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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남은 때(베드로전서 4 : 1-6)

by 【고동엽】 202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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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남은 때(베드로전서 4 : 1-6)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 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우리 가정의 자녀나 친지 중에 시험을 치르러 가는 사람이 있을 때면 부모된 도리나, 혹은 선배된 도리에서 이런 저런 당부를 하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가장 중요한 부탁이요 심각한 당부라고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많이 생각하고, 또 기도한 후에, 그리고 부탁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부탁의 말들을 종합하여 정리해 본다면 대체로 이러한 내용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제 첫 번째로 하는 부탁이 마음을 차분히 하고 당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코 들뜬 마음, 걱정하는 마음, 초조한 마음으로 시험에 임하지 말고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아달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탁은 시간을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을 100퍼센트, 완전히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없는 정해진 시간을 남기지도 말고 모자라지도 않게 시간 요리를 잘 하라는 부탁입니다. 이제 세 번째 부탁은 쉬운 것부터 해결해 나가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려운 문제나 자신 없는 문제는 뒤로 미루어 두고 우선 쉽고 자신 있는 것부터 풀어나가라는 부탁입니다.

여기에다 보다 지혜로운 부모라면 더욱 중요한 한 마디를 더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인즉 지난날 공부 못한 것 시험지 마주 앉아 후회하지 말고 아는 것에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입니다. 이제 와서는 아무리 후회하고 뉘우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는, 이미 다 끝난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이제 앞으로는 잘 하겠다는 결심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앞으로는 열심히 공부 잘 할터이니 입학만 시켜 주십시오"라며 혈서를 쓴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저것도 이것도 통하지 않는 것이 시험입니다. 그 때문에, 그저 현재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하라는 부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이치가 그렇습니다. 지혜롭게 산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나는 어리석게 살았어도 삶의 지혜를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것이 마지막 지혜입니다. 마치 시험장에서 답안지를 마주 대하고 앉아 시험을 시작하는 어느 수험생과도 같은 것이 바로 인생의 모습이라는 생각입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시작입니다. 그래서 시인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어지고 만다고 했습니다. 이는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시작을 잘못했으면 그 모든 수고가 무효로 돌아가게 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고칠 길도 없는데 그나마 이제는 원점으로 돌아 갈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문제가 있고, 그 때문에 마지막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잘못된 출발에서 좋은 끝을 기대한다는 것은 미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시작이 잘못되었으면 그 마지막은 뻔한 것입니다. 당연히 잘못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주소, 이 모습, 이대로가 중간 끝이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이 시간을 위하여 오늘까지 살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와서 다른 할 말이 따로 있을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 종말은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이요, 내가 몰랐을 뿐이지 오늘과 같은 결정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요행은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불변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을 알고 시작한다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종국을 미리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 인생은 이대로 좋은 것입니까? 내가 살아온 과거와 현재, 이대로 만족해도 좋으냔 말입니다. 아니면 궤도 수정을 하여야 합니까? 궤도 조정을 하여야 합니까? 아무래도 다시 한번 깊이 물어보셔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 이대로 끝나도 좋겠는가를 말입니다. 무턱대고 오래오래 더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애걸할 것이 아닙니다. 더 살아 보았자 별 일도 없는데 어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하여 무조건 고마워할 것도 아닙니다. 연장해 보았자 더 다를 것이 없다면 이대로 좋으냐고 한번 물어 보십시다. 이미 끝은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한된 생을 삽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관은 직선적입니다. 역사를 하나의 돌고 도는 원형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에는 우연도 없고 자연 현상도 아닙니다. 시작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 뜻이 있고 섭리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고 목표가 분명합니다. 다만 내가 이를 미처 모르는 것뿐입니다. 내 눈에는 안개처럼 희미했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분명 뜻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종착점도 이제 아물거리며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멀지 않았습니다. 생각컨대 어떻게 끝이 날 것 같습니까?

창세기 1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은 합니다. 역사의 시작은 하나님의 창조하심에서 비롯됩니다.

