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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두세 사람이 모인 곳(마태복음 18장 15절~20절)

by 【고동엽】 2023.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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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세 사람이 모인 곳(마태복음 181520)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신부가 찾아오더니 다음과 같이 기막힌 사연을 털어놓습니다. 결혼 전에 한동안 친하게 지내던 남자 친구가 있었답니다. 그 사람과는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누구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과거에 대해서 이렇다하게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새 출발을 했는데, 세상에 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신혼여행 며칠 다녀오는 동안에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전에 사귀던 그 남자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꿈을 마음대로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꿈에서 깨어나고보면 마음이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왜 이러는가, 이래서야 고통스러워 어떻게 평생을 살아가겠는가 싶어서이고, 둘째는 곁에 있는 남편에게 미안해서 못견디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물리적으로 한자리에 있다고 해서 하나인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평생을 같이 살아도 남남일 수가 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살았다 해서 그 부부가 반드시 한마음 한뜻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 원인이 필경은 하나되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정문제 전문가들은 현대인의 비극이 동숙자는 있으되 가정은 없다는 데 있다고들 말합니다. 심지어는 '도미터리 홈(dormitory home)' 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가족들이 서로가 룸메이트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필요에 따라, 마치 학교 기숙사에서 만난 룸메이트처럼 함께 있을 뿐이라니 얼마나 서글픈 노릇입니까? 진실로 마음과 뜻이 하나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들 말하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불행하고 고독하고, 심지어는 절망까지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 마음을 누구에게 줄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데서, 즉 마음과 생각이 하나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남북대화를 한다고 하면서 서로 대척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처음으로 남북대화를 한다 할 때에는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풀릴 것처럼 생각하여 모두들 얼마나 들떴습니까? 그런데 요새는 남북회담 한다고 해도 별 관심들이 없습니다. 만나보나마나 결과는 뻔하니까요.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릅니다. 완전히 동상이몽(同床異夢)인데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비즈니스는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된다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실제적이고 심각한 말씀을 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사람이 하나되기만 해도 '그곳에 내가 있으마' 하십니다. 겨우 두 사람이 하나되기도 이렇게 어렵습니다.

저는 결혼주례 할 때에 간간이 신랑 신부에게 부탁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살기 어렵고 시험이 많다고 하지마는 당신들 두 사람만 진정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된다고 한다면 살아볼 만한 세상이다, 얼마든지 푸르게 볼 수 있고 얼마든지 낭만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부디 두 사람만은 열심히 깨끗하게 진실하게 살아달라고요.

여러분, 우리는 어차피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인간관계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그런 연계에서 살다가 죽어 갑니다. 그러므로 화목이라고 하는 바른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결국은 화목 가운데에 행복이 있고 문제의 해결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문제의 깊은 원인이 바로 하나되지 못한 슬픔입니다. 하나되고자 하는 갈구가 우리의 마음에 응어리가 됨으로 슬픔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225절에 아담과 하와의 사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묘사합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얼마나 좋습니까? 둘이 벗어도 걱정이 없더라 ------ 다 노출된 상태에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 마음으로 깨끗하게 벗은 거기가 바로 낙원이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 하나된 바로 거기에 나도 있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모임은 무슨 물리적인 모임이라거나, 어떤 기계적이고 구조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사업상으로나 물질적인 이해 관계에서도 아닙니다. 순전하게 영적인 만남입니다. 신령한 가운데서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만남을 말합니다.

이 문제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단적으로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무슨 말씀입니까? 화해 없이, 용서 없이, 내 이웃과 내가 사랑해야 될 사람과 하나됨의 역사가 없이는 예배하는 것도 헛것이요 제물을 드리는 것도 헛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어떤 것을 보아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임재, 하나님의 은혜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됨이 없다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합니다. 이 역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우리는 저 야곱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과 불화함으로 20년 동안을 타향에 살면서 돈도 벌었고 가정도 이루었고 부자도 되었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절대로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집에 돌아왔고, 형을 만나면서, 형과 화해함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뵙는 참 기쁨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응답도 형통함도, 예배도 찬송도, 말씀도 말씀의 소통도, 화평과 진정한 영적인 교제와 하나됨의 역사가 있고야 있어지는 일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되는 역사가 어디서 이루어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이 있는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

온유하고 겸손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 만날 때, 바로 그러한 관계 속에 진정한 화평이 있고 그리스도의 음성이 현존한다 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목회를 한 30년 하다보니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돈 많은 사람도 만나보고 돈 없는 사람도 만나봅니다. 특히 돈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때마다 느끼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모로 뜯어봐도 돈벌 사람 같지는 않은데 돈을 벌었더라는 사실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 큰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자주 그런 인상을 받곤 합니다.

