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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근심케 말라(에베소서 4 : 25-32)

by 【고동엽】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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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근심케 말라(에베소서 4 : 25-32)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자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차를 몰다 보면 종종 앞에 가는 자동차가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운전을 무사하게 하려면 자기 차만 바로 몬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법을 지켜야 함은 물론이지만 또 하나, 법을 지키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내가 흡수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무사하다는 것입니다. 나만 제대로 간다고 고집을 부려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 실수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비켜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무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차만 살피고 내 갈 길만 보아서도 되지 않습니다. 내 앞차도 보아야 하고, 그 앞에 있는 차, 그리고 뒷 차도 보면서 운전을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간간이 보면 차가 비틀거립니다. 차는 좋은 차입니다. 그럼에도 차가 제 궤도로 가지 못하고 비틀비틀 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차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잘 아시는 대로 운전사가 잘못된 것입니다. 또 운전사도 가까이 가서 보면 생기기는 멀쩡하게 잘 생겼습니다. 운전사의 지식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기술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또한 경력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술취했기 때문입니다. 제 정신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 정신이 무엇엔가 잘못 포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에 예속되었고, 무엇에 씌었으며, 무엇에 붙들렸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인간 규범적 입장에서 분류하여 생각해 본다면, 첫째 사람들 가운데에는 생리학적 본능과 욕정 주도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생리적 욕정 주도적 인간! 이건 정밀 비참한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속물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성 주도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지식을 위주로 삽니다. 자기 판단이 자기에게 대하여 주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소위 지성인이라고 부릅니다만 그러나 이 자기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다시 한번 자기를 얼마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자기라고 하는 교만과 체면에 살아갑니다. 따라서 구제하라면 내 놓을 돈이 없지만 체면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내 놓습니다. 번번이 떨어지면서도 국회의원 되겠다고 평생 출마하는 사람, 아무리 보아도 그만 두었으면 좋으련만 계속 명예에 끌리고 체면, 자존심에 끌려 이런 것 챙기느라 전 신경을 다 쏟으며 그것을 위해서 평생을 다 바치는 불행한 사람을 봅니다. 이제는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삽니다. 자기의 판단은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그리스도의 판단에 따라, 성령이 감화해 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성령 주도적 인간, 이런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전적인 타락이라고 하는 교리를 시인한 그 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의 모든 성품, 모든 지식, 모든 계획, 모든 판단은 모두가 타락된 것이며, 선을 생각하는 그 자체도 타락되었고, 의를 주장하는 그것도 타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타락되었고 완전 타락입니다. 그러기에 지식은 결국 교만을 이루고 감정은 향락으로 치닫습니다. 나아가 허영과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나의 지식과 나의 판단을 믿을 수 있습니까? 내 감정, 이 변덕스러운 인간 나를 믿을 수 있느냐구요? 내 기쁨, 내 기분대로 살아서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완전히 묵살해버려야 사람답게 살는지도 모릅니다. 내 감정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또 내 의지라는 것은 교만과 고집으로 치닫습니다. 여기에서 남는 것은 못된 고집만 남고 맙니다. 따라서 이것 또한 믿을 것이 못됩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우상 숭배로 전락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세 가지의 우상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과학주의입니다. 이 과학주의란 과학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을 만능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과학을 만능으로 생각하는 이 생각이 또 하나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이 우상에 대한 정면적인 심판이 미국이 쏘아 올렸던 로켓 첼린저호의 실패요, 또한 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폭발입니다. 특별히 요즈음에 와서는 컴퓨터라고 하면 무조건 믿으려 드는 젊은이들의 우상적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는 성경은 믿지 않아도 컴퓨터는 믿으려고 합니다.

컴퓨터로 점까지 친다니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만, 그러한 컴퓨터를 몽땅 동원했으나 폭발했습니다. 이제 무슨 할 말이 따로 있습니까?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우상은 황금만능주의 곧 황금이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저 죽을 날도 모르는 채 꾸역꾸역 물질만을 모아들이는 답답한 인간들, 물질만능주의, 이것 또한 대단한 우상입니다. 생각해 보면 돈만 벌면 다 될 줄 아는 사람처럼 바보스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초인간주의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우상이요, 이것의 결정체가 곧 공산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하면서 초인간을 내 세워 보았는데 결국은 저렇게 비참해지고 말았습니다.