나아가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 2220절에 가서 보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말로 끝이 납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을 향해서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 출발을 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마지막, 끝이 있을 뿐입니다. 모르든, 알든, 믿든, 믿지 않든 간에 분명 마지막은 있습니다. 이제 그 종말을 내다보면서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말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라고. 정한대로 한번은 죽어 심판대 앞에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목사이기에 가끔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마지막 선언을 받은 중환자를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이 때처럼 마음이 무겁고 괴로울 때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런 사람을 앞에 놓고 위로도 해보며,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도 해봅니다. 그리고 찬송과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대체도 그러한 예배 후에는 "내 인생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이 있을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이러한 생을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내게 다시 생이 주어진다면 지금과는 같지 않은, 좀더 다른 의미의 보람된 생을 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와서 이 얼마나 답답한 이야기입니까? 그런 말을 듣고 환자의 방문을 나설 때면 목사로서 부인할 수없는 솔직한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속으로 짓는 쓴웃음과 함께 "그럴 줄 몰랐나?" 하는 생각입니다. 도대체 인생에 있어서 죽는다는 것! 그것도 하나 모르고 살았더냔 말입니다. 그래도 소위 지성인이요, 그만한 인격을 갖추고 살았다면서 "사람은 죽는다"는 그 사실 하나도 확인하지 못하고 살았더냔 말입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인간의 죽음 운운하는 것은 무슨 별 소리입니까? 왜 진작, 그토록 상식적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상식적이고, 가장 평범한 진리를 몰랐습니다. 하긴 모른 것이 아니라 부인했습니다. 여러분! 옷을 입을 때가 있으면 벗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감투를 썼으면 쓴 감투를 벗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쓸 줄만 알았지 벗을 생각은 하지 않으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지위에 오를 생각만 하였지 내려앉을 생각은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 반드시 다가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어났으면 죽어야지요. 왜 죽을 생각은 하지 않았더냐구요? 이토록 답답한 인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부터 먼저 생각을 했어야 하고 여기에 인간의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매사에 이것을 계산하여야 하며 모든 계획의 중심부에 이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저는 우연히 미국 사람 부부가 참으로 간단하게 집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저 기초만 간단하게 해 놓은 후 건물은 목조로 아주 가늘게 기둥을 세원 놓고는 합판을 붙이고 페인트칠을 해가면서 부부간에 간단하게 집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길래 제가 있다가 "왜 이렇게 날림집을 짓느냐?" 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의 대답이 "어차피 20년밖에 안 살 건데요, 그 다음 사람은 자기 집 짓고 살라지요 뭐, 우리 두 내외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는 것입니다. 그것 참! 하고,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는 여기저기 적당히 기초를 다지고 휙 하며 벽돌을 쌓아올리는 모양을 보고는 "저 집은 날림집이다.

저것은 날림 공사다" 하며 모두가 한 마디씩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속으로 "그래도 40년 살기에는 충분할텐데 별 걱정을 다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날림집이 괜찮아요.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생이라고 만세 반석 위에다 짓겠다는 것입니까? 게다가 흔하지도 않은 대리석까지 붙일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뜯어내기도 힘들게 그럴 필요가 없어요. 간단하게 지읍시다.

가볍게 사세요. 떠나기 쉽게, 아쉽지 않게 살란 말입니다. 꾸역꾸역 애써 모아 보았자 어차피 남의 것이 되고 말 뿐입니다.

