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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강)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 (창 12:10-20)

by 【고동엽】 2022. 4. 12.

(제24강)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 (창 12:10-20)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면 '내 삶이 무엇인가 달라지겠지? 그리고 풍요해 지겠지?' 기대 속에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은 피곤함이 계속됩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신앙자체를 의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받고 인생의 새로운 소망을 갖고 신앙생활을 했지만 복은커녕 점점 더 어려움 속에 빠지고, 거기다가 기대하지도 않은 재앙까지 만나 예수 믿는 그 자체가 후회스러운 성도들이 계십니까? 또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시작한 일이지만 오히려 예기치 않은 좌절과 난관에 부딪쳐 하나님이 원망스러운 분이 계십니까?
  오늘 본문은 그런 분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본문 1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0절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 땅이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척을 떠날 때에 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니 풍년은 고사하고 기근이 닥쳐와 생활 그 자체가 위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만하고 농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어리석은 인간의 머리로는 누가 감히 하나님의 의중을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이와 같이 사람의 계산법에 맞지 않은 비상수단을 쓰신 답니다.
  엎친 데 덮지는 격으로 시험과 유혹이 동반합니다. 출17:1-8절에 보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이 고통하고 있을 때 원수 아말렉이 쳐들어 왔습니다. 기갈도 해결 못하고 '죽느니, 사느니' 하는 판에 적이 침략까지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마4:20절에 보면 40일간 금식 기도하신 후에 마귀가 금식하신 예수님께 와서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이 나아가는 길에도 이같이 이중, 삼중 시험이 언제나 밀어닥쳐 올 때가 있습니다. 병들어 신음하는데 직장마저 쫓겨나고 사업이 무너져 허덕이는데 친한 친구에게 배신까지 당하는 눈물겨운 일이 언제나 뒤따릅니다.
  그러나 이런 궁지에 몰리면 물릴수록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 과정을 잘 참았던 본이 누구인가? 욥입니다.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망한 것 같았는데 결론은 갑절의 축복으로 해피엔딩입니다. 욥은 어떤 상황이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창조주 하나님을 높여 찬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간만 참으면 욥의 축복이 옵니다.
  ▶다시 한 번 본문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고 살 길이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애굽에는 양식이 있고 살기가 좋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가장 쉽게 유혹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양식이 풍족한 애굽으로 이민을 가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이민을 가면 경제적인 문제가 당장에 해결이 됩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애굽으로 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종종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간 것이 '잘한 것이냐? 못한 것이냐?'를 놓고 시비를 합니다. 잘못하지 않았다는 학자들의 말은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그 자체를 하나님이 책망하신 사실이 성경에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고,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애굽이라는 땅은 언제나 세상의 상징인데 결국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타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불 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사31:1절에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대개 애굽은 세상으로 비유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내려간 것이 잘한 것이냐? 못한 것이냐를 풀기 위해서는 본문의 심판을 좀 더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애굽에 갔다면 그것은 명령에 대한 순종이므로 우리를 시비의 대상이 못 칩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이 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 따라 애굽에 팔려가 천신만고 끝에 국무총리가 되어 자기의 형제의 가족을 구출한 사건이 있습니다.
  또 창46:3-4절에 야곱이 애굽으로 이민 가는 것을 꺼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또 아기 예수님이 헤롯왕의 위협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육신의 부모로 하여금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지시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명령과는 상관없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갈 때는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4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였고, 그러나 10절에서의 애굽 행은 말씀을 좇아갔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자기의 생각대로 움직였습니다.
  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재차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아브라함은 이제 마땅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 땅을 개척해야 할 사명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근이 왔다고 사명을 던져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우리는 룻기서의 나오미를 잘 압니다. 그가 유대 땅에 흉년이 오자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갔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고, 그래서 결국 세 쌍 과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을 버리고 세상에 떨어지면 하나님은 심판의 몽둥이를 두드립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몽둥이를 쓰임 받을 것들입니다. /믿/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오직 전적인 순종과 영웅적인 신앙심을 보여 주었는데 본문으로 넘어오니 이러한 믿음의 용장이 조그마한 물질적 시험이 왔을 때 하나님을 떠나 불 신앙의 나약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도 언제라도 주님을 배신할 수 있다는 확률입니다.
