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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능하게 하시는 예수(디모데전서 1장 12절~17절)

by 【고동엽】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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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능하게 하시는 예수(디모데전서 11217)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사람은 자기 정체에 대한 진실한 평가를 자기 스스로 내릴 수 있을 때에야 충분히 행복한 법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의지나 확신, 그리고 살아가는 힘, 그 강한 능력이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무서운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실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잃어버릴 때에 우리는 약해질 수밖에 없고, 진실을 떠날 때에 우리는 비굴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말을 합니다. 나의 실패한 책임이 세상에 있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원망도 해봅니다.

그러나, 속일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속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심지어는 하나님께 대하여도 가장 귀중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한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진실한 자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을 내가 속이고 있든가, 아니면 내가 나 자신에게 속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알고 보면 내가 나를 정죄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향하여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할 때에, 그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공연히 내 책임을 남에게 돌려 봅니다마는 그것은 부질없는 외침이요 발악입니다.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나의 성실입니다. 자기를 과대평가 하는 사람은 불안 속에서 살수밖에 없으며, 자기를 과소평가 하는 사람은 불평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나를 평가하는 평가가 있고, 남이 나를 평가하는 평가가 있고, 하나님이 나를 평가해주시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 삼자가 일치할 때에 우리는 천하무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질 때에 우리는 빈약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평가하지 말고 남들의 나에 대한 오직 하나님의 나에 대한 평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해주시는 나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실존 의식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내 멋대로 나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내 진실까지도 하나님 앞에 맡겨버립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를 찾고, 그리스도가 부여해주시는 만큼, 그가 인정해주시는바만 내것으로 알고 받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부르신바" 그 부름 안에서 자기 존재를 찾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평가하는 방법과 기준을 완전히 바꾸어 버릴 때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로서 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평가하는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나를 크게, 너무 크게만 보다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를 너무 작게만 생각하다가 하나님께로서 받은 은혜까지도 부인해버리는 딱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서 나 자신을 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점에서도 훌륭한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비롯해서 그가 쓴 모든 편지들을 여기저기 찾아보면 그는 자기 평가에 대해서 냉정한 사람입니다. 다른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깨끗하게,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진실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대단한 일입니다.

