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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 (마27:57~61)

by 【고동엽】 2022. 4. 9.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 (마27:57~6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 사이에 되어진 일입니다. 흔히들 예수님의 십자가는 깊이 묵상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도 많이 묵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냥 지나쳐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 우리는 이 가운데서 놀라운 영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라 함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섭리(providence)는 이적(miracle)과는 다릅니다. 이적이라 함은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가 세우신 자연 법칙을 잠시 깨뜨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태양이 중천에 머무르면서 내려오지도 아니하고, 또는 쇠도끼가 물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와는 달리 섭리라 함은 하나님이 자연 법칙을 그대로 유지하시면서, 그 배후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적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은 성찬식이 있습니다. 이 뜻깊은 날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 곧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57~58절).

 

마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저물었을 때에.”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이 저물었을 때를 가리킵니다. 막15:25을 보면, 예수님은 그 날 제삼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유대인의 제삼시는 우리 식으로는 오전 9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막15:34~37을 보면, 예수님은 그 날 제구시에 숨지셨습니다. 유대인의 제구시는 우리의 오후 3시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같은 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요19:31을 보면, 이 날은 준비일로서 그 다음 날인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오늘날의 토요일입니다. 따라서 그 준비일은 금요일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금요일 오후 3시에 숨지셨습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 해질 무렵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 날 저녁 해질 무렵에 끝납니다. 따라서 그 날 오후 6시경이 되면,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특별히 그 안식일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기간에 있는 큰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참고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유대인들은 언제나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아무튼 그들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시체들을 치워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해서, 금방 죽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개는 이삼일 정도 고통을 당하다가, 그 후에 숨을 거둡니다. 그래서 사정이 있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빨리 죽게 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다리를 꺾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야구 방망이와 같은 나무 망치로 정강이를 후려칩니다. 그러면 다리뼈가 으스러지면서,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몸이 아래로 쳐지더라도,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숨을 쉴 수 없으니까, 결국은 질식해서 곧 죽게 됩니다. 

아무튼 요19:32 말씀과 같이,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대로 빌라도는 군인들을 보냈습니다. 군인들은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아직까지 죽지 않고, 숨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19:33~34 말씀과 같이, 군인들은 이미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고,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심장을 겨냥하고 찔렀을 것입니다. 

물론 로마의 군인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19:36~37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시34:20을 보면,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로마의 군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출12:46을 보면, 유월절 양의 뼈는 꺾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고전5:7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더라도, 그의 다리가 꺾어지면 안 되었습니다.    

그 대신 슥12:10을 보면,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로마의 군인들로 하여금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금요일에는 반드시 무덤에 장사되셔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12:40에서 말씀하시기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날짜를 계산할 때, 어떤 날의 한 부분이라도 그것을 하루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금요일에는 반드시 무덤에 장사되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금요일, 토요일, 주일 해서, 사흘 동안을 땅 속에 계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었습니다. 눅23:51을 보면, 아리마대는 유대인의 동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갈릴리도 이방의 동네라고 불렸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는 유대에 위치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자기의 새 무덤을 예루살렘에 준비해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리마대라는 동네는 분명 예루살렘에서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부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53:5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그 곳 사53:9을 보면,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무덤은 악인들과 함께 해야 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부자의 무덤에 장사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본시는 그의 시체가 악인들이 던져지는 웅덩이에 던져져서 불태워지든지, 아니면 새나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신 후에, 부자와 함께 있도록 예언되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이 응하여지도록, 하나님은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눅23:50~51을 보면, 그는 본시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공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결정을 내린 유대교의 최고 기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공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행한 결의와 행사에는 찬성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오늘 본문 57절 끝 부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19:38 말씀과 같이, 그는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그 사실을 숨겼습니다. 만일 그 사실이 밝혀지면, 그는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누리던 지위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의 생업에도 지장이 있어, 부를 잃게 될 것입니다.

 

마27: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그리고는 당돌히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도 숨겼던 그가 어떻게 이와 같이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무엇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습니까?

아마도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여러 가지의 이적들이 일어난 것을 자기의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과,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된 것과,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진 것과, 무덤들이 열린 것 등을 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하시며,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죄수를 구원하시는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것들이 그의 마음을 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무튼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은 예수님의 친인척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전연 없었습니다.

