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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근심 위에 근심(빌립보서 2장 25절~30절)

by 【고동엽】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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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위에 근심(빌립보서 22530)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옛날 이야기입니다. 어떤 효자가 여름날 모기가 들끓는 밤에 마당에다 평상을 내놓고 아버지와 함께 거기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모기가 어찌나 심하게 들끓고 물어대는지 견디기가 보통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효자는 종내 모기를 쫓지 않았습니다. 내가 모기를 쫓으면 그 모기가 아버지에게 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효자는 밤새도록 모기한테 시달리면서 한밤을 꼬박 지새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효자는 똑똑한 사람입니까, 미련한 사람입니까? 아마도 요새 사람들은 이렇게 평할 것입니다.

"참 바보 같은 사람이다. 돈 벌어서 모기장 사오든가 모기약이라도 뿌리면 될 것 아니냐?" "돈 벌어서 모기한테 시달리지 않을 수 있는 좋은 집을 지어 드리면 될 것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의 세상이 살맛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해서 그토록 모기한테 시달리면서도 꾹꾹 참고 하룻밤을 지새는 그 효자의 마음씨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 이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될 때의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런 마음씨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어려운 것입니다. 만사를 다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세상입니다.

인생 가치는 그 인생이 지닌 목적에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그 인생이 세운 가치관에 준합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물리적 상황보다도 정신적 도덕적 상황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도대체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그리들 극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궁극적 관심을 어디에 두고 있으며, 정말로 순간순간 현실적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가 추구하는 그것만큼 내 인생은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생각하면 썩은 사람이요, 거룩한 것을 생각하면 거룩한 사람이요, 순간의 것을 생각하고 살면 그 사람은 부질없는 사람이요, 영원한 가치의 것을 생각하고 살면 그 사람이 영원한 생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이기주의'입니다.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문제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이기주의가 얼마나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기적으로 산다고 얻어지는 게 있습니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도 남도 자꾸자꾸 불행해지기만 합니다. 그러하거늘 아직도 이기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기주의로 무엇이 이루어질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참으로 불쌍한 노릇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최대의 타락입니다. W. E. 그레스터는 이기주의를 가리켜 '인류 최대의 재앙'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앙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오늘의 불행은 물질주의의 팽배에 있는 것도 아니요 기술의 문제도 부귀의 문제도 가난의 문제도 평화의 문제도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기주의라고 하는 재앙을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분명히 재앙입니다. 그 때문에 마냥 무서운 멸망의 길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발달심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만, 혹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주 어렸을 때에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이를테면 어머니란 나에게 젖을 먹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젖이 둘인 것도, 하나는 나에게 먹이기 위한 것이요, 하나는 가지고 놀라는 것이므로 모두 내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선물을 사오는 사람이요, 오빠는 내가 타고 놀기 위하여 있는 장난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제는 주위 사람들도 돌아볼 줄 압니다.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흔히 철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있고 부모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있고야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정이 있고야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있고야 내가 있다는 것이요, 세계가 있고야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철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어지간히 나이가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철이 못난 사람이 많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크신 구속의 역사가 있고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엄청난 긍휼하심이 있고 그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가운데 '근심 위에 근심'이라는 아주 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근심이란 마음의 아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후 7:8)"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영생을 이루고 구원을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걱정은 아주 고상하고 유익하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배경을 생각해봅시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로마를 여행할 때에 일반적으로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마는 사도 바울이 있었던 그 감옥에 한번 가보십시오. 그곳이 실제로 사도 바울이 있었던 감옥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어쨌든 그 지하 감옥과 사도 바울을 묶었다던 쇠사슬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하 감옥에 갇혀 그 외로움과 불편함과 답답함과 고통스러움과 부자유함을 겪었습니다. 이보다 사도 바울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불확실한 미래였습니다. 언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재판을 해서 어떻게 죽일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그는 불안과 초조감을 느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전 할 수 없어 답답해했습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그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1:24)"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는 고난을 기뻐할 줄 아는 초연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에게도 더 높은 차원의 근심이 있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빌립보 교인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성금을 모았습니다. 돈을 모아서 교회의 목사님인 에바브로디도를 로마로 파송합니다. 그곳에 가서 사도 바울에게 요샛말로 사식과 담요를 넣어주며 여러 가지로 시중들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당시 감옥의 이부자리는 지푸라기를 깔아 놓은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의 뜻대로 로마로 가 사도 바울의 곁에서 매일같이 돌아보았습니다. 사식도 들이고 여러 모로 시중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중들던 에바브로디도가 갑자기 병이 들고 맙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때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빌립보교회가 걱정을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시중들라고 파송한 그가 덜커덕 병들어 죽으면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게 될지 걱정합니다. 혹 떼러 갔다가 붙인 격입니다. 편안하게 해드린다는 것이 본의 아니게 바울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한 결과가 되었다고 빌립보 교인들은 걱정합니다. 에바브로디도 또한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성경에 나타난 대로 에바브로디도는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요, 복음을 위하여 바울을 위하여 얼마든지 죽을 용의가 있고 죽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병들어 죽게 되면 순교도 아닙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은 얼마나 마음이 괴로울까, 빌립보교회가 소식을 들었으니 온 교회가 얼마나 걱정을 할까 하고 에바브로디도 또한 나름대로 근심합니다.

