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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성탄절 설교

성탄절! (3)

by 【고동엽】 2022. 4. 4.

성탄절! (3)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마 1:18-25)

 

  벌써 12월 한 겨울! 오늘이 대강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25일은 성탄절입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한해가 가고 새해가 옵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자연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사계절이 아주 뚜렷한 나라입니다. 이것도 알고 보면 큰 축복입니다. 자연이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을 때 사람들도 함께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러면서 자연과 함께 변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계절의 변화 없이 늘 따뜻한 기후를 가진 나라들은 생동감이 없습니다. 겨울을 위한 준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계절의 변화가 우리의 삶에도 상당한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4계절은 자연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알고 보면 인생에도 4계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자연의 4계절을 깊이 생각해 보면 인생의 사계절과 아주 절묘하게 비교됩니다.
  ▶봄은 마치 어린 아이 때와 같습니다. 봄에 새싹이 돋아납니다. 그리고 모든 식물이 싱그럽고 연하고 모든 것이 소생하며 자라납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 때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십시오. 꼭 새싹이 그렇듯이 여리고 부드럽고 순전하고 맑고 깨끗합니다. 이 시기는 꾸밈이 없고, 가식이 없고, 숨김이 없습니다. 그래서 봄철은 마치 어린 아이들과 같은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름은 청년의 때와 같습니다. 여름은 뜨겁고 정열의 계절입니다. 여름은 탁 트인 바다와 시원한 산이 기다려지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여름을 청년의 때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청년의 때는 뜨겁습니다. 정열적입니다. 가슴에 불이 끓습니다. 손에 땀이 가득합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꿈이 가득합니다.
  이때는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때입니다. 이성과 사랑 때문에 열병을 앓는 때입니다. 젊은이가 사랑에 한번 깊이 빠지게 되면 헤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십시오. 그 모습이 젊은이들의 모습입니다. 젊은이들이 데모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한번 몰두하게 되면 일방통행입니다. 설득이 안 됩니다. 그리고 결혼할 때 보면 오직 핑크빛 꿈만 있습니다. 몇 시간 후 신혼여행을 가서부터 싸울 것인데 그런 걱정 따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름은 청년의 때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을은 중년기와 같습니다. 가을은 노숙합니다. 모든 만물이 여물고 결실하고 내실이 가득 채워지는 계절입니다. 인생으로 말하자면 가을은 마치 중년기와 같은 때입니다. 중년기의 인생을 보십시오. 아주 노숙합니다. 원만합니다. 안정되고 고상합니다. 중후함이 있습니다. 또 여러분 가을 산을 보십시오. 마치 중후한 중년의 인생과 같이 고상하지 않습니까? 자연을 보면 모두 풍성하게 결실합니다. 열매가 맺힙니다. 고상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중년기의 인생과 같습니다.
  그리고 ▶겨울은 노년과 같습니다. 겨울이 되면 세상 전체가 스산해집니다. 썰렁합니다. 찬바람이 일어납니다. 겨울잠에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노년기가 되면 미래보다는 지난날을 말하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추억도 깊어지고, 아쉬움도 묻어나고 그동안 아옹다옹하면서 세상을 살았던 모습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도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한해가 저물어 가는 문턱에서 인생을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노년기에 계신 분들은 신앙생활이나 잘 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천국에서 받을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아버지가 신앙이 좀 약했습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졸았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참 민망했습니다. 그래서 한 아이에게 옆에 앉았다가 아버지가 졸 때 깨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천 원씩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주일마다 아버지 곁에 앉아서 열심히 깨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조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가 다시 졸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옆에 앉아있는데도 졸고 있는 아버지를 깨우지 않고 그냥 앉아있습니다.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예배 후에 아이를 불러서 왜 깨우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할아버지가 깨우지 않으면 2천 원씩 준다고 해서 깨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아이들은 이렇게 영악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계산이 확실합니다.
  오늘 저는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에는 네 권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성탄의 기사를 다루고 있는 복음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탄의 이야기가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성탄의 이야기는 이미 구약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성탄을 예언하는 말씀이 적어도 350번이나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 한 절을 봅니다. 창3: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에, 하나님이 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씀은 원어에 '여자의 씨'라는 뜻입니다. 본시 여자에게는 씨가 없습니다. 남자에게만 씨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장차 남자의 씨를 받지 않고서도 후손을 가지게 될 한 여자가 나오는데 그에게서 태어날 아이는 뱀(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갈4:4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바울은 창3:15절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밝혔습니다. 예수님은 남자으의 씨로 잉태되지 않고,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에게서 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탄은 구약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의 첫머리에서부터 언급되기 시작했고 그 뒤로도 구약 성경은 적어도 350번에 걸쳐서 성탄을 언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성탄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되었고, 신약 성경에서는 그대로 성취가 된 사건입니다. /할/

