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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설교 모음

by 【고동엽】 202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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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본문 :마2:1-14

 

서 론

 

1. 베들레헴 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 되었더라(4,5)

 

2. 온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

 

3.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사람들중에 평화로다(14)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세가지 신앙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 베들레헴에서 탄생 하셨습니다(4-7).

 

 

예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명령으로 온세상이 떠들석하던 그때 조용히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 하셨습니다.

 

이소식을 제일 먼저 알게된 사람들은 베들레헴 근처에서 밤중에 양을 치던 가난한 목자들이 었습니다(8).

 

그들은 비천했지만 마음이 깨끗하고 순전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깨어 있었기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베들레헴 탄생은 성경 약속 성취와 다윗 후손의 증거입니다.

 

오늘 이시대는 예수님 당시와 마찬 가지로 분주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순수함과 약속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늘깨어있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순수함과 기대감으로 늘깨어 있습니까?

 

 

 

 

둘째 :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10).

 

 

오늘날 슬픔,걱정,절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신은 진정 건강하고 기쁨이 충만하십니까?

 

동박박사들은 예수를 보지 않았지만 별만 보고도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마2:10).

 

예수님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생각만 해도 기쁘고,듣기만 해도 기쁘고, 마음속에 감동만 받아도 기쁩니다. 여러분 기쁨을 잃어 버리셨습니까?

 

이번 성탄에 빼앗기고 상실한 기쁨을 다시 되찾아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바라보며 감사 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웃음을 잃어 버리셨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셋째 :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가득합니다(14)

 

 

하늘에 영광이 가득하다고 했는데 그영광는 세속적인 영광이 아닙니다.

 

참 영광이며 진정한 영광으로 높은자가 낮아지는 영광입니다.

 

죄인을 용서하는 영광입니다.

 

여기에 참된 교훈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영광은 눈물과 희생에 있습니다.

 

남편,아내의 영광은 수고와 사랑,뜨거운 정성에 있습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섬김이며, 직분자의 영광은 충성과 헌신인 것입니다.

 

또한 땅에는 평화가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가장 근본적인 평화입니다(요14:27)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기뻐할줄 아는 사람에게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당신은 참된 영광과 참된 평화를 진정 소유 하셨습니까?

 

 

 

 

 

결 론

 

1.기대와 관심, 정결함으로 예수님 만나는 성탄이 되시길 바랍니다.

 

2.예수님을 만날 때 슬픔,걱정,절망이 웃음과 기쁨으로 변화됩니다.

 

3.예수님의 보혈로 영광과 평화가 충만한 성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평화 평화로다

 

본문 눅2:8-14

 

황영준목사

 

 

 

 

성탄절이 연말과 겹치면서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연말이 될 때마다 우리를 짓누르는 천근 만근의 무거운 짐을 진 그런 심정입니다. 한 해가 지나고 새 날이 되면서 홀가분하게 새로워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금년 연말에도 지난 1년을 회고하면 어려운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 앞이 재대로 안 보이는 경기 불황은 감원 선풍을 몰아와 수많은 가정이 해체 또는 파괴 위험에 직면해 있다. 또 고국에서 숱한 고초를 겪은 재중(在中) 동포를 비롯 탈북자, 외국인 근로자 문제가 꼬일 대로 꼬여 있다. 그런데도 과소비와 사치 풍조는 수그러질 줄 모르고 사회 각계 각층에 화합보다는 갈등이 깊어져 간다. 북한의 위협도 더욱 거세 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럴 때 타락, 탐욕에서 벗어나고 고통 당하는 이웃과 고난을 함께 하며, 하나님의 위로를 나누라고 했다"

 

어느 해 연말인들 평안한 때가 없는 것이 우리의 역사요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매년 되풀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 세상입니다.

 

페루에서는 인질범이 일본 대사관에서 100명이 넘은 사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어떤 사태가 발생 할 지 모릅니다. 아프리카에는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종족간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휴전선 넘어 북한의 내 동포도 죽도 못 먹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서 정든 고향을 내버려두고 두만강을 넘고 압록강을 건너서 도망칩니다.

 

남의 이야기가 그렇고 우리들도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어려운 현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가 절실합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합니다. 형제의 고통을 내 아픔으로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절실합니다. 2천년 전 유대 땅에만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어두운 심령에 예수님을 모

 

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운 밤을 밝혀 영광의 빛을 비쳤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두움이 물러갔습니다. 절망과 한숨이 물러갔습니다. 미움과 저주가 변하여 사랑이 되었습니다. 절망의 골짜기에 소망의 강줄기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1. 주의 사자와 함께 영광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8절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 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하였습니다.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하늘이 열렸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나고 신비로운 빛이 비추었습니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신비로운 빛이었습니다. 놀라고 두려워하는 저들에게 위로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은 영광의 빛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어두움으로 칠흑 같은 인간 세상에 구원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선포하는 의미 있는 빛이었습니다. 새로운 광명이 열림을 선포하는 놀라운 빛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어둠을 깨우는 구원이 빛이 비쳐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할 때면 빛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불러내서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을 때도 하나님은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호렙산 양치기로 있을 때 가시덤불 가운데서 신비롭게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제 내가 너를 바로 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 하였습니다.

 

나이 많아 늙고 쇠약해진 모세가 나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는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하나님께서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하였습니다. 빛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은 언약하신 그대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광야 생활 40년 동안을 인도하시고 동행해 주셨습니다.

 

빛 가운데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생의 광야 길에 동행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하였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5)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눈을 밝혀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변함없는 세계였지만 소경 에게는 기적 같은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신비로웠을 것입니다. 산천 초목과 꽃들이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예수님은 육신의 소경만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소경을 눈뜨게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소경을 보게 합니다. 자신을 보게 합니다. 사람이 성령 안에서 거듭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나를 보게 됩니다.

 

 

 

복음성가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낙심치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시오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은 너를 고치시리

 

예수님의 사역이 소개되는 마태복음 4장 24절에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 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하였습니다. 또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마4:24-25) 하였습니다.

 

문둥병자와 소경과 중풍병자와 귀먹은 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귀신 들려서 가족까지 염려하고 불안해했던 사람들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와 갈릴리와 같이 어둡고 소망 없는 그런 환경에서 사는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

 

본 문: 누가복음 2:8-14

 

 

 

 

1809년은 이상하리 만큼 세계적인 위인들이 많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비밀 투표 등 민주의회의 초석을 놓은 영국의 재상 위리엄 글래드스턴, 찰스 다윈, 아브라함 링컨, 악성 멘델스존, 시인 테니슨 등이 그렇습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위인들의 업적보다 더욱 위대한 업적을 이룬 한 사람이 2000여년 전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태어났습니다. 이날은 인류의 정신문화와 역사에 대변혁이 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분이 태어난 해를 역사의 분기점으로 삼아 기원전, 기원 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이 누구일까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이 12월 25일입니다. 이날은 세계적인 명절이 되어 있습니다.

 

 

 

 

Ⅰ.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셨을까요?

 

 

1.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찬양한 노래를 기록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했습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우주와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인간을 영장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만물은 인간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은 만물을 다스리며 먹고 마시고 즐기기만 하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물은 다 창조 목적이 있습니다. 길가의 풀 한 포기, 땅속의 벌레 하나까지 다 지음 받은 까닭이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겠습니까? 더욱 귀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43:7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가 헛된 길에서, 헛된 것만 추구할 뿐 인간 본연의 사명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목적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목적 기능은 상실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계나 물건에 비유한다면 고장이 나 쓸 수모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간 본연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시고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의 방향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다는 것은 우리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앙인 가운데, 지난 88년 서울 올림픽 때 육상 단거리에서 3관 왕을 차지한 "그리피스 조이너"라는 미국의 흑인 여자 선수 있습니다. 그는 경기가 끝날 때마다 경기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금메달을 수상한 후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묻기를 "달려갈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달린다. 금메달도 명성도 다 안개다. 운동장에서까지라도 나의 행동, 나의 경기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만이 나의 만족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치 고장나지 않는 물건이나 기계를 아끼며 잘 관리하는 주인의 마음과 같습니다.

 

 

 

 

2. 땅의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들의 노래가운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켜 화평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룩한 사람의 삶의 증거는, 그가 머무는 곳마다 평화가 있게 됩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나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 노예제도가 사라졌습니다. 기독교가 있는 곳에 양반과 상민, 남존여비가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평화와 자유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쓴 성프란시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게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 모두의 소원,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Ⅱ.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이룩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일생 대변하는 도구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으며, 어떻게 땅위의 평화를 이룩하셨는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1. 말구유입니다.

 

 

본문인 누가복음 2:7의 말씀에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와 호적을 하는 때였습니다. 먼저 찾아온 사람들이 이미 여관을 다 차지했고, 만삭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먼길을 힘겹게 찾아온 마리아는 방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방 한 칸 마련할 수 없어서 구유에 탄생하셨겠습니까? 만일 천사를 동원하여 어느 권력자의 집이나, 부자의 집을 찾아가 지시했더라면 어느 누가 감히 거절했겠습니까? 누구나 기쁜 마음으로 방을 비워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유에 탄생하신 그 자체가 진리요 교훈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광이 가득한 하늘 나라에서 추한 세상에 내려오시되, 왕의 궁궐이나, 부자의 호화로운 저택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가난한 목수 요셉의 가정에 오셨습니다. 출생의 때는 구유에 오셨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 곳 없는 자리에 오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하신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가장 높이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만큼 존귀하신 분,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낮아져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은 존귀함의 길이라하셨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하셨습니다.

 

 

겸손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으며, 땅에 평화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웁니까? 교만하여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화를 깨뜨립니까?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이러한 사람까닭에 이웃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화평은 깨어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건물의 출입문은 아주 낮고 작습니다. 허리를 숙이지 아니하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문 위에 "겸손의 문"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까지 낮아지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셨고, 땅의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 모습을 우리들은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2. 세수 대야입니다.

 

 

요한복음 13:4-7, 12-15의 말씀에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스라엘나라는 날씨가 덥고 먼지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집에 들러오면 먼저 발을 씻는 것이 풍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관례로는 가정의 하인이 주인이나 귀한 손님이 집으로 들어오면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인이 하는 일, 아랫사람이 하는 그 일을 친히 하셨습니다. 이것은 섬기시는 예수님의 봉사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섬기기보다 섬김 받기를 더 좋아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

 

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지 않아도 될 사람, 도리어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점가운데 하나는 마땅히 섬겨야할 사람까지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섬기는 사람을 찾아 복을 주셨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섬긴 아브라함, 20년간 외삼촌을 잘 섬긴 야곱, 13년간 억울하게 노예로, 죄수로 살았지만 그래도 주위 사람을 말없이 섬긴 요셉, 40년간 애굽의 학문을 통달한 석학이었으나 양치는 단순 노동으로 40년을 처가를 섬긴 모세, 광야생활 40년 동안 한마디 원망과 불평도 없이 모세를 섬긴 여호수아와 갈렙, 악한 왕 사울 앞에서 그래도 신하의 도를 다한 다윗, 끝까지 엘리야를 섬긴 엘리사 등 모두가 섬기기를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기 전 먼저 섬김의 자세를 확인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섬기며, 아래로 사람을 섬길 때 이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땅의 평화가 이룩되기 때문입니다.

 

 

 

 

3.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이 십자가는 본래 흉악범을 처형할 때 사용하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어떤이는 목걸이로, 또 어떤이는 뺏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결과 죄인 된 우리들이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대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셔서 희생하신 그 고귀한 희생의 상징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희생으로 주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고, 이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가치 기준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해 살아간 삶은 아무도 인정하거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얼마나 희생을 했느냐 하는 것만 삶의 가치로 인정하게 됩니다. 자기자신 만을 위하는 것은 동물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짐승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가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이웃을 위해 희생할 때 땅에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이 시간 전국 곳곳에서 4만여 교회, 1200만 성도들이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날이 있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감격한 수많은 선교사들과 앞서간 성도들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렸습니다. 그 고귀한 희생에 의해 오늘이 있게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평화롭습니다. 다소간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옛날에 비해 얼마나 풍요롭습니까? 이 평화와 풍요로움이 저절로 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제 치하와 6.25전쟁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애국지시들과 우방국들의 젊은이들이 피 흘려 희생한 대가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 참 사람의 모델로, 하나님께 영광과 땅위의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이를 이루시고자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이었습니다.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본을 보여주신 삶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셨다

 

사9:1-7마4:12-17

 

임영수목사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준 분으로 기억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고 부정적인 인상을 준 사람으로 가끔 기억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에게도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 가운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분으로 기억되는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거창 고등학교 설립자이신 故 전영창 교장이십니다. 저는 그 분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생략하고, 그 분에게 있었던 일화 한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분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첫 번째 부름을 받은 곳이 폐교 직전에 있던 거창에 있는 한 학교였습니다. 교장에 취임하기 위해 서울에서 거창으로 내려가 그 다음날 교장 취임식을 가졌을 때 전교생 이백여명의 학생 중에서 취임식에 참석한 학생은 겨우 여덟명이었습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다 인근 학교로 가버렸습니다.

 

 

그는 빚더미 학교를 인수하고 나서 확고한 신앙심에 바탕을 둔 신념을 지닌 선생들외에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한 선생들을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선생들의 월급을 삼만환으로 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삼만환마저도 지불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얼마 안되어 학교의 어 려운 사정을 안 선생들은 교장을 찾아와서 자진해서 월급을 반으로 줄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교장으로 취임한 후 처음으로 희망의 빛을 보았다고 술회했습니다.

 

 

월급을 자진해서 반으로 줄인 선생들의 열정은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보충수업을 서로 하려는가 하면 수업시간도 서로 맡으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꽁보리 밥만 삶아 먹다가 그것도 없으면 국수를 삶아 먹고 그것도 없으면 감자를 삶아 먹었습니다. 그마저 없으면 굶었습니다. 선생들의 뜨겁고 숭고한 열정에도 아랑곳없이 학교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전임교장이 남긴 빚의 이자가 날로 불어났습니다. 매일같이 빚쟁이들이 교장실로 들이닥쳐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 많은 부채 중에는 정부 기관으로부터 대부받은 것도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기관으로부터 학교를 차압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장실 문을 닫고 의자 앞에 엎드려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천정 이상 더 올라가지 않는것 같았습니다.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를 해봐도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는 교장실 문을 박차고 나가 운동장 한 가운데 서서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외쳤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내 기도를 듣고나 계십니까?

 

 

내 기도에 응답을 하실 겁니까??