'이토록 천진난만하고 촌뜨기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그토록 큰일을 할까 싶은 것입니다. 그저 타고 난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깨끗하고 순진하고 천진합니다. 때가 묻지 않았어요.

',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시는구나, 어린아이와 같은 이런 사람을 높이시는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체험하곤 합니다.

변변치 않은 일을 하면서도 도도하고 교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실패하는 것을 봅니다. '아서라' 싶어 염려를 하다보면 아니나다를까 얼마 못가 울상이 되는 것입니다. 평안도 능력도, 주님이 주시는 축복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라야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을 보면 가정에서까지 왕 노릇 하려고 합니다. 시쳇말로 '위신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체면이다, 위신이다, 권위다, 그런 것은 다 변변치 않은 것이니 뚝 떼어버리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에도 "네가 중생해야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고관이요 바리새인입니다.

도도한 사람이지요. 그래 예수님께 긴 인사를 했지요. '하늘로부터 온 선생이 아니고는 당신이 하는 그 일을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하고 한참동안 치켜세우고 나서 '그런데,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남 몰래 밤에 찾아와 묻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중생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질없는 체면이며 쓸데없는 위신 같은 것은 다 떼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여,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한마디면 됐지 무슨 긴 얘기냐, 그 말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해야만 하나됨이 있습니다. 아직도 교만하고, 아직도 체통 차리고, 아직도 체면 찾고 위신 챙기고 한다면, 그러한 부부는 부부가 아닙니다. 그런 집은 가정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아가 12절 이하에 어린양의 비유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놓아두고는 목자가 편안할 수 없어요. 찾아 나서야 했고 꼭 찾아와야만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야만 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 가지고는 안되더라는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그 한 마리 양이 함께 있어야만 비로소 목자는 편안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15절에는 "한 사람이 죄를 범하거든"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를 범한 한 사람이 곧 잃어버린 한 마리 양입니다. '그렇거든 너는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가 권면하되 말을 듣지 않거든 친구를 데리고 가서 증참케 하고, 그래도 안 듣거든 교회로 하여금 권면하게 하고, 그래도 안 듣거든 세리와 이방인으로 여기고 말라' ---- 참 오묘한 말씀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권면하라 하시더니 어느 때에 가서는 잊어버리라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내 할 일은 끝까지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권면하고 위로하고 회개케 한다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 하는 말씀입니다. 너는 너의 할 일로 최선을 다하라, 남 원망하지 말고, 시비할 것도 없이, 다만 내 할 일은 다 하되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내 할 일을 하되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열심히 화해를 청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용서라는 말은 영어로 'for'()가 들어간 네 낱말을 함축한다고 하는 설명도 있습니다. 포겟(forget), 포세이크(for- sake), 포베어(forbear), 포비드(forbid) ---- 지난날을 잊어주는 것이요, 원망을 포기하는 것이요, 인내해주는 것이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금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다 하는 설명입니다.

하나됨을 위하여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저로 하여금 회개케 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거기에 하나됨의 역사가 있습니다.

모였다고 하나된 것이 아닙니다. 같이 산다고 하나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됨은 서로가 회개하는 데에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사과하고 저쪽에서도 '잘못했습니다' 하며 서로가 회개할 때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 마음을 열고 함께 진리에로 마음을 향할 때에 하나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하나되자' 한다고 하나되는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나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회개하는 심령에만 하나됨의 역사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여기에 장발장이라고 하는 죄수가 나오지요. 어쩌다가 그는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이렇게 저렇게 죄가 불려져서 물경 20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합니다. 만기가 되어 출감했으나 해가 저물어도 잘 곳을 찾지 못합니다. 전과자라고 모두가 외면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제관에서 뜻밖의 따뜻한 영접을 받고 은식기로 식사 대접까지 받은 뒤 하룻밤을 쉽니다. 물론 신부는 그의 과거를 알면서도 묻지를 않고 좋은 손님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장발장은 이른 새벽, 다시 옛 버릇이 도져서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헌병에게 붙잡혀 다시 사제관으로 끌려옵니다. 이를 본 신부는 "은식기는 내가 준 것인데…… 당신 왜 은촛대는 안 가져갔지요?" 합니다.

