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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강) 선택은 정말 중요합니다! (창 13:9-18)

by 【고동엽】 2022. 4. 12.

(제26강)    선택은 정말 중요합니다! (창 13:9-18)

 

  지난 시간의 말씀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거부가 되어 그의 목자들끼리 싸움이 잦아지고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도 감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너와 나는 한 골육 한 집안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물질의 문제로 이렇게 다투지 말자'(8)고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벌써 90세가 넘은 노인입니다. 그러나 그의 조카 롯은 젊은 청년입니다. 때로는 웃어른으로서 조카 롯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또 노여움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젊디젊은 아랫사람이 연로하신 어른을 그렇게 무시하고 감히 대들 수가 있는가? 저놈이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부자가 되었는데 이런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이런 섭섭한 마음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감정을 억제합니다. 노여움도 거둡니다. 물질보다는 혈육을 더 중히 여기고 사랑한 것입니다. 재산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또 없다가도 생길 수 있지마는 혈육을 잃는다면 그것은 다시 얻지 못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는 엉망진창이 되어도 돈만 손에 쥐면 최고 인줄로 알고 삶을 낭비하고 잠 못 이루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은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재산의 분쟁으로 불안을 일으켜 거부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양보하면서 화평을 도모함으로 재산 적으로는 손해가 될지 모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길을 택했습니다. /할/
  인생은 선택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부단히 선택하며 삽니다. 사람을 선택하고, 믿음의 대상을 선택하고, 직업을 선택합니다. 인생길에서 누구와 함께 살며, 무엇을 하고 살며, 어떤 신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재 모습은 지나간 과거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복하다면 과거에 행복한 것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믿/ 그러나 우리가 지금 불행하다면  과거에 불행한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생각이 결과를 낳는 것처럼 선택도 결과를 낳습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영원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택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선택을 잘하면 행복하고, 선택을 잘못하면 불행합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전 인류를 죄와 사망의 고통아래 살게 했습니다.
  성경에 선택을 잘 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맛본 사람이 룻입니다. 나오미가 롯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 롯은 어머니 나오미를 선택하여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이방 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였고, 이방 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나중에 보아스와 결혼하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됩니다. /할/
  인생은 '어떤 사람을 선택하며, 어떤 장소를 선택하며, 어떤 때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선을 선택할 것인가? 악을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인생은 결정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한 순간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선택은 우리가 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우리를 만들어 나갑니다. 기억하십시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영원합니다. ◀제목소개!▶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지난 시간에 배운 대로 목자들의 분쟁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면 겸손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해결방안을 내 놓습니다.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완전히 기득권의 포기입니다. 삼촌의 권위로 조카를 얼마든지 쫓아낼 수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자기가 좋은 것을 차지할 수도 있고, 조카를 더 나쁜 곳으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멋있는 사람입니다. 요사이 이런 사람 보기 드뭅니다. 하나님은 이런 멋쟁이를 더 크게 축복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들판이나, 사막이나, 다 좋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라도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낼 수 있다면 사막도 좋고, 오아시스도 좋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가보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니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면 화평케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높은 신앙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네가 오른쪽을 택하면 내가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내가 오른쪽으로 가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쉽게 생각해 보면 네가 좋은 땅을 차지하면 나는 나쁜 땅이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은 어디서든지 '네가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살아 계신 나의 하나님이 애굽에서도 내 아내를 지켜주시고 나에게 돌려주신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지고 도와주시지 않겠느냐?' 이런 신앙을 바탕으로 귀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내 이웃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져 주시리라는 귀한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여유입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배짱입니다. 손해를 보면서도 짓밟히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이 당당한 사람, 아브라함을 닮아갑시다. /아멘!/
