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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게 축복을(마가복음 10장 13절~16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지난 4월 25일 오후 2시경, 인천에서 열두 살된 어린이가 15층 아파트의 창문을 열고 35미터 아래로 떨어져 숨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년밖에 안된 그 어린이가 자살한 이유는 73점에 그친 4월 총괄평가의 성적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비관하여 자살을 결심하고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그에게는 먹을 것이 부족한 것도 입을 것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니요 형제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친구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습니다. 부모, 형제, 선생님, 친구, 그리고 이 사회가 그에게 가르친 바가 무엇입니까? 그 어린이의 마음속에 심어준 세계관, 가치관, 행복관, 삶의 의미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랑도 성공도 보람도 그리고 삶의 의미까지도 모두가 자신의 성적에 달렸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이는 성적이 올라가면 그에 따라서 모든 것이 주어지고, 성적이 떨어지면 성공도 행복도 없고 심지어는 살 필요조차도 없다고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평소 부모가 그에게 뭐라고 말했기에 이런 행동을 했겠습니까? 이것은 육체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마는 정신적으로는 이밖에도 얼마나 많은 어린이가 벌써 몇 차례나 이 같은 자살과 자해행위를 하고 있는지, 또한 얼마나 스스로 절망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위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 나라의 도처에는 퍽 많은 고아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아원에 수용된 고아 가운데 42퍼센트나 부모가 있는 어린이라고 합니다. 오직 8퍼센트의 어린이만이 부모가 없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부모님이 죽음으로써 고아가 되고 수용시설에 맡겨졌습니다 마는 요즘의 고아는 단지 돌볼 사람이 없어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엄연히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버려져서 고아가 되고, 문제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고아를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가출과 자살까지는 안갔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소외되어 고민하고 희생당하는 어린이들을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절망과 반항과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어린아이들의 오늘의 절망은 내일의 폭력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도덕의 원인도 여기에 있습니다.
구세군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지는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는 슬하에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가면서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일꾼들로 성장했습니다. 캐서린 여사가 세계적으로 모든 사람의 눈에 위대하게 비친 원인은 남편을 위한 내조에도 있었지만, 이보다는 여덟 명의 자녀 모두를 그렇듯 훌륭하게 키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사에게 교육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여사의 대답은 담담하고 명료했습니다. "언제나 악마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나쁜 습관을 배우기 전에 좋은 습관을 먼저 가르치고, 악마가 나쁜 생각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좋은 생각을 가르치고, 악마가 나쁜 지혜를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치고, 악마가 사단의 거짓과 위선과 악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마음속에 악마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배우게 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야 합니다.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체로 경건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자 순교자인 폴리캅(Polycarp)도 아홉 살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또한 주석가 메튜 헨리(Mathew Henry) 역시 열한 살 때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설교가이자 목사님인 스퍼젼(Spurgeon)도 열두 살 때 영적인 자각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는 다들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요즘에 나온 한 조사결과도 어렸을 적에 체험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줍니다. 그 조사결과에 따르면 예수믿는 사람 가운데 85퍼센트가 스무 살 이전에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흔히 어렸을 때에는 아직 사물에 대하여 잘 모르고, 사고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도 복음을 듣고, 영적 체험을 하고, 중생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일생을 바꾸어놓는다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어린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주시는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된 우리가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해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어떤 마을을 총총히 지나시고 계실 때, 그 마을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께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주시기를 간청했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제자들이 꾸짖거늘(13절)"----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자 귀찮아서 꾸짖었을까요? 생각해보십시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붙들고 이야기하고 복을 빌고 하는 일보다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더 크고 중요한 일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은 시간만 빼앗기는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소홀히 여겼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중입니다. 심각한 각오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입니다. 제자들은 이처럼 바쁘고 고된 상황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빼앗길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꾸짖고 물리친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눈앞에 가시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복을 빌어준다고 당장 눈앞에 어떤 확실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변화는 이삼십 년 뒤에나 나타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에 관한 한 전부가 그렇습니다. 눈에 띄게 당장 얻어지는 효과는 없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쳐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에 보면 서로 장난질이나 하고 돌아다니지 가르치는 내용을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해보십시오. 줄줄 잘도 대답합니다. 장난치면서도 들을 것은 다 듣습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고개도 끄덕이고 간혹 '아멘'을 외치며 모두 이해하는 것처럼 듣습니다마는 막상 물어보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어른과 어린이의 다른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이들을 조급하게 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조급히 생각하면 당장은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같이 조급한 생각을 가졌기에 사람들을 꾸짖어 물리친 것입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망하시고 분노하셨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14절)"----이렇듯 제자들을 꾸짖으시고는 당신 곁에 모인 어린아이들을 차례차례 모두 안아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주십니다.
