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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고난의 당위성과 필연성(마태복음 16장 21절~23절)

by 【고동엽】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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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당위성과 필연성(마태복음 162123)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당대 절색이요 동정녀인 아빌라의 테레사 성녀는 야고보 사도와 더불어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추앙 받는 성인입니다. 그녀가 한번은 나귀 수레를 타고 순례의 길을 나섰습니다. 시골길로 들어서서 개천을 건너게 되었는데, 나귀의 한 발이 물 속의 돌부리에 미끄러져 껑충 뛰는 바람에 성녀는 공중제비가 되어 개천바닥에 나둥그러졌습니다. 엉망진창이 되어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성녀는 그답지 않은 소리를 입밖에 냅니다. 잔뜩 골이 나서 하늘 쪽을 쳐다보고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친구 대접이 겨우 이 꼴이란 말입니까? 그래서 당신께는 그렇듯 친구가 적단 말이예요!" 테레사 성녀는 그 후, 이 일을 두고 일생토록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고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이 정말 우리의 하나님이십니까? 당신이 정말 저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당신은 저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침묵하실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해주시지 않습니다. 제발, 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주십시오." 그리고 이런 원망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생각하는 시간에, 제가 바라는 욕망대로, 제가 원하는 소원대로 이루어주십시오. 이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저는 당신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존재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어리석은 골부림입니까? 얼마나 미련한 원망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이런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나의 현실이 이럴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겨우 이것이냐 하고, 현실 속에서 자기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불평합니다.

여러분, 깊이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사건은 사실대로 믿음으로부터 사건화하는 것입니다. 사건(fact)과 사건화(actualization)는 서로 다릅니다. 믿음으로써만 사건(事件)이 사건화(事件化)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 여기 있다 해도 내가 모르거나 내게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믿지 아니한다면, 그 일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가령, 집에 불이 났을 때에도 이것을 믿는 사람만이 불난 것과 관계가 있을 뿐,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분사(焚死)해도 그 화재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건이란 그 사건을 믿음으로써만 사건화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과 신앙 사건(faith event)은 엄연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지혜도 내가 알고 내가 믿는 만큼만 나에게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고 합니다. 안 계시다면 어떻게 이 우주가 생기고 서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벌써 다 없어졌지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지 않는다, 내게 벌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다면 벌써 다 벼락이라도 맞아 죽었지 한 사람이라도 살아 남았겠습니까?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 밖에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내가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데에, 내가 그것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당신을 못박는 그 무서운 시간에 다음과 같은 귀중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가상칠언(架上七言)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 :34)"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마는 우리가 하나님을 간혹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의 원인, 모든 잘못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르는 것, 그 무지의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은혜 되고 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만 합니다. 엄연히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믿지 않고 이를 모르는 한, 그것은 나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나에게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역사이며, 사랑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결정입니다. 역사 안에 오신 엄청난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도 믿음이 문제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무의미합니다. 내가 믿는 만큼만 나에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 비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탕자가 아버지께 제 몫의 재산을 나누어 받아 가지고 방탕의 길을 떠납니다. 갖은 고생을 하다가 결국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아버지 앞에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변함없이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들의 그런 소리는 들은 체도 않고 즐거워하며 맞아들입니다. 소를 잡아라, 좋은 옷을 입혀라, 반지를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나와 더불어 기뻐하자 하면서 흐드러지게 잔치를 벌입니다. 비로소 그 아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의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유산을 나누어준 것도 사랑입니다. 집을 나가도록 내버려둔 것도 사랑입니다. 집을 나간 뒤에도 꾸준히 그를 기다려주었습니다. 역시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이 엄청난 사랑을 언제 깨닫습니까? 말할 수 없는 고난에 처했을 때, 그 어려운 고통 속에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둘째, 그 아들은 돌아와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신을 위해 벌어진 잔치에 참여해서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영접할 줄 진작에 알았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여기에 이렇게 변함없이 있음을 진작에 알았다면, 그 동안 밖으로 돌며 그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좀더 일찍 돌아왔을 텐데'----좀은 염치없고 부끄러운 대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얼마나 더 방황을 해야 됩니까? 다시 한번 생각할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 때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만족하시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하고 칭찬하십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 동안 동행하면서 그의 말씀과 행하심을 통하여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귀중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고치시는 능력을 보면서 깨닫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목도하면서 깨닫습니다.