 

1.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하여 알아보자!(1-17)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 여기 세계란 말은 족보(族譜) 또는 계보(系譜)를 뜻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성씨, 족보를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 우리민족입니다. 여자들이 시집을 가도 자기 성씨를 가지고 사는 민족이 우리민족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큼이나 족보를 귀하게 여기는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신약성경도 족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족보 연구가로 알려진 '헬버그'는 '계보'로 알려진 1절에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야기는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즉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했던 모든 약속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약속했던 그 영원한 왕국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가 본 예수는 그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이 되어 집니다.
  모든 복음서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메시야'는 똑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메시야는 히브리어'일 뿐입니다.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직분을 모두 가지고 기름 부으심을 받으셨습니다.
  네 권의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이 만백성들의 구세주로 오신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 복음서가 나름대로 강조하는 점이 따로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메시야적 왕'으로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메시야적 종'으로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열 왕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창17:6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 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오늘 본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다윗에게만 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6절 상반부에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말하자면 예수님은 열 왕의 아비인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인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님의 왕적 족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자신이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셨습니다. 요18:37절 "빌라도가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마태복음은 그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의 왕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종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종에게 무슨 족보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눅3장에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1장의 족보는 하향식 족보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밑으로 내려오면서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눅3장의 족보는 상향식 족보입니다.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첫 사람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또 마1장의 족보가 예수님의 법적 부친인 요셉 집안의 족보인 반면, 눅3장의 족보는 예수님의 혈통적 모친인 마리아 집안의 족보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인적 족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1:1절에 처음부터 아예 예수님의 신적 족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족보 한 가지를 통해서도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종 되심을,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인성을,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1장은 족보를 통해 예수님의 왕 되심을 설명하고 있고, 2장은 동방박사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셨음을 증거하고 있고, 3장에는 선구자 세례 요한이 '왕 되신 예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선포'하고 있고 4장에서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천하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겠다'고 한 것은 심지어 마귀조차도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릴 권세가 있으신 왕이심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할/

2. 3-6절에 불명예스러운 네 명의 여자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과 우리야의 아내 곧 밧세바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족보에는 여성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처럼 네 명의 여성 이름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 네 명은 하나같이 불미스러운 과거를 지닌 여성들입니다. 이들이 메시야의 족보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멘!/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누구인가?
  ①'다말'입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창38장에 자세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가나안 여자로 이방 여인입니다. 그는 자기 남편이 죽자 창녀의 행세를 하면서 자기의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했습니다. 그리고는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다말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여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②'라합'입니다. 라합은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그는 여리고 성의 기생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여호수아가 보낸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여리고 성이 멸망당할 때, 그와 그의 가족들은 살리셨고 후에 살몬과 결혼해서 룻기에 나오는 경건한 다윗 왕의 증조할아버지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기생이었던 라합이 메시야의 조상이 되어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게 된 것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아멘!/ 
  ③'룻'입니다. 그는 이방 여인으로 모압 사람입니다. 모압의 조상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창19장에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뒤에 살아 나온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술에 취해 있을 때 그의 큰딸이 들어가서 동침해서 낳은 아들입니다.
  ④'밧세바'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고, 단순히 우리야의 아내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불러서 동침을 했습니다. 그 결과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배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야는 최전선으로 보냄을 받아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후에 다윗은 밧세바를 자기의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솔로몬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밧세바가 다윗의 아내가 되어 솔로몬을 낳고, 나아가서 그가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족보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남자와 여자의 장벽이 무너집니다. 성도와 죄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어 집니다. 수치가 영광으로 바뀌어 집니다. 이런 영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할/
  오늘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놀라운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어떤 종류의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예수 안에 들어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당신의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됩니다. 그러니까 메시아 구원족보에 내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3. 오늘 본문 16절에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마지막 한 여인이 더 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바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는 사실 때문에 마리아를 특별히 순결한 여인으로 우상화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가 이런 오류에 빠졌습니다. 마리아를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겠느냐'는 불경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에 보면 마리아를 우상화하는 몇 가지 사상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리아 무죄설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려면 마리아가 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둘째는 마리아 승천설입니다. 마리아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승천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마리아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입니다. 모두 비 성경 적이고 근거 없는 교리들입니다.
  마리아는 우리의 사랑을 받고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도 죄인입니다. 오히려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절대로 우상화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눅1:28절에 보면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축복하며 '은혜를 받은 자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도 '은혜를 받은 자이며 은혜를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경배해야 할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마리아도 하나님께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께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멘!/

