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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의 능력을 읽은 자(이사야 37장 1절~7절)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를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에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이와 같이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조심스레 강을 건너다가 실수해서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강가에 있던 구조대원 하나가 급히 헤엄을 쳐서 그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빠진 사람을 바로 건지지 않고 한동안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강가 언덕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습니다. "아니, 왜 건지지 않고 보고만 있는 거야?" "저러다 죽어버리면 어떡해?" 사람들의 눈에는 그 구조대원의 태도가 이상스럽게 비쳤습니다. 그 구조대원은 시간이 얼마간 흘러,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사람이 기진맥진한 다음에야 비로소 건져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구조대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째서 바로 건지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어요?" 구조대원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렇게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버둥거릴 때에 가까이 가면 있는 힘을 다해서 매달립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빠져 죽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를 잃고 기진맥진해서 전적으로 나한테 순종할 수 있게 되면 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만 그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지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매우 중요하고 상징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의 능력, 나의 지혜, 나의 의지…… 이런 것들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순간이 오고야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교훈입니다.
히스기야왕 14년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무려 이십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성을 포위했습니다. 이십만이라고 하면 지금 따져봐도 적은 수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 당시로 보면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군사를 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산헤립 왕은 히스기야 왕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붓고, 비방과 협박을 거듭했습니다.
먼저, 그는 히스기야왕의 무기력을 비난했습니다. "나는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사 36:8)"----이스라엘 군사의. 예루살렘 시민들의, 그리고 히스기야왕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비난했습니다.
다음으로, 히스기야왕이 애굽의 원정(遠征)에 의지함을 비난했습니다. 나라가 전쟁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우호적 관계에 있는 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히스기야왕도 그 같은 어려움에 처하여 애굽에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산헤립은 이를 두고 히스기야왕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지팡이와 일반이라(사 36:6)"----애굽이 너를 도와줄 줄로 아느냐,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협박합니다. 애굽도 내 앞에서는 상한 갈대와 같다, 그러니 항복하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마지막으로 산헤립왕은 예루살렘 시민들의 신앙을 비난했습니다. "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그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내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사 36:20)"--모든 신들이 내 앞에 쓰러졌거늘 너희의 하나님인들 별수 있겠느냐고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러면 무사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 라?고 선동하고 있지만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어느 신이 내 손에서 건져내더냐' '여호와를 의뢰하는 신앙은 헛된 것이다'라고 소리치면서 삿대질을 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강했습니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그 많은 우상을 완전히 진멸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선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만 의뢰하라.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라'고 시민들을 가르치고,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그 민족을 정결케 한 왕이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역대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가장 선한 왕으로 손꼽히는 왕입니다. 이렇듯 그는 종교적․신앙적 차원에서 보면 나무랄데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군사․경제 부문에서는 그리 유능한 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에게 시련이 닥쳤습니다. 큰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사 37:3)"----히스기야왕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련을 그는 민족적으로 개인적으로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왕은 이 엄청난 문제 앞에서 산헤립의 협박이 담긴 편지를 들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갑니다. 제단 위에 편지를 펼쳐놓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앗수르왕이 이렇게 모욕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욕하고 있습니다. 수치와 비탄과 참회의 물이 굵은 베옷을 적십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사야 선지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문무백관 모든 신하들에게도 굵은 베옷을 입고 기도하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립니다. 마음은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에게는 시련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이 아름다운 왕에게도, 그리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도 그 엄청난 고난과 핍박이 닥치지 않았습니까? 이렇듯 신앙인에게는 실제로 언제든지 시련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련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신앙적 용기가 히스기야왕에게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에는 엄청난 교육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엔 큰 시련 같지만 오늘의 본문말씀인 이사야서 37장을 계속 읽어보면, 그 기고만장하던 앗수르왕은 끝내 죽임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십팔만오천이나 되는 앗수르군사가 하룻밤 새에 죽고 맙니다. 