본문말씀은 어린이의 일이 모든 일보다 가장 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어린아이들보다 바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던 예수님의 행적 역시 사실은 엄청난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어린이를 위한 일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큰일이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위하여 하신 예수님의 행위를 본문은 세 가지로 간단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복을 빌라, 둘째는 가르치라, 셋째는 어린아이들로부터 배우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교훈입니다.
먼저, 축복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은 복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을 청하는 행위, 복을 내리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대사람들은 복을 비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마을에 특별히 존경받는 랍비나 어떤 훌륭한 분이 들어서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저 어른을 쳐다보아라. 얼마나 훌륭한 분이냐?"라고 말하면서 자녀들로 그러한 분들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지도록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에게 다가가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어 복을 빌어줄 것을 간청합니다. 물론 랍비와 같이 훌륭한 분들은 어린아이들을 차례차례 만나서 머리에 손을 얹고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유대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풍속이 있어왔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여러분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어떤 본을 보이고 있습니까? 지금은 '나는 자녀에게 어떤 본을 보였는가'를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평소 저와 친분이 두터운 장로님에게 가슴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그분의 자녀 하나가 탈선을 해서 교회에 안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큰 말썽을 부리는 문제아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였던지 저에게 그의 아들을 만나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그 장로님이 다니는 교회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 분쟁으로 교인들이 서로 패를 나누어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장로님댁에 매일같이 교인들이 모여서 남들을 비난하곤 했습니다. 목사가 어떻고 장로가 어떻고 누가 어떻고, 비난하는 소리들을 하도 듣다보니 그 당시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학생으로서 여간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인과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른들은 물론이요 교회마저 곱게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문제아가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라도 어린아이들이 듣는 데서 누구를 비방하지 마십시오. 특히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에 대하여는 절대 금기입니다. 쉽게 내뱉는 한마디로 아이들의 운명이 결딴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지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의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십시오.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평소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본 일도 들어본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소리뿐입니다. 대통령도 욕하고 길가는 사람도 욕합니다. 자녀가 누구를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의 머리 속에는 존경이라는 말의 개념조차 서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바로 성장할 것입니까? 문제가 심각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존경심이 필요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역시 존경심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무릇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너희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해라.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네 어머니들은 "제발 너희 아버지만은 닮지 마라"라고 합니다. 이러니 무슨 교육이 되겠습니까? 아버지 역시 아이들에게 "너희 어머니는 왜 늘 저모양이냐?"하고 낯을 찌푸립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어머니의 말을 잘 듣겠습니까? 이렇듯 존경을 잃어버린 사회와 가정에는 어떤 축복도 임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존경심을 가르치고 우러르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복을 받고자 하는 그 자세, 축복을 구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복을 간구하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도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에게 복을 빌어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뒤늦게 돌아온 에서가 남은 복은 없느냐고 하며 울부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 빌고 복 받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성경에 나타난 말씀을 통하여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한다고 하지만 아버지 자신이 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에게 복을 내려주십사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축복의 선포가 있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이다마는 네 생명은 내가 준 것이 아니요, 출생도 성장도 운명도 모두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각자의 노력과 수고보다는 하나님의 절대 은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복으로 지금의 내가 있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어야만 너의 미래도 열릴 것이다" ----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은총을 간청하는 이 아름다운 기도, 즉 축복의 선포는 바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요, 삶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축복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위탁하고, 이를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와 그 크신 사랑과 보호와 은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령한 축복의 의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먹거리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복을 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신에 대한 정체의식(正體意識)을 자각하게 됩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내 정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나의 나됨(self- identity)에 대한 의문을 바로 그 축복 안에서 풀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터득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절망하는 일없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을 받는 자세로, 복을 받을만한 그릇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위탁받은 천국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할 것입니다. 