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강) 아브라함과 롯의 분쟁! (창 13:1-8)
창세기는 이름 그대로 이 세상 천지만물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주제는 창조가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일을 펼쳐 보이신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적을 베푸신 이유도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창세기는 믿음의 책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아벨, 노아, 에녹,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 문장에서 중요한 두 개의 동사는 '떠나라, 가라'인데 이 두 단어를 합치면 '떠나가라'입니다.
믿음이란 '떠나, 가는 것'입니다. 먼저 '본토'는 '나라'(country)입니다. 이 말씀은 장소 적인 의미도 있지만 사탄이 지배하는 영역, 즉 마귀적 가치관의 첨병인 세속문화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친척'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인간관계의 끈끈한 정, 이해관계, 친구, 잘못된 전통'들입니다. 이러한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아비 집'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 무엇을 뜻'합니다. 즉 학력, 재산, 재능, 실력, 외모, 직장, 가문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의지하는 자아의 껍질을 과감히 깨어버리고 던져버리는 자세가 곧 믿음입니다. /할/
이렇게 볼 때 '떠나,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지금까지 손에 꽉 쥐고 있던 것을 과감히 놓아라' 이것이 '믿음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를 붙잡기 위해서는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합니다.
갈대아 우르 땅에 발 딛고 서 있으면서 가나안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란에 거하면서 가나안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애굽에 머물면서 영적인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선택하되 딱 부러지게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아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아니한 자세를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어떻든 그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애굽은 대단히 매력적인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감히 그 애굽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다시 '벧엘' 즉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옵니다. 그곳에 이르러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름진 땅과 조카 롯까지 포기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9)
그런데 바로 이렇게 손에 쥔 것까지도 놓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그에게 나타났습니다(14-16). /할/
창13장인 본문을 네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⑴1-4절까지는 애굽에 내려가 있던 아브라함이 큰 부자가 되어 가나안 땅으로 복귀한 기사이고, ⑵5-9절까지는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재물이 불어나자 목자들끼리 분쟁이 일어나서 분가하게 되는 장면이고, ⑶10-13절까지는 소돔 땅을 차지한 롯에 관한 기사이며, ⑷14-18절까지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아브라함의 생활에 관하여 나옵니다.
오늘은 1-8절까지를 가지고 ◀아브라함과 롯의 분쟁!▶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할/
▶1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새" 앞장에서 말한 대로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그 흉년을 피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하나님이 바로를 통해서 권고를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왕을 통해서 권고를 받았다는 것은 큰 수치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때로는 이웃의 욕설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고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저 따위로 행동하는 것이 예수쟁이야, 저게 무슨 집사야!' 이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래 내가 저런 말을 들어도 싸지'하는 생각이 들면 회개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서 세상 사람들 입을 통해서 주의 영광을 가렸나이다.' 이런 마음으로 회개하고 바로 서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아멘!/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갔던 일, 불 신앙의 행동을 했던 일들을 하나님께 철두철미하게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통해서 아브라함을 권고하신 다음 그가 깨닫자 책망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곳에서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2절에 보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돌아오십니다. 부자가 되어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할/
▶2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오늘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올 때, 얼마나 순종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불순종, 불 신앙으로 애굽에 내려갔는데 그곳 애굽에서도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복음입니다. 순종할 때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할 때도 하나님의 손길이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할 때만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패까지도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간섭하십니다. 실패에 빠졌을지라도 한번 선택한 백성은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아멘!/
불 신앙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을 권고하시고 깨닫자 많은 재산과 조카 롯과 함께 남방을 향하여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남방은 가나안 땅입니다. 영적으로는 신앙이 폭삭 내려앉았다가 다시 회복된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애굽은 세상이요, 가나안은 믿음입니다.
