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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디모데전서 6장 11절~16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이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우리는 직접 운동장을 찾아가서 운동경기를 관람할 때도 있고, 텔레비전으로 중계하는 운동경기를 볼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면 온 국민이 그것에 관심을 모으기도 합니다. 길가는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상가의 텔레비전에 매달립니다. 길가에는 택시가 멈춰 서 있고 거리가 한산하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온 국민이 그 경기에 시선을 모으고 흥미 있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저는 운동경기를 볼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경기를 관전하면서 흔히 '이긴다' '진다'라는 말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들릴 수가 없습니다. 경기 시작하기 전에는 양편 모두가 다 이길 것처럼 의기양양하지만, 결국 경기 끝날 때에 보십시오. 한쪽의 승자와 한쪽의 패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승자에게는 영광과 만인의 찬사가 돌아갑니다. 본인들도 감격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가하면 패자는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습니다. 올림픽에 나가 메달 하나 따지 못하고 돌아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겨가지고 돌아서는 패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렇듯 이긴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요, 진다는 것은 극단적인 비참함입니다. 이기고 짐의 이러한 갈림을 보면 사람들이 너무도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리고, 그 승리를 위한 수고가 엄청난 것이기에 찬사를 보냄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경기는 3분으로 승패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이 3분의 경기를 위하여 그 선수는 10 년 동안 수고를 했습니다.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스스로 절제하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 긴 시간의 노력이 단 3분으로 결정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승패에 따라서 이 3분에 지금까지 수고한 의미가 있어지기도 하고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단 3분에 수년간의 수고가 평가되어야 하다니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너무 순간적이고 찰나적입니다.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서 목에 걸어봐도 그렇습니다. 물론 그 순간은 매우 영광스럽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축하 퍼레이드다 기자 회견이다 해서 무척 바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입니다. 그 순간이 지나면 모두 잊어버리게 마련입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이렇듯 시간이 흐르다보면 나중에는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허무입니다. 이렇듯 영광이란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기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승리했지만, 내일은 패자로 남습니다. 영원한 승리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지금의 승자도 언젠가는 패자로 남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champion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새로운 승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패자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는 영원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승자는 영원해야만 합니다. 승자는 비참하고 허무한 존재이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영원한 승리는 없는 것입니까? 영원한 승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영원한 영광은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영원한 것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영광도 마땅히 영원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참 승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악과 죄와 부조리를 이겨야 합니다. 이에 앞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면 악에게 진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만 합니다. 의로 이기고, 진리로 이기고, 평화로 이겨야 합니다. 빼앗아서 이긴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빼앗길 것입니다. 그리고 빼앗아 이겼을 때, 빼앗긴 자의 아픔을 볼 때에 빼앗은 내 마음도 결코 기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겼다고는 하지만, 지금 여기에 쓰러져 있는 저 사람을 바라보면 내 마음도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함께 이기고, 함께 영광을 누리고, 함께 승리를 노래할 수 있는 평화적이고 화목한 것이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빼앗고 죽임으로 얻어진 혁명적 승리란 그 안에 또 다른 혁명과 또 다른 전쟁을 내포하고 있기에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요새 보면 흔히들 무슨 일을 당하여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눌렸다고 생각하면 원수를 갚는다 복수를 한다 합니다. 이렇게 해서 원수를 갚고 나면 또 다른 원수가 생깁니다. 원수 갚고 다시 복수하는, 이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 보복전쟁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다 잿더미에 앉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가 참 승리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싸움 없는 전쟁, 이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참 승리, 선한 싸움의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선으로 악을 이기는 참 승리의 결정적 실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은 이 선한 싸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사랑하고 있기에, 저는 그 모습을 늘 생각해봅니다. 그 장면을 늘 마음에 그려봅니다. 여러분, 빌라도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를 믿건 안 믿건 상관없이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모순되고 부조리한 판단을 가리켜서 '빌라도 법정 같다'라고 합니다. 빌라도 법정---인류 역사상 최악의 부조리요, 최고의 모순입니다. 있을 수 없는 부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주제를 상실한 것 같습니다. 모순된 재판은 생각했지만, 그 재판대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빌라도 법정의 주제는 빌라도가 아닙니다. 그 판결 내용이 아닙니다. 재판대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 주제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빌라도 법정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의와 진리와 승리의 참모습을 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모습, 최대의 승리, 최대의 능력을 바로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다. 