내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할 것입니다. 또한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실망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은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엄히 말씀합니다 ----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절대로 실망을 주지 않도록 좋은 본만을 보이면서 소중히 키워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증오와 시기와 싸움과 다툼을 보여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너무나도 잘 울어서 울보라고 불리는 계집아이가 있었습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아무리 달래도 그칠 줄을 모르고 온종일 웁니다. 흔히 아이들은"엄마, 엄마"라고 하면서 울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는 참으로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웁니다. "이년아, 이년아"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평소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야단칠 때마다 "이년아, 이년아"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배운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볼 이야기입니다.
모름지기 아이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생각만을 심어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언행이 아름다워야만 합니다. 들어본 일이 없는데 아름다운 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린아이는 어른의 언행을 그대로 배워서 똑같이 할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보면 그 부모님을 알 수 있다고 학교의 선생님들은 말합니다. 부모님을 안 만나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아이들이란 부모님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본을 보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진실한 모습, 그리스도인다운 life style--삶의 모습과 그 방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살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봉사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다니면서 같이 봉사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과는 달리 옛날에는 거지들이 가정집에 먹을 것을 얻으러 많이 왔었습니다. 사람들은 줄 수 있는 만큼의 쌀이라든지 옷가지를 내어주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어른들의 심부름으로 거지들에게 쌀을 내다주곤 했습니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 일을 항상 저에게만 시켰습니다. 언제나 제가 쌀바가지를 들고 가서 그들의 자루에 부어주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봉사는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무릇 봉사란 아이들과 함께 함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께로 바르게 인도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우리는 이것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일이 잘될 때에는 찬송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는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모습을 저들의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겨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머니'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우리의 아이들은 '어머니'하면 무엇을 생각할 것 같습니까? '어머니'하면 나를 위해서 늘 기도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납니까? 그렇게 생각될 것 같습니까? 아니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아버지와 싸우는 모습이 떠오릅니까? 훌륭한 어머니란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마음속에 어떤 그림을 그려주고 있느냐에 따라서 훌륭한 어머니일 수도 있고 추한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이 한 가지만 가지고도 모든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셋째, 어린이로부터 배우라고 합니다. 여기서 배운다고 함은 childish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유치해지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childlike---어린아이와 같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신뢰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전적으로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모든 사람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순수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실망감과 노여움을 안겨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배신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에 대하여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부모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천국 백성된 기본자세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의심이 없습니다. 천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꿈에 살아갑니다. 그들은 꿈을 잘 꿉니다. 무한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동화가 통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꿈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꿈은 현실보다 강합니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강합니다.