  10절 이하에는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의 선택의 결정과 결과가 나옵니다. 먼저 육의 사람, 아브라함이 이러한 제한에 롯은 얼싸 좋아하고 좋은 편을 선택했습니다.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눈에 보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 보이는 것은 순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안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는 보입니다. 그러나 내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내세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고 잘 알아야 합니다. /할/
  이 땅은 오래 살아야 백년해로입니다. 롯은 보이는 대로 좋은 땅을 선택했습니다. 보이는 것에 의한 결정, 그것은 계산에 의한 결정입니다. 세상 적인 수치를 보면 이것이 현명한 것 같고, 수지맞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수학 법은 여기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보입니까?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은 믿음은 어떠한 역사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히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바라보는 데로 되는 것이요, 믿는 데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할/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보이는 것에 수치가 밝은 사람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건너편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각양각색의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고 시간이 많이 지나 회중에 모인 군중들의 배고픔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그들에게 먹은 것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보이는 데로 정확하게 계산해 보았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밥집도 떡집도 없고 돈을 아무리 거둬도 먹일 수 없다는 결론이 딱 머릿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다는 결론을 했습니다.
  빌립은 보이는 것 현실적인 것을 계산하다가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고, 안드레는 어린아이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일 것을 보았습니다. 빌립은 보이는 숫자에 기초를 두었고, 안드레는 믿음의 숫자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기초를 두고 살겠습니까? 믿음의 수치에 기초를 두고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중동지방에는 물이 귀한 곳입니다. 물이 많다는 것은 땅도 비옥할 뿐만 아니라 한 마디로 생활조건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요단 들을 바라본즉' 여기 '바라본 즉'이란 이 단어가 같은 의미로 쓰여진 것이 꼭 한곳 에 더 나옵니다. 창3:6절을 보세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본즉, 즉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는 그 눈길이 사랑의 눈길이 아닙니다. 뭔가 따먹고 싶어하는 욕망의 눈길입니다.
  이 욕망의 눈길로서 선악과를 바라보다가 곧 그 선악과를 안 따먹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눈길을 가지고 롯이 요단강 동편에 있는 들판을 내려다봅니다. 탐심으로 바라보는 롯의 선택은 그 결과 마지막은 멸망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롯이 바라보는 요단들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물이 넉넉했다.'는 사실입니다. 물이 많다는 것은 농사가 잘 되고 모든 것이 풍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을 생각하게 할 만큼 완벽한 조건과 환경을 갖춘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애굽 땅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롯은 그곳에서 나일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도시문화가 꽃피었던 애굽문명의 편리함과 화려함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렇게 '물댄 동산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그곳은 행복이 보장된 곳'처럼 보여 그곳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 화려한 것에 속지 마세요! 그럴듯한 곳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 땅이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았던 땅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도시요 매력 있는 도시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없는 도시입니다.
  사실 롯의 비극은 아브라함을 떠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왜 아브라함을 떠나는 것이 비극입니까? 아브라함은 축복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여러분! 축 복의 사람을 따라 다니시기를 바랍니다. 또 축복의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면 평생 후회가 없습니다. /할/
  롯은 육신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육신의 눈은 언제나 겉만 봅니다. 겉만 그럴듯하면 마음이 동합니다. 신앙의 사람들도 기도하지 않고 말씀에 깨어있지 않으면 겉만 보고 당장 혹해 버립니다. 세상 적인 계산으로 볼 때는 아주 좋습니다.
  여러분! 세상 적인 쾌락이 얼마나 달콤합니까? 그러나 그곳에 멸망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음을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을 볼 때나 사람을 볼 때 성경 적인 표준으로 영적인 표준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믿/ 오늘 우리 모두 '하나님! 우리의 영안을 밝혀 주소서'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1절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요단 온 들을 택하고" 요단이 어디입니까? 가나안을 벗어나는 변방입니다. 약속의 땅, 언약의 땅, 하나님의 땅을 벗어나는 경계선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세상이 좋아서, 물질이 좋아서, 롯은 한 손에는 하나님을 붙들고, 또 한 손으로 세상을 붙들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롯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일군대로 사는 것이 둘째였고, 세상이 첫째였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그냥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했다'고만 되어 있습니다만 히브리어 원문성경에 보면 롯이 '그 자신을 위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의 부요와 안락을 위해서 하나님의 것을 포기했다는 뉘앙스가 깊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 보다는 자신의 부요와 안락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롯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늘 자신의 행복이 우선이 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신앙노선은 하나님 한 분만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는 신앙입니다.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떠났다는 것은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