그가 물에 빠져들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것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그 군중에게 신이 나서 음식을 나누어주었으며 그 이적의 떡을 내 입으로도 맛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모든 사건, 그 모든 교훈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기중심적(egocentric) 고백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으며, 언젠가는 로마군인들을 다 몰아내고 왕국을 건설해서 이 민족에 자유와 번영을 안겨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나아가 메시야인 예수님께서 그 새로운 왕국의 왕이 되시고, 자신은 그의 결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는 국무총리쯤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극히 세속적인 이런 욕망에 준하여 저러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생각에 매여 있으면서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관이 잡스럽고 세속적이고 빗나간 탓입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개념이 문제되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에는 예수님께서 그 개념을 교정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으로,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메시야관을 설명하심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가느라면 '비로소''이때로부터'라는 두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비로소'는 헬라어 원문에 '엘사토'로 되어 있으며, 이는 '여기서 시작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데서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이때로부터'는 헬라어 원문에 '아포 토테'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한 바로 이 시간부터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에 신앙고백의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신앙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고백으로 복음을 전하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메시야로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로소 '너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21)"----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를 이해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고난은 자원적인 것이요, 자발적인 것입니다. 선택적 고난입니다. 십자가를 이리저리 피하다가 부득이하게 이루어진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길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스스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무지가 낳은 고난이 아닙니다. 저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굳게 결심하시고,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십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통하는 길이요, 부활의 영광으로 통하는 길이요,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고난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이것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 것이요, 구원을 위해서는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피를 홀려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희생의 피가 필요합니다. 피흘림이 없는 사함은 없다고 성경도 말씀합니다. 여러분, 사랑을 해보셨습니까? 사랑을 받아보셨습니까? 사랑의 언어는 희생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사랑의 언어에는 주는 말도 없으며, 듣는 말도 없습니다. 많은 선물이 오가고, 많은 사랑의 행위가 있으되, 희생은 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전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당위성입니다. 여기에 밀알 하나가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여기에 당위성이 있습니다.

또한, 고난의 필연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언된 것으로, 하나님의 엄청난 경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께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고 머무신 목적이 이 사명에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들을 불러서 대화하시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4:25)"----성경에 예언한 것을 왜 곧바로 믿고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자기 욕망이 성경의 진리를 객관적으로 순수하게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깨우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고난의 길을 가고 계시는데, 이 영광의 길을 가고 계시는데 어이없게도 베드로는 이 길을 가로막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자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런 베드로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23)"하고 소리치십니다. 베드로를 가리켜 사단이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도 예수님의 영광도 알고 있으며, 또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아!"라고 단호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제가 아는 성경대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지신 능력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우리의 충성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결하게도 '십자가'라니요, 말도 안됩니다'----베드로는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3)"라고 베드로를 크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선물을 다 주십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아는 길, 받는 길, 깨닫는 길도 고난을 통하여 주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길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고난을 통해서만 얻습니다. 고난이라는 언어를 통하여 비로소 바른 음성을 듣게 됩니다. 시메온 벤 야하이라고 하는 유명한 랍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셨다. '토라''이스라엘땅'과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고난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고난을 통해서야 주시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서 깨닫고, 고난을 통해서 믿고, 고난을 통해서 이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성자 베르나르(Bernard)는 가슴을 치며 탄식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나는 어찌하여 여전히 쾌락만을 즐기고 있는가?' 여러분, 고난의 십자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이렇습니다. 첫째, 고난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우연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필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고난의 의미가 있으며, 고난의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의 필연성이 있고, 당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둘째, 고난은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고난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생명으로,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고난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있음을 알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예수님께서는 이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수용하시고 계십니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 통하며, 이 사랑과 고난은 합동하여 선을 이룹니다. 다만, 나의 깨달음과 나의 믿음만이 문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 여러분, 우리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나야 죽든 살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잘되든 못되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망하든 흥하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 나를 성장케 하시는 하나님의 일,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 큰 구원의 사역, 하나님의 일 안에서 나를 생각할 것입니다. 나의 존재와 현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말에 가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모든 고난, 모든 실패, 모든 역사의 흐름을 다 합쳐서 종말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 모든 고난을 감수하면서 천사의 미소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아무리 복잡한 문제도 이에서 해결을 볼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됨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의 신비로운 의미를 깨닫는 데에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고난의 의미를 어느 만큼 알고 있습니까? 어느 만큼 믿고 있습니까? 고난 당하는 자를 구원하시고자 고난 당하시고, 저주받는 자를 살리시고자 대신 저주받으시고, 죽어 가는 자를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셔야만 했던, 그 고난의 의미를 말입니다.