▶3절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남방으로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남방은 애굽의 경계선입니다. 여기에 있으면 문득 문득 애굽 생각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도 남방에 거하면 안됩니다. '세상에 한발, 하나님께 한발' 그렇게 왔다갔다하면 안됩니다. 행여나 오늘 이 자리에 남방에 머물러 있는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있다면 벧엘로 올라가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할/아멘!/
벧엘은 참으로 좋은 곳입니다. '벧'은 '집'이란 뜻이고,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 이름을 지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야곱이 형을 속이고 아비를 속이고, 그게 발각이 되자 외갓집을 향하여 도망갑니다. 도망가다가 해가 저물매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늘이 열리고 사다리가 내려오더니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꾸고 난 야곱이 외치기를 '오! 내가 여기서 하나님을 만났구나!' 그러고는 베고 잤던 돌을 세워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때까지는 그곳이 '루스'라는 지명이었는데,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벧엘은 가나안 땅의 중심지입니다. 한마디로 벧엘에 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 중심으로 서 있다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어디에 중신을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믿/
▶4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이전에 창12: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다시 찾아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가 애굽에 내려가 신앙으로 실패하고 처음 신앙을 잃어버렸음으로 그 처음 신앙을 사모하여 다시 찾으려는 열심의 발로입니다. 후에 야곱도 신앙이 곤두박질되었을 때, 벧엘을 찾아와 잃어버렸던 신앙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아갔던 경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단을 쌓았고 하나님을 만났던 그 감격의 장소. 그곳으로 그는 곧장 돌아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습니다. 애굽에서 놀라고 탄식했던 그는 하나님과 만났던 그 장소를 그리워했고 훼손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의 열망이 생겨서 그 곳으로 맨 먼저 달려왔다고 본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곳을 향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면 이런 내용이 될 것입니다. '주여 이제 주를 떠나 내 마음대로 했던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의 진정한 예배를 받아주세요!' 그는 그리웠던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서 진정한 예배를 통라여 신앙이 회복되었습니다. /할/
하나님은 신앙이 내려간 당신의 백성들에게 처음 신앙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계2:4-5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벧엘 신앙을 다시 찾은 것처럼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을 항상 뜨겁게 믿었던 첫사랑을 늘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할/
▶5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당시 유목민들은 장막을 준비해 다닌다고 합니다. 본문에 새삼스럽게 롯에게 이러한 장막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은 롯도 아브라함 못지 않게 달린 식구와 가족이 많았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신앙의 연단 없이 삼촌 덕분에 부자가 되어졌습니다.
▶6절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소 떼와 양떼가 들판에 가득했습니다. 그 넓디넓은 들판도 양떼가 가득하니 좁아 보였고 그 맑은 물이 철철 흘러 넘치던 많은 우물물도 가축을 먹이기에는 부족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로 내 생활의 삶에 물질적인 부요가 풍성해지면 아무 근심 걱정이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만은 절대 그렇지도 않습니다. 부자가 되어도 항상 걱정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아브라함을 보세요! 나그네로 살며 가난하게 살다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만은 부자가 되고 보니 거기서도 또 문제가 있습니다. 땅이 좁아 보였습니다. 사실은 그가 풍요해진 것은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감사의 조건 속에서 불편함을 느꼈고 다툼이 나게 되었다고 성경은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롯의 종들끼리 서로 맹렬히 다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욕심에서 온 사건입니다.