보십시오. 무엇을 믿겠습니까? 내 마음도 내가 믿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에게는 정말 자유가 없습니다. 그저 무엇엔가 씌어서 지금 끌려가고 있으니 어디서부터 자유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참된 매임과 예속 속에 참된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두고 생각을 하여도 한 사람에게 매이고, 한 사람을 사랑하므로 고독과 방종과 허무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한 사람에게 예속되므로 오히려 자유를 느끼는 사람만이 결혼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하니까 남는 것은 술집밖에 없지 않습니까? 질서로부터 벗어나니 이제 무질서가 남고, 폭력이 남았지요. 양심으로부터 자유하겠다고 하니 남는 것은 거짓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고로 무엇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부정적인 진리로서는 참된 자유가 성립되지를 않습니다. 거기에서는 자기 극복, 아니면 자기 학대와 절망 이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참된 매임에서 참된 자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좁은 길로 가십시다. 성서적인 길은 말씀과 성령에 노예가 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의 길입니다. 진리에 매이고, 은혜에 매이며, 사랑에 매여 그리스도와 성령의 종이 되는 순간, 진정한 자유를 얻기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고린도후서 317절에 보면 "주의 영이 게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에 붙들리어 노예가 되는 그 순간, 바로 그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가 자유케 하심으로 자유를 느낍니다. 그가 나를 주관하시므로 자유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악령의 역사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어떤 때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섬짓할 만큼 무서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분명 악령의 역사입니다. 어쩌면 내가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무서운 폭언과 욕설을 해 놓고 뒤늦게 후회합니다. 내 마음 어느 구석에 아직도 악마의 역사가 있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자는 눈빛이 다릅니다. 마음이 다릅니다. 행동이 다릅니다. 여러분께서 혹 제게 묻기를 왜 목사가 되었느냐고 한다면 저는 대답할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공산 치하에서 쫓기고, 붙들리며, 감옥에서 매를 맞으며 느낀 것이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도 악하고 잔인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행위는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분명히 악령에 붙들린 것이요, 마귀의 종이 된 것이지 사람의 탈을 쓰고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이 악령의 역사로부터, 이 사탄의 역사로부터 나와 저를 구원할 수 있을까? 한 그것이 바로 나로 하여금 교역자 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영적으로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내다 본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7:23)라고 하였습니다. 율법과 죄에 붙들려 있는 자기 모습을 비참하게 내다보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그의 역사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은 동시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리라", "내가 가르쳐 준 바를 감당하게 하리라",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또한 "다른 보혜사를 보내어 그가 너를 진리에로 인도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요, 그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는 지혜의 영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진리에로 인도하십니다.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고 마음 문을 열도록, 말씀을 듣도록, 말씀을 깨닫도록,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말씀을 믿도록, 말씀께 생명을 위탁하도록 계속 역사하십니다. 좀 더 나아가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때에 그에게 온전히 붙들린 바를 느끼게 됩니다. 나는 나대로 산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나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2절에서 "나는 지금 성령님의 인도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매임을 받아서, 포로가 되어 강하게 끌려갈 때에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 전에는 죄와 더불어 싸웁니다. 악과 더불어 싸우고, 불의와 더불어 싸워가며 죄에 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며 끌려가다가 죄를 짓고는 또 후회하고, 자기를 뉘우치며 반성하고, 그러다가 다시 끌려가고 마는 비참한 싸움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이제 악령은 물러가고 그리스도에게 붙들려서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주관하게 됩니다.

문제는 내가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붙들려 가느냐, 아니면 질질 끌려가면서 성령을 근심케 하느냐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데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가는 자가 있고 질질 끌려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농촌에서 주인의 손에 끌려가는 송아지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제 주인이 고삐를 잡고 송아지를 끌 고가면 주인이 가는 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졸랑졸랑 따라갔으면 좋으련만 그러지를 못하고 끌려가지 않겠다며 엉덩이를 빼다가 마침내 매를 맞는 어리석은 송아지를 봅니다. 결국은 끌려갈 문제요, 이는 주인이 양보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기왕 갈 길을 매를 맞으면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구주인 주님께서는 한번 중생한 자를 다시 놓치시지 않으십니다.

