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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자에게 더 주라(누가복음 19장 11절~27절)

by 【고동엽】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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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자에게 더 주라(누가복음 191127)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지식과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란 공부를 하고 수고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공부를 많이 한 지성인인데도 지혜롭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지식은 땅에서 나지만, 지혜는 위로서 오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식은 과거에 대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혜는 미래를 아는 것입니다. 지식은 대체로 넓은 것에 대한 앎이고, 지혜는 깊은 것에 대한 지식입니다. 지식을 양적인 이해라 한다면 지혜는 질적인 이해입니다. 지식은 현상적인 이해이고 지혜는 의미의 이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이요 시작이요 뿌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어리석은 자, 지혜롭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없다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어리석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좁은 의미로 생각하면 이러한 면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창조주로, 자신을 피조물로 생각하는 것, 피조물됨을 아는 것 ----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피조물됨을 안다는 것은 내가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생을 산다는 것, 나의 생이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생임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다시말하면 한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한계를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무엇이든지 다 가지고, 무엇이든지 다 알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만큼 알고, 주신 만큼 살고,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면된다 ---- 안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안될 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가능한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한계를 아는 것, 그 한계의 의미를 아는 것, 뜻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한걸음 나아가 그 한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디까지가 한계이며, 그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갈 수 있느냐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데가 많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주인이 종들의 재능에 따라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열 종에게 공평하게 한 므나씩을 주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심판을 할 때에도 그 보상 방법이 다릅니다.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열 고을을 차지하라고 합니다. 다섯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고 합니다. 각각 수고한 충성의 분량대로 영광과 특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므나'라고 할 때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봅시다. 먼저 성서적인 배경을 말씀드리면 그 당시에 사용하고 있던 화폐의 가치가 제일 큰돈이 달란트이며 금화입니다. 그리고 은화가 므나입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은 데나리온입니다. 이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 일한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들에 나가 하루 일을 해내면 그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한 므나는 20데나리온의 가치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20일 동안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이 되는 셈입니다. 일하는 날도 있고 쉬는 날도 있다고 생각해서 한 달 봉급에 해당하는 액수가 한 므나 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주인이 한 므나씩을 공평하게 나누어준 것이 저들에게는 기회이자 기회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에게 주신 기회, 나에게 주신 므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평한 것도 같은데 어떻게 보면 불공평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을 볼 때에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은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봅시다. 이를테면 여기 가난한 사람과 돈많은 사람이 있어 가난한 사람은 건강이 좋고 입맛이 좋아서 무엇을 먹든지 맛있게 먹는데, 돈많은 사람은 건강도 신통찮고 다이어트 한답시고 두고도 못 먹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이런 경우 없어서 못 먹는 사람과 두고도 못 먹는 사람의 어느 쪽이 더 불쌍합니까? 가난하고 어려운 가운데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하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썩 좋은 환경에 살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물량적인 안목에서 볼 것이 아닙니다. 질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똑같이 한 므나씩 주신 공평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알았다면 나에게 주어진 한 므나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날아가는 새 열 마리보다 내 손에 있는 한 마리의 새가 더 중요한 법입니다. 남의 돈 1억 원보다 내 돈 만 원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기회를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제가 미국 파사데나에서 공부할 때에 한번은 초청장을 받고 음악회에 간 일이 있습니다. 그 음악회의 날짜며 연주 곡목, 심지어는 연주자의 이름도 지금은 기억에 없습니다마는 다만 한 가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날 연주한 분이 젊은 분이라는 것과 오른팔이 없어 의수(義手)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군복무 중에 한 팔을 잃은 것입니다. 그는 팔 하나를 가지고 피나는 노력을 해서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1시간 30분 동안이나 열연하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청중들은 하나같이 눈물로 감격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두 손으로도 하기 어려운데 왼손 하나로 끝까지 연주해내다니요.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든지 우리는 주어진 그 은사와 주어진 그 기회 ---- 내게 주어진 한 므나를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신앙이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도 건강도 재능도 소질도 시간도,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있을 때에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꼭 할 수 없을 때에 하겠답니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소중한 줄을 압니다. 돈 있을 때에 돈 귀한 줄 모르고 다 써버린 뒤늦게야 돈 귀한 줄 알았는데 이때는 이미 돈이 없어요.

