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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마지막 주님의 기도! (마 26:36-46)

by 【고동엽】 2022. 4. 8.

겟세마네 마지막 주님의 기도! (마 26:36-46)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남겨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때 백성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했다 하여 '종려주일'(棕櫚主日)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하여 '고난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고난주일이라는 것은 오늘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해서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마지막 한 주간을 기념하면서 지키는 주간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일이 끝나는 날을 부활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주일 이렇게 이어지는 한 주간을 과거부터 '대 주간'이라고 해서 전통적으로 가장 큰 절기로 여겨왔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이야말로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된 요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할/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주간인 목요일 밤중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하루 앞둔 저녁의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시는 주님의 모습은 깊은 고뇌에 잠겨 있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온 십자가의 형벌에 대한 예지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철저히 버림받아야 한다는 외로움에서 오는 고뇌는 예수님의 온몸을 고통과 슬픔으로 젖어들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가셨습니까? 기도하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풍랑까지도 잔잔케 하시는 능력이 있었던 분이십니다. 그런 능력의 주님이 왜 기도해야만 했겠습니까?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자기를 꺾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과정이 없이는 십자가를 지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무서운 고통과 무거운 짐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먼저 기도로 무장하시려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그때 가롯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배신하여 떠나버렸고 열 한 제자를 데리고 오시다가 여덟 제자들은 동산 입구에 남겨 주시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함께 동산 깊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은 중요한 사건마다 이 수석 제자들을 동행시켰습니다.
  마17장에서 변화산에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실 때도, 눅8장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딸을 살리신 때도 이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수석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간 것은 함께 기도하기 원해서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와 저주를 가난과 질병을 다 청산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셔야 되는데 인성을 입으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뇌하시며 고독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시고 제자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얼굴을 땅에 데시고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난 뒤 제자들에게 와보니 그들이 골아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다시 한 번 당부하시고 또다시 간절하게 기도하신 뒤 와보니 제자들은 또 마찬가지로 졸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는 주님을 외면한 채 잠에 떨어진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뜻을 좇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때 졸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나와 함께 기도하자는 뜻입니다. 즉 내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너희도 기도하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제목소개!▶

 

  1.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기드론 골짜기 넘어 감람나무가 우거진 감람산 기슭에 있으며 예루살렘 동쪽 벽으로부터 약 1.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본래의 산 이름은 감람산 즉 '올리브 산'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산의 서쪽 중턱을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합니다. 감람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가면 '범죄자의 산' 또는 '멸망 산'이라는 산이 나오는데 여기까지 감람산이라고 부릅니다.
  어찌하여 이런 험한 이름이 주어졌는가 하면 솔로몬 왕이 이곳에 우상의 전각을 짓게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감람산 위에 있는 봉우리인데 그곳은 평지가 아니고 산꼭대기에 있는 조그마한 동산입니다. 그곳에는 감람나무가 많았습니다.
  감람나무 동산은 중동의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쉼터로, 또는 묵상하는 장소로 매우 귀중히 여겨졌습니다.
  감람나무는 가지가 많은 나무로 천천히 6m정도 자라며, 5-6백년을 사는 나무입니다. 만약 밑둥이를 쳐내면 그곳에서 5개정도의 새싹이 나오는 번식력 또한 강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고대 중동 사람들에게 감람나무는 부의 상징이었고, 미(美), 힘, 신적인 축복, 번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시52:8절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이 겟세마네란 지명은 아람어 명칭으로 '기름 짜는 틀'이란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감람나무 열매를 틀에 넣어서 기름을 많이 짠 곳입니다.
  예수님도 이 곳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짜고, 피를 짜고 기도하신 곳입니다. 그러니까 땀이 변하여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노동입니다. 힘이 듭니다. 땀을 쏟고 피를 쏟고 눈물을 쏟고 생명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능력이요, 축복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2.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지금도 겟세마네 동산에는 우리 주님이 땀방울이 변하여 피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은 기념하기 위해서 '땀 흘린 교회'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또 이곳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이 습관을 좇아 기도하신 곳입니다.
  눅22:39절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고 제자들도 그곳에 같이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제3시, 6시, 9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장면을 다시 살펴보면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눅22:41), 땅에 엎드리어(막14:35), 얼굴을 땅에 대시고(마26:39),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마26:44)'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36절을 보면 '내가 저기 가서 기도 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지금 여덟 제자들은 산 중턱에 머물러 있게 하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만 데리고 갔습니다.
  '여기 앉아 있으라'고 했는데 여덟 제자보고 그냥 쉬고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너희는 '여기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앉아 있으라'는 원어 적인 뜻은 '깨어 기도하라'는 뜻과 동일 어 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혼자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는 아무나 질 수 없습니다. 오직 기도하는 자만이 그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믿/
  37-38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처음에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한 장소에 앉아 기도하도록 시키십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그 중에서 세 명을 데리고 조금 앞자리에 가십니다. '깨어 있으라'고 수석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뒤에 좀 더 앞으로 나아가서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함께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홀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남모르게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밤에 기도해야 할 때가 있고, 새벽에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할 때가 있고, 철야하며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 앞에서는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한 사람이 천을 좇고 두 사람이 만을 좇는다'고 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개인 기도도 중요하지만 성령 받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기적과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 그래서 우리가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큰 힘이 됩니다.
  우리는 여기 본문에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의 고통을 보게 됩니다. 37절에 '고민하고 슬퍼 하사'라고 했고, 38절에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①예수님의 고뇌가 무엇입니까? 몇 가지가 있습니다.