택함 받은 자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문제는 곱게 따라가느냐, 아니면 매맞으며 끌려가느냐? 하는 그것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령이 탄식하시고, 책망하시며,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거역할 때에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내 안에 내재하여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성령과 나 사이에 대화적 관계와 인격적인 만남의 관계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림자가 둘이 있다는 재미있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 하나는 나의 그림자요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가는 그리스도의 그림자! 그런데 그 그림자가 어떤 때에는 하나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내가 어려운 시험을 당하게 되면 그리스도가 나를 업고 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의 손목을 잡고 나가면 그림자가 둘 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되면 그를 안아 주고 마니까 그림자는 하나가 됩니다. 그와 같이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가 항상 나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분이 강하게 역사 하실 때에 나에게는 이제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런 순간을 바로 충만 이라고 합니다. 내 생각도, 내 의지도, 내 감정도, 완전히 그리스도의 영에 붙들리어 충만하여 살아갑니다. 그런 순간이 그리스도인의 진실된 모습이요,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 성령의 역사를 한번 거역하고 나면 또다시 거역하게 되고, 이어 계속적으로 거역하게 되면 마침내 성령의 역사는 희미해지고 맙니다.

이제는 있는 듯, 없는 듯, 가물가물합니다. 이미 그 심령은 죽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희미해지는 순간 그 눈앞에는 죄가 엎드립니다. 이제는 악령이 와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순간, 이런 상태를 우리는 위험 수위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무서운 함정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에 성령이 근심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요약해 보면 먼저는 용서하지 않을 때에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계속하여 "사랑하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용서하지 않을 때에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두 형제뿐인데도 늘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만나면 싸우고 서로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형이 집을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얼마 후에 아버지의 회갑 잔치를 크게 베풀게 되었는데 이 때에도 큰아들은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진수성찬의 잔치상과 많은 축하객이 있음에도 조금도 기뻐하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한 말씀드립니다. "그 집 나간 형님은 생각지 마십시오. 그 망나니 같은 형님은 생각해서 무얼 하십니까? 제가 형님의 몫까지 다해서 아버지의 여생을 평안히 모실 것입니다" 하며 이렇게 위로를 드렸지만 아버지는 전혀 기뻐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좋은 음식으로 이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동생은 나쁜 형이라고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소중한 맏아들입니다. 좋은 의복, 융숭한 회갑 잔치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귀중한 것은 화목입니다. 무조건 화목하여야 합니다.