여러분! 생을 좀 달리 생각해 보세요. 오늘 본문 말씀을 깊이 새겨 보십시오. 육체의 남은 때! 이는 참으로 결정적인 말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 남아 있는 시간! 여기까지 살아 왔는데 이제 남아 있는 시간이 있단 말입니다. 아직도 남은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남은 때가 있습니다. 불원간에 다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캄캄하게 어두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도 빛이 있습니다. 분명 다 빼앗길 것이고 나의 가진 바 그 모든 재물은 남의 것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쥐고 있어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현재, 손에 쥐고 있을 뿐입니다. 반드시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머물고있습니다. 이 남은 때! 이 육체의 남은 때! 이 마지막 가능성!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 일을 후회하지 맙시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면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고 하였습니다. 육체로 살고, 세상 욕망으로 살고, 우상 숭배와 물질로 살고, 허랑 방탕하며 후회 막급한 생을 살았으나 지난날의 것으로 족하단 말씀입니다. 이제는 여기서 끝내어야 합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를 마십시다.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새롭게 정비하여 남은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짧다고 후회하지도 말고, 적다고 불만하지도 말며, 가진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간혹 40이 넘고, 더러는 60이 넘어서 공부하겠다며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뜻이야 갸륵하지만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돋보기 안경 끼고, 하나 생각하면 둘 잊어버리는 처지에서 무슨 공부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학생들은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는 모범생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진작 그럴 것이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무엇을 더 얻겠다고도 하지 말고, 더 벌겠다고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더 공부한다고 해보았자 별 볼 일이 없습니다. 이제는 가진 것대로 수습을 하십시다. 적어도 35제가 넘었거든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이제는 별 발전이 없습니다. 이미 가진 바 이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무엇을 더 하느냐고 묻지를 말고 어떻게 끝낼 것이냐고 물으십시오. 바로 거기에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지수로 보이는 저 앞의 길을 가지고 허풍 떨 것이 아닙니다. "이제도 하면 된다. 나 결심해 가지고 안 된 일이 없다"는 식의 허세를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처럼 답답한 사람이 없습니다. 되긴 무엇이 되었단 말입니까? 아니면 자기 의지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 될 것은 끝까지 아니 되는 것입니다. 한계를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남은 때를 소중히 여기세요. 멀리 날아가는 새를 잡겠다며 떠들지를 말고 내 손안에 있는 새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현실 그대로, 가진 바 그대로, 아는 바 그대로, 병든 몸이지만 가진 건강 그대로, 이 모습 이대로 이제는 남은 것을 마감하여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허세로 자기를 내세우지 마십시다. 우리는 이미 결정적인 한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들어 말씀하신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그 해석상 난해한 말씀에 속합니다만 거기에는 대단히 심각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청지기가 부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소문이 퍼져서 그 주인이 알게 되고 이에 청지기를 불러서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 회계 감사를 받고 사무 인계를 하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이렇게 나오자 이 청지기는 그 동안에 자기가 한 짓도 있고 부정한 것은 드러나고 말 것이니 "이제는 틀렸구나" 생각을 하고는 주인에게 용서를 빌거나 애걸도 하지 않고 청지기 생활은 여기서 끝났으니 그렇다면 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궁리하게 됩니다. 그 결과 "내가 할 일을 알았다"며 그 동안에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여서는 그 빚진 정도를 얼마씩 과감하게 감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기름 100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그 증서에 50말로 고쳐 쓰게 하고, 100석을 갚아야 할 사람에게는 80석으로 쓰게 하는 등 빚진 모든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위조와 위증죄입니다. 그러나 이 청지기의 생각은 이렇게 선심을 베풀어 놓으면 내가 청지기직을 빼앗기더라도 이 은혜를 생각하여 저들이 나에게 잘하지 않겠느냐는 속셈입니다. 이는 최후 순간까지 주인에게 부정한 자요, 윤리적으로는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말씀과, 예수님의 평가는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누가 보아도 부도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 죽을 날은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마지막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을 종말론적으로 처리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때 보면 나이가 50이 넘은 분들이 산다, 못산다 하며 이혼하겠다고 나옵니다. 게다가 재미있는 것은 성격 차이 때문에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라면 진작에 했어야지, 지금까지 다 살아왔는데, 이제 장례식을 앞에 둔 처지에 무슨 문제가 그렇게도 복잡하더란 말입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님은 항상 자기의 장례식에 관해서 말하고는 했습니다. 내 장례식에서 조사를 하는 사람이 나를 무엇이라고 말하라! 그는 항상 그것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목사로서 장례 의식을 치르는 중에 가끔 고인이 잘 부르던 찬송이 무엇입니까 하고 그 유족에게 물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대답이 "찬송 부르는 것 못 보았는데요" 하고 나오면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 됩니다. ", 고인이 좋아하던 찬송은 몇 장입니다"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고인이 즐겨 부르던 찬송을 마지막으로 함께 부르십시다" 하고 같이 부른다면 얼마나 은혜스럽고, 또한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찬송 한 장 부르는 것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니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장례식 순서 좀 준비해 놓으십시다. 그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수의를 자기가 준비하는 그러한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남은 때! 이 오늘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제는 정욕을 좇지 말고. 방황하지 말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남은 때를 살 것입니다. 고귀한 시간을 고귀하게 사용하여야 하고 이제는 시간을 속량하여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궤도 수정을 못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궤도 수정을 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뒤늦게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요, 동시에 아픈 일입니다. 그런고로 분명히 알고 바른 자세로 임하여야 하겠습니다.