  ⑴배신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여러 가지 고통이 많습니다. 가난한 것도 고통이고, 병든 것도 고통이고 사업에 실패한 것도 고통이고, 또한 일자리가 없는 것도 고통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보다는 더 큰 고통은 배신당한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배신당할 때, 남편이 아내에게 배신당할 때, 또 그렇게 믿었던 친구가 배신할 때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우리는 지금 사순 절기를 보내면서 우리 주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믿었던 제자에게 그것도 돈 받고 팔아먹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이웃을 배신하지 맙시다. 배신자의 말로는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예수님은 배신한 가롯 유다는 창자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저주스런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⑵고독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렇게 믿었던 수제자들도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졸고 있으니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따라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주의 종은 외롭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이 외롭고 사명자의 길이 외롭습니다.
  56절에 한번 보세요!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 다 버리고 떠나갔으니 얼마나 고독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면 안 됩니다. 만약 주님을 버린다면 그 버리는 순간 우리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믿/

 

  ⑶뭐니뭐니 해도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형틀입니다. 로마는 무서운 중죄인들만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반역 범, 도망간 노예, 그리고 살인자들'에게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에 처하지 아니 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형은 최고의 저주의 형틀입니다. 또한 육신적인 고통은 얼마나 무섭습니까? 양손, 양발이 대못을 받으시고 달리신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입니다.

 

  ⑷가장 큰 고통은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저주받은 고통'입니다.
  이 고통이 정녕 견딜 수 없는 고통이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상의 절규에서 십자가의 고통의 절정을 이루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뇌를 우리도 이해해야 합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 때문에, 따라주지 않는 제자들을 바라보고 느끼는 외로움, 또한 십자가의 고통과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슬픔 때문에 38절에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당부한 것은 ②'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그 고난을 기도로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청계산 기도원에서 두 분 목사님이 40일 장기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김 목사님이시고, 또 한 분은 박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금식기도를 시작하신 그 날부터 장로님도, 권사님도, 집사님들이 금식 시간표를 만들고 순번을 짜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죽음을 각오하고 교회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편안히 쉬고 있을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김 목사님은 아주 수월하게 40일의 장기 금식을 마치고 회복도 빨랐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 네 교회는 목사님이 매일 매일 생명을 걸고 죽음을 각오하고 영적 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교인들은 나 몰라라 편히 쉬었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은 40일 금식기도도 어려웠고 회복도 어려워서 크게 고생을 하셨습니다.
  본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당부했지만 제자들은 졸고만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해도 너무했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시지만 제자들이 깨어 기도하면 그 십자가에 동참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직접 하는 것도 많지만 우리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함께 동참한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종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기도가 증보 기도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

  주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③'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41절을 보면 주님은 졸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왜 신앙인들이 실패합니까? 나쁜 일을 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을 안 해서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실패하고 무너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넘어가고, 욕심에 넘어가고, 정욕에 넘어가고,' 어디 그뿐입니까? 괜히 오해를 사서 마음이 토라집니다. 섭섭 마귀가 들어가서 목사님은 나만 미워한다고 섭섭해합니다.  모두 다 부질없는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을 잘하고 열심도 냅니다. 그러나 시험에 들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 축복입니다. /믿/ 마귀는 좋은 일을 시키고도 시험에 들게 합니다.
  그래서 다 무너지게 만듭니다. 마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서 우는 사자처럼 우리들을 올무에 잡아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신앙에 잠들어 있는 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41절을 해석하면서 '너희들이 내 생각은 못한다 하더라도 너희들 자신들의 문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너희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험이 너희들을 덮치고 말 것이다'라고 했고, '포스터'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마음을 놓지 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놓아선 절대로 안 됩니다.