 

 

 

 

차압 기간이 점점 다가오는데도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는 견디다 못해 하나님과 최후 담판을 하기로 작정하고 거창읍에서 40리쯤 떨어진 웅양면에 있는 굴을 찾아 갔습니다. 일주일 작정하고 금식기도를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불평을 다 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거창에 돈을 벌려고 왔소?

 

 

아니면 내 명예를 위해서 왔소? 복음을 전한다고 당신이 보내서 왔지.

 

 

 

 

그런데 왜 학교 운영할 만한 돈을 주지 않습니까?

 

 

만약 빚을 못갚아서 제가 거창서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나가면 누가 더 창피하겠소?

 

 

하나님이 더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제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과 찬송가 외에 평소 탐독하던 우찌무라 간조의 로마서 주석과 담요 한 장만을 가지고 산에 온 그는 성경을 읽다가, 찬송을 하다가, 우찌무라의 책을 읽다가 너무 피곤하고 답답하면 잠깐동안 눈을 붙이면서 나흘 동안을 하나님께 애걸복걸 하였지만 아무 도움도 없었습니다. 마음만 더욱 초조하고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오후에 그는 더 견디지 못하고 동굴에서 나와 그 앞에 있는 바위위로 올라갔습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바위 위에선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하나님이 없다는 광고를 일간 신문에다 큼지막 하게 내고 싶었습니다. 고향에 마지막 남아있는 전 재산인 논 열세 마지기를 다 팔아서라도 광고를 내서 다른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아서 피해를 입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위 아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아래는 깊은 골짜기였습니다. 그는 문득 학교에서 배운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도 공전을 한다는데 그 속도는 제트기로 백두산과 한라산을 한 시간에 오갈 수 있는 속도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털털 소리가 나고 어지러울 텐데 아무소리도 없이 털털거리지도 않고 아주 조용하게 달리지 않는가. 기계는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소리가 없고 또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큰 지구가 이렇게 빨리 달리는데 그것도 자전을해가면서 소리 하나 나지 않고 부드럽게 달리는 그 배후에는 이 지구를 지으신 분이 없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바로 그때, 해는 함양쪽에 있는 산 너머로 막 넘어가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석양의 아름다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산능선에 걸린 태양은 장엄하다 못해 신비로웠습니다. 어디 그뿐인가,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연두빛 잎새들의 생명의 윤기, 저녁 노을에 비친 풀잎과 나뭇잎은 한 폭의 그림 이상의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영창아, 이 아름다운 그림의 배후에 화가가 없을까? 화가 없이도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까??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어둠이 서서히 짙어지자 주위의 새들이 울기 시작하고 이름 모를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렸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계곡에서 흐르는 물 소리, 그것은 자연이 완벽한 화음을 이루어 빚어내는 아름다운 합창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영창아, 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가 없을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께 숙연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제 빚을 다 갚아 주시든지 갚아 주시지 않든지 거창고등학교에서 일하겠습니다.?

 

 

기도를 하는 그의 두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기도를 마친 그는 그날 밤 굴속에서 평온하게 잠을 잤습니다. 학교에 돌아오니 미국에서 온 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 구좌에 2,050불. 조우 보기.?

 

 

?곧장 서울로 올라가서 달러를 바꾸어 정부 기관의 빚을 다 갚았습니다.?

 

 

학교 채무로 깊은 흑암에서 고통받던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치었습니다. 그가 무겁게 멘 채무의 멍에에서 그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무거운 채무의 멍에를 메고 고통을 겪는 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역시 한민족 공동체가 겪는 어두움의 고통도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본문에서 바로 그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메시아의 노래입니다. 어두운 가운데서 하나님의 빛으로 오실 메시아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이사야서에는 고난의 종의 노래가 있고 메시아의 노래도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 남단과 북단에 위치한 이스라엘 지파들로서 강대국 앗수르 침공 때 가장 고통을 많이 받았던 지파입니다. 그 대지 위에는 흑암이 짙게 덮여있었습니다. 예언자는 그 흑암 가운데서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고 기뻐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때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의 기쁨은 추수때의 즐거움이나, 탈취물을 나눌 때의 기쁨보다 더 클 것입다.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은 반드시 어느 지역을 국한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타난 지역은 어디까지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과 억압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장차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임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흑암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인간의 역사에서 한 아기의 탄생의 사건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한 아기의 탄생이 흑암 가운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빛의 사건입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현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십니다.

 

이렇게 한 아기에게 많은 이름이 부여되는 것은 그가 고통받는 사람에게 주는 다양한 영적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역사에서 한 아기의 탄생과 함께 그들이 메고 있던 무거운 멍에서 풀려나는 경험을 여러 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억압의 사슬에 얽매어 신음하고 있을 때 모세의 탄생은 그들의 억압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기회였습니다. 그들이 블레셋의 억압의 사슬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아이 사무엘의 탄생은 흑암 가운데서 고통받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빛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삼손의 탄생 역시 그들이 억압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해방의 시간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하는 한 아기의 탄생 역시 흑암 가운데서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전의 아기들과 차이점은 이 아기의 탄생으로 미치는 그 빛의 영향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인류에게 파급됩니다.

 

 

예수께서 유대땅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을 방문하셨을 때 복음서 기자 마태는 그 사건이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어두운 역사의 밤이 새로운 아침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내다보았습니다. 궁극적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난날 역사의 한 시점에 인간으로 방문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분명히 드러내신것입니다.

 

 

태초에 온 우주가 어둠으로 덮여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면서 먼저 어두움 가운데 빛이 있게 하신 하나님은 그 후 계속 빛으로 어둠이 우리의 대지를 뒤덮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피조물들이 어두움 가운데서 신음하며 고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한 아기의 태어나심 가운데서 빛으로 임재해 오시는 하나님의 현존이 어두운 대지 위에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 아기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포기하시지 않으셨다는 유일한 확인입니다. 어둠의 세력이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대강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기간입니다. 일년중 한 해를 거의 다 보내면서 대강절을 맞이 한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에서 언제나 희망의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때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비록 어둡고 고통스러운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적절한 때에 우리에게 기묘자(카운셀러), 모사, 전능하신 분, 영존하시는 분, 평강의 왕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멍에를 벗겨 주시곤 합니다.

 

 

금번 대강절에 우리는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우리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이 기다려지는 때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새해, 좀더 나아가서 우리의 미래가 영원한 흑암의 고통으로 끝난다면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새해에 우리에게 평강의 왕, 우리의 고통과 멍에를 벗겨주시는 위로자로, 모사로, 우리에게 찾아 오실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두운 역사의 현실에서 빛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대강절에서 내다보는 새로운 한해는 우리에게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합니다. 그 희망은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오시고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희망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나 실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실재 앞에서 초조, 불안, 조급함에서 벗어나 젖먹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깊이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평온 가운데서 잠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진정 하나님 되심을 보곤 합니다.

 

 

우리 개인의 역사,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반복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반복 가운데서 계속해서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되어가게 됩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멍에를 벗어 버리며 자유인으로 되어갑니다.

 

 

금년 한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금년 한해는 매우 어두웠을 것이며, 우리의 삶은 매우 무미건조하고 지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년 한 해도 오시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깊이 찾아오셔서 개입해 주셨습니다. 금년 한해 살아온 결론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정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그분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금년 한해의 삶의 결론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시작되는 한해를 그 하나님의 오심과 함께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어두움이 있는 현실에서 희망으로 시작해서 위로와 감사로 한해를 마감하게 됩니다.

 

 

크리스마스에 내려온 기쁨

 

눅2:15-20

 

조주희목사

 

 

 

 

오늘은 성탄음악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찬양이라고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도요, 또 한편으로는 선포요, 메시지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고백이 됩니다. 바로 전에 성가대의 찬양을 들었습니다만 이 찬양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받으시고 함께 돌리시고 그리고 함께 참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찬양과 함께 아울러 잠깐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3가지 메시지를 캐내려고 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2장 8절을 보겠습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당시 '목자'하면 두 가지 보편적인 개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믿을수 없는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양의 주인이 아니고 단순히 관리자라서 그랬던 것인지 양을 소홀히 돌보고 때로는 양을 훔쳐내고는 거짓말을 하는 경우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못 믿을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둘째로는 당시 유대인의 규례에 의하면 목자의 일은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적인 비천하였고 종교적인 소외를 당했고 심지어는 자신들 마저 자신을 값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실직자들의 참 아픔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식구를 부양할 돈이 없는 것입니까? 그것도 포함됩니다만 그들의 본질적인 상처는 '쫓겨났다. 쓸모없이 여겨졌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아픔입니다.

 

 

그런 목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9절을 보세요.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황홀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기 주목할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서" 비천하고 종교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자신들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들 곁에 주의 사자가 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목자들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으나 그러나 하늘은 달랐다. "주의 사자, 영광" 이것은 그들과 전혀 관계없는 얘기입니다. 예루살렘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나 관계 있는 얘기이지 그들의 가슴과 머리 속에는 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그들에게 주의 사자를 보내시고 영광보이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참 기쁨입니다. 큰 기쁨입니다.

 

 

기력을 입은 사람들,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삶의 덧없음에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가난함에 불행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 삶에 지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는 빛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참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의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답게 보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선언하시는 사건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참되고 큰 기쁨이 임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은 그들에게 들려온 음성이 무엇인가? 10절부터 12절을 보겠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목자들에게 보다 큰 음성으로 들린 내용은 "온 백성에게"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존귀한 자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 스스로 종교적인 경건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온 백성'입니다. 자신들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빠졌는데 지금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같은 목자들에게까지도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차별 없이 내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땅에 얼마나 차별이 강한 구조로 자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차별은 사람을 찢어 놓습니다. 대립하게 합니다. 증오하게 만듭니다.

 

실수로 일어나는 차별이야 그저 침 한번 꿀꺽 넘어갈 수 잇는 것이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구조적이고도 의도적인 차별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평화를 깨뜨립니다.

 

 

성탄절에 주시는 강력한 메시지는 하나님께는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셨고, 세리와 창기들과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경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지는 얼음 같은 차별의 사슬을 끊어 내신 것입니다. 목자들은 여기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에 있는 차별로 인한 아픔이나 차별을 조장하는 모든 것이 평화와 기쁨으로 바뀌는 놀라운 역사가 이번 성탄절에 이 땅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16절부터 18절까지를 보십시오.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목자들이 하나님의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목자들의 삶의 역할이 전혀 달라졌다. 마리아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는 자로서의 역할까지 한 것입니다. 목자가 아니라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성탄절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탄의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함께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역사를 찬양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인류의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을 고치시기 위해 오신 주님을 가족들과 이웃들과 그리고 교우들과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성탄절은 구주가 오셨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메신저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이 땅 가운데 나아가야 합니다. 한밤에 졸며 양떼를 지키는 이 세상의 변두리에 있던 존재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여러분들의 언어가, 여러분들의 모습이 메신저적 의미를 가졌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 땅 백성들 가운데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소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죄악의 심각성을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없는 성탄절은 반쪽의 성탄절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바로 이 메신저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자들은 첫 번째 성탄절날 아름다운 경배를 드렸습니다. 20절을 보세요.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송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영국국왕이 신하들과 귀족들이 집결해 있는 곳에 나타납니다. 그러자 모든 귀족들과 신하들이 엄숙한 자세로 일어나 최고의 예우를 보입니다. 그때 국왕이 말합니다. "여러분 자리에 앉으시오. 나는 여러분들의 친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나는 주님이 아니잖소." 그러자 귀족중 한 명이 "폐하 만일 폐하기 주님이셨으면 저희들은 이렇게 자리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셨다면 저희들은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성탄절은 오신 주님을 큰 기쁨 가운데 맞이하는 날임과 동시에 무릎 꿇는 날입니다. 여러분 모두 내 삶 모두가 주님의 것이며 그래서 주님의 뜻 앞에 100% 순종하겠다는 참다운 경배의 무릎을 꿇는 날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없는 사람들

 

눅 3:1-7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크리스마스란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성육신(Incamatio, Inacmation)하신 위대한 역사적 사실과, 그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류 역사가운데 오셨던 참으로 엄청나도 시비한 사건이 아기 예수의 탄생에 감사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날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복잡한 일과, 분주함, 또는 자질구레한 일들로 크리스마스가 어수선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하고 복된 크리스마스를 올바로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한 세기를 보내는 마지막 성탄일을 앞에 두고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유대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시던 그 때에 크리스마스의 은혜와 기쁨을 알지 못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증거해 드림으로, 오늘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지 않아야함을 위해 증거해드리며, 참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1. 여관 주인입니다.(눅 2:7)

 

이 여관 주인은 재물에만 눈이 어두웠던 사람입니다. 만삭이 된 여인을 보고도 모른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동정심이 없었습니다. 무정했습니다. 그저 돈벌기에 급급했고, 그저 바빴습니다. 선을 베풀어야 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질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관 주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의 방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간적인 재물들이나 사소한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라는 방 속에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차있고, 돈벌려고 하는 생각으로만 가득차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2. 헤롯 왕입니다.(마 2:1-3)

 

예수께서 탄생하실 당시 유대의 분봉왕은 헤롯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광과, 위대함과 왕위를 구하는 정치광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의심을 품고, 결국 자기보다 더 나은 의심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죽였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질투에 찬 두려움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기 왕권을 취할까 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이 권세욕이 있고, 질투심이 많은 이 사람은 불행하게도 자기의 통치기간에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에 평화의 왕이신 주님이 오셨건만 그는 주님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자신의 결정과 계획들, 자신의 중요한 일, 자신들의 가치와 도덕을 잃게 될까 몹시 마음을 쓰며 급급해 합니다. 즉 자신들의 방식을 속박 받을까봐 그들은 그리스도께 마음 문을 열고 나오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3. 대제사장들과 서시관들입니다.(마 2:4)

 

그 당시 대제사장들(High Priest)은 신학적인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관리를 통솔하는 자들이었고, 최고의 행정력, 교육, 지도자적 기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규칙에 의해 선택된, 제사장들 중 으뜸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성경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서기관들(Secretary)은 어학자들이요, 성경 해석자들이며, 성경의 자료에 관련된 모든 문화와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두 부류의 사람들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물음에 정확히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를 찾아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난 아기가 정말 메시야인지 가서 확인해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지식의 교만함이 가져다준 안일함과 무관심으로 인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긍심과 자기의의 자부심으로 꽉 차있었기 때문에 메시야가 태어날 줄 알면서도 찾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냉담했습니다.

