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세상에 오셨을 때
요1:9~18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설교:
인간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상처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절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母胎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母胎요, 平安함인데 그러나 모태는 사정없이 나를 밀어냅니다. 그리고 탯줄을 사정없이 잘라버립니다. 그때부터 사람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거절에 대한 상처, 환영받지 못한 것으로 인한 상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장하면서는 生存競爭이라는 사회 속에 들어오면서 거절을 훈련 받으며 자랍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애인이나 친구들로부터 거절을 당합니다. 이 拒絶감의 상처는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은 늘 거절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도 남을 거절하는 것이 本能이 되어버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이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에는 흥겨워합니다.
성탄절이 들어 있는 이 주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그는 어떤 모습으로 왔으며, 어떤 수모를 당하셨으며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실 때
1. 그는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이 경찰만 보면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찰은 사람의 얼굴과 눈빛을 보면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 오래 있던 사람은 태양 앞에서 눈을 뜰 수 없습니다. 빛이 찌르므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양심을 찌르므로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예수를 거부합니다.
자기의 더럽고 천하고 무질서하고 비참한 모습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늘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조직이든 정직한 사람이 들어오면 나쁜 짓하는 사람들이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같이 탈세하고 훔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그 사람으로 인해 자기들이 노출되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 직장에 들어오면 그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바보로 만들어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 말은 이제 달라져야 한단 말입니다. 빨리 자기를 들어내고 빛으로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치유를 받습니다. 그것이 일시적으로 좀 고통스럽고 창피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유가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빛을 저주하고 눈을 감고 등을 돌립니다.
자기의 불의를 감추기 위해 빛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이라면 두겹 세겹으로 장치를 합니다.
참 빛은 자기를 찌르기 때문에 싫습니다. 그래서 거짓 빛으로 위장합니다. 사람들이 거짓 빛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기 눈을 찌르지 않고 양심을 찌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편한 길로 가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야단치고 정체를 밝히고 실수를 드러내는 사람은 꺼려합니다. 이것은 마치 술과 마약처럼 내 죄를 합리화시키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참빛이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우리는 여기서 참빛의 특성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1)세상에 오신 빛입니다.
침빛은 세상에 와서 감추인 모든 것을 들쳐 냅니다.
2)참 빛은 힘을 갖고 있습니다.
참빛은 힘, 에너지를 갖고 있어 태우고 정결케 합니다. 심령을 정결케 합니다. 또한 참 빛은 따뜻합니다. 빛은 얼어붙은 것을 녹이고 위로하고 보호하며 따뜻하게 만들어 줍니다.
3)참 빛은 바른길을 안내해 줍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 경고를 해주기도 합니다. 잘못된 길을 비춰서 가지 못하도록 하고 방황할 때, 길을 잃었을 때 빛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가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빛, 등대입니다. 그러나 어둠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이 빛을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4)마지막으로 그 빛이 “각 사람에게 비췬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빛은 일반적으로 태양빛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비춰지는 빛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춰지는 빛입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나 한사람을 향해 비춰지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일반적인 빛이라면 누구 뒤에 숨으면 그 빛을 받을 수 없지만 예수님의 빛은 내가 숨든 숨지 않든 간에 나 한 사람을 완전히 비추는 빛입니다. 구원은 온 인류에게 주는 일반적인 특성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 빛이 여러분에게도 비쳐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실 때
2. 아무도 그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극도로 혼돈된 삶입니다. 둘째로, 그 인생이 허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둠 속에서 방황합니다.
마치 창세기 1장을 보면 빛이 만들어지기 전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잡은 것은 빛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이신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순간 모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천지 창조의 새벽이 열립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은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어두움이 가득 찬 세상에 오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요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 빛 되신 예수님을 환영하기는커녕 거절했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0절의 주제는 우리가 그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분이 엉터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양심이 마비되고 인격이 파괴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않은 까닭은 죄 때문입니다. 죄가 진리와 빛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환영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거절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외롭고 고독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탄생을 거절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어날 때에 외양간에서 탄생했고 애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가장 저주스런 십자가형으로 그 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환영하고 영접해야 할 그분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경배해야 할 그분을 인간들은 죄의 속성 그대로 거절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몰라보는 자식과 같습니다. 부모를 거역하고 집을 나간 탕자와 같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집주인이 왔지만 세든 사람이 집 주인을 몰아낸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주님이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내쫓고 오히려 죽였습니다.
인간은 상처 받을 때는 아이큐가 높아져서 상처를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상처를 받을 때는 토시까지 모두 기억합니다.
그러나 상처줄 때는 아이큐가 낮아져서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 상처준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발뺌합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받았다는 얘기는 상처 받은 만큼 상처를 줬다는 얘기입니다.
거절을 당했다는 얘기는 거절했다는 말입니다. 배신을 당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배신을 했다는 사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인간이 가진 많은 문제를 요약해 들어가며 뿌리를 찾아보면 결국 배신과 거절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부부 관계의 문제도 여기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거절하고 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순종하는 것은 쇼하는 것이지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좋아서가 아니라 돈 때문에, 아이 때문에 산다는 것입니다. 언제 나를 사랑해 봤냐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하는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들이 언제 나를 사랑했냐는 것입니다. 이 상처 때문에 자식들이 평생을 방황합니다. 거절감과 배신감, 이것이 우리 구원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실 때
3. 놀라운 복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거절하는 인생에서 환영하는 인생으로,
거부하는 인생에서 받아들이는 인생으로,
부정적인 삶에서 긍정적인 삶으로 내 인생을 바꾸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 축복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복을 주님은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내 인생의 소속, 위치, 신분, 환경이 완전히 달라짐을 의미합니다. 상속의 조건이 달라집니다.
북한에 살던 사람이 탈북하면 상황, 환경, 소속이 달라집니다. 환경이 달라지면 문화와 법과 질서가 달라지고 소속이 달라지면 그 인생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과 함께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천국에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이 있을 것입니다.
땅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 순간적인 복이 아닌 영원한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거절에서 환영으로, 부정적이던 데서 긍정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배척하던 데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로 바꾸면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분기점입니다. /거절이냐 환영이냐,/ 신앙이냐 불신앙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저주냐 축복이냐를 결정짓는 분기점은 예수님을 환영하느냐 거절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유전, 가문, 종족, 혈통, 국가라는 것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사랑이요 선택이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인 그분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한 가지 뿐입니다. 그분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축복이 이 시간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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