신화는 역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망은 경험을 이겨냅니다. 이렇듯 사랑에 대한 환상적 신뢰야말로 모든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을, 나아가서는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숨겨진 엄청난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에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혹은 어머니의 무릎에 쪼그리고 앉아서 불편하게 잠자는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편안히 누우면 더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사실 어머니의 등이나 무릎에 기대어 자는 것이 우리의 눈에는 불편해 보여도 그들에게는 더없이 편한 것입니다. 무릇 아이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야 잘 수가 있습니다. 자다가도 손을 뻗쳐서 어머니를 만지고, 어머니의 체온과 사랑을 확인해야만 만족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확인하고 살아갑니까? 어린아이들은 결코 교만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선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전적으로 믿고 사랑할 뿐입니다. 사랑중심의 세계관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 없는 단 한순간도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린아이들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도 어렸을 때에는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믿음이 시간과 함께 변색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믿음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을 때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이제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 산타클로스의 모습으로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린아이들은 가슴으로 듣고 마음으로 배웁니다.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치를 따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으로 듣고 배우며, 그 안에서 성장할 뿐입니다. 아이들은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을 받는 깨끗한 그릇으로 자랄 수 있도록 소중하게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복을 주십사 하고 간구하던 어머니들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천국 백성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들을 축복합시다.
칼럼니스트 반 부렌(Van Buren)이 지은「부모의 기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오, 하나님. 저로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제 자녀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듣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질문에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하여주옵소서. 저로 하여금 그들의 생각을 가로막거나 꾸짖지 말게 하시고, 그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거나 실수를 할 때에 비웃지 않도록 하여주옵소서. 그리고 제 자신의 만족이나 권위를 내세우려고 그들을 나무라는 일이 없도록 하여주옵소서. 매순간마다 저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정직함이 옳음을 알려줄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제가 기분이 언짢을 때에 저의 입술을 지켜주시고, 그들이 어린이라는 것과 그들이 어른과 같이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들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회를 허락할 수 있도록 저에게 참을성을 주시고 그들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저를 정직하고 바르며 친절한 부모가 되게 하여주시고, 들에게 존경받고 본이 되는 부모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여러분, 아이들의 잘못을 나무라십니까?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라십니까? 훌륭한 자식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잠깐 멈추시고 먼저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훌륭한 부모가 있어야 훌륭한 자식이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축복 받을 수 있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부모가 되게 하여주십시오'라고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아이들이 훌륭한 자녀로 성장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어린이에게 축복을(마가복음 10장 13절~16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지난 4월 25일 오후 2시경, 인천에서 열두 살된 어린이가 15층 아파트의 창문을 열고 35미터 아래로 떨어져 숨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년밖에 안된 그 어린이가 자살한 이유는 73점에 그친 4월 총괄평가의 성적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비관하여 자살을 결심하고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그에게는 먹을 것이 부족한 것도 입을 것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니요 형제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친구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습니다. 부모, 형제, 선생님, 친구, 그리고 이 사회가 그에게 가르친 바가 무엇입니까? 그 어린이의 마음속에 심어준 세계관, 가치관, 행복관, 삶의 의미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랑도 성공도 보람도 그리고 삶의 의미까지도 모두가 자신의 성적에 달렸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이는 성적이 올라가면 그에 따라서 모든 것이 주어지고, 성적이 떨어지면 성공도 행복도 없고 심지어는 살 필요조차도 없다고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평소 부모가 그에게 뭐라고 말했기에 이런 행동을 했겠습니까? 이것은 육체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마는 정신적으로는 이밖에도 얼마나 많은 어린이가 벌써 몇 차례나 이 같은 자살과 자해행위를 하고 있는지, 또한 얼마나 스스로 절망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위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 나라의 도처에는 퍽 많은 고아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아원에 수용된 고아 가운데 42퍼센트나 부모가 있는 어린이라고 합니다. 오직 8퍼센트의 어린이만이 부모가 없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부모님이 죽음으로써 고아가 되고 수용시설에 맡겨졌습니다 마는 요즘의 고아는 단지 돌볼 사람이 없어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엄연히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버려져서 고아가 되고, 문제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고아를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가출과 자살까지는 안갔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소외되어 고민하고 희생당하는 어린이들을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절망과 반항과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어린아이들의 오늘의 절망은 내일의 폭력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도덕의 원인도 여기에 있습니다.