 

 

 

 

<맺는말>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올바로 맞이하지 못한 데는 많은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들에는 세상 돈버는 재미에 빠져 만삭이 된 여인에게 동정을 베풀지 못하고 크리스마스를 잃어버린 여관 주인이나, 세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질투심에 가득차 자기 땅에 오는 메시야 평화의 왕을 죽이려 했던 헤롯 왕과 같은 사람, 지식으로 인해 오는 교만함과 냉담, 그리고 종교적 의식이나 자기 의에 빠진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크리스마스를 잃어버린 크리스마스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를 넘어서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불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믿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크리스마스를 진정하게 보내지 않았다면 나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던 그의 오심을 믿는 크리스마스가 되게 하십시오. 이번 크리스마스는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참된 구원의 실제가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크나큰 기쁨의 선물

 

본문 눅2:1-14

 

김중렬목사

 

 

 

 

성탄절은 기쁨의 절기입니다. 성탄은 그 누구에게나 크나큰 기쁨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이 성탄절에 누구나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누구나 큰 기대와 함께 기쁨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10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탄절은 이 민족의 중요한 명절이 되었고, 이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기쁨의 명절이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누가복음 2 : 10에 보면,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해 준 좋은 소식입니다. 이 좋은 소식(福音, good news)은 구주(그리스도, 메시야)가 나신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 이 좋은 소식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로서 거저 주시는 크나큰 기쁨의 좋은 선물(good present)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편지를 받을 때 기쁩니다. 이 편지 속에 좋은 소식이 담겨 있든, 좋지 못한 소식이 담겨 있든 간에 일단 편지를 받는 그 순간은 기쁜 것입니다. 더욱이 그 편지 내용이 기쁘고 반가운 좋은 소식이면 더욱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래서 편지를 읽고 또 읽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편지를 받는 일도 기쁜 일이지만 선물을 받는 일은 더욱 기쁜 일입니다. 그것도 자기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받을 때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습니다. 성탄절에는 우리들이 아름다운 마음과 정을 담은 성탄절 카드와 선물을 주고 받으며 지내는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기쁨의 절기입니다.

 

이 아름답고 복된 절기, 기쁨의 성탄절에 여러분들은 어떤 선물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대학 입학시험을 치룬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은 '합격'이라는 기쁜 소식의 선물을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합격의 기쁜 소식을 받은 자들도 있습니다. 한없이 기뻤으리라 믿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이 이 성탄절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보내 주신 선물 중에 어쩌면 가장 큰 선물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1. 그러나, 가장 큰 기쁨의 선물은

 

그러나 이 성탄절에 우리들이 참으로 기뻐해야 할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의 내용은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선물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토록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크나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의 경우 우리가 이 크나큰 선물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불쌍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귀한 선물을로 주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선물을 기뻐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바빠서, 너무나 분주해서 그 귀한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관마다, 호텔마다 손님이 가득 차서 아기 예수를 영접할 방이 없었습니다. 또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를 맞이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세상의 욕심과 세상의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탄절은 우리들에게는 기쁜 날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슬프고 아픈 날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픈 마음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그것도 외아들을 우리들에게 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RP서 우리들에게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 성탄절에 아기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크나큰 선물로 아기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이 성탄절에 이 같은 크나큰 기쁨의 선물이 되시길 바랍니다.

 

 

 

2. 크나큰 기쁨의 선물

 

어찌하여 아기 예수가 우리들에게 크나큰 기쁨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까? 그 선물의 내용이 무엇이길래, 즉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이며, 누구이길래 우리들의 기쁜 선물이 되신다는 것입니까? 첫째는 구원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는 누구입니까? 구주입니다. 세례문답을 하면서 "예수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했는데, "예수는 나의 구주입니다, 나의 주님입니다, 나를 죄악에서 건져 주신 구주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나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어 변화하여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토록 죄인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 멸망받을 자가 구원얻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고, 이것보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 이토록 예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가장 큰 구원의 선물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기뻐하는 것 입니다.

 

 

 

둘째는 생명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에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강보에 싸인 아기는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생명을 강보로 싸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생명을 연장할 수 없는 죽음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같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기 위해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생명으로 우리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 : 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고, 그 독생자, 생명이신 독생자를 믿음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자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셋째는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선물입니다.

 

마태복음 1 :23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의 은총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외롭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외로운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병석에 누워 계시는 분들, 감옥에 갇혀 있는 분들, 외롭고 슬픈 가난한 어머니들이 너무 많습니다. 상점마다 가게마다 선물들이 가득가득 쌓였는데도 그 선물 하나 사서 자식들에게 줄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가난한 어머니들에게는 슬프고 외로운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외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해야 하는 날입니다. 성탄의 기쁨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8 :20에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특별히 이 성탄절에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네 번째의 기쁨의 선물은 평화입니다.

 

본문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는 우리의 평화이며, 평강의 왕이십니다(사 9:6-7). 아기 예수가 누구에게 평화입니까? 아기 예수가 아무에게나 평화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 예수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인하여 기뻐하면서 그 선물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 가지며 사는 자, 이 같은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이 같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자 중에 예수님은 평화가 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 : 27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을,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영원한 평안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기쁜 성탄절에 구원의 주, 생명이신 아기 예수, 임마누엘 예수,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아 크게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첫번 크리스마스 이브

 

사 9:1-7 눅 2:8-20

 

 

 

 

 

예수가 탄생할 즈음 팔레스타인에서는 추운 계절을 피한 3월과 11월 사이에 양들을 들판에 내어 놓고 방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근방(특히 베들레헴)에서는 성전 제사에 쓸 양을 충당하기위해 1년 내내(겨울철인 12월-2월에도) 양을 방목했다. 그래서 6세기 당시 서방교회의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하여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잡았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은 최초의 사람이 다름아닌 베들레헴 들판의 양치기 목자들이었다고 전한다. 구주탄생의 소식이 목자들에게 먼저 전해진 것은 의미있는 사건이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목자들이 매우 천한 일을 하며 그들이 늘 양떼와 같이 있어서 서기관들이 요구하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하찮케 취급하였다. 그러한 취급을 당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비천한 목자들이 예수의 탄생소식을 최초로 듣고 이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될 수 있었을까?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8절은 ; 목자들이 맡겨진 직분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당시 예수 탄생의 때는 팔레스타인의 겨울이었다. 더욱이 베들레헴은 해발 600m의 고산지대였기 때문에 한밤중에 목자들이 양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들은 성전에 바쳐질 희생양(제물)을 돌보면서 들판에서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그러한 충성과 열심이 그들을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최초로 구주 탄생의 복된 소식을 접하는 축복을 얻게 했다.

 

 

 

 

15-16절은 ; 목자들이 사명감에 불타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목자들은 베들레헴 교외의 들판에서 양을 치던 중 천사들을 통해 구주 탄생의 실로 어마어마한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대망하던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듣자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주탄생 장소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즉시로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이다. 성전의 희생 양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들에게는 참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속죄양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었던 것이다.

 

 

 

 

17-19절은 ; 목자들은 보고 들은 대로 충실하게 증거하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아기 예수를 찾아간 목자들은 천사에게서 전해 들은 말을 그대로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하였다. 즉 목자들은 그들이 믿고 들은 내용을 한치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예수의 부모들에게 전한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천사들이 목자에게 선포한 말씀과 당시의 상황은 목자들 밖에 아는 자들이 없었지만 그들이 충실하게 증거함으로써 또 다른 여러사람들의 입을 통해 결국 누가복음에 묶여져 성서 말씀의 일부로 기록되었으며, 이것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일점 일획의 더함이 없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들려 주고 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를 교훈한다. 진실로 복음전파의 사명을맡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해야 한다.

 

 

 

 

20절은 ; 목자들이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목자들은 당시 팔레스타인의 최하위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에 불평하지 않고 맡겨진 직분에 묵묵하게 충성한 결과 구주 탄생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첫번째 축복을 입었으며, 놀라운 이 소식을 널리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아기 예수를 방문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가 사실로 나타난 것을 목도하는 두번째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룻밤의 짧은 시간에 말할 수 없이 놀랍고도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직접 체험한 목자들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 놀라운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향해 조용히 찬양과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목자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들은 인생 최고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과 자기들이 본 것이 한없이 전파될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기쁨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실로 인생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며 하나님께서는 그 행복의 초점을 인간에게 두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한 방법으로 인간의 가족 어린아이를 택하셨고 베들레헴 마굿간을 찾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에게는 '평화'는 인생의 가장 큰 희망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인간이 요구하는 영광은 자기중심의 부귀영화이지만 예수가 행한 '하나님께 영광'은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가난한 자들과 어린 것들에게 친근히 하시고 잔인과 부정을 미워하시며 모욕을 당해도 반항치 않으시며 원수의 사유를 구하신 영광, 곧 주린 자를 먹이시고 헐벗은 자를 입히시며 실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시고 차별없이 사랑하시며 인간의 평화를 위해 일하시고 만민을 한 형제로 포용하신 그 영광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의 모습을 우리는 신약성서 곳곳에서 찾아 볼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식에 고통당하는 자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신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결심을 통하여 가능하며, 될 수 있으면 피해자에게 보상할 것을 명하셨고 다음에 요구되는 것은 사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확증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크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이 확보되었으며 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사유, 고침, 평강을 얻을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근심과 공포에 싸인 자에게 평화를 주신다. 근심과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믿음이다. 생(生)이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으며, 세상은 무관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과 능력을 믿을 수 있을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역경에서 헤어날 수 있다. 그러나 생의 허무, 세상의 무관심만을 주장하는 자는 살 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고뇌와 공포에서 신음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믿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사랑과 성실로 남을 돕는 과정 중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줌으로써 평화를 주신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천사들이 노래한 평화이다. 예수가 오심으로 이루어진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를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세계 평화도 우리가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만민을 위한 관심'에 동참할 때 가능할 수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의 탄생에 있어서 '목자들의 경배'가 지상의 반응이었다면 '천사들의 찬양'은 곧 하늘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천사들은 한 입을 모아 찬양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노래했다. 이 찬양을 투해 예수탄생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던 것이다. 실로 인류 구원을 위해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선하심은 정녕 찬양 받아야 마땅하다. 즉 하나님은 다른 일로도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하지만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신 사건은 특히 지극히 높은곳에서 그 분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한편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러한 선하심은 이 낮고 천한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으며, 참 평화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처럼 허다한 천군천사들에 의해 증거된 믿음의 외침, 즉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가 된다는 이 말은 복음 중의 복음이요, 진리중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예수의 탄생후 최초의 경배자가 바로 목자들이었다는 오늘의 본문은 예수는 영혼의 목자장(牧者長)이시라는 것과, 선한 목자되신 예수는 양들, 곧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신 분이라는 것, 예수는 유리방황하는 자들의 생명의 길과 안내자가 되신다고 하는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 인생의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시는 예수탄생의 소식을 기쁨으로증거한 2,000년 전 목자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우리의 입술과 행위로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그렇게 될 때 이 기쁜 소식은 진정 모든 인류의 영혼을 구원할 복된 소식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메리 크리스마스 !! (Merry Christmas!!)

 

 

첫 번째 크리스마스

 

누가복음 2 : 8 - 20

 

 

 

 

[8]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요즘 저희 집 아이들은 크리스마스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도대체 왜 이렇게 크리스마스는 오지 않느냐고 한숨을 쉬곤 하는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제 아이들이 기다리는 대상은 예수님이 아니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입니다. 저희 집 아이들은 비교적 순진해서 아직 산타클로스를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큰 아이가 요즘 들어서 무엇인가 의심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눈치가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아는지 모르는지 저로서는 분명한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저희 집 사람은 아이들의 동심을 키워주기 위해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별로 멋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잘못된 지식은 최대한 빨리 계몽하여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면 저는 어렸을 때는 한번도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믿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산타할아버지가 진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말해도 저희 아이들이 못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아이들에게 산타할아버지의 실체에 대해서 가르쳐 주려는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저희는 매년 성탄절이 되면 한 아이 당 두 개씩 선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는 산타할아버지가 주는 것, 또 하나는 아빠 엄마가 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개만 준비했더니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산타할아버지는 선물을 준비했는데, 아빠, 엄마는 선물을 어떻게 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과소비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산타가 빨리 우리 아이들의 머리에서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제 아내는 진저리를 칩니다. "세상에 저렇게 멋이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거겠지요. 그런데 저는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무엇인가 성탄절의 의미가 아이들에게 잘못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가곤 합니다.

 

 

 

 

 

 

 

요즘은 우리 나라도 성탄절이 되면 장식을 하는 등 축제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 같습니다. 교회보다 오히려 사회에서 먼저 크리스마스를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아마도 예수탄생일을 제일 기다리는 사람들은 백화점을 운영하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멀었는데 장식을 시작해서 한껏 성탄절 분위기를 돋구곤 합니다.

 

 

 

 

 

미국에서 있을 때 매년 성탄절이 되면 집안밖에 트리를 비롯한 장식을 하고, 그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장식을 학교에서 골라서 상을 주곤 했습니다. 저희 학교는 신학교였기 때문에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물론 애석하게도 한번도 상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절기가 다가올 때마다 그 절기를 즐기는 미국 사람들의 그런 긍정적인 태도를 보면서, '나와는 참 많이 다르구나.' 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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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람들은 11월 셋째 주에 있는 추수감사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탄절 준비를 시작합니다. 추수감사절 장식을 떼어내면서 거의 동시에 성탄절 장식을 시작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집안에 간단한 트리를 꾸미기는 했지만, 직접 그렇게 아름다운 장식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입장은 아니었고,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장식을 한 동네에 차를 타고 구경을 가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 비해서 기독교 문화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린 나라라서 그런지 사회전체가 온통 성탄절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마치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반기고 환영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문득 문득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곤 합니다. 산타를 기다리는 저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한 온갖 장식으로 화려하게 수놓는 현대의 성탄절을 보면서 저는 1세기에 처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과연 어떠했을까하는 궁금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복음서 가운데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뿐입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누가복음에 있는 말씀으로 함께 성탄의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작년 성탄절에 누가복음 2:1-7을 설교했었습니다. 오늘은 8-20절에 있는 말씀을 본문으로 성탄의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매년 성탄절 설교도 무슨 책별 강해 설교 같이 같은 책만 이어서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준비를 하다보니 그렇게 바로 다음 구절에 이어서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세기의 크리스마스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에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 시대에 성탄절의 의미를 바르게 회복하려면 먼저 1세기의 성탄절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본문에 질문을 던져서 그 시대 속으로 뛰어들어가 1세기의 크리스마스를 함께 경험하고자 합니다. 저와 함께 1세기의 크리스마스를 경험하기 원하는데 이 여행에 함께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1세기의 크리스마스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첫 번째 성탄절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1세기의 팔레스타인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당시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1에 나와 있는 것처럼 당시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인으로서는 아주 성공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통치기간동안 로마의 신민들은 큰 기대를 품었습니다.