바울도 걱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젊은 종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시중들다가 죽게 되면 어떻게 하나 교회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인들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하고 걱정합니다. 근심 위에 근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두가 자기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걱정합니다. 자기 미래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미래를 염려합니다. 자기 마음 편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근심하는 것을 근심해서 더 큰 근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부가 이타적이고 봉사적이고 희생적입니다. 아름다운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매우 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내일 아침 죽게 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위로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14:1, 2)."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아픔과 괴로움과 억울함을 생각하시기보다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들을 걱정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받을 심판과 그 운명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심성입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디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까?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이 있습니다. 평생토록 부부가 함께 살면서 아내가 지은 밥을 먹다보면 가끔은 돌을 씹을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이분, 한번도 아내에게 돌 씹는 것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밥에 돌이 한번도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가 돌을 씹으면 그분은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그대로 나가서 뱉어버리고 들어옵니다. 아내는 그것을 전혀 모릅니다. 어느 날인가, 그 아내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나는 평생 밥에 돌을 넣어본 일이 없다"하고 자랑하더랍니다. 여러분, 이 정도라면 과연 훌륭한 남편이랄 수 있지 않습니까? 누군들 밥에 돌을 넣고 싶어 넣었겠습니까?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어쩌다보면 돌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밥을 먹다가 돌 씹히면 밥을 먹으라는 것이냐 말라는 것이냐고 소리치며 화를 내는 남편이 있습니다. 이런 남편은 함께 살기 힘이 듭니다. 무릇 남편들이란 '내가 돌을 씹었다고 하면 아내가 얼마나 마음 아플까?'하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아내를 생각하는 이러한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제가 얼마 전 호주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는 12년 전에 이주한 친구와 후배, 제자들과 그 사모님들이 살고 있습니다. 12년만에 비행장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처음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아이구 목사님, 늙으셨네요"입니다. 제가 말은 안 했습니다 마는 속으로 '당신은 더 늙었소'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주책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든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늙게 되는것 아닙니까? 도무지 자기 생각만 했지 말끝에 오는 영향은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여러분, 남편이 저녁에 피곤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좀 피곤해 보이니 내가 좋은 분위기로 바꿔서 피로를 잊어버리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들어오자마자 "피곤해 보여요. 어디 아파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관심이 사랑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주책입니다. 그러한 말을 들으면 더욱 피곤해집니다. 깜빡 피곤을 잊었다가도 '아이쿠 정말 피곤하다.

병원에 가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말을 할 때에는 이 말을 함으로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제 신학대학 동기동창 중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아내를 잃은 친구가 있습니다. 아내를 잃고 한동안 몹시 슬퍼하고 외로워하다가 친구들의 권유로 일 년 후엔가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동기동창 친구들이 부부동반으로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그 자리에 새로 맞은 부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저는 못 보던 여자 분이지만 재혼한 그분인가보다 하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있던 친구 하나가 그 목사님을 보고는 "일년 전, 자네가 상처했을 때 장례식에 못 가서 미안하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옆에 서 있던 사모님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것이 인사입니까? 사랑이요 관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나간 짓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말을 하기 전에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또 한번 생각한 연후에 말을 하십시오. 사랑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가짐 하나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은 아니었지만, 유달리 돈을 잘 쓰고 다니는 분이 계셨습니다. 연세가 팔십이다 되어 사회에서 은퇴한 지 오래되었고, 재산도 넉넉지 않을 뿐더러 자식들 역시 그리 부자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분 보면 돈을 잘 쓰고 다니십니다. 만나기만 하면 "목사님, 차 한잔합시다.