 

  ④깨어서 기도하지 않던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은 시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베드로는 마26:33절에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또 막14:31절에서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 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또 눅22:33절에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또 요13:37절에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복음서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지나친 장담은 결국 내가 제일이며 내가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과신과 도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언뜻 보면 위대한 신앙고백처럼 보입니다 만은 그러나 고백은 실천될 때 참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신앙이 문제입니다. 떠벌리는 신앙! 행함 없는 신앙은 시험받기 쉽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대개의 경우 장담은 허풍과 통합니다. 속이 차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장담하지 않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언제나 떠들고 말 많은 총잡이가 말없이 눈을 굴리는 총잡이 한데 당하는 것이 정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허풍떠는 신앙은 빈 수레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태도는 시험에 빠지는 통로가 됩니다.
  이렇게 장담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된지 아십니까? 마26:5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을 잡으러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쳤으며, 또 6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붙잡혀 빌라도 뜰에 계실 때 베드로는 그곳에서 어린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58절 이하에 보면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세요!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님을 좇아갔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비겁합니까? 이처럼 베드로가 혈기를 부리고 또 예수님을 부인하는 비겁자가 되고 멀찍이 따라가는 비겁자가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 결정적인 이유는 겟세마네의 동산에서 깨어 기도하지 않고 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
  기도를 쉬면 머리를 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세력입니다. 기도소리가 작아지고 기도시간이 줄어들면 상대적으로 마귀의 활동무대가 넓어지게 됩니다. 시험에 든다는 것은 마귀가 파 놓은 함정에 깊이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험에 빠지게 되면 영적 즐거움을 빼앗기게 되고 그 영혼이 위태롭게 됩니다. 패잔병에게는 군가와 개선가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시험에 빠진 영적 패잔병에게는 찬송과 감격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너희 자신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하지 않고 졸고 있다가 망신당하고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깊이 회개하고 나서 훗날 벧전5:8-9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역설했습니다.

 

  ⑤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은 우리가 곤경에 빠졌을 때에는 기도가 가장 실제적인 구제의 수단이라는 교훈입니다.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교회도, 국가도, 곤경에 빠졌을 때 가장 실제적인 구제의 수단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내가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전쟁터에 나가서도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시간이 되면 언제나 천막 문에 흰 수건을 걸어놓고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그 누구도 그의 기도 시간에는 만날 수 없다고 합니다. '기도 절대 우선, 누구도 침해 할 수 없는 기도시간'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만나 주시고 큰 힘과 능력과 지혜와 용기와 승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지금은 우리 모두 기도할 때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교회 적으로도 그렇고 국가적으로도 그렇고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아도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통로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른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와의 바른 관계입니다. 부자와 자식간의 바른 관계입니다. 선생과 학생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교인과 목사와의 바른 관계입니다. 정치인들과 국민들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관계가 중요합니다. 이 관계가 바르지 않을 때 사고가 납니다. 소리가 나고 무력이 행사되고 급기야는 깨어지고 맙니다. 이 관계가 진실하게 잘 유지될 때 우리는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 관계는 오직 기도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신앙인의 가장 큰 적은 기도를 가로막는 세력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마지막 기도의 교훈을 우리에게 귀한 진리입니다. 왜 주님이 '깨어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⑥기도의 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5절에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미 가롯유다가 안내한 악당들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잡기 위해 밀어 닥쳤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만사가 때가 있듯이 기도에도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 제자들은 주님이 잡혀가시기 전에 주님과 함께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망해버린 다음에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망하기 전에 축복해 달라는 기도가 더 힘  있고 효과적입니다.
  병든 다음에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미리 건강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환난을 당한 후에 부랴부랴 정신 차리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환난을 막아 주시고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입니다. 기도엔 때가 있습니다. 오늘 지금이 기도할 때입니다.
  세상이 무섭습니다. 어린 생명들을 유괴해서 토막 살인을 해서 암매장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의 사업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스컴들이 전하는 우리나라의 형편을 보면 그리 밝지만 않습니다.
  또한 전 세계의 형편들을 볼 때에도 그리 쉽지만은 않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우리 교회가 성전 이전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주님의 제자로 드려지고 쓰임 받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지금은 우리가 합심하여 무릎을 꿇고, 정말 간절한 심정으로 생명을 걸고 기도해야 할 때인 줄 믿습니다. /아멘!/
  ▶죠지 물러 목사님은 일평생 고아사업에 헌신한 분입니다. 그는 그토록 힘든 고아사업을 하면서 한 번도 사람을 찾아가 그 무엇을 달라고 청탁한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다만 한일은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했습니다.
  그의 일생동안 무려 5만 번의 기도의 응답을 받았답니다. 한나의 기도가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도로 15년을 더 살았습니다. 다윗은 기도로 그 고비 고비를 위기를 잘도 넘겼습니다. 엘리야는 기도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이겼습니다. /믿/ 이런 이야기는 수를 셀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언제 기도하느냐?'입니다. 지금 기도할 때입니다. 병들면 소리 높여 무릎 꿇고 기도하지 못합니다.
  고혈압 증세로 전신마비에 실어증까지 겹쳐 투병중인 어떤 장로님은 떨리는 손으로 '주님 지난번의 불 신앙을 용서해 주시고 고쳐 주세요' 글을 써서 높이 쳐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때를 놓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어둔 밤이 되기 전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소리로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음성으로 귀를 기울입시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할/

 

  3.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됩시다!