여호와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산헤립왕은 간신히 본국으로 도망치기는 했으나 저희네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하다가 아들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일은 결국 통쾌하게 끝났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크나 큰 교육적 의미를 안겨주었습니다. 구원하시고 양육하시고 성장케 하시고 가르치고자 하시는, 그리고 어디론가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경륜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은총적 경륜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괴로웠습니다. 그 사실을 온전히 알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건에는 선교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루셨고, 당신의 뜻을 실현하셨으며, 나아가서는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온천하에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널리널리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사 37:20)"----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드린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선교적 사역이 여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히스기야를 겸손하고도 강하게 만드셨습니다. 진실하게도, 온유하게도 만드셨습니다. 동시에 영화롭게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앗수르왕 산헤립과 그의 신하 랍사게가 예루살렘 침략이 성공한 줄 알 정도로, 오늘의 이 사건은 절박했었습니다. 산헤립왕은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그때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많은 노획물도 얻었습니다. 이러한 승리를 통해 산헤립왕은 교만하고 오만해졌습니다. 예루살렘을 쳐들어와서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히스기야왕과 예루살렘 시민들과 그들의 하나님을 겁없이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앗수르의 군사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산헤립왕은 간신히 도망은 하나 역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크나큰 구원의 역사와 심판의 역사가 이 한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입니다. 이렇게 커다란 의미가 담긴 사건이 바야흐로 히스기야왕의 눈앞에 다가오는데, 그들에게는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 벌벌 떨었고 굴욕을 느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온백성과 함께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신앙에는 유형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다고 말로는 하면서도 실제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 이것은 위대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신앙의 초보적 단계에 불과합니다. 추상적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내 편에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와주신다, 지난날에도 자비로우셨고 도와 주셨으며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실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또한 훌륭한 믿음이기는 하나 아직은 유치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기다리는 마음, 이 대망적 신앙 역시 훌륭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아직은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네 번째가 하나님의 모든 경륜과 지혜 안에 내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 크신 경륜 안에 나를 온전히 위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온전하고 위대한 믿음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오직 하나 '하나님의 그 은혜를 내가 받기에 충분한가'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해방을 위하여 남북전쟁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비록 인종차별을 없애려는 거룩한 의도에서 시작된 싸움이기는 하지만 7년을 넘게 전쟁이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이 죽고, 서로들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긴 싸움으로 인한 병폐 앞에서 링컨대통령은 고민에 빠집니다. 선한 목적에서 비롯된 싸움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바람직하게만 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민하던 끝에 하루는 집무실에서 밤을 새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제게 힘을 주시지 아니하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 이를 알고 장관들 역시 밤새 문밖에 서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링컨 대통령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대통령을 위로한답시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에 링컨 대통령은 대답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희 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이것을 걱정할 뿐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자비가 아무리 크고 놀랍다 하더라도 과연 여러분 자신은 그것을 받을만 합니까? 여러분은 그 은혜를 바로 알고 받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보다는 우리가 누구에게 속하여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에 깨끗하게 순종하고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적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추상적 신앙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식일 뿐, 능력은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3절)." 임신을 해서 해산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몇 시간 뒤에는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 이 고통을 견딜힘이 없습니다. 생명을 출산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산파를 부르는 것처럼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이 고통의 의미를 우리는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몰라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도, 당신의 능력이 나타날 것도 믿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자 하는 이 현실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루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날을 분명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은혜를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부를 주셨다고 바로 썼습니까, 물질을 주셨다고 바로 썼습니까, 풍년을 주셨다고 바로 누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잘살게 해주셨다고 해서 우리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기주의와 세속적인 욕망과 향락, 그리고 방탕과 사치로 치달을 뿐입니다.