먼저, 우리는 능력은 있으나 스스로 자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를 비롯한 오늘의 본문말씀인 디모데전서를 읽어보십시오. 예수님께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하는 복음서의 가장 큰 주제가 바로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시고, 거친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능력의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하신 한마디로 시체가 걸어나오게 하시는 이적의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빼고 나면 성경에는 읽을 내용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능력의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아무 능력도 행하시지를 않으십니다.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비참하게 무능하게 무력하게 서 계실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다만 말씀하시지 않으실 뿐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능력을 행사하시지 않으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못된 무리를 진멸하실 수도 있습니다. 유황불을 내려 진멸하실 수도 있고,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묻어버리실 수도 있고, 당신을 해하는 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실 수도 있고, 지진으로 섬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같은 능력을 행하시지 아니하시고, 무능한 모습으로 서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증거 합니까? 하실 수 있으나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얼마든지 적을 소멸하실 수 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리하시지 않으십니다. 파괴적인 능력을 행사하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모습은 침묵입니다. 말씀이 없으십니다. 빌라도와 가야바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이를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시던 분이요, 많은 사람 앞에서 진리를 갈파하시던 분으로, 분명 무슨 말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네가 메시야냐?" 대답이 없으십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이 없으십니다. 그 많은 비난을 받으시면 서도 한마디 변명이 없으십니다. 당신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끝끝내 침묵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이 너무 많고 변명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들 통하겠습니까?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필요 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행실이 별로 온전치 않은 남편이 밤늦게 집에 돌아옵니다. 부인이 그 남편을 향하여 "왜 이렇게 늦었어요?"라고 묻습니다. 이 때 별로 양심에 찔릴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냥 늦었어"하고 맙니다.
그러나 행실이 바르지 않은 사람은 어디서 뭘 먹고, 누구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어쩌고저쩌고 하며 길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필경 거짓말입니다. 설명이 긴 말은 태반이 거짓말입니다. 진실한 말은 짧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진실하고 확실할 때에는 말이 없습니다. 오해를 할 테면 해라, 마음대로 해라하고는 말이 없습니다. 넉넉한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새 사람들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진실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허점이 너무 많습니다. 옛날에 여자는 말이 많아서 수염이 안 난다고 했는데 웬걸 보십시오. 요즘은 남자들이 더 말이 많습니다. 듬직하지 못하고, 도대체 무슨 변명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진실은 말이 없어도 됩니다.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인내와 온유와 믿음으로 빌라도 앞에서 침묵을 지키셨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동요가 없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당신 뜻대로 일을 밀고 나가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십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맡기고 계십니다. 그리고 산을 내려오시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무리들에게 체포당해주십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당신 앞에 되어지는 일에 어떤 굴욕이 있든 비난이 있든지 간에 이에 대항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 모두가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이 일이 있으리라고 한 성경이 여기서 성취되고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전혀 동요가 없으십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해도, 예수님께서는 만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본래의 뜻을 그대로 밀고 나가십니다. 마음에, 생각에, 행위에 전혀 동요가 없으십니다. 이것이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당신을 온전히 위탁하셨습니다.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되어진 일과 앞으로 되어질 일을 모두 맡기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저 앞을 바라보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하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앞에 십자가가 있음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음을 아십니다. 저 앞을 내다보십니다. 지금 당하시는 이 일에 대하여 개의(介意)하시지 않으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을 많이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십시오.
속은 속대로 쓰리고 돈은 돈대로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술만 들어가면 뭐든지 다 때려부숩니다. 그리고는 술이 깬 뒤에 수리를 하느라고 뚝딱거립니다. 이 얼마나 망신스럽습니까? 왜 이래야 합니까? 술을 마신 뒤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몰랐단 말입니까? 술이란 마신 뒤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깨어난 뒤의 그 망신스러움을 왜 미리 생각하지 못합니까? 그 몇 시간 뒤의 일을, 그 같은 실수를 평생 반복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또한 젊은 사람들도 나이가 든 다음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영원히 젊은 상태로 있지는 않습니다.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도 언젠가는 자식 때문에 속을 썩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정치가 슐츠(Schultz. George)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정치가가 되려면 적어도 2년 앞은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당장 국민의 지지를 받을 생각이 아니라 2년 후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생각을 하는, 그만큼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어야만 정치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장 국민의 여론에 동요되어서야 어떻게 미래를 움직이는 정치가가 되겠습니까? 먼 훗날에 알 때가 있을 것입니다. 훗날에 누군가가 평가해줄 것입니다.
