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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의 일과 나의 일(고린도전서 3장 1절~9절)

by 【고동엽】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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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과 나의 일(고린도전서 319)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아무래도 사람은 복을 받아야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되는 일이라는 것은 생각하면 하찮은 것이요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적어도 우리 인간은 세 가지의 기본적인 복을 받고 삽니다. 이 세 가지 복에 대해서 우리는 그대로 인정을 하고, 어떤 분복이 주어졌든지 간에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를 찬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부모가 아닙니다. 부모가 나를 낳아주어서 세상에 난 것입니다. 어떤 부모 아래 태어났든지 간에 절대로 이것을 탓하지는 맙시다. 좋은 부모 슬하에 태어났건 그렇지 못했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내게 주어진 이 분복을 그대로 수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원망은 금물입니다. 내게 주어진 분복이니까 말입니다.

둘째는, 어느 시점에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긴긴 시간의, 역사 속의 어느 시점에서 태어나느냐, 어느 시점에서 세상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왜 이렇게 어려운 때에 태어났단 말인가" 하는 따위의 탄식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을 이대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앞으로 남은 복입니다 마는, 바로 어느 시간에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가서 잘못 끝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참 귀하게 고결하게 세상을 살았는데 늘그막에 그만 망령이 들어서 해서 아니될 말을 하고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한다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 마음대로는 못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느 시간에 죽게 될는지 몰라도 그 죽는 시간에 대해서 역시 가부를 말하지 맙시다. 이것은 우리의 축복입니다. 주어지는 그대로가 내게 안식이요, 내게 축복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복, 아주 원천적인 복이 있어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불만이나 원망도 결국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되고 하나님께까지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본래성과 자기의 페이스를 바로 알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나됨이 피조물이요, 극히 제한된 분복을 살아갑니다.

로마서 1133절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리고 34장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이렇게 감탄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모사가 되겠습니까? 누가 그 하나님의 오묘하고 깊은 뜻을 알았겠습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 내가 나올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시고 얼마나 귀한 역사를 이루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셨습니까? 그 놀라운 역사, 그 엄청난 뜻을 누가 일찍이 알았겠습니까?

이 기회에 우리 한번 기도 제목에 대하여 생각해보십시다. 가령,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모조리 컴퓨터에 입력해서 분석해본다면 어떻게 나올까요? 저는 이렇게 한번 짐작해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모사가 되려 한다고요. 하나님께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거의가 이런 식입니다. 알고보면 거의가 불 신앙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참으로 건방진 소리들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더 큰 역사를 보고 더 큰 기도의 응답을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믿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합니다. 저런 사람에게는 복을 주지 말고 나같은 사람에게 복을 주어야 할 텐데, 하나님, 건강해야 됩니다, 돈벌어야 됩니다, 우리 아이는 학교에 입학하여야 됩니다……

제가 자란 시골에 아주 조용하게 하는 못된 욕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령 아주 못된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하면 "뒷산의 호랑이는 무엇을 먹고 사나?" 하고 욕을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곳은 산촌입니다. 뒤에 산이 있어서 맹수들이 많아요. 가끔 닭은 물론이고 돼지가 물려가고 소도 없어지곤 합니다. 그러니까 이 욕은 곧 뒷산의 호랑이는 저런 사람 좀 잡아먹지 않고 뭘하나 하는 뜻이 됩니다. 조용한 욕이지만 무서운 욕이지요.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생각이 다 그렇습니다. 저러한 자는 망하여야 되겠고 나같은 사람은 복받아야 하겠다며 하나님 앞에 항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변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모사가 될 것입니까? 깊이 생각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하실 일과 나의 할 일 ---- His part, My part를 분명히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주셨습니다. 햇빛을 주셨고 토양을 주셨고 비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심어야 하고 물주어야 하고 가꾸어야 하고 거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농장에 고용된 일꾼입니다. 충성되게 진실하게 일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고용된 직분을 가지고 일해야 하고, 이 농장에서 일하는 감격을 가지고 고마운 마음으로 일해야 할 것입니다.

