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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입은 자! (눅 1:26-38)

by 【고동엽】 2022. 4. 8.

은총을 입은 자! (눅 1:26-38)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는 해마다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는데 성탄절이 다가올 때마다 생각나는 여인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마리아라는 여인입니다. 우리는 성탄절만 되면 으레 마리아라는 여인을 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성탄절과 너무나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6부터 보게 되면 성탄절이 있기까지 마리아라는 여인의 삶에는 두 가지 면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아주 희망적이고 소망적인 밝은 면이고, 또 다른 면으로는 아주 고난스럽고 고통스러운 어두운 면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음의 세 가지를 명상해 보면서 주의 나심을 축하하며 성탄의 깊은 뜻을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명상하고 싶은 것은  이 땅에 성탄절이 생기면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사람은 과연 누구였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뭐니 뭐니 해도 마리아라는 여인일 것입니다. "마리아" 갈릴리 해변 구릉 지대인 나사렛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살던 무명의 시골 처녀 마리아, 학벌도 별로 없고, 가정 배경도 나타낼만한 것이 별로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시골 처녀 마리아.
  누가복음 1:26을 보니까 하루는 천사 가브리엘이 이 시골 처녀를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와서 하는 말이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를테면 수태를 통고한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영광입니다. 여인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잉태하는 능력입니다. 신비 중에서 가장 극적인 신비는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 속에서 사람이 만즐어져 나옵니다. 이보다 더 신비한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남자들이 뭐라고 떠들지만 하나님이 이런 재주를 남자들에게는 주시지 않고 여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만큼 여인들은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아이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였습니다. 세상의 임금님 아들만 잉태하였어도 영광이라고들 야단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였으니 그와 비교를 할 수가 있는 일입니까?
  그것도 생리적인 관계에 의한 잉태가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 여인들 가운데서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은 굉장한 은총을 입은 영광의 여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그 다음을 보면 영광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32절을 보면 이 아이가 태어나면 장차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천사가 말했습니다. 또 33절을 보면 이 아이가 태어나면 장차 왕 노릇할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가 영원 무궁하리라고도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이를 갖게 될 때 태몽이라는 것을 꾸어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좀 좋은 꿈만 꾸었어도 길몽이라 해서 좋아하고 용꿈을 꾸었다고 하면 좋아서 야단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런 꿈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도 천사가 직접 와서 장차 네가 낳을 아이는 큰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왕 노릇을 할 것이고, 그의 나라가 무궁하리라고까지 직접 말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자상한 꿈을 꿀 수가 없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는 하늘에서 천사들이 축하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하고 축가가 불러지는가 하면 조금 있으니까 동방에서 박사들이 선물을 가지고 찾아와 경배를 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하늘에서 별이 인도해줘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렇게 진기한 현상이 일어났던 예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엄마가 다름 아닌 마리아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은총을 입은 여인 마리아,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여인입니까? 그래서 이 땅에 성탄절이 있음으로 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을 입은 여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것만을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왜 그 많은 여성들 가운데서 하필 마리아라는 여인을 선택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를 알아야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고 은총을 입는 방법을 터득할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시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명문 가문이 많이 있었습니다. 학식과 재색을 겸비한 규수들이 종교적인 율법 생활에 훈련되고 익숙해진 가문의 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다 제쳐놓으시고 하필이면 시골 동네, 그것도 알려지지도 않은 지중해의 동쪽 연안에 위치한 조그만 시골 동네에서 살고 있는 무명의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렇게 일을 해 오셨습니다.
  어느 주석 자는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데 따른 기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택하실 때 그의 신분이나 가문이나 생활이나 미를 보시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생각을 중시하시고, 그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느냐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무리 낙후되고 그늘진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곳에서 어떤 정신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느냐하는 점을 항상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일을 유명하고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해낸 적이 없습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직업을 보면 한결같이 농부 아니면 목동 그리고 비천한 직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 중 출신이나 직업이 변변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동서양의 지성 자를 흩어 보아도 그 사회의 맥을 이어가는 정신적인 지주는 언제나 이름 없는 일반 대중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까? 재력가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맑은 마음을 가지고 소신 있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에게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고 얽매일 것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떳떳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1941년 12월 8일은 일본이 진주만에 폭격을 개시하면서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한 날입니다. 이 무렵 일본 도쿄에 있는 히비아 공원 광장에 수많은 시민들을 모아 놓고 어느 한 사람이 이렇게 연설을 했습니다.
  "미국의 땅이 넓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섭지 않습니다. 미국의 인구가 우리보다 많지만 그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미국에는 군함도 많고, 무기도 많고, 돈도 많이 있지만 그것도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야마도 다마시 정신이 이기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에는 꼭 한 가지 우리가 당해낼 수가 없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800만 명이나 되는 청교도들의 때묻지 않은 신앙 정신입니다."
  이것이 무자비하기로 소문 난 일본의 군국주의자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하면 과연 소신껏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청결한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에서 무서운 존재들인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은 인신 매매가 성행하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흉악한 인신 매매 범이라고 할지라도 길가는 수녀를 납치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두려워서도 그것만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을 잡아다가 팔아먹고 사는 막된 인간이라 할지라도 순결하고 너무나 깨끗한 사람에게는 손을 못 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깨끗한 사람이고 순결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의 군국주의자가 증명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이 같은 정신을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당시 그 유수한 명문 가문의 규수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게 된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깨끗한 정신과 신앙을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고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이고 첩경입니다.