내 생애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지 맙시다. 더 기대하지도 말고, 더 장담하지도 말며, 고요한 가운데 욕심을 버리고 남은 시간을 정비하십시다. 정한 시간이 끝나기 직전입니다. 이제는 남은 시간을 극대화하여 최대한의 생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부칙을 따르는 것에서 떠나 원칙을 따르십시다. 이제는 외도가 아닌 정도로 가십시다. 그리하여 부끄러운 일이 아닌 자랑스러운 일만을 하십시다. 지금까지는 희미하게 시작하여 여기까지 살아왔지만 이후로는 똑바로 알고, 그리고 그것을 향해 살아가십시다. 과거에는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는 생을 살아가십시다. 보다 가까이 다가오는 끝을 분명히 보는 가운데 육체의 남은 때를 소중히 여기십시다. 그리하여 이 남은 때를 속량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여서, 나의 이 육체의 남은 때가 하나님 앞에 깨끗한 제물로 드려지는 온전한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뜻 모르고 산 저희들에게 은혜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희미한 가운데 살아왔으나 이제는 아는 생을 살게 하옵시고, 주의 손에 붙들리어 분명한 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욕되고 부끄러운 생은 지난날로 족하게 하시고 이 후로는 주님의 얼굴을 뵙기에 부끄러움 없는 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자가 아니어도 선하게 살며, 큰 지위는 갖기 못하였어도 명예롭게 살게 하옵소서. 이제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정직하게, 나의 남은 때를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위한 생은 여기에서 끝을 내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을 좇는 삶을 서둘러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육체의 남은 때(베드로전서 4 : 1-6)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 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우리 가정의 자녀나 친지 중에 시험을 치르러 가는 사람이 있을 때면 부모된 도리나, 혹은 선배된 도리에서 이런 저런 당부를 하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가장 중요한 부탁이요 심각한 당부라고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많이 생각하고, 또 기도한 후에, 그리고 부탁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부탁의 말들을 종합하여 정리해 본다면 대체로 이러한 내용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제 첫 번째로 하는 부탁이 마음을 차분히 하고 당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코 들뜬 마음, 걱정하는 마음, 초조한 마음으로 시험에 임하지 말고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아달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탁은 시간을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을 100퍼센트, 완전히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없는 정해진 시간을 남기지도 말고 모자라지도 않게 시간 요리를 잘 하라는 부탁입니다. 이제 세 번째 부탁은 쉬운 것부터 해결해 나가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려운 문제나 자신 없는 문제는 뒤로 미루어 두고 우선 쉽고 자신 있는 것부터 풀어나가라는 부탁입니다.