혹 어떤 분들은 내가 자격이 있다 없다 하고 스스로 자신의 자격을 운위합니다. 주인이 필요해서 쓰시면 자격이 있는 것이지 자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격을 내가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인정하시고 주인이 필요하다 하시면 필요한 것입니다. 온세상 사람이 다 나를 필요치 않다고 해도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서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소명 자체가 자격임을 알아야 합니다. 존재함으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건강해서 일한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일해서 건강한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돈, 내가 부지런해서 벌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쓰일 데 있어서 내 손에 주어진 것입니다. 쓰라고 주신 돈이지 꾸역꾸역 저축해 움켜쥐고 있으라고 주어진 돈이 아닙니다. 모든 시간, 모든 건강, 모든 재능이 쓰임 받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만일에 쓰지 않고 쓰임 받지 않는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일, 내가 하여야 할 일이 엄연히 있음을 확실히 아십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고용된 일꾼이라고 하는 자기 의식을 분명히 하여야 되겠습니다. 일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존재합니다. 목적 의식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제한된 한계 안에서 내가 쓰임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다 하고, 무엇이든지 다 가지고, 수고하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한된 복, 분복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대로 고용되었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대로 그 기간 안에 그가 주신 능력 안에서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뿐입니다.

잠언 161절에 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많이 수고하고 많이 계획하고 많이 애를 쓰겠지만 그 결과는 주인 되신 하나님께 있음을 항상 새롭게 고백하고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영역에 손을 대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복으로 알뿐입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여건 이대로가 내게 주신 최선의 복임을 명심하십시다. 그리고 내가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십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5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아십니다. 5천 명을 무리 지어 앉히는 것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떡 다섯 덩이를 예수님께 바쳐서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게 하는 것도 사람이 할 일입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제자들이 할 일입니다. 부스러기를 거두어들이는 것도 사람이 할 일입니다. 사람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떡 다섯 덩이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 역사를 위해서 사람들이 봉사하여야 할 일이 있었고 심부름하여야 할 사역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그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덤 앞에 막아놓은 돌을 옮겨놓은 것은 사람이 한 일입니다. 수의를 벗겨준 것도 사람이 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신 것은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반드시 내가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지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경륜을 미처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이렇게 인도하시나, 하나님은 왜 우리를 괴롭히시나, 왜 이렇게 노정을 멀리 잡으셨나, 어째서 이렇게 오랫동안 광야에 머무르게 하시나, 원망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교육을 맡은 사람들 사이에 'hidden curriculum'이라고 하는 용어가 쓰인다고 합니다. 숨겨진 교육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선생님 혼자만 알고 있는 교육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이 교육과정에 따라와야 됩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hidden curriculum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우리는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꼭 우리가 하여야 합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경건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하자면 새벽기도회인 셈이지요. 그런데 한 젊은 사람이 고단해서 늘 새벽기도회에 빠지고 있습니다. 잠자다가 빠져놓고는 미안하던 나머지 "뮬러 선생님, 제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 좀 해주세요"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뮬러 선생 하시는 말씀이 "자네가 침대에서 한 발을 내려놓으면 나머지 한 발을 내려놓게 해달라고 기도해 줌세! 그러나 두 발을 침대에 얹어놓고 있는 한 나는 기도하지 않을 걸세." , 번번이 달콤한 잠의 유혹에 빠져서, 시계가 따르릉 울리면 되눌러 놓고 계속 쿨쿨 자는 주제에 한다는 소리가 "주여,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게 해주세요" 라니 어쩌라는 것입니까? 내가 할 일은 내가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그 많은 기도제목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일 내가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손을 얌전히 호주머니에 찌른 채 하나님께만 해달라고, 하나님께만 책임전가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엄연히 내가 할 일을 제시하고 계신데,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만 책임을 돌립니다.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이런 기도가 응답될 것 같습니까?

 

거듭 말하거니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비록 제한된 것이지만 우리가 할 일은 꼭 우리가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 우리의 희생을 통해서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한 저의 할 일과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큰 역사에 비해서 인간이 하는 일이란 하찮은 것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심는 일, 물주는 일, 거두는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자라게 하는 일에 비한다면 일이랄 것이 있습니까? 그래도 심어야 되고 거두어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일이란, 이사람의 작은 일이든 저사람의 큰 일이든 모두가 일반입니다. 인간의 일이 다양하여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물주고 한 사람은 거두고 ---- 이렇게 각색입니다마는 질적으로 보면 다 일반이요, 다같이 소중하고 다같이 필요합니다. 저마다 나름의 기능적인 수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 기능적인 수고에 대해서 서로 존중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 사람이 심고 한 사람이 거둔다는 말이 옳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심고 끝냈습니다. 저사람은 물주고 끝냈습니다.