 

 

 

 

 

 

 

로마의 신민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최고의 국가를 이룰 것을 기대했고 요구했습니다. 사실 '복음' 혹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의 그리이스어를 최초로 차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말을 자신의 통치로 인해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그를 신으로 선포하고 예배의식을 제정했습니다. 안정적이고 찬란하게 빛나던 그의 정부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대다수의 신민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개선이 필요 없는 최종적이고 완전한 정부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로마가 다스리는 영토인 팔레스타인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로마제국은 최고의 정부가 아니라 최악의 정부일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헤롯을 내세워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통치 영역에 로마법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포악한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가지는 그가 베들레헴 지역의 모든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그것은 아주 극악무도한 테러였습니다. 그러나 헤롯에 대한 세속역사를 보면 그가 충분히 그럴만한 인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정치적 격변기에 기가 막힌 줄타기를 통해서 유대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 정국이 혼미한 틈을 타서 그 시대에 계속해서 줄을 대어가면서, 필요하면 줄을 바꾸어 가면서, 끝내는 줄타기에 성공해서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왕이 된 이후에도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헤롯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첫 부인 도리스를 죽이고, 당시 유대인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가문이었던 하스모니안 왕가의 마리암네와 결혼했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끝없는 처형행진을 계속합니다. 아내인 마리암네와 아저씨의 관계를 의심하여 아저씨를 죽였습니다. 얼마 후에 직전 왕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두 번째 아내인 마리암네와 장모까지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리암네의 두 아들인 아리스토불러스와 알렉산더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기 5일전에 첫 부인의 아들인 안티파테르를 죽였습니다.

 

 

 

 

 

자신의 죽음 직전에 죽인 것은 첫 부인의 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죄 없는 많은 백성들마저도 체포하여 자신이 죽는 날 함께 처형하라는 명령을 자신이 죽기 5일 전에 내렸습니다. 그래야 자신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헤롯이 통치하는 기간동안은 처형이 자행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어떤 작가는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는 그의 돼지가 되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하다."는 조롱하는 말을 나중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헬라어로 '돼지'라는 말과 '아들'이라는 말은 발음이 유사합니다. 그래서 비꼬기 위해 그러한 글을 남겼던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이런 지경일 때 일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 얀시는 예수님이 태어날 때의 유대지역의 정치적 분위기를 스탈린 치하의 1930년대 러시아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로마는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저 바닥에 있는 힘없는 일반 백성들의 삶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1세기에 저 유대 땅에 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있는 마리아의 찬가에서는 이런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1-53을 같이 읽겠습니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서 온 세상의 구주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감격하면서 이 찬송시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보면 당시 그녀의 고단한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내리치셨고 부자를 공수로 돌려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동시에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배불리셨다고 찬양합니다.

 

 

 

 

 

자신이 처한 삶의 고통을 드러내면서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1세기에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은 그렇게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압제당하며 굶주린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고난의 땅에 우리 주님께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 우리 주님께서 가장 긴급하게 찾아가기를 원하는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과연 우리 시대의 1세기 팔레스타인은 어디입니까? 어쩌면 여전히 2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곳은 팔레스타인일지도 모릅니다. 또 어쩌면 요즘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일지도 모릅니다. 또 어쩌면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고 있는 저 동토의 땅 북한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2000년 전에 바로 그런 곳에 우리 모두와 같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친히 육신을 입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만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본문 8-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8]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이 말씀에 보면 주의 사자가 영광가운데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주의 사자가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목자의 지위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목자가 아주 천한 계층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성 안에서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목자는 철저한 천민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위와 같은 전통적인 견해는 1세기 목자의 모습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목자가 철저히 소외당한 천민이었던 것은 1세기가 아니라, 1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1세기의 목자는 지극히 평범한 계층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목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견해를 따르든지 분명한 것은 당시 사회에서 목자는 결코 상류층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상류층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목자는 분명히 그 사회의 낮은 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누가복음 2:1에 나오는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헤롯왕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같은 종교지도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아니 어쩌면 평범하다 못해 낮은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가장 먼저 찾아가실 사람들은 최소한 나와 같은 목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아니 그 보다도 오히려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 북한에서 굶어죽은 부모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고아가 되어 버린 아이들, 그리고 이 땅에서도 미혼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 버려진 그 아이들을 가장 먼저 찾아가실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굶주리고 압제받는 곳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일반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누가복음 2:4에 보면 요셉이 다윗의 족속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11절에 보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다윗왕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동네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생각하는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왔다는 것은 그 분이 이 땅에 왕으로, 구원의 주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후손인 그 왕이 여관도 없이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누가복음 2장은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7절에서, 12절에서, 그리고 16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하여 예수님이 말의 밥그릇인 구유에 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역설 중에서도 엄청난 역설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역설이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의 밥그릇인 말구유에 오셔서 가장 낮고 천한 자에게도 생명의 떡으로 그리고 생명의 밥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가난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오신 것은 그 분이 어떤 왕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과 같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백성들의 눈에 고인 눈물과 한숨을 거두어주는 진정한 목자요, 진정한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의 탄생은 10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목자들의 태도는 우리에게 귀한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자들의 행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1) 그들은 먼저 영광가운데 주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자로부터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 감격은 천군 천사의 찬송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우리 같이 13-14절을 읽겠습니다.

 

 

 

 

 

[13]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존재로서 하늘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천사들이 나타나서 아기 예수의 탄생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확증하는 찬송을 부릅니다.

 

 

 

 

 

15절에 보면 그들은 기쁨가운데 단숨에 베들레헴까지 달려갑니다. 이 목자들은 비록 그 사회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심지어 헤롯왕이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조차 알지 못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제일 먼저 듣는 놀라운 축복을 누렸습니다.

 

 

 

 

 

 

 

2) 그런데 목자들의 행동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16-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목자들은 자신들이 들었던 기쁨의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들은 그 감격을 직접 경험하고 마리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이 넓은 우주의 점 하나와 같은 지구에 오시고, 그 중에 점 하나와 같은 내게 찾아오셔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영생의 소망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때 목자들이 했던 일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목자들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목자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왕궁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성전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시장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달려간 곳은 말구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은 자리로 오셨으므로 그들도 역시 낮은 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이나 성전이 아니라 말구유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말구유로 가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크리스마스를 맞기 위해 말구유로 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셔서 겸손해지셨지만 우리는 높아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삽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1세기의 크리스마스는 서로가 높아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나팔을 불어대는 우리 시대의 크리스마스에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할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라 말구유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구유를 향해 가고, 그때 하나님의 천사는 우리에게 나팔을 불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입으로 직접 나팔을 불고 싶어합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말씀으로 듣는 것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구유로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말구유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의 말구유는 과연 어디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말구유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까?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서 말구유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긴급하게 전해야 할 곳은 과연 어디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말구유로 가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신 주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우리도 역시 오늘 이 시대에도 여전히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그 곳은 이 땅에서 여전히 소외되어 있는 고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할 시기에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버려진 아이들일 수 있습니다. 단지 육체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이 사회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교회로부터도 격리당하고 외면당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멀리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정치인들의 싸움 사이에서 희생양이 되어 버린 불쌍한 백성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사랑하는 동족인 북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부모를 잃고 추위와 배고픔으로 신음하고 있는 북한 땅의 고아들일 수 있습니다.

 

 

 

 

 

 

 

필립 얀시는 자신의 유명한 책,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라는 책에서 헨리 나우엔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천주교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한창 그 일을 하다가 교수직을 사퇴하고 토론토 근처에 있는 데이 브래익이라는 공동체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에덤이라고 하는 한 청년과의 우정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자신의 책에서 에덤이라는 청년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에덤을 25세의 젊은이로, 말할 줄도 모르고 혼자서는 옷을 입을 줄도 벗을 줄도 모른다. 혼자 걷지도 못하고 먹을 때도 남의 도움이 있어야만 먹을 수 있다. 웃거나 울 줄도 모른다. 아주 가끔씩 눈을 마주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에덤의 등은 휘어있다. 팔다리를 놀리는 것도 이상하다. 게다가 간질이 심해서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난데없이 몸이 뻣뻣해져 소리지르거나 계속 신음 소리를 내기도 한다. 더러 굵은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보기도 한다. 에덤을 깨워 약을 먹이고, 목욕탕에 데려가 씻기고, 면도시키고, 이빨을 닦게하고, 또 부엌으로 데려가 아침을 먹인 다음, 휠체어에 태워 그가 하루종일 물리치료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장소까지 데려다 주는데 꼬박 한시간 반이 걸린다.'

 

 

 

 

 

필립 얀시는 토론토를 방문해서 헨리 나우엔이 에덤을 데리고 위에서 말한 과정을 실제로 수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참 그것을 지켜보다가 필립 얀시의 마음에 헨리 나우엔이 과연 자기에게 주신 인생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있는 것인가, 최선으로 쓰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당시까지 아주 유명한 교수였습니다. 학문적인 업적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덤이라는 한 청년을 돌보는 따위의 단순 노동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럴 때 헨리 나우엔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얀시는 조심스럽게 나우엔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우엔은 그때 얀시가 오해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우정에서 득을 보고 있는 것은 에덤이 아니라 바로 저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우엔은 에덤과의 관계로 어떤 이득을 보고 있는 지를 열거했습니다. 에덤과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깊은 내적인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내적인 평화에 비하면 그 동안 해왔던 다른 활동들, 고도의 정신적인 그런 노동들은 너무나 지루하고 피상적인 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사람 옆에 앉아 있노라면, 헨리 나우엔 자신이 학문의 세계 및 목회 사역에서 그 동안 얼마나 성공과 경쟁에 집착하며 살았는지를 깨닫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우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인간이 되는 길은 우리의 정신이 아니라 가슴이며,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말구유에 오신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오늘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있는 그 곳으로, 낮은 곳으로, 우리 주님께서 오셨던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왕궁에서는 그 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화려한 성전에서는 그 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성육신하신 주님을 만나기 원하신다면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베들레헴의 말구유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 곳에 백성들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신 우리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 곳에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 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자리를 펼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성육신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 교회는 카이스트 강당에서 특별한 성탄행사를 갖습니다. 우리 성도들끼리 보냈던 예년의 성탄절과 다르게 올해는 우리가 지난 일년동안 함께 사랑하며 섬겼던 분들을 초청했습니다. 약 200명의 형제, 자매님들을 초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분들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나누기 위해 마련한 자리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로 돌아가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우리의 작은 걸음입니다.

 

 

 

 

 

또 선교위원회에서는 '북한 어린이들에게 담요 보내기' 운동을 합니다. 한 장에 $6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6을 헌금하면 북한의 한 어린이가 이 추운 겨울철에 얼어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사역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날 아침에 한 겨울에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보면 그곳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이 집이 없어 돌아다니다가, 헌 낡은 집에서 잠을 자다가 한꺼번에 얼어죽어 있는 것을 수 없이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이 운동을 시작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연장하므로 영생의 소식을 들을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랑의 나눔을 통해서 저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선물을 받기 위해 눈이 빠지라고 성탄절을 기다리는 저희 아이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했습니다.

 

 

 

 

 

"정인아, 지인아! 성탄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신 날이니, 너희들도 선물을 받기만 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큰 아이가 "아빠, 엄마 선물 준비했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빠, 엄마 선물도 감사하지만, 아빠가 생각할 때는 북한의 어린이들이 담요가 없어서 너무 춥다고 하니 담요를 보내주면 좋겠는데 아빠도 물론 보내겠지만 너희들도 담요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제가 그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아이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나는 3,000원 있어! 그런데 형아는 1,000원밖에 없어!" 아마 누가 용돈을 주었는데, 작은 아이는 덜 쓰고 큰 아이는 많이 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이 둘이 힘을 합해서 담요 한 장 값을 모아서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의 일을 조금씩 도와주고 돈을 받든지 용돈을 아껴서 하든지 너희 둘이 상의해서 담요 한 장만 북한의 어린이에게 보내면 아마 우리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다." 그랬더니 둘이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6살 먹은 막내와 9살 먹은 큰 아이가 과연 돈을 모아서 담요 한 장이라고 보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통해서 올 성탄절에 제 아이들에게 성탄 선물 가운데에는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성탄절이 단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기만 하는 신나는 날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참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소외되고 그늘진 곳에 전하는 절기라는 것을 제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자동차에 부착하고 다니는 글귀 가운데서, "Reason for the Season"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는 절기의 이유, 절기의 의미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이 절기를 주신 의미를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달았다면 예수님을 본받아 말구유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작은 것이지만 제 아이들이 그런 마음을 이해할 때 저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자라준다면 그런 소외된 곳에 가서 말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일생동안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럴 때 나팔을 부는 자가 아니라 말구유에 찾아가는 아이들이 될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그런 작은 실천으로 제 아이들도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고, 북한의 어린 아이들도 성탄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그런 성 축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 새누리 가족들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참 평화와 참 기쁨을 누리는 성탄절을 경험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화려한 축제로서의 성탄에 빠져 있는 이 때에, 우리 새누리 가족들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회복하여 유대 땅 베들레헴에 있는 말구유로 가서 진정으로 낮은 자를 건지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살아계신 예수님,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뜻 깊은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낮은 자들을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진심으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이 시대에, 참으로 성탄의 의미가 퇴색해가고 상업주의에 물들어 가는 이 시대에 저희들이 1 세기의 크리스마스,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그 모습을 본받고 목자들이 말구유로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도 말구유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참으로 이 땅에 소외된 곳, 그늘진 곳, 주님께서 그곳에 계심을 알고 우리가 그곳에 가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올 크리스마스가 그런 놀랍고 축복된 크리스마스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참 평화의 주님을 경험하는 그런 크리스마스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특별히 저희에게 주신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아서 그들의 인생의 가치관을 바르게 정립하고 살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시고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님이 탄생하신 날

 

본문 마1:18-25

 

이승하목사

 

 

 

 

크리스마스는 세계적 명절입니다.

 

그래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심지어 다른 종교가 국교로 지정된 나라들도 이 날을 기쁜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나신 날입니다. 그는 마구간에서 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나사렛에서 목수일을 하며 살았는데 정혼한 마리아와 호적을 하러 조상의 본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었을 때 예수님께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다윗의 동네라 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며, 당시에는 작은 베들레헴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여 오는 사람들은 많은데 유할 만한 곳은 적어서, 만삭이 되어 늦게 도착한 요셉과 마리아는 유할 만한 여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겨우 얻은 곳이 마굿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은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면 불륜의 아들이 아닌가 걱정할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태어났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그러므로 예언에 의한 탄생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지 물었을 때,

 

서기관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예언된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미 5:2).