로마서 7장을 읽으면 읽을 때마다 죄송하지만 인간적으로 사도 바울을 새삼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솔직성 때문입니다. 로마교회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얼굴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라고만 알고, 당시에 소아시아와 온 지역에 교회를 세운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라고만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나는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사람이다. 원하는 바를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일만 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 마음에, 내 인격 속에 두 법이 있다는 고백을 그대로 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솔직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솔직함과 그 진실이 그를 강하게, 그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굳게 설 수 있게 하는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업적과 지식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소유에 따른 평가도 없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업적이 많을 때에 그것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고, 소유가 많을 때에 그 소유대로, 심지어는 소속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으면 그 업적대로 가기가 자기 평가를 내리려듭니다.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지위, 지식, 명성, 명예 이런 것들과 자기 존재와를 동일시하려고 하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한 크나큰 주의 종인데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한 다음에 내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렵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했다고 하는 그 실적과 나의 존재와는 별개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게는 목사가 되기 전에 늘 이러한 문제로 심각했습니다. 목사라는 성직과 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관계 말입니다. 이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가? 나 곽선희라고 하는 자연인과 성직이라고 하는 이 엄청난 지위 사이의 문제를 두고 많이 고민하다가 마침내는 완전히 별개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일단 집에 들어서면 나는 곽선희라고 하는 자연인이요 한 남편일 뿐이지, 목사라고는 생각지도 말고 부르지도 말라, 목사로 대접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나는 일단 집에 들어가면 하나의 남자요, 남편이요,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일 뿐이라고 그것을 잊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다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지위에 따라서, 가진 소유에 따라서, 밖에서 받는 존경에 따라서, 어느 결에고 자기 존재의 정체를 잃어버리지는 않고 있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냉정했습니다. 아주 엄격했습니다. 나의 나됨은 나라고, 업적과도 사도의 명분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도 내가 오히려 실격자가 될까 두렵다 자기 충실, 자기 진실에 대하여 그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솔직하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9절에 보면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하고, 에베소서 38절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 했으며, 본문에서는 "죄인의 괴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라고 말씀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자신은 부득불 복음을 전한다고도 말씀합니다. '부득불'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를 당할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도 복음을 전했지만 어떤 때에는 전하지 않을 수 없어서, 불가피성이 있어서 전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느낀 대로 보면 그가 복음을 전하고 열심히 뛰는 동안에는 건강도 따랐지마는 어쩌다가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다가 보면 쑤시는 육체의 가시가 그를 괴롭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부득불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칭찬 받을 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거룩한 직분을 맡은 사람이라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억지로 할 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충만하여 복음을 전할 때도 있지만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어떤 때에는 이 강단에 서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죽기보다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 일은 내게 주어진 직분이므로 때로는 이 강단에 한번 서기 위하여 무려 세 시간 동안 엎드려 기도하고 나서야 겨우 단에 서는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지금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솔직합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부득불 복음을 전할 때도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칭찬 받을 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이 진실과 이 솔직함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이란 진실하면 진실한 만큼 위대한 법입니다. 솔직한 만큼 강한 법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도 부족하고 형편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은 큰 은혜로, 풍성한 은혜로, 그 긍휼로 나를 붙들어 오늘의 내가 되게 했다 ---- 그렇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는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라고 말씀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에 방탕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다가 중생하여 성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위트 넘치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죄도 지을 수가 없다" ---- 사실입니다. 내가 죄지으려고 하는 현장에서 벼락을 맞는다면 끝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그 인내함과 너그러움이 있기에 죄도 짓고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래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이 형편없는 길을 가고 있을 때에도 오래오래 참아 주셨기에 내가 오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은혜가 풍성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불신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증오를 넘어서서 마침내 내가 오늘에 있다고 그는 감격하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잘 읽어보면 바울은 은혜 앞에 몇 가지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해주셨다는 데에 대한 감격입니다. 갈라디아서 115절에 보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셨다" 라고 합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큰 경험 다음의 일인 것 같습니다.

전에는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내 멋대로 사는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내가 선택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줄 알았습니다마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고 부르심을 받은 다음에는 옛날 일을 생각해봅니다. 모두가 은혜였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아서 오늘 내가 있다고 그는 확실히 믿었습니다.

나 자신의 뜻으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구원의 경륜, 그 창조적인 놀라운 역사, 그 엄청난 역사적 사명 안에 내 존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역사란 놀라운 것입니다.

미국 작가 오 헨리는 "발부리에 채이는 자갈 하나도 의미 없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필요해서 존재합니다. 가끔 우리는 무엇은 필요하고 무엇은 필요치 않다고들 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동안 이상구박사의 이야기 때문에 떠들썩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강연이 녹음된 것을 들어보면서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목젖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가끔가다가 부어서 말썽이거든요. 이것 때문에 감기가 오기도 하고 목이 쉬기도 하는데 그런 목젖이 왜 만들어졌단 말인가? 상하게 되면 그것을 가위로 잘라버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언뜻 생각하기에는 없느니만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이론은 창조주가 허투루 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맹장이고 목젖이고 반드시 필요해서 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젖 아래에는 특별히 중요한 백혈구를 내는 티 임파구가 있다고 합니다. 입으로부터의 더러운 세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딱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태학적으로 볼 때에는 벌레들도 모두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농사에도 많은 벌레와 곤충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자연 그대로 다 두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욕심을 내어 소출 좀 더 내보겠다고 갖은 독약으로 만든 농약을 쓰는 바람에 이것이 한바퀴 빙 돌아서 이제는 사람들이 그 독약을 먹게 되어 죽느니 사느니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돈 많이 내고 무공해식품이니 뭐니 하는 것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한심한 일입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뱀까지도 생태학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랍니다. 하나님이 필요치 않은 것을 세상에 낸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고치다가 요사이는 사람들이 죽으면 이제는 썩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도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방부제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다나요.