나로 하여금 신령한 세계로 들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영생 지향적 인생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 귀한 의미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귀한 생명의 역사는 이 순간에도 쉼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당위성과 필연성(마태복음 162123)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당대 절색이요 동정녀인 아빌라의 테레사 성녀는 야고보 사도와 더불어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추앙 받는 성인입니다. 그녀가 한번은 나귀 수레를 타고 순례의 길을 나섰습니다. 시골길로 들어서서 개천을 건너게 되었는데, 나귀의 한 발이 물 속의 돌부리에 미끄러져 껑충 뛰는 바람에 성녀는 공중제비가 되어 개천바닥에 나둥그러졌습니다. 엉망진창이 되어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성녀는 그답지 않은 소리를 입밖에 냅니다. 잔뜩 골이 나서 하늘 쪽을 쳐다보고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친구 대접이 겨우 이 꼴이란 말입니까? 그래서 당신께는 그렇듯 친구가 적단 말이예요!" 테레사 성녀는 그 후, 이 일을 두고 일생토록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고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이 정말 우리의 하나님이십니까? 당신이 정말 저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당신은 저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침묵하실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해주시지 않습니다. 제발, 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주십시오." 그리고 이런 원망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생각하는 시간에, 제가 바라는 욕망대로, 제가 원하는 소원대로 이루어주십시오. 이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저는 당신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존재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어리석은 골부림입니까? 얼마나 미련한 원망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이런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나의 현실이 이럴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겨우 이것이냐 하고, 현실 속에서 자기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불평합니다.

여러분, 깊이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사건은 사실대로 믿음으로부터 사건화하는 것입니다. 사건(fact)과 사건화(actualization)는 서로 다릅니다. 믿음으로써만 사건(事件)이 사건화(事件化)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 여기 있다 해도 내가 모르거나 내게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믿지 아니한다면, 그 일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가령, 집에 불이 났을 때에도 이것을 믿는 사람만이 불난 것과 관계가 있을 뿐,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분사(焚死)해도 그 화재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건이란 그 사건을 믿음으로써만 사건화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과 신앙 사건(faith event)은 엄연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지혜도 내가 알고 내가 믿는 만큼만 나에게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고 합니다. 안 계시다면 어떻게 이 우주가 생기고 서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벌써 다 없어졌지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지 않는다, 내게 벌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다면 벌써 다 벼락이라도 맞아 죽었지 한 사람이라도 살아 남았겠습니까?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 밖에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내가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데에, 내가 그것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당신을 못박는 그 무서운 시간에 다음과 같은 귀중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가상칠언(架上七言)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 :34)"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마는 우리가 하나님을 간혹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의 원인, 모든 잘못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르는 것, 그 무지의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은혜 되고 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만 합니다. 엄연히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믿지 않고 이를 모르는 한, 그것은 나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나에게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역사이며, 사랑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결정입니다. 역사 안에 오신 엄청난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도 믿음이 문제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무의미합니다. 내가 믿는 만큼만 나에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 비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탕자가 아버지께 제 몫의 재산을 나누어 받아 가지고 방탕의 길을 떠납니다. 갖은 고생을 하다가 결국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아버지 앞에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변함없이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들의 그런 소리는 들은 체도 않고 즐거워하며 맞아들입니다. 소를 잡아라, 좋은 옷을 입혀라, 반지를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나와 더불어 기뻐하자 하면서 흐드러지게 잔치를 벌입니다. 비로소 그 아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의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유산을 나누어준 것도 사랑입니다. 집을 나가도록 내버려둔 것도 사랑입니다. 집을 나간 뒤에도 꾸준히 그를 기다려주었습니다. 역시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이 엄청난 사랑을 언제 깨닫습니까? 말할 수 없는 고난에 처했을 때, 그 어려운 고통 속에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둘째, 그 아들은 돌아와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신을 위해 벌어진 잔치에 참여해서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영접할 줄 진작에 알았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여기에 이렇게 변함없이 있음을 진작에 알았다면, 그 동안 밖으로 돌며 그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좀더 일찍 돌아왔을 텐데'----좀은 염치없고 부끄러운 대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얼마나 더 방황을 해야 됩니까? 다시 한번 생각할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 때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만족하시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하고 칭찬하십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 동안 동행하면서 그의 말씀과 행하심을 통하여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귀중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고치시는 능력을 보면서 깨닫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목도하면서 깨닫습니다.

