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강 다니엘이 벨사살에게 나아옴(5:13-16)
5:13-16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바벨론의 벨사살 임금이 태후로부터 다니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에게 사람을 보내서 즉시 연회장으로 오라고 일렀습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입고 왕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을 때 바벨론 박사들이 꿈을 알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박사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을 왕에게 인도해 주고 소개해 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리옥의 역할을 이번에는 누가 한 것입니까? 태후가 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받아서 왕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니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마음이 착잡했을 것입니다. 지금 바벨론 도성 밖에는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공격하기에 앞서서 적당한 시간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궁에서는 연회를 베풀고 귀인들 천 명과 왕의 왕후들과 수많은 왕의 첩들이 그곳에서 술 파티를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술 냄새, 음식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거기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거룩한 기명들이 더러는 그 속에 술이 담겨 있었을 것이고, 더러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왕궁 촛대 옆에 있는 왕에게 걸어가면서 다니엘의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착잡했을까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다니엘이 왕 앞에 나왔습니다. 벨사살 임금이 다니엘을 알고 있었겠습니까?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모를 리가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 때 바벨론 온 도성을 다스리는 바벨론의 총리 대신이었고, 거기다가 바벨론 모든 박사들의 어른이었는데 벨사살이 다니엘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왕궁에서는 틀림없이 왕의 이름으로 잔치에 오라고 다니엘에게 초청장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거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왕이 오라고 했으니까 가서 술을 마시는 대신에 음료수나 생수를 마시면 될 것이 아니냐? 또 바벨론 신들을 찬양하지 않고, 숭배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될 것 아니냐?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다니엘이 그 사람들 가운데 있어다면, 그 술잔치에 참석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다니엘을 찾겠습니까? "그 사람도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인데"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다니엘이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다니엘을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름철에는 모든 나무가 푸르기 때문에 송죽의 절개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서 찬바람이 불고 백설이 온 천지를 뒤덮을 때는 송죽의 절개가 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 바른 신앙의 사람은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더욱더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깨끗한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석탄을 캐는 탄광에 한번 들어갔다 나와보세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커멓게 검댕이가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니엘은 가서는 안될 자리에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가서는 안될 자리에는 아예 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약합니다. 어두움에 물들지 말고 어두울수록 더욱더 빛을 발하고 부패한 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다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 다음을 보세요. 왕이 다니엘에게 말을 합니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태후는 왕에게 다니엘을 소개할 때 그런 식으로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11절 말씀을 한번 보세요.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만약 그 소개대로 벨사살이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바벨론 모든 박사들의 어른으로 삼은 그 다니엘이냐?" 이렇게 말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벨사살 임금은 다니엘을 경시하고 깔보는 말을 했습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추억, 치욕적인 조국의 과거를 기억나게 했습니다.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다니엘은 일개 포로 출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거기다가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에게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까? 바벨론 식 이름인 벨드사살이라고 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계속해서 다니엘의 이름을 바벨론 식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히브리 식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법관이시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이 다니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존경해서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기명에 술을 마시면서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바벨론 식 이름으로 안 부르고 계속해서 히브리어 식 이름을 부르겠습니까? 자기 이름이 무엇입니까? 벨사살입니다. 다니엘의 바벨론 식의 이름이 벨드사살입니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히브리 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벨사살이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다니엘을 존중하고 다니엘의 말에 경청해서 다니엘의 조언대로 신앙적으로 나아갔었더라면 어려운 일들을 안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무시하고 교만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결국은 자기도 망하고, 자기 나라도 망해 버리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중세에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전해 내려옵니다. 수도원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이 많이 왕래했던 이름난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수도원이 썰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이 풍성하던 수도원에 찬바람이 쌩쌩 불고 서로가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반목, 질시하는 수도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썰렁한 수도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도원 원장이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지혜로운 현자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우리 수도원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현자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당신네 수도원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못 알아봐서 그렇다."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현자가 한 말이 수도원 안에 쫙 퍼졌습니다.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미워하고 있던 저 사람이 혹시 육신의 모양을 입고 있는 하나님이 아닐까?" 그때부터 서로 대하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전에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했는데 이제는 달라져서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이 사람이, 나와 대화하고 있는 이 사람이 하나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수도원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사랑을 다시 찾았습니다. 따뜻한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사람들이 많이 그 수도원을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누구를 대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대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 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두 가지만 생각하십시다. 