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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원인과 결과를 통한 심판의 논증(2)(3:3-8)

by 【고동엽】 2022. 4. 16.

제15강 원인과 결과를 통한 심판의 논증(2)(3:3-8)

 

3:3-8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지난 시간에 이어서 3:3∼8의 말씀을 한 절 한 절 읽어가면서 그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3절 말씀입니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어떤 사람은 여기에 나오는 두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로 해석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출애굽과 선택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서로 의합하고 함께 동행한다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3:1∼2 말씀에 출애굽과 선택에 대해서 나오지요.
(암3:1∼2)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온 족속을 쳐서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또 다른 견해로는 여기에 등장하는 두 사람을 하나님과 아모스로 보기도 합니다. 곧 선지자 아모스의 말씀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중에 전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명히 말씀해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아모스는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수도 없이 보아왔을 것입니다. 광야에는 사나운 짐승이 많이 있습니다. 사자도 있고, 곰도 있습니다. 5:19 말씀을 보십시다.
(암5: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또 광야에서는 강도를 당할 위험도 있습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혼자 다니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길을 갈 때는 언제나 서로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여럿이 함께 걸어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서로 만나서 함께 여행하는 것이 그 당시에 하나의 관례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아무튼 서로 동행하는 일을 위해서 우선 서로 의합하는 일이 있음을 아모스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4절 말씀으로 넘어갑니다.
(3:4)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사자가 부르짖을 때는 무엇인가 움킨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사자가 부르짖는 법이 없습니다. 사자는 자기 손아귀에 먹이를 쥐고서 찢기 바로 전에 포효합니다. 드고아의 목자였던 아모스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사자가 먹이를 잡고 난 뒤에 부르짖는다는 사실을 터득했습니다. 사자가 부르짖을 때는 그 손에 먹이가 잡혀 있고, 잠시 뒤에는 그 먹이의 몸이 갈래갈래 찢겨서 사자의 입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아모스의 눈에는 사자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짐승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잡혀서 잠시 잠깐 뒤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이 선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땅에 더 이상 사자가 없을 것입니다만 구약 시대만 해도 사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몇 구절만 찾아봅니다.
(삿14:5)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 지르는지라
(삼상17: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왕하17:25) 저희가 처음으로 거기 거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한 고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 가운데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성경에 보면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로 비유한 경우가 종종 등장합니다.
(욜3:16)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그러나 나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암1:2)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암3: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사자가 부르짖을 때 반드시 희생당할 먹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심판의 경고를 발하실 때도 반드시 심판받을 당사자가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3:5)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창애라고 하는 것은 새를 잡는 덫입니다. 그 가운데 미끼를 놓아서 새가 그것을 건드리면 창애가 양쪽에서 솟아올라 그 속에 새를 가두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도 역시 원인과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창애가 있으니까 그 안에 새가 치이는 것이고, 또 새가 치이니까 창애가 땅에서 뛰어오른다는 것입니다.
아모스가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재앙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원인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가 치이면 창애가 뛰어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범죄하게 되면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창애가 새를 잡듯이 하나님께서 필경은 죄를 벌하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새를 이스라엘로 보고, 창애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만 억지로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아모스는 일반적인 사실을 통해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6절 상반부입니다.
(3:6)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당시 사람들은 성을 쌓고 성안에 살았습니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위에서 파수꾼이 나팔을 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적군이 몰려온다는 뜻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성읍에서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퍼지게 될 때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아모스가 노리는 효과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들도 이제는 내가 부는 심판의 나팔 소리를 듣고 당연히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 하반부를 보시겠습니다.
(3:6)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6절 하반부는 6절 상반절에 대한 이유입니다. 어떻게 해서 성읍이 적군으로 둘러싸이는 재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누구의 시키심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시키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해보면 순서적으로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은 재앙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시키심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우리 개인에게, 우리 가정에 어떤 재앙이 임하게 될 경우에 한번 그 일을 묵상하면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 멀리 이국땅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죄악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해 후에 그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큰 궁핍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큰 궁핍을 통해서 탕자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네 아버지에게 돌아가라. 네가 왜 여기서 궁핍한 생활을 하느냐? 네 아버지에게 돌아가라." 이러한 음성이 아니겠습니까? 전에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을 하고 니느웨로 가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다시스로 갔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풍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요나야, 네가 가는 그 길은 잘못된 길이다. 너의 길을 돌려라. 회개하라." 이러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어떠한 재앙이 닥칠 경우 그 재앙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듣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내가 너무 교만하지 않았나? 내가 너무 세상일에 분주해서 하나님을 멀리 하지는 않았나? 이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봅니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는 먼저 심판을 경고하시지도 않고 즉흥적으로 성읍에 재앙을 내리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재앙을 내리기 전에 먼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하나님은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미리 소돔과 고모라에 임할 재앙을 알려주셨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심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요나에게 그 사실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종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서 이미 이스라엘에게 내릴 심판의 경고로 2:13∼16에 있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심판의 경고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한때 우리 나라에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와서 이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잘못 해석해서 물의를 빚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날과 그 시를 자기들에게는 이미 다 가르쳐주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본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본문이 말씀해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그 종들을 통해서 회개를 재촉하신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종말을 고할 그날이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미리 특정인에게만 가르쳐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24:36)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은 알리시지만, 어떤 것은 일부러 우리를 위해서 알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느냐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비밀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일 사람이 자기가 죽을 때를 미리 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밥맛도 떨어지고 일하기도 싫고 온식구가 둘러앉아서 한숨만 내쉬고 있을 것입니다. 또 어린애가 한밤중에 배가 아파서 죽는다고 떼굴떼굴 굴러도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너는 아직 죽을 때가 안되었어. 좀 참아라." 그러면서 병원에 안 데리고 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를 모른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때를 모르기 때문에 늘 그때를 소망하면서 기다리는 기쁨 속에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시느냐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지 않는 것은 언제라도 늘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깨어 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8절 말씀으로 넘어갑니다.
(3: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에 보여주어야 할 마땅한 반응이 두 가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4절에 있는 말씀처럼 단순히 가상적으로 사자의 부르짖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실제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는 실제로 사자가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자가 부르짖을 때는 이미 먹이가 그 손아귀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자는 1:2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심판의 음성을 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부르짖으셨기 때문에 이미 그 먹이가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잡혀 있고, 이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선지자는 예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메시지는 우주의 주재 되시는 하나님이 발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중차대한 말씀을 무시하고 선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비록 자신에게 어떠한 위협이 닥칠지 모르지만, 또 자기의 말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짢게 생각할 것이 뻔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턱대고 심판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잘못이 있기에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범죄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징계를 당할 때에, 우리가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깨닫게 되면 즉시 그 길에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징계를 통해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점검하면서, 여러분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바르게 유지되고 있는가? 아직도 내가 회개하지 않은 죄악이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는가?" 있다면 이 시간 빠짐없이 다 회개하고 자유함을 누리시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기시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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