건강했을 때에 건강이 소중한 줄 모르고 함부로 살다가 건강 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아 건강이 제일인데!" 그러나 이제는 늦었어요. 귀한 젊음 다 헛되이 보내놓고 이제 돋보기안경 낄 때에 가서야 책보겠다고 하니 끝난 것이지요. 눈 밝을 때에 진작 볼 것을! 하나 보면 둘 잃어버리는데 해서 무엇합니까? 맑은 총명 있을 때에, 좋은 기억력 가졌을 때에 그 가치를 모르고 지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같이 그렇습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은 축복이요, 축복은 곧 사명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것은 또한 자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자유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무제한의 자유는 없습니다. 궤도 탈선은 자유가 아닙니다. 낭비는 자유가 아닙니다. 방탕은 또 하나의 노예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그 한계를 똑바로 알고 향유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므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테스팅, 하나의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므나를 주셨을 때에는 그것 하나만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쓰는 것 봐서 둘 주겠다는 뜻입니다. 열 쓰는 것을 보아서 백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충성을 시험하고, 진실을 시험하고 우리의 능력을 시험합니다. 돈을 쓸 줄 알아야 돈을 줄 것이 아닙니까? 지혜를 쓰는 것 보아야 지혜를 더하든지 덜하실 것 아닙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또 하나의 심판적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훈련하십니다. 은혜를 알도록 권고(眷顧)하고 제십니다. 거기에 더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경륜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 이야기는 많은 주석가들이 예수님께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드신 귀한 비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해 조금 언급하겠습니다.

()헤롯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시원치 않았던 사람입니다 마는 본래 믿음의 사람이고 정치적인 능력이 많았던가봅니다. 주전 40, 로마에 찾아가서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 나라 다스릴 왕권을 얻어 가지고 옵니다. 그 사이에 유대 나라에서는 그 사람이 왕 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어쨌든 왕권을 받아 가지고 와서 왕좌에 앉으면서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 8천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왕권을 세웁니다. 그리고 40년 동안을 통치 하고 세상을 떠날 때에 가서는 세 아들 안티파스, 빌립, 아펠라우스에게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줍니다. 성경에 보면 분봉 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처럼 나누어주어서 다스리게 한 왕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에서 말씀합니다.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온 사람이 그 왕위를 가지고 충성된 종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열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 열 고을을 주고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다, 그리고 다섯 므나를 남긴 자에게 다섯 고을 권세를 주었다고 합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창세기 1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만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스린다고 하는 것, 그 정치적 본능에 굉장한 행복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주인이 되고, 직장의 주인이 되고, 내가 돈을 많이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영역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식하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함으로써 그만큼 영역이 넓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스림의 권리를 주셨습니다. 자연을 다스리고,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사람들은 죄를 짓고 불신앙에 빠져서 이 권리를 다 상실하고 이제는 오히려 우상을 섬기고 자연을 섬기고 자연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다시 자연을 다스릴 줄 아는 그 왕권을 회복받을 수 있는 길이 이미 주어진 권리 안에서, 그 작은 영역 안에서 충성을 다하는 데에 있다 ------ 이것이 본문의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신실하게 충성되이 최선을 다하면 다스림의 권세를 넓혀주십니다. 왕권의 영역을 넓혀주신다는 것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돈이란 벌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도 어렵습니다. 잘 쓰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돈 잘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돈을 주시겠습니까? 잘 쓰므로 더 주십니다. 우리가 부모된 도리로 자식에게 돈을 줄 때에도 어디다 쓰는지를 보아서 주는 것입니다.

잘 쓰면 주는 것입니다. 아주 잘 쓰면 얼마든지 더 주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너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느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왜 안 주시겠느냐 ---- 못 받는 이유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건강을 얻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도 어렵고, 그 건강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건강을 주었더니 타락, 방탕합니다. 방탕하라고 건강을 주셨습니까? 필요없는 건강이라면 회수하여야지요.

