 34:1)고 하십니다. 그러면 거기에 내가 다시 약속의 말씀을 써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언약을 세우고 계명을 주겠으니 이 언약을 지키면 살리라! 이는 또 한번의 다른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6절 말씀에 보면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아룁니다. 생각하면 이는 얼마나 실제적인 말씀인 줄 모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과거에 축복하신 것을 압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도 사랑해 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저 앞에 약속된 가나안 땅이 있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이 백성으로 보아서는 그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요. 도저히 안 되겠어요. 아무리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이 있다 하더라도 그 축복을 받을 만한 거룩함과 정결이 없더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낙심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하나님! 이 백성이 은혜를 이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며 그 증거를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모세는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귀한 복음을 저희에게 들려주십니다. 오늘 본문 19절 하반절에 보면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는 절대적 은혜입니다. 긍휼을 입을 만하기에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자에게 사랑한단 말입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 잘되는 것을 보아 가면서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집나간 자식을 더 사랑하고, 불구 자식을 더 아끼게 됩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창조적이요, 일방적입니다.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느니라! 본래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그리고 내일도, 그 먼 훗날에도 내가 긍휼히 여길 것이니라! 여기에 창조적인 긍휼이 있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긍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다시 말합니다. "주여 주께서 친히 가시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도입니다. 친히 주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시면 우리도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통일이 좋은 것이로되 자유 없는 통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화목이 좋은 것이로되 불의한 화목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진리를 떠난 화해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더욱이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는 가나안 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주여! 주님이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가나안도 바라지 않습니다라는 이것이 모세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는 간청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듯이,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듯이,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주의 영광을 보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 영광을 보고는 살아남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직선적으로 나타난다면 그 앞에서 살아남을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그래도 실현되기를 바랍니다만 진정 하나님의 공의가 정확하게 실현된다면 그 앞에 살아남을 자가 어디에 있느냔 말입니다. 그런고로 나를 보지 못하리라! 나를 보고서는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기에 심판적 요소가 있고 동시에 긍휼이 있습니다. 이제 오늘도 함께 하시는 그 약속, 그 긍휼을 믿고,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원컨대 주의 길을 보이소서! 내가 친히 가리라!
기도
자비하신 주님! 우리들이 계속된 원망과 불신앙 속에서도 이를 용납하시고 오늘까지 은혜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이 은혜를 계속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시사 주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드리옵나이다. 절망된 현실을 보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약속과, 그 축복의 확실함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은혜에 합당한 오늘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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