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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에덴동산 (창 2:4-17)

by 【고동엽】 2022. 4. 12.

(제5강)             에덴동산 (창 2:4-17)

 

  1장은 천지창조를 한꺼번에 교훈한 것이고, 2장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중심으로 교훈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대대적으로 서론을 말하고 그 다음 각론을 풀어서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1장에서도 인간 창조가 나오지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하여 특히 영적인 면을 특별히 강조한 것입니다.
  2장에서는 '인간의 육체와 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남자는 어떻게 창조하셨고, 여자는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창조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셨고, 인간에게 맞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부족함이 없도록 다 준비하신 뒤에 마지막으로 지으시고 모든 것을 인간들에게 허락하시고 '생육, 번성, 충만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목 소개!▶

 

  ▶4절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단어를 무려 6,800여회나 기록하고 있으며 본문의 여호와 하나님은 1:1절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강조하신 '엘로힘'과는 달리 능동적으로 '스스로 계신 분(출3:14), 이스라엘의 구속자'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략' 여기서 대략이라고 하니까 잘못 생각하여 대충대충 기록했는가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 말이 아니라 대략이라는 말은 '족보, 계보, 역사, 출생, 가족' 등과 같은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는데 본 절에서의 의미는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내력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 중에 특별히 인간창조를 강조했습니다. 창37:2절에 보면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여기서도 약전이라는 말의 뜻도 역시 '대략, 역사, 내력'이라는 의미입니다.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는 말씀을 했는데 다른 내용도 별로 없이 아담을 만드시고 그를 어디에 두셨다는 것과 또 두시고는 무엇을 부탁하셨다는 것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성경이 주는 초점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쓰여졌습니까? 하나님의 그 의도를 잘 알아야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곧 가정에서 자녀가 아버지의 마음을 잘 읽어야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에 화가 몹시 난 나머지 '이놈아 썩 나가버려!' 하신다고 '예 집을 나가지요' 하고 집을 나가면 됩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지요, '썩 나가거라!'는 이 말은 '네가 왜 그렇게 잘못 했느냐?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꾸중의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지 집을 아주 나가라고 한 말씀은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의 마음을 잘 이해를 해야 하듯이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도가 무엇이냐에 초점을 두라는 의미입니다. /아멘!/

 