  이 모습은 비단 아브라함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자부하는 우리 모두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의 애굽 행은 불 신앙의 발로입니다.
  우리는 어려움 앞에 부딪치면 본능적으로 몸을 도사려 피할 곳을 찾습니다. '보다 쉬운 길이 어디 없나?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어디 없나?' 본능적으로 탈출구를 찾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세속으로 발길을 돌리고 믿음의 낙오병들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음절을 보면 도피해서 결코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1-13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애굽에서 당한 아브라함의 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11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보장 없이 약속 없이, 하나님의 말씀 없이, 애굽에 갔으니까 인간적 생각과 계산으로 애굽에 왔으므로 '아! 이제 살았구나!' 기뻐해야 되겠는데 반대로 불안해 집니다. 왜 불안하겠습니까? 아브라함 속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애굽에 가까이 가니 불안해 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애굽에 가서 살면 무엇인가 찜찜해집니다. 세상 적으로 미끄러져 살면서도 성도는 심령 가운데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깨닫게 됩니다.
  그때 깨달았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통회하고 죄를 슬퍼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약간 신앙 양심에 빨간 불이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인간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애굽에 내려온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가 굉장히 미인이었는데 자기 아내를 탐내는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애굽 인들도 아름다운 부인을 보면 그 남편을 살해하고 그 여자를 자기 아내를 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불안은 불 신앙입니다. 불안 쪽으로 생각하면 분명한 것은 불안한 환경이 옵니다. '내가 아무래도 실패하지' 이런 마음을 가지면 정말 실패하고 맙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무조건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무서워 말고,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입니다. /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어려움을 당하면 기발한 아이디어로 살길을 찾습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어리석은 아이디어를 보세요!
  쉽게 표현하면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내 아내라 하면 나를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한마디로 '누가 당신과 나의 관계를 물으면 내 누이 동생이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바로 왕과 사람들이 무서워서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이 아브라함의 실수였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체면 때문에 거짓말을 많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싫어하십니다. 진실을 좋아하십니다.
  한 부흥사 목사님이 어떤 모임에 가서 국회의원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걱정이었습니다. 무슨 말을 전해야 되나? 그래서 자기 선배 목사님에게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국회에 가서 국회의원님들에게 '거짓말하지 마시오'하고 강하게 꾸짖으라고 해서 그대로 했다고 합니다. 그 선배 목사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함으로 인하여 그 위대한 신앙의 용장이 넘어집니다. 속된 말로 '죽을 놈은 죽을 꾀만 내고 망할 놈은 망할 꾀만 낸다.'고 했습니다. 조그만 거짓말 한마디가 자기체면 때문에, 위험 때문에, 욕심 때문에, 거짓말 하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치졸한 아이디어를 보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별 수 없는 사람이구나!'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가 아브라함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사람은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생존본능을 노출시키기 마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생존본능에서도 진실을 추구하고 그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순교자니, 애국자니, 성인군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여기서 보면 순교자도, 성인군자도 못돼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묶이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붙들고 의지하는 꼴을 보십시오! 그는 연약한 자신의 아내를 붙들고 살아보려고 매어 달립니다.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여러분! 우리에게도 아브라함과 같은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좋게 잘 나가다가도 어느 순간에 정신 없이 믿음이 없는 자리에서 낙심하고 있는 나를 볼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저만큼 멀리 있고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사람을 붙들고 바라보며 의지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목사인 나에게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어떤 고난도 참겠다고 결심하고도 그 아름다운 결심이 한 순간 사정없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 없이 사람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태도를 그의 아내 사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남편이란 자가 자기 아내를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누이라고 거짓말을 강요하다니..' 사라가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만약 현대 여성 같으면 난리가 납니다. '병신 웃기네, 당장 이혼해, 저런 병신을 신랑이라고 믿고 살았으니'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라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무능한 남편을 비웃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자기의 팔자소관이려니 생각하고 속으로 울며 묵묵히 운명의 길을 떠났습니다.