또한 빌라도도 그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주어야 할 이유가 전연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죄수들이 던져지는 구덩이에 던져버리라고 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체를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에게 내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유대인들과, 로마의 군인들과,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과,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다 쓰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쓰임을 받은 도구들에 불과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모든 주권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이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범사에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말씀의 성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59~60절).

 

마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막15:46 말씀과 같이, 요셉은 그의 손으로 직접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렸습니다. 물론 이 때 요19:39 말씀이 밝히고 있듯이, 그의 곁에서 니고데모가 함께 그 일을 거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한 사람은 요셉이었을 것입니다. 

먼저 요셉은 니고데모의 도움을 받아서, 땅위에 서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심스럽게 내려서 땅바닥에 반듯하게 눕혀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예수님의 머리에 씌운 가시 면류관을 벗겼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발을 최대한 부드럽게 못 밖으로 잡아당겨서,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떼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몸에서 흐르는 피와 땀, 그리고 예수님의 몸에 묻은 먼지들을 깨끗하게 닦아내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요셉은 그가 사온 깨끗한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체를 쌌습니다. 그 때 요19:40 말씀과 같이, 니고데모가 준비해온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함께 세마포로 쌌습니다. 이것들은 시체가 썩을 때 풍기는 악취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27: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바위 속에 판 자기의 무덤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 무덤은 아직까지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의 나이가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그의 가족 중 아무도 그 무덤에 묻히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19:42 말씀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 무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서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장사는 준비일, 곧 금요일에 다 끝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끝낸 요셉은 큰 돌을 굴려서 무덤 문에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있던 골고다 언덕 아래에는 큰 바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 곳에 있는 큰 바위를 파고서, 작은 동굴 모양의 가족묘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덤 입구에 도랑을 만들고, 그 위로 큰 돌을 굴려서 무덤을 열고 닫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을 열어 놓은 채로 둬두면, 도둑이 세마포나 향품을 훔쳐 갈 수도 있었습니다. 또는 들짐승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대적들이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훼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무도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무덤의 입구를 큰 돌로 막았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끝낸 후, 요셉은 돌아갔습니다. 니고데모도 돌아갔습니다. 눅23:54 말씀처럼, 이 때는 아직 준비일로서 안식일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장사에 대하여 예언된 말씀들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먼저 사53:9에 예언된 말씀, 곧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는 성경이 응하여졌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또한 마12:40에서 예수님이 친히 예언하신 말씀, 곧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신 성경도 응하여졌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금요일부터 주일까지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실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두 여자의 헌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61절).

 

마27: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여기에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둘 다 똑같은 마리아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한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여자를 그저 다른 마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아리마대가 동네의 이름인 것처럼, 막달라도 역시 동네의 이름입니다. 참고로 배신자 가룟 유다의 경우도 가룟은 동네의 이름입니다. 성경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 명 나오기 때문에, 서로를 구별하기 위하여 동네의 이름을 덧붙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막달라는 갈릴리 바다 서안에 위치한 자그마한 해변 마을입니다. 눅8:2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본시 일곱 귀신이 들렸었는데 예수님이 그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또 다른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27:56을 보면, 그를 가리켜서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막15:40에 의하면, 이 때의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 곧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른 마리아는 알패오의 아내인 셈입니다. 그런데 요19:25을 보면, 이 마리아를 가리켜서 글로바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글로바의 별명이 알패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마27:55 말씀과 같이, 이들 두 마리아는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밝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장사가 끝난 후에도 한 동안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앉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한 후,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은 돌아갔습니다. 니고데모도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로잡히실 때, 이미 다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이들 두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앉아있었습니다.

그 후 마28:1과 9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이들 두 마리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결과 이들 두 여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으로 목격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증언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이와 같은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이들의 믿음에, 이들의 헌신에, 이들의 사랑에 보상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헌신과 사랑을 잊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아름다운 것으로 보상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을 잊지 아니하시고 상 주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수고는 주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말씀의 성취를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힘있게 의지합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합시다. 예수님을 위하여 기쁨으로 헌신합시다. 그리해서 우리도 예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도록 합시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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