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강) 롯의 선택의 결과! (창 14:1-16)
어느 신학교 학년 말 시험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철야기도만 하는 신학생에게 교수가 공부 좀 하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생들은 교수의 말을 듣지 않고 기도만 했습니다. 그 신학생은 주님의 말씀대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린 것이니라'는 말씀만 철석같이 믿고 밤새 기도하고 난 다음, 그 다음날 드디어 시험에 임했습니다.
공부를 안 했으니 시험문제가 알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는 한 문장만 써 놓고 유유히 교실을 빠져나갔습니다. 그의 시험지를 보고 기가 막힌 담당교수는 그 답안지에 '하나님은 다 아시니 100점, 학생은 다 모르니 0점'이라고 채점하여 그 학생에게 주었습니다. 결국 그 학생은 한 학기를 낙제했다고 합니다.
요즈음 '믿음으로 산다'고 자칭하는 일부 신앙 인들이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 합리주의 신앙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하기 싫어 가난하면서도 '하나님은 부자'라 하여 만족해하는 사람, 또 인색하여 헌금을 안 하면서도 '하나님을 내 사정을 잘 아신다'고 하여 위로를 받거나, 또 세상일에 골몰해서 주일을 잘 지키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은 내 바쁜 형편을 다 아실 것'이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믿음으로, 자기 편리한대로 살아가는 신앙 인이 있다면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헷셀 포오드' 목사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에 출석하는 한 청년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목사님에게 이런 부탁을 했답니다. '목사님!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사업을 잘해서 주님 위해 큰일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를 했고, 그 청년은 사업이 번창하여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약속했던 주님을 위한 큰 사업은커녕 십일조도 교회 출석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포오드 목사님이 청년의 사업장을 찾아갔습니다. '왜 십일조를 안 하십니까?'하고 물었더니 '그거야 액면이 커지니까 경영상 십분의 일 떼어내기가 힘이 드는군요' 이번에는 '그럼 교회는 왜 출석하지 않습니까?' '사업이 너무 커져서 여러 군데 사업장을 벌이다 보니까 교회에 가고 싶어도 시간이 나야지요'
이 말은 들은 '헷셀 포오드' 목사님은 그 청년 실업가의 손을 붙잡고 '우리 한번 기도합시다.'하시더니 '하나님! 이 형제의 수입이 너무 커서 십일조 헌금하기가 어렵답니다. 수입의 규모를 줄여서 십일조 떼기에 부담 없게 해 주시고, 또 교회에 출석하고 싶어도 너무 바빠서 못나온답니다. 사업장도 확 줄여서 한가하게 해서 교회에 잘 출석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젊은 사업가는 '목사님! 잘 알았습니다. 이제 열심히 하겠으니 그런 기도는 제발 하지 마세요' 간청하더랍니다.
마11:12절에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였으니 힘써 하나님을 섬기고 힘써 노력하고 사업해서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신학생의 고백은 맞는 고백입니다. 내가 노력 안 하는 것까지도 정말 하나님은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믿/ ◀제목 소개!▶
바벨탑 사건 이후에 분열된 많은 민족들간에 여러 차례의 전쟁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는 전쟁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돔왕과 엘람왕 그돌라오멜' 사이의 전쟁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욕심은 이제 일 개인에 대한 살인에 그치지 않고, 집단 살인 즉 전쟁까지 일으키게 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팔레스틴의 소국들이 12년 간 엘람왕 그돌라 오멜을 섬기다가 조공을 거부한데서 일어났습니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전쟁은 일반 국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한 나라의 군왕이나 통치자의 탐심에 의해 일어났으며 많은 백성들은 그 희생물이 되어 왔습니다.
시저가 그러했고 나폴레옹이 그러했으며 히틀러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양심이 살아 있다면 이들은 영웅으로 숭배 받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가정과 평화를 파괴한 흉악범으로 인류의 도덕 법정에서 정죄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제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겠습니다.