▶7절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왜 다툼이 일어났습니까? 재산이 많아서 투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부유한 형제들보다 가난한 가정의 형제우애가 더 좋은 것을 보게 됩니다. 물질은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몇몇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물질로 선을 행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또는 쾌락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의리와 순정에 살던 친척과 친구들이 돈을 계산하기 시작하면서 이해관계가 엇갈려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도, 롯도, 재산문제로 땅 뺏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물질 없이는 절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물질을 죄악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구약의 사대 의인은 '노아, 아브라함, 요셉과 욥'을 꼽습니다. 이 사대 의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믿음의 족장들이 다 물질의 풍성한 복을 받았습니다. 사기꾼 야곱도, 그의 아버지 이삭도, 큰 부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은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할/
그런데 그 물질 관이 중요합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 되고, 물질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8:17-18절을 보세요!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우리가 물질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 마음속에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8장에 말씀처럼 내 손으로, 내 능력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할까 오히려 두려워해야 합니다. 물질을 얻으면 얻는 그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땅에 보내주실 때 시간적인 상황도 주십니다. 그 속에는 건강을 주시고, 환경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그래서 우리들에게 물질에 상황을 주십니다. 이 물질을 주신 것을 단순히 생명만 영위하고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물질가지고 인간문화를 이룩하면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간들이 문명문화 속에서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이 모든 과학이나 문명이니 하는 기초가 어디서 온지 아십니까? 모든 조건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삶의 근원을 제공하시는 그 하나님께 감사가 빠져서 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조건을 주시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눈을 떠야 합니다. /할/
여러분, 우리 인간이 이 땅에 올 때 빈손으로 옵니다. 어떤 사람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땅문서 가지고 나온 사람은 없습니다.
오래간만에 외국에서 남편이 돌아와서 사랑하는 아내와 마주 앉았습니다. 이 남편의 일성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소!' 이런 말이 오고가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의 첫 물음이 '여보! 우리 집 값이 얼마나 올랐어?'하고 물어본다면 이들 부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합니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 거입니다. 그 사실을 알았던 동방의 의인 욥은 욥1:21절에 고백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할/
여러분!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을 우리가 맡아서 관리하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을 사용할 때마다 물질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후9:8절에서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감리교를 세우신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젊을 때에 어느 교회에 부임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얼마나 살아 있는 말씀인지 많은 성도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자 영감 한 분이 모처럼 친구 한 사람을 전도해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때 웨슬레 목사님이 설교를 하십니다. 그 날 물질에 대하여 설명을 하면서 첫째로 '돈을 잘 벌어야 하고 많이 모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그 영감님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은혜를 받더랍니다. 물론 우리 모두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대지에서 '벌은 돈을 절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부자 영감이 옆의 친구의 옆구리로 쿡쿡 찌르면서 '목사님! 설교 참 잘하시네' 그르더랍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대지에 가서는 '벌어 놓은 돈을 선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니까 이 부자 영감의 눈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그 마지막 대목이 아까운 설교를 버렸네' 하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는 데는 열심입니다. 내 것으로 만드는 일에는 열심입니다. 그러나 선한 일에 쓰는 데는 인색합니다.
▶영국의 고든 장군은 33회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로 이끈 공로가 인정되어 정부로부터 큰 금메달하나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 금메달이야말로 그에겐 더 없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아무리 찾아봐도 그 메달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뒤 그의 일기장에 보니 흉년이 있던 해에 그 매달을 녹여 팔아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재민들에게 식량을 사서 나눠주고 그 소감을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오늘 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히 여기는 마지막 물건을 주 예수께 받쳤노라' /할/
▶지금부터 약 30년 전에 불란서에 유명한 작가 '알버트 까뮤'가 있었습니다. 그 작가가 세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너무 기쁘고 좋았습니다. 그때 상급으로 10여만 불의 상급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가난하게 살았던 까뮤는 그 돈으로 파리 근교에 큰 저택을 장만하고 또 고급 승용차를 샀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부풀렸겠습니까? 이제 신나게 그 승용차를 몰로 자기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만나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물건이라고 자기만족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자 그 생명이 끊어지는 그 순간 그 고급 저택이고, 그 고급 승용차는 누구의 것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같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약 35년 전의 인물입니다. '앨버트 슈바이처'입니다. 그가 덴마크에서 노벨상으로 상급 13여만 불을 받았습니다. 그는 덴마크에서 불란서 파리까지 3등 기차를 타고 와서 아프리카에 문둥병 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지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 일입니까? 지금도 슈바이처는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찬란히 그 업적이 빛나고 있습니다. /할/
▶유대나라에 가면 두 개의 호수가 있습니다. 북쪽의 갈릴리 호수가 있고, 남쪽에는 사해바다가 있습니다. 사실 바다라 하지만 적은 호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기는 같은 물줄기를 받고 있는 두 호수이지마는 갈릴리 호수에는 고기 때가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쪽에 있는 사해 바다는 죽음의 바다라고 합니다. 생명들이 없습니다. 고기 떼가 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갈릴리 바다는 헬몬산에서 내려오는 그 물을 받아서 자기 안에서 정수하여 다시 요단강을 거쳐서 사해로 내려보냅니다. 받을 줄도 알고, 줄줄도 알기 때문에 그 속에 생명이 움직입니다.
