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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생활의식(베드로전서 4장 7절~11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중에 손수 유서(遺書)를 써본 적이 있습니까?
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어떤 죽음으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를 두고 기도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서울에 '유서쓰기공동체'라고 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있다고 합니다. 그 소문을 듣고 저는 퍽 반가웠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나서 유서를 쓰는 것입니다. 이들 유서를 봉하고 한데 모아서 변호사에게 맡깁니다. 유서란 쓴 사람이 죽었을 때에만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서를 쓰고 나서 1년이 지나면 그들은 다시 모입니다. 다시 모여서 지난번에 썼던 유서는 다 찢어버리고 새로운 유서를 씁니다. 해마다 그런 일을 되풀이한다고 합니다. 그 유서에는 재산의 처리방법과 유산물림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특별히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자녀에게는 한푼의 유산도 물리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만 대학 공부 마칠 때까지 소요되는 것을 유산으로 남깁니다. 이렇게 하고 보았더니 그 자녀들의 자세가 달라지더랍니다. '아버지 것은 내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유서를 써놓으셨으니, 이제 나에게 돌아올 몫은 없다'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들 받아들이고 보니 자녀들은 오히려 마음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들 합니다.
'이 재산은 내 것이 아니다, 이미 처분되고 만 것이다, 내가 잠시 빌려쓰고 있을 뿐이다'---이런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서 쓰기 운동'이 날로 호응을 얻어 확산되고 있다 하니 적이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시간 개념은 직선적입니다. 시간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역사에 궁극(窮極)이 있습니다. 목표가 있습니다. 역사에 final goal이 있고 D-day가 있습니다.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가 있습니다. 이렇게 믿고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우주에 종말이 있고 개인적으로도 끝이 있습니다.
오늘은 말세의 징조로 가득차 있습니다. 생태학적(生態學的)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더욱이 인간성으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종말을 고하는 징조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 속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파국으로 치닫는 시간의 카운트다운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무엇을 서둘러 해야 할 것입니까? 여러분도 일생을 통하여 많은 시험을 치러보셨을 줄 압니다. 학교에 다닐 때에도 시험을 쳤습니다. 직장에 들어갈 때에도 치렀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학생들의 시험 보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봅니다. 누구할 것 없이 시험지를 손에 잡으면 심각해집니다. 이 시간에는 모른다고 선생님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참고서를 뒤적여볼 수도 없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달리 도움을 청할 길이 없습니다. 냉정하게 홀로 앉아서 답을 내어야만 합니다. 아는 데까지입니다. 되도록이면 아는 것부터, 쉬운 것부터 풀어나가야 합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답을 내어보아야 합니다. 마감 종소리가 땡하고 울립니다. 이젠 손을 들어야 합니다. 밥이 됐든 죽이 됐든 끝입니다. 후회할 것도, 뭘 탓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시험장의 시간입니다. 시험장이야말로 인간사(人間社)를 한마디로 웅변하는 현장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7절)"---이는 심판을 말씀하는 것이요, 종말론적 구원을 말씀함입니다. 끝을 말씀함인가 하면 영원한 생의 시작을 말씀함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주님을 만나는 그 시각을 의미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마지막이 가까웠으므로 밝게 살아야 합니다. 이제 어두움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빌립보서 4장 5절에서는 다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셨으니 이젠 너그러워야 한다, 인색해서는 안 된다 함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5장 8절에서는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끝까지 참으라 함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벌고, 가지고, 지위를 구하고…… 이런 것보다도 이제 우리의 관심은 얼마나 깨끗하게 사느냐에 있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7절)"라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과거에 매일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관심과 시선을 저 앞에 다가오는 미래에 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 뵐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은 벌써 저 결정적 미래에, 저 앞에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취할 태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모름지기 하나님께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 하나님께로서 듣는 마음, 하나님의 뜻을 찾는 마음으로 기울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 실패가 정치적인 것에 원인이 있습니까, 경제 적인 것에 원인이 있습니까? 혹은 어느 딴사람 때문입니까? 야고보서에서는 문제가 기도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 3)." 우리는 흔히 실패를 하고 나서야 가슴을 치고 후회를 합니다. '그 때에는 내가 왜 그렇게 했던고'하고 탄식합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실패했던 것입니다. 