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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창세기 33장 1절~10절)

by 【고동엽】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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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창세기 33110)

 

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두 화가가 '마음의 평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나는 깊은 산골에 은빛으로 빛나는 잔잔한 호수를 그리고, 하나는 천둥 같은 소리로 떨어지는 폭포 옆에 서 있는 한 그루 자작나무 가지 위에 울새(robin) 한 마리가 물보라를 맞으면서 동요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두 그림의 어느 쪽이 '평화'를 더 잘 나타낸 것 같습니까?

인간의 불행은 행복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모르면서 그것을 찾아 산다는 데 있습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복이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막연히 그것을 추구하면서 온 생을 바칩니다. 여기에 불행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일생을 통하여 성공, 실패, 역경의 숱한 곡절을 겪으면서 진정한 복을 알아나가는 것입니다.

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이란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내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미처 깨닫지는 못합니다. 다만, 시간 시간 경험하며 깨달으며 공부하며 정말로 내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어떤 길로 가야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배우며 깨달으며 맡겨진 생을 살아갑니다. 복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살다가 그대로 죽어 가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 이것이 복이었구나! 이것이 행복이었구나!'라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남겨진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끝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야곱의 일생은 축복을 받고자, 축복을 쟁취하고자 애쓴 생이었습니다. 아마도 복을 추구하는 데에 야곱처럼 철저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피나는 노력을 다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복을 추구한 사람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야곱은 복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하여 복을 배워 가는 하나의 pilgrim으로, 순례자로 생을 산 것입니다.

창세기 47장을 보십시오.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에, 바로는 그에게 묻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었나이다(9)."

야곱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얻어내려고 아버지를 속이지 않았습니까? 눈이 어두운 이삭 앞에서 야곱은 장자인 에서 행세를 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장자 에서인 줄로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그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복은 하나님께로서 오고,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 복을 빈다----야곱은 이것을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진정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막연할 따름입니다. 형이 받을 복을 속임수로 가로챘지만, 결국은 에서의 증오를 삼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됩니다. 그 당시에 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하란으로 향하는 도중, 광야에서 돌을 베개삼아 노숙까지 합니다. 광야에서 혼자 하룻밤을 지내는 것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여기서 복의 두 번째 개념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장자의 축복을 가로챔으로 복을 받은 줄로 믿었는데, 결국 형 때문에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집을 떠나 위험한 광야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도무지 살아남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복이란 무엇이냐? 살아남는 것이다'라고요. 그렇습니다.

살아남는 것이 복입니다. 야곱의 생각이 이에 미친 것 같습니다.

하란에 도착하여 외삼촌 라반을 만난 야곱은 어느 정도 안정을 얻게 됩니다. 그는 아리따운 여인 라헬을 만나 반하고 맙니다.

라헬은 라반의 둘째딸입니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는 것이 복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리하여 요샛말로 '환상적인' 연애를 합니다. 라헬을 아내로 취하고자 라반 밑에서 7년 동안 봉사를 합니다. 그러나 7년이 되는 날에 그가 아내로 맞은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그는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하여 라반의 밑에서 7년을 더 봉사합니다. 결국 야곱은 14년 동안의 머슴살이 끝에 라헬과 결혼할 수 있게 됩니다. 7년 세월이 짧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연애하는 까닭에 야곱은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얼마나 라헬을 사랑했던지 그녀와 결혼만 하면, 그녀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라헬과 사는 것이 진정 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해서 14년 간의 열애 끝에 드디어 라헬을 얻지만 그녀와의 생활도 그리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지나친 질투심으로 많이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라헬과의 결혼도 진정한 복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으로 야곱이 생각한 복의 개념은 물질이었습니다. 부가 곧 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모으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함으로 큰 부를 쌓습니다. 넉넉한 가정과 많은 자식, 수많은 종들과 가축을 거느리는 대가족의 추장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깨닫습니다. 평화가 복이라는 것을. 화평이 복이라는 것을. 형 에서와 원수지고 하란에 와서 20, 이제는 안정된 것 같은데 마음에는 아직도 기쁨이 없습니다. 마침내 그는 원점으로 돌아가 형과 화목하기 전에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화평만이 복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화평이 진정한 복임을 깨달은 야곱은 에서에게 잘못을 빌기 위하여 먼저 사자를 보냅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자신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전갈을 접하게 됩니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합니다. 화목을 이루려고 했는데, 자신이 없어집니다. 형이 나를 죽이러 오는 것인지 살리러 오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불안에 접니다. 그 많은 재산도 소용없습니다.