 

둘째로 명상할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입니다.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은 한편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된 은총을 입은 여인이었지만 또 다른 면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므로 말미암아 지독한 곤욕과 멸시와 고뇌도 있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마리아라는 여인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영광을 안았지만 그 반면에 그는 견디기 어려운 수모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수모가 약혼자로부터의 오해입니다. 약혼을 하고 결혼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처녀가 글쎄 아이를 잉태했습니다. 이것을 무슨 말로 설명할 것입니까?
  "처녀가 아이를 뱄다." 여기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이것이 무슨 말로 이해가 될 일이며 이것이 어떻게 해명이 될 일입니까? 간밤에 천사가 와서 성령으로 아이가 잉태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할 것입니까? 그 당시는 성령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안 될 때입니다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그래서 결국 마태복음 1:19을 보면 요셉이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아픔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가까운 친구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 남편으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 이웃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 이런 것들은 참기 어려운 오해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오해를 받는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마리아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말로써는 이해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약혼자로부터의 수모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수모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입니다. 그 마을은 시골의 동네입니다. 시골 동네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아가는 도시와는 환경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바로 옆집과 왕래가 적고 대화의 기회가 적어서 서로가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밀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골은 하루 아침이면 우물가에서 전해지는 소식이 UPI통신을 타고 온 동네에 신속하게 퍼져 나갑니다.

  여인들이 우물가에서 찧어대는 입방아에 한번 걸려들게 되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수줍어해서 얌전한 줄 알았더니 글쎄 마리아가 애를 뱄대." 이보다 더 좋은 이야깃거리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고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변명을 할 수도 없고, 밤중에 천사가 와서 하나님의 아이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겪어야 했던 수모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 같은 수모 뒤에는 더 엄청난 아픔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2:35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그의 가슴을 찌르는 고뇌입니다. 성경은 장차 이 아이가 태어난다 해도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로서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광에 앞서서, 누가복음 2:35에서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곤혹 주의 곤혹이 될 것입니다.
  즐거운 성탄절이 있기까지에는 배후에 이 같은 아픔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세상 사람들이 성탄절만 되면 먹고, 마시고, 밤을 새우고, 호텔로, 여관방으로 돌아다니며 너나없이 흥청대고 떠들고 하는데 왜 저들이 밤을 새우고 호텔로, 여관방으로 돌아다니며 야단들을 피우고 그럽니까? 심지어 술집 문간 앞에서 "축 성탄"하고 써 붙여 놓는데 이거 왜 이럽니까? 그들과 성탄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한 여인은 이렇게 수모와 아픔을 겪고 있었던 것을 세상의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만민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셨지만 그 소망이 우리에게 안겨지기까지 숨어서 애태우고 가슴 조여 가며 온갖 수모와 곤혹을 치루었던 이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어느 누군가가 이렇게 아픔을 겪고 그 아픔과 살을 찢는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업이 잉태되고 실현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업이 완성되게 된 것도 그곳에 진통과 몸부림과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다구라라는 신학자는 이것을 일컬어서 "아픔의 신학"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의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까지는 이렇게 아픔이 수반되고 누군가가 이 같은 아픔을 감수해 주어야만 많은 사람들이 웃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 성탄절의 기쁨이 주어지기까지는 이 같은 마리아의 아픔이 있었고, 십자가의 구속의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지기까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아픔이 있었듯이, 이 세상에 평화와 안전과 복음화가 있기까지에는 여러분들의 노력과 헌신과 땀이 있어야 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에서 이렇게 영광된 면도 있지만 반면에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데는 이 같은 곤혹도 있고 수고도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찔림까지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또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결심입니다.

 

  이 같은 천사의 제의를 받고 고뇌에 찬 마리아는 어떻게 결심을 했습니까? 마리아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통고를 받고 나서 깊이 생각하고 계산을 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다는 것은 분명 굉장히 큰 영광된 일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고, 거기다 하나님의 은총까지 입은 축복입니다. 이것은 두고 두고 영광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그런 영광 뒤에는 엄청난 아픔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타산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길을 가다가 그만 도중에서 떨어져 나가고, 도중에서 탈락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38을 보면 마리아가 이렇게 결심을 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말은 "아무리 큰 수모와 아픔이 주어진다 해도 감수하겠습니다."하는 결심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결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계집종에게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계집종은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가리지 않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집종의 사명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얼마나 분명하고 확고한 결단입니까? 이것이 마리아의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쁜 성탄절이 있게 된 배경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보내면서 세 가지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아무리 조그만 집에서 살고 변변치 못하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정결하게 살고, 경건하게 살아가노라면 마리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게 될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가 주님을 따르다 보면 매번 좋은 일만 있고 웃을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고난도 있고, 손해를 볼 때도 있고, 수모를 당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형통만 있고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일에는 예만 있고 아니오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렵지만, 나는 무능하고 변변치 못하지만, 주안에서 내가 하려고만 하면,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지혜도 주시고, 힘도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때 부족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 땅에 펼치시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도 이 같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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