장발장은 기적을 본듯한 충격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는 여기서야 인간 부활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회개하고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20년 동안 감옥에 가두어 고생을 시켰는데도 장발장은 사람이 안됐습니다. 한순간의 용서와 뜨거운 사랑이 그를 회개케 한 것입니다.

회개가 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판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가 없는 곳에 하나됨의 역사는 있습니다. 다시 한번 포용하고 다시 한번 인내하고 다시 한번 뜨겁게 사랑할 때에, 그래서 사랑의 큰 감격을 얻을 때에, 비로소 참회개가 일어나고, 참회개가 있는 곳에 하나되는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20)" ---- 기도하는 그곳에 주께서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됨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두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바라고 찬송하는 것처럼 귀한 일이 없습니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하나됨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라고 하는 말씀은 헬라어로 '에이스 토 오노마 예수' ------ '예수 이름으로'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에이스'라고 하는 말이 특별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번역하기 조금 어려운 말인데, 뜻을 몇 가지로 나누어보겠습니다. 내 이름을 향하여,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이름 때문에 ------ 이러한 뜻이 됩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이유가 없지만 예수의 이름 때문에 사랑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할 이유가 없으나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저를 용서합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참아줄 이유가 하나도 없지만 예수의 이름 때문에 참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할 이유는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향하여 사랑과 용서를 베풀 때에, 거기에 하나됨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거룩한 성전에 모였습니다. 진정한 하나됨이란 기도와 찬송으로, 한가지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 때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마도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을, 그리고 간간이 지금도 꿈에 그 현장이 나타나곤 하는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19504월부터 아마도 9월까지, 625전쟁이 일어나던 그 해입니다. 제가 북한 광산에 끌려가 강제수용소에서 고생을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마는 지금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식사라고는 아침저녁으로 수수밥 한 그릇이 고작 입니다. 식당도 없습니다. 손에 한 그릇씩 주어지면 아무 데나 앉아서 먹고 그릇 갖다놓고 일터에 나갑니다. 시계도 없어요. 훤하면 나갔다가 어두우면 돌아옵니다. 작업 중에 절대로 말을 못하게 되어 있으니 옆 사람하고 통성명도 못합니다. 일할 때에도 말을 못하고 쉴 때에도 말을 못합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습니다. 굴속에서 왔다갔다 일을 하고 있는데 때아닌 휘파람소리 ------ 누군가가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놀랍게도 이 찬송을 휘파람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이 났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따라 부르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 결에 수많은 휘파람소리가 하나둘 합세하였고, 굴속은 마침내 휘파람 찬송으로 가득 찼습니다.

서로가 생면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하나되어 드리는 장엄한 예배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넘쳤습니다. 감격했습니다. 누구 할 것 없이 그리스도가 거기 함께 계신 것을 똑똑히 체험하였습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 반드시 어느 성전에 모여야만 모임이겠습니까? 어디든 무슨 상관입니까?

주의 이름 때문에 모였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모였고, 하나님을 향하여 모인 자리라면, 그런 곳에 하나됨의 역사는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에 있으리라" ---- 나도 거기에 있으리라, 그들 중에 있으리라고요. 온유함과 회개할 마음과 주의 이름만을 높이는 마음 이것이 그리스도 임재의 조건입니다.