 

그러므로 박사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또한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 2:11■12) 하셨습니다.

 

그 후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들의 노래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들은 급히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에게 절하였습니다.

 

 

 

 

예수의 나심은 이렇게 성령의 역사로, 또는 하늘의 별과 음성으로 알려졌던,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2천년 역사중에서 12월 25일을 성탄일, 즉 크리스마스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날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며 어떻게 전할 것입니까?

 

모든 성도들이 바로 알고 즐거워하며,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르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기쁜 날입니다.

 

 

인류의 죄악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셨으므로, 모든 인간은 그를 기쁜 마음으로 맞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하면 ■축하합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나심은 그렇게 기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은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는 것은 일시적이며, 내가 만든 기쁨도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든 기쁨은 희극에서 웃기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얼굴에서 시작해서 얼굴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식고 맙니다.

 

 

그리고 인간의 기쁨은 물질로부터 옵니다. 어떤 여인이 미국에서 복권이 당첨되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만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물질은 좋은 것이지만 위험한 것입니다. 물질이 반드시 인간에게 기쁨을 주지는 못합니다. 어떤 때에는 기쁨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은 인간적이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생명력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됩니다.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왔습니다. 아니, 앞으로 세상 끝날까지 성탄일은 기쁨의 날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쁨의 날로 모든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고, 교회마다 좋은 순서로 축하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사는 자신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축하하는 순서들입니다. 교회당에서 밤을 새우며 찬송하고 또한 성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새벽송을 부르는 것은 매우 즐거운 행사들입니다. 누가 기뻐합니까? 인간적인 목적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은 향락적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신앙인들의 성탄에 대한 기쁨은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그 높은 하나님 나라의 보좌를 버리고 이 낮은 세상에 오셨다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보다 바로 자신에 대한 긍휼과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에 신앙인은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기쁨은 본질적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2. 깊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날은 모든 신앙인들이 깊이 감사해야 할 날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으로 보내셔서 희생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죄는 구약시대에 제사들처럼 짐승을 잡아 희생함으로 용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는 항상 드렸습니다. 아니, 매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몸으로 직접 드린 제사는 단번에 드려졌습니다(히 9:28).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고귀한 피를 흘리심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하셨습니다. 가장 고귀한 피로 인하여 용서해 주셨으니 이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적 에로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가페입니다. 에로스는 남녀간의 성적 사랑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사랑을 예수님을 통하여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어떤 조건이 있어서도 아니요, 아무 조건 없이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주시기 위하여 이 낮은 세상에까지 오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신 사건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직접 고쳐 주셨고, 직접 귀신을 내쫓으셨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직접 집에까지 가셔서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은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기적입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전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도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천국을 소개하셨습니다. 그의 복음은 곧 천국을 전하는 데서 나타났습니다. 그가 세상에 오심은 천국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만큼 천국은 귀중한 나라이며, 그 소식은 인간에게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어디서 들을 수 있습니까? 새로운 뉴스라고 해도 이런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들리는 것은 모두 비극적인 것 뿐입니다. 그리고 나를 두렵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식은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나라,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소식을 전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3. 전파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기뻐하고, 노래부르는 이유 중 하나는 천군천사들의 모범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떠나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까지 내려와서 예수의 나심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별을 동원해서까지 예수의 나심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나에게도 같은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이니 내가 좋아하는 친구에게만 전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옥 창살 앞에 가서 성탄 축하송을 부르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세상에 물들어 있는 죄인들을 향해서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전할 것입니까? 노래로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탄절에는 반드시 음악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이유도 모른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음악예배를 드리는 것은 천군천사들처럼 찬송으로 주님의 오심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도들에게만 들려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향한, 아니 우주를 향한 찬송입니다. 이 노래는 교회에서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란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많이 불러서,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 가서 노래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노래하고, 어두운 곳이라도, 한 사람이 들어도 필요한 사람에게 성탄절 노래를 들려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선물로 전합니다. 성탄절에 반드시 있는 것이 선물교환입니다. 교회행사에서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성탄절에는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가정에서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라는 전설에 의해서 자녀들에게 양말에 선물을 담아서 줍니다. 이 선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 수용해야 합니다. 선물을 받는 것보다 선물을 하는 사람이 성탄을 전하는 일을 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선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선물은 꼭 물질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할 수도 있으며, 또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룩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전합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때 목사님으로부터 성탄메시지를 듣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나심을 전달받는 시간입니다. 몰라서 받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들도 새로운 은총의 역사로, 오늘을 맞는 기쁨의 소식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평생을 들어도 싫지 않고, 새로운 것이며, 누구에게나 필요한 소식입니다. 말씀은 귀중한 것입니다. 메시지를 잘 듣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축하해야 할 날입니다. 현대인은 휘황찬란한 네온싸인 속에서 기쁜 성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박해가 심한 시대에는 토굴 속에서, 또는 감옥에서 성탄을 맞았고, 표면적인 기쁨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갈 때, 실제로 공포와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찬미하며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매를 맞고 쓰러졌을 때, 그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그 찬송은 슬픔의 찬송이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부르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러나 찬송이란 기쁨의 표현입니다. 오늘도 저 북녘 땅에서 성탄을 맞아 찬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많이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기뻐할 것입니다. 진실로 마음속으로부터 성탄을 축하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성탄절을 맞이해야 하겠습니까? 바른 믿음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를 찾아왔던 박사들이나 목자들은 오늘 우리들과 같은 기쁨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초조와 공포 속에서 축하했습니다. 그리고 편하지도 못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성탄은 왔습니다. 우리들은 진실로 가장 아름다운 때에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치있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성탄이 되어야 합니다. 최선의 축하를 드립시다.

 

좋은 소식을 주시는 분

 

눅2:8-14

 

 

 

 

인생에게는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늦게 집에 들어와서도 마감뉴스에 혹시 내일 좋은 일 안 생기나 TV채널을 돌려보고, 아침에 일어나면 밤사이 어떤 좋은 일 안 생겼나 신문을 뒤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듣는 소리는 좋은 소식보다 슬프고 어려운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쁜 소식을 듣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들으려고 TV를 틀면 먼저 누가 죽었다는 소리가 먼저 나옵니다.

 

누가 은행을 털다 잡혔다는 소식, 어디어디에 불이 났다는 소식등, 나쁜 소식이 더 많습니다.

 

 

사람의 심리가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이 더 흥미롭다는 인식을 갖어서인지, 매스컴은 좋은 쪽보다 나쁜쪽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며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진정한 흥밋거리도 없고, 정말 기뻐할 일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하나님에 대한 좋은 소식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하여 나쁜 정보만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비리만 캐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MBC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교회나 하나님에 대하여 나쁜쪽의 정보만 기억하고 퍼트리려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처럼 사탄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와 하나님에 대하여 좋은 소식만 기억하시고 그 좋은 소식을 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좋은 소식만 주시는 분이십니다.

 

첫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담 내외에게도 좋은 소식을 주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창3:15)는 희망의 소식을 주셨습니다.

 

죄에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죄지은 아담에게 죄의 댓가로 형벌을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는 좋은 소식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좋은 소식을 주셨습니다.

 

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브라함에게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좋은 소식을 주셨습니다.

 

 

이 말을 믿지 못하고 장막뒤에서 코웃음치던 사라에게 재차 "기한이 이를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분명히 확시키주는 좋은 소식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가족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알았던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방 민족까지 구원하시겠다는 좋은 소식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좋은 소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라고 보냈지만, 모세는 이리핑계 저리핑계를 대며 사양했습니다.

 

첫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갑니까?" 겸손한척하며 뒤로 뺏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가라고 하시자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보내신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핑계를 대면서 못가겠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또 핑계를 댓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보낼자를 보내소서. 나는 못갑니다."라고 아예 말을 잘라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애굽에서의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이 가장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의 소식을 모세를 통해서 전해주시고 해방시켜주시려고 하는데도 모세는 못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못 가겠다고 버티고 버티는 모세를 결국에는 보내셔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시겠다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노릇을 하며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와 사망의 종노릇을 하며 어둠과 실망속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쁜 소식을 들려주시려고 못가겠다, 안가겠다는 모세를 어떻게 해서라도 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택한 자녀들에게 늘 좋은 소식만을 주시던 하나님께서 성탄절을 통해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죄와 사망에게 종노릇하는 모든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죄를 사해주시겠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던 것입니다.

 

 

이 좋은 소식이 바로 오늘 본문 10절에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좋은 소식, 좋은 말씀-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사망이라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죄악에서 건지시고 영생을 주시는 기쁨의 소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기 예수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땅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되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가장 기쁘고 복되고 좋은 소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절이 되면, 서로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사람들끼리, 카드를 나누거나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번 성탄절에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받아 본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선물이든지 받게 되면, 마음이 기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선물을 허락하셨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은혜와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감격과 기쁨으로 세상 사람들이 좋다는 돈도, 명예도 이것 때문에 뒤로 제껴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난 구원의 감격이 날로 새로워 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처음에 주님을 만난 그 기분과 그 감정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구원의 기쁜 소식을 오늘 말씀에서 제일 먼저 들은 목자의 초심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목자들이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삶이 깨끗했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당시에 가장 자기일에 성실하게 일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 기웃거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서 비리와 야합하지 않고 오직 성실하게 양들을 돌보며 열심히 살았었던 사람들입니다.

 

 

메시야의 탄생의 좋은 소식은 이렇게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를 탐하는 사람들에게 오지 않고, 낮고 보잘 것 없는 일이지만 그것에 충실했던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찾아오시는 것은 차별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은 약한자에게 죄에 묶인 자들에게 억울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억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는 양심적으로 살았는데, 땀 흘리고 살았는데, 애쓰고 살았는데, 이 수고한 만큼, 자기가 정말로 바르게 산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남보다 가난하고, 남보다 약하고, 남보다 낮은 처지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사랑하고 긍흉히 여기시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돕고, 이런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소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목자들은 밤에 자기 양 떼를 돌보는 목자들과 같이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았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복음은 이들에게 더 쉽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세상을 의롭게 통치하실 메시아를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주셔서 필요를 채워주시고, 응답해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시는 모든 일들이 좋은 소식 복된 소리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들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소식은

 

첫째로 용서의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하나님을 어겨서 하나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예배시간 마저 빠지기 일수이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기보다는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기도생활은 거의 하지 못하고, 봉사도, 구제도, 전도도 하지 못하는 게으른 자들이었습니다.

 

 

마음속에 수많은 죄를 지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입히면서 나 자신의 잘못된 교만으로 나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받아 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며, 교만한 우리의 마음에 상처주지 않으시려고 조금씩조금씩 우리를 녹여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한마디로 저에게 예수님은 놀랍도록 은혜롭고 좋은 분이십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 주님은 좋은 소식으로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새해에는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좋은 소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항상 밝은 모습으로 기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 복음은 지금 뿐 만이 아니라. 심판 때에도 믿는 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은 자기가 살아온 생애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서서 설명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이 심판은 분명히 임한다는 것과 심판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심판은 그 자신의 행위에 따라 심판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분명하고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은 그렇다면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아니면 공포와 불행의 소식이겠습니까?

 

이 대답에 따라 분명히 그가 살아온 삶의 질과 내용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육신의 편리와 이익만을 추구해온 사람들에게는 불안한 소식일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 사람들에게 심판은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 예수 믿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에게 심판이란 공포와 불안의 소식이 될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는 자들도 심판은 나쁜 소리로 들려올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심판 받을 때 쌓아놓은 선이 자신의 악보다 많아야 됩니다.

 

그러나 그럴 자신이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이들은 심판이 불안할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위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다(롬3:20-23)고 했습니다.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심판은 나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좋은 소식-기쁨의 소식이 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순종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 때문에 하늘에 들어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롬5:1-2).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의롭다함을 받고 영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품에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정죄는 이미 제거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의 마음은 심판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기쁨을 가져오는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천사를 통하여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이 기쁨을 우리는 이제 오시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 땅에서도 기쁜 소식이지만 심판날에 더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죽음에도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별것 아닌 존재로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을 별 것 아닌 사람으로 보았냐면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자를 별 것 아닌 자로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제 아무리 유식하고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자처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 산지식 즉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고 대범한 척하고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아도 그러나 실상은 살얼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전설이니 신화니 꾸며낸 이야기니 비웃지만 결국은 심판과 죽음앞에서 공포에 떨며 죽을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가 생각하도 싫은 우울하고도 슬픈 단어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세등등한 살인마라 할지라도 죽음을 앞에두면 겸손해 지고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살인마라고 했던 사람들도 결국은 다 예수 믿고 사형장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그 사망은 공포와 두려움의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래도 희망을 갔고 사형장으로 갔을 것입니다.

 

 

밀톤은 "사망은 영원의 궁전을 열수 있는 열쇠"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오늘날 너희를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이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만, 사망은 영원한 궁전을 여는 열쇠가 되고 사망은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사망은 도둑입니다.

 

사망은 인간의 소망과 생명을 약탈해 가는 약탈자입니다.

 

사망은 무시무시한 추수꾼입니다.

 

사망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갑니다.

 

지혜있는 자도, 강한자도, 위인과 성인들…, 한 사람도 제외 없이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이들 모두에게 사망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믿고,

 

"다윗의 동네에 우리를 위하여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는 사망까지도 기쁨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자기에게 주신 좋은 소식 때문에, 그 좋은 소식을 감출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스데반에게는 이 좋은 소식이 그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기 때문에 죽으나 사나 오직 이 좋은 소식만을 증거하는 것이 기쁨이었기 때문에, 죽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하며 환하게 웃으며 죽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죽음에도 좋은 소식이기 때문에 스데반은 웃으면서 죽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복음은 사망에도 좋은 소식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동네에 오신 예수께서 우리의 기쁨이고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스데반의 죽음만큼 더 아름답게 표현된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스데반만이 아니라 다윗의 동네에 오신 아기 예수는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멸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을 주신 좋은 소식은 모든 인류뿐 아니라 오늘 성탄절에 경건하게 경배드리는 여러분에게 똑같은 기쁨이 되고 좋은 소식이 될 줄로 믿습니다.

 

 

반복되는 성탄절이 우리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가거나, 잠깐동안 우리의 생각 속에만 있다가 사라지는 날로 전락되어지지 않도록 믿음을 세워나가시기 바랍니다.