그러나 사해 바다는 사방으로부터 물을 받기는 하지만 나갈 통로가 없습니다. 점점 하늘의 태양이 증발시켜 소금기만 남아 곧 죽음의 바다가 되어졌습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줄 모르는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갈릴리 바다처럼 선한 일에 많이 투자하십시오, 하나님 일에는 많이 투자하십시오, 물질에 복 받는 비결을 바로 심고 거두는 법칙입니다.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할/
▶다시 본문 7절로 돌아갑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재물이 많아지니까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가축들이 먹이 때문에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양쪽 목자들끼리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과 롯이 감정이 격하됩니다. 그런데 그 땅에는 가나안 원주민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살고 있었습니다.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서 거하였는지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그 땅에 살고 있는데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이사를 왔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라는 사람들이 여러 사람들 데리고 와서 살게 되었단 말입니다.
가나안과 브리스 사람들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자기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동네에 낯선 사람들이 이사를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만히 보니 자기들과 여러모로 다릅니다. 생각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특별히 종교가 다릅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그렇게 날마다 말을 하는데 그래서 그들이 어떠한 사람인가 하고 눈을 똑바로 뜨고 주의해 봤더니마는 맨 날 싸우더란 것입니다.
여러분!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뭐라고 했겠습니까? '저것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맨 날 싸움질만 하냐?'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쉽게 말하면 빅뉴스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그들이 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망신을 당하면 하나님 망신당하는 꼴이 됩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을 욕하면 교회를 욕하는 것이요, 교회가 욕먹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욕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아브라함은 그 재산 싸움에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멋지게 처리하는 드라마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아브라함이 정신이 번쩍 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참 어른답습니다.
본문을 잘 보면 원망이 없습니다. '야! 롯!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여 정성으로 길러주었느냐?' 그러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분쟁이 있는데 뭐 화낸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해결을 시도합니다. 아브라함은 땅이 좁다는 현실을 수용했습니다. 이 형편 이대로서는 다투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우리말로 말하면 현실을 직시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게 중요합니다. 모든 다툼에는 이것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8절에서 아브라함의 인격을 보세요!
▶8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먼저 문제를 만난 아브라함이 먼저 손아래 조카에게 찾아가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동양 문화권에서는 천만에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문화권은 잘못 여하를 막론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빌어야 합니다. 그것이 타당한 윤리와 순리로 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높은 사람이요,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자기 아랫사람에게 나아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의 인간문제의 다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대부분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대화를 회피해 버립니다. 부부간의 싸움 뒤에도 흔히들 냉전이라고 말합니다. 화가 나면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누가 먼저 말을 시작하느냐? 이 문제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먼저 백기들고 머리 숙이고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굉장한 자존심의 문제보다 사실 풀어버리면 아무 문제도 아닌데 그놈의 자존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툼이 일어나고 냉전에 돌입하면 먼저 대화를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의 아브라함의 행동은 믿는 이의 행동이요, 주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우리 다같이 마5:23-24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 친구가 찾아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이 항복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화해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화해자로 하늘보좌로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숨을 거두시기까지 우리를 향한 용서와 사랑을 선포해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라'
여러분! 이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먼저 찾아가 화해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남편의 위치면 어떻고, 아내의 위치면 어떻습니까? 시어머니의 위치면 어떻고, 선배의 위치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팔복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의 예배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겠습니까? 기도를 오래 한다고 감동을 받겠습니까? 한마디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며 사랑할 때 그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뭔가 달라' 이렇게 그들의 눈에 우리의 모습이 보일 때, 전도가 되어 집니다. /할/ 우리는 이래 봐도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무엇이라도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오늘부터라도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어주십시다. 원망이 있는 곳에 화해자가 되어 화목을 이루어 나갑시다. /아멘!/
"우리는 한 골육이라" 아브라함은 먼저 화평을 제의합니다. 이 문제가 중요합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땅 문제입니다. 또 그의 종들이 조카의 종들에게 얻어맞았습니다. 즉 재산싸움입니다. 얻어맞은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인간관계 차원에서 보았습니다. '내가 형제를 잃느냐? 찾느냐?'는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는 한 골육'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치관을 돈에 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에 두었습니다.
