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 (눅 22:39-46)
예수님의 고난이 오늘 오후부터 시작해서 금요일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간을 고난 주간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일년 중에서 이번 주간이 가장 경건하고 엄숙하며 장엄하고 뜻이 있는 주간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픈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고난 주간 첫 날인 오늘은 종려 주일 혹은 고난 주일이라고 합니다. 2천년 전 오늘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십니다. 그 때 군중들은 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왕으로, 메시아로, 열렬히 환영하며 환호했습니다.
후대에 와서 사람들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종려 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교회들이 이 날이 되면 종려 나뭇가지를 들고 시가 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 날인 월요일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신 날입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불결하고 속된 시장 바닥과 같은 문란해진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분노하시며 장사꾼들을 모두 내보내시고 성전을 척결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길을 가시다가 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으로 나타내십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해 버린 예루살렘의 도성, 그리고 그보다 더 타락한 제사장들의 모습을 보시고는 그들에게 쏟을 저주의 진노를 나무에게 대신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셋째 날인 모래 화요일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날입니다. 앞으로 40년만 있으면 망해 버리고 말 이 도성의 앞날을 주님은 일찍부터 알고 계십니다. 그 날, 이 도성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일 그 때를 보시면서 그것도 모르고 오늘 흥청망청 살아가고 있는 저 우매한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결국 이 도성은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끈 군대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 110만 명이 불에 숨지고 도성은 산산이 조각나는 수난을 겪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행렬을 따르면서 눈물짓던 여인들을 향해서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타이르셨던 것입니다.
넷째 날인 수요일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모처럼 제자들과 함께 하루를 휴식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그 날도 가룟 유다는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팔기 위해 흥정을 하고 다녔습니다.
다섯째 날인 목요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날을 세족 목요일이라고 부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마음껏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가십니다. 이것이 다섯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섯째 날인 금요일은 고난 주간의 절정입니다. 이 날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날입니다. 이 날 예수님은 체포되어 가야바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마침내는 군중들에게 맡겨져서 가시관을 쓰시고, 붉은 죄수복을 입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날이 A.D. 29년, 니산월, 15일, 금요일, 오전 9시에 못 박혀서 여섯 시간 동안 고생을 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을 하심으로 예수님은 그 한 많은 인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성금요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토요일은 안식일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 날은 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저녁에 매장되어 토요일을 무덤에서 지내시고 제 3일 안식 후 첫 날인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모든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하시고, 모든 부조리를 일소하시고, 보란듯이 살아나셔서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새벽이 부활의 아침입니다. 그 후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주님의 날로 선포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래서 오늘 주일이 주님의 날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독교를 말할 때 십자가를 빼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는 그렇게 아름답거나 유쾌한 것도 아니고 뜻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통나무 두 개를 서로 엮어 3m 높이로 세워 놓고 그 곳에 흉악한 죄수들을 잡아다가 매달아 놓고는 진을 빼서 죽이는 곳, 그 곳이 십자가입니다.
이를테면 사형 틀입니다. 바로 이 같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창조자가 피조물들에게 처참하게 죽으신 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10년 후에 화폐에다 이 십자가 모형을 새겨 넣었습니다. 30년 후에 가서는 죽은 사람의 관 위에다 고난의 표시로 이 십자가 모형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4세기 후에는 교회들마다 십자가를 만들어서 종탑 위에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교회들마다 십자가를 높이 지붕 위에 달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그 뒤부터 사람들은 고난을 표시할 때 으레 십자가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몸에 지닌 질병을 가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는 십자가가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근심거리가 생겼을 때도 사람들은 십자가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집집마다 가보면 십자가 없는 집이 없습니다. 겉에서 보면 행복하게 보이는 집에도 좀 깊이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십자가는 네가 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면 다 십자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는 남이 대신 져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에게 전가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나밖에 질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내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 내게 주신 십자가는 너무나 커, 하나님은 왜 나에게만 이렇게 큰 십자가를 주셨는지 몰라." 하고 푸념하며 불만스럽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는데 그 곳에 십자가가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으로 바꾸어지고 가거라." 이 사람은 너무나 반가워서 지고 있던 십자가를 집어 던지고는 가장 작은 것으로 골라졌습니다. 빛이 나고 보석으로 장식한 가볍게 생긴 것으로 골라서 져 보니까 묵직했습니다.
그래서 속을 들여다보니까 그 곳에는 아픔과 고뇌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른 것으로 골랐습니다.