 

 

이날이 있었기에 우리가 범사에 기쁨이 있고 예수님께서 오신 성탄절이 있기에, 심판에도 무서워 떨지 않을 수 있고 죽음 앞에도 담대하여 오히려 이 모든 것이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죽는 순간까지도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지창조이래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야를 보내주신 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이래 최대의 뉴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메시야를 보내주신 바로 그날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탄절을 통해서 이미 메시야를 맞았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우리의 모습에서 기쁨의 소식을 전해야 됩니다.

 

 

삶에서 늘 감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기쁨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만 전해주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삶의 참된 기쁨은 땅에 있지 않습니다.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대학에 있지 않습니다.

 

좋은 직장에도 있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명예에는 더더욱 있지 않습니다.

 

 

우린 그 사실과 그 말씀을 천사의 음성에서 듣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 복음이 2000년 성탄에 경배드리는 설보교회 모든 성도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009년에도 다른 어떤 일보다 다윗의 동네에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가장 기쁜 소식, 가장 좋은 소식이 되기를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성탄예배

본문 : 사도행전 27장 12~26절

<이제는 안심하라>

김양재 목사

 

 

[시작기도]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희들 인생에 언제 광풍을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생로병사를 거치면서 의지할 곳 없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오신 분 가운데 정말 주님을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오늘 찾아가 주시고 말씀하여 주옵소서.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주님을 믿는 것밖에 길이 없는데 말구유간에 오신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자 되신다는 사실을 제 입으로 증거할 자신이 없습니다. 인간의 말로 전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이 시간에 찾아오셔서 주님이 전하시고 말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큐티 본문이 사도행전 27장입니다.

처음 오신 분들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늘 큐티를 하고 말씀을 읽어 가는 우리들교회이기에 오늘 성탄절에 이 말씀을 주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우리는 선택의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잘못 선택했다고 후회하고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항상 내 선택은 내 삶의 결론입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그것은 내 선택의 결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큰 문제가 일어났는데 내 사건을 통해서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났으며 해결점은 무엇인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 읽어보겠습니다.

 

앞에 9절부터 보겠습니다.

 

9절 -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1절부터 8절까지 보면 사도 바울에게는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해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고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감옥에 갔든 어쨌든, 바울이 죄수의 몸이었지만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이 됐습니다.(1절)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수의 신분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에 그렇게 가게 하셨습니다.

 

유명한 공직자, 대단한 회사의 사장이었던 사람들이 감옥에 가고, 그 일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감옥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복음 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죄수의 신분으로도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게 하십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중풍병자, 앉은뱅이,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예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얼마든지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의 떡 뿐 아니라 육신의 떡도 많이 주시기 때문에 우리들교회에 그런 축복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믿음이 대단한 것은,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교회 12월의 인사말이 "하나님은 항상 옳으십니다" 입니다.

내가 감옥에 가도 옳고, 병에 걸려도 옳고... 항상 하나님은 옳으십니다.

배타고 죄수의 몸으로 이달리야에 가게 되었어도 옳은 일입니다.

 

그렇게 옳다고 생각하고 가는데 여러 행선지를 거쳐서 간신히, 간신히 미항에 이릅니다.(8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는데도 미항 - 좋은 항구에 이르기까지 간신히, 간신히...

의지해야될 구브로 해안도 있고, 피해야할 바람도 있고, 그냥 지나쳐야 될 길리기야와 밤빌리야 바다도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간신히, 간신히 인도함을 받으며 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죄수로 탄 배는 276명의 인원과 곡물을 싣고 가던 배인데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이 이미 힘들게 가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9절에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롭다"는 뜻은

금식하는 절기는 유대력으로는 7월 10일이고, 태양력으로는 9월 10일쯤인데 항해하기가 위험한 때였습니다. 그리고 11월 10일 이후로는 완전히 항해가 불가능해집니다.

 

예수 믿어도 우리에게는 Common-Sense(상식)가 있어야 합니다. 상식을 완전히 내려놓는 게 아니라 초월적인 하나님이지만 언제나 상식을 지켜야 합니다. 그 시기가 행선하기에 위험하다는 것은 바울만 아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다 아는 것입니다.

 

얼마 전 남극 세종기지에서 동료들을 구하러 갔다가 안타깝게 사망한 전재규씨의 죽음은 예견된 죽음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 기지들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경비행기 등을 다 갖추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여러 번의 요청에도 마련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세종2호를 타고 구조를 나간 것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타고 얼음길을 달리는 격이었기 때문에 이미 예견된 죽음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견된 여러분의 파선에 대해서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바울은 벌써 어려운 일을 겪고 위태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저희에게 권했습니다.

 

10~11절 -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백부장이 지금까지는 바울을 아주 잘 대해줬습니다. 죄수인데도 친구들에게 대접도 받게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안 믿는데 평소 나한테 너무 잘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해주는 부모, 남편이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오가면서 체험을 했기 때문에 이 선택이 옳지 않다고 권고를 합니다.

저도 제 결혼 생활 자체가 힘들었고 자녀 문제, 고부 갈등, 또 수많은 상담을 통해서 결혼과 사업에 위태한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 말씀에 "천하범사에 기한이 있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했는데 우리가 때를 모르면 망합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기 결정이 옳다고 하면서 개혁을 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방에서 전도를 하고,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어도 믿음의 본체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비난을 당했을 때는 '어째서 할례를 받아야 되고,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느냐, 당신들이 그러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냐'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 때 그 말을 했다면 바울은 지금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맞는 이야기여도 때를 모르면 모두가 망하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울이 말을 해야될 때입니다. 생명이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면서 세 번씩이나 파선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극구 만류를 했습니다. 지금 행선을 하면 안 된다, 결혼도 잘못하면 재물의 손해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피폐해져서 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결혼은 안 된다 만류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평소에 내 말을 잘 듣던 백부장이 결정적일 때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전문가들 입장에서는 바울이 자기 보다 아는 척을 하니까 기분이 나쁜 겁니다.

 

전문가 말은 어느 때 들어야 하는가 하면

감기 걸렸을 때는 의사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암에 걸리고 생명이 오늘 내일 할 때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에 전문가의 말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미항-좋은 항구까지 오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우리가 믿어서는 안 될 애굽이 있습니다.

이사야 31장 3절에 보면 "그들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라"고 했는데 돈이 신처럼 보이고, 좋은 사람이 신처럼 보이니까, 사람과 재물과 권력과 지식을 우상으로 여기고 믿을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울과 선주의 말 중에서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언제,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설교자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나눔을 통해서 들려지는 말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들으면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많습니다.

왜 아직도 안 들립니까.

아직도 타격과 손해가 없기 때문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누구 말을 잘 듣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것이 100%, 1,000%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교양은 생명을 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을 가졌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가르쳐주시는데 이것이 비밀입니다.

 

권력가나 재산가의 경험이 너무 위대해 보입니다.

1513명이 죽은 타이타닉호는 노련한 선장이 운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 못한 암초와 유빙에 걸려서 자기 경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인생 항해를 보면서 지식과 경험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가 말씀을 통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험과 분별력은 너무나 다른 겁니다.

선장과 선주는 그 동안에 수많은 풍랑을 이긴 경험담, 무용담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없느니만 못합니다. 운전도 초보운전 때보다 2~3년 경력이 붙었을 때가 더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비밀입니다. 이 비밀이 오늘 여러분에게 뚫고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왜 말을 안 듣는가 인간의 악을 보겠습니다.

 

12절 -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이 게 아니라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편하게 겨울을 보내자는 다수의 분위기가 압도적입니다.

불편하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 힘들다는 뜻인데, 작은 불편을 참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큰 불편을 자초하게 돼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휴머니즘이 넘쳐서 아예 권면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미항이 왜 싫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마도 수세식 화장실이 없었나 봅니다.

그리고 무미 건조한 곳이라서 술집, 노래방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골프장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골프장 있는 곳에 가서 지내자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뵈닉스가 남서쪽 북서쪽 바라보는 항구라서 로마로 가기에 좋은 방향이라고 합리화까지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별 이유를 다 대면서 안간힘을 씁니다.

 

내가 예수 안 믿어야 될 이유가 너무 많습니다.

교회 안 가야 되고, 성경 안 읽어야 되는 이유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제 친정 아버님이 너무 인격자이신데 교회를 안 나가셨습니다.

어머니는 3대째 신앙이셨는데 야단도 안 치고, 돈도 마음껏 주고, 새벽기도, 기도원.. 마음껏 가도 아버지는 안 나가셨습니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유교적 관념에 사로잡혀서 자기 의가 있으니까 사업 끝나면 간다고, 사업하려면 술도 담배도 해야 되니까 사업이 끝나면 간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핍박하는 사람보다 어려운 사람이 그런 타입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남편은 핍박형이고 아버지는 젠틀맨형이셨는데, 젠틀맨형이 핍박형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제 인생에서 경험했습니다. 결국 저희 어머니가 새벽기도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가셨습니다. 나중에는 장로 직분까지 받으셨지만 그래도 두 분이 함께 신앙생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될까 두렵습니다.

부인이 죽고 난 다음에야 신앙생활 하실 분이 있을까봐 두렵습니다.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야 신앙생활 하실 분이 있을까봐 두렵습니다.

평생 눈물을 안 보이시던 아버지가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13절 -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그런데 그 말이 틀렸으면 좋겠는데 남풍이 순하게 붑니다.

조그만 불편을 참지 못해 가겠다고 하니까 바울이 안 된다고 말렸는데 "순~하게" 남풍이 부는 겁니다. 그러니 저희가 자기 뜻이 옳은 줄 알고 행선을 하게 됐습니다.

 

결혼과 사업과 모든 것을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는데도 잘 될 때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 사람들은 바울 말을 안 들었는데도 잘 되는 겁니다.

 

비기너스 럭(Beginners-Luck)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해 봤는데 행운이 왔습니다. 주식에 처음 투자를 했는데 돈을 벌고, 고스톱을 처음 해봤는데 돈을 땄다, 부동산도 처음 사봤는데 값이 올랐다...

이게 사람을 망치는 겁니다.

어렸을 때 고생하는 것이 그래서 유익합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기 싫어서 안 가려고 하는데 다시스행 배가 딱 오니까 내 말이 옳다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말씀 따라 가지 않으면 형통한 것이 멸망의 길입니다. 예수 안 믿는데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멸망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라굴로 광풍 같은 사건이 와야 정신을 차립니다.

 

14절 -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얼마 못되어"

우리 인생은 80년이 걸려서 광풍이 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한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내 인생이 득의한 줄 알고 광풍을 대적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같이 있었기 때문에 똑같이 광풍을 만나도 해석을 잘해줘서 이 배의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이 광풍이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닙니다.

그곳의 지형을 보면 2100미터 이다 산맥에서 일어나는 두 기류가 맞 부딪혀서 일어나는 것이 유라굴로 광풍입니다. 내 삶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내 삶의 결론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오늘 '네, 아니오' 한 것은 내 삶의 결론으로 한 것입니다.

사업에서 어떤 일에 '네, 아니오' 사인을 했다면 그것은 어쩌다 실수한 게 아닙니다.

내 삶의 결론으로 예견된 일입니다.

 

결혼 생활이 힘드십니까.

양가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도 불신 결혼을 했다면 이미 예견된 일입니다.

암초에 부딪히면 파선할 수밖에 없는 광풍입니다.

남편이 배신했습니까. 삶의 결론입니다.

잘 나가던 사람이 망했습니까. 자식이 집을 나갔습니까. 삶의 결론입니다.

 

김행이라는 정몽준 캠프의 대변인을 하던 여자 분이 있는데 그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작년 이 맘때 수십만 명을 모아놓고 선거 유세를 해도 떨리지 않았는데 간증을 하니까 떨린다고 하면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 분은 미모에, 학력에 모든 걸 갖추고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민정당 정책조사부장으로 일했고, 중앙일보 수석기자로 9년을 하고 정계 재계에서 아주 유명했다고 합니다. 신문기자는 유명해지기가 어려운데 스타급 기자로서, 명철한 정치 분석가로서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거기에다가 너무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자신이 언젠가 위대하게 될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 촌지도 안 받고, 세금도 잘 내고, 언제나 남을 보살피고.... 언젠가 인생이 오픈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과외 수입이 있어도 세금을 꼬박 꼬박 냈다고 합니다.

 

만나는 사람이 정치권 장관부터 시작해서, 법조계에서도 고검장 이상의 판검사들만 만나고, 의사도 대학병원, 종합병원 원장만 만나고 상류층의 인생으로 아주 파워풀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하루에 점심 약속이 두 군데 이상, 저녁 식사 약속도 늘 세 군데 이상 있었고, 하루에 핸드폰이 백 번 이상 울리고, 골프도 선별해서 치는데 하루에 두 번씩 쳤고, 음식도 유명하다는 곳에는 다 가봤습니다. 그리고 생기는 돈은 불우 이웃에게 나눠줬습니다. 3500만원 상금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도 유니세프에 전액 구제했다고 합니다.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든든한 빽(Back-ground)도 있고, 미모에

모든 걸 잘하고, 잘하고, 잘하고..

그런데 그 분이 모든 사람 앞에서 자기의 말과 글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지는 일을 작년에 당했습니다. 작년 대선에서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를 하는데 그 선언문을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읽게 된 것입니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하는데 자기 생각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것을 읽으면서 거기에서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자기가 왜 이 말을 해야 되는 지도 모르는 채 선언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받는데 그 똑똑한 사람이 한 마디 대답도 못했습니다. 정몽준 후보를 찾아가서 새벽 내내 문을 두드려도 안 열어주고, 아침 7시에 문을 열어줘서 겨우 만났는데 절대 지지철회를 번복할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는 겁니다.

 

그 후 3일을 죽은 듯이 있었는데 정몽준씨가 사과 성명을 내고 3일 뒤에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김행씨는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못 먹고 7Kg이 빠졌다고 합니다. 새해를 맞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CNN, BBC 방송과 언론을 통해 세계적으로 발가벗겨져서 바보가 됐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자살을 해야겠다, 이민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선 때는 핸드폰이 하루에도 300번씩 울렸는데 그 날 이후 전화도 딱 끊어졌습니다.