한낱 미물이라도 필요해서 지어졌다고 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이 인간이, 여러분과 나 한사람 한사람이 왜 의미 없이 태어났겠습니까? 왜 필요 없이 살아가겠습니까? 사도 바울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존재의 바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세워놓은 가설, 쓸데없는 욕망 때문에 슬퍼하고 절망하고 낙심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필요한 존재입니다. 내가 볼 때에는 내가 필요치 않습니다마는, 이웃이 볼 때에는 내가 거추장스러운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놓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택정하셨다, 그뿐만이 아니라 과거를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하실 뿐더러 과거를 전혀 묻지 않으시는 그 일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훼방자는 입으로 훼방하는 자요 핍박자는 행동으로 핍박하는 자요 포행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못된 사람을 택해서 과거를 전혀 묻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신다 ---- 그래서 그는 감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요한복음 21장을 볼 때마다 특별히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그 많은 경고와 주의를 듣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만 자다가 마침내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엄청난 실수를 합니다.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명색이 수제자인데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는 죄를 짓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는 그것이 너무나 가책이 되었던가 봅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 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갈릴리로 물고기 잡으러 돌아간 것입니다. 옛집으로 돌아간 그 앞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십니다.

이런 경우,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이 사람아 그래, 내가 뭐라고 하던가? 정신차리라고 하지 않던가? 깨어 기도하라고 하지 않던가? 끝까지 말을 안 듣더니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 했구나. 또 모른다 했으면 그만이지 거기다가 또 저주까지 할 것은 뭐란 말인가?" 이렇게 한마디쯤 비아냥거려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오직 한마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 어쩌면 이렇게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어떤 개구장이 어린아이가 늘 말썽을 일으킵니다. 하도 장난이 심해서 툭하면 남의 집 유리창을 깨뜨리기 일쑤고 남의 집 아이를 때려서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이렇게 사고를 치니 그 아이의 부모는 그 뒤치다꺼리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어떤 때에는 이 아이를 붙들고 "얘야, 제발 좀 무사하게 지내다오. 이게 무슨 짓이냐 응? 이제부터 일주일 동안만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너에게 자전거를 사 주마. 부디 일주일 동안만 참아다오" 하고 애원하다시피 하니 '알았다' 라고 대답합니다. 과연 일주일 동안은 사고를 내지 않더랍니다. 일주일만에 상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져서 "얘야, 그렇게 착한 아이가 그 동안은 왜 그토록 못되게 놀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그 아버지의 실수였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시니 내가 바로 살수가 없잖아요?" 하고 아이는 충격적인 소리를 합니다.

"지난 일을 왜 자꾸 기억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끝나고 말았답니다.

화해하자고 마주 앉았다가 지난 일을 들먹이는 바람에 다시 싸우게 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정말로 용서할 마음이 있으면 묻지도 말 것입니다. 되풀이 생각지도 말 것입니다. 지난 일을 다시 들먹여보았자 소용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옛날의 그 핍박자를 깨끗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믿어주셨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에 남에게 주는 선물 치고 믿음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 큰 존경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지금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잘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가난과 비참이 있습니다. 바로 불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믿지를 못합니다.

요사이는 고아(孤兒)가 많습니다. 부모 없는 아이가 고아 아닙니까?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고아라고 하면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어떤 배신을 당해서 아이의 마음속에 불신감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런 아이가 고아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나를 버렸는데 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 이런 마음이 고아 의식입니다. 고아 의식을 가진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믿고 있습니까?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로 남을 믿고 있습니까?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용서라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를 믿어주는 것이요, 믿음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한 사랑입니다. 용서는 그의 과거를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미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도 바울을 전적으로 믿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충성 되이 여겼다" 라고 말씀합니다.

헬라어 원문대로는 '피스토스'입니다. 이 말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실 때에 구원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으실 수 있을 때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믿으실 수 있을 때에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직분을 맡기심이니" ---- 바울은 직분을 맡았다는 것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일을 맡는 것, 참 고마운 일입니다. 십자가로 구속한 그 소중한 양들을 이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그 거룩한 교회를 바로 이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일을 맡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겸손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느 대학의 총무처장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디다. 대학 교수들이 대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좀 열심히 가르쳤으면 좋으련마는 가만히 보면 빈둥빈둥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그런 교수들이 막상 은퇴를 하게 되니까 오히려 옛집을 팔아서 대학 가까이로 이사들을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대학을 빙빙 돌면서 강의 한시간 달라고 조른답니다. 그럴 때마다 안타깝다고 합니다.