역사가 평가해줄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앞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자식된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부모가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 다음에 십자가요,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있음을 내다보시고, 오늘 빌라도 앞에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진정 빌라도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빌라도가 큰소리를 치고 있는 듯하지만 보십시오.
오히려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향하여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이 악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께서 가해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빌라도 법정에서도 '빌라도 이 사람아, 자네 참 안됐구먼. 어쩌다 이 신세가 되었나? 자네도 알고 보면 피해자일세'하고 불쌍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지키고자 했을 뿐, 자신이 이 역사의 중심에 길이 악역으로 가담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사도신경을 외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천 년 동안 그 많은 성도들이 사도신경을 외어왔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여러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으시게 한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입니까? 먼저, 가야바를 원고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한 숱한 유대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이 많은 사람들은 다 제외시켜놓고, 오직 한사람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빌라도야말로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피해를 입었을 때에 가해자를 불쌍히 여겨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굴욕을 당했을 때에 가해자를 가엾게 여겨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피해와 굴욕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며, 나아가 그 가해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악한 처우를 받으면서도 선을 잃지 않는 것이 승리입니다.
더러운 세상에 살면서도 순결을 잃지 않는 것이 승리입니다. 모순된 세상에 살면서도 정도(正道)를 잃지 않는 것이 승리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직접 차를 운전하고 가십니까? 앞에 가고 뒤에 오는 차가 여러분을 괴롭힙니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내 길을 의연히 가야 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나오니, 나는 이렇게 한다---이러한 일대 일의 감정싸움이 사고를 부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나온다고 해서 나도 함께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미움을 받으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고, 내 본연의 길인 성도의 길을 하나님 앞에서 의연히 가야 할 것입니다.
승리란 생존자에게만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살아남는 것이 우선입니다. Survival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이 살고, 목적이 살고, 동기가 살고, 서원(誓願)이 살고, 믿음이 살고, 사랑이 살아 있어야 승리인 것입니다. 동시에 종속적 변화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욕을 먹었다고 해서 같이 욕을 한다면 지고 마는 것입니다. 미움을 받는다고 같이 미워해버리면 나는 완전히 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종속적으로 변화를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상 악명 높은 삼대 악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에 나타난 욥의 아내입니다. 욥이 부자로 살다가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평생의 동반자로서 욥을 위로하고 격려함이 마땅한데 오히려 그녀는 남편을 저주하고 가출해버렸습니다. 그 둘은 소크라테스의 아내입니다. 집안을 돌보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돌아다니는 남편에게 불만인 그녀는 소크라테스에게 물세례를 퍼부을 정도로 못됐다고 합니다. 그 셋은 웨슬리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전도자의 아내인데도 불구하고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지간히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내가 자신을 저주하고 나갔을 때, 욥은 인생무상이니 세상이 어떻다느니 하는 마음의 흔들림이 없이 자신의 신앙을 꿋꿋이 지켜나갔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아내의 욕설에 맞대어 싸우거나 감정이 흔들리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을 남기는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웨슬리 역시 아내가 괴롭힌다고 해서 자신의 전도사업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공로를 아내에게 돌렸습니다.