  ▶5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 하였으며"
  1장에서는 셋째 날에 여러 가지 과실을 만드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왜 이렇게 다룰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5절에서 말씀하신 경작할 사람과 또 들에는 초목이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밭의 채소란 말의 원 뜻은 작물, 사람이 농사를 짓는 벼, 보리, 채소, 무우, 기타 등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재배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중 사람이 재배하지 않아도 마구 자라는 것이 있고, 사람이 재배해야만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스린다는 말은 운영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위에서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고 돈을 버는 것, 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입니다. 그것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을 할 때 '주를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먹을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을 다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적이 바르면 다 주의 일입니다. 꼭 교회에 와서 성가연습을 하고 주일학교교사를 해야만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밭을 매면서도 주의 영광을 위해,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남편을 받들고 자식들을 돌보는 것도 다 주님이 허락하신 것을 우리가 잘 가꾸고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에 충성해야 합니다. /할/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우린 여기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진흙을 이겨서 어린아이를 공작한 것처럼 만드셨는가 보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진흙은 그런 진흙이 아닙니다. 원어의 흙은 '티끌, 먼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흙은 히브리어로 '아팔'인데 우리말 성경에는 '아담'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사람이란 뜻이 되고, 첫 사람의 이름도 되고 흙이란 의미도 됩니다. '아담아! 티끌아! 먼지야!' 하나님은 진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만드시고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이 생명을 얻어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육체가 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영혼이 귀한 것입니다. /믿/ 영혼이 떠나가 버리면 육체는 썩어져 냄새가 나고 티끌로, 흙으로 먼지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 우리의 육체입니다.
  아무리 양귀비처럼 예쁜 미인이라도 영혼이 떠나가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육체만으로는 절대로 존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영혼이 귀한 것입니다. 육체는 영혼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육체에다 생명을 불어 넣어주셨을 때, 그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귀한 자로, 하나님을 닮은 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믿/아멘!/
  우리 장로교회는 칼뱅주의인데 칼뱅주의는 오늘 본문을 토대로 해서 인간을 이분 설로 봅니다. 영과 육으로 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알아야 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본질, 우리의 근원, 우리의 체질은 흙입니다. 흙이라도 흙먼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흙도 아닌 흙먼지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일을 보십시오. 정말 대단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자동차를 만들어 타고,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고, 빌딩을 짓고 큰 도시를 만듭니다. 달과 우주를 정복하려고 연구를 합니다. 그 하는 일이 참으로 대단하고 굉장해서 사람은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원숭이와 사람,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감히 견줄 수 없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질은 흙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3:19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흙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흙이라 스트레스를 조금만 받아도, 조그마한 병균이 들어와도 휘청거리고 죽습니다. 자동차에 부딪혀도 일그러지고 죽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흙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몇 만 명의 사원을 거느린 CEO이고, 몇 억만 금을 쌓아놓은 부자이고, 하늘을 찌를 만한 권세가 있다 해도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흙입니다. 오늘밤에 집으로 가다가 자동차 사고로 죽을 수 있는, 질그릇같이 연약한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겸허하게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⑴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이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흙, 먼지, 티끌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곳에 한 때는 물이 덮여 있었고 잡초가 자랐을 것이고, 짐승들이 뛰어다니며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흙의 원소에서 인간이 지음을 받았다면  하나님 앞에 인간은 마땅히 겸손해야 합니다. /아멘!/  일찍이 예레미야는 렘9:23-24절에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사40:7절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할/
  ⑵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여기 '지으시고'는 '야차드'인데 '형성하다. 만들다.' 즉 '토기장이처럼 만들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64:8절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아멘!/
  저와 여러분은 진흙으로 지음 받은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금으로 지었다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흙으로 지은 몸에다가 죄악의 때까지 묻은 별 볼일 없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기분 나쁘십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또 우리의 몸은 질병에 걸려서 금이 많이 갔습니다. 우리의 몸은 이병, 저 병을 앓으면서 심장도 금이 가고, 위장도 금이 가고, 그러므로 자랑할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교만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주께서 만든 인간 그릇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진리로 가득 채워지면 귀하게 보이지만 욕심과 음란과 강포와 교만이 담겨져 있다면 아무 유익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대로 인간이 쓰여지면 귀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르면 그 그릇을 깨뜨려 버리십니다. /믿/
  ⑶인간은 흙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그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전1:5-7절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 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인간은 흙으로 취해진 것처럼 머지않아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흙으로 지어진 존재는 이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합니다. 시90:10절에서 모세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약4:13-14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안개가 가득할 때는 굉장합니다. 비행기도 뜨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개는 사라집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는, 이렇게 무리를 지어 살아갈 때는 굉장해 보이지만, 그러나 시간의 바람이 불면 우리는 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찰스 다윈이 '해리옷'이라는 이름의 거북이 한 마리를 길렀다고 합니다. 그 거북이는 몇 십 년을 길러도, 아무리 오래 길러도 변함 없이 거북이입니다. 거북이가 억만 년이 지나면 사람이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찰스 다윈은 죽었는데 그 거북이는 얼마 전에 180살 생일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거북이를 기르고 있는 호주 동물원에서 생일잔치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지금 30파운드(약 14kg)의 그 거북이가 지금까지 제일 오래 산 동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데,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30년은 더 살 것이라고 합니다.
  거북이는 180살을 넘게 사는데 사람은 그만큼도 못 살고 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그 날의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믿/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인간의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죽음은 만인의 공포입니다. 옛날 진시황제는 죽음을 면해 보려고 불로초와 불사약을 구해보았지만 그는 죽어 한줌의 흙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영웅, 호걸, 열사, 미인, 그 누구도 죽음의 길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보십시오, 시90:3-4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이런 인간들이 하나님께 뭐 잘났다고 교만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다시 7절을 보시면/
  ⑷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허락하셨으므로 영생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된 것입니다. /할/ 어떤 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아멘!/할/