이런 주제로야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에 나설 것이며, 어떻게 더 복을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자유를, 이 풍성함을 지속해 달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14장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는 없고 죄만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카프만 부인의 「광야의 샘」이라고 하는 책 속에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에고치 4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누에고치 하나에 구멍이 뚫립니다. 바늘구멍 만한 구멍이 점점 커지는 것이 참으로 신비로웠습니다. 이윽고 그 구멍을 통하여 나비 한 마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된 것입니다. 나비는 그 조그마한 구멍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려고 바둥바둥 애를 씁니다. 날갯죽지가 나오더니 바둥거리기 시작합니다. 안쓰러워 못볼 정도로 기를 쓰고 바둥거립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그렇게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더니 머리가 나오려고 바둥거리고, 마침내는 몽둥이가 나오려고 바둥거립니다. 하루종일 그렇게 애를 쓰더니 기어이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합니다. 밖으로 나온 나비는 몇 바퀴를 뒤채더니 휘잉하고 공중으로 날아오릅니다. 그 사람은 다시, 다른 누에고치로 시선을 돌립니다. 또 한 마리의 나비가 밖으로 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를 보고 그는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구멍을 만드시려거든 좀 크게 만드실 것이지, 왜 저렇게 조그맣게 만들어서 고생을 시키시나.' 그는 스스로 나비들의 고생을 덜어 줄 양으로 가위로 누에고치의 구멍을 넓혀 줍니다. 그랬더니 나비가 쉽게 쑤욱 나옵니다. 그런데, 고생을 하고 나온 나비는 훨훨 날아가는데, 자신이 구멍을 넓혀 끌어낸 이 나비는 몇 바퀴 뒤채는가 했더니 웬걸 그대로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오랜 시간 누에고치 속에 있던 이 나비는 그 조그마한 구멍을 빠져 나오려고 바둥거리며 운동을 해야 온몸에 영양을 공급하고 힘을 얻을 수 있으며, 그래야만 곧장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넘치게 받으며 삽니다. 다만, 그 받은 바를 바로 알고 쓰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를 주시니 사치합니다. 건강을 주시니 방탕합니다. 때로 우리는 무사안일을 바랍니다. 하지만 무사(無事)하면 우리의 심신은 썩습니다. 안일(安逸)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무사안일과 번영은 복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잘되기만을 바라지 마십시오. 나든 남이든 누구든지 무사안일, 만사형통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사안일을 구함이 온당치 않음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그런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에야 그 믿음이 능력으로 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을 만큼 온전히 순종할 때에야 그 믿음이 능력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조지 뮐러는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친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고아의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서 항상 존경과 높임을 받았습니다. 뒤를 이어서 수고하는 젊은이들이 그를 찾아와서 봉사의 비결을 묻곤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토록 귀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때마다 그는 일평생 자신이 늘 생각하던 바를 쉽게 그리고 신중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곤 했습니다. "내가 철저하게 엎어진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하나님의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취미, 내 의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완전히 묻어 버리고, 인정을 받든 비난을 받든 비방을 받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 감각이 없을 만큼 완전히 죽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진실하고 착하게 남을 위해서 헌신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끝까지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그 의지가 쓰러지고 맙니다. 왜 쓰러지겠습니까? 인간적인 의지가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자기 의지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을 일치시킬 만큼 온전한 순종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일운동'이라는 이 엄청난 사건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비로소 민주의식이 싹트게 됩니다. 이전에는 나라의 모든 일이란 왕이나 몇 사람의 일이었지 백성들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온 백성이 나라를 위하여 함께 들고일어난 것이 바로 삼일운동입니다. 뿐만아니라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삼일운동은 민족 교회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임을 교인들에게 일깨워 줄 수 있었습니다. 애국과 애족,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일깨워 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삼일운동은 순국과 순교가 하나의 의미로 통하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온 국민이 함께 시작했지만, 결국 죽은 사람은 모두 기독교인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하는 삼일운동의 이 정신을 기독교적 정신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정신을 신앙적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애국가를 찬송가로 부르고, 기도하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처럼 순국과 순교가 하나였습니다. 마침내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북녘 땅을 방문했을 때에 그쪽의 한 고관이 말하더군요.