▶1-3절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 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왕의 이름들도 읽기조차 어려운 글자들입니다. 쉽게 풀어보면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땅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우상의 땅에 있지 말고 말씀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가라고 하신 대로 그 땅에 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고, 롯은 가나안을 떠나 물질이 풍부한 곳으로, 세상 적으로 보기 좋은 곳으로 이주를 하였는데 그 땅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쟁은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을 중심으로 네 부족의 왕들이 연합군을 이루어 쳐들어오므로 일어났습니다. 롯이 살고 있는 소돔 땅은 아주 비옥한 땅입니다. 그래서 그 주변에 있던 왕들은 항상 이 소돔과 고모라 평지를 탐내고 있었습니다.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어야 만이 그들의 양식을 제대로 구할 수가 있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왕들은 거창한 나라의 왕들이 아닙니다. 이때는 부족국가로서 십만, 오만 되는 조그마한 성에 왕이 세워졌습니다. 소돔 왕, 고모라 왕 이런 식으로 세워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류최초의 전쟁역사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끊임없이 반목이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반목이 이제는 나라와 나라사이의 싸움으로 발전해 졌습니다.
왜 전쟁이 일어났습니까? 인간의 야심이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이것은 정복욕이라고 합니다. 알렉산더 2세가 자기 아버지보고 '나도 싸워서 땅을 정복할 수 있도록, 아버지는 그만 정복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인간의 욕심은 옆집보다는 내가 나아야 하고, 또 내가 사는 우리 마을이 제일 나아야 하고, 마을이 최고가 되면 내가 사는 나라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다 야망이요, 욕심입니다.
하나님은 주신 바를 족하게 여기라고 하셨는데 인간들의 족하게 여기지 않고 자꾸 허욕을 부립니다. 여기 나오는 전쟁도 그래서 일어난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는 물질이 풍부하여 잘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물질이 풍부한 만큼 죄악도 풍부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물질이 풍부해지면 죄악도 풍부해집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잘 살려고 애를 쓰지만 적당하게 잘 살아야 됩니다. 신앙 안에서 잘 살아야지 그냥 살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됩니다. /할/
로마가 풍부하게 살더니 그만 소돔 고모라가 되어 망해버렸습니다. 여러분, 잘 사는 나라들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래 전에 미국의 한 젊은 청년이 자기의 세 살 난 조카를 성 폭행한 장면을 차량들이 일렬로 서서보고만 있었지 저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양심의 소리는 '이제 썩어질 대로 썩어졌다.'는 한탄이 소리가 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잘 살아보자'라는 말보다는 '옳게 살아보자'는 이 마음이 더 귀한 줄 믿습니다. /아멘!/
나라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잘 살아보자'만 외치면 거기서 한탕주의가 나오고 남이야 죽든 말든 인정 사정없이 흉기를 들어 약탈을 하게 됩니다.
2절 하반 절에 보면 '싸우니라'고 했습니다. 싸움도 전쟁도 비극입니다. 가장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기근과 전쟁과 천재지변'입니다.
롯이 풍요로움과 아름다운 환경을 찾아갔지만 그 풍요로운 물질도 아름다운 환경도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인간의 욕망이 넘쳐 싸움의 장소가 되어져 버렸습니다.
세상을 따라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나도 거기에 동참해 버립니다. 교회를 빼먹고 계니 뭐니 하는 데만 찾아가고, 동창생만 찾아보십시오, 그곳의 이야기가 뻔합니다. 자기들을 나타내는 소리, 자랑하는 소리, 돈 이야기, 놀았던 이야기, 싸움이야기, 잘 먹은 이야기, 누구 벗겨먹은 이야기, 그런 소리를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곳에 빠지게 됩니다. 롯은 세상 적으로 살다가 세상 싸움판에 자기도 모르게 물들어 버렸습니다.
이 전쟁에서 무엇을 말해줍니까?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심판이요, 롯에게는 채찍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심판과 채찍을 가하십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채찍질하실 때에 개인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기근, 전쟁, 온역으로, 소돔과 고모라는 심판의 전쟁으로, 롯에게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주신 것입니다.