라헬도 이 시간에는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더없이 외로워집니다. 그는 얍복강변에 홀로 앉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화평이 먼저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화평이 first prior-ity인 것입니다. 화평이 있고야 복이 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야곱은 깨달은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잘 보십시오. 20년만에 형 에서와 아우 야곱이 만나고 있습니다. 원수되어 20년을 보낸 터수로되 이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원수가 아닌 혈육으로 만나게 됩니다. 20년 동안 원수로 지내다가 이제야 형제로서 만나 화목하게 되는 그 감격적인 순간을 본문은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4)"다고 말씀합니다.

이 화목의 시간을 위하여 앞서 야곱이 한 일이 있습니다. 먼저, 얍복강변에서 밤새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미련도 소유욕도 버렸습니다. 모든 세속적인 것을 다 떨쳐버리고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만납니다. 야곱은 진정 고독한 순간에 홀로 하나님과 만난 것입니다. 마침내 야곱의 마음속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증오가 용서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두려워하던 마음이 이제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집니다. 20년만에 형제가 만나는 그 화평의 시간 이전에 야곱의 마음속에 먼저 화평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브라디라는 아주 불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 이를 목격한 사람의 고발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목사님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됩니다. 지난날을 돌이키며 다 회개합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놈이다. 내 죄가 너무 크기에 죽어 마땅하다'라고 스스로 결론 내립니다. 사형선고를 받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가운데 나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사형집행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지워버리지 못하는 증오의 감정이 한 가닥 남아 있습니다. 아무 이해관계도 없이 자기를 고발한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내 신세가 이렇게 까지는 안되었을 텐데……' 기도하고 회개하면서도 자꾸만 이 생각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었습니다.

사형집행 바로 전날, 한 수녀가 브라디를 찾아왔습니다. 수녀는 그에게 말합니다. "브라디씨, 나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브라디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용서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무조건 용서해야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꼭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합니다. "좋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은 우리 오빠를 죽였습니다. 내가 아무리 당신을 용서하려고 해도 용서할 수가 없었는데, 당신을 만나고야 비로소 당신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다." 순간, 브라디는 호된 충격을 받고 눈을 감았습니다. 한참만에 입을 엽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제는 저도 나를 고발한 그 사람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먼저 용서해야 했습니다. 용서받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야곱의 마음 속에 있는 증오의 감정부터 하나님 앞에 깨끗이 청산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변에서 밤을 새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용서하셨기에 지난 20년 동안을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벧엘(Bethel)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31:13)"----네가 피난의 길을 갈 때, 네가 죄를 짓고 쫓겨날 때에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네가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네가 증오를 사고 있을 때에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너를 용서했고 지금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엄청난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그 은혜 가운데 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로소 그는 형을 용서합니다. 나아가 형을 용서함으로 그는 다시 용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야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하셨음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내가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식솔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에서 앞에 나아가 절을 하는 모습이 본문말씀에 있습니다. 에서가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하고 묻자,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5)"라고 야곱은 대답합니다.

또 야곱이 정성을 다하여 바친 선물을 보고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라고 물었을 때에도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8)"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노력, 어떤 수모도 다 뒤로 돌리고 여기 이 자리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형님의 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이것이 바로 야곱의 고백입니다. 지금 야곱은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깨끗하게 포기했습니다. 모름지기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은 백 퍼센트 자기 입장을 포기할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 앞에 엎드려 일곱 번 절합니다. 여기에는 얼마를 잘했고, 얼마를 못했다고 하는 어떤 변명도 없습니다. 엎드려 일곱 번 절을 할 뿐입니다. 그럼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홉즈(Hobbes, Thomas)는 저서 정치 철학론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잡은 싸움의 세 가지 주된 원인의 첫째는 경쟁심이요, 둘째는 불신이요, 셋째는 명예다.' 그렇습니다. 경쟁심이란 조금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경쟁 해봐야 서로가 망하고 말 뿐입니다. 불신 역시 그렇습니다. 나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명예는 어떻습니까? 명예는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서로 싸워서 명예를 얻으려 하기 때문에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 나타난 야곱을 보십시오. 20년만에 형님과 만나는 이 자리에는, 이 순간에는 어떤 경쟁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불신도 없습니다. 자존심도 명예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나아가 엎드려 일곱 번 절할 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화평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일곱 번 엎드려 절한 이 사건 자체가 기도의 응답이요, 기도 가운데서 얻은 신앙적 용기입니다. 이로써 모나고 강팍하던 에서의 마음도 녹습니다.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감격의 눈물을 홀립니다.