 

  ▶14절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예견했던 그대로 위험이 찾아 왔습니다. '아리따움을 보았고...' 차라리 아름답지 않았더라면 괜찮았겠는데 예쁜 것 때문에 큰 실패의 짐이 되었습니다. 아마 춘향이도 예쁘지 않았더라면 변 사또에게 그런 고통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쁜 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 지식, 건강,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을 때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이 많기 때문에 악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식이 많이 때문에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라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지금 일이 잘못되어집니다.
  그렇다면 사라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데 심히 아리따웠습니까? 이때 사라의 나이가 적어도 65-6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어떻게 그렇게 예뻤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오늘날의 사람들보다도 거의 두 배 이상을 살았습니다. 물론 사라는 127세까지 밖에 못 살았습니다만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고 그 아들 이삭은 180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더 오래 삽니다. 그러니까 요즈음으로 말하면 중년부인 정도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은 함 족속이기 때문에 피부가 까무잡잡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셈 족속이라 피부가 하얗습니다. 그리고 사라가 대단한 미녀였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아직 아이도 하나 안 낳았으니 더 젊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15절에는 드디어 불안해하고 염려했던 것들이 현실로다가 옵니다.

 

  ▶15절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바로의 대신들이 바로 앞에서 사라 이야기를 침이 마르도록 합니다. 바로가 듣고 '야! 그 여인이 누구라고 하더냐?' '예 아브라함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그래 잘됐다. 궁으로 데리고 오라' 그래서 궁으로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어찌할 수도 없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능한 자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세상에 내려가면 완전한 무능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을 보겠습니다. 자기 마누라를 빼앗기면서도 한마디 대꾸도 못합니다. 사래도 아무 변명도 못하고  따라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애굽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없이 하나님의 간섭 없이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다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믿/
  '그 여인은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아브라함은 두 가지의 실수로 이런 낭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고, 또 하나는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 때문입니다. 누이라고 속인 것은 반쪽은 맞습니다. 과거에는 누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아내입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고대 및 애굽의 세도가들은 여러 첩들을 거느렸으며 특히 왕들은 수십, 수백 명의 후궁들을 거느리는 것이 관례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도 삼천 후궁을 두었습니다. 바로가 사라를 궁전으로 불러들인 것은 곧 후궁의 하나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 간 것입니다. 반쪽은 분명히 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반쪽의 진실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에서 떠나 적당하게 현실과 타협하며 반쪽의 진리만을 붙들 때 우리는 사단의 밥이 되기 쉽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사단은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메시아가 태어나도록 하는 계획을 갖고 계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단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밥 먹고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는 사단이 노골적으로 방해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아서 이집트 왕의 왕비가 되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의 반쪽 진실이 사단에게 이런 엄청난 빌미를 준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잔꾀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묘안들이 우리 인간의 수준에서 볼 때는 더없이 훌륭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려움이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하려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풀려다가 더 얽히고 설키게 하는 꼴이 되고  문제를 더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본문에서 많은 사람들은 사래의 순결성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2절에서 아브라함과 특별한 계약을 맺었습니다. 사라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룰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곧 약속의 자녀를 생산할 사라를 바로에게 정절을 빼앗긴 후 때늦게 재앙을 내릴 분이 아닙니다. 본 절은 사래가 정식 후궁으로 맞아 드릴 예식을 준비중에 있음을 말합니다.

 

  ▶16절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고대 근동에서는 신랑이 될 사람이 신부될 사람의 가족에게 결혼 대가로 예물을 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창24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의 신부될 리브가를 데리고 올 때는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주고 왔음을 3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마누라를 누이라고 했기 때문에 바로가 그 오바리 아브라함에게 예물로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아내를 빼앗긴 대가로 받을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상황을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너무 예쁜 것이 죄가 되어 애굽 바로 왕에게 수청 들어야할 팔자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널리 전하기까지 했던 그에게 기근이 있어 그곳에서 도저히 살수 없게 되므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누라를 애굽 왕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냥 본토 친척, 아비 집, 고향 땅에 쳐 박혀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생각해보면 기가 막힐 일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 사이에 아브라함과 똑 같은 처지에 처해있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팔자가 늘어지는 줄 알았는데 어떤 심판인지 일이 자꾸만 꼬입니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부터 상황이 점점 호전되어지는 것을 17절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불순종과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일이 형편없이 막 꼬이든 상황이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잘 풀어지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 사건 속에서 잘못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의 몽둥이는 아브라함에게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떨어졌습니까? 사래를 데리고 간 바로 왕의 집안에 내려졌습니다.
  이 여자를 데려오자마자 집안이 난리가 납니다. 왕궁이 어지러워집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큰 고민거리가 또 대형사고가 뻥 떠집니다. 그래서 바로가 '왜 일이 자꾸 터지는가?' 추적해 봤더니 한 마리로 후궁 삼으려고 데리고 온 사라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주인이 있는 임자 있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 신지라"
  하나님은 지금 누구에게 재앙을 내리고 계십니까? 바로의 집입니다. 그런데 이 일의 발단은 누구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래의 거짓말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부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일차적인 잘못은 이들 부부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 부부는 가만 두고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 무서운 재앙은 대개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기근과 온역'입니다. 여기서는 기근은 아니고 온역입니다. 온역은 다른 말로 전염병입니다. 전문가들은 특별히 전염성이 강한 피부병이었을 거라고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자 이제 바로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모처럼 예쁜 첩을 하나 두어서 기분 좋았는데 갑자기 온몸에 피부병이 나면서 궁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끙끙 앓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럴까? 이게 무슨 일이냐?' 해서 자기의 박수와 술객들에게 묻습니다.
  '왜 이러한 재앙이 있는 것이냐?' 점괘가 나왔습니다. '새로 취한 그 여자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 남의 아내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섬기는 신이 노한 것입니다.' 그래서 확인해보니 정말 맞습니다.
  바로는 재앙을 통해서 '아 내가 남의 아내를 빼앗은 연고로구나' 하나님은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영적인 감각이 이때는 바로가 더 예민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잘못으로 사실은 바로의 집에 재앙이 임했습니다. 성도가 바로 서지 못할 때 교회가 타락할 때 세상에 채찍 맞을 때가 있습니다.

