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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회의(니케아-칼케돈회의)

by 【고동엽】 2022. 4. 12.

1. 니케아 회의(The CoonCil of Nicaea)

 

   

초대교회는 오랜 갈등과 시련 그리고 고난과 박해이후 313년 동방의 리카리우스와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이에 맺어진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기독교회에는 새로운 활력과 최대의 자유가 찾아왔다.

  콘스탄티누스황제는 기독교를 자유화 한 뒤 몰수된 기독교의 재산을 반환하고 교직자에게는 국비를 보조하고 일요일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정하여 선포하였다. 하지만 로마는 광대한 영토의 확장과 많은 이민족의 문화와 혼합한 제국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교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교회안에는 내분과 갈등이 일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교회의 힘을 빌어 공존하기 위해서는 교회내의 내분을 막아야만 했는데 당시 교회내에는 교리적인 논쟁으로 인한혼란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초대교회는 약 300년동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로 믿는 분명한 삼위일체 교리가 제정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시련과 핍박 때문에 교리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황제는 이러한 교회내의 갈등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광대한 나라를 통치하려면 교회의 지지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급기야 325년5월 20일 처음으로 에큐메니칼 공회의를 니케아에서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고 그 회의는 2개월이 지난 7월 25일 까지 진행되었다.  니케아는 소아시아의 작은 동네의 보스포러스(Bosporus) 해안에 있으며 콘스탄티노플로부터는 약 45마일거리에 있다.  그리고 니케아 공의회라는 이름은 당시 모임을 가졌던 니케아라는 지역의 지명 이름을 따라 니케아 회의라고 부르게 된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 교회의 내분과 갈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의 감독 대표들을 소집하였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될 수 있는대로 많은 감독들이 회의에 참석하게하려 하였다. 그래서아프리카 시리아 폐르시아, 소아시야,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멀리는 스페인까지 총 318명의 대표들이 참가했는데 대부분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의 주교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소집통고를 받은 감독들은 장로2명 수행원 3명정도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그 수는 약 1500여명이 넘는 수자이나 그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와 체제비는 국고에서 부담을 하였다1).  4세기 초엽 교회안에는 교리적인 체계가 바로 세워지지 않아 일어난 갈등과 내분이란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인 아다나시우스는 성자는 성부와 완전히 “동질”이라고 주장을 하고 아리우스는 성자는 성부보다 낮은 “이질” 이라고 주장하는 논쟁이 벌어진 결과 이 회의에서 에우세비우스의 제안대로 “동질” 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니케아 신조”가 성립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7년 사망한뒤에도 아리우스파는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 다르다고 주장을 계속 하고 아다나시우스파는 성자와 성부는 본질이 같다고 주장을 하면서 교회내의 갈등이 그치지 않았는데 니케아 정통파 황제인 데오도시우스1세가(379-395)가 공동 신앙령을 380년 반포하고 성자는 성부와 본질이 같다는 니케아주의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였으며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아리우스를 완전히 이단으로 추방하였다.2) 그리고 니케아 총회직후 제국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데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뒤 모든 이교의 제전을 금하고 올림픽 경기도 신의 제전이라는 이유로 393년 금지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제 1회 올림픽이 1896년 아테네에서 개최되기 까지 1500년동안 경기가 중단되었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97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 황제로 활약하였으나 그가 정말 기독교 황제이었는가는 의문시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가지의 분쟁은 부활주일의 문제이다.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이 지키는 유월절과 같은날 즉 닛산월 14일에 지켜고 서방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요일날 부활하신 사실을 중시하여 춘분후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주일의 날자 문제는 오랫동안 일치된 해결을 보지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니케아 회의에서 서방교회의 손을 들어 정하였는데 “부활주일은 춘분후 만월후의 첫 일요일에 지키기로 정하였다” 이것도 교회의 통일을 이루는데 큰 힘이 되었다.