점심합시다" 하며 대접을 해줍니다. 그래서 한번은 "장로님, 무슨 돈이 있어서 이렇게 늘 남을 대접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저요, 돈 많습니다" 하십니다. "어디서 났습니까?" "제게 아들 삼형제가 있잖아요?" 그 아들 삼형제가 돈이 그렇게 많으냐고 했더니 그분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아들들한테 가서 직접 "이놈들아, 내가 돈을 잘 쓰고 다녀야 너희가 효자 되지 않겠느냐? 내가 초라해 가지고 다니면 동네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너희들 효자 만드느라고 내 이 소리한다. 돈 내놔라"하고 말한답니다. 아주 재미있는 분이요 지혜로운 분입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중심에서부터 누구를 위하고 있습니까? 간혹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만나보면 갖가지의 병으로 고생하시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병 가운데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담석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담석증으로 고생하시는 어떤 분에게 가서 "어떻습니까?"하고 안부를 물으면 그렇게 아파서 고생을 하시면서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그런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그저 좀 아프면 주위 사람 전부를 못살게 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매양 아프다고만 합니다. 옆에서 시중드는 분의 마음도 헤아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픈 것이 무슨 벼슬인양 그저 자기만 위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 사람이 예수를 믿나, 안 믿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계를 넘었을 때에는 정신을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아무리 아프다 해도 한계는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온 집안 식구들을 다 못살게 굽니다. 이 심성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중생하지 못한 마음에서 비롯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나보다 남을 생각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남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어 남을 기쁘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깊은 생각 끝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자기 희생적으로 행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여덟 살이나 아홉 살만 되어도 장가를 가지 않았습니까? 자기보다 무려 열 살이나 많은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 였습니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아주 조그맣고 어린 신랑이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아내한테 자꾸만 업어달라고 조릅니다. 그 부인, 신랑 노릇도 못하는 것이 자꾸 업어달라고만 하니까 짜증이 난 나머지 신랑을 지붕 위로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골탕을 먹이느라고, 내려달라고 졸라도 안내려줍니다. 그 때에 마침 출타중이던 시부모님이 돌아옵니다. 초가지붕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아들이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며느리는 그 밑에서 어쩔줄 몰라하며 서 있고요. 하도 기가 막혀 ", 거기에 왜 올라가 있느냐?"라고 아들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이 꼬마 신랑이 아내를 보고는 "큰 호박을 딸까, 작은 호박을 딸까"하더랍니다. 꼬마신랑의 그 기지로 며느리는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신랑이 아내보고 "내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라면 색시는 쫓겨나고 말았을 거야"하더랍니다. 어떻습니까? 요즘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없습니다. 컴퓨터 조작하는 데는 '도사'이지만, 이렇듯 남을 위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내 행동으로 인한 파급효과는 어떠할까, 다른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이것을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근심이 비롯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위하여 열심으로 진심으로 기도하자 그의 병이 낫지 않았습니까?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낫자마자, 바울은 그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급히 보냅니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으면야 '에바브로디도는 다 나았습니다'라고 전화를 걸어 전하면 되겠습니다만, 옛날에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를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 데리고 있고 싶었지만 급히 보내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하는 것을 생각하고 빨리 그 걱정에서 면케 해주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의 건강한 모습에 빌립보 교인들이 위로 받게 하려고 급히 보낸 것입니다. 바울은 키는 작았지만 마음은 저렇듯 넓었습니다. 깊은 배려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28)"---내게 필요한 사람이지마는 너희들의 기쁨을 위해서 빨리 보내노라고 편지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근심을 가지고 삽니다. 첫째, 행여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할까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봐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둘째, 이웃의 모든 사람들과 부모, 형제, 자매, 자녀가 나로 인하여 걱정하게 될까봐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먼저, 남이 근심하는 것을 근심합니다. 그 다음에야 나 자신을 걱정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근심 위에 근심----남의 마음, 남의 걱정을 또 한번 걱정하는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있고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근심 위에 근심(빌립보서 22530)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옛날 이야기입니다. 어떤 효자가 여름날 모기가 들끓는 밤에 마당에다 평상을 내놓고 아버지와 함께 거기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모기가 어찌나 심하게 들끓고 물어대는지 견디기가 보통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효자는 종내 모기를 쫓지 않았습니다. 내가 모기를 쫓으면 그 모기가 아버지에게 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효자는 밤새도록 모기한테 시달리면서 한밤을 꼬박 지새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효자는 똑똑한 사람입니까, 미련한 사람입니까? 아마도 요새 사람들은 이렇게 평할 것입니다.