이 화목이 없이는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이 올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온갖 이론을 다 동원하여, 진리와 의를 말하고, 갖은 미사여구로 설명을 한다손 치더라도 다 소용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214절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많은 시간을 기도하면서도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까? 이는 화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믿는다고 애써 왔건만 아직도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없습니까? 이는 당연히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용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목의 영인 성령을 따라갈 때에 비로소 성령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화목이 없이 불화하는 거기에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화목해야 함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심 같이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거칠고 부도덕한 말을 내뱉고 보면 곧장 내 마음에 먼저 슬픔이 옵니다.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그런고로 말조심할 것입니다. 부도덕한 말을 하는 순간 성령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을 분냄과 분을 품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 26절 말씀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의 경우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해 지기 전에 고쳐야 합니다. 여기에서 "해 지기 전"이라는 말은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 개념을 두고 한 말로서 다음 날까지 넘기지 말라는 뜻의 소립니다. 잔뜩 분을 품은 채로 어디 두고 보자는 심사로 몇 달씩 벼르고 간다는 데야 어떻게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런고로 분을 품지 말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의 기쁨이란 조건이 없습니다. 물질로 인하여 기쁜 것도 아니요, 명예로 인해 기쁜 것도 아니며, 건강하고 병들고의 문제에 때문에 기쁘고 슬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오직 하나, 성령이 내 안에서 기뻐하실 때에 내가 기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을 기쁘게 함이 없이는 나 또한 절대로 기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칭찬을 듣고 성공을 했다손 치더라도 성령의 기뻐하심이 없고는 나는 기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에 사도 바울은 죽도록 매를 맞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사의 찬송을 부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이요, 승리의 생활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다. 내 안에 계신 성령! 그분께 듣고, 그분과 의논하며,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성령을 기쁘시게 합시다. 그리하여 그 성령이 나를 주관하고 내 안에 충만할 때 비로소 영광이 있으며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도 성령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그 순간에도 성령은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성령을 슬프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여! 성령의 은혜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성령의 은사로 우리를 지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원하옵나니 성령을 근심케 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고, 온전히 성령에 붙들린 바 나의 감정이 되게 하시며, 성령에 예속된 지식, 성령만을 따라 순종하는 내 의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살게 하사 주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기쁨과 그 은혜에 충만한 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성령을 근심케 말라(에베소서 4 : 25-32)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자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차를 몰다 보면 종종 앞에 가는 자동차가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운전을 무사하게 하려면 자기 차만 바로 몬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법을 지켜야 함은 물론이지만 또 하나, 법을 지키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내가 흡수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무사하다는 것입니다. 나만 제대로 간다고 고집을 부려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 실수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비켜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무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차만 살피고 내 갈 길만 보아서도 되지 않습니다. 내 앞차도 보아야 하고, 그 앞에 있는 차, 그리고 뒷 차도 보면서 운전을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간간이 보면 차가 비틀거립니다. 차는 좋은 차입니다. 그럼에도 차가 제 궤도로 가지 못하고 비틀비틀 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차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잘 아시는 대로 운전사가 잘못된 것입니다. 또 운전사도 가까이 가서 보면 생기기는 멀쩡하게 잘 생겼습니다. 운전사의 지식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기술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또한 경력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술취했기 때문입니다. 제 정신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 정신이 무엇엔가 잘못 포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에 예속되었고, 무엇에 씌었으며, 무엇에 붙들렸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인간 규범적 입장에서 분류하여 생각해 본다면, 첫째 사람들 가운데에는 생리학적 본능과 욕정 주도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생리적 욕정 주도적 인간! 이건 정밀 비참한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속물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성 주도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지식을 위주로 삽니다. 자기 판단이 자기에게 대하여 주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소위 지성인이라고 부릅니다만 그러나 이 자기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다시 한번 자기를 얼마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자기라고 하는 교만과 체면에 살아갑니다. 따라서 구제하라면 내 놓을 돈이 없지만 체면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내 놓습니다. 번번이 떨어지면서도 국회의원 되겠다고 평생 출마하는 사람, 아무리 보아도 그만 두었으면 좋으련만 계속 명예에 끌리고 체면, 자존심에 끌려 이런 것 챙기느라 전 신경을 다 쏟으며 그것을 위해서 평생을 다 바치는 불행한 사람을 봅니다. 이제는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삽니다. 자기의 판단은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그리스도의 판단에 따라, 성령이 감화해 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성령 주도적 인간, 이런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전적인 타락이라고 하는 교리를 시인한 그 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의 모든 성품, 모든 지식, 모든 계획, 모든 판단은 모두가 타락된 것이며, 선을 생각하는 그 자체도 타락되었고, 의를 주장하는 그것도 타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타락되었고 완전 타락입니다. 그러기에 지식은 결국 교만을 이루고 감정은 향락으로 치닫습니다. 나아가 허영과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나의 지식과 나의 판단을 믿을 수 있습니까? 내 감정, 이 변덕스러운 인간 나를 믿을 수 있느냐구요? 내 기쁨, 내 기분대로 살아서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완전히 묵살해버려야 사람답게 살는지도 모릅니다. 내 감정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또 내 의지라는 것은 교만과 고집으로 치닫습니다. 여기에서 남는 것은 못된 고집만 남고 맙니다. 따라서 이것 또한 믿을 것이 못됩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우상 숭배로 전락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세 가지의 우상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과학주의입니다. 이 과학주의란 과학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을 만능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과학을 만능으로 생각하는 이 생각이 또 하나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이 우상에 대한 정면적인 심판이 미국이 쏘아 올렸던 로켓 첼린저호의 실패요, 또한 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폭발입니다. 특별히 요즈음에 와서는 컴퓨터라고 하면 무조건 믿으려 드는 젊은이들의 우상적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는 성경은 믿지 않아도 컴퓨터는 믿으려고 합니다.

컴퓨터로 점까지 친다니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만, 그러한 컴퓨터를 몽땅 동원했으나 폭발했습니다. 이제 무슨 할 말이 따로 있습니까?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우상은 황금만능주의 곧 황금이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저 죽을 날도 모르는 채 꾸역꾸역 물질만을 모아들이는 답답한 인간들, 물질만능주의, 이것 또한 대단한 우상입니다. 생각해 보면 돈만 벌면 다 될 줄 아는 사람처럼 바보스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초인간주의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우상이요, 이것의 결정체가 곧 공산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하면서 초인간을 내 세워 보았는데 결국은 저렇게 비참해지고 말았습니다.