꼭 병이 들어야만 착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꼭 앓아누워야만 모처럼 한번 진실해지고 겸손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필요없는 것 왜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필요없고 잘못 사용할 때에는 모처럼 가진 것까지 빼앗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일함으로 건강하고 공부함으로 머리도 총명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친구 한 사람이, 저와 같이 공부를 하던 사람인데, 훌륭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에 나와서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미적미적하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돈 벌면서 이래저래 한 10년을 흘려보냈습니다.

이윽고 허무함을 느끼고 한국에 나와 가르치겠다고 대학에 편지를 했더니 대학총장이 회답을 합니다. "학문을 놓은 지가 일십 년이 넘은 당신에게 우리가 뭘 기대한단 말입니까?" 박사 아니라 박박사라도 소용없습니다. 공부는 계속해야 합니다. 10년을 쉬었다면 끝난 것입니다.

오르가니스트니 피아니스트니 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꾸준하게 오르간을 치고 계속해서 피아노를 치고 해야 발전을 하는 것이지 한 10년 손을 놓아보십시오. 멍청해지고 맙니다. 거기다가 되지 못하게 교만하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여러분, 머리란 자꾸 써야 발달하는 것입니다. 일함으로 건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지보고 옛날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니까 이 어른이, 하신 이야기 또 하시고 또 하시는데 하도 많이 들어서 그 이야기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떤 임금님이 며느리, 곧 장차 왕후가 될 여자를 구하기 위하여 고을에 방을 붙이고 아주 덕망이 높고 예쁜 아가씨들을 다 불러다가 심사를 하는데, 임금님의 심사 방법이 퍽 지혜로웠습니다.

아가씨들에게 쌀 한 됫박을 주면서 한 달 동안 그것만 먹고살라고 했습니다. 아가씨들은 이것을 한 달로 나누어 가지고 죽을 쑤어서 조금씩 먹으면서 본의 아닌 다이어트를 했습니다. 마침내 죽을 지경이 되어서 어떤 아가씨는 들것에 들려 오고, 어떤 아가씨는 파리해져서 들어오는 등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한 아가씨는 피둥피둥한데다 떡까지 한 시루 머리에 이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넌 어떻게 된 일이냐?"하고 물어보니 쌀 한 됫박으로 떡을 해서 내다 팔았답니다.

그렇게 거듭하니까 실컷 먹고도 남아서 임금님 드리려고 한 시루 해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임금님은 "네가 잘 하였도다"하고 그 아가씨를 장래의 왕후로 삼았다는 이야기올시다.

여러분,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다. 소중히 여깁시다. 지난날을 후회할 것 없습니다. 오늘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책자에서 읽었습니다마는 통계적으로 조사해 보았더니 사업이나 학문에서 성공한 사람은 보통사람보다 평균 세 시간 일찍 일어난다고 합니다. 30분 일찍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세 시간이나 일찍 일어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게으르고는 아무 것도 되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금년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십니까? 아무쪼록 없는 것을 찾으며 불평하지 말고, 지난날을 후회하지도 말고, 내 여건대로, 주어진 대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권위 있는 발표를 보면 우리의 건강도 75퍼센트가 스스로 해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지 못한 것이지요. 병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는 진실에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만큼, 진리에 사는 것만큼, 의로운 만큼, 최선을 다한 만큼 자유의 영역이 넓어집니다.

있는 자에게 더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예레미야 4810절에 보면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벌써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생활 속에 심판이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게으른 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겪는 일입니다 마는 부지런히 일하고 보면 거기에는 잡념이 없습니다. 시험도 없습니다. 흘러가는 물은 썩는 법이 없습니다. 한가하고 할 일이 없으니까 앉아서 한숨이나 쉬게 되고 갖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필요 없는 건강을 계속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있는 자에게 더 주시는 하나님,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습니다.