형 에서의 얼굴을 마주하고 감격한 야곱은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것 같사오며(10)"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에서'는 히브리어 '에도움'에서 따온 말로 '붉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피부가 불그스름해서 '에서'로 이름지었다 합니다. 또한 창세기에 나타난대로 에서는 본디 털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털이 많았던지 염소가죽과 혼동할 정도였습니다. 털로 덮인 불그레한 피부에 사막의 메마른 길을 걸어오느라 먼지까지 뒤집어썼으니, 그 모습이 원숭이 사촌쯤으로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형님을 눈이 아닌 가슴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20년 동안 막혔던 담이 무너져 형제간의 화평을 찾는 순간,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뵙는 것 같은 엄청난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할 때의 모습은 천사와 같았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돌에 맞아 죽지 않습니까? 그러나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라고 기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에게는 원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거기서 장차 하늘나라에서 뵙게 될 그리스도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비록 돌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지만, 천사의 마음을 지녔기에 천사의 얼굴로 죽음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 같은 화평이, 평안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신앙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합니다. 자기 십자가 안에서 자기 자신과 화목합니다. 희생의 십자가 안에서 이웃과 화목합니다. 히브리서 1214절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하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화평함이 없이는, 용서함이 없이는 그 많은 기도도 소용없습니다. 허다한 선행도 소용없습니다. 화평이 먼저입니다.

왜 얻고도 기쁨이 없고, 왜 성취하고도 행복이 없고 불안에 떨어야 합니까? 화평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8,9)" --- 화평케 하는 사람(peace maker)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창세기 33110)

 

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두 화가가 '마음의 평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나는 깊은 산골에 은빛으로 빛나는 잔잔한 호수를 그리고, 하나는 천둥 같은 소리로 떨어지는 폭포 옆에 서 있는 한 그루 자작나무 가지 위에 울새(robin) 한 마리가 물보라를 맞으면서 동요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두 그림의 어느 쪽이 '평화'를 더 잘 나타낸 것 같습니까?

인간의 불행은 행복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모르면서 그것을 찾아 산다는 데 있습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복이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막연히 그것을 추구하면서 온 생을 바칩니다. 여기에 불행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일생을 통하여 성공, 실패, 역경의 숱한 곡절을 겪으면서 진정한 복을 알아나가는 것입니다.

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이란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내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미처 깨닫지는 못합니다. 다만, 시간 시간 경험하며 깨달으며 공부하며 정말로 내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어떤 길로 가야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배우며 깨달으며 맡겨진 생을 살아갑니다. 복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살다가 그대로 죽어 가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 이것이 복이었구나! 이것이 행복이었구나!'라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남겨진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끝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야곱의 일생은 축복을 받고자, 축복을 쟁취하고자 애쓴 생이었습니다. 아마도 복을 추구하는 데에 야곱처럼 철저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피나는 노력을 다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복을 추구한 사람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야곱은 복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하여 복을 배워 가는 하나의 pilgrim으로, 순례자로 생을 산 것입니다.

창세기 47장을 보십시오.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에, 바로는 그에게 묻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었나이다(9)."

야곱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얻어내려고 아버지를 속이지 않았습니까? 눈이 어두운 이삭 앞에서 야곱은 장자인 에서 행세를 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장자 에서인 줄로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그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복은 하나님께로서 오고,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 복을 빈다----야곱은 이것을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진정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막연할 따름입니다. 형이 받을 복을 속임수로 가로챘지만, 결국은 에서의 증오를 삼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됩니다. 그 당시에 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하란으로 향하는 도중, 광야에서 돌을 베개삼아 노숙까지 합니다. 광야에서 혼자 하룻밤을 지내는 것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여기서 복의 두 번째 개념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장자의 축복을 가로챔으로 복을 받은 줄로 믿었는데, 결국 형 때문에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집을 떠나 위험한 광야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도무지 살아남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복이란 무엇이냐? 살아남는 것이다'라고요. 그렇습니다.