보십시오. 무엇을 믿겠습니까? 내 마음도 내가 믿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에게는 정말 자유가 없습니다. 그저 무엇엔가 씌어서 지금 끌려가고 있으니 어디서부터 자유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참된 매임과 예속 속에 참된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두고 생각을 하여도 한 사람에게 매이고, 한 사람을 사랑하므로 고독과 방종과 허무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한 사람에게 예속되므로 오히려 자유를 느끼는 사람만이 결혼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하니까 남는 것은 술집밖에 없지 않습니까? 질서로부터 벗어나니 이제 무질서가 남고, 폭력이 남았지요. 양심으로부터 자유하겠다고 하니 남는 것은 거짓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고로 무엇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부정적인 진리로서는 참된 자유가 성립되지를 않습니다. 거기에서는 자기 극복, 아니면 자기 학대와 절망 이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참된 매임에서 참된 자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좁은 길로 가십시다. 성서적인 길은 말씀과 성령에 노예가 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의 길입니다. 진리에 매이고, 은혜에 매이며, 사랑에 매여 그리스도와 성령의 종이 되는 순간, 진정한 자유를 얻기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고린도후서 317절에 보면 "주의 영이 게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에 붙들리어 노예가 되는 그 순간, 바로 그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가 자유케 하심으로 자유를 느낍니다. 그가 나를 주관하시므로 자유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악령의 역사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어떤 때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섬짓할 만큼 무서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분명 악령의 역사입니다. 어쩌면 내가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무서운 폭언과 욕설을 해 놓고 뒤늦게 후회합니다. 내 마음 어느 구석에 아직도 악마의 역사가 있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자는 눈빛이 다릅니다. 마음이 다릅니다. 행동이 다릅니다. 여러분께서 혹 제게 묻기를 왜 목사가 되었느냐고 한다면 저는 대답할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공산 치하에서 쫓기고, 붙들리며, 감옥에서 매를 맞으며 느낀 것이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도 악하고 잔인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행위는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분명히 악령에 붙들린 것이요, 마귀의 종이 된 것이지 사람의 탈을 쓰고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이 악령의 역사로부터, 이 사탄의 역사로부터 나와 저를 구원할 수 있을까? 한 그것이 바로 나로 하여금 교역자 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영적으로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내다 본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7:23)라고 하였습니다. 율법과 죄에 붙들려 있는 자기 모습을 비참하게 내다보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그의 역사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은 동시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리라", "내가 가르쳐 준 바를 감당하게 하리라",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또한 "다른 보혜사를 보내어 그가 너를 진리에로 인도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요, 그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는 지혜의 영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진리에로 인도하십니다.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고 마음 문을 열도록, 말씀을 듣도록, 말씀을 깨닫도록,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말씀을 믿도록, 말씀께 생명을 위탁하도록 계속 역사하십니다. 좀 더 나아가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때에 그에게 온전히 붙들린 바를 느끼게 됩니다. 나는 나대로 산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나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2절에서 "나는 지금 성령님의 인도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매임을 받아서, 포로가 되어 강하게 끌려갈 때에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 전에는 죄와 더불어 싸웁니다. 악과 더불어 싸우고, 불의와 더불어 싸워가며 죄에 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며 끌려가다가 죄를 짓고는 또 후회하고, 자기를 뉘우치며 반성하고, 그러다가 다시 끌려가고 마는 비참한 싸움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이제 악령은 물러가고 그리스도에게 붙들려서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주관하게 됩니다.

문제는 내가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붙들려 가느냐, 아니면 질질 끌려가면서 성령을 근심케 하느냐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데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가는 자가 있고 질질 끌려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농촌에서 주인의 손에 끌려가는 송아지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제 주인이 고삐를 잡고 송아지를 끌 고가면 주인이 가는 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졸랑졸랑 따라갔으면 좋으련만 그러지를 못하고 끌려가지 않겠다며 엉덩이를 빼다가 마침내 매를 맞는 어리석은 송아지를 봅니다. 결국은 끌려갈 문제요, 이는 주인이 양보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기왕 갈 길을 매를 맞으면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구주인 주님께서는 한번 중생한 자를 다시 놓치시지 않으십니다.