어떤 한 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많이 벌고, 출세하고 ---- 이런 것은 잊어버립시다. 세계가 흔들리는데 내 사업만 잘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다만 충성 되이 진실하게 부지런하게 사는 성실한 한 해가 되어서 "착하고 진실한 종아, 내가 네게 열 고을 권세를 주노라"하시는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선진국을 운위합니다. 선진국민이 있고야 선진국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선진국민이 되고 나서 선진을 운위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른 자세로 설 때에 비로소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  

있는 자에게 더 주라(누가복음 191127)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지식과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란 공부를 하고 수고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공부를 많이 한 지성인인데도 지혜롭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지식은 땅에서 나지만, 지혜는 위로서 오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식은 과거에 대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혜는 미래를 아는 것입니다. 지식은 대체로 넓은 것에 대한 앎이고, 지혜는 깊은 것에 대한 지식입니다. 지식을 양적인 이해라 한다면 지혜는 질적인 이해입니다. 지식은 현상적인 이해이고 지혜는 의미의 이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이요 시작이요 뿌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어리석은 자, 지혜롭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없다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어리석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좁은 의미로 생각하면 이러한 면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창조주로, 자신을 피조물로 생각하는 것, 피조물됨을 아는 것 ----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피조물됨을 안다는 것은 내가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생을 산다는 것, 나의 생이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생임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다시말하면 한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한계를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무엇이든지 다 가지고, 무엇이든지 다 알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만큼 알고, 주신 만큼 살고,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면된다 ---- 안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안될 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가능한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한계를 아는 것, 그 한계의 의미를 아는 것, 뜻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한걸음 나아가 그 한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디까지가 한계이며, 그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갈 수 있느냐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데가 많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주인이 종들의 재능에 따라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열 종에게 공평하게 한 므나씩을 주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심판을 할 때에도 그 보상 방법이 다릅니다.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열 고을을 차지하라고 합니다. 다섯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고 합니다. 각각 수고한 충성의 분량대로 영광과 특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므나'라고 할 때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봅시다. 먼저 성서적인 배경을 말씀드리면 그 당시에 사용하고 있던 화폐의 가치가 제일 큰돈이 달란트이며 금화입니다. 그리고 은화가 므나입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은 데나리온입니다. 이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 일한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들에 나가 하루 일을 해내면 그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한 므나는 20데나리온의 가치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20일 동안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이 되는 셈입니다. 일하는 날도 있고 쉬는 날도 있다고 생각해서 한 달 봉급에 해당하는 액수가 한 므나 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주인이 한 므나씩을 공평하게 나누어준 것이 저들에게는 기회이자 기회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에게 주신 기회, 나에게 주신 므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평한 것도 같은데 어떻게 보면 불공평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을 볼 때에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은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봅시다. 이를테면 여기 가난한 사람과 돈많은 사람이 있어 가난한 사람은 건강이 좋고 입맛이 좋아서 무엇을 먹든지 맛있게 먹는데, 돈많은 사람은 건강도 신통찮고 다이어트 한답시고 두고도 못 먹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이런 경우 없어서 못 먹는 사람과 두고도 못 먹는 사람의 어느 쪽이 더 불쌍합니까? 가난하고 어려운 가운데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하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썩 좋은 환경에 살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물량적인 안목에서 볼 것이 아닙니다. 질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똑같이 한 므나씩 주신 공평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알았다면 나에게 주어진 한 므나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날아가는 새 열 마리보다 내 손에 있는 한 마리의 새가 더 중요한 법입니다. 남의 돈 1억 원보다 내 돈 만 원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기회를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제가 미국 파사데나에서 공부할 때에 한번은 초청장을 받고 음악회에 간 일이 있습니다. 그 음악회의 날짜며 연주 곡목, 심지어는 연주자의 이름도 지금은 기억에 없습니다마는 다만 한 가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날 연주한 분이 젊은 분이라는 것과 오른팔이 없어 의수(義手)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군복무 중에 한 팔을 잃은 것입니다. 그는 팔 하나를 가지고 피나는 노력을 해서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1시간 30분 동안이나 열연하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청중들은 하나같이 눈물로 감격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두 손으로도 하기 어려운데 왼손 하나로 끝까지 연주해내다니요.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든지 우리는 주어진 그 은사와 주어진 그 기회 ---- 내게 주어진 한 므나를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신앙이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도 건강도 재능도 소질도 시간도,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있을 때에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꼭 할 수 없을 때에 하겠답니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소중한 줄을 압니다. 돈 있을 때에 돈 귀한 줄 모르고 다 써버린 뒤늦게야 돈 귀한 줄 알았는데 이때는 이미 돈이 없어요.