구세군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지는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는 슬하에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가면서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일꾼들로 성장했습니다. 캐서린 여사가 세계적으로 모든 사람의 눈에 위대하게 비친 원인은 남편을 위한 내조에도 있었지만, 이보다는 여덟 명의 자녀 모두를 그렇듯 훌륭하게 키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사에게 교육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여사의 대답은 담담하고 명료했습니다. "언제나 악마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나쁜 습관을 배우기 전에 좋은 습관을 먼저 가르치고, 악마가 나쁜 생각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좋은 생각을 가르치고, 악마가 나쁜 지혜를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치고, 악마가 사단의 거짓과 위선과 악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마음속에 악마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배우게 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야 합니다.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체로 경건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자 순교자인 폴리캅(Polycarp)도 아홉 살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또한 주석가 메튜 헨리(Mathew Henry) 역시 열한 살 때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설교가이자 목사님인 스퍼젼(Spurgeon)도 열두 살 때 영적인 자각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는 다들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요즘에 나온 한 조사결과도 어렸을 적에 체험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줍니다. 그 조사결과에 따르면 예수믿는 사람 가운데 85퍼센트가 스무 살 이전에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흔히 어렸을 때에는 아직 사물에 대하여 잘 모르고, 사고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도 복음을 듣고, 영적 체험을 하고, 중생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일생을 바꾸어놓는다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어린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주시는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된 우리가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해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어떤 마을을 총총히 지나시고 계실 때, 그 마을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께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주시기를 간청했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제자들이 꾸짖거늘(13절)"----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자 귀찮아서 꾸짖었을까요? 생각해보십시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붙들고 이야기하고 복을 빌고 하는 일보다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더 크고 중요한 일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은 시간만 빼앗기는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소홀히 여겼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중입니다. 심각한 각오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입니다. 제자들은 이처럼 바쁘고 고된 상황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빼앗길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꾸짖고 물리친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눈앞에 가시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복을 빌어준다고 당장 눈앞에 어떤 확실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변화는 이삼십 년 뒤에나 나타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에 관한 한 전부가 그렇습니다. 눈에 띄게 당장 얻어지는 효과는 없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쳐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에 보면 서로 장난질이나 하고 돌아다니지 가르치는 내용을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해보십시오. 줄줄 잘도 대답합니다. 장난치면서도 들을 것은 다 듣습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고개도 끄덕이고 간혹 '아멘'을 외치며 모두 이해하는 것처럼 듣습니다마는 막상 물어보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어른과 어린이의 다른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이들을 조급하게 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조급히 생각하면 당장은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같이 조급한 생각을 가졌기에 사람들을 꾸짖어 물리친 것입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망하시고 분노하셨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14절)"----이렇듯 제자들을 꾸짖으시고는 당신 곁에 모인 어린아이들을 차례차례 모두 안아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주십니다.
본문말씀은 어린이의 일이 모든 일보다 가장 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어린아이들보다 바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던 예수님의 행적 역시 사실은 엄청난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어린이를 위한 일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큰일이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위하여 하신 예수님의 행위를 본문은 세 가지로 간단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복을 빌라, 둘째는 가르치라, 셋째는 어린아이들로부터 배우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교훈입니다.