그러할 때에 이웃과의 관계가 하나되고, 하나되는 그 순간에 주님도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에 주의 평강, 주의 능력, 주의 지혜, 주의 거룩한 역사, 살아 역사 하는 생명적인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싶습니까? 여러분 가정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인간 관계 속에 항상 주님이 동행하는 체험을 원하십니까? 아니, 주의 영광이 함께 하고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분명히 하나됨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남을 용서할 때에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같습니다" 라고 야곱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 같은 체험, 그 같은 능력, 그 같은 생명적인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두세 사람이 모인 곳(마태복음 181520)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신부가 찾아오더니 다음과 같이 기막힌 사연을 털어놓습니다. 결혼 전에 한동안 친하게 지내던 남자 친구가 있었답니다. 그 사람과는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누구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과거에 대해서 이렇다하게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새 출발을 했는데, 세상에 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신혼여행 며칠 다녀오는 동안에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전에 사귀던 그 남자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꿈을 마음대로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꿈에서 깨어나고보면 마음이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왜 이러는가, 이래서야 고통스러워 어떻게 평생을 살아가겠는가 싶어서이고, 둘째는 곁에 있는 남편에게 미안해서 못견디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물리적으로 한자리에 있다고 해서 하나인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평생을 같이 살아도 남남일 수가 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살았다 해서 그 부부가 반드시 한마음 한뜻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 원인이 필경은 하나되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정문제 전문가들은 현대인의 비극이 동숙자는 있으되 가정은 없다는 데 있다고들 말합니다. 심지어는 '도미터리 홈(dormitory home)' 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가족들이 서로가 룸메이트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필요에 따라, 마치 학교 기숙사에서 만난 룸메이트처럼 함께 있을 뿐이라니 얼마나 서글픈 노릇입니까? 진실로 마음과 뜻이 하나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들 말하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불행하고 고독하고, 심지어는 절망까지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 마음을 누구에게 줄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데서, 즉 마음과 생각이 하나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남북대화를 한다고 하면서 서로 대척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처음으로 남북대화를 한다 할 때에는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풀릴 것처럼 생각하여 모두들 얼마나 들떴습니까? 그런데 요새는 남북회담 한다고 해도 별 관심들이 없습니다. 만나보나마나 결과는 뻔하니까요.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릅니다. 완전히 동상이몽(同床異夢)인데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비즈니스는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된다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실제적이고 심각한 말씀을 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사람이 하나되기만 해도 '그곳에 내가 있으마' 하십니다. 겨우 두 사람이 하나되기도 이렇게 어렵습니다.

저는 결혼주례 할 때에 간간이 신랑 신부에게 부탁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살기 어렵고 시험이 많다고 하지마는 당신들 두 사람만 진정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된다고 한다면 살아볼 만한 세상이다, 얼마든지 푸르게 볼 수 있고 얼마든지 낭만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부디 두 사람만은 열심히 깨끗하게 진실하게 살아달라고요.

여러분, 우리는 어차피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인간관계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그런 연계에서 살다가 죽어 갑니다. 그러므로 화목이라고 하는 바른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결국은 화목 가운데에 행복이 있고 문제의 해결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문제의 깊은 원인이 바로 하나되지 못한 슬픔입니다. 하나되고자 하는 갈구가 우리의 마음에 응어리가 됨으로 슬픔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225절에 아담과 하와의 사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묘사합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얼마나 좋습니까? 둘이 벗어도 걱정이 없더라 ------ 다 노출된 상태에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 마음으로 깨끗하게 벗은 거기가 바로 낙원이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 하나된 바로 거기에 나도 있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모임은 무슨 물리적인 모임이라거나, 어떤 기계적이고 구조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사업상으로나 물질적인 이해 관계에서도 아닙니다. 순전하게 영적인 만남입니다. 신령한 가운데서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만남을 말합니다.

이 문제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단적으로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무슨 말씀입니까? 화해 없이, 용서 없이, 내 이웃과 내가 사랑해야 될 사람과 하나됨의 역사가 없이는 예배하는 것도 헛것이요 제물을 드리는 것도 헛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어떤 것을 보아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임재, 하나님의 은혜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됨이 없다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합니다. 이 역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우리는 저 야곱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과 불화함으로 20년 동안을 타향에 살면서 돈도 벌었고 가정도 이루었고 부자도 되었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절대로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집에 돌아왔고, 형을 만나면서, 형과 화해함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뵙는 참 기쁨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응답도 형통함도, 예배도 찬송도, 말씀도 말씀의 소통도, 화평과 진정한 영적인 교제와 하나됨의 역사가 있고야 있어지는 일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되는 역사가 어디서 이루어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이 있는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

온유하고 겸손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 만날 때, 바로 그러한 관계 속에 진정한 화평이 있고 그리스도의 음성이 현존한다 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목회를 한 30년 하다보니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돈 많은 사람도 만나보고 돈 없는 사람도 만나봅니다. 특히 돈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때마다 느끼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모로 뜯어봐도 돈벌 사람 같지는 않은데 돈을 벌었더라는 사실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 큰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자주 그런 인상을 받곤 합니다.