"참 바보 같은 사람이다. 돈 벌어서 모기장 사오든가 모기약이라도 뿌리면 될 것 아니냐?" "돈 벌어서 모기한테 시달리지 않을 수 있는 좋은 집을 지어 드리면 될 것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의 세상이 살맛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해서 그토록 모기한테 시달리면서도 꾹꾹 참고 하룻밤을 지새는 그 효자의 마음씨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 이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될 때의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런 마음씨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어려운 것입니다. 만사를 다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세상입니다.

인생 가치는 그 인생이 지닌 목적에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그 인생이 세운 가치관에 준합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물리적 상황보다도 정신적 도덕적 상황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도대체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그리들 극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궁극적 관심을 어디에 두고 있으며, 정말로 순간순간 현실적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가 추구하는 그것만큼 내 인생은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생각하면 썩은 사람이요, 거룩한 것을 생각하면 거룩한 사람이요, 순간의 것을 생각하고 살면 그 사람은 부질없는 사람이요, 영원한 가치의 것을 생각하고 살면 그 사람이 영원한 생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이기주의'입니다.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문제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이기주의가 얼마나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기적으로 산다고 얻어지는 게 있습니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도 남도 자꾸자꾸 불행해지기만 합니다. 그러하거늘 아직도 이기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기주의로 무엇이 이루어질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참으로 불쌍한 노릇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최대의 타락입니다. W. E. 그레스터는 이기주의를 가리켜 '인류 최대의 재앙'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앙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오늘의 불행은 물질주의의 팽배에 있는 것도 아니요 기술의 문제도 부귀의 문제도 가난의 문제도 평화의 문제도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기주의라고 하는 재앙을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분명히 재앙입니다. 그 때문에 마냥 무서운 멸망의 길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발달심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만, 혹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주 어렸을 때에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이를테면 어머니란 나에게 젖을 먹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젖이 둘인 것도, 하나는 나에게 먹이기 위한 것이요, 하나는 가지고 놀라는 것이므로 모두 내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선물을 사오는 사람이요, 오빠는 내가 타고 놀기 위하여 있는 장난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제는 주위 사람들도 돌아볼 줄 압니다.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흔히 철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있고 부모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있고야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정이 있고야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있고야 내가 있다는 것이요, 세계가 있고야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철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어지간히 나이가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철이 못난 사람이 많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크신 구속의 역사가 있고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엄청난 긍휼하심이 있고 그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가운데 '근심 위에 근심'이라는 아주 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근심이란 마음의 아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후 7:8)"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영생을 이루고 구원을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걱정은 아주 고상하고 유익하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배경을 생각해봅시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로마를 여행할 때에 일반적으로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마는 사도 바울이 있었던 그 감옥에 한번 가보십시오. 그곳이 실제로 사도 바울이 있었던 감옥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어쨌든 그 지하 감옥과 사도 바울을 묶었다던 쇠사슬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하 감옥에 갇혀 그 외로움과 불편함과 답답함과 고통스러움과 부자유함을 겪었습니다. 이보다 사도 바울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불확실한 미래였습니다. 언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재판을 해서 어떻게 죽일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그는 불안과 초조감을 느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전 할 수 없어 답답해했습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그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1:24)"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는 고난을 기뻐할 줄 아는 초연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에게도 더 높은 차원의 근심이 있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빌립보 교인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성금을 모았습니다. 돈을 모아서 교회의 목사님인 에바브로디도를 로마로 파송합니다. 그곳에 가서 사도 바울에게 요샛말로 사식과 담요를 넣어주며 여러 가지로 시중들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당시 감옥의 이부자리는 지푸라기를 깔아 놓은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의 뜻대로 로마로 가 사도 바울의 곁에서 매일같이 돌아보았습니다. 사식도 들이고 여러 모로 시중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중들던 에바브로디도가 갑자기 병이 들고 맙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때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빌립보교회가 걱정을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시중들라고 파송한 그가 덜커덕 병들어 죽으면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게 될지 걱정합니다. 혹 떼러 갔다가 붙인 격입니다. 편안하게 해드린다는 것이 본의 아니게 바울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한 결과가 되었다고 빌립보 교인들은 걱정합니다. 에바브로디도 또한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성경에 나타난 대로 에바브로디도는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요, 복음을 위하여 바울을 위하여 얼마든지 죽을 용의가 있고 죽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병들어 죽게 되면 순교도 아닙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은 얼마나 마음이 괴로울까, 빌립보교회가 소식을 들었으니 온 교회가 얼마나 걱정을 할까 하고 에바브로디도 또한 나름대로 근심합니다.