성공의 기준을 더 많은 재물을 손에 쥐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재물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은 믿음의 거장답게 성공의 기준은 재물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일에 더 많은 가치를 두었습니다. 최고의 경영자는 사람을 더 많이 얻는 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것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비결을 애굽에서 배웠습니다. 자기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긴 대가로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 또 목숨도 그가 바라는 대로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내가 바로 궁에 들어간 그 날 밤, 아브라함이 편하게 두 다리 쭉 뻗고 재물 모았다고 잠을 잤겠습니까?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그 밤에 한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지새면서 자신의 부족함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 것을 가슴을 치면서 회개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이런 고난과 자기 아픔을 통해서 성찰이 되어지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돈도 생명도 귀하지만 더 귀한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연이 얼마나 귀한가를 깨달았습니다. 사실 재물에 대한 기득권은 아브라함에게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면 롯의 재산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얻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주인공은 아브라함입니다. 롯은 언제나 따라다니는 엑스트라입니다. 2절에 '아브라함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이 얻은 것 가운데 일부를 롯에게 주어서 그것이 커서 부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기득권을 따지자면 분명히 아브라함이지만 아브라함은 사람을 더 중요시했고, 혈육관계를 더 중요시 여겼던 사람입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는 엉망진창이 되어도 재물만 손에 쥐면 최고인줄 알고 삶을 낭비하고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주님은 이런 연약한 인간들의 모습을 아시고 우리에게 산상보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 주셨습니다. /믿/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무슨 말인가? 의역해 보면 '우리는 골육이다.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냐? 큰아버지와 조카의 사이입니다. 자식이 없는 큰아버지에게 아들과 같은 사이였습니다. 이제 너와 나 사이에 싸움이 있어서야 되겠느냐? 형제이므로 다투어서는 안되겠고 또 너와 나는 신앙적으로는 이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신앙 인으로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이며 살수가 있겠느냐?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할/
다시 한 번 8절 하반 절에서 아브라함의 인격을 보세요!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지 말자'고 당부합니다. 얼마나 멋쟁이요 신사적인 모습입니까? 형제를 존중히 여길 줄 아는 배려 깊은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집 자녀가 귀하다면 남의 자식도 귀한 것을 아는 사람은 신사입니다. 내 물질이 귀하다면 남의 물질도 귀중함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인격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재산이 귀한 줄 알았지만 형제의 재산도 귀한 줄 알았고, 자기의 종들을 귀한 줄 알고, 형제의 종들도 귀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나 나나 한 혈육이므로 다투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참 훌륭한 신앙의 인격자가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이입니까? 예수의 피로! 예수의 보혈로 한 형제 한 자매가 된 사이입니다. 육신의 형제도 예수 안 믿으면 세상 떠나는 날 영원한 이별이지만 우리 모두는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할 영생복락의 동반자입니다. 우리 모두 화목하며 삽시다! /할/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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