살아남는 것이 복입니다. 야곱의 생각이 이에 미친 것 같습니다.

하란에 도착하여 외삼촌 라반을 만난 야곱은 어느 정도 안정을 얻게 됩니다. 그는 아리따운 여인 라헬을 만나 반하고 맙니다.

라헬은 라반의 둘째딸입니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는 것이 복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리하여 요샛말로 '환상적인' 연애를 합니다. 라헬을 아내로 취하고자 라반 밑에서 7년 동안 봉사를 합니다. 그러나 7년이 되는 날에 그가 아내로 맞은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그는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하여 라반의 밑에서 7년을 더 봉사합니다. 결국 야곱은 14년 동안의 머슴살이 끝에 라헬과 결혼할 수 있게 됩니다. 7년 세월이 짧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연애하는 까닭에 야곱은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얼마나 라헬을 사랑했던지 그녀와 결혼만 하면, 그녀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라헬과 사는 것이 진정 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해서 14년 간의 열애 끝에 드디어 라헬을 얻지만 그녀와의 생활도 그리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지나친 질투심으로 많이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라헬과의 결혼도 진정한 복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으로 야곱이 생각한 복의 개념은 물질이었습니다. 부가 곧 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모으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함으로 큰 부를 쌓습니다. 넉넉한 가정과 많은 자식, 수많은 종들과 가축을 거느리는 대가족의 추장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깨닫습니다. 평화가 복이라는 것을. 화평이 복이라는 것을. 형 에서와 원수지고 하란에 와서 20, 이제는 안정된 것 같은데 마음에는 아직도 기쁨이 없습니다. 마침내 그는 원점으로 돌아가 형과 화목하기 전에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화평만이 복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화평이 진정한 복임을 깨달은 야곱은 에서에게 잘못을 빌기 위하여 먼저 사자를 보냅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자신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전갈을 접하게 됩니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합니다. 화목을 이루려고 했는데, 자신이 없어집니다. 형이 나를 죽이러 오는 것인지 살리러 오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불안에 접니다. 그 많은 재산도 소용없습니다.

라헬도 이 시간에는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더없이 외로워집니다. 그는 얍복강변에 홀로 앉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화평이 먼저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화평이 first prior-ity인 것입니다. 화평이 있고야 복이 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야곱은 깨달은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잘 보십시오. 20년만에 형 에서와 아우 야곱이 만나고 있습니다. 원수되어 20년을 보낸 터수로되 이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원수가 아닌 혈육으로 만나게 됩니다. 20년 동안 원수로 지내다가 이제야 형제로서 만나 화목하게 되는 그 감격적인 순간을 본문은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4)"다고 말씀합니다.

이 화목의 시간을 위하여 앞서 야곱이 한 일이 있습니다. 먼저, 얍복강변에서 밤새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미련도 소유욕도 버렸습니다. 모든 세속적인 것을 다 떨쳐버리고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만납니다. 야곱은 진정 고독한 순간에 홀로 하나님과 만난 것입니다. 마침내 야곱의 마음속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증오가 용서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두려워하던 마음이 이제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집니다. 20년만에 형제가 만나는 그 화평의 시간 이전에 야곱의 마음속에 먼저 화평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브라디라는 아주 불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 이를 목격한 사람의 고발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목사님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됩니다. 지난날을 돌이키며 다 회개합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놈이다. 내 죄가 너무 크기에 죽어 마땅하다'라고 스스로 결론 내립니다. 사형선고를 받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가운데 나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사형집행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지워버리지 못하는 증오의 감정이 한 가닥 남아 있습니다. 아무 이해관계도 없이 자기를 고발한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내 신세가 이렇게 까지는 안되었을 텐데……' 기도하고 회개하면서도 자꾸만 이 생각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었습니다.