"우리 북조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철저하게 교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듣기로 남조선은 국민의 70퍼센트 정도가 기독교 정신권에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 말을 듣고 내심으로 부끄러우면서도 자랑스러웠습니다. 그 북녘사람의 말이 오히려 고맙게 들렸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 남한에 있는 국민의 정신력은 70퍼센트가 기독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가 이렇게 부흥하고,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살게 된 것이 과연 어디서 연유합니까? 삼일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히스기야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하여 분명코 여호와만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온 세계에 알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만이 역사의 주인 되심을 만방에 선포하여야 합니다. 모름지기 오늘의 이 중요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해산의 능력을 읽은 자(이사야 37장 1절~7절)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를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에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이와 같이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조심스레 강을 건너다가 실수해서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강가에 있던 구조대원 하나가 급히 헤엄을 쳐서 그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빠진 사람을 바로 건지지 않고 한동안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강가 언덕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습니다. "아니, 왜 건지지 않고 보고만 있는 거야?" "저러다 죽어버리면 어떡해?" 사람들의 눈에는 그 구조대원의 태도가 이상스럽게 비쳤습니다. 그 구조대원은 시간이 얼마간 흘러,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사람이 기진맥진한 다음에야 비로소 건져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구조대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째서 바로 건지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어요?" 구조대원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렇게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버둥거릴 때에 가까이 가면 있는 힘을 다해서 매달립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빠져 죽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를 잃고 기진맥진해서 전적으로 나한테 순종할 수 있게 되면 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만 그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지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매우 중요하고 상징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의 능력, 나의 지혜, 나의 의지…… 이런 것들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순간이 오고야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교훈입니다.
히스기야왕 14년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무려 이십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성을 포위했습니다. 이십만이라고 하면 지금 따져봐도 적은 수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 당시로 보면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군사를 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산헤립 왕은 히스기야 왕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붓고, 비방과 협박을 거듭했습니다.
먼저, 그는 히스기야왕의 무기력을 비난했습니다. "나는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사 36:8)"----이스라엘 군사의. 예루살렘 시민들의, 그리고 히스기야왕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비난했습니다.
다음으로, 히스기야왕이 애굽의 원정(遠征)에 의지함을 비난했습니다. 나라가 전쟁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우호적 관계에 있는 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히스기야왕도 그 같은 어려움에 처하여 애굽에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산헤립은 이를 두고 히스기야왕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지팡이와 일반이라(사 36:6)"----애굽이 너를 도와줄 줄로 아느냐,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협박합니다. 애굽도 내 앞에서는 상한 갈대와 같다, 그러니 항복하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마지막으로 산헤립왕은 예루살렘 시민들의 신앙을 비난했습니다. "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그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내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사 36:20)"--모든 신들이 내 앞에 쓰러졌거늘 너희의 하나님인들 별수 있겠느냐고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러면 무사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 라?고 선동하고 있지만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어느 신이 내 손에서 건져내더냐' '여호와를 의뢰하는 신앙은 헛된 것이다'라고 소리치면서 삿대질을 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강했습니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그 많은 우상을 완전히 진멸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선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만 의뢰하라.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라'고 시민들을 가르치고,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그 민족을 정결케 한 왕이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역대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가장 선한 왕으로 손꼽히는 왕입니다. 이렇듯 그는 종교적․신앙적 차원에서 보면 나무랄데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군사․경제 부문에서는 그리 유능한 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에게 시련이 닥쳤습니다. 큰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사 37:3)"----히스기야왕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련을 그는 민족적으로 개인적으로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왕은 이 엄청난 문제 앞에서 산헤립의 협박이 담긴 편지를 들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갑니다. 제단 위에 편지를 펼쳐놓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앗수르왕이 이렇게 모욕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욕하고 있습니다. 수치와 비탄과 참회의 물이 굵은 베옷을 적십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사야 선지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문무백관 모든 신하들에게도 굵은 베옷을 입고 기도하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립니다. 마음은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에게는 시련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이 아름다운 왕에게도, 그리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도 그 엄청난 고난과 핍박이 닥치지 않았습니까? 