세상 중심으로 가면 세상과 함께 매를 맞는다는 것을 알도록 하여 '돌아오라'는 채찍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되면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고 공식입니다. 롯은 하나님의 채찍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다가 결국은 마누라는 소금기둥이 되어버렸고, 그 많은 재산은 몽땅 날리고 알거지가 되어서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상황을 수시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채찍이 슬쩍 때리는 것 같을 때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상처가 적습니다. /아멘!/
▶4절 "이들이 십 이년 동안 그돌라 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 삼 년에 배반한지라"
소돔과 고모라 성, 또 같이 연대했던 나라들이 엘람 왕, 그돌라 오멜에게 12년 동안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 나라가 워낙 강한 나라라 자꾸 쳐들어와 애를 먹임으로 화친조약을 맺어 일 년의 농사를 지은 것을 얼마씩 바치는 것으로 엘람 왕이 봐주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 땅의 나라들이 점점 강성해 집니다. 자기들 생각대로 농사가 잘되고 곡식이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역량이 생기니까 이젠 배짱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쳐들어오면 한판 붙자 생각하고 엘람 왕에게 조공 바치기를 묵살해 버렸습니다.
이들이 독립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잘못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속박 당하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립하고자 할 때는 그 정신과 생활이 바르게 되지 않고는 진정한 독립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용치 않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은 윤리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물질만 가졌다고 해서 자연이 독립이 되어 질 수 없습니다. 요사이 말로 하면 미사일만 좀 가졌다고 해서 까불다가 이라크에 후세인이 미국에게 혼난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GNP가 더 오르고 핵무기를 만들어 내고 그러하면 이북이 꼼짝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의 철병거가 되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시127:1절에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했습니다. /할/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시여'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당신이 이 나라를 지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능력으로 지켰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얼마나 이 민족이 크냐? 그것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이 몇 명이냐를 묻지 않으시고 '의인 열 명이 있느냐?' 그것을 물으셨습니다.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 세례를 받았습니다. 백성들이 많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면 이 나라를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17%만 넘으면 모든 물질이 쉽게 썩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신앙인의 수가 1천 2백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나라 안팎으로 구석구석 썩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아브라함처럼 신령하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으로 자기 이기주의로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에 의인 열 명이 없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그 시대가 병들고 썩었기에 하나님은 심판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할/ 5-9절은 그들의 전쟁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5-9절 "제 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족속을, 사웨기랴다임에서 엠족속을 치고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곧 그 다섯 왕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그돌라오멜의 동맹군들은 파죽지세의 힘으로 르바 족소, 수스 족속, 엠 족속, 호리 족속, 아말렉 족속과 아모리 족속들을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소돔왕과 고모라 왕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다섯 동맹왕들을 치려 하고 있습니다.
8절 '소돔왕과 고모라왕과 아드마왕과 스보임왕과 벨라 곧 소알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일대 대(大)접전이 일어났습니다. 왜 전쟁이 일어났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소돔왕 그룹에서는 12년 동안 억울하게 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돌라오멜의 입장에서는 '이제 좀 네가 컸다고 나에게 반항하는구나. 이 못된 놈!'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양쪽 논리에는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가정의 불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맞고, 부인 말을 들으면 그 말도 맞습니다. 자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소리지르며 가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 나름대로 자식 때문에 가슴앓이 하는 속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이 모든 투쟁, 싸움, 상처의 깊은 곳에는 '죄'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세상에서의 전쟁은 '내'가 살면 '너'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권력을 갖게 되면 그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곧 그 다섯 왕이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과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드디어 접전에서 교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죽거나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전쟁의 비참한 결과입니다.
▶10절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여기 '싯딤 골짜기'늠 '아카시아 골짜기, 급류의 골짜기'란 뜻으로 역청 구더기가 많은 곳입니다. 지금도 그쪽에는 석유가 많이 나는 곳이랍니다. 도로에 포장되어 있는 아스팔트는 굳어서 괜찮지만 액체 상대에 있을 때 밟으면 신발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찐덕 찐덕 합니다.
소돔 왕과 고모라 땅과 그의 연합군이 엘람 왕 그돌라 오멜과 그의 연합군과 싸움하다가 도망을 쳤는데 그만 그 역청구더기에 빠져버렸습니다. 여러분! 그곳은 자기네들의 땅입니다. 군사보호지역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곳 지리를 훤히 잘 아는 곳입니다.