여러분, 남편을 잘 만났느니 못 만났느니, 아내가 어떻다느니 하는 것은 다 소인들의 소리입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내 길을 갈 뿐입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어떤 환경에도, 어떤 욕설에도, 어떤 비난에도 흔들리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영생 지향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갈 것입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악을 시인하신 것도, 묵인하신 것도, 더욱이 악과 타협하신 것도 아닙니다. 조용하게 심판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정욕)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라고.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귀양갈 때에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수백만 대군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단 하나의 군사도 없이 온유와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오, 갈릴리사람이여! 당신이 이겼소." 또한 슈바이처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고난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 승리의 신비, 생명의 신비가 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심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 비참하게 서 계신 것 같으나, 그실 주님께서는 세계를 호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고난의 신비, 이 부활의 신비, 이 참된 증거를 내가 온전히 받아들일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승리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있고, 우리를 향한 승리의 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디모데전서 6장 11절~16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이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우리는 직접 운동장을 찾아가서 운동경기를 관람할 때도 있고, 텔레비전으로 중계하는 운동경기를 볼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면 온 국민이 그것에 관심을 모으기도 합니다. 길가는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상가의 텔레비전에 매달립니다. 길가에는 택시가 멈춰 서 있고 거리가 한산하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온 국민이 그 경기에 시선을 모으고 흥미 있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저는 운동경기를 볼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경기를 관전하면서 흔히 '이긴다' '진다'라는 말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들릴 수가 없습니다. 경기 시작하기 전에는 양편 모두가 다 이길 것처럼 의기양양하지만, 결국 경기 끝날 때에 보십시오. 한쪽의 승자와 한쪽의 패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승자에게는 영광과 만인의 찬사가 돌아갑니다. 본인들도 감격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가하면 패자는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습니다. 올림픽에 나가 메달 하나 따지 못하고 돌아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겨가지고 돌아서는 패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렇듯 이긴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요, 진다는 것은 극단적인 비참함입니다. 이기고 짐의 이러한 갈림을 보면 사람들이 너무도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리고, 그 승리를 위한 수고가 엄청난 것이기에 찬사를 보냄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경기는 3분으로 승패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이 3분의 경기를 위하여 그 선수는 10 년 동안 수고를 했습니다.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스스로 절제하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 긴 시간의 노력이 단 3분으로 결정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승패에 따라서 이 3분에 지금까지 수고한 의미가 있어지기도 하고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단 3분에 수년간의 수고가 평가되어야 하다니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너무 순간적이고 찰나적입니다.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서 목에 걸어봐도 그렇습니다. 물론 그 순간은 매우 영광스럽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축하 퍼레이드다 기자 회견이다 해서 무척 바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입니다. 그 순간이 지나면 모두 잊어버리게 마련입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이렇듯 시간이 흐르다보면 나중에는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허무입니다. 이렇듯 영광이란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기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승리했지만, 내일은 패자로 남습니다. 영원한 승리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지금의 승자도 언젠가는 패자로 남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champion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새로운 승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패자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는 영원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승자는 영원해야만 합니다. 승자는 비참하고 허무한 존재이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영원한 승리는 없는 것입니까? 영원한 승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영원한 영광은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영원한 것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영광도 마땅히 영원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참 승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악과 죄와 부조리를 이겨야 합니다. 이에 앞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면 악에게 진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만 합니다. 의로 이기고, 진리로 이기고, 평화로 이겨야 합니다. 빼앗아서 이긴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빼앗길 것입니다. 그리고 빼앗아 이겼을 때, 빼앗긴 자의 아픔을 볼 때에 빼앗은 내 마음도 결코 기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겼다고는 하지만, 지금 여기에 쓰러져 있는 저 사람을 바라보면 내 마음도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함께 이기고, 함께 영광을 누리고, 함께 승리를 노래할 수 있는 평화적이고 화목한 것이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빼앗고 죽임으로 얻어진 혁명적 승리란 그 안에 또 다른 혁명과 또 다른 전쟁을 내포하고 있기에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요새 보면 흔히들 무슨 일을 당하여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눌렸다고 생각하면 원수를 갚는다 복수를 한다 합니다. 이렇게 해서 원수를 갚고 나면 또 다른 원수가 생깁니다. 원수 갚고 다시 복수하는, 이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 보복전쟁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다 잿더미에 앉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가 참 승리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싸움 없는 전쟁, 이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참 승리, 선한 싸움의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선으로 악을 이기는 참 승리의 결정적 실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은 이 선한 싸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사랑하고 있기에, 저는 그 모습을 늘 생각해봅니다. 그 장면을 늘 마음에 그려봅니다. 여러분, 빌라도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를 믿건 안 믿건 상관없이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모순되고 부조리한 판단을 가리켜서 '빌라도 법정 같다'라고 합니다. 