내가 비겁하고 무능했던 것도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판단에 실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서둘러야 할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하시고 밤새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도 당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 지금이 어떤 시간인데 잠을 자고 있느냐,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졸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그는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주님의 종으로 역사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고,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합니다. 여러분, 한 시간 기도하셨습니까? 기도하는 시간을 늘려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입니다. 얼마나 선하게 사느냐가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얼마나 진실하게 기도하느냐--이것이 문제입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인의 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더 진실하게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되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몽롱한 가운데서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웅얼거릴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근신하여 기도하라"---여기서 근신한다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삼간다는 뜻입니다. 기도에 합당한 몸가짐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기도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시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새벽기도에 한 2천 명 나오는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가끔 싱거운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모두들 세수는 하고 나왔을까? 이는 닦고 나왔을까?'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모름지기 근신을 해야 합니다. 어지러워진 마음, 더러운 몸으로는 안됩니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가짐으로 기도에 합당한 자세를 취하여 기도하라 함입니다.
본문은 다시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8절)"라고 말씀합니다. '열심으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엑테네'입니다. 이 말은 '잡아늘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말입니다. 경주에 비유하여 이 말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경마할 때에 보면, 말이 힘을 다하여 열심히 달리는데도 기수(騎手)는 채찍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더 빨리 달리라고 함입니다. 능력을 극대화하려는 소위 주마가편(走馬加鞭)인 것입니다. "열심으로 사랑하라"의 '열심으로'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최대한으로 서둘러서 사랑하라 함입니다. 더 열심으로 더 뜨겁게 사랑하세요. 모름지기 진정 존중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해서 꾸준하게 끝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8절)"---죄를 용서하면서, 죄를 극복하면서 서로 사랑하라 함입니다. 우리 집에 세 살난 제 손녀가 하나 있습니다. 그 아이가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제법 노래도 부릅니다. '송아지 송아지'를 '동아지 동아지'라고 하면서 열심히 노래부릅니다. 그런데 제 귀에는 '동아지'가 '송아지'보다 더 예쁘게 들립니다.
분명히 발음을 잘못하는 것이지만 사랑의 마음에는 이 실수가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더 귀해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사랑의 눈을 가지고 남을 볼 때에는 남의 잘못도 허물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할 때에는 상대방이 그렇게 좋고 완벽해 보입니다.
머리끝서 발끝까지 다 좋아 보입니다. 발뒤꿈치도 외씨로 보일 만큼 어느 한군데도 미운 데가 없습니다. 얼굴 찡그리는 것까지도 예뻐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엔가부터 사랑이 식어지면 웃는 것도 미워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던 허물이 하나둘 드러나고 점점 더 커 보입니다. 상대방이 변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사랑하는 마음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허물이 안보일 때까지 사랑하라, 모든 죄를 덮을 만큼 사랑하라, 허물이 기억되지 않을 때까지 사랑하라, 그것이 아니면 사랑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이것이 종말론적 교훈입니다.
날로 그릇되어 가는 아들을 보다못해 집에서 내쫓아버린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내쫓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사이에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 아버지 역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이 아버지가 차 사고로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집을 나간 터이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숨이 넘어가는 시각, 아버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힘겹게 입술을 들먹이려 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입에 귀를 갖다댑니다. 아버지는 간신히 한마디를 남깁니다. "그 애를 보거든 내가 이젠 용서했다고 말해주시오." 그리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결국에는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사랑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여러분, 쉰 살이 넘었거든 이젠 남을 비판하지 말 것입니다.