그사람은 심지도 물주지도 않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거둡니다. 거두는 사람에 대해서 질투하지 맙시다. 심고 끝낸 것으로 족합니다. 수고하고 여기서 끝나도 좋습니다. ,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 누가 거두건 소중히 여기고 같이 기뻐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주어진 부분이 있고 주어진 달란트가 있고 주어진 위치가 있어서 놓일 자리에 놓이면 성공이요,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성공이요, 최선을 다했으면 유감없는 것입니다. 나한테 주어진 가능성을 다해서,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며칠전에 한 친구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네는 공동묘지가 저만치 산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외국에 나가 보면 동리 한가운데에 묘지가 있는 곳이 많습니다. 미국에를 가보아도 뉴욕시 한가운데에 묘지가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친구가 말합니다. 오며가며 묘지를 좀 보아야 하겠다 그 말이지요. 그래야 정신이 나지 멀리 산 속에다 해놓고 1년에 한두 번 왔다갔다 하니까 실감이 나지 않아요. 건망증 많은 사람들이 영 정신을 못 차린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께서 거두십니다.

이제 우리는 내게 주어진 여건대로, 내게 주어진 시간 대로 봉사할 뿐입니다. 서로서로 소중히 여기고 협력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목수가 집을 짓다가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연장들끼리 싸움이 붙었습니다. 톱이 줄자보고 말하기를 "이 게으른 놈아, 너는 밤낮 재기만 하고 있느냐?" 또 대패보고는 "너는 밤낮 깎기밖에 모르느냐?" 또 흙손보고도 언제나 갖다가 덧붙이기만 한다고 시비를 겁니다. 너는 필요 없다느니 내가 제일이라느니 옥신각신 다투고 있는데 점심을 끝낸 주인이 돌아오더니 줄자를 들고는 길이를 재는가 하면 대패로 깎고, 흙손으로 바르고 하며 집을 지어나갑니다.

줄자 없이 길이를 잴 수 있겠습니까? 대패 없이 줄자가 일을 하겠습니까? 저마다가 제 기능을 다할 뿐입니다. 주인의 손에 들리어진 채 말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성가대를 생각해봅니다.

옛날에 사람 귀할 때에 저는 아마추어지만 몇년 동안 성가대를 지휘해보았습니다. 성가대 지휘에서 중요한 것이 많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첫째로 성가대원들이 모두 다 지휘하는 사람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둘째는 악보에 충실해야 합니다. 모두들 열심히 악보를 잘 읽어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내 파트를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제 파트는 충실히 하지 않고 남의 파트만 탓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파트가 어떻다, 저 파트가 어떻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해야지요.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합창단원들은 대체로 음악대학 문턱도 못 가본 아마추어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음악대학을 나왔다 하면 개성이 강해서 저가 제일 잘난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합창단원으로서 좋은 일이 못됩니다. 숫제 백지로 돌아가서 지휘자에게 합심하여 순종해야 좋은 합창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에도 각자 지도자를 찾아보고,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그리고 서로 협력하여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똑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오케스트라로 말하더라도 어느 악기인들 필요치 않은 악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일, 내 부분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공부하다가도 뭐 좀 잘못되면 책상을 때립니다.

책상이 나빠서 글씨가 잘 안 써지면 연필을 내던집니다. 연필이 나빠서가 아닌데 말입니다.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나서 불평을 합니다. 안 따먹으면 되지, 왜 만들어놓았느냐고 불평하다니 말이 안됩니다.

남의 아내가 되었습니까? 남편 나무라지 마십시오. 그도 내 분야가 아닙니다. 좋은 아내가 되면 그만입니다. 남편이 되었습니까? 아내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좋은 남편만 되면 그만입니다. 부모가 되었습니까? 좋은 부모만 되면 됩니다. 부모는 시원찮은데 좋은 아들이 되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내 본분 내가 다하면 됩니다. 남 원망하지 맙시다. 하나님도 원망하지 말고 자연도 원망하지 말고 이웃도 원망하지 맙시다. 나대로 내 본분만 착실히 감당하십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세상을 떠날 때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해온 일은 내가 하여야 할 일에 못 미쳤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류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내가 할 일 내가 하고, 형제에게 온유해서 내가 할 일 내가 감당합시다. 이렇게 할 때에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합동하여 귀한 작품을 이루도록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  

