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정사기념예배]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 (마가복음 15장 21-41)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모님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우시고 거의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지면, 가능한 한 그 병상을 지키고 한시라도 떠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부모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바로 그 순간을 자식으로서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줄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식이 병상을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그 부모님의 운명하시는 순간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있어도 부모님이 숨을 거두시는 순간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고 혹은 잠깐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고 혹은 피곤해서 졸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그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자리에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인 줄로 다들 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모 앞에서 자식 된 자가 그러해야 하는 것이라면, 하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이 날을 신자 된 자들이 바로 그 십자가 밑에서 지켜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바로 그런 뜻에서 볼 때 오늘 밤 비록 몸들은 교회에 모여 있지만 우리의 영으로는 그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이 시간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주님 죽으시던 날에, 바로 그 십자가 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귀중하고도 위대한 그 구세주께서 죽으시는 현장에, 그들은 마음 뿐 아니라 몸으로 함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주님의 죽으심을 대하는 자세는 천태만상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자리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엄숙해하는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딴판으로,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제멋대로 시끌벅적거리는 난장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이 점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 시간 이 주님의 죽으시는 십자가 밑에 우리 자신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제 욕심만 차리는 자가 아니라, 그 십자가에 마음이 끌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1절로부터 27절에 기록하기를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 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 /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마지막 재판을 통하여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그 길로 곧 '골고다'라는 곳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 곳을 일명 '갈보리'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 말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골고다'라는 지명은 원래 '해골'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인데, 그 장소가 그런 이름으로 불린 것은, 지형 자체가 사람의 해골 비슷하게 생겼든지 아니면 그런 처형이 자주 있었던 장소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골고다에서 "제 삼시" 즉 금요일 오전 9시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은 십자가의 수평대를 땅바닥에 펼쳐놓은 후에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그 위에 눕히고서 양 손목에다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형장에 미리 세워져 있던 십자가의 수직대에다가 이 수평대를 밧줄 따위로 끌어올려서 전체를 십자형으로 만들어 고정시키고는 또 발에 못을 박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꼭대기 부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명패, 즉 죄목을 적은 명패를 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시고 그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에 그 아래에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두고 어떻게 나눌지를 제비 뽑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당시 옷은 다 귀했기 때문에 사형수의 것이라 해도 버리기에는 아까웠고, 그래서 사형수가 입고 있던 옷을 그 형을 집행하던 군인들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겉옷, 속옷, 허리띠 등을 여러 사람들이 공평하게 나누느라고 찢을 수는 없었으니 결국 누가 어느 것을 차지하느냐를 두고 제비를 뽑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그들이 막 십자가에 못 박아 단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 예수님의 몸에서 벗겨낸 옷들을 누가 가져가게 되느냐 이것을 두고 서로가 안달을 하며 제비뽑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십자가 밑에서 이런 짓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 위에서 우리 위해 죽음의 고통을 받고 계신데, 그 주님은 전혀 안중에 없고 그저 자기 욕심만 채우기에 바쁜 사람들입니다.
교인이라고는 하지만 오직 자기가 좀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생각하느라고 십자가 따위는 바라볼 여유도 없는 자들입니다.
자기 자식이 어느 대학교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는 일 년 내내 신경을 쓰면서도,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가?'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수난주간 동안에조차도 생각해 볼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루 매상 좋은 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 위하여 대신 죽으신 날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상가에 조문하러 와서도 자기네들끼리 화투나 치고 돈 따먹는 재미만 보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처럼, 오늘도 주님 십자가 밑에서는 자기 욕심 채우려고 제비만 뽑는 사람들이 여전히 들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군병들과는 대조적으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던" 사람이었는데, 졸지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이 골고다까지 따라오게 되었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 이름조차 그때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을 가망성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몬이 예수님이란 사람을 만나게 된 첫 순간, 물론 자의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졸지에 그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까지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몬이 나중에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추측합니다.
본문에 보면 그를 가리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자세히 밝혔습니다.
즉 그 시몬의 아들들의 이름까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그 아들들이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한 시골 사람"이라고만 언급해도 아무 상관없고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까지 했으면 이미 충분한 것이지, 이 사건에 직접적 관계가 없는 그 아들들의 이름까지 굳이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이 구레네 시몬은 참으로 특별한 과정을 거쳐 신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해서 따르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무슨 병 고침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예루살렘에 볼일 보러 왔다가 누가 십자가에 달리게 되어 끌려간다는 소문을 듣고 그냥 궁금증 때문에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엉겁결에 그 십자가를 자기가 지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만나게 된 예수님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자연히 이것저것 알게 되었을 것이며 결국에 가서는 그 예수임을 믿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은 바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군병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으로 그 십자가 밑에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의 모습을 본받아 이 주님의 십자가 밑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십자가 밑에까지 와서도 여전히 세상 욕심만 머리에 가득하여 위를 올려다 볼 생각도 하지 않는 눈뜬장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사건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분을 만나게 되고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가 생각하게 되고 십자가 때문에 그 예수님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고 종내에는 바로 그 십자가 때문에 그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십자가라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을 상기시키고 표현하는 것으로서는 너무나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십자가를 가지고 목걸이 따위를 만들어 장식품처럼 쓰고 있지만, 원래 십자가라는 것은 사람이 그 위에 벌거벗은 채로 달려서 못에 박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끔찍한 형틀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다른 그 어떤 위인들이나 요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상징으로 그런 비참하고 끔찍한 것을 선택하지 않고, 그 대신에 힘 있는 동물이나 아름답게 빛나는 해나 별 따위를 상징물로 사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들에 비하여 십자가는 어떤 한 사람을 상징하기에는 너무나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높이 달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너무나도 신기한 장면이 아닙니까?