'이토록 천진난만하고 촌뜨기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그토록 큰일을 할까 싶은 것입니다. 그저 타고 난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깨끗하고 순진하고 천진합니다. 때가 묻지 않았어요.

',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시는구나, 어린아이와 같은 이런 사람을 높이시는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체험하곤 합니다.

변변치 않은 일을 하면서도 도도하고 교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실패하는 것을 봅니다. '아서라' 싶어 염려를 하다보면 아니나다를까 얼마 못가 울상이 되는 것입니다. 평안도 능력도, 주님이 주시는 축복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라야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을 보면 가정에서까지 왕 노릇 하려고 합니다. 시쳇말로 '위신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체면이다, 위신이다, 권위다, 그런 것은 다 변변치 않은 것이니 뚝 떼어버리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에도 "네가 중생해야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고관이요 바리새인입니다.

도도한 사람이지요. 그래 예수님께 긴 인사를 했지요. '하늘로부터 온 선생이 아니고는 당신이 하는 그 일을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하고 한참동안 치켜세우고 나서 '그런데,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남 몰래 밤에 찾아와 묻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중생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질없는 체면이며 쓸데없는 위신 같은 것은 다 떼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여,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한마디면 됐지 무슨 긴 얘기냐, 그 말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해야만 하나됨이 있습니다. 아직도 교만하고, 아직도 체통 차리고, 아직도 체면 찾고 위신 챙기고 한다면, 그러한 부부는 부부가 아닙니다. 그런 집은 가정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아가 12절 이하에 어린양의 비유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놓아두고는 목자가 편안할 수 없어요. 찾아 나서야 했고 꼭 찾아와야만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야만 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 가지고는 안되더라는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그 한 마리 양이 함께 있어야만 비로소 목자는 편안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15절에는 "한 사람이 죄를 범하거든"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를 범한 한 사람이 곧 잃어버린 한 마리 양입니다. '그렇거든 너는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가 권면하되 말을 듣지 않거든 친구를 데리고 가서 증참케 하고, 그래도 안 듣거든 교회로 하여금 권면하게 하고, 그래도 안 듣거든 세리와 이방인으로 여기고 말라' ---- 참 오묘한 말씀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권면하라 하시더니 어느 때에 가서는 잊어버리라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내 할 일은 끝까지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권면하고 위로하고 회개케 한다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 하는 말씀입니다. 너는 너의 할 일로 최선을 다하라, 남 원망하지 말고, 시비할 것도 없이, 다만 내 할 일은 다 하되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내 할 일을 하되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열심히 화해를 청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용서라는 말은 영어로 'for'()가 들어간 네 낱말을 함축한다고 하는 설명도 있습니다. 포겟(forget), 포세이크(for- sake), 포베어(forbear), 포비드(forbid) ---- 지난날을 잊어주는 것이요, 원망을 포기하는 것이요, 인내해주는 것이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금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다 하는 설명입니다.

하나됨을 위하여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저로 하여금 회개케 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거기에 하나됨의 역사가 있습니다.

모였다고 하나된 것이 아닙니다. 같이 산다고 하나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됨은 서로가 회개하는 데에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사과하고 저쪽에서도 '잘못했습니다' 하며 서로가 회개할 때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 마음을 열고 함께 진리에로 마음을 향할 때에 하나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하나되자' 한다고 하나되는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나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회개하는 심령에만 하나됨의 역사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여기에 장발장이라고 하는 죄수가 나오지요. 어쩌다가 그는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이렇게 저렇게 죄가 불려져서 물경 20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합니다. 만기가 되어 출감했으나 해가 저물어도 잘 곳을 찾지 못합니다. 전과자라고 모두가 외면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제관에서 뜻밖의 따뜻한 영접을 받고 은식기로 식사 대접까지 받은 뒤 하룻밤을 쉽니다. 물론 신부는 그의 과거를 알면서도 묻지를 않고 좋은 손님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장발장은 이른 새벽, 다시 옛 버릇이 도져서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헌병에게 붙잡혀 다시 사제관으로 끌려옵니다. 이를 본 신부는 "은식기는 내가 준 것인데…… 당신 왜 은촛대는 안 가져갔지요?" 합니다.