그의 일과 나의 일(고린도전서 319)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아무래도 사람은 복을 받아야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되는 일이라는 것은 생각하면 하찮은 것이요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적어도 우리 인간은 세 가지의 기본적인 복을 받고 삽니다. 이 세 가지 복에 대해서 우리는 그대로 인정을 하고, 어떤 분복이 주어졌든지 간에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를 찬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부모가 아닙니다. 부모가 나를 낳아주어서 세상에 난 것입니다. 어떤 부모 아래 태어났든지 간에 절대로 이것을 탓하지는 맙시다. 좋은 부모 슬하에 태어났건 그렇지 못했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내게 주어진 이 분복을 그대로 수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원망은 금물입니다. 내게 주어진 분복이니까 말입니다.

둘째는, 어느 시점에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긴긴 시간의, 역사 속의 어느 시점에서 태어나느냐, 어느 시점에서 세상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왜 이렇게 어려운 때에 태어났단 말인가" 하는 따위의 탄식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을 이대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앞으로 남은 복입니다 마는, 바로 어느 시간에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가서 잘못 끝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참 귀하게 고결하게 세상을 살았는데 늘그막에 그만 망령이 들어서 해서 아니될 말을 하고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한다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 마음대로는 못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느 시간에 죽게 될는지 몰라도 그 죽는 시간에 대해서 역시 가부를 말하지 맙시다. 이것은 우리의 축복입니다. 주어지는 그대로가 내게 안식이요, 내게 축복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복, 아주 원천적인 복이 있어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불만이나 원망도 결국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되고 하나님께까지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본래성과 자기의 페이스를 바로 알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나됨이 피조물이요, 극히 제한된 분복을 살아갑니다.

로마서 1133절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리고 34장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이렇게 감탄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모사가 되겠습니까? 누가 그 하나님의 오묘하고 깊은 뜻을 알았겠습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 내가 나올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시고 얼마나 귀한 역사를 이루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셨습니까? 그 놀라운 역사, 그 엄청난 뜻을 누가 일찍이 알았겠습니까?

이 기회에 우리 한번 기도 제목에 대하여 생각해보십시다. 가령,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모조리 컴퓨터에 입력해서 분석해본다면 어떻게 나올까요? 저는 이렇게 한번 짐작해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모사가 되려 한다고요. 하나님께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거의가 이런 식입니다. 알고보면 거의가 불 신앙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참으로 건방진 소리들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더 큰 역사를 보고 더 큰 기도의 응답을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믿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합니다. 저런 사람에게는 복을 주지 말고 나같은 사람에게 복을 주어야 할 텐데, 하나님, 건강해야 됩니다, 돈벌어야 됩니다, 우리 아이는 학교에 입학하여야 됩니다……

제가 자란 시골에 아주 조용하게 하는 못된 욕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령 아주 못된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하면 "뒷산의 호랑이는 무엇을 먹고 사나?" 하고 욕을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곳은 산촌입니다. 뒤에 산이 있어서 맹수들이 많아요. 가끔 닭은 물론이고 돼지가 물려가고 소도 없어지곤 합니다. 그러니까 이 욕은 곧 뒷산의 호랑이는 저런 사람 좀 잡아먹지 않고 뭘하나 하는 뜻이 됩니다. 조용한 욕이지만 무서운 욕이지요.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생각이 다 그렇습니다. 저러한 자는 망하여야 되겠고 나같은 사람은 복받아야 하겠다며 하나님 앞에 항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변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모사가 될 것입니까? 깊이 생각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하실 일과 나의 할 일 ---- His part, My part를 분명히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주셨습니다. 햇빛을 주셨고 토양을 주셨고 비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심어야 하고 물주어야 하고 가꾸어야 하고 거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농장에 고용된 일꾼입니다. 충성되게 진실하게 일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고용된 직분을 가지고 일해야 하고, 이 농장에서 일하는 감격을 가지고 고마운 마음으로 일해야 할 것입니다.

