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자격도 없었는데
로마서 5:7~11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7義人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善人을 위하여 勇敢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罪人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確證하셨느니라.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震怒하심에서 救援을 얻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怨讐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和睦되었은즉 和睦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和睦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설교:
누구나가 한번은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언제일지 모르고 또 어떤 형태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사망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가 한번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나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아무도 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오면 그 죽음을 거부하고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난리를 칩니다. 입으로는 늘 “빨리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도 막상 죽음이 찾아오면 어찌하든 피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간 노회 동료 목사님 모친께서 소천하셔서 조문을 갔는데 어떻게 소천하셨냐고 물으니 너무도 황당하다는 것입니다. 저녁 잘 잡수시고 가슴이 좀 답답하다 하시기에 등 좀 두드려 드리고 주무셨는데 아침에 안 일어나시더랍니다. 보니까 소천하신 것입니다. 연세가 72세이신데 갑자기 가신 것입니다. 너무도 갑자기 찾아온 것이라 자식들이 모두 너무 황당해 하시더군요. 그런데 자식들은 그렇게 황당하게 가신 것이 너무 속상하여 있는데 조객들은 다 그 할머니 복 받았다고 한마디씩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죽을 것 같습니까? 그것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설사 안다고 좋을 것도 없습니다. 만약 몇년 몇월 몇일 몇시에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불행해질 것입니다. 차라리 모르고 살다가 때가 되면 가는 것이 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분명해야 합니다. 나는 죽어도 사망하는 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은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십니까?
사람은 아무도 자기가 죽을 날과 장소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 주님은 당신이 어떻게 죽으실지, 그리고 어디서 죽으실지 아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왜 당신이 죽어야 하는지도 알고 계셨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신 앞에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으셨고 피하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왜 죽으셨습니까?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아직 罪人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確證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이 말은 전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을 때란 말입니다. 그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죽음은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1. 罪를 죄로 알지 못하고 있을 때이고
2.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때이며
3. 죄의 結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전혀 일지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왜 죽어야만 했을까요? 제가 세례문답을 할 때마다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왜 죽어야 구원이 이루어지는지는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라고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하나님과 인간의 최초의 약속입니다. 에덴동산의 헌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는다고 법을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법을 어겼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사망에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려고 하나님이 죄 없으신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사람으로 보내셔서 대신 죽게 하신 것입니다. 代贖, 대신 贖罪하신 사건, 이것이 십자가의 核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고 公義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고 반면에 하나님 편에서는 당신이 당신의 법을 지키신 위대한 공의인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이 그 십자가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구체적으로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조금이라도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解放시키셨습니다. 영원히 사단의 종노릇해야 할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때가 우리가 전혀 資格이 없을 때, 아직 죄인 되었을 때란 말입니다. 어떤 분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닌데요?” “나는 그럴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錯覺입니다.
양반의 자식은 양반이고, 종의 자식은 아무리 잘났고 똑똑해도 종입니다. 그처럼 아담이 죄를 짓고 난 후 죄인이 되었고 죄인 된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다 죄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犯罪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었으니 이것을 遺傳죄, 原罪라고 말합니다. 이 죄의 결과로 사망이 왔으니 사망이라는 말은 죽었다, 끝났다는 의미에 앞서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을 정해주었습니다. 한 예를 들면 고기는 물 속에서만 살라, 그렇게 고기의 삶의 영역을 물로 한정시켜 주었는데 고기가 물이 싫다고 물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그것을 分離된 상태라고 말하고 결과를 사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영역을 하나님 말씀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면 인간에게 죽음이 온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했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범하므로 인간에게는 사망이 왔습니다. 이 사망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 즉 영적인 죽음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럽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죄로 타락한 인간은 사망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사는 것인지, 한 세상 살고 난 이후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여 흑암, 캄캄한 밤에 방향을 잃어버린 나그네처럼 그런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들이 이렇게 死亡길에서 허덕이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보내실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죄를 홀로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자격이 합당한 자를 위한 일이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아직 죄인으로 죄를 알지도 못하는 우리를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10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는 이미 십자가 지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온밤을 지새워 가야바의 법정, 빌라도의 법정, 헤롯왕의 법정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은 흔적에서 피가 나고, 그런 몸으로 180근이 넘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너무 힘들어 쓰러지셨습니다. 그때마다 로마 병정이 내려치는 채찍에 맞아 다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 중에서 18번이나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힘이 없어 십자가 지지 못하기에 저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온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습니다.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피 흘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十字架가 무엇입니까?
원래 십자가라는 것은 <페니키아>라고 하는 나라에서 凶惡無道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死刑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좌우편에 두 살인강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형벌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죄가 있기에 흉악무도한 살인강도나 반역자들에게만 지게 했던 십자가 형틀을 주님에게 지워서 죽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이 그토록 무서운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가?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인간의 죄가 그토록 무서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2)이것만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령 죽으리라”는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바뀌게 되는 위대한 사건이 된 것입니다.
옛날 드라마인 허준을 보면 그는 양반의 자식이면서도 어머니가 첩실이기에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의가 되어 왕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자 왕이 신분을 바꾸어주어 양반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그 신분의 변화는 오로지 왕만이 바꿀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죄의 종 된 신분을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분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드셨습니다.
전에는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인 지옥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었으나 이제 신분이 확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무런 자격이 없었는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3.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11절)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죄에서 영원히 해방시킨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었던 그들을 하나님이 친히 모세를 통해 구해내셔서 자유를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영원이 마귀의 종노릇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사 값을 치르셔서 解放시키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종노릇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해방되지 못한 자 같이 굽신굽신 거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토지라는 드라마 속에서 옛날 최씨 집안에서 종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일제시대에 해방되었음에도 주인 딸을 만나면 마님 마님 하며 굽신거리는 모습을 봅니다. 왜요? 옛 습관 때문입니다. 신분은 자유를 얻었으나 생각과 습관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드웨어는 바뀌었는데 소프트웨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바꾸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더 이상 마귀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없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종교의 신은 때마다 절기마다 震怒를 풀어야만 평안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더 이상의 十字架를 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번으로 완전하게 끝이 난 것입니다.
찬송가458장 2절을 보세요.
♬주 십자가에 달리사 날 구원해 주셨으며 주 예수님 고난받아 나 평화 누리도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그렇습니다. 8장 31절~37절도 보세요.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할렐루야
십자가의 拘束으로 얻은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변함없는 것이며 누구도 取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장안의 성도 여러분!
자격이 있는 자가 사랑을 받으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이 위대한 사랑입니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먼저 우리를 먼저 사랑하사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을 깊이 감사하며 경건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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