좋지 않은 말은 하지 말 것입니다. 예순 살이 넘었거든 좋지 않은 것은 듣지도 보지도 말 것입니다. 입을 열겠거든 덕담이나 할 것이요, 남 듣기 좋은 소리나 할 것입니다. 그런 말만 하고 살아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남의 허물을 살필 겨를은 없습니다. 마지막이 가까웠으므로 이제는 모든 허물을 덮을 만큼 열심히 사랑할 것입니다.
본문은 가르칩니다. "서로 봉사하라(10절)." 내 시간은 다 되었으니 남은 시간은 이제 남을 위해 바치라, 나를 기쁘게 할 시간은 다 되었으니 이제는 남을 기쁘게 하는 시간으로 살라 함입니다. '봉사'는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입니다. 이 말은 '예배'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 service'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에게 봉사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도 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 말씀입니다. 봉사를 하고자 함에는 가진 것이 없다는 것, 은사가 없다는 것, 재능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실, 문제는 가진 것을 모르는 데에 있습니다. 있는 재능을 올바로 쓰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라고 가르쳐줍니다. 새로운 은사를 구할 것 없습니다. 새로이 능력을 구할 것 없습니다. 더 재산을 구할 것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서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말씀은 "서로 봉사하라"라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의 봉사는 수직적이기 쉽습니다. 내가 위에서 봉사하는 것같이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평적으로 섬기어야 합니다. 섬기되 주는 자가 되려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주는 자요, 너는 받는 자다---이런 생각은 착각인 것입니다. 서로서로 봉사할 것입니다. 서로서로 주고받을 것입니다. 서로 봉사하되 원망 없이 할 것입니다. 언제나 고마운 마음으로 받으니 감사합니다. 줄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섬긴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고 섬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웬 여자가 다가오더니 웨슬리에게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만일 내일 밤 12시에 목사님이 죽게 되어 있다면 남은 시간에 목사님은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웨슬리는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대답합니다. "여기에 적혀 있는 원래의 계획대로 할 것입니다." 하던 일을 그대로 할 것이다---참으로 뜻깊은 대답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되 언제나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유감없이 해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시각까지 말입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유감이 없습니까? 그대로 괜찮은 것입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날마다 시간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 해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들을 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생활의식(生活意識)입니다. 한 농부가 친구를 보고 하소연했습니다. "나에게는 땅도 많고 재산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죽은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을 자선사업에 쓰도록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유서를 써놓았다. 그러니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구두쇠라고 하니 속 상하구나." 그러자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은 우화(寓話)를 들려주었습니다.
하루는 돼지가 암소를 보고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나는 남들 보기에 많이 먹고 살도 쪘지만, 죽으면 내 살과 가죽을 고스란히 주인한테 바치지 않는가. 그런데도 남들은 왜 나를 보고 '돼지야, 돼지야'하며 손가락질하는지 모르겠어." 그러자 암소가 핀잔을 줍니다. "너는 실컷 먹고 살이나 잔뜩 쪄서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다가 죽고 나서야 고작 쓸모 없는 고깃덩이나 주인한테 바치지만 나는 어떠냐? 나는 열심히 밭을 갈아주고 짐도 져주고, 심지어는 우유도 바치지 않느냐? 나는 살아 있을 때에도 이렇게 도움을 드린단 말이다. 그러고도 죽은 다음에는 주인에게 고기까지 바치지 않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재산을 악착같이 움켜쥐고 살다가 빈손으로 죽어 가는 사람도 물론 어리석지만, 좋은 일에 바치겠다는 유서 한 장 써놓고 구두쇠 노릇 하는 사람도 올바르다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을 때에, 할 수 있을 때에 열심히 선하게 일하고 그리고 나서 남은 것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런 사람이 올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동안에 종말론적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할 일을 할 것입니다. 부지런히 서두를 것입니다. 종말론적 창조의식을 가질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의식으로부터 비로소 인간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과연 종말론적 의식이 있습니까? 역사의 징조를 판독하고 있습니까? 나의 낮음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내가 처한 이 시간이 어떠한 시간이라고 분명하게 파악하고 삽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 8)"---여러분, 열심히 서로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봉사합시다.