혹 어떤 분들은 내가 자격이 있다 없다 하고 스스로 자신의 자격을 운위합니다. 주인이 필요해서 쓰시면 자격이 있는 것이지 자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격을 내가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인정하시고 주인이 필요하다 하시면 필요한 것입니다. 온세상 사람이 다 나를 필요치 않다고 해도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서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소명 자체가 자격임을 알아야 합니다. 존재함으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건강해서 일한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일해서 건강한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돈, 내가 부지런해서 벌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쓰일 데 있어서 내 손에 주어진 것입니다. 쓰라고 주신 돈이지 꾸역꾸역 저축해 움켜쥐고 있으라고 주어진 돈이 아닙니다. 모든 시간, 모든 건강, 모든 재능이 쓰임 받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만일에 쓰지 않고 쓰임 받지 않는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일, 내가 하여야 할 일이 엄연히 있음을 확실히 아십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고용된 일꾼이라고 하는 자기 의식을 분명히 하여야 되겠습니다. 일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존재합니다. 목적 의식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제한된 한계 안에서 내가 쓰임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다 하고, 무엇이든지 다 가지고, 수고하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한된 복, 분복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대로 고용되었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대로 그 기간 안에 그가 주신 능력 안에서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뿐입니다.

잠언 161절에 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많이 수고하고 많이 계획하고 많이 애를 쓰겠지만 그 결과는 주인 되신 하나님께 있음을 항상 새롭게 고백하고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영역에 손을 대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복으로 알뿐입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여건 이대로가 내게 주신 최선의 복임을 명심하십시다. 그리고 내가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십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5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아십니다. 5천 명을 무리 지어 앉히는 것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떡 다섯 덩이를 예수님께 바쳐서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게 하는 것도 사람이 할 일입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제자들이 할 일입니다. 부스러기를 거두어들이는 것도 사람이 할 일입니다. 사람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떡 다섯 덩이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 역사를 위해서 사람들이 봉사하여야 할 일이 있었고 심부름하여야 할 사역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그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덤 앞에 막아놓은 돌을 옮겨놓은 것은 사람이 한 일입니다. 수의를 벗겨준 것도 사람이 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신 것은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반드시 내가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지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경륜을 미처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이렇게 인도하시나, 하나님은 왜 우리를 괴롭히시나, 왜 이렇게 노정을 멀리 잡으셨나, 어째서 이렇게 오랫동안 광야에 머무르게 하시나, 원망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교육을 맡은 사람들 사이에 'hidden curriculum'이라고 하는 용어가 쓰인다고 합니다. 숨겨진 교육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선생님 혼자만 알고 있는 교육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이 교육과정에 따라와야 됩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hidden curriculum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우리는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꼭 우리가 하여야 합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경건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하자면 새벽기도회인 셈이지요. 그런데 한 젊은 사람이 고단해서 늘 새벽기도회에 빠지고 있습니다. 잠자다가 빠져놓고는 미안하던 나머지 "뮬러 선생님, 제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 좀 해주세요"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뮬러 선생 하시는 말씀이 "자네가 침대에서 한 발을 내려놓으면 나머지 한 발을 내려놓게 해달라고 기도해 줌세! 그러나 두 발을 침대에 얹어놓고 있는 한 나는 기도하지 않을 걸세." , 번번이 달콤한 잠의 유혹에 빠져서, 시계가 따르릉 울리면 되눌러 놓고 계속 쿨쿨 자는 주제에 한다는 소리가 "주여,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게 해주세요" 라니 어쩌라는 것입니까? 내가 할 일은 내가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그 많은 기도제목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일 내가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손을 얌전히 호주머니에 찌른 채 하나님께만 해달라고, 하나님께만 책임전가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엄연히 내가 할 일을 제시하고 계신데,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만 책임을 돌립니다.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이런 기도가 응답될 것 같습니까?

 

거듭 말하거니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비록 제한된 것이지만 우리가 할 일은 꼭 우리가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 우리의 희생을 통해서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한 저의 할 일과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큰 역사에 비해서 인간이 하는 일이란 하찮은 것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심는 일, 물주는 일, 거두는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자라게 하는 일에 비한다면 일이랄 것이 있습니까? 그래도 심어야 되고 거두어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일이란, 이사람의 작은 일이든 저사람의 큰 일이든 모두가 일반입니다. 인간의 일이 다양하여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물주고 한 사람은 거두고 ---- 이렇게 각색입니다마는 질적으로 보면 다 일반이요, 다같이 소중하고 다같이 필요합니다. 저마다 나름의 기능적인 수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 기능적인 수고에 대해서 서로 존중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 사람이 심고 한 사람이 거둔다는 말이 옳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심고 끝냈습니다. 저사람은 물주고 끝냈습니다.