사형집행 바로 전날, 한 수녀가 브라디를 찾아왔습니다. 수녀는 그에게 말합니다. "브라디씨, 나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브라디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용서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무조건 용서해야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꼭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합니다. "좋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은 우리 오빠를 죽였습니다. 내가 아무리 당신을 용서하려고 해도 용서할 수가 없었는데, 당신을 만나고야 비로소 당신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다." 순간, 브라디는 호된 충격을 받고 눈을 감았습니다. 한참만에 입을 엽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제는 저도 나를 고발한 그 사람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먼저 용서해야 했습니다. 용서받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야곱의 마음 속에 있는 증오의 감정부터 하나님 앞에 깨끗이 청산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변에서 밤을 새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용서하셨기에 지난 20년 동안을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벧엘(Bethel)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31:13)"----네가 피난의 길을 갈 때, 네가 죄를 짓고 쫓겨날 때에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네가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네가 증오를 사고 있을 때에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너를 용서했고 지금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엄청난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그 은혜 가운데 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로소 그는 형을 용서합니다. 나아가 형을 용서함으로 그는 다시 용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야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하셨음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내가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식솔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에서 앞에 나아가 절을 하는 모습이 본문말씀에 있습니다. 에서가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하고 묻자,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5)"라고 야곱은 대답합니다.

또 야곱이 정성을 다하여 바친 선물을 보고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라고 물었을 때에도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8)"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노력, 어떤 수모도 다 뒤로 돌리고 여기 이 자리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형님의 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이것이 바로 야곱의 고백입니다. 지금 야곱은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깨끗하게 포기했습니다. 모름지기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은 백 퍼센트 자기 입장을 포기할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 앞에 엎드려 일곱 번 절합니다. 여기에는 얼마를 잘했고, 얼마를 못했다고 하는 어떤 변명도 없습니다. 엎드려 일곱 번 절을 할 뿐입니다. 그럼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홉즈(Hobbes, Thomas)는 저서 정치 철학론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잡은 싸움의 세 가지 주된 원인의 첫째는 경쟁심이요, 둘째는 불신이요, 셋째는 명예다.' 그렇습니다. 경쟁심이란 조금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경쟁 해봐야 서로가 망하고 말 뿐입니다. 불신 역시 그렇습니다. 나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명예는 어떻습니까? 명예는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서로 싸워서 명예를 얻으려 하기 때문에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 나타난 야곱을 보십시오. 20년만에 형님과 만나는 이 자리에는, 이 순간에는 어떤 경쟁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불신도 없습니다. 자존심도 명예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나아가 엎드려 일곱 번 절할 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화평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일곱 번 엎드려 절한 이 사건 자체가 기도의 응답이요, 기도 가운데서 얻은 신앙적 용기입니다. 이로써 모나고 강팍하던 에서의 마음도 녹습니다.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감격의 눈물을 홀립니다.

형 에서의 얼굴을 마주하고 감격한 야곱은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것 같사오며(10)"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에서'는 히브리어 '에도움'에서 따온 말로 '붉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피부가 불그스름해서 '에서'로 이름지었다 합니다. 또한 창세기에 나타난대로 에서는 본디 털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털이 많았던지 염소가죽과 혼동할 정도였습니다. 털로 덮인 불그레한 피부에 사막의 메마른 길을 걸어오느라 먼지까지 뒤집어썼으니, 그 모습이 원숭이 사촌쯤으로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형님을 눈이 아닌 가슴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20년 동안 막혔던 담이 무너져 형제간의 화평을 찾는 순간,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뵙는 것 같은 엄청난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할 때의 모습은 천사와 같았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돌에 맞아 죽지 않습니까? 그러나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라고 기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에게는 원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거기서 장차 하늘나라에서 뵙게 될 그리스도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비록 돌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지만, 천사의 마음을 지녔기에 천사의 얼굴로 죽음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 같은 화평이, 평안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신앙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합니다. 자기 십자가 안에서 자기 자신과 화목합니다. 희생의 십자가 안에서 이웃과 화목합니다. 히브리서 1214절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하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화평함이 없이는, 용서함이 없이는 그 많은 기도도 소용없습니다. 허다한 선행도 소용없습니다. 화평이 먼저입니다.

왜 얻고도 기쁨이 없고, 왜 성취하고도 행복이 없고 불안에 떨어야 합니까? 화평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8,9)" --- 화평케 하는 사람(peace maker)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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