진작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한답니다. 은퇴하고 나서야 자기가 맡은 직분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지요.

일을 맡았다고 하는 것은 작거나 크거나 소중한 것입니다. 제가 힘에 지나치도록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다보면 가끔 걱정을 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웬만한 것에는 응하지 마시고 나가시지 마세요"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오라 할 때 가야지요. 아무 때나 오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다 때가 있는 거예요."

일을 맡는다, 일이 맡겨진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장로건 집사건 성가대건 주일학교 선생이건, 맡겨진다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주셨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고자 하심이요, 또한 나에게 능력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 맡은 바에 대한 감격, 맡았다는 데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권적인 영광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엔두나모오'라고 하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엠파워(empower)입니다. 능력을 주신다, 가능케 한다라는 뜻입니다. 맡기실 때에 그냥 맡기시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맡기셨으면 이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도 능력도 지식도, 모든 은사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맡기십니다. 내가 내놓아야 할 카드는 오직 하나, 충성뿐입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가서 크게 성공한 분이 있습니다. 누가 그에게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나의 가장 중요한 활동 모토는 사랑이요, 내가 유용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확증은 허영과 이기심을 버린 것이며, 가장 확실한 계획은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썩어지려고 하는 데에야 아무도 말리지 못합니다. 위대한 능력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 나로 능력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돈도 지혜도 지식도 건강도 다 필요 없습니다. 그것들은 필요할 때에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주십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충성하느냐 입니다. 충성만은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충성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진실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평가에, 자기 능력에, 그리고 사실 자체에 대하여, 사명에 대하여 진실했습니다. 여기에 인정을 받고 그는 더욱더 크게, 능력 있게, 영광되게 쓰임 받은 것을 봅니다.

오직 은혜 오직 감사, 그럴 때에 오직 능력, 그의 능력이 여기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  

 

나를 능하게 하시는 예수(디모데전서 11217)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사람은 자기 정체에 대한 진실한 평가를 자기 스스로 내릴 수 있을 때에야 충분히 행복한 법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의지나 확신, 그리고 살아가는 힘, 그 강한 능력이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무서운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실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잃어버릴 때에 우리는 약해질 수밖에 없고, 진실을 떠날 때에 우리는 비굴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말을 합니다. 나의 실패한 책임이 세상에 있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원망도 해봅니다.

그러나, 속일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속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심지어는 하나님께 대하여도 가장 귀중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한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진실한 자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을 내가 속이고 있든가, 아니면 내가 나 자신에게 속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알고 보면 내가 나를 정죄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향하여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할 때에, 그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공연히 내 책임을 남에게 돌려 봅니다마는 그것은 부질없는 외침이요 발악입니다.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나의 성실입니다. 자기를 과대평가 하는 사람은 불안 속에서 살수밖에 없으며, 자기를 과소평가 하는 사람은 불평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나를 평가하는 평가가 있고, 남이 나를 평가하는 평가가 있고, 하나님이 나를 평가해주시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 삼자가 일치할 때에 우리는 천하무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질 때에 우리는 빈약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평가하지 말고 남들의 나에 대한 오직 하나님의 나에 대한 평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해주시는 나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실존 의식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내 멋대로 나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내 진실까지도 하나님 앞에 맡겨버립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를 찾고, 그리스도가 부여해주시는 만큼, 그가 인정해주시는바만 내것으로 알고 받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부르신바" 그 부름 안에서 자기 존재를 찾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평가하는 방법과 기준을 완전히 바꾸어 버릴 때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로서 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평가하는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나를 크게, 너무 크게만 보다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를 너무 작게만 생각하다가 하나님께로서 받은 은혜까지도 부인해버리는 딱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서 나 자신을 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점에서도 훌륭한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비롯해서 그가 쓴 모든 편지들을 여기저기 찾아보면 그는 자기 평가에 대해서 냉정한 사람입니다. 다른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깨끗하게,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진실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대단한 일입니다.