여기에다 보다 지혜로운 부모라면 더욱 중요한 한 마디를 더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인즉 지난날 공부 못한 것 시험지 마주 앉아 후회하지 말고 아는 것에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입니다. 이제 와서는 아무리 후회하고 뉘우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는, 이미 다 끝난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이제 앞으로는 잘 하겠다는 결심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앞으로는 열심히 공부 잘 할터이니 입학만 시켜 주십시오"라며 혈서를 쓴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저것도 이것도 통하지 않는 것이 시험입니다. 그 때문에, 그저 현재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하라는 부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이치가 그렇습니다. 지혜롭게 산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나는 어리석게 살았어도 삶의 지혜를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것이 마지막 지혜입니다. 마치 시험장에서 답안지를 마주 대하고 앉아 시험을 시작하는 어느 수험생과도 같은 것이 바로 인생의 모습이라는 생각입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시작입니다. 그래서 시인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어지고 만다고 했습니다. 이는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시작을 잘못했으면 그 모든 수고가 무효로 돌아가게 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고칠 길도 없는데 그나마 이제는 원점으로 돌아 갈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문제가 있고, 그 때문에 마지막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잘못된 출발에서 좋은 끝을 기대한다는 것은 미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시작이 잘못되었으면 그 마지막은 뻔한 것입니다. 당연히 잘못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주소, 이 모습, 이대로가 중간 끝이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이 시간을 위하여 오늘까지 살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와서 다른 할 말이 따로 있을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 종말은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이요, 내가 몰랐을 뿐이지 오늘과 같은 결정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요행은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불변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을 알고 시작한다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종국을 미리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 인생은 이대로 좋은 것입니까? 내가 살아온 과거와 현재, 이대로 만족해도 좋으냔 말입니다. 아니면 궤도 수정을 하여야 합니까? 궤도 조정을 하여야 합니까? 아무래도 다시 한번 깊이 물어보셔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 이대로 끝나도 좋겠는가를 말입니다. 무턱대고 오래오래 더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애걸할 것이 아닙니다. 더 살아 보았자 별 일도 없는데 어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하여 무조건 고마워할 것도 아닙니다. 연장해 보았자 더 다를 것이 없다면 이대로 좋으냐고 한번 물어 보십시다. 이미 끝은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한된 생을 삽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관은 직선적입니다. 역사를 하나의 돌고 도는 원형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에는 우연도 없고 자연 현상도 아닙니다. 시작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 뜻이 있고 섭리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고 목표가 분명합니다. 다만 내가 이를 미처 모르는 것뿐입니다. 내 눈에는 안개처럼 희미했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분명 뜻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종착점도 이제 아물거리며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멀지 않았습니다. 생각컨대 어떻게 끝이 날 것 같습니까?

창세기 1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은 합니다. 역사의 시작은 하나님의 창조하심에서 비롯됩니다.

나아가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 2220절에 가서 보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말로 끝이 납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을 향해서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 출발을 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마지막, 끝이 있을 뿐입니다. 모르든, 알든, 믿든, 믿지 않든 간에 분명 마지막은 있습니다. 이제 그 종말을 내다보면서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말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라고. 정한대로 한번은 죽어 심판대 앞에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목사이기에 가끔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마지막 선언을 받은 중환자를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이 때처럼 마음이 무겁고 괴로울 때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런 사람을 앞에 놓고 위로도 해보며,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도 해봅니다. 그리고 찬송과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대체도 그러한 예배 후에는 "내 인생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이 있을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이러한 생을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내게 다시 생이 주어진다면 지금과는 같지 않은, 좀더 다른 의미의 보람된 생을 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와서 이 얼마나 답답한 이야기입니까? 그런 말을 듣고 환자의 방문을 나설 때면 목사로서 부인할 수없는 솔직한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속으로 짓는 쓴웃음과 함께 "그럴 줄 몰랐나?" 하는 생각입니다. 도대체 인생에 있어서 죽는다는 것! 그것도 하나 모르고 살았더냔 말입니다. 그래도 소위 지성인이요, 그만한 인격을 갖추고 살았다면서 "사람은 죽는다"는 그 사실 하나도 확인하지 못하고 살았더냔 말입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인간의 죽음 운운하는 것은 무슨 별 소리입니까? 왜 진작, 그토록 상식적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상식적이고, 가장 평범한 진리를 몰랐습니다. 하긴 모른 것이 아니라 부인했습니다. 여러분! 옷을 입을 때가 있으면 벗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감투를 썼으면 쓴 감투를 벗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쓸 줄만 알았지 벗을 생각은 하지 않으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지위에 오를 생각만 하였지 내려앉을 생각은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 반드시 다가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어났으면 죽어야지요. 왜 죽을 생각은 하지 않았더냐구요? 이토록 답답한 인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부터 먼저 생각을 했어야 하고 여기에 인간의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매사에 이것을 계산하여야 하며 모든 계획의 중심부에 이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저는 우연히 미국 사람 부부가 참으로 간단하게 집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저 기초만 간단하게 해 놓은 후 건물은 목조로 아주 가늘게 기둥을 세원 놓고는 합판을 붙이고 페인트칠을 해가면서 부부간에 간단하게 집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길래 제가 있다가 "왜 이렇게 날림집을 짓느냐?" 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의 대답이 "어차피 20년밖에 안 살 건데요, 그 다음 사람은 자기 집 짓고 살라지요 뭐, 우리 두 내외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는 것입니다. 그것 참! 하고,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는 여기저기 적당히 기초를 다지고 휙 하며 벽돌을 쌓아올리는 모양을 보고는 "저 집은 날림집이다.