건강했을 때에 건강이 소중한 줄 모르고 함부로 살다가 건강 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아 건강이 제일인데!" 그러나 이제는 늦었어요. 귀한 젊음 다 헛되이 보내놓고 이제 돋보기안경 낄 때에 가서야 책보겠다고 하니 끝난 것이지요. 눈 밝을 때에 진작 볼 것을! 하나 보면 둘 잃어버리는데 해서 무엇합니까? 맑은 총명 있을 때에, 좋은 기억력 가졌을 때에 그 가치를 모르고 지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같이 그렇습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은 축복이요, 축복은 곧 사명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것은 또한 자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자유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무제한의 자유는 없습니다. 궤도 탈선은 자유가 아닙니다. 낭비는 자유가 아닙니다. 방탕은 또 하나의 노예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그 한계를 똑바로 알고 향유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므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테스팅, 하나의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므나를 주셨을 때에는 그것 하나만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쓰는 것 봐서 둘 주겠다는 뜻입니다. 열 쓰는 것을 보아서 백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충성을 시험하고, 진실을 시험하고 우리의 능력을 시험합니다. 돈을 쓸 줄 알아야 돈을 줄 것이 아닙니까? 지혜를 쓰는 것 보아야 지혜를 더하든지 덜하실 것 아닙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또 하나의 심판적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훈련하십니다. 은혜를 알도록 권고(眷顧)하고 제십니다. 거기에 더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경륜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 이야기는 많은 주석가들이 예수님께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드신 귀한 비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해 조금 언급하겠습니다.

()헤롯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시원치 않았던 사람입니다 마는 본래 믿음의 사람이고 정치적인 능력이 많았던가봅니다. 주전 40, 로마에 찾아가서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 나라 다스릴 왕권을 얻어 가지고 옵니다. 그 사이에 유대 나라에서는 그 사람이 왕 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어쨌든 왕권을 받아 가지고 와서 왕좌에 앉으면서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 8천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왕권을 세웁니다. 그리고 40년 동안을 통치 하고 세상을 떠날 때에 가서는 세 아들 안티파스, 빌립, 아펠라우스에게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줍니다. 성경에 보면 분봉 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처럼 나누어주어서 다스리게 한 왕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에서 말씀합니다.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온 사람이 그 왕위를 가지고 충성된 종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열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 열 고을을 주고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다, 그리고 다섯 므나를 남긴 자에게 다섯 고을 권세를 주었다고 합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창세기 1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만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스린다고 하는 것, 그 정치적 본능에 굉장한 행복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주인이 되고, 직장의 주인이 되고, 내가 돈을 많이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영역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식하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함으로써 그만큼 영역이 넓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스림의 권리를 주셨습니다. 자연을 다스리고,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사람들은 죄를 짓고 불신앙에 빠져서 이 권리를 다 상실하고 이제는 오히려 우상을 섬기고 자연을 섬기고 자연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다시 자연을 다스릴 줄 아는 그 왕권을 회복받을 수 있는 길이 이미 주어진 권리 안에서, 그 작은 영역 안에서 충성을 다하는 데에 있다 ------ 이것이 본문의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신실하게 충성되이 최선을 다하면 다스림의 권세를 넓혀주십니다. 왕권의 영역을 넓혀주신다는 것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돈이란 벌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도 어렵습니다. 잘 쓰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돈 잘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돈을 주시겠습니까? 잘 쓰므로 더 주십니다. 우리가 부모된 도리로 자식에게 돈을 줄 때에도 어디다 쓰는지를 보아서 주는 것입니다.

잘 쓰면 주는 것입니다. 아주 잘 쓰면 얼마든지 더 주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너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느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왜 안 주시겠느냐 ---- 못 받는 이유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건강을 얻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도 어렵고, 그 건강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건강을 주었더니 타락, 방탕합니다. 방탕하라고 건강을 주셨습니까? 필요없는 건강이라면 회수하여야지요.