빌라도 법정---인류 역사상 최악의 부조리요, 최고의 모순입니다. 있을 수 없는 부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주제를 상실한 것 같습니다. 모순된 재판은 생각했지만, 그 재판대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빌라도 법정의 주제는 빌라도가 아닙니다. 그 판결 내용이 아닙니다. 재판대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 주제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빌라도 법정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의와 진리와 승리의 참모습을 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모습, 최대의 승리, 최대의 능력을 바로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다. 먼저, 우리는 능력은 있으나 스스로 자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를 비롯한 오늘의 본문말씀인 디모데전서를 읽어보십시오. 예수님께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하는 복음서의 가장 큰 주제가 바로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시고, 거친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능력의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하신 한마디로 시체가 걸어나오게 하시는 이적의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빼고 나면 성경에는 읽을 내용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능력의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아무 능력도 행하시지를 않으십니다.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비참하게 무능하게 무력하게 서 계실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다만 말씀하시지 않으실 뿐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능력을 행사하시지 않으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못된 무리를 진멸하실 수도 있습니다. 유황불을 내려 진멸하실 수도 있고,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묻어버리실 수도 있고, 당신을 해하는 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실 수도 있고, 지진으로 섬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같은 능력을 행하시지 아니하시고, 무능한 모습으로 서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증거 합니까? 하실 수 있으나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얼마든지 적을 소멸하실 수 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리하시지 않으십니다. 파괴적인 능력을 행사하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모습은 침묵입니다. 말씀이 없으십니다. 빌라도와 가야바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이를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시던 분이요, 많은 사람 앞에서 진리를 갈파하시던 분으로, 분명 무슨 말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네가 메시야냐?" 대답이 없으십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이 없으십니다. 그 많은 비난을 받으시면 서도 한마디 변명이 없으십니다. 당신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끝끝내 침묵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이 너무 많고 변명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들 통하겠습니까?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필요 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행실이 별로 온전치 않은 남편이 밤늦게 집에 돌아옵니다. 부인이 그 남편을 향하여 "왜 이렇게 늦었어요?"라고 묻습니다. 이 때 별로 양심에 찔릴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냥 늦었어"하고 맙니다.
그러나 행실이 바르지 않은 사람은 어디서 뭘 먹고, 누구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어쩌고저쩌고 하며 길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필경 거짓말입니다. 설명이 긴 말은 태반이 거짓말입니다. 진실한 말은 짧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진실하고 확실할 때에는 말이 없습니다. 오해를 할 테면 해라, 마음대로 해라하고는 말이 없습니다. 넉넉한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새 사람들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진실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허점이 너무 많습니다. 옛날에 여자는 말이 많아서 수염이 안 난다고 했는데 웬걸 보십시오. 요즘은 남자들이 더 말이 많습니다. 듬직하지 못하고, 도대체 무슨 변명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진실은 말이 없어도 됩니다.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인내와 온유와 믿음으로 빌라도 앞에서 침묵을 지키셨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동요가 없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당신 뜻대로 일을 밀고 나가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십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맡기고 계십니다. 그리고 산을 내려오시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무리들에게 체포당해주십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당신 앞에 되어지는 일에 어떤 굴욕이 있든 비난이 있든지 간에 이에 대항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 모두가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이 일이 있으리라고 한 성경이 여기서 성취되고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전혀 동요가 없으십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해도, 예수님께서는 만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본래의 뜻을 그대로 밀고 나가십니다. 마음에, 생각에, 행위에 전혀 동요가 없으십니다. 이것이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당신을 온전히 위탁하셨습니다.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되어진 일과 앞으로 되어질 일을 모두 맡기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저 앞을 바라보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하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앞에 십자가가 있음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음을 아십니다. 저 앞을 내다보십니다. 지금 당하시는 이 일에 대하여 개의(介意)하시지 않으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을 많이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십시오.
속은 속대로 쓰리고 돈은 돈대로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술만 들어가면 뭐든지 다 때려부숩니다. 그리고는 술이 깬 뒤에 수리를 하느라고 뚝딱거립니다. 이 얼마나 망신스럽습니까? 왜 이래야 합니까? 술을 마신 뒤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몰랐단 말입니까? 술이란 마신 뒤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깨어난 뒤의 그 망신스러움을 왜 미리 생각하지 못합니까? 그 몇 시간 뒤의 일을, 그 같은 실수를 평생 반복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또한 젊은 사람들도 나이가 든 다음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영원히 젊은 상태로 있지는 않습니다.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도 언젠가는 자식 때문에 속을 썩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정치가 슐츠(Schultz. George)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정치가가 되려면 적어도 2년 앞은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당장 국민의 지지를 받을 생각이 아니라 2년 후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생각을 하는, 그만큼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어야만 정치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장 국민의 여론에 동요되어서야 어떻게 미래를 움직이는 정치가가 되겠습니까? 먼 훗날에 알 때가 있을 것입니다. 훗날에 누군가가 평가해줄 것입니다.