장발장은 기적을 본듯한 충격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는 여기서야 인간 부활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회개하고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20년 동안 감옥에 가두어 고생을 시켰는데도 장발장은 사람이 안됐습니다. 한순간의 용서와 뜨거운 사랑이 그를 회개케 한 것입니다.

회개가 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판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가 없는 곳에 하나됨의 역사는 있습니다. 다시 한번 포용하고 다시 한번 인내하고 다시 한번 뜨겁게 사랑할 때에, 그래서 사랑의 큰 감격을 얻을 때에, 비로소 참회개가 일어나고, 참회개가 있는 곳에 하나되는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20)" ---- 기도하는 그곳에 주께서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됨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두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바라고 찬송하는 것처럼 귀한 일이 없습니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하나됨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라고 하는 말씀은 헬라어로 '에이스 토 오노마 예수' ------ '예수 이름으로'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에이스'라고 하는 말이 특별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번역하기 조금 어려운 말인데, 뜻을 몇 가지로 나누어보겠습니다. 내 이름을 향하여,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이름 때문에 ------ 이러한 뜻이 됩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이유가 없지만 예수의 이름 때문에 사랑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할 이유가 없으나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저를 용서합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참아줄 이유가 하나도 없지만 예수의 이름 때문에 참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할 이유는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향하여 사랑과 용서를 베풀 때에, 거기에 하나됨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거룩한 성전에 모였습니다. 진정한 하나됨이란 기도와 찬송으로, 한가지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 때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마도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을, 그리고 간간이 지금도 꿈에 그 현장이 나타나곤 하는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19504월부터 아마도 9월까지, 625전쟁이 일어나던 그 해입니다. 제가 북한 광산에 끌려가 강제수용소에서 고생을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마는 지금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식사라고는 아침저녁으로 수수밥 한 그릇이 고작 입니다. 식당도 없습니다. 손에 한 그릇씩 주어지면 아무 데나 앉아서 먹고 그릇 갖다놓고 일터에 나갑니다. 시계도 없어요. 훤하면 나갔다가 어두우면 돌아옵니다. 작업 중에 절대로 말을 못하게 되어 있으니 옆 사람하고 통성명도 못합니다. 일할 때에도 말을 못하고 쉴 때에도 말을 못합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습니다. 굴속에서 왔다갔다 일을 하고 있는데 때아닌 휘파람소리 ------ 누군가가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놀랍게도 이 찬송을 휘파람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이 났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따라 부르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 결에 수많은 휘파람소리가 하나둘 합세하였고, 굴속은 마침내 휘파람 찬송으로 가득 찼습니다.

서로가 생면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하나되어 드리는 장엄한 예배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넘쳤습니다. 감격했습니다. 누구 할 것 없이 그리스도가 거기 함께 계신 것을 똑똑히 체험하였습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 반드시 어느 성전에 모여야만 모임이겠습니까? 어디든 무슨 상관입니까?

주의 이름 때문에 모였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모였고, 하나님을 향하여 모인 자리라면, 그런 곳에 하나됨의 역사는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에 있으리라" ---- 나도 거기에 있으리라, 그들 중에 있으리라고요. 온유함과 회개할 마음과 주의 이름만을 높이는 마음 이것이 그리스도 임재의 조건입니다.

그러할 때에 이웃과의 관계가 하나되고, 하나되는 그 순간에 주님도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에 주의 평강, 주의 능력, 주의 지혜, 주의 거룩한 역사, 살아 역사 하는 생명적인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싶습니까? 여러분 가정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인간 관계 속에 항상 주님이 동행하는 체험을 원하십니까? 아니, 주의 영광이 함께 하고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분명히 하나됨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남을 용서할 때에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같습니다" 라고 야곱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 같은 체험, 그 같은 능력, 그 같은 생명적인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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