그가 물에 빠져들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것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그 군중에게 신이 나서 음식을 나누어주었으며 그 이적의 떡을 내 입으로도 맛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모든 사건, 그 모든 교훈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기중심적(egocentric) 고백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으며, 언젠가는 로마군인들을 다 몰아내고 왕국을 건설해서 이 민족에 자유와 번영을 안겨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나아가 메시야인 예수님께서 그 새로운 왕국의 왕이 되시고, 자신은 그의 결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는 국무총리쯤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극히 세속적인 이런 욕망에 준하여 저러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생각에 매여 있으면서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관이 잡스럽고 세속적이고 빗나간 탓입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개념이 문제되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에는 예수님께서 그 개념을 교정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으로,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메시야관을 설명하심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가느라면 '비로소''이때로부터'라는 두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비로소'는 헬라어 원문에 '엘사토'로 되어 있으며, 이는 '여기서 시작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데서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이때로부터'는 헬라어 원문에 '아포 토테'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한 바로 이 시간부터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에 신앙고백의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신앙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고백으로 복음을 전하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메시야로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로소 '너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21)"----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를 이해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고난은 자원적인 것이요, 자발적인 것입니다. 선택적 고난입니다. 십자가를 이리저리 피하다가 부득이하게 이루어진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길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스스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무지가 낳은 고난이 아닙니다. 저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굳게 결심하시고,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십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통하는 길이요, 부활의 영광으로 통하는 길이요,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고난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이것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 것이요, 구원을 위해서는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피를 홀려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희생의 피가 필요합니다. 피흘림이 없는 사함은 없다고 성경도 말씀합니다. 여러분, 사랑을 해보셨습니까? 사랑을 받아보셨습니까? 사랑의 언어는 희생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사랑의 언어에는 주는 말도 없으며, 듣는 말도 없습니다. 많은 선물이 오가고, 많은 사랑의 행위가 있으되, 희생은 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전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당위성입니다. 여기에 밀알 하나가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여기에 당위성이 있습니다.

또한, 고난의 필연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언된 것으로, 하나님의 엄청난 경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께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고 머무신 목적이 이 사명에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들을 불러서 대화하시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4:25)"----성경에 예언한 것을 왜 곧바로 믿고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자기 욕망이 성경의 진리를 객관적으로 순수하게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깨우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고난의 길을 가고 계시는데, 이 영광의 길을 가고 계시는데 어이없게도 베드로는 이 길을 가로막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자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런 베드로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23)"하고 소리치십니다. 베드로를 가리켜 사단이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도 예수님의 영광도 알고 있으며, 또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아!"라고 단호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제가 아는 성경대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지신 능력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우리의 충성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결하게도 '십자가'라니요, 말도 안됩니다'----베드로는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3)"라고 베드로를 크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선물을 다 주십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아는 길, 받는 길, 깨닫는 길도 고난을 통하여 주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길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고난을 통해서만 얻습니다. 고난이라는 언어를 통하여 비로소 바른 음성을 듣게 됩니다. 시메온 벤 야하이라고 하는 유명한 랍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셨다. '토라''이스라엘땅'과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고난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고난을 통해서야 주시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서 깨닫고, 고난을 통해서 믿고, 고난을 통해서 이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성자 베르나르(Bernard)는 가슴을 치며 탄식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나는 어찌하여 여전히 쾌락만을 즐기고 있는가?' 여러분, 고난의 십자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이렇습니다. 첫째, 고난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우연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필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고난의 의미가 있으며, 고난의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의 필연성이 있고, 당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둘째, 고난은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고난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생명으로,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고난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있음을 알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예수님께서는 이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수용하시고 계십니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 통하며, 이 사랑과 고난은 합동하여 선을 이룹니다. 다만, 나의 깨달음과 나의 믿음만이 문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 여러분, 우리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나야 죽든 살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잘되든 못되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망하든 흥하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 나를 성장케 하시는 하나님의 일,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 큰 구원의 사역, 하나님의 일 안에서 나를 생각할 것입니다. 나의 존재와 현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말에 가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모든 고난, 모든 실패, 모든 역사의 흐름을 다 합쳐서 종말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 모든 고난을 감수하면서 천사의 미소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아무리 복잡한 문제도 이에서 해결을 볼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됨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의 신비로운 의미를 깨닫는 데에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고난의 의미를 어느 만큼 알고 있습니까? 어느 만큼 믿고 있습니까? 고난 당하는 자를 구원하시고자 고난 당하시고, 저주받는 자를 살리시고자 대신 저주받으시고, 죽어 가는 자를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셔야만 했던, 그 고난의 의미를 말입니다.

나로 하여금 신령한 세계로 들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영생 지향적 인생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 귀한 의미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귀한 생명의 역사는 이 순간에도 쉼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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