사실은 적을 유인하여 그곳에서 빠뜨리려고 했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파 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저버리고 범죄에 길도 들어가면 내가 제일 좋다고 여겼던 곳에 빠지고 맙니다. 내 머리는 원래 좋아, 하다가 자기 꾀에 빠집니다. 자기의 힘, 지식, 수단, 방법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은 의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나를 의지하며 살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믿/
한마디로 소돔과 고모라 왕이 자기들의 작전지역, 역청구덩이에 빠져 죽었다는 것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간섭이요,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11절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이것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곡식이 아주 잘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양식뿐만 아니라 금은보화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의 의지하고 믿었던 식량, 재물, 모든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이 허무하게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농사를 다 지어 타작을 하면 적들이 와서 빼앗아 가 버렸습니다.
차라리 들에 있을 때 베어 가면 좀 덜하겠는데 타작을 해 놓으면 싹 빼앗아 버리니 기가 막힐 지경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신령한 은혜를 잃어버리면 마귀에게 다 빼앗깁니다. 우환이 도적이라고 합니다. 꼭 사업에 실패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엉뚱하게 일이 벌어지게 만듭니다. 십일조, 감사, 아까워서 못하는 사람, 하나님은 보이지 않은 곳에서 손해가 오게 합니다.
12절에는 드디어 조카 롯의 세상을 좇아 선택했던 결과가 나옵니다.
▶12절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선택도 중요합니다. 인생은 선택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는 자신이 져야 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선택하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을 선택하고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포기하고 다시스를 선택했다가 비참한 꼴이 되었습니다. 아간과 게하시는 물질을 선택했다가 돌에 맞아죽고, 게하시는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까지도 포기하고 하나님을 선택했더니 저 하늘에 별처럼 이 땅에 수많은 모래알처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을 선택했으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기에 머리칼 하나 상하지 아니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롯은 가나안을 버리고 기름진 소돔 땅을 선택했는데 그 결과로 오늘 12절의 결과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불행은 어제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선택이 중요합니다. /아멘!/
롯이 삼촌 아브라함의 은혜를 배반하고 세상 물질을 따라갔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그동안 모았던 많은 재물을 다 빼앗기고 자기 자신과 아내와 자식들까지 포로의 신세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롯이 잘 살아보려고 소돔 고모라에 갔으나 결과는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롯의 신앙 노선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성도가 한 손에는 하나님을 붙들고 또 한 손에는 세상을 붙들고 살면 롯과 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세상의 것을 아무리 쌓아 놓았다 할지라도 순식간에 없어지고 맙니다. 롯은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물질과 명예를 다 잃어버리고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령한 것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값진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현재 있는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또 현재 있는 것을 바르게 사용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또 가장 의지했던 것이 올무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구덩이를 의지하다가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돈을 의지하다가 돈에 올무가 되고 자식을 의지하다가 자식이 올무가 되고, 명예, 인기를 쫓아가다가 그것에 올무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 구덩이가 승리로 가는 보호의 장벽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 구덩이가 승리로 가는 보호의 장벽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모든 선택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믿/
▶13절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아마 롯의 하인이 도망하여 이야기를 해 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때 벌써 아브라함은 히브리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온 자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을 건너 온 자라는 말입니다.
그 때 당시에는 이리로 건너오는 자가 아주 드물었습니다. 왜? 그쪽은 문명문화가 발달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농촌에서 서울로 이사하는 사람은 많지만 서울서 농촌으로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 갈대아 우르는 세계적으로 문명의 발상지로서 학교도 있고, 도서관도, 공연장도, 공중목욕탕도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야지인 가나안으로 왔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어째서 강을 건너 왔을까? 도시에서 왜 시골로 왔지?' 하여 아브라함에게 붙어진 이름이 히브리 즉 건너온 댁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세상과 물질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온 자'라는 뜻입니다. 그곳 사람들이 영접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라함에게 고하니' 또 이 말은 진노 중에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롯은 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위기에 빠졌을 때 소식을 전할 자를 남겨두셨습니다. 연락할 사람도 남겨 두었고, 도와줄 사람도 남겨 두었습니다.