이렇듯 신앙인에게는 실제로 언제든지 시련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련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신앙적 용기가 히스기야왕에게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에는 엄청난 교육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엔 큰 시련 같지만 오늘의 본문말씀인 이사야서 37장을 계속 읽어보면, 그 기고만장하던 앗수르왕은 끝내 죽임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십팔만오천이나 되는 앗수르군사가 하룻밤 새에 죽고 맙니다. 여호와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산헤립왕은 간신히 본국으로 도망치기는 했으나 저희네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하다가 아들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일은 결국 통쾌하게 끝났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크나 큰 교육적 의미를 안겨주었습니다. 구원하시고 양육하시고 성장케 하시고 가르치고자 하시는, 그리고 어디론가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경륜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은총적 경륜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괴로웠습니다. 그 사실을 온전히 알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건에는 선교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루셨고, 당신의 뜻을 실현하셨으며, 나아가서는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온천하에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널리널리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사 37:20)"----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드린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선교적 사역이 여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히스기야를 겸손하고도 강하게 만드셨습니다. 진실하게도, 온유하게도 만드셨습니다. 동시에 영화롭게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앗수르왕 산헤립과 그의 신하 랍사게가 예루살렘 침략이 성공한 줄 알 정도로, 오늘의 이 사건은 절박했었습니다. 산헤립왕은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그때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많은 노획물도 얻었습니다. 이러한 승리를 통해 산헤립왕은 교만하고 오만해졌습니다. 예루살렘을 쳐들어와서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히스기야왕과 예루살렘 시민들과 그들의 하나님을 겁없이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앗수르의 군사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산헤립왕은 간신히 도망은 하나 역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크나큰 구원의 역사와 심판의 역사가 이 한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입니다. 이렇게 커다란 의미가 담긴 사건이 바야흐로 히스기야왕의 눈앞에 다가오는데, 그들에게는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 벌벌 떨었고 굴욕을 느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온백성과 함께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신앙에는 유형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다고 말로는 하면서도 실제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 이것은 위대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신앙의 초보적 단계에 불과합니다. 추상적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내 편에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와주신다, 지난날에도 자비로우셨고 도와 주셨으며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실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또한 훌륭한 믿음이기는 하나 아직은 유치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기다리는 마음, 이 대망적 신앙 역시 훌륭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아직은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네 번째가 하나님의 모든 경륜과 지혜 안에 내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 크신 경륜 안에 나를 온전히 위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온전하고 위대한 믿음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오직 하나 '하나님의 그 은혜를 내가 받기에 충분한가'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해방을 위하여 남북전쟁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비록 인종차별을 없애려는 거룩한 의도에서 시작된 싸움이기는 하지만 7년을 넘게 전쟁이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이 죽고, 서로들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긴 싸움으로 인한 병폐 앞에서 링컨대통령은 고민에 빠집니다. 선한 목적에서 비롯된 싸움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바람직하게만 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민하던 끝에 하루는 집무실에서 밤을 새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제게 힘을 주시지 아니하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 이를 알고 장관들 역시 밤새 문밖에 서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링컨 대통령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대통령을 위로한답시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에 링컨 대통령은 대답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희 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이것을 걱정할 뿐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자비가 아무리 크고 놀랍다 하더라도 과연 여러분 자신은 그것을 받을만 합니까? 여러분은 그 은혜를 바로 알고 받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보다는 우리가 누구에게 속하여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에 깨끗하게 순종하고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적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추상적 신앙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식일 뿐, 능력은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3절)." 임신을 해서 해산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몇 시간 뒤에는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 이 고통을 견딜힘이 없습니다. 생명을 출산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산파를 부르는 것처럼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이 고통의 의미를 우리는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몰라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도, 당신의 능력이 나타날 것도 믿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자 하는 이 현실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루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날을 분명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은혜를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부를 주셨다고 바로 썼습니까, 물질을 주셨다고 바로 썼습니까, 풍년을 주셨다고 바로 누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잘살게 해주셨다고 해서 우리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기주의와 세속적인 욕망과 향락, 그리고 방탕과 사치로 치달을 뿐입니다.