바울도 걱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젊은 종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시중들다가 죽게 되면 어떻게 하나 교회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인들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하고 걱정합니다. 근심 위에 근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두가 자기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걱정합니다. 자기 미래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미래를 염려합니다. 자기 마음 편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근심하는 것을 근심해서 더 큰 근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부가 이타적이고 봉사적이고 희생적입니다. 아름다운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매우 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내일 아침 죽게 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위로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14:1, 2)."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아픔과 괴로움과 억울함을 생각하시기보다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들을 걱정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받을 심판과 그 운명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심성입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디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까?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이 있습니다. 평생토록 부부가 함께 살면서 아내가 지은 밥을 먹다보면 가끔은 돌을 씹을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이분, 한번도 아내에게 돌 씹는 것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밥에 돌이 한번도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가 돌을 씹으면 그분은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그대로 나가서 뱉어버리고 들어옵니다. 아내는 그것을 전혀 모릅니다. 어느 날인가, 그 아내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나는 평생 밥에 돌을 넣어본 일이 없다"하고 자랑하더랍니다. 여러분, 이 정도라면 과연 훌륭한 남편이랄 수 있지 않습니까? 누군들 밥에 돌을 넣고 싶어 넣었겠습니까?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어쩌다보면 돌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밥을 먹다가 돌 씹히면 밥을 먹으라는 것이냐 말라는 것이냐고 소리치며 화를 내는 남편이 있습니다. 이런 남편은 함께 살기 힘이 듭니다. 무릇 남편들이란 '내가 돌을 씹었다고 하면 아내가 얼마나 마음 아플까?'하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아내를 생각하는 이러한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제가 얼마 전 호주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는 12년 전에 이주한 친구와 후배, 제자들과 그 사모님들이 살고 있습니다. 12년만에 비행장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처음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아이구 목사님, 늙으셨네요"입니다. 제가 말은 안 했습니다 마는 속으로 '당신은 더 늙었소'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주책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든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늙게 되는것 아닙니까? 도무지 자기 생각만 했지 말끝에 오는 영향은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여러분, 남편이 저녁에 피곤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좀 피곤해 보이니 내가 좋은 분위기로 바꿔서 피로를 잊어버리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들어오자마자 "피곤해 보여요. 어디 아파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관심이 사랑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주책입니다. 그러한 말을 들으면 더욱 피곤해집니다. 깜빡 피곤을 잊었다가도 '아이쿠 정말 피곤하다.

병원에 가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말을 할 때에는 이 말을 함으로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제 신학대학 동기동창 중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아내를 잃은 친구가 있습니다. 아내를 잃고 한동안 몹시 슬퍼하고 외로워하다가 친구들의 권유로 일 년 후엔가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동기동창 친구들이 부부동반으로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그 자리에 새로 맞은 부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저는 못 보던 여자 분이지만 재혼한 그분인가보다 하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있던 친구 하나가 그 목사님을 보고는 "일년 전, 자네가 상처했을 때 장례식에 못 가서 미안하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옆에 서 있던 사모님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것이 인사입니까? 사랑이요 관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나간 짓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말을 하기 전에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또 한번 생각한 연후에 말을 하십시오. 사랑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가짐 하나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은 아니었지만, 유달리 돈을 잘 쓰고 다니는 분이 계셨습니다. 연세가 팔십이다 되어 사회에서 은퇴한 지 오래되었고, 재산도 넉넉지 않을 뿐더러 자식들 역시 그리 부자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분 보면 돈을 잘 쓰고 다니십니다. 만나기만 하면 "목사님, 차 한잔합시다.