그사람은 심지도 물주지도 않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거둡니다. 거두는 사람에 대해서 질투하지 맙시다. 심고 끝낸 것으로 족합니다. 수고하고 여기서 끝나도 좋습니다. ,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 누가 거두건 소중히 여기고 같이 기뻐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주어진 부분이 있고 주어진 달란트가 있고 주어진 위치가 있어서 놓일 자리에 놓이면 성공이요,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성공이요, 최선을 다했으면 유감없는 것입니다. 나한테 주어진 가능성을 다해서,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며칠전에 한 친구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네는 공동묘지가 저만치 산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외국에 나가 보면 동리 한가운데에 묘지가 있는 곳이 많습니다. 미국에를 가보아도 뉴욕시 한가운데에 묘지가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친구가 말합니다. 오며가며 묘지를 좀 보아야 하겠다 그 말이지요. 그래야 정신이 나지 멀리 산 속에다 해놓고 1년에 한두 번 왔다갔다 하니까 실감이 나지 않아요. 건망증 많은 사람들이 영 정신을 못 차린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께서 거두십니다.

이제 우리는 내게 주어진 여건대로, 내게 주어진 시간 대로 봉사할 뿐입니다. 서로서로 소중히 여기고 협력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목수가 집을 짓다가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연장들끼리 싸움이 붙었습니다. 톱이 줄자보고 말하기를 "이 게으른 놈아, 너는 밤낮 재기만 하고 있느냐?" 또 대패보고는 "너는 밤낮 깎기밖에 모르느냐?" 또 흙손보고도 언제나 갖다가 덧붙이기만 한다고 시비를 겁니다. 너는 필요 없다느니 내가 제일이라느니 옥신각신 다투고 있는데 점심을 끝낸 주인이 돌아오더니 줄자를 들고는 길이를 재는가 하면 대패로 깎고, 흙손으로 바르고 하며 집을 지어나갑니다.

줄자 없이 길이를 잴 수 있겠습니까? 대패 없이 줄자가 일을 하겠습니까? 저마다가 제 기능을 다할 뿐입니다. 주인의 손에 들리어진 채 말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성가대를 생각해봅니다.

옛날에 사람 귀할 때에 저는 아마추어지만 몇년 동안 성가대를 지휘해보았습니다. 성가대 지휘에서 중요한 것이 많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첫째로 성가대원들이 모두 다 지휘하는 사람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둘째는 악보에 충실해야 합니다. 모두들 열심히 악보를 잘 읽어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내 파트를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제 파트는 충실히 하지 않고 남의 파트만 탓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파트가 어떻다, 저 파트가 어떻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해야지요.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합창단원들은 대체로 음악대학 문턱도 못 가본 아마추어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음악대학을 나왔다 하면 개성이 강해서 저가 제일 잘난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합창단원으로서 좋은 일이 못됩니다. 숫제 백지로 돌아가서 지휘자에게 합심하여 순종해야 좋은 합창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에도 각자 지도자를 찾아보고,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그리고 서로 협력하여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똑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오케스트라로 말하더라도 어느 악기인들 필요치 않은 악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일, 내 부분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공부하다가도 뭐 좀 잘못되면 책상을 때립니다.

책상이 나빠서 글씨가 잘 안 써지면 연필을 내던집니다. 연필이 나빠서가 아닌데 말입니다.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나서 불평을 합니다. 안 따먹으면 되지, 왜 만들어놓았느냐고 불평하다니 말이 안됩니다.

남의 아내가 되었습니까? 남편 나무라지 마십시오. 그도 내 분야가 아닙니다. 좋은 아내가 되면 그만입니다. 남편이 되었습니까? 아내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좋은 남편만 되면 그만입니다. 부모가 되었습니까? 좋은 부모만 되면 됩니다. 부모는 시원찮은데 좋은 아들이 되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내 본분 내가 다하면 됩니다. 남 원망하지 맙시다. 하나님도 원망하지 말고 자연도 원망하지 말고 이웃도 원망하지 맙시다. 나대로 내 본분만 착실히 감당하십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세상을 떠날 때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해온 일은 내가 하여야 할 일에 못 미쳤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류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내가 할 일 내가 하고, 형제에게 온유해서 내가 할 일 내가 감당합시다. 이렇게 할 때에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합동하여 귀한 작품을 이루도록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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