이번에는 장미꽃으로 장식해 놓은 십자가를 골랐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자마자 찔러대기 시작하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곳에는 각종 한숨과 질고가 가득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다시 고른 것이 지금까지 자기가 지고 있다고 무겁다고 집어 던진 그 옛날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니, 그 것은 네가 무겁다고 던져 버린 그 십자가가 아니냐."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이 가장 가벼운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사람이 그 십자가를 지니까 그렇게 가벼웠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남들은 모두 십자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있어도 모두 가볍게 보입니다. 내게만 제일 무거운 십자가가 주어진 것처럼 생각되어 불평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죽하면 그 고난들을 십자가라고 했겠습니까?
오늘 본문 속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지금 겟세마네 동산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오늘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제자의 배신으로 체포됩니다. 지금 산 아래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금요일,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누가 대신 져 줄 수가 없습니다. 져 줄 일도 아닙니다. 어떻게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절박한 시간, 너무 괴로워서 몸부림을 치며 기도를 합니다. 혼자서는 너무나 고독해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얼마나 외로운 시간입니까?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정을 모릅니다. 그래서 잠만 잡니다.
이 같은 모습들이 예수님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자 하나는 배반을 하였고, 세 제자는 잠만 자고 있고, 호산나 하면서 열광하던 그 군중들은 내일이면 폭도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운명의 시간은 자꾸만 다가오고 있고,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한 밤, 그것이 겟세마네의 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심각하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그 때 예수님이 바위를 부여잡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 때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데 핏방울 같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세기의 교부였던 저스틴과 이레네우스는 문자 그대로 그것은 핏방울이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같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밤새 기도하고 하산할 때 산밑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체포당한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 가서 심문을 받으시고, 죄수의 몸이 되어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강도요, 살인자요, 방화범인 바라바는 석방되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이를 깨끗케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려 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아프고 어두웠던 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인 죽음은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죽음은 억울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다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예수의 죽음을 군중들만큼은 막아 주었어야 했습니다. 군중들 속의 단 몇 %만큼은 그 시대를 옳게 분별하고 직시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약자를 보호하는데 그 군중들을 이끌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것이 민중의 힘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어떠했습니까? 엊그제까지만 해도 호산나 하면서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열광하던 군중들이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입으로 이번에는 살인범 바라바를 석방하고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정치에 이골이 난 빌라도가 그 순간을 놓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그 죄 값을 너희가 받아라."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우매한 군중들이 화답하기를 "그 핏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머리에 돌리소서."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그 죄 값을 얼마나 혹독하게 치렀습니까?
예수 사후 받은 혹독한 죄 값 말고도 근대역사 속에서 그의 자손들이 나찌에게 당한 수난이 얼마입니까? 당시 인구 천만 명 가운데 600만 명의 백성들이 남녀 노소 가릴 것 없이 무작위로 전쟁도 아닌 때에 학살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군중들이 왜 이렇게까지 우매했습니까?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해서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백성들을 "권고"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고"라는 말은 제사장들이 가만히 있는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그래서 정치인들의 선동에 군중들이 놀아나면 안 됩니다. 이 땅에 더 이사의 선동 정치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정치학자는 "군중은 우매한 무리들이다. 군중을 잘 이용만 하면 천부의 독재자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끝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얼마나, 처절하고, 외롭고, 고독한 자리입니까? 그래서 견디다 못해서 절규합니다. "엘리 엘리 마라 사박다니." 이 소리가 그냥 나올 수 있는 소리입니까? 피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인류의 모든 고통과 질고와 죄와 형벌과 죽음의 전부를 한 몸에 걸머지고 가장 어둡고 부정적인 자리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하나님을 불러 가며 고뇌 속에서 절규하는 이 예수의 처절한 모습, 이 모습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누구를 위한 고난이고, 누구를 위해서 흘리는 피요, 아픔입니까? 이렇게 절규하건만 정작 인자하기만 하시던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일언반구 말씀이 없습니다. 위로의 말씀 한 마디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정은 어떨 것이며, 또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말씀 한 마디가 없으십니다. 어디에선가 마음 아파해 하며 고뇌하고 계실 것이 분명한데 그 하나님은 끝내 절규하는 독생자를 외면하십니다. 왜입니까?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뜻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다 구라라는 신학자는 십자가 속에 들어 있는 이 같은 하나님의 고뇌하시는 아픔을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걸입니다.
고난 주일을 맞아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모습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며 부르짖는 고뇌에 찬 저 절규의 소리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독생자의 저 절규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내 세상 구원을 위해서 아들을 포기하신 하나님의 저 저미는 아픈 마음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의 그 고난에 만분지일이라도 동참하게 되고 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 내 앞에 닥칠 십자가도 기쁘게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고난 주일의 아침에 부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신 우리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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