종말론적 생활의식(베드로전서 4장 7절~11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중에 손수 유서(遺書)를 써본 적이 있습니까?
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어떤 죽음으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를 두고 기도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서울에 '유서쓰기공동체'라고 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있다고 합니다. 그 소문을 듣고 저는 퍽 반가웠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나서 유서를 쓰는 것입니다. 이들 유서를 봉하고 한데 모아서 변호사에게 맡깁니다. 유서란 쓴 사람이 죽었을 때에만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서를 쓰고 나서 1년이 지나면 그들은 다시 모입니다. 다시 모여서 지난번에 썼던 유서는 다 찢어버리고 새로운 유서를 씁니다. 해마다 그런 일을 되풀이한다고 합니다. 그 유서에는 재산의 처리방법과 유산물림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특별히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자녀에게는 한푼의 유산도 물리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만 대학 공부 마칠 때까지 소요되는 것을 유산으로 남깁니다. 이렇게 하고 보았더니 그 자녀들의 자세가 달라지더랍니다. '아버지 것은 내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유서를 써놓으셨으니, 이제 나에게 돌아올 몫은 없다'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들 받아들이고 보니 자녀들은 오히려 마음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들 합니다.
'이 재산은 내 것이 아니다, 이미 처분되고 만 것이다, 내가 잠시 빌려쓰고 있을 뿐이다'---이런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서 쓰기 운동'이 날로 호응을 얻어 확산되고 있다 하니 적이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시간 개념은 직선적입니다. 시간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역사에 궁극(窮極)이 있습니다. 목표가 있습니다. 역사에 final goal이 있고 D-day가 있습니다.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가 있습니다. 이렇게 믿고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우주에 종말이 있고 개인적으로도 끝이 있습니다.
오늘은 말세의 징조로 가득차 있습니다. 생태학적(生態學的)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더욱이 인간성으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종말을 고하는 징조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 속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파국으로 치닫는 시간의 카운트다운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무엇을 서둘러 해야 할 것입니까? 여러분도 일생을 통하여 많은 시험을 치러보셨을 줄 압니다. 학교에 다닐 때에도 시험을 쳤습니다. 직장에 들어갈 때에도 치렀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학생들의 시험 보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봅니다. 누구할 것 없이 시험지를 손에 잡으면 심각해집니다. 이 시간에는 모른다고 선생님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참고서를 뒤적여볼 수도 없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달리 도움을 청할 길이 없습니다. 냉정하게 홀로 앉아서 답을 내어야만 합니다. 아는 데까지입니다. 되도록이면 아는 것부터, 쉬운 것부터 풀어나가야 합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답을 내어보아야 합니다. 마감 종소리가 땡하고 울립니다. 이젠 손을 들어야 합니다. 밥이 됐든 죽이 됐든 끝입니다. 후회할 것도, 뭘 탓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시험장의 시간입니다. 시험장이야말로 인간사(人間社)를 한마디로 웅변하는 현장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7절)"---이는 심판을 말씀하는 것이요, 종말론적 구원을 말씀함입니다. 끝을 말씀함인가 하면 영원한 생의 시작을 말씀함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주님을 만나는 그 시각을 의미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마지막이 가까웠으므로 밝게 살아야 합니다. 이제 어두움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빌립보서 4장 5절에서는 다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셨으니 이젠 너그러워야 한다, 인색해서는 안 된다 함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5장 8절에서는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끝까지 참으라 함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벌고, 가지고, 지위를 구하고…… 이런 것보다도 이제 우리의 관심은 얼마나 깨끗하게 사느냐에 있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7절)"라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과거에 매일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관심과 시선을 저 앞에 다가오는 미래에 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 뵐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은 벌써 저 결정적 미래에, 저 앞에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취할 태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모름지기 하나님께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 하나님께로서 듣는 마음, 하나님의 뜻을 찾는 마음으로 기울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 실패가 정치적인 것에 원인이 있습니까, 경제 적인 것에 원인이 있습니까? 혹은 어느 딴사람 때문입니까? 야고보서에서는 문제가 기도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 3)." 우리는 흔히 실패를 하고 나서야 가슴을 치고 후회를 합니다. '그 때에는 내가 왜 그렇게 했던고'하고 탄식합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실패했던 것입니다. 