 

1) 네케아 신조의 내용

 

우리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일체의 사물들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성부 한 하나님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부의 본질로서 비롯된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오 빛중의 빛이시오 진정한 하나님중에 하나님이시니 그는 창조되지 않고 성부와 동일 본질로서 잉태되셨으니 그를 통하여 천상과 지상의 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는 우리 인간들과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이 당에 내려 오셔서 성육신 하시고 인간이 되심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제3일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으니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는다. 그러나 그가 존재하지 않을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 잉태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자들 혹은, 무에서 그가 비롯되었다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서로 다른 본질 혹은 정수라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그가 창조 되었다거나 변화될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면 교회는 저주하는 바이다. 아멘

 

2). 사도신경

  사도 신경은 신약성경의 편집과 때를 같이하여 정해졌다. 사도 신경이란 사도들이 지은 신경이란 뜻이 아니고 사도들의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상 사도 신경은 사도들이 떠난 뒤 오랜후에 정해 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신경은 사도들에 의해 지어졌다는 전설이 오래 동안 믿어져 왔다. 

교회의 조직법과 행정규례는 시대가 변함에 다라 변천해 왔지만 사도신경만은 그 때의 신앙 고백을 지금까지 지속하여 오고 앞으로도 계속 지속할것이기에 신앙의 선조들이 고백한 사도 신경은 당대에 쌓은 영원한 금자탑이라 할수있다. 신경이란 (크리드 Creed) 란 말로 라틴어 크레도(Credo)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 뜻은 “나는 믿는다” 라는 뜻이다. 또한 신경이란 신앙적 조건의 설명이다. 당시 영지주의자와 교회와의 투쟁때문에 사도 신경이 생기게 되었다. 이 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에 총체라고 할수있다.

  사도 신경은 200년경부터 세례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면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의 신앙을 사도신경을 통하여 고백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세례를 위한 신앙 고백이 점차 발전하여 360년에 아리안 고백에서 처음으로 “음부로 내려가사”가 첨부되었고 750년경에 정식으로 삽입이 되었다.  또한 “성도의 교제”란 말은 650년 이후에 삽입되었으며 “영원히 사는것”이란 말은 어거스틴이 사용한 신경에서부터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 신경은 니케아시대에서 부터 일반적으로 믿어 오던 것을 좀더 보충하여 세례문답 뿐만 아니라 그노시스(영지주의)이단을 위시한 여러 가지 잘못된 교리를 구별하기 위한 정통적 신앙고백으로 점차 사용하게 되었다.

 

2. 콘스탄티노플 회의(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하여는 환정지엇으나 성령의 신성에 관하여는 언급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381년에 제2 기독교 총회의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 이회의에서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또한 성령의 신성에 관하여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삼위일체 교리가 정리되고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항목이 되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다만 위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계획하신분이시고 에수님은 그 계획을 이루신분이시며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노으신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일을 하신다. 이렇게하여 삼위일체 교리가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온전히 정립되었다.

 

 

 

3. 칼케톤 공의회(The Council of Chalcadon)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핵심은 삼위일체의 본질에 관한 것으로 성자와 성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규명하는것이었다. 이 논쟁을 통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바로 규명한 서방의 아타나시우스의 신조를 인정하여 정통교리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삼위일체의 제 2격인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어떻게 그의 인성과 관계될수 있는가? 진실로 하나님이신 그가 어떻게 동시에 인간이 될 수 있는가 또한 그가 어떻게 인간적 조건하에 살수 있으며 사람의 형체로 나타 났는가?3)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의 문제였다.

이 문제로 인하여 451년 제 3차로 세계적 종교회가 니케아 근처의 칼케톤에서 약 600여명의 감독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진행되었다. 칼케톤의회에서 논의된 사항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의 하나님이시오 완전한 인성을 가진 참 사람으로 교회는 신앙할 것을 결의 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두 성품은 그리스도 자신의 관계에 관하여 혼돈이 없고 변함이 없고 분리가 없고 불화가 없는 두 성품을 가지셨지만 한인격이시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만 생각한다면 근본주의로 흐르기 쉽고 사람으로만 생각한다면 신신학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의 증언과 그 인격의 생활에서 보여 주듯이 그리스도는 분명이 하나님이요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도 되고 사람도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복음주의적 전통 신앙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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