꼭 병이 들어야만 착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꼭 앓아누워야만 모처럼 한번 진실해지고 겸손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필요없는 것 왜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필요없고 잘못 사용할 때에는 모처럼 가진 것까지 빼앗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일함으로 건강하고 공부함으로 머리도 총명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친구 한 사람이, 저와 같이 공부를 하던 사람인데, 훌륭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에 나와서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미적미적하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돈 벌면서 이래저래 한 10년을 흘려보냈습니다.

이윽고 허무함을 느끼고 한국에 나와 가르치겠다고 대학에 편지를 했더니 대학총장이 회답을 합니다. "학문을 놓은 지가 일십 년이 넘은 당신에게 우리가 뭘 기대한단 말입니까?" 박사 아니라 박박사라도 소용없습니다. 공부는 계속해야 합니다. 10년을 쉬었다면 끝난 것입니다.

오르가니스트니 피아니스트니 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꾸준하게 오르간을 치고 계속해서 피아노를 치고 해야 발전을 하는 것이지 한 10년 손을 놓아보십시오. 멍청해지고 맙니다. 거기다가 되지 못하게 교만하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여러분, 머리란 자꾸 써야 발달하는 것입니다. 일함으로 건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지보고 옛날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니까 이 어른이, 하신 이야기 또 하시고 또 하시는데 하도 많이 들어서 그 이야기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떤 임금님이 며느리, 곧 장차 왕후가 될 여자를 구하기 위하여 고을에 방을 붙이고 아주 덕망이 높고 예쁜 아가씨들을 다 불러다가 심사를 하는데, 임금님의 심사 방법이 퍽 지혜로웠습니다.

아가씨들에게 쌀 한 됫박을 주면서 한 달 동안 그것만 먹고살라고 했습니다. 아가씨들은 이것을 한 달로 나누어 가지고 죽을 쑤어서 조금씩 먹으면서 본의 아닌 다이어트를 했습니다. 마침내 죽을 지경이 되어서 어떤 아가씨는 들것에 들려 오고, 어떤 아가씨는 파리해져서 들어오는 등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한 아가씨는 피둥피둥한데다 떡까지 한 시루 머리에 이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넌 어떻게 된 일이냐?"하고 물어보니 쌀 한 됫박으로 떡을 해서 내다 팔았답니다.

그렇게 거듭하니까 실컷 먹고도 남아서 임금님 드리려고 한 시루 해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임금님은 "네가 잘 하였도다"하고 그 아가씨를 장래의 왕후로 삼았다는 이야기올시다.

여러분,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다. 소중히 여깁시다. 지난날을 후회할 것 없습니다. 오늘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책자에서 읽었습니다마는 통계적으로 조사해 보았더니 사업이나 학문에서 성공한 사람은 보통사람보다 평균 세 시간 일찍 일어난다고 합니다. 30분 일찍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세 시간이나 일찍 일어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게으르고는 아무 것도 되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금년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십니까? 아무쪼록 없는 것을 찾으며 불평하지 말고, 지난날을 후회하지도 말고, 내 여건대로, 주어진 대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권위 있는 발표를 보면 우리의 건강도 75퍼센트가 스스로 해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지 못한 것이지요. 병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는 진실에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만큼, 진리에 사는 것만큼, 의로운 만큼, 최선을 다한 만큼 자유의 영역이 넓어집니다.

있는 자에게 더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예레미야 4810절에 보면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벌써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생활 속에 심판이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게으른 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겪는 일입니다 마는 부지런히 일하고 보면 거기에는 잡념이 없습니다. 시험도 없습니다. 흘러가는 물은 썩는 법이 없습니다. 한가하고 할 일이 없으니까 앉아서 한숨이나 쉬게 되고 갖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필요 없는 건강을 계속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있는 자에게 더 주시는 하나님,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습니다.

어떤 한 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많이 벌고, 출세하고 ---- 이런 것은 잊어버립시다. 세계가 흔들리는데 내 사업만 잘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다만 충성 되이 진실하게 부지런하게 사는 성실한 한 해가 되어서 "착하고 진실한 종아, 내가 네게 열 고을 권세를 주노라"하시는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선진국을 운위합니다. 선진국민이 있고야 선진국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선진국민이 되고 나서 선진을 운위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른 자세로 설 때에 비로소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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