내가 비겁하고 무능했던 것도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판단에 실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서둘러야 할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하시고 밤새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도 당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 지금이 어떤 시간인데 잠을 자고 있느냐,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졸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그는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주님의 종으로 역사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고,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합니다. 여러분, 한 시간 기도하셨습니까? 기도하는 시간을 늘려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입니다. 얼마나 선하게 사느냐가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얼마나 진실하게 기도하느냐--이것이 문제입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인의 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더 진실하게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되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몽롱한 가운데서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웅얼거릴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근신하여 기도하라"---여기서 근신한다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삼간다는 뜻입니다. 기도에 합당한 몸가짐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기도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시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새벽기도에 한 2천 명 나오는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가끔 싱거운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모두들 세수는 하고 나왔을까? 이는 닦고 나왔을까?'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모름지기 근신을 해야 합니다. 어지러워진 마음, 더러운 몸으로는 안됩니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가짐으로 기도에 합당한 자세를 취하여 기도하라 함입니다.
본문은 다시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8절)"라고 말씀합니다. '열심으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엑테네'입니다. 이 말은 '잡아늘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말입니다. 경주에 비유하여 이 말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경마할 때에 보면, 말이 힘을 다하여 열심히 달리는데도 기수(騎手)는 채찍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더 빨리 달리라고 함입니다. 능력을 극대화하려는 소위 주마가편(走馬加鞭)인 것입니다. "열심으로 사랑하라"의 '열심으로'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최대한으로 서둘러서 사랑하라 함입니다. 더 열심으로 더 뜨겁게 사랑하세요. 모름지기 진정 존중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해서 꾸준하게 끝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8절)"---죄를 용서하면서, 죄를 극복하면서 서로 사랑하라 함입니다. 우리 집에 세 살난 제 손녀가 하나 있습니다. 그 아이가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제법 노래도 부릅니다. '송아지 송아지'를 '동아지 동아지'라고 하면서 열심히 노래부릅니다. 그런데 제 귀에는 '동아지'가 '송아지'보다 더 예쁘게 들립니다.
분명히 발음을 잘못하는 것이지만 사랑의 마음에는 이 실수가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더 귀해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사랑의 눈을 가지고 남을 볼 때에는 남의 잘못도 허물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할 때에는 상대방이 그렇게 좋고 완벽해 보입니다.
머리끝서 발끝까지 다 좋아 보입니다. 발뒤꿈치도 외씨로 보일 만큼 어느 한군데도 미운 데가 없습니다. 얼굴 찡그리는 것까지도 예뻐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엔가부터 사랑이 식어지면 웃는 것도 미워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던 허물이 하나둘 드러나고 점점 더 커 보입니다. 상대방이 변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사랑하는 마음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허물이 안보일 때까지 사랑하라, 모든 죄를 덮을 만큼 사랑하라, 허물이 기억되지 않을 때까지 사랑하라, 그것이 아니면 사랑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이것이 종말론적 교훈입니다.
날로 그릇되어 가는 아들을 보다못해 집에서 내쫓아버린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내쫓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사이에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 아버지 역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이 아버지가 차 사고로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집을 나간 터이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숨이 넘어가는 시각, 아버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힘겹게 입술을 들먹이려 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입에 귀를 갖다댑니다. 아버지는 간신히 한마디를 남깁니다. "그 애를 보거든 내가 이젠 용서했다고 말해주시오." 그리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결국에는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사랑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여러분, 쉰 살이 넘었거든 이젠 남을 비판하지 말 것입니다.