로마서 7장을 읽으면 읽을 때마다 죄송하지만 인간적으로 사도 바울을 새삼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솔직성 때문입니다. 로마교회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얼굴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라고만 알고, 당시에 소아시아와 온 지역에 교회를 세운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라고만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나는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사람이다. 원하는 바를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일만 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 마음에, 내 인격 속에 두 법이 있다는 고백을 그대로 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솔직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솔직함과 그 진실이 그를 강하게, 그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굳게 설 수 있게 하는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업적과 지식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소유에 따른 평가도 없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업적이 많을 때에 그것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고, 소유가 많을 때에 그 소유대로, 심지어는 소속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으면 그 업적대로 가기가 자기 평가를 내리려듭니다.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지위, 지식, 명성, 명예 이런 것들과 자기 존재와를 동일시하려고 하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한 크나큰 주의 종인데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한 다음에 내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렵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했다고 하는 그 실적과 나의 존재와는 별개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게는 목사가 되기 전에 늘 이러한 문제로 심각했습니다. 목사라는 성직과 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관계 말입니다. 이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가? 나 곽선희라고 하는 자연인과 성직이라고 하는 이 엄청난 지위 사이의 문제를 두고 많이 고민하다가 마침내는 완전히 별개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일단 집에 들어서면 나는 곽선희라고 하는 자연인이요 한 남편일 뿐이지, 목사라고는 생각지도 말고 부르지도 말라, 목사로 대접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나는 일단 집에 들어가면 하나의 남자요, 남편이요,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일 뿐이라고 그것을 잊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다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지위에 따라서, 가진 소유에 따라서, 밖에서 받는 존경에 따라서, 어느 결에고 자기 존재의 정체를 잃어버리지는 않고 있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냉정했습니다. 아주 엄격했습니다. 나의 나됨은 나라고, 업적과도 사도의 명분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도 내가 오히려 실격자가 될까 두렵다 자기 충실, 자기 진실에 대하여 그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솔직하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9절에 보면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하고, 에베소서 38절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 했으며, 본문에서는 "죄인의 괴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라고 말씀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자신은 부득불 복음을 전한다고도 말씀합니다. '부득불'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를 당할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도 복음을 전했지만 어떤 때에는 전하지 않을 수 없어서, 불가피성이 있어서 전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느낀 대로 보면 그가 복음을 전하고 열심히 뛰는 동안에는 건강도 따랐지마는 어쩌다가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다가 보면 쑤시는 육체의 가시가 그를 괴롭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부득불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칭찬 받을 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거룩한 직분을 맡은 사람이라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억지로 할 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충만하여 복음을 전할 때도 있지만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어떤 때에는 이 강단에 서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죽기보다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 일은 내게 주어진 직분이므로 때로는 이 강단에 한번 서기 위하여 무려 세 시간 동안 엎드려 기도하고 나서야 겨우 단에 서는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지금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솔직합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부득불 복음을 전할 때도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칭찬 받을 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이 진실과 이 솔직함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이란 진실하면 진실한 만큼 위대한 법입니다. 솔직한 만큼 강한 법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도 부족하고 형편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은 큰 은혜로, 풍성한 은혜로, 그 긍휼로 나를 붙들어 오늘의 내가 되게 했다 ---- 그렇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는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라고 말씀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에 방탕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다가 중생하여 성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위트 넘치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죄도 지을 수가 없다" ---- 사실입니다. 내가 죄지으려고 하는 현장에서 벼락을 맞는다면 끝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그 인내함과 너그러움이 있기에 죄도 짓고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래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이 형편없는 길을 가고 있을 때에도 오래오래 참아 주셨기에 내가 오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은혜가 풍성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불신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증오를 넘어서서 마침내 내가 오늘에 있다고 그는 감격하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잘 읽어보면 바울은 은혜 앞에 몇 가지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해주셨다는 데에 대한 감격입니다. 갈라디아서 115절에 보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셨다" 라고 합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큰 경험 다음의 일인 것 같습니다.