왜 예수님이란 분은 그처럼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린 모습으로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계시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이란 분은 구세주라고 하시면서도 세상의 여타 해방 군주처럼 힘 있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려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오히려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올려놓고 계시는 제사장의 모습을 우리 눈앞에 보여주고 계시는 것인지 정말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밤에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도 여전히 제 욕심만 차리는 이기주의 교인이 아니라, 이처럼 이상하고 신기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에 끌려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게 됨으로써 결국에 가서는 그 예수님께서 왜 그 십자가에 달리셨는지를 바로 그 십자가의 현장 가까이에서 뜨거운 은혜로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십자가를 향하여 조롱하는 자가 아니라, 그 십자가에서 선포된 복음에 이끌려 신앙고백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9절로 39절에 기록하기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 /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제 삼시부터 제 구시까지, 즉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정말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계셧습니다.
우리는 보통 손발에 못을 박힌 것만 십자가의 고통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은 약과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양손을 벌리고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 그 사형수 자신의 체중이 흉곽 부근을 압박하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숨을 쉬기가 어렵게 되어지고, 그러면 사형수는 숨통을 트기 위하여 그 십자가에 달린 상태에서 자기 몸을 스스로 좀 더 위로 끌어올리려 하게 됩니다.
그러면 바로 그 동작 때문에 손에 못 박힌 것이 더욱 고통스러워지게 되고, 또 잠시 숨을 돌리게 되어도 스스로의 체중을 이길 힘이 없어서 또 몸은 처지게 됩니다.
그러면 또다시 호흡이 가빠지게 되는 것이며, 그 때문에 그 사형수는 또 다시 몸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반복하게 되며, 이런 동작이 계속될수록 조금씩 조금씩 더 기력은 쇠진하면서 고통은 더 심해지고 호흡은 더 곤란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설사 십자가에 달려 있지 않더라도 만약 사람이 하루 온종일을 조금씩 숨이 더 가빠져가면서 죽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상상이라도 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끔찍한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온 세상 사람의 죄와 저주를 대신 다 지신 극심한 영적 고통까지 함께 당하고 계셨으니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최악의 고통을 겪고 계셨던 십자가 밑에서는 온갖 종류의 비웃음들이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아하,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도로 짓겠다고 큰소리치시던데 어디 한번 스스로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하고 예수님을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역시 "남은 구원한다더니 자기는 못하시는구먼. 어디 지금이라도 한번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도 당신이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인 줄로 믿어 주지."하고 맞장구치면서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 좌우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던 강도들도 "예수를 욕했다"고 했는데, 물론 그 중에 한편 강도는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우리가 다 알지만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함께 욕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을 때에도, 이들은 "어디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해 주나 보자."라고 계속 비웃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희롱과 모욕이 다 '구원'이란 말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비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셨더라면, 정작 꼭 필요한 이 세상 죄인들의 구원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고통과 조롱 속에서도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으셨던 이유는 바로 이 구원, 즉 주님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시 이 십자가 밑에서 꼭 같은 조소와 모욕을 퍼붓고 사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밑에 모여 있는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 믿는다고 밥 먹여 주나."라고, 그 십자가가 자기 인생에 아무 것도 베풀어 줄 능력이 없다고 코웃음을 치면서 지나갑니다.