 

  ▶12절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 거하였고" 요단강 서편이 진짜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이 어떤 땅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땅, 언약의 땅입니다. 롯은 동으로 기름진 곳으로 갔고, 아브라함은 서편에 거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물이 별로 없는 곳입니다.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이 말은 롯은 평지로 갔고, 아브라함은 산지로 그러니까 '산골짜기, 가파른 곳, 메마른 곳'으로 갔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볼 때는 황막한 땅, 인간적으로 볼 때는 버림받은 땅, 거기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브라함은 갔습니다.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이 말을 원문에 보면 정확하게는 '소돔 근처에 장막을 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소돔성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성 밖에서 살다가 얼마 후에는 결국 성안으로 들어갔고, 그러다가 창14:12절에 보면 '소돔에 거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소돔 사람들의 죄악된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경계도 하고 망설이기도 하다가 결국에는 성안으로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소돔 사람들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성안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롯은 그 소돔성의 죄악된 생활을 보면서도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갔었지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떠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시자 애굽에 내려갔던 것을 후회하고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롯은 소돔성을 멸하실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빨리 그 성에서 빨리 나가라고 '재촉'을 하셨는데도 그 성을 떠나지 않으려고 '지체'했습니다.
  배는 물 위에 떠있어야 합니다. 만약 배가 물 속에 잠기게 된다면 아무리 좋은 배라도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바다만 오염시킬 뿐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세상에 잠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배속에 물이 너무 많이 들어오면 결국에는 배가 물에 잠겨 버리는 것처럼 세상에 잠겨버리면 죄악에 침몰되고 맙니다.
  배는 물이 들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들어오면 그것을 퍼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 롯처럼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 잘못했다고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도 찾아와 간섭해 주셨고 롯도 간섭해 주셨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절대로 그냥 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찾아오시고 간섭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할/
  롯은 한마디로 세속적인 부귀영화 공명과 향락이 끌려 동으로 점점 옮기다가 멸망의 자리, 심판의 자리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나오겠지만 소돔은 죄악의 도시입니다. 롯은 명예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신앙의 세계를 떠나 점점 죄악의 세계로 빠져드는 타락한 성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결과는 비극적으로 끝이 납니다. 롯은 포로 신세가 되었고, 가산의 몰락이 왔으며, 아내와 사위들을 잃어버렸으며, 딸과의 불륜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13절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무슨 말입니까? 심판 받을 날이 곧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고, 애굽 땅처럼 기름지고, 풍성해 보였지만 속을 들어다 볼 때는 유황불이 떨어질 곳이더라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세계, 겉보다는 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긴 안목으로 판단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여러분 지금 돈을 잘 버는 것보다 믿음생활 잘할 수 있는 곳, 순종생활 잘할 수 있는 곳, 여기가 축복의 땅입니다.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입니다. 환경이야 사막 같지만 하나님이 언약하신 약속의 소망이 있으니까 아브라함은 그곳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지금 보이는 제물만 바라보고 은혜를 잊어버리고, 예의를 잃어버리고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그런 욕심으로 가다보니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자리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돌이킬 수 없는 자리로 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아간은 돈 좋아하다가 돌무더기에 파묻혀 죽었고, 게하시도 돈 좋아하다가 문둥이가 되었으며, 발람도 돈 좋아하다가 거짓 선지가가 되어버렸습니다. 발람, 이방 선지자였지만 그가 축복하면, 축복 받고, 저주하면 저주가 임하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이 돈에 눈이 어두워 그 능력을 다 잃어버리고 결국은 칼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당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명예를 얻고 싶었지만 돈 좋아하다가 성령 모독 죄로 사함을 받지 못하고 차례로 줄초상을 당했습니다. 가롯유다도 돈을 좋아하다가 예수 팔아먹고, 천추에 나쁜 이름을 남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빌딩을 자랑하고 부동산 자랑합니다. 그것이 내 집이요, 내 땅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것들이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사는 동안 잠깐 빌려 쓰는 것'입니다. /믿/
  여러분들 세상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착각을 하지 마십시다. 건강도 내 것이 아닙니다. 지식도, 명예도, 재물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시로 우리에게 맡겨두신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언제든지 내 놓아야 합니다. '아하! 하나님이 이런 때에 필요하셔서 이것을 나에게 맡기셨구나!' 이런 믿음이 우리 안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하나님께 내 놓아서 망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 내 것인 줄 착각하고 움켜쥐고 앉아 있다가 엉뚱한 데다 재물 다 날려보내고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롯은 금욕위주의 선택을 했습니다. 요단 들판은 넓기는 하지만 물이 넉넉하여 목축하기엔 가장 알맞은 곳이었습니다. 롯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도 없고 윗사람도 몰라보고 의리니 정의니 하는 것도 없고 오직 자기의 사업을 위해 철면피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물욕이 많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탐심이 많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욕심은 사람을 비굴하게 만듭니다. 사람의 인격과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이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어 복을 주셔야 그 복을 지키며 살 수 있습니다. /믿/아멘!/
  ▶이제 영의 사람 아브라함의 선택의 뒤를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고후4:18절에 보면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주님이 내 앞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의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다음절을 보세요!