 

  ▶8-9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은 동방에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이란 말은 '기쁨, 즐거움, 희락, 낙원'이란 말로 헬라어로는 '파라데이소스', 영어로는 '파라다이스'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동산, 행복의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에게 지키고 관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과의 교제 장소로서 육신을 물질도 만족할 수 있는 곳이고, 영혼을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로 만족할 수 있는 곳입니다. 또 그곳은 거룩한 장소이므로  죄가 없는 곳이고, 죄인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이 동산 한복판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주셨는데 생명나무를 주신 것은 그 과실을 먹을 때마다 생명은 하나님께 온 것이라는 소속감을 알게 하셨고, 생명의 기원을 알게 하셨으며 아담과 하와의 신분의 존엄성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또 선악과를 주신 것은 몇 가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①하나님과 사람의 교제의 규범을 보여 주어 질서를 알게 하셨고,

  ②계명의 원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계명을 순종할 때 축복이 되고 거역하면 저주가 임함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③선악과는 인간창조의 목적을 알려주는 나무였으며,

  ④중요한 것은 마귀가 존재하고 죄가 있다는 사실을 경계시킨 나무입니다.

  ⑤선악과의 더 큰 의미는 인간에게 자유는 있지만 그 자유는 제한된 자유임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한마디로 에덴동산은 인간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소속되었다는 사실과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 살아야 생명을 유지하게 되고 나무는 뿌리를 흙에 두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설 수 없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구별하여 살도록 한 계명을 주셨는데 그 계명이 선악과의 계명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절대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건강, 자녀, 사업, 물질, 명예, 성공, 상대적인 것입니다. 상대에 따라서는 약할 수도 있고, 강할 수도 있습니다. 또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는 영원한 안식과 생명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요 그 계명자체가 바로 생명입니다. /아멘입니까?/

 

  ▶10-14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에덴동산에서 발원하는 4대강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주는 강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국에는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 섬진강 등 여러 강이 있어서 한국 벌판을 기름지게 하며 윤택하게 하듯 에덴동산에는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라는 4대 강이 있습니다. 이 강으로 아름다운 에덴을 더욱 빛냈으며 아름답게 했습니다. 우리가 상징적으로 생각해보면 에덴은 우리의 심령을 뜻함이요, 강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강은 인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인류 역사를 찬란하게 꽃 피우는 풍요로움을 준 것은 다 강물을 통해서입니다.
  애굽 문화는 나일강변에서, 바벨론 문화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에서 나왔습니다. 강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지역의 경계선입니다. 그러므로 강을 건넌다는 것은 그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입니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그만큼 개인이나 민족역사에 큰 영향을 던져주고 전환기를 이루게 합니다.

  히브리인이라 함은 이스라엘민족을 가리킵니다. 히브리라는 뜻은 야곱과 요셉의 일가족이 나일 강을 건너온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⑴아브라함은 믿음의 강을 건너온 사람입니다. 창12장은 고향 갈대아 우르를 75세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시하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유프라테스 강 하류로 비옥한 땅으로 덮어져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비옥한 땅을 두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⑵야곱도 기도의 강을 건넜습니다. 얍복강의 기도의 강을 건넜습니다. 야곱의 기도는 생명을 건 기도입니다. 홀로 남은 자의 기도였습니다. 간청하는 기도였습니다. 회개하는 자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기도의 강을 건너는 자에게 만나주십니다.
  ⑶모세는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여호수아는 그 백성들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⑷엘리야와 엘리사는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왕하2:8절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받으려고 한사코 그를 따라 다녔으며 요단강을 가르는 능력까지 받았습니다.
  ⑸우리는 장차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강을 건너가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에덴도 우리의 심령을 의미합니다. 강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에덴의 4대 강은 이렇습니다.
  ①비손강: 이 강은 '충만하다.'는 뜻이니 장마 때만 물이 있고, 가뭄 때는 물이 없는 그런 강이 아니라 사시사철 수원이 충만한 강입니다. 이 강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충만히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읍시다. 