당시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처럼 오늘날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남달리 성경을 연구하고 신앙과 종교를 잘 안다고 하면서도,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향하여 '스스로 메시아라고 착각에 빠져서 십자가에 달리게까지 되었지만, 정작 그 십자가에서는 자기가 기대했던 기적적인 구원을 받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버렸던 일종의 광신자였다.'라고 떠들어댑니다.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들기만 해도 고인과 유가족에 대하여 보통 실례가 아닌데, 감히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이처럼 입으로 옮기기에도 두려운 모욕을 함부로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꼭 같은 십자가 밑에는 그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의 길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큰 소리"를 지르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다 이루었다"(요 19:30)라는 최후승리의 선언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는 마지막 기도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처럼 돌아가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 즉 성전 내부를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누어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찢김'을 당하고 죽으심으로써 이제 성도들은 바로 이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상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죽으신 순간 참으로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실로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은 문자 그대로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장교'로서 오늘날로 치면 대위 계급의 중대장 정도에 해당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포함한 세 명의 죄수들을 십자가를 지워서 골고다 현장까지 끌고 가고 또 거기에 십자가 세울 구멍을 파고 또 군중들의 접근을 막고 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 정도 단위의 부대, 즉 백 명 정도의 군사와 그 지휘관인 백부장이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즉 그 백부장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서" 있었다는 사실은, 십중팔구 그가 바로 자기 휘하의 부하들을 지휘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도록 한 현장 지휘관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연의 징조들, 하늘이 어두워지고 지진이 나고 하는 따위의 징조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또 그는 그처럼 십자가에 가까이 있었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가상칠언(架上七言)'의 말씀들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들을 보고 듣고 있었으며, 그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백부장보다는 평소에 예수님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었고 그 말씀도 더 많이 듣고 많은 기적들까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을 향하여 온갖 욕만 해대고 있는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방 사람 백부장은, 그 십자가에서 일견 무력하게 보이고 다른 죄수처럼 극심한 고통 가운데 괴로워만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새겨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백부장이 예수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이라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그 일곱 말씀이 전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로 그 말씀을 하시면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는 신앙을 얻게 되었습니다.
무슨 산상보훈을 듣는 자리나 오병이어의 식사를 받는 자리나 자기 병을 고쳐 주시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몇 마디의 말씀만 듣고서도 그 백부장은 그 많은 유대인들 중 단 한 명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신앙 고백을 바로 그 자리에서 했던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밑은 사람이 시끄럽게 떠드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큰 고통 속에서도 또렷하게 남기신 신기한 말씀들을 듣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저주하는 무리를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하셨던 놀라운 용서의 사랑을 들어야 합니다.
같이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죽어가고 있는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던 그 신기한 내세복락의 약속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 끔찍한 고통 중에도 오히려 당신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시며 요한더러 "보라 네 어머니라"고 당부하셨던 진실한 효성을 들어야 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와 함께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그 십자가의 고통은 결코 가상이나 연기가 아니라 진짜 현실이었으며 완전한 사람으로 당하신 최악의 저주였음을 들어야 합니다.
가장 비참하게 죽는 것처럼만 보였던 십자가에서 오히려 "내가 다 이루었다"라는 기상천외한 승리의 선포를 하시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기도를 통하여 실로 성부 하나님께 끝까지 자발적으로 순종하시고 그 뜻을 따르셨던 성자의 신실하심을 들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가상칠언 중 단 하나만 보더라도, 이것이 어떻게 사람의 입에서 그런 끔찍하고 처참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십자가 밑에서도 자기 요구, 자기 주장, 자기 판단의 소리만 시끄럽게 지르느라고 이런 놀라운 말씀까지도 귀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자들이 되지 말고, 그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도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을 선언해 주시는 이 복음의 소리를 듣고 '이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함께 고백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십자가는 이 세상 사람들을 일단 둘로 나눕니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대속의 은총을 쏟아 부어 주시는데도 여전히 자기 욕심에만 가득차서 예수님을 향하여 불만과 비난만을 퍼붓는 사람들과, 이 십자가의 신기함에 이끌리고 이 십자가를 통하여 선포되는 말씀에 이끌리는 사람들로 확실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사람을 둘로 나누기만 하는 데서 끝나지 아니하고, 그처럼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그 대속의 은총으로, 그 영생구원의 길로 더욱 가까이 끌어당겨줍니다.
십자가에 이끌리는 성도는 세상과는 멀어지지만 그 대신에 하나님 쪽으로 가까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서도 "멸시함을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갈보리 산 위에 선 십자가'에 이끌리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주가 죄인 위해 고난 당하신 표'인 줄을 알게 됩니다.
그 '험한 십자가에서 주가 흘리신 피'가 바로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흘리신 보혈'인 것을 뜨겁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그 '주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끝까지 붙들면서' 나도 그 '험한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고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절로 서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택자의 심령을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고난의 주, 대속의 주, 구원의 주님께로 이끌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과연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이 시간을 지키고 있습니까?
돌아가시는 부모님의 병상에서조차 엉뚱한 짓하고 있는 자식이 있다면 어디 사람이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불효자였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평소에 잘 해 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그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이 십자가 밑에서조차 자기 죄와 자기 연약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욕심만 살아서 그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그저 불만만 품고 있다고 한다면, 이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를 그 얼마나 크게 모욕하는 자이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 그 '멸시 받는 십자가'에 마음이 끌려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하게 되며 이제 '내 몫에 태인 십자가'까지 기꺼이 지고 다 함께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끝까지 주님 따르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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