은혜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사랑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가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남겨두었습니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롯에게 깨닫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끝내 깨닫지 못하다가 마누라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아브라함은 그 땅 주위의 사람들과 동맹하여 평화를 이루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주위에는 이런 평화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러나 롯이 들어간 성 주위의 여리고 성을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도 피해를 봅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함께 망했습니다.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아브라함의 주변에는 항상 세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마므레' '에스골' '아넬' 이 세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상 적인 친구가 아닙니다. 영적인 친구들입니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므레는 '부유하다'는 뜻으로 영적인 풍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에스골'은 '한 가족'이라는 뜻이며 '아넬'은 '성결'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함께 사랑으로 모여 믿음으로 기도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자신을 훈련시키는 사람들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도 아브라함은 게으치 않고 이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요, 기도의 사람들이요, 사랑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할/
▶14-16절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 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조카 뿐 아니라 그 주위에 모는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고, 그 땅을 쑥밭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소식 들었을 때, '인간이 의리 없이 행하더니만 결국 그 꼴이 되었구나!'하고 원망할 법도 한데 아브라함은 원망도 낙심도 없습니다.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자 삼백십팔 명'이라고 했으니 그들에게 따르는 식솔까지 합치면 약 1,500명쯤 되는 큰 마을의 촌장과 같은 지위에 아브라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에 '가신은 노예나 종'을 말합니다.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습니다. /할/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아브라함은 그돌라 오멜의 군대가 도망하니까 도망하는데 까지 쫓아가서 다 멸하고 롯을 구해 왔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는 사랑의 특징입니다. 믿음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유한한 인간의 사랑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지만 믿음의 사랑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 사랑은 하늘에서 오는 사랑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사랑보다 더 뜨겁고 더 아름답고 더 숭고합니다. /아멘!/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안 되는 일이 되었고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부녀, 그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다 데려왔습니다. 무엇이 이런 일을 했습니까?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이런 일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한 것만 관심 있게 보고 계십니다. /할/
오늘 본문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남길 사랑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요, 동시에 사랑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을 사랑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것도 평안할 때 보여준 것이 아니라 전쟁 가운데 보여주었습니다. 철모 위에 피어난 사랑이요, 미워해야 할 사람, 배신하고 떠나간 사람에게 보여준 사랑입니다. 상처 속에 피어난 사랑의 꽃이었고, 광야에서 피어난 백합과 같은 향기로운 사랑의 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신비합니다. 세상 밖에 있으면서 세상 안에서 존재합니다. 믿음은 분명히 세상 적이지 않습니다. 세상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 있어야 믿음이 빛나고 세상과 더불어 움직여야 믿음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믿음의 세계는 아름답습니다. 미워해야 하는데도 미워하지 못합니다. 싫어해야 하는데도 싫어하지 못합니다. 투정을 부리거나 짜증을 내야하는데 그러지도 못합니다. 믿음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색깔로 포장이 되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할/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믿음에도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해와 달과 별과 같습니다.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소망이고, 믿음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할/ 이런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기도로부터 시작한 사랑'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면 비로소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시작이 기도요, 사랑의 열매가 봉사라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은 사랑 자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 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진실한 사랑의 에너지입니다. /할/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신앙의 인격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①아브라함은 먼저 자기 자신을 이겼습니다. 그것을 남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내적인 자기 승리였습니다. 윗사람을 우대하지 않은 조카 롯을 용서해 준 것입니다. 롬12:21절에서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할/
②아브라함은 환경을 잘 다스리는 승리자였습니다. 헤브론 산지는 산악지대이며 목초가 적은 유다 광야지대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지역을 개척하여 목축지를 만들어 318명의 기병을 거느리는 한마디로 자수성가, 자립경제의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환경을 이기는 비결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삶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15: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을 이길 수 있는 첫째 비결은 자신을 죽이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현실의 조건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불리한 조건이라도 신앙과 개척정신으로 축복의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할/
③그는 전쟁에도 승리했습니다. 318명으로 연합군을 이긴 것은 정신적으로 신앙으로 이겼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많은 적들이 있습니다.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하고 죄와 자신과 정욕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빌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신비하리 만큼 위대한 능력이 나옵니다. /믿/ 사람이 무엇이나 진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한 사건이나 한 시대나 한 인생을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반드시 이겨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④사건 처리에 승리하였습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나 사건이 부딪칠 때 피하거나 낙심하거나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앙의 자세로 이겼습니다.
이런 자세가 우리에게도 절대 필요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했던 사람이 위기에 빠졌을 때 손을 펴서 도와주고 나에게 상처 주었던 사람을 용서하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감당하기에 불가능한 일이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318명의 가신이라도 끌고 가서 조카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런 믿음의 행동이 우리들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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