이런 주제로야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에 나설 것이며, 어떻게 더 복을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자유를, 이 풍성함을 지속해 달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14장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는 없고 죄만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카프만 부인의 「광야의 샘」이라고 하는 책 속에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에고치 4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누에고치 하나에 구멍이 뚫립니다. 바늘구멍 만한 구멍이 점점 커지는 것이 참으로 신비로웠습니다. 이윽고 그 구멍을 통하여 나비 한 마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된 것입니다. 나비는 그 조그마한 구멍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려고 바둥바둥 애를 씁니다. 날갯죽지가 나오더니 바둥거리기 시작합니다. 안쓰러워 못볼 정도로 기를 쓰고 바둥거립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그렇게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더니 머리가 나오려고 바둥거리고, 마침내는 몽둥이가 나오려고 바둥거립니다. 하루종일 그렇게 애를 쓰더니 기어이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합니다. 밖으로 나온 나비는 몇 바퀴를 뒤채더니 휘잉하고 공중으로 날아오릅니다. 그 사람은 다시, 다른 누에고치로 시선을 돌립니다. 또 한 마리의 나비가 밖으로 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를 보고 그는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구멍을 만드시려거든 좀 크게 만드실 것이지, 왜 저렇게 조그맣게 만들어서 고생을 시키시나.' 그는 스스로 나비들의 고생을 덜어 줄 양으로 가위로 누에고치의 구멍을 넓혀 줍니다. 그랬더니 나비가 쉽게 쑤욱 나옵니다. 그런데, 고생을 하고 나온 나비는 훨훨 날아가는데, 자신이 구멍을 넓혀 끌어낸 이 나비는 몇 바퀴 뒤채는가 했더니 웬걸 그대로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오랜 시간 누에고치 속에 있던 이 나비는 그 조그마한 구멍을 빠져 나오려고 바둥거리며 운동을 해야 온몸에 영양을 공급하고 힘을 얻을 수 있으며, 그래야만 곧장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넘치게 받으며 삽니다. 다만, 그 받은 바를 바로 알고 쓰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를 주시니 사치합니다. 건강을 주시니 방탕합니다. 때로 우리는 무사안일을 바랍니다. 하지만 무사(無事)하면 우리의 심신은 썩습니다. 안일(安逸)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무사안일과 번영은 복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잘되기만을 바라지 마십시오. 나든 남이든 누구든지 무사안일, 만사형통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사안일을 구함이 온당치 않음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그런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에야 그 믿음이 능력으로 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을 만큼 온전히 순종할 때에야 그 믿음이 능력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조지 뮐러는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친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고아의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서 항상 존경과 높임을 받았습니다. 뒤를 이어서 수고하는 젊은이들이 그를 찾아와서 봉사의 비결을 묻곤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토록 귀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때마다 그는 일평생 자신이 늘 생각하던 바를 쉽게 그리고 신중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곤 했습니다. "내가 철저하게 엎어진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하나님의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취미, 내 의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완전히 묻어 버리고, 인정을 받든 비난을 받든 비방을 받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 감각이 없을 만큼 완전히 죽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진실하고 착하게 남을 위해서 헌신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끝까지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그 의지가 쓰러지고 맙니다. 왜 쓰러지겠습니까? 인간적인 의지가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자기 의지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을 일치시킬 만큼 온전한 순종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일운동'이라는 이 엄청난 사건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비로소 민주의식이 싹트게 됩니다. 이전에는 나라의 모든 일이란 왕이나 몇 사람의 일이었지 백성들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온 백성이 나라를 위하여 함께 들고일어난 것이 바로 삼일운동입니다. 뿐만아니라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삼일운동은 민족 교회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임을 교인들에게 일깨워 줄 수 있었습니다. 애국과 애족,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일깨워 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삼일운동은 순국과 순교가 하나의 의미로 통하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온 국민이 함께 시작했지만, 결국 죽은 사람은 모두 기독교인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하는 삼일운동의 이 정신을 기독교적 정신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정신을 신앙적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애국가를 찬송가로 부르고, 기도하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처럼 순국과 순교가 하나였습니다. 마침내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북녘 땅을 방문했을 때에 그쪽의 한 고관이 말하더군요.
"우리 북조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철저하게 교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듣기로 남조선은 국민의 70퍼센트 정도가 기독교 정신권에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 말을 듣고 내심으로 부끄러우면서도 자랑스러웠습니다. 그 북녘사람의 말이 오히려 고맙게 들렸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 남한에 있는 국민의 정신력은 70퍼센트가 기독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가 이렇게 부흥하고,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살게 된 것이 과연 어디서 연유합니까? 삼일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히스기야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하여 분명코 여호와만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온 세계에 알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만이 역사의 주인 되심을 만방에 선포하여야 합니다. 모름지기 오늘의 이 중요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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