역사가 평가해줄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앞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자식된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부모가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 다음에 십자가요,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있음을 내다보시고, 오늘 빌라도 앞에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진정 빌라도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빌라도가 큰소리를 치고 있는 듯하지만 보십시오.
오히려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향하여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이 악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께서 가해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빌라도 법정에서도 '빌라도 이 사람아, 자네 참 안됐구먼. 어쩌다 이 신세가 되었나? 자네도 알고 보면 피해자일세'하고 불쌍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지키고자 했을 뿐, 자신이 이 역사의 중심에 길이 악역으로 가담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사도신경을 외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천 년 동안 그 많은 성도들이 사도신경을 외어왔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여러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으시게 한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입니까? 먼저, 가야바를 원고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한 숱한 유대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이 많은 사람들은 다 제외시켜놓고, 오직 한사람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빌라도야말로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피해를 입었을 때에 가해자를 불쌍히 여겨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굴욕을 당했을 때에 가해자를 가엾게 여겨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피해와 굴욕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며, 나아가 그 가해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악한 처우를 받으면서도 선을 잃지 않는 것이 승리입니다.
더러운 세상에 살면서도 순결을 잃지 않는 것이 승리입니다. 모순된 세상에 살면서도 정도(正道)를 잃지 않는 것이 승리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직접 차를 운전하고 가십니까? 앞에 가고 뒤에 오는 차가 여러분을 괴롭힙니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내 길을 의연히 가야 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나오니, 나는 이렇게 한다---이러한 일대 일의 감정싸움이 사고를 부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나온다고 해서 나도 함께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미움을 받으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고, 내 본연의 길인 성도의 길을 하나님 앞에서 의연히 가야 할 것입니다.
승리란 생존자에게만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살아남는 것이 우선입니다. Survival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이 살고, 목적이 살고, 동기가 살고, 서원(誓願)이 살고, 믿음이 살고, 사랑이 살아 있어야 승리인 것입니다. 동시에 종속적 변화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욕을 먹었다고 해서 같이 욕을 한다면 지고 마는 것입니다. 미움을 받는다고 같이 미워해버리면 나는 완전히 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종속적으로 변화를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상 악명 높은 삼대 악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에 나타난 욥의 아내입니다. 욥이 부자로 살다가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평생의 동반자로서 욥을 위로하고 격려함이 마땅한데 오히려 그녀는 남편을 저주하고 가출해버렸습니다. 그 둘은 소크라테스의 아내입니다. 집안을 돌보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돌아다니는 남편에게 불만인 그녀는 소크라테스에게 물세례를 퍼부을 정도로 못됐다고 합니다. 그 셋은 웨슬리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전도자의 아내인데도 불구하고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지간히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내가 자신을 저주하고 나갔을 때, 욥은 인생무상이니 세상이 어떻다느니 하는 마음의 흔들림이 없이 자신의 신앙을 꿋꿋이 지켜나갔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아내의 욕설에 맞대어 싸우거나 감정이 흔들리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을 남기는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웨슬리 역시 아내가 괴롭힌다고 해서 자신의 전도사업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공로를 아내에게 돌렸습니다.
여러분, 남편을 잘 만났느니 못 만났느니, 아내가 어떻다느니 하는 것은 다 소인들의 소리입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내 길을 갈 뿐입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어떤 환경에도, 어떤 욕설에도, 어떤 비난에도 흔들리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영생 지향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갈 것입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악을 시인하신 것도, 묵인하신 것도, 더욱이 악과 타협하신 것도 아닙니다. 조용하게 심판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정욕)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라고.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귀양갈 때에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수백만 대군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단 하나의 군사도 없이 온유와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오, 갈릴리사람이여! 당신이 이겼소." 또한 슈바이처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고난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 승리의 신비, 생명의 신비가 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심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 비참하게 서 계신 것 같으나, 그실 주님께서는 세계를 호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고난의 신비, 이 부활의 신비, 이 참된 증거를 내가 온전히 받아들일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승리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있고, 우리를 향한 승리의 보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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