이 나라를 움직이는 여성 3인방 중의 하나였던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선하게 살고, 노력하면서 살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어떻게 자기 인생을 망칠 수 있는가 하면서 노무현씨와 정몽준씨를 너무 미워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연세대학교를 나왔는데도 평생 교회를 한 번도 안 가봤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르고 살았다는 것도 그 분의 결론인데 김행씨의 할아버지가 아현시장의 주인이었는데 장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1년에 30~40번씩 굿을 했습니다. 만신굿, 제수굿, 나랏굿, 비가 많이 와도 굿을 하고, 적게 와도 굿을 하고, 눈이 와도 굿을 하고, 안 와도 굿을 하고... 중림동에 무당들이 많이 사는데 어려서부터 굿을 너무 많이 해서 무당이 다 친척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아프면 부적을 태워서 먹이고, 자기가 굿주로 한 가운데 앉아있어서 대한민국 굿 중에 모르는 것이 없고, 무당을 딱 보면 급수를 안다고 합니다.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굿을 하는데 집 한 채를 팔아서 굿을 했습니다. 굿을 하려고 새벽에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방생을 하고.... 어찌나 신이 많은지 부엌에도 부적, 천장에도 부적, 베개에도 부적, 몸에도 오른쪽 주머니, 왼쪽 주머니 네 개 이상 부적을 가지고 다니고 돼지머리, 고사떡... 또 이 세상에 옥황상제 귀신이 제일 무섭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해서 늘 나눠주고, 좋은 일 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나를 위해서 굿을 해주니까 나는 이 나라에서 무슨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보다 겉의 행동이 낫습니까, 안 낫습니까.

정말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유라굴로 대광풍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인간관계를 중요시 여기고, 사람들과 관계를 쌓았는데 아무도 안 찾더라는 겁니다. 바울이 죄수로 떠날 때 KS마크 동창생들이 아무도 안 찾아왔습니다. 김행씨에게도 아무도 안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김행씨는 감사하게도 광풍을 만났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예수 믿는 어떤 분이 전화를 하더니 너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가 보다고 축하한다고 하더랍니다. 또 예수 믿는 몇 분이 전화를 해서는 드러누워있는 사람한테

'질투가 나네~ 너무 축하드려요' 이렇게 전화를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망한 사람한테는 '질투가 나네' 이렇게 전화를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이 세상에서 그렇게 잘 나가다가 웬 은혜로 예수까지 믿어요' 이런 말입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못 살다가 예수를 믿었는데 말이죠.

정말 질투 날 일 아닙니까.

 

15절 -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우리는 광풍이 일어나면 표류하면서 떠밀려 갈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부정맥이 있고, 카드 빚이 있고, 정신 장애가 있고 그런데도 아직 하나님께 안 나오는 사람은 뭡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서 도대체 뭘 붙잡겠다고 아직도 예수께로 안 나오는 겁니까.

 

16~17절 -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아직도 주님께 안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걸 간신히 잡아 끌어올리고 있습니까.

 

이러고 가다가 더 안 될까봐, 망했는데 빚을 내고, 반짝 과외를 시키고... 우리가 망했으니까 너라도 대학에 붙어서 우리 집을 살려야겠다 그러니 더 빚을 내서 과외를 시켜야겠다.. 이러면서 심히 애를 씁니다.

 

18~19절 -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배가 거센 광풍에 부딪혀 깨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심히 애를 씁니다.

 

조종이 불가능하면 내어버려 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내 능력의 한계를 벗어났을 때는 99% 이상은 가만히 있는 게 최고입니다.

내 자식도 말해서 안 들으면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우리는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홍해 바다 앞에서 "너는 잠잠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방방 뛰고 다니면 일을 망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불안해서 가만히 있질 못합니다.

 

이렇게 하염없이 헛된 것들, 떠밀려 가는 것들을 우리는 너무나 의지하면서 갑니다.

누가 나에게 위로자가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헛된 집착을 버려야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야 침몰하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게 되니까 짐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자기 스스로 짐을 버리게 됐습니다.

 

20절 -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내 인생의 해달별이 떨어졌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정몽준씨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그만한 해달별이 어디 있겠습니까.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때,

노무현 대통령도 나를 버리는데 누가 나에게 위로자가 되어주겠습니까.

배가 광풍에 처했는데 출세한 사람-백부장이 나를 도와줄 수 있습니까.

돈 많은 사람-선주, 경험 많은 사람-선장이 나를 도와주겠습니까.

백부장, 선주, 선장이 나한테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겁니다.

 

떠나지 말라고 했는데 떠났기 때문에 바울도 같이 거기에서 잠잠히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 남편이 안 믿고, 내 부인이 안 믿고, 내 자식이 안 믿는데

한 가족이기 때문에, 같이 배를 탔기 때문에 아무리 이야기를 안 들어도 나는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바울처럼 그 자리에서 같이 풍랑을 겪으면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신자(信者)의 갈 길입니다. 그래서 내 식구에 대해서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21절 -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불신 결혼을 하는데 '남 결혼에 재 뿌릴 일 있니, 어떻게 하지 말라고 하겠어' 이러지만

그래도 반드시 이야기해야 합니다.

말을 안 들어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지금 바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증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예수 믿어라,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을 안 들어도 해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휴머니즘에 젖어있어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절대 이런 말을 못합니다.

 

김행씨가 얼마나 셌으면 예수 믿으라는 말을 아무도 안 했겠습니까. 그 분은 그렇게 모든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해야 돌아오는 겁니다. 그만큼 의롭고 금그릇이기 때문에 연세대학교를 다니면서 채플(Chapel-예배)에서 말씀을 들었을 텐데도 전혀 자기 죄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말씀을 전해두어야 합니다.

 

지금은 선장과 선주와 배의 기구들을 의지하기 때문에 절대로 바울이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망하고, 없고, 배의 기구도 다 버리고, "이 때쯤"에는 내 집에서 나를 세워주는 이가 없어도 저절로 예수 믿는 내가 리더가 됩니다.

보십시오. 21절에 처음으로 "바울이" 주어가 됩니다.

여러분이 이 "바울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예수 믿는다고 핍박했을지라도

인생은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힘들어지는 일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시간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잘먹고 잘살아도 다 병들어 죽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일들이 닥쳐있습니까.

어떤 파선의 위기에 처했습니까.

자녀 문제, 남편 문제, 고부간에 문제가 있습니까. 질병의 문제가 있습니까. 가치관에 문제가 있습니까.

 

에베소서 전신갑주를 취하라는 말씀에서 "의의 흉배"가 나오는데

팔에 화살이 뚫고 들어가면 생명에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화살이 꽂히면 한 방에 나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뼈로 보호를 했습니다.

 

사단이 한 방만 치고 들어와도 우리는 다 넘어갑니다.

돈 펀치를 한 번 맞으면 평생 돈... 권세 펀치를 맞으면 평생 권세.. 지식의 펀치를 맞으면 지식... 정신을 못 차리고 삽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정신을 못 차립니다.

 

나그네 인생 길에서 내가 얼마나 잘먹고 잘살겠다고 뵈닉스로 갑니까.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길인데 조금 불편하면 어떻습니까.

우리들교회가 식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조금 불편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좋은 성전에서 예배드린다고 천국에 가면 좋은 자리에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스테인드 글래스로 멋지게 장식된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이 짠~ 울리면 더 은혜가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구유간에 오셨습니다.

그런 것에 속지 마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무슨 펀치를 맞았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돈 안 좋아해, 지식 안 좋아해, 권세 안 좋아해, 왜 나 같은 사람보고 그런 소리를 해...

이러는 사람은 무감각의 펀치를 맞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펀치를 맞았는지 자신을 진단해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다 망하고 나니까 내 옆에 바울이 있었다는 것이 인생의 가장 축복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22절 -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권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없어지면 안심하기가 쉽습니다.

죄 지을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생명에 손상이 없기 위해서 배는 손상이 있어야 합니다.

내 하드웨어가 다 부서져야 합니다.

안심하라의 근거는 배가 파손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있어야 될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망하고 힘든 일은 '있어야 될 일'입니다.

다 부서져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김행씨가 워낙 의롭게 자랐기 때문에 돈 없는 것으로는 절대 안 무너집니다.

그 분은 명예가 우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예를 치셨습니다. 한 방에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방에 무너지고 어떤 사람이 기사 딸린 차를 보내줘서 안 갈 수가 없어서 교회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는 날 설교 말씀을 듣고 펑펑 울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지 6개월만에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들교회에는 한 달만에 간증하는 사람이 생길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누구도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을 믿습니다.

 

"안심하라"의 근거는 배가 파손된 것입니다.

그래서 배가 파손된 것이 고통이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배 뿐이리라"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습니다.

구원에는 아무 손상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자신의 무능을 깨달을 수 있는 이런 치명적인 일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23~25절a -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똑같은 사건에서 말씀이 있는 바울은 어떻게 다릅니까.

 

바울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제도, 오늘도 말씀하시기 때문에 날마다 말씀이 있으면 인도함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에 "너와 함께 행선하는 사람"도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과 한 배 탄 사람은 죽을 수가 없는 겁니다.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습니다.

카드 빚이 있고, 남편은 부정맥이고.. 살 수가 없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기가 막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러면 로마에 가서도 증거할 수 있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스코어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남편이 배신을 했습니까.

내가 불신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것이 내 삶의 결론이다, 내가 회개할 것 밖에 없다, 이것이 증거하는 겁니다. 자식이 집을 나갔습니까. 내가 아이를 말씀으로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내가 돌이켰다, 내게 평강이 있다... 이것이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사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사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명에서, 그 환경에서 예수님 때문에 평강을 증거하면

김행씨보다 더 크게 하나님이 여러분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영육간으로 증거하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똑같은 사건에서 "이제는 안심하라" 말할 수 있는 바울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에게,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의 식구들에게 "이제는 안심하라".

나는 돈 없고, 병들고, 힘들어도 "이제는 안심하라" 말해 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내가 파선됐을 지라도 "이제는 안심하라"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또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소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로마 행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무엇을 소망으로 삼는가에 다같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276명중에서 바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저 목사 한 사람의 소망이 야망이 되지 않으면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한 것처럼 우리들교회에 승선한 여러분들이 다 천국행 배를 타고 함께 갈 것을 믿습니다.

제 소망이 야망으로 변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로만 전달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25절b -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에게 눈에 보여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안심의 근거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눈앞의 사람을 의지했다면 사람이 없어지면 사라질 안심입니다. 누구 옆에 있는가가 너무 중요합니다. 로마 선교를 위해서 276명이 조난 당할 위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꽂힌다면

 

26절 -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한 섬에 걸리리라"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을 믿습니다.

 

"한 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천 년 전에 나를 위해 죽어주신, 말구유간에서 태어나신, 고운 것도 없고, 풍채도 없고, 아름다울 것도 없는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기 때문에...

이 "한 섬"에 우리가 걸리기를 원합니다.

 

많은 환난이 "한 섬" -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나의 유라굴로 광풍이 "한 섬"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내가 앞날을 알기 원한다면 예언기도나 환상보다는 바울 사도처럼 사는 것,

자기 부정과 십자가 잘 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앞날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기도하면 내가 갈 길이 보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길이 보이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탄절에는 일반적으로 복음서의 예수님 탄생 본문을 하지만

성경은 어디를 보나 예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늘 매일성경 큐티 본문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인생의 선택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셨습니까.

내가 잘못 선택한 것도 내 인생의 결론입니다.

모든 사람을 통해 말씀해주셨어도 나는 그 배를 탔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이 와서 파선된 것이 너무 감사한 겁니다.

삶의 의지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었기에 사람으로, 돈으로 어디에 펀치를 맞았는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제 버리기 원합니다.

헛된 것들, 집착하는 것들을 다 버리기 원합니다.

짐을 버리고, 기구를 버리고, 내 배를 가볍게 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떠밀려 다니면서 하나도 의지가 안 되는 것들 다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내 옆에 바울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말씀을 주시고, 설교자를 통해 인도 받게 해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그 동안 너무 형편없는 입장의 바울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바울이" 주어가 되는 인생으로

여러분이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들에게 말씀으로 인도해줄 거리가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안심하라"의 음성이 여러분에게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눈앞에 바라보이는 것이 근거가 아니라 어떤 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이 이 성탄절에 찾아오셔서

예수 "한 섬"에 걸리기를 원합니다.

 

다같이 기도합니다.

 

[기도]

 

이 성탄절에 우리들교회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들은 인생에 갖가지 사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니 삶의 결론이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렸지만 우리는 그 배를 탔습니다. 재물과 많은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 배를 탔습니다.

 

김행씨가 금그릇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말을 해도 믿기 어려웠지만 내가 금그릇이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안 들린다면 오늘 저는 재물과 많은 타격이 있을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생각날 때를 위하여서 오늘 이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장차 받을 환난이라고 했는데 육적인 것이 무너지지 않으면 영적인 성전이 세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진리(눅 2:8-14)

 

 

경향교회 - 석원태 (19981220) 1998.12.20.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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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역사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수다한 기록들 가운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 리고 그 사건들이 과거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매장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의 기록들 중에는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을 동안 그 사건이 영원히 살아서 생각나게 하고, 기억나게 하고, 감격하여지게 하고, 기쁨을 샘솟게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결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거나 잊혀져 버릴 수 없는 살아 있는 역사가 있습니다. 말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행동하게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바로 역사가 주는 힘입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그는 과거 어느 역사의 시점에 있었다가 사라져 버린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는 역사의 한 가운데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현재 여기 세상에 숨쉬고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 이라 일컫는 사람들 속에 그 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성탄 진리는 바로 그리스도 인들의 삶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 성탄의 영광이 그리스도인에게 빛을 주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기쁨 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멋진 승리의 삶을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1998년의 예수 성탄을 맞으면서 또 다시 '성탄의 진리'를 만나보기 원합니다.

 

 

 

Ⅰ. 예언된 진리입니다.

 

 

 

사실상 전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이 사실을 가리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예수 탄생의 예언은 더 내 용적이고 구체적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예컨대,

 

 

 

1. 예수 탄생의 방법이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 「보라 처녀 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탄생 74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징조라고 하였습니다.

 

 

 

2. 그 이름이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 「…그 이름 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을 말하면 「…하나님이 우 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3, 사 8:8-10).

 

하나님의 천사(가브리엘)는 마리아와 정혼했던 청년 요셉에게 현몽할 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고 하였습니다. 이 천사의 예언은 먼저 마리아에게도 주어진 이름이었습니다(눅 1:31).

 

 

 

3. 예수 탄생의 시기와 나라와 장소가 예언되었습니다.

 

 

 

① 예수 탄생의 시기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히 1:2)라고 하였습니다.