저것은 날림 공사다" 하며 모두가 한 마디씩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속으로 "그래도 40년 살기에는 충분할텐데 별 걱정을 다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날림집이 괜찮아요.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생이라고 만세 반석 위에다 짓겠다는 것입니까? 게다가 흔하지도 않은 대리석까지 붙일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뜯어내기도 힘들게 그럴 필요가 없어요. 간단하게 지읍시다.

가볍게 사세요. 떠나기 쉽게, 아쉽지 않게 살란 말입니다. 꾸역꾸역 애써 모아 보았자 어차피 남의 것이 되고 말 뿐입니다.

여러분! 생을 좀 달리 생각해 보세요. 오늘 본문 말씀을 깊이 새겨 보십시오. 육체의 남은 때! 이는 참으로 결정적인 말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 남아 있는 시간! 여기까지 살아 왔는데 이제 남아 있는 시간이 있단 말입니다. 아직도 남은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남은 때가 있습니다. 불원간에 다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캄캄하게 어두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도 빛이 있습니다. 분명 다 빼앗길 것이고 나의 가진 바 그 모든 재물은 남의 것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쥐고 있어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현재, 손에 쥐고 있을 뿐입니다. 반드시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머물고있습니다. 이 남은 때! 이 육체의 남은 때! 이 마지막 가능성!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 일을 후회하지 맙시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면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고 하였습니다. 육체로 살고, 세상 욕망으로 살고, 우상 숭배와 물질로 살고, 허랑 방탕하며 후회 막급한 생을 살았으나 지난날의 것으로 족하단 말씀입니다. 이제는 여기서 끝내어야 합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를 마십시다.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새롭게 정비하여 남은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짧다고 후회하지도 말고, 적다고 불만하지도 말며, 가진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간혹 40이 넘고, 더러는 60이 넘어서 공부하겠다며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뜻이야 갸륵하지만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돋보기 안경 끼고, 하나 생각하면 둘 잊어버리는 처지에서 무슨 공부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학생들은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는 모범생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진작 그럴 것이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무엇을 더 얻겠다고도 하지 말고, 더 벌겠다고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더 공부한다고 해보았자 별 볼 일이 없습니다. 이제는 가진 것대로 수습을 하십시다. 적어도 35제가 넘었거든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이제는 별 발전이 없습니다. 이미 가진 바 이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무엇을 더 하느냐고 묻지를 말고 어떻게 끝낼 것이냐고 물으십시오. 바로 거기에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지수로 보이는 저 앞의 길을 가지고 허풍 떨 것이 아닙니다. "이제도 하면 된다. 나 결심해 가지고 안 된 일이 없다"는 식의 허세를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처럼 답답한 사람이 없습니다. 되긴 무엇이 되었단 말입니까? 아니면 자기 의지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 될 것은 끝까지 아니 되는 것입니다. 한계를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남은 때를 소중히 여기세요. 멀리 날아가는 새를 잡겠다며 떠들지를 말고 내 손안에 있는 새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현실 그대로, 가진 바 그대로, 아는 바 그대로, 병든 몸이지만 가진 건강 그대로, 이 모습 이대로 이제는 남은 것을 마감하여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허세로 자기를 내세우지 마십시다. 우리는 이미 결정적인 한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들어 말씀하신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그 해석상 난해한 말씀에 속합니다만 거기에는 대단히 심각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청지기가 부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소문이 퍼져서 그 주인이 알게 되고 이에 청지기를 불러서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 회계 감사를 받고 사무 인계를 하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이렇게 나오자 이 청지기는 그 동안에 자기가 한 짓도 있고 부정한 것은 드러나고 말 것이니 "이제는 틀렸구나" 생각을 하고는 주인에게 용서를 빌거나 애걸도 하지 않고 청지기 생활은 여기서 끝났으니 그렇다면 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궁리하게 됩니다. 그 결과 "내가 할 일을 알았다"며 그 동안에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여서는 그 빚진 정도를 얼마씩 과감하게 감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기름 100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그 증서에 50말로 고쳐 쓰게 하고, 100석을 갚아야 할 사람에게는 80석으로 쓰게 하는 등 빚진 모든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위조와 위증죄입니다. 그러나 이 청지기의 생각은 이렇게 선심을 베풀어 놓으면 내가 청지기직을 빼앗기더라도 이 은혜를 생각하여 저들이 나에게 잘하지 않겠느냐는 속셈입니다. 이는 최후 순간까지 주인에게 부정한 자요, 윤리적으로는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말씀과, 예수님의 평가는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누가 보아도 부도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 죽을 날은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마지막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을 종말론적으로 처리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때 보면 나이가 50이 넘은 분들이 산다, 못산다 하며 이혼하겠다고 나옵니다. 게다가 재미있는 것은 성격 차이 때문에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라면 진작에 했어야지, 지금까지 다 살아왔는데, 이제 장례식을 앞에 둔 처지에 무슨 문제가 그렇게도 복잡하더란 말입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님은 항상 자기의 장례식에 관해서 말하고는 했습니다. 내 장례식에서 조사를 하는 사람이 나를 무엇이라고 말하라! 그는 항상 그것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목사로서 장례 의식을 치르는 중에 가끔 고인이 잘 부르던 찬송이 무엇입니까 하고 그 유족에게 물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대답이 "찬송 부르는 것 못 보았는데요" 하고 나오면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 됩니다. ", 고인이 좋아하던 찬송은 몇 장입니다"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고인이 즐겨 부르던 찬송을 마지막으로 함께 부르십시다" 하고 같이 부른다면 얼마나 은혜스럽고, 또한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찬송 한 장 부르는 것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니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장례식 순서 좀 준비해 놓으십시다. 그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수의를 자기가 준비하는 그러한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남은 때! 이 오늘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제는 정욕을 좇지 말고. 방황하지 말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남은 때를 살 것입니다. 고귀한 시간을 고귀하게 사용하여야 하고 이제는 시간을 속량하여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궤도 수정을 못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궤도 수정을 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뒤늦게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요, 동시에 아픈 일입니다. 그런고로 분명히 알고 바른 자세로 임하여야 하겠습니다.