먼저, 축복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은 복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을 청하는 행위, 복을 내리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대사람들은 복을 비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마을에 특별히 존경받는 랍비나 어떤 훌륭한 분이 들어서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저 어른을 쳐다보아라. 얼마나 훌륭한 분이냐?"라고 말하면서 자녀들로 그러한 분들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지도록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에게 다가가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어 복을 빌어줄 것을 간청합니다. 물론 랍비와 같이 훌륭한 분들은 어린아이들을 차례차례 만나서 머리에 손을 얹고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유대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풍속이 있어왔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여러분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어떤 본을 보이고 있습니까? 지금은 '나는 자녀에게 어떤 본을 보였는가'를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평소 저와 친분이 두터운 장로님에게 가슴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그분의 자녀 하나가 탈선을 해서 교회에 안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큰 말썽을 부리는 문제아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였던지 저에게 그의 아들을 만나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그 장로님이 다니는 교회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 분쟁으로 교인들이 서로 패를 나누어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장로님댁에 매일같이 교인들이 모여서 남들을 비난하곤 했습니다. 목사가 어떻고 장로가 어떻고 누가 어떻고, 비난하는 소리들을 하도 듣다보니 그 당시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학생으로서 여간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인과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른들은 물론이요 교회마저 곱게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문제아가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라도 어린아이들이 듣는 데서 누구를 비방하지 마십시오. 특히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에 대하여는 절대 금기입니다. 쉽게 내뱉는 한마디로 아이들의 운명이 결딴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지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의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십시오.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평소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본 일도 들어본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소리뿐입니다. 대통령도 욕하고 길가는 사람도 욕합니다. 자녀가 누구를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의 머리 속에는 존경이라는 말의 개념조차 서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바로 성장할 것입니까? 문제가 심각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존경심이 필요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역시 존경심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무릇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너희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해라.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네 어머니들은 "제발 너희 아버지만은 닮지 마라"라고 합니다. 이러니 무슨 교육이 되겠습니까? 아버지 역시 아이들에게 "너희 어머니는 왜 늘 저모양이냐?"하고 낯을 찌푸립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어머니의 말을 잘 듣겠습니까? 이렇듯 존경을 잃어버린 사회와 가정에는 어떤 축복도 임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존경심을 가르치고 우러르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복을 받고자 하는 그 자세, 축복을 구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복을 간구하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도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에게 복을 빌어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뒤늦게 돌아온 에서가 남은 복은 없느냐고 하며 울부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 빌고 복 받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성경에 나타난 말씀을 통하여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한다고 하지만 아버지 자신이 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에게 복을 내려주십사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축복의 선포가 있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이다마는 네 생명은 내가 준 것이 아니요, 출생도 성장도 운명도 모두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각자의 노력과 수고보다는 하나님의 절대 은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복으로 지금의 내가 있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어야만 너의 미래도 열릴 것이다" ----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은총을 간청하는 이 아름다운 기도, 즉 축복의 선포는 바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요, 삶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축복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위탁하고, 이를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와 그 크신 사랑과 보호와 은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령한 축복의 의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먹거리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복을 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신에 대한 정체의식(正體意識)을 자각하게 됩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내 정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나의 나됨(self- identity)에 대한 의문을 바로 그 축복 안에서 풀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터득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절망하는 일없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을 받는 자세로, 복을 받을만한 그릇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위탁받은 천국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할 것입니다. 내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할 것입니다. 또한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실망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은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엄히 말씀합니다 ----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절대로 실망을 주지 않도록 좋은 본만을 보이면서 소중히 키워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증오와 시기와 싸움과 다툼을 보여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너무나도 잘 울어서 울보라고 불리는 계집아이가 있었습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아무리 달래도 그칠 줄을 모르고 온종일 웁니다. 흔히 아이들은"엄마, 엄마"라고 하면서 울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는 참으로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웁니다. "이년아, 이년아"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평소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야단칠 때마다 "이년아, 이년아"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배운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볼 이야기입니다.