첫째로, 다니엘처럼 어둠에 물들지 말고, 가서는 안될 자리에 가지 말고,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누구를 대하든지 간에,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 우리 성도들을 대할 때 내가 지금 주님을 만나고 있다는 심정으로 사랑과 존경으로 잘 대해주고 우리를 겸손히 낮출 수 있는 하루가 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바벨론의 벨사살 임금이 태후로부터 다니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에게 사람을 보내서 즉시 연회장으로 오라고 일렀습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입고 왕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을 때 바벨론 박사들이 꿈을 알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박사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을 왕에게 인도해 주고 소개해 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리옥의 역할을 이번에는 누가 한 것입니까? 태후가 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받아서 왕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니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마음이 착잡했을 것입니다. 지금 바벨론 도성 밖에는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공격하기에 앞서서 적당한 시간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궁에서는 연회를 베풀고 귀인들 천 명과 왕의 왕후들과 수많은 왕의 첩들이 그곳에서 술 파티를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술 냄새, 음식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거기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거룩한 기명들이 더러는 그 속에 술이 담겨 있었을 것이고, 더러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왕궁 촛대 옆에 있는 왕에게 걸어가면서 다니엘의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착잡했을까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다니엘이 왕 앞에 나왔습니다. 벨사살 임금이 다니엘을 알고 있었겠습니까?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모를 리가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 때 바벨론 온 도성을 다스리는 바벨론의 총리 대신이었고, 거기다가 바벨론 모든 박사들의 어른이었는데 벨사살이 다니엘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왕궁에서는 틀림없이 왕의 이름으로 잔치에 오라고 다니엘에게 초청장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거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왕이 오라고 했으니까 가서 술을 마시는 대신에 음료수나 생수를 마시면 될 것이 아니냐? 또 바벨론 신들을 찬양하지 않고, 숭배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될 것 아니냐?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다니엘이 그 사람들 가운데 있어다면, 그 술잔치에 참석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다니엘을 찾겠습니까? "그 사람도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인데"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다니엘이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다니엘을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름철에는 모든 나무가 푸르기 때문에 송죽의 절개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서 찬바람이 불고 백설이 온 천지를 뒤덮을 때는 송죽의 절개가 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 바른 신앙의 사람은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더욱더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깨끗한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석탄을 캐는 탄광에 한번 들어갔다 나와보세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커멓게 검댕이가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니엘은 가서는 안될 자리에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가서는 안될 자리에는 아예 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약합니다. 어두움에 물들지 말고 어두울수록 더욱더 빛을 발하고 부패한 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다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 다음을 보세요. 왕이 다니엘에게 말을 합니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태후는 왕에게 다니엘을 소개할 때 그런 식으로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11절 말씀을 한번 보세요.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만약 그 소개대로 벨사살이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바벨론 모든 박사들의 어른으로 삼은 그 다니엘이냐?" 이렇게 말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벨사살 임금은 다니엘을 경시하고 깔보는 말을 했습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추억, 치욕적인 조국의 과거를 기억나게 했습니다.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다니엘은 일개 포로 출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거기다가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에게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까? 바벨론 식 이름인 벨드사살이라고 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계속해서 다니엘의 이름을 바벨론 식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히브리 식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법관이시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이 다니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존경해서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기명에 술을 마시면서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바벨론 식 이름으로 안 부르고 계속해서 히브리어 식 이름을 부르겠습니까? 자기 이름이 무엇입니까? 벨사살입니다. 다니엘의 바벨론 식의 이름이 벨드사살입니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히브리 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벨사살이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다니엘을 존중하고 다니엘의 말에 경청해서 다니엘의 조언대로 신앙적으로 나아갔었더라면 어려운 일들을 안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무시하고 교만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결국은 자기도 망하고, 자기 나라도 망해 버리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중세에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전해 내려옵니다. 수도원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이 많이 왕래했던 이름난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수도원이 썰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이 풍성하던 수도원에 찬바람이 쌩쌩 불고 서로가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반목, 질시하는 수도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썰렁한 수도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도원 원장이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지혜로운 현자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우리 수도원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현자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당신네 수도원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못 알아봐서 그렇다."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현자가 한 말이 수도원 안에 쫙 퍼졌습니다.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미워하고 있던 저 사람이 혹시 육신의 모양을 입고 있는 하나님이 아닐까?" 그때부터 서로 대하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전에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했는데 이제는 달라져서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이 사람이, 나와 대화하고 있는 이 사람이 하나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수도원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사랑을 다시 찾았습니다. 따뜻한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사람들이 많이 그 수도원을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누구를 대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대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 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두 가지만 생각하십시다. 첫째로, 다니엘처럼 어둠에 물들지 말고, 가서는 안될 자리에 가지 말고,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누구를 대하든지 간에,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 우리 성도들을 대할 때 내가 지금 주님을 만나고 있다는 심정으로 사랑과 존경으로 잘 대해주고 우리를 겸손히 낮출 수 있는 하루가 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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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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