내 생애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지 맙시다. 더 기대하지도 말고, 더 장담하지도 말며, 고요한 가운데 욕심을 버리고 남은 시간을 정비하십시다. 정한 시간이 끝나기 직전입니다. 이제는 남은 시간을 극대화하여 최대한의 생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부칙을 따르는 것에서 떠나 원칙을 따르십시다. 이제는 외도가 아닌 정도로 가십시다. 그리하여 부끄러운 일이 아닌 자랑스러운 일만을 하십시다. 지금까지는 희미하게 시작하여 여기까지 살아왔지만 이후로는 똑바로 알고, 그리고 그것을 향해 살아가십시다. 과거에는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는 생을 살아가십시다. 보다 가까이 다가오는 끝을 분명히 보는 가운데 육체의 남은 때를 소중히 여기십시다. 그리하여 이 남은 때를 속량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여서, 나의 이 육체의 남은 때가 하나님 앞에 깨끗한 제물로 드려지는 온전한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뜻 모르고 산 저희들에게 은혜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희미한 가운데 살아왔으나 이제는 아는 생을 살게 하옵시고, 주의 손에 붙들리어 분명한 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욕되고 부끄러운 생은 지난날로 족하게 하시고 이 후로는 주님의 얼굴을 뵙기에 부끄러움 없는 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자가 아니어도 선하게 살며, 큰 지위는 갖기 못하였어도 명예롭게 살게 하옵소서. 이제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정직하게, 나의 남은 때를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위한 생은 여기에서 끝을 내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을 좇는 삶을 서둘러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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