 

  ▶14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롯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육신적으로는 대단히 허전합니다. 혈육이라곤 단지 둘이었는데 롯과 헤어졌으니 대단히 허전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순종하게 된 셈입니다.
  창12:1절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인간적인 것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롯이 따라왔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도 떠나갔으므로 하나님과만 교통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조금 외로워야 됩니다. 육신 적으로 좀 외로워야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믿/
  오늘 14절에서는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사건입니다. 역시 우리는 인간적인 도움이 끊어질 때 인간적인 위로가 끊어질 때, 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가난한 마음이 됩니다. 사람은 인간적으로 도움이나 배경이 있으면 하나님보다 그쪽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기도가 게을러지며 신앙도 나태해집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떠나고 나서 더 간절한 마음이 생겼고, 더 가난한 심령이 되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하나님 쪽에서 교제를 시작하십니다.
  여러분! 언제든지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는 인간 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형편을 먼저 아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내 형편과 처지를 먼저 아십니다. 아브라함의 외로움과 허전함을 다 아신 하나님이 오셔서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고 했을 때, 롯이 쭉 살펴보고는 푸른 풀과 물이 넉넉해 보이는 요단 뜰을 택하여 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롯에게 양보하고 기득권을 포기했습니다.
  신앙은 심은 데로 거두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롯에게 심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너는 눈을 들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는 것은 롯이 '눈을 들어'(10)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롯은 자의적으로 보았고 물욕의 눈으로 보았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보았고 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할/
  여기서 '너는 눈을 들라!'는 이 말씀은 인간적인 생각을 접어 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은 우리로 하여금 땅만 바라보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눈을 들어 보아야 합니다. /아멘!/
  여기 '눈을 들어'라고 하셨으니 멀리 넓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또 동서남북이라고 하였으니 그 범위가 제한이 없습니다. 롯은 한 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제한이 없는 무한정한 축복입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의 법칙은 지금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십일조 생활, 봉사생활 할 때, 지금 보이는 것은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은 동서남북을 가리킵니다. /할/
  시간을 드려 봉사하고 물질을 받쳐 봉사하고 이 사람에게, 저 사람에게 예수를 전한다고 피곤한 육신, 눈에 보이는 것은 그리 신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은 곳에서 동서남북을 지금 측량하고 계십니다. /믿어집니까?/
  여러분의 가정의 동서남북을 여십시다. 여러분의 사업과 기업 위에 동서남북 사방을 여기서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할/ 다음절은 하나님의 놀라운 보장입니다.