점심합시다" 하며 대접을 해줍니다. 그래서 한번은 "장로님, 무슨 돈이 있어서 이렇게 늘 남을 대접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저요, 돈 많습니다" 하십니다. "어디서 났습니까?" "제게 아들 삼형제가 있잖아요?" 그 아들 삼형제가 돈이 그렇게 많으냐고 했더니 그분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아들들한테 가서 직접 "이놈들아, 내가 돈을 잘 쓰고 다녀야 너희가 효자 되지 않겠느냐? 내가 초라해 가지고 다니면 동네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너희들 효자 만드느라고 내 이 소리한다. 돈 내놔라"하고 말한답니다. 아주 재미있는 분이요 지혜로운 분입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중심에서부터 누구를 위하고 있습니까? 간혹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만나보면 갖가지의 병으로 고생하시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병 가운데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담석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담석증으로 고생하시는 어떤 분에게 가서 "어떻습니까?"하고 안부를 물으면 그렇게 아파서 고생을 하시면서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그런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그저 좀 아프면 주위 사람 전부를 못살게 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매양 아프다고만 합니다. 옆에서 시중드는 분의 마음도 헤아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픈 것이 무슨 벼슬인양 그저 자기만 위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 사람이 예수를 믿나, 안 믿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계를 넘었을 때에는 정신을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아무리 아프다 해도 한계는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온 집안 식구들을 다 못살게 굽니다. 이 심성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중생하지 못한 마음에서 비롯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나보다 남을 생각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남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어 남을 기쁘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깊은 생각 끝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자기 희생적으로 행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여덟 살이나 아홉 살만 되어도 장가를 가지 않았습니까? 자기보다 무려 열 살이나 많은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 였습니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아주 조그맣고 어린 신랑이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아내한테 자꾸만 업어달라고 조릅니다. 그 부인, 신랑 노릇도 못하는 것이 자꾸 업어달라고만 하니까 짜증이 난 나머지 신랑을 지붕 위로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골탕을 먹이느라고, 내려달라고 졸라도 안내려줍니다. 그 때에 마침 출타중이던 시부모님이 돌아옵니다. 초가지붕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아들이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며느리는 그 밑에서 어쩔줄 몰라하며 서 있고요. 하도 기가 막혀 ", 거기에 왜 올라가 있느냐?"라고 아들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이 꼬마 신랑이 아내를 보고는 "큰 호박을 딸까, 작은 호박을 딸까"하더랍니다. 꼬마신랑의 그 기지로 며느리는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신랑이 아내보고 "내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라면 색시는 쫓겨나고 말았을 거야"하더랍니다. 어떻습니까? 요즘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없습니다. 컴퓨터 조작하는 데는 '도사'이지만, 이렇듯 남을 위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내 행동으로 인한 파급효과는 어떠할까, 다른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이것을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근심이 비롯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위하여 열심으로 진심으로 기도하자 그의 병이 낫지 않았습니까?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낫자마자, 바울은 그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급히 보냅니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으면야 '에바브로디도는 다 나았습니다'라고 전화를 걸어 전하면 되겠습니다만, 옛날에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를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 데리고 있고 싶었지만 급히 보내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하는 것을 생각하고 빨리 그 걱정에서 면케 해주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의 건강한 모습에 빌립보 교인들이 위로 받게 하려고 급히 보낸 것입니다. 바울은 키는 작았지만 마음은 저렇듯 넓었습니다. 깊은 배려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28)"---내게 필요한 사람이지마는 너희들의 기쁨을 위해서 빨리 보내노라고 편지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근심을 가지고 삽니다. 첫째, 행여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할까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봐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둘째, 이웃의 모든 사람들과 부모, 형제, 자매, 자녀가 나로 인하여 걱정하게 될까봐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먼저, 남이 근심하는 것을 근심합니다. 그 다음에야 나 자신을 걱정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근심 위에 근심----남의 마음, 남의 걱정을 또 한번 걱정하는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있고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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