  인간의 작은 심령으로는 형제의 허물 하나도 용납할 수 없으나 성령의 능력을 충분히 받게 되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 강은 금으로 뒤덮여 있으며 정금도, 진주도, 호마노도 있습니다. '베델리엄'은 진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먹는 즐거움도 주셨지만 그 위에 충만한 물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보석들까지 주셨습니다.
  ②기혼강: 이 강은 주위로 '흘러 넘친다.'는 뜻이니 충만한 자는 또한 흘러 넘쳐 이웃에게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충만한 성령은 예루살렘으로 넘쳐났고 예루살렘의 충만했던 성령도 다시 온 유대 땅으로 넘쳐났고 온 유대에 충만했던 성령도 사마리아 땅 끝까지 흘러 넘쳤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기혼 강처럼 흘러 넘쳐야 합니다. 기쁨이 넘쳐 찬미가 되고 간증이 넘쳐 전도가 되고 간절한 소원이 넘쳐 기도가 되고 감사가 넘쳐 눈물이 되고 생명이 넘쳐 영원히 사는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③힛데겔강: '급히 흐른다.'는 뜻입니다. 충만한 자는 넘쳐흐를 뿐 아니라 신속하게 넘쳐  흐름을 의미합니다.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신속하게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④유프라테스 강: '달다.'는 의미입니다.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곳에는 사막이 변하여 옥토가 됩니다. 한마디로 유프라테스 강과 같은 성령이 지나가면 우리 메마른 쓴 가슴에 옥토가 되어 변한다는 것입니다. 사막이 옥토로 변하듯이 쓸모 없는 자는 쓸모 있는 자로, 저주받은 자는 축복 자로 절망과 좌절이 소망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실패는 성공으로 하나님은 에덴을 지으시고 4대 강을 흐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처럼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멘!/

 