 

  ▶18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여기 말씀을 보면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라고 했으면 바로가 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지키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은 그 어려움을 통해서 또 축복해 주십니다.
  계속해서 19-20절에 보면 바로는 사래를 다시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냥 사래만 보냈습니까?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그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19-20절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여러분 예수님 믿고 잘될 줄 알았던 모든 일이 안 된다고 너무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네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아브라함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방법을 한 번 보겠습니다. 잘못되어야 할 아브라함, 매를 맞아야 할 아브라함이 오히려 잘 되어 가는 이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두 가지 관점으로 보겠습니다.
  ①17절에 보니 사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이 사건이 전개되어지는 과정에서 보면 가장 무고한 희생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사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약한 자의 편이십니다. 그리고 억울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을 지켜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할/아멘!/
  ②하나님의 백성은 계약된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은혜로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편에서 볼 때는 책망 받아 마땅한 아브라함은 오히려 축복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여기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또 다시 애굽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으며 또한 그 하나님은 참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할/ 여러분! 참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면 크게 /아멘!/ 합시다.
  오늘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씻어 주시며 문제 속에 오셔서 그 문제 위에 해결의 실마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치료하는 하나님의 영이 이 시간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난, 저주, 일을 꼬이게 하는 원수 마귀도 묶임을 받고 떠나갈 줄 믿습니다. /할/


  ▶아브라함을 이 사건을 통해서 어떤 영적인 각성이 임했습니까?
  ①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았습니다. ⑴하나님은 바로(세상)보다 크신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 아브라함은 바로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들이 복잡해 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의 무릎을 꿇게 하시면서 하나님이 크심을 바로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가르치셨습니다.
  ⑵'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나와 함께 해 주시는구나' 아브라함에게 임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임하십니다. /아멘!/
  ⑶또 아브라함은 깨달았습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내 삶의 역사 속에 찾아 오셔서 반드시 간섭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잘못한 것은 반드시 처리하시지만 그러나 징계보다는 더 커다란 사랑을 가지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며 회개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깨달은 것입니다.
  ②문제 해결의 열쇠는 하나님께 있음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그 어렵고 절박했던 문제는 결국 아브라함 자신이 해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결코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인생조차도 모릅니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내 인생도, 이 세상도 내가 조종하려면 결국은 망하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됩니다.
  ③믿는 자에게도 기근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믿음이 기근을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사는 한 기근을 만나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기근 앞에 속절없이 당하고 무너지지만 우리는 그 기근을 다루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기근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축복이요, 이것이 우리의 배짱이요, 이것이 우리의 담대함입니다. /할/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것 담대한 것 이것이니 그를 향하여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아멘!/
  ④아브라함은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해보면 자신을 더 잘 알게 됩니다. 평탄할 때는 인간의 능력을 모릅니다. 그러나 위기가 오면 그 행동하는 모습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위기가 오니 거짓말하고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아내를 배신해 버린 추한 자기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더더욱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깨닫는 순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깨닫는 것이 복입니다. 깨달은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제 제 마음대로 살지 않겠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려움을 통해서 믿음의 한 계단을 옮겨 주십니다. 절대로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요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⑤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바울의 권면을 보겠습니다. 엡4:22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 /할/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말은 예수 믿기 전에 세속적인 인간의 육신의 정욕 적인 생활을 말합니다. 원문에 보면 '계속해서 벗어 버리라'는 현재형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걸치고 있는 옛사람의 누더기가 있습니다. 내 행위 속에, 내 습관 속에, 폭발하는 내 성질 속에 옛 사람의 누더기가 그대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옛사람을 벗어라, 새사람을 입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새롭게 만드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한 큰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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