 

  ▶15절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이 말씀은 사실 아브라함이 본토 아비 집을 떠날 때, 이미 다 약속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걸어갈 때 재확인시켜 주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말씀인대도 우리가 말씀을 순종하여 걸어갈 때 문득, 문득 그 본뜻을 바르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깨달으려면 깨닫게 해 준 만큼 순종해 가야 더 깊이 있게 깨닫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축복이 제한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받았다가 잠깐 후에 없어지면 받지 않은 것 보다 더 섭섭합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잘 살았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가슴 아픈 사람입니다. 옛날이 아니라 지금 현재 잘 살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멘!/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감당할 능력까지도 주십니다. 그 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장구히 누릴 수 있는 은혜까지도 주십니다. 축복은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지키는 것은 더 더욱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물질도, 건강도, 자기 자신이 관리를 잘해야 된다고 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 기본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물질을 지켜주지 않으시면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은 지키고, 누리고, 간직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바라보라고 하실 때, 얼른 바라보고 걸어가라 하실 때, 얼른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15절에 자세히 봐야할 단어가 나옵니다. '주리니, 이르리라'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멘!/

 

  ▶16절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에게 현재 아들도, 딸도 없습니다. 또 나이도 많이 먹었습니다. 아직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땅에 티끌같이 주겠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땅만 받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지배할 후손이 있어야지,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자손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예언대로 아브라함이 자손, 영적인 자손과 육적인 자손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오늘날 50억이 넘는  인구 3분의 1이 예수를 믿습니다. /할/ 또 육신적으로는 왕상3:8절에 보면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이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사실 가나안 땅은 박토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스라엘에 비하면 기름진 옥토랍니다. 우리나라가 한참 보리 고개를 지날 때, 덴마크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시찰을 왔는데 이렇게 좋은 기후와 기름진 옥토를 가지고도 '보리 고개를 당한다니' 그것도 기적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 가나안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하니 '가만히 있어도 젖이 줄줄 흐르고 꿀이 줄줄 흐르는 줄'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땅은 메마른 박토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적당한 비와 바람과 공기를 주셔서 풍년을 약속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멘!/
  보기에는 박토인데도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풍년이 드는 곳, 그곳이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이란 하나님의 간섭이 민감한 곳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신령한 의미로 다 가나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다스림을 잘 받아 크게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대로 믿음으로 걸어갔더니 그대로 다 이루어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한꺼번에 왕창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한꺼번에 자녀가 태어나서 티끌같이 많아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감당을 못합니다. 점점 번성하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 하리라'는 약속대로 되는 축복입니다. /할/

 

  ▶17절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처음에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 땅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종과 횡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바라만 보고 행하지 아니하면 자기 것이 안 됩니다.
  여기 영적인 의미는 '내가 깨달은 진리, 네가 소망하는 진리를 종으로 횡으로 행하면 그 안에 포함한 모든 은혜와 복을 다 네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멘!/
  여기서 '종과 횡'은 무엇인가? 종은 하늘과 땅,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윤리요, 횡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 즉, 하나님께 바로 하고 이웃에게 바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십계명도 먼저 하나님과 관계, 그 다음에 이웃과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은 벧엘에서 헤브론까지 계속 남방으로 내려와" 베들레헴 근방에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하나님의 중심으로 왔습니다. 롯은 세상으로 갔지만 아브라함은 계속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상수리 수풀 근처" 유대 땅은 수풀이 아주 귀합니다. 그런데 수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주거지역으로서는 최고 위치입니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단을 쌓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본업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본업을 삼고 세상일은 부업으로 삼으십시다.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것들이 더해지는 하나님의 약속에 복이 임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현실을 좇아 사는 삶과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삶이 있습니다. 현실주의적인 삶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 있습니다. 현실주의자들이 피를 튀기며 경쟁하는 현실의 땅이 있고 믿음 안에서 꿈을 가진 사람들이 사랑을 구현하며 사는 땅이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의 기준은 무엇을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그의 최후진술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미 시간이 다 되어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살기 위하여! 그러나 우리들 중의 어느 쪽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지는 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가는 길입니다. /믿/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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