전에는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내 멋대로 사는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내가 선택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줄 알았습니다마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고 부르심을 받은 다음에는 옛날 일을 생각해봅니다. 모두가 은혜였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아서 오늘 내가 있다고 그는 확실히 믿었습니다.

나 자신의 뜻으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구원의 경륜, 그 창조적인 놀라운 역사, 그 엄청난 역사적 사명 안에 내 존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역사란 놀라운 것입니다.

미국 작가 오 헨리는 "발부리에 채이는 자갈 하나도 의미 없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필요해서 존재합니다. 가끔 우리는 무엇은 필요하고 무엇은 필요치 않다고들 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동안 이상구박사의 이야기 때문에 떠들썩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강연이 녹음된 것을 들어보면서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목젖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가끔가다가 부어서 말썽이거든요. 이것 때문에 감기가 오기도 하고 목이 쉬기도 하는데 그런 목젖이 왜 만들어졌단 말인가? 상하게 되면 그것을 가위로 잘라버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언뜻 생각하기에는 없느니만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이론은 창조주가 허투루 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맹장이고 목젖이고 반드시 필요해서 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젖 아래에는 특별히 중요한 백혈구를 내는 티 임파구가 있다고 합니다. 입으로부터의 더러운 세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딱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태학적으로 볼 때에는 벌레들도 모두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농사에도 많은 벌레와 곤충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자연 그대로 다 두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욕심을 내어 소출 좀 더 내보겠다고 갖은 독약으로 만든 농약을 쓰는 바람에 이것이 한바퀴 빙 돌아서 이제는 사람들이 그 독약을 먹게 되어 죽느니 사느니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돈 많이 내고 무공해식품이니 뭐니 하는 것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한심한 일입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뱀까지도 생태학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랍니다. 하나님이 필요치 않은 것을 세상에 낸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고치다가 요사이는 사람들이 죽으면 이제는 썩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도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방부제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다나요.

한낱 미물이라도 필요해서 지어졌다고 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이 인간이, 여러분과 나 한사람 한사람이 왜 의미 없이 태어났겠습니까? 왜 필요 없이 살아가겠습니까? 사도 바울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존재의 바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세워놓은 가설, 쓸데없는 욕망 때문에 슬퍼하고 절망하고 낙심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필요한 존재입니다. 내가 볼 때에는 내가 필요치 않습니다마는, 이웃이 볼 때에는 내가 거추장스러운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놓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택정하셨다, 그뿐만이 아니라 과거를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하실 뿐더러 과거를 전혀 묻지 않으시는 그 일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훼방자는 입으로 훼방하는 자요 핍박자는 행동으로 핍박하는 자요 포행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못된 사람을 택해서 과거를 전혀 묻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신다 ---- 그래서 그는 감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요한복음 21장을 볼 때마다 특별히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그 많은 경고와 주의를 듣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만 자다가 마침내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엄청난 실수를 합니다.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명색이 수제자인데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는 죄를 짓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는 그것이 너무나 가책이 되었던가 봅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 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갈릴리로 물고기 잡으러 돌아간 것입니다. 옛집으로 돌아간 그 앞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십니다.

이런 경우,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이 사람아 그래, 내가 뭐라고 하던가? 정신차리라고 하지 않던가? 깨어 기도하라고 하지 않던가? 끝까지 말을 안 듣더니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 했구나. 또 모른다 했으면 그만이지 거기다가 또 저주까지 할 것은 뭐란 말인가?" 이렇게 한마디쯤 비아냥거려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오직 한마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 어쩌면 이렇게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어떤 개구장이 어린아이가 늘 말썽을 일으킵니다. 하도 장난이 심해서 툭하면 남의 집 유리창을 깨뜨리기 일쑤고 남의 집 아이를 때려서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이렇게 사고를 치니 그 아이의 부모는 그 뒤치다꺼리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어떤 때에는 이 아이를 붙들고 "얘야, 제발 좀 무사하게 지내다오. 이게 무슨 짓이냐 응? 이제부터 일주일 동안만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너에게 자전거를 사 주마. 부디 일주일 동안만 참아다오" 하고 애원하다시피 하니 '알았다' 라고 대답합니다. 과연 일주일 동안은 사고를 내지 않더랍니다. 일주일만에 상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져서 "얘야, 그렇게 착한 아이가 그 동안은 왜 그토록 못되게 놀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그 아버지의 실수였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시니 내가 바로 살수가 없잖아요?" 하고 아이는 충격적인 소리를 합니다.