모름지기 아이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생각만을 심어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언행이 아름다워야만 합니다. 들어본 일이 없는데 아름다운 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린아이는 어른의 언행을 그대로 배워서 똑같이 할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보면 그 부모님을 알 수 있다고 학교의 선생님들은 말합니다. 부모님을 안 만나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아이들이란 부모님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본을 보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진실한 모습, 그리스도인다운 life style--삶의 모습과 그 방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살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봉사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다니면서 같이 봉사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과는 달리 옛날에는 거지들이 가정집에 먹을 것을 얻으러 많이 왔었습니다. 사람들은 줄 수 있는 만큼의 쌀이라든지 옷가지를 내어주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어른들의 심부름으로 거지들에게 쌀을 내다주곤 했습니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 일을 항상 저에게만 시켰습니다. 언제나 제가 쌀바가지를 들고 가서 그들의 자루에 부어주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봉사는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무릇 봉사란 아이들과 함께 함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께로 바르게 인도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우리는 이것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일이 잘될 때에는 찬송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는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모습을 저들의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겨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머니'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우리의 아이들은 '어머니'하면 무엇을 생각할 것 같습니까? '어머니'하면 나를 위해서 늘 기도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납니까? 그렇게 생각될 것 같습니까? 아니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아버지와 싸우는 모습이 떠오릅니까? 훌륭한 어머니란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마음속에 어떤 그림을 그려주고 있느냐에 따라서 훌륭한 어머니일 수도 있고 추한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이 한 가지만 가지고도 모든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셋째, 어린이로부터 배우라고 합니다. 여기서 배운다고 함은 childish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유치해지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childlike---어린아이와 같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신뢰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전적으로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모든 사람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순수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실망감과 노여움을 안겨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배신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에 대하여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부모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천국 백성된 기본자세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의심이 없습니다. 천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꿈에 살아갑니다. 그들은 꿈을 잘 꿉니다. 무한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동화가 통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꿈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꿈은 현실보다 강합니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강합니다.
신화는 역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망은 경험을 이겨냅니다. 이렇듯 사랑에 대한 환상적 신뢰야말로 모든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을, 나아가서는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숨겨진 엄청난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에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혹은 어머니의 무릎에 쪼그리고 앉아서 불편하게 잠자는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편안히 누우면 더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사실 어머니의 등이나 무릎에 기대어 자는 것이 우리의 눈에는 불편해 보여도 그들에게는 더없이 편한 것입니다. 무릇 아이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야 잘 수가 있습니다. 자다가도 손을 뻗쳐서 어머니를 만지고, 어머니의 체온과 사랑을 확인해야만 만족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확인하고 살아갑니까? 어린아이들은 결코 교만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선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전적으로 믿고 사랑할 뿐입니다. 사랑중심의 세계관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 없는 단 한순간도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린아이들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도 어렸을 때에는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믿음이 시간과 함께 변색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믿음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을 때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이제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 산타클로스의 모습으로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린아이들은 가슴으로 듣고 마음으로 배웁니다.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치를 따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으로 듣고 배우며, 그 안에서 성장할 뿐입니다. 아이들은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을 받는 깨끗한 그릇으로 자랄 수 있도록 소중하게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복을 주십사 하고 간구하던 어머니들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천국 백성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들을 축복합시다.
칼럼니스트 반 부렌(Van Buren)이 지은「부모의 기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오, 하나님. 저로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제 자녀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듣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질문에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하여주옵소서. 저로 하여금 그들의 생각을 가로막거나 꾸짖지 말게 하시고, 그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거나 실수를 할 때에 비웃지 않도록 하여주옵소서. 그리고 제 자신의 만족이나 권위를 내세우려고 그들을 나무라는 일이 없도록 하여주옵소서. 매순간마다 저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정직함이 옳음을 알려줄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제가 기분이 언짢을 때에 저의 입술을 지켜주시고, 그들이 어린이라는 것과 그들이 어른과 같이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들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회를 허락할 수 있도록 저에게 참을성을 주시고 그들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저를 정직하고 바르며 친절한 부모가 되게 하여주시고, 들에게 존경받고 본이 되는 부모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여러분, 아이들의 잘못을 나무라십니까?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라십니까? 훌륭한 자식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잠깐 멈추시고 먼저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훌륭한 부모가 있어야 훌륭한 자식이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축복 받을 수 있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부모가 되게 하여주십시오'라고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아이들이 훌륭한 자녀로 성장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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