 

  오늘 말씀에 '깨어 있으라'는 말이 3번이나 나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 말씀이 무려 22번이나 나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준비하라, 각성하라'는 뜻입니다. 멍청하게 생각 없이 있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입니다.

 

  ⑴38절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이 깨어 있으니까 너희도 나와 함께 깨어 있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깨어 있었습니다.
  큰 어려움을 앞에 두고도 예수님은 깨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어떤 경우에도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⑵40절에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하십니다.
  깨어 있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안타까움을 가지고 '한 시간도 깨어서 기도 할 수 없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한 시간이라도 깨어 있을 수 있지 않느냐'라는 말입니다.

 

  ⑶'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바꾸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든다는 말입니다. 내 영혼이 깨어서 기도하지 않고 잠자면 시험에 듭니다.
  유두고가 설교를 들을 때 잠을 자다가 회당 2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삼손이 드릴라의 무릎을 베고 깊은 잠에 빠질 때 머리털을 깎이고 힘을 상실하여 붙잡혀 갔습니다.
  'D.L 무디'가 말한 대로 '새가 머리위로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나 머리에 집을 짓는 것은 막을 수 있듯이' 우리에게 시험이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시험에 들어서는 안 됩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받으면 들지만 받지 않으면 시험 들지 않습니다. 시험이 와도 NO THANK 하면 절대로 시험이 들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받으니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할/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내 영혼이 건강해야 합니다. 내 영혼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영혼의 호흡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내 영혼이 강건하고 믿음이 강하여 집니다.

 

  ▶우리가 어느 면에서 깨어 있어야 하는가?
  ⑴영적인 것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영적인 면에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사탄에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벧전5:8-9절에서 말한 것처럼 깨어 있지 않으면 언제 마귀에게 삼켜 질지 모릅니다.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다가 졸아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경우 얼마동안 졸았습니까? 물으면 깜박 졸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87%이라는 것입니다. 깜박 졸았다는 말은 깜박 정신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그 깜박이라는 순간이 중요합니다. 깜박하는 순간에 사고가 터지고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깜박 정신을 잃은 그 순간에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고 사고가 터지고 이단에 넘어가서 패가망신할 수 있습니다.

 

  ⑵사람에 대해서도, 이단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24:24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表蹟)과 기사(奇事)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오늘도 수많은 이단들이 나를 미혹하게 하고 나를 속여서 잘 못된 길로 빠지게 합니다. 주의 종이라고 다 믿으면 안 됩니다. 삯군이 많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는 삯군이 더 거룩한 것 같고 신령한 것 같고 좋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운데서 깨어서 분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⑶세상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롬13:11-12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악한 세상입니다. 세상에 대한 분별력이 없이 살다가는 망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⑷재림에 대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24:42-43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우리 더욱 분별해야 하는 것은 주의 재림입니다. 주의 재림을 이야기하실 때마다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똑 같이 졸았지만 기름 준비하고 깨어 있는 자만이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뜻 있는 사람은 지금 '말세 지말'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웠다는 경고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깨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할/

 

  4. 왜 주님이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까?(42)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이 마신 잔이기에 우리도 마셔야 합니다.


  ⑴고난의 잔을 마셔야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요12: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서 금해 놓으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세상에 저주와 멸망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심으로 세상에는 죄 사함과 용서와 사랑과 영생이 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습관이 내 자신에게 달면 삼킵니다. 쓰면 뱉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잔을 스스로 받아 마실 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는 성도들이 많을 때 많은 영혼이 구원되고 좋은 사회가 이룩됩니다.


  ⑵고난의 잔을 마셔야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잔을 마셨기에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기에 구원받은 성도들로부터 영원한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의 피로 속죄 받은 천천만만의 셀 수 없는 성도들이 찬양과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마셨기에 이런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당에서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그 어떤 고난도 감수해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는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서 면류관 쓸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⑶고난의 잔을 마셔야 영광이 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 존경받은 위대한 인물들은 남들이 싫어하는 고난의 잔을 회피하지 않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고난의 잔이 돌아올 때에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주님 뜻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고난절을 맞이하여 우리 마음대로 살던 것, 우리 뜻대로 살던 것, 우리 편리한대로 살던 것 이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우리의 삶을 옮겨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복을 받는 비결이고 면류관을 얻는 비결이요 좋은 열매 맺게 하는 통로인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의 잔 뒤에는 많은 열매가 있고 고난의 잔 뒤에는 면류관이 있습니다. 승리가 있습니다. 고난의 잔 뒤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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