 

「때가 찼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엡 1:9, 갈 4:4). 이 사실을 역사적 시기로 표현하기를 「헤롯왕 때」 (마 2:1)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장 1-2절에는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께서 탄생하였습니다.

 

② 예수가 탄생할 나라는 유대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장 1절에 「헤롯왕 때 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 시매…」라고 하였습니다.

 

③ 그리고 예수 탄생의 지역까지 예언하기를 베들레헴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1).

 

이는 선지자 미가에 의하여 예언 된 것입니다.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하였습니다. 헤롯왕도 예수께 경배하러 왔던 동방박사들 때문에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마 2:3-6).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에 대한 예언은 여자의 후손으로(창 3:15, 갈 4:4-5),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창 12:3, 마 1:1), 이삭의 자손으로(창 17:19, 눅 3:34). 야곱의 자손으로(민 24:17, 마 1:2), 유다 지파 중에서(창 49:10, 눅 3:33), 다윗의 위를 상속할 자로(사 9:7, 눅 1:32, 33) 예언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Ⅱ. 초자연주의에 속하는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 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 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천사에게 들은 당사자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리고 자신은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때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6-35).

 

천사는 요셉에게 현몽할 때도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 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 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0).

 

 

 

성령께서 마리아와 요셉을 간섭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믿음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였 습니다(눅 1:38).

 

요셉도 잠이 깨어 일어나서 주의 천사의 분부대로 행하여 아내를 데리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1:24-25).

 

마리아의 고통과 요셉의 번민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풀려진 것입니다. 그후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의 성탄 신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가 된 것입니다. 곧 사도들의 신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상의 기독교회가 한결같이 고백하여 오는 신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가 초자연주의에 속한 구원 종교임 을 입증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요 1:14). 그 말씀은 태초부터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태초'는 시간 전의 영원을 가리키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1).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자신만이 하실 수 있는 초자연주의에 속하는 일입니다. 예수 성탄의 진리는 자연주의, 이성주의가 아닌 초자연주의에 속하는 진리입니다.

 

 

 

Ⅲ. 구원의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 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1. 예수 성탄은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마 1:21).

 

 

 

요한복음 1장 11절에도 「자기 땅 에 …자기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도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2.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은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 중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자기 땅에 있던 자기 백성을 가리켜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 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9:9). 예수님은 이 죄인들을 비유하기를 「병든 자」라고 하였습니다(막 2:17). 사도 베드로는 제각기 자기 길로 가버린 길 잃은 양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벧전 2:25).

 

 

 

3. 그의 오심은 이러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도「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 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하기를 「미쁘다 모 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 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 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 (딤전 1:15).

 

 

 

4. 죄인 구원은 오직 예수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드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 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대속물'이란 팔려가 버린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대신 지불하는 몸값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대신하여 희생함으로 죗 값인 사망을 지불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 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벧 전 1:18-19).

 

 

 

5. 바로 이것이 성탄의 복음이라 고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에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 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탄생은 좋은 소식, 곧 복음 (福音)이라고 하였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온 백 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라고 하였습니다. 그 큰 이유는 온 인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 에게는 구원만이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Ⅳ. 역사적 진리입니다.

 

 

 

예수 성탄의 사건은 전설이나 신화나 혹은 미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권위 있는 역사가 요세퍼스 사기에도 '이때에 예수라 고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로마 역사가 타기투스 (Tacitus)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 해에 대하여 말하는 중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는 큰 무리가 있었다. 그 이름은 베리오 황제 때에 유대의 감 사 본디오 빌라도에게 처형된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서 유래하였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예수 탄생의 역사성에 대 하여 바로 말하기를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 다」고 한 사실입니다(마 2:1). 헤롯 왕이 역사적인 인물이 확실하다면 예수 탄생 역시 역사적 사건이요 사 실이 아닌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 하에 호적령을 내리고, 구레뇨가 수 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첫 번째 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때 호적령을 따라 다윗 집 족속인 요셉 이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올라간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 어간에 베들레헴의 어느 구유에서 예수가 탄생했다는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눅 2:1-7)!

 

무엇보다도 예수 탄생은 역사의 신기원이 되어버린 사실이 역사의 진리임을 보여줍니다. 역사의 연호 는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주전 (B.C.)과 주후(A.D.)로 나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역사의 연호가 지금 1988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오늘의 인류는 예수의 역사적 탄생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헤르만 바빙크(H. Bavink) 박사는 이런 기록을 남겼 습니다.

 

'70인역(LXX)이 지적한 대로 구약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456번인데,

 

오경(창, 출, 레, 민, 신) 에서 75번이요, 선지서에서 243번이요, 그 나머지 부분에서 138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탄생과, 33년의 지상에서의 삶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여인의 후손으로 오셔서 뱀의 후손(마 귀)을 이기실 것을 예언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창 3:15). 마귀를 이기신 예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출생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갈 4:4 ).

 

하나님은 주전 2,0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예언하고 약속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2:3). 여기 아브라함의 자손은 오실 예수를 가리킨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740 여 년 전에 다시 구체적으로 오실 메시야는 처녀 몸으로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7:14). 그 후에 미 가 선지자를 통해서 유대 베들레헴 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에게 예고하였습니다.

 

결국 그 예언은 그대로 역사 속에 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 앞에서 우리 믿음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먼저 그 구속의 예언을 주신 하나 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예언을 영 감으로 기록한 계시, 곧 성경의 참 됨을 믿어야 합니다. 그 예언의 성취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탄생을 믿어야 합니다. 그 예 수 탄생의 결과 우리에게 임한 구원 의 축복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리고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인류에 게 전해야 합니다.

 

1998년의 성탄을 맞는 우리 모두 에게, 「하늘의 하나님께는 영광, 땅 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 에 평화」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성탄에 복 받는 가정(눅 2:1-14)

 

 

광림교회 - 김선도 (19981220) 1998.12.20.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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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을 맞이하게 되면, 옛날에 밤잠을 자지 아니하고 성탄 트리를 만들고 연극을 준비하며 뛰어다니던 참으로 행복한 추억들을 회상하며 동심을 돌아가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성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에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성탄 성극을 준비하였습니다. 바비이라고 하는 어린이가 베들레헴의 여관집 주인역을 맡았습니다. 바비의 부모님들은 손님이 오면 융숭하게 대접을 하는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비는 여관 집 주인의 역을 하면서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에 찾아왔을 때에 성극의 대본대로

 

"미안합니다. 이 여관에는 방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가 돌아서 나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소년은 늘 눈물이 글썽이게 되었습니다. 며칠을 연습한 후 성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을 찾아왔습니다. 문전에 서서 이 소년은 대본대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그 소년은 대본에도 없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잠깐 들어오셔서 차나 한잔 들고 가시지요."

 

이것이 동심의 세계의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성탄절은 온 세계의 가정이 성탄절로 인해서 축복을 받는 세계의 명절입니다. 서구의 성탄절은 흩어졌던 온 가족이 집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나누며 정담을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는 날입니다. 마치 우리 나라의 구정과 같습니다.

 

처음 성탄절의 기록을 보면 가정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하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혼한 요셉과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어린 아기를 낳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구유에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homeless-people이 노숙하는 곳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노상에서 탄생하신 예수님, 말 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우리 가정이 복된 가정으로 성탄의 은총을 입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온 세계의 가정의 명절인 이 성탄절에 우리가 축복을 가정이 되기 위해서 세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의 가정에 평화의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축복의 가정이 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게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세계 제 1,2차 대전 때 에 성탄절이 되면 정전 협정도 없이 서로 전쟁을 멈추고 적들과 먹을 것을 나누고 선물을 나누며 피차간의 가정을 그리고 향수에 젖는 날로 보냈다고 합니다. 저 멀리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난 예수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거친 세상, 살벌한 세상,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는 이 세상에서, 성탄절의 평화의 왕이 우리 가정에 태어나게 될 때에 그 가정에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의 축복입니다.

 

한달 반전에 저희 가정에 7번째 손자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을 호산 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름은

 

"호산나! 호산나!"라는 말이 좋다고 제 손자인 호백이가 지어준 것입니다. 저도 집에 함께 있으면서 어린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기도하며 순산하기를 바랬습니다. 마침내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소리를 지르며 이 가정의 가운데 뉘어질 때에 온 가정이 변화되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기뻐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는 바로 어린 아기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비스럽습니다. 우리 가정에 손자 한 명이 태어나도 그렇게 기쁘고 즐겁다 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평화의 왕으로 우리들의 가정 한 가운데 태어나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탄생될 때에, 그리고 그 아기 예수님을 믿음으로 맞이하게 될 때에 우 리는 기쁘고 감사하게 되며 365일을 평화의 날로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 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찬의 삶입니다.

 

한 유대인이

 

"행복의 비결"이라 는 책에 행복은 건강, 재물, 아름다움, 즐거움, 조화 등이 있어야 된다 고 갖가지 조건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을 유대인 랍비에게 읽어보라고 드렸는데 그 유대인 랍비가 그 책을 읽어보고는 그 많은 조건들이 다 갖추어져도 불행해 질 수 있으며 행복을 위해서 한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다고 그에게 말했는데 그것은 바로

 

"평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돈과 권력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평화가 없이 다투기만 한다면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탄생될 때에 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광림 교회에 있는 스태인드글래스를 자세히 보시면 색유리 조각들 이 모여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상징하고 성령과 교회를 상징하며 숲 속에 불타는 호렙산, 웨슬리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조화를 이루어서 위대한 예술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조각나고 모난 것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뭉쳐지게 될 때에 아름다운 조각품처럼 아름다운 축복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에 평화가 임할 때에 이 살벌한 시대에 주님을 모시고 참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2. 어린 아기 예수를 찬양하고 예배할 때에 행복한 가정이 된다.

 

성탄절 때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군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하고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Christ(그리스도) + mass(천주교의 미사)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즉 그리스도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성탄절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백화점 앞에 가보면 산타클로스가 사슴들이 끄는 썰매를 타는 것이 성탄인 것으로 상징을 합니다. 그러나 처음 성탄절의 이야기에는 산타클로스가 없습니다. 서구 사람들은 주일 예배를 잘 드리지 않다가도 성탄절과 부활절 때에는 예배에 꼭 참석을 한다고 합니다. 성탄절 때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성탄절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탄절이 가까워 올 때마다 고향에서 어린 시절에 공산치하에서도 어떻게 하면 그날만큼은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기쁘게 지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옛날의 추억에 행복감을 느끼게됩니다. 성탄절 성극을 할 때에 제가 모세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모세역을 할 때, 공산치하에서 억압받는 가운데 그 성극을 하게 될 때에 저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공산당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새벽에 성도들의 가정을 찾아다니며 그 앞에서 캐롤을 부르고 찬양을 하며 성도들과 뜨거운 정을 나누면서 성탄을 지냈던 그때를 생각할 때에 그것이 바로 참 성탄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점성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이상한 별을 보고는 예물을 들고 베들레헴에 찾아온 것은 예배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 앞에 경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카스파라는 동방박사는 황금을 가지고 예수님께 드렸는데 황금을 드렸다고 하는 것은 인간 소유의 최고의 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넬콰이어라는 동방박사는 사상과 영향력을 상징하는 유향을 드렸습니다. 발타진이라는 박사는 몰약을 드렸는데 예수님의 시체를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몰약을 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정성을 다해서 예배드릴 때에, 어린 아기 예수님 앞에 경배하고 찬양할 때에 큰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게 됨 을 믿습니다. 찬양하는 성탄, 예배하는 성탄이 바로 축복의 상징입니다.

 

 

 

3.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가정에 축복이 임한다.

 

성탄절은 홀로 지낼 수 없습니다. 혼자서 지내는 성탄절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지내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자, 외로운자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홀로 성탄을 맞이한 경험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성탄을 맞이하게 되면 한 달 동안을 분주하게 지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텅텅빈 기숙사에서 홀로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창가에 앉아 홀로 성경을 펴고 성탄에 관한 성경 구절을 읽고 로마서를 읽었습니다. 홀로 보내는 성탄절은 적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저를 늘 사랑해 주시던 미국인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도 홀로 성탄절을 맞이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할아버지에게 선물할 큰 구두를 한 켤레 사가지고 홀로 계신 그분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찾아가자 그 분은 반갑다고 저를 끌어안으셨고 제가 드린 그 선물을 붙잡고 너무나도 기뻐했습니다. 둘이서 식사를 하며, 서로를 위로하며 성탄절을 지냈던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홀로 지낼 수 없는 성탄절에 너그러운 마음,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살벌한 세상 속에서 성탄절에 선을 베풀고자 하는 선한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에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여러 해 전에 카돌릭 교회의

 

"마리세리노"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영화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가 오갈 곳이 없을 때에 수도원에 가서 수도사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다락에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은 수도사들조차도 들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이 소년은 그 방을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도사는 그 방은 금단의 방이라 수도사들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고 소년에게 말을 했으나 소년은 몰래 그 방을 들어갔습니다. 그 방에는 다른 것은 없고 예수님이 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메달려 있는 고(古)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참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그 소년은 예수님이 얼마나 추우실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소년은 담요 한 장 을 훔쳐가지고 벗은 몸으로 있는 예수님의 상을 덮었습니다. 그 소년은 예수님이 시장해 보이는 것처럼 느끼고는 매일 아침마다 빵 한 덩어리를 예수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동심에 젖은 이 소년이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에 이 소년은 예수님과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소년이 예수님께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보고 싶다고 호소를 합니다. 이 소년의 애타게 부르짖는 모습을 보시고는 예수님이 잠시 사라지셨다가 나타나셔서 그 소년의 어머니가 천국에 있으니 함께 가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 소년이 굶주리고 추운 예수님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이 소년에게 있었던 지극한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신비스러운 영화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실직을 당한 신체 장애자들 95명을 비행기로 제주도에 모시고 가서 서귀포에 있는 호텔에 모셨습니다. 그분들은 건강한 사람들도 출 수 없을 정도로 기쁨에 넘치는 춤을 추었습니다. 그분들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출봉에 올라갔습니다. 휠처를 타고 일출봉에 오르려는 그분들을 제주도 도지사가 119 구조대원들과 부녀소방대원들을 동원해서 신체장애자들을 부등켜안고 일출봉을 올라가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해가 뜨는 모습을 보는 그분들에게 부녀소방대원들께서 따끈한 커피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찬들이 아닙니다. 그들 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을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이 어떻게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축복을 받은 성탄에 평화의 왕을 우리 가정에 모시는 믿음이 있을 때에, 어린 아기 예수님을 찬양하는 예배가 있을 때에,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베푸는 사람들의 가정에 성탄의 축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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