"지난 일을 왜 자꾸 기억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끝나고 말았답니다.

화해하자고 마주 앉았다가 지난 일을 들먹이는 바람에 다시 싸우게 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정말로 용서할 마음이 있으면 묻지도 말 것입니다. 되풀이 생각지도 말 것입니다. 지난 일을 다시 들먹여보았자 소용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옛날의 그 핍박자를 깨끗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믿어주셨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에 남에게 주는 선물 치고 믿음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 큰 존경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지금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잘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가난과 비참이 있습니다. 바로 불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믿지를 못합니다.

요사이는 고아(孤兒)가 많습니다. 부모 없는 아이가 고아 아닙니까?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고아라고 하면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어떤 배신을 당해서 아이의 마음속에 불신감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런 아이가 고아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나를 버렸는데 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 이런 마음이 고아 의식입니다. 고아 의식을 가진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믿고 있습니까?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로 남을 믿고 있습니까?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용서라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를 믿어주는 것이요, 믿음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한 사랑입니다. 용서는 그의 과거를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미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도 바울을 전적으로 믿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충성 되이 여겼다" 라고 말씀합니다.

헬라어 원문대로는 '피스토스'입니다. 이 말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실 때에 구원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으실 수 있을 때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믿으실 수 있을 때에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직분을 맡기심이니" ---- 바울은 직분을 맡았다는 것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일을 맡는 것, 참 고마운 일입니다. 십자가로 구속한 그 소중한 양들을 이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그 거룩한 교회를 바로 이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일을 맡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겸손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느 대학의 총무처장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디다. 대학 교수들이 대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좀 열심히 가르쳤으면 좋으련마는 가만히 보면 빈둥빈둥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그런 교수들이 막상 은퇴를 하게 되니까 오히려 옛집을 팔아서 대학 가까이로 이사들을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대학을 빙빙 돌면서 강의 한시간 달라고 조른답니다. 그럴 때마다 안타깝다고 합니다.

진작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한답니다. 은퇴하고 나서야 자기가 맡은 직분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지요.

일을 맡았다고 하는 것은 작거나 크거나 소중한 것입니다. 제가 힘에 지나치도록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다보면 가끔 걱정을 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웬만한 것에는 응하지 마시고 나가시지 마세요"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오라 할 때 가야지요. 아무 때나 오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다 때가 있는 거예요."

일을 맡는다, 일이 맡겨진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장로건 집사건 성가대건 주일학교 선생이건, 맡겨진다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주셨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고자 하심이요, 또한 나에게 능력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 맡은 바에 대한 감격, 맡았다는 데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권적인 영광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엔두나모오'라고 하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엠파워(empower)입니다. 능력을 주신다, 가능케 한다라는 뜻입니다. 맡기실 때에 그냥 맡기시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맡기셨으면 이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도 능력도 지식도, 모든 은사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맡기십니다. 내가 내놓아야 할 카드는 오직 하나, 충성뿐입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가서 크게 성공한 분이 있습니다. 누가 그에게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나의 가장 중요한 활동 모토는 사랑이요, 내가 유용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확증은 허영과 이기심을 버린 것이며, 가장 확실한 계획은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썩어지려고 하는 데에야 아무도 말리지 못합니다. 위대한 능력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 나로 능력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돈도 지혜도 지식도 건강도 다 필요 없습니다. 그것들은 필요할 때에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주십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충성하느냐 입니다. 충성만은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충성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진실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평가에, 자기 능력에, 그리고 사실 자체에 대하여, 사명에 대하여 진실했습니다. 여기에 인정을 받고 그는 더욱더 크게, 능력 있게, 영광되게 쓰임 받은 것을 봅니다.

오직 은혜 오직 감사, 그럴 때에 오직 능력, 그의 능력이 여기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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