좋지 않은 말은 하지 말 것입니다. 예순 살이 넘었거든 좋지 않은 것은 듣지도 보지도 말 것입니다. 입을 열겠거든 덕담이나 할 것이요, 남 듣기 좋은 소리나 할 것입니다. 그런 말만 하고 살아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남의 허물을 살필 겨를은 없습니다. 마지막이 가까웠으므로 이제는 모든 허물을 덮을 만큼 열심히 사랑할 것입니다.
본문은 가르칩니다. "서로 봉사하라(10절)." 내 시간은 다 되었으니 남은 시간은 이제 남을 위해 바치라, 나를 기쁘게 할 시간은 다 되었으니 이제는 남을 기쁘게 하는 시간으로 살라 함입니다. '봉사'는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입니다. 이 말은 '예배'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 service'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에게 봉사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도 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 말씀입니다. 봉사를 하고자 함에는 가진 것이 없다는 것, 은사가 없다는 것, 재능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실, 문제는 가진 것을 모르는 데에 있습니다. 있는 재능을 올바로 쓰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라고 가르쳐줍니다. 새로운 은사를 구할 것 없습니다. 새로이 능력을 구할 것 없습니다. 더 재산을 구할 것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서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말씀은 "서로 봉사하라"라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의 봉사는 수직적이기 쉽습니다. 내가 위에서 봉사하는 것같이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평적으로 섬기어야 합니다. 섬기되 주는 자가 되려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주는 자요, 너는 받는 자다---이런 생각은 착각인 것입니다. 서로서로 봉사할 것입니다. 서로서로 주고받을 것입니다. 서로 봉사하되 원망 없이 할 것입니다. 언제나 고마운 마음으로 받으니 감사합니다. 줄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섬긴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고 섬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웬 여자가 다가오더니 웨슬리에게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만일 내일 밤 12시에 목사님이 죽게 되어 있다면 남은 시간에 목사님은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웨슬리는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대답합니다. "여기에 적혀 있는 원래의 계획대로 할 것입니다." 하던 일을 그대로 할 것이다---참으로 뜻깊은 대답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되 언제나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유감없이 해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시각까지 말입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유감이 없습니까? 그대로 괜찮은 것입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날마다 시간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 해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들을 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생활의식(生活意識)입니다. 한 농부가 친구를 보고 하소연했습니다. "나에게는 땅도 많고 재산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죽은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을 자선사업에 쓰도록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유서를 써놓았다. 그러니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구두쇠라고 하니 속 상하구나." 그러자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은 우화(寓話)를 들려주었습니다.
하루는 돼지가 암소를 보고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나는 남들 보기에 많이 먹고 살도 쪘지만, 죽으면 내 살과 가죽을 고스란히 주인한테 바치지 않는가. 그런데도 남들은 왜 나를 보고 '돼지야, 돼지야'하며 손가락질하는지 모르겠어." 그러자 암소가 핀잔을 줍니다. "너는 실컷 먹고 살이나 잔뜩 쪄서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다가 죽고 나서야 고작 쓸모 없는 고깃덩이나 주인한테 바치지만 나는 어떠냐? 나는 열심히 밭을 갈아주고 짐도 져주고, 심지어는 우유도 바치지 않느냐? 나는 살아 있을 때에도 이렇게 도움을 드린단 말이다. 그러고도 죽은 다음에는 주인에게 고기까지 바치지 않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재산을 악착같이 움켜쥐고 살다가 빈손으로 죽어 가는 사람도 물론 어리석지만, 좋은 일에 바치겠다는 유서 한 장 써놓고 구두쇠 노릇 하는 사람도 올바르다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을 때에, 할 수 있을 때에 열심히 선하게 일하고 그리고 나서 남은 것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런 사람이 올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동안에 종말론적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할 일을 할 것입니다. 부지런히 서두를 것입니다. 종말론적 창조의식을 가질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의식으로부터 비로소 인간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과연 종말론적 의식이 있습니까? 역사의 징조를 판독하고 있습니까? 나의 낮음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내가 처한 이 시간이 어떠한 시간이라고 분명하게 파악하고 삽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 8)"---여러분, 열심히 서로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봉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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