  ▶15-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독일 통일 이전에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동독에서 베를린 장벽을 넘어 개 한 마리가 넘어 왔습니다. 서독의 개가 물었습니다. '얘 너는 어떻게 목숨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넘어 왔니? 동독에는 먹을 게 없나보지?' 동독 개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서독 개가 되물었습니다. '그럼 왜 온 거야? 집이 없어?' 동독 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진짜 궁금해진 서독 개가 계속 묻습니다. '정말 궁금하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온 거야? 먹을 거 있고 집 있으면 됐지. 무얼 더 바라? 참 이상하네.' 그러자 동독 개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모르는 소리 말아. 그런 건 견딜 만해. 모름지기 개는 짖고 싶을 때 마음대로 짖어야 되는 거란 말이야. 어디 마음놓고 짖을 수가 있어야지. 답답해서 넘어 왔지.'
  무슨 이야기입니까?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자유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속박을 당하고 갇혀서는 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게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필요하지만, 인간은 결코 무제한의 자유를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자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베를린 장벽이 동독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박탈하는 '속박의 울타리'였습니다. 그러나 서독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뭡니까? 정반대로 자유를 지켜주는 '보호의 울타리'였습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물고기의 자유는 '물 속에서의 자유'입니다. 만일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면 자유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죽음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지고 행복할 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100% 착각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만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요 죽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약을 합니다. 자유입니까? 자기는 자유라고 강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요?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은 겁니다. 계속 그러다 보면 자신이 마약을 하는 게 아니라 마약 중독으로 속박되는 겁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요 방종이며, 그 결과는 죽음이요 멸망입니다.
  인간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울타리를 넘어감으로 오히려 자유를 박탈당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영원한 멸망으로 돌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요 기쁨이요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울타리를 보자!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기서 '동산'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성경 원문을 보면 '간'이라는 단어로 '울타리를 치다, 보호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산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으로 보호하기 위해 조성해 놓으신 울타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는 것은 속박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시고는 지키고 다스려서 운영이 잘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대자연을 인간들에게 잘 지키고 보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산에 가서 예쁜 돌만 있어도 무조건 자기 집으로 옮겨놓고 예쁜 나무만 있어도 옮겨 놓습니다.
  하나님은 대 자연만 지키고 보호하라고 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가정, 교회, 사회' 이 모든 것을 다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잘 가꾸고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주께서 피 값으로 세우신 이 몸 된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가정과 교회당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흔히 임금이 백성을 다스릴 때 군림과 착취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다스림은 군림이 아닙니다. 관리자로서, 청지기로써의 다스림입니다. 한마디로 더 많은 것을 남기고 발전시키고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낙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일을 하지 않고는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노숙자에게 '행복하십니까?'하고 물어보십시오. '기쁨이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십시오. '보람이 있습니까? 정신적인 만족이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십시오. 다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일이 없으면 얻는 것이 없습니다. 돈도 없습니다. 그래서 초라합니다. 그런데 일을 해 보세요! 땅콩을 뽑으면 수십 개의 땅콩이 줄기 째 딸려 나옵니다. 고구마 뽑아도, 감자를 뽑아도 한 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몇 개씩 딸려 나옵니다. 이렇듯 일하면 기쁨, 보람, 축복, 물질이 다 따라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5:17절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이 행복입니다. 일이 많다고 절대로 짜증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
  16절에서는 각종나무의 실과를 임으로 먹으라고 했습니다. '임으로 먹되 먹고 싶은 대로 먹으라, 자유대로 섭취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하나 만은 조심하도록 당부했습니다. 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나무 열매를 마음대로 먹으라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에는 한 가지 제한조건이 있었는데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善惡果)는 먹지 말라는 겁니다. 동산 중앙에는 선악과 외에도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이건 얼마든지 먹어도 됩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일종의 신호(signs) 즉 표지판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 어디서나 잘 보이도록 중앙(center)에 위치시킨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인간의 자유를 의미하고, 선악과는 자유의 제한 범위를 표시합니다. 그 제한 범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게 마땅합니다. 그것이 생명이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만약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짐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먹지 말라 하셔서 사람을 죄 짓게 하셨나?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머리로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며 살 때 축복이 옵니다. /믿/아멘!/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안다는 것은 선과 악을 분별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혼자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하나님, 이것이 선입니까? 이것이 악입니까?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했는데 이제는 자기가 하나님처럼 판단해서 자기가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망하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것 다 따먹어도 이것 하나만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엄마가 외출하면서 과자를 많이 사다놓고 이것저것 다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쪽에 의자 밑에 있는 것은 '먹지 말라, 그것은 쥐약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을 시험해 보십니다. '먹거나 먹지 않거나'는 인간의 의지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대로 먹었다면 정녕 죽을 것이고 먹지 않았다면 살 것입니다.
  '정녕 죽으리라!'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최초의 행위언약입니다. '하라, 하지 말라' 이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엄마가 나가면서 이르고 간 말이 궁금하고 의심이 생겨 정말일까 한번 먹어봐야 쥐약인지 아닌지 알 것이니 먹어봐야지 하고 먹어 봤다면 그 아이는 생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으면 이 어린아이가 쥐약을 먹은 것처럼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죽음이 틀림없이 찾아오게 됩니다. 여기서 죽음은 영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죽음입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그 분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가 두절된 것이 영적인 죽음입니다. /믿/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거운 계명을 주시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의 사도요한은 그의 서신 요일5: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감당할 수 있는 것을 주시고 또 어려울 때는 피할 길도 주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이 무겁다고 피합니다.

  여기 아담에게도 주신 것은 전부이고, 금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육일은 전부 우리의 날이며, 하루 주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전부 주시고 하나 만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표로 순종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할/
  신앙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축복은 순종하는데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먹고 하나만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 하나를 못 지킵니다. 열 개를 주고 하나만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는데 그 하나를 못 내놓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위계약을 체결하시고 바른 행위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하나님의 기대를 실망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의 동산 축복의 동산인 에덴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 때부터 인간은 죽음이 왔고 인간의 모든 근본 문제들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에덴의 회복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도, 모든 인간의 근본문제의 회복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회복됩니다. /믿/아멘!/    (2008년 11월 2일 오후예배)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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