택함 받은 자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문제는 곱게 따라가느냐, 아니면 매맞으며 끌려가느냐? 하는 그것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령이 탄식하시고, 책망하시며,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거역할 때에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내 안에 내재하여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성령과 나 사이에 대화적 관계와 인격적인 만남의 관계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림자가 둘이 있다는 재미있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 하나는 나의 그림자요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가는 그리스도의 그림자! 그런데 그 그림자가 어떤 때에는 하나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내가 어려운 시험을 당하게 되면 그리스도가 나를 업고 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의 손목을 잡고 나가면 그림자가 둘 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되면 그를 안아 주고 마니까 그림자는 하나가 됩니다. 그와 같이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가 항상 나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분이 강하게 역사 하실 때에 나에게는 이제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런 순간을 바로 충만 이라고 합니다. 내 생각도, 내 의지도, 내 감정도, 완전히 그리스도의 영에 붙들리어 충만하여 살아갑니다. 그런 순간이 그리스도인의 진실된 모습이요,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 성령의 역사를 한번 거역하고 나면 또다시 거역하게 되고, 이어 계속적으로 거역하게 되면 마침내 성령의 역사는 희미해지고 맙니다.

이제는 있는 듯, 없는 듯, 가물가물합니다. 이미 그 심령은 죽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희미해지는 순간 그 눈앞에는 죄가 엎드립니다. 이제는 악령이 와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순간, 이런 상태를 우리는 위험 수위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무서운 함정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에 성령이 근심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요약해 보면 먼저는 용서하지 않을 때에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계속하여 "사랑하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용서하지 않을 때에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두 형제뿐인데도 늘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만나면 싸우고 서로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형이 집을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얼마 후에 아버지의 회갑 잔치를 크게 베풀게 되었는데 이 때에도 큰아들은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진수성찬의 잔치상과 많은 축하객이 있음에도 조금도 기뻐하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한 말씀드립니다. "그 집 나간 형님은 생각지 마십시오. 그 망나니 같은 형님은 생각해서 무얼 하십니까? 제가 형님의 몫까지 다해서 아버지의 여생을 평안히 모실 것입니다" 하며 이렇게 위로를 드렸지만 아버지는 전혀 기뻐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좋은 음식으로 이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동생은 나쁜 형이라고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소중한 맏아들입니다. 좋은 의복, 융숭한 회갑 잔치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귀중한 것은 화목입니다. 무조건 화목하여야 합니다.

이 화목이 없이는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이 올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온갖 이론을 다 동원하여, 진리와 의를 말하고, 갖은 미사여구로 설명을 한다손 치더라도 다 소용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214절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많은 시간을 기도하면서도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까? 이는 화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믿는다고 애써 왔건만 아직도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없습니까? 이는 당연히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용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목의 영인 성령을 따라갈 때에 비로소 성령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화목이 없이 불화하는 거기에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화목해야 함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심 같이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거칠고 부도덕한 말을 내뱉고 보면 곧장 내 마음에 먼저 슬픔이 옵니다.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그런고로 말조심할 것입니다. 부도덕한 말을 하는 순간 성령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을 분냄과 분을 품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 26절 말씀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의 경우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해 지기 전에 고쳐야 합니다. 여기에서 "해 지기 전"이라는 말은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 개념을 두고 한 말로서 다음 날까지 넘기지 말라는 뜻의 소립니다. 잔뜩 분을 품은 채로 어디 두고 보자는 심사로 몇 달씩 벼르고 간다는 데야 어떻게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런고로 분을 품지 말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의 기쁨이란 조건이 없습니다. 물질로 인하여 기쁜 것도 아니요, 명예로 인해 기쁜 것도 아니며, 건강하고 병들고의 문제에 때문에 기쁘고 슬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오직 하나, 성령이 내 안에서 기뻐하실 때에 내가 기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을 기쁘게 함이 없이는 나 또한 절대로 기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칭찬을 듣고 성공을 했다손 치더라도 성령의 기뻐하심이 없고는 나는 기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에 사도 바울은 죽도록 매를 맞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사의 찬송을 부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이요, 승리의 생활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다. 내 안에 계신 성령! 그분께 듣고, 그분과 의논하며,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성령을 기쁘시게 합시다. 그리하여 그 성령이 나를 주관하고 내 안에 충만할 때 비로소 영광이 있으며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도 성령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그 순간에도 성령은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성령을 슬프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여! 성령의 은혜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성령의 은사로 우리를 지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원하옵나니 성령을 근심케 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고, 온전히 성령에 붙들린 바 나의 감정이 되게 하시며, 성령에 예속된 지식, 성령만을 따라 순종하는 내 의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살게 하사 주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기쁨과 그 은혜에 충만한 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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