 

4. 17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이는 이스라엘 역사를 편리하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본 것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역사가 대단한 역사였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첫째 시기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족장들과 그들의 뒤를 이은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이스라엘을 만들어나가던 시기였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부터 족장들의 삶은 끊임없는 방황의 삶이었습니다. 모세의 때는 노예로 살아야 했던 서러운 삶이었습니다.
  둘째 시기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입니다. 다윗부터 시작된 왕정시대는 한없는 불순종과 실패, 분열과 죄악으로 얼룩진 역사였습니다.
  셋째 시기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입니다. 암흑기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 다시 이스라엘은 포로로 살아야 했던 좌절과 오욕으로 이어진 역사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수님은 바로 이런 역사의 땅에 오셨습니다. 흔히 유대인이 위대하기 때문에 메시아가 그 곳에 오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도 못난 민족, 못난 역사인지라 그곳에 오신 것입니다.
  잘난 민족, 영광스런 역사 속에 오시길 원했다면 당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에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받은 민족, 고난과 죄악으로 얼룩진 어두운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왜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곧 나의 모습이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나처럼 못나고 구원받을 아무런 조건이 없는 자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다는 위대한 메시지가 이스라엘이라는 역사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방황과 고난의 삶, 범죄와 어둠의 인생걸음을 걸어오신 분들이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오늘 이 성탄의 계절에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은 바로 나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나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는 예수 안에서 이제 '구원역사, 축복의 역사, 영광의 역사, 생명의 역사'로 바뀌어 졌습니다. /할/
  그런데 여러분, 오늘 족보 속에서 제일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뭔지 아십니까? '낳고, 낳고, 낳고'입니다. 그것이 뭐가 대단하냐고요? 구약의 족보는 모두 누구는 몇 살에 죽었고 누구는 몇 살에 죽었다는 '죽고, 죽고, 죽고'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예수 안에서 우리의 역사는 새로운 역사, 생명의 역사를 낳고 또 낳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 것입니다. /믿/ 신약성경은 족보라는 서곡과 함께 크리스마스의 무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또 무엇입니까?

 

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18-25)

 

  본문 18절에 기록된 나심이라는 단어와 1절에 기록된 세계라는 단어는 사실 똑같은 단어입니다. 모두 족보라는 뜻입니다. 1-17절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밝히고 있고, 18-25절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경이롭고도 특이한 출생에 관한 기록들이 나타납니다. 창18장에 기록된 이삭의 출생이 그러합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그의 어머니 사라는 둘 다 노쇠했습니다. 특히 그의 어머니 사라는 경수도 끊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삭이라는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삿13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의 출생도 그러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곧 마노아의 아내는 잉태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아들 삼손을 낳게 하셨습니다.
  삼상1장에 나오는 사무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어머니 한나는 본시 잉태하지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한나는 하나님에게 나아가 통곡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닫힌 태를 여시고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또 눅1장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출생도 그러했습니다. 그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나이 들기까지 아이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라는 아이를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이들의 출생이 경이롭고 특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밝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들의 출생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고 특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 모두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을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아멘!/0

 

  ①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18절)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옛날 유대인들은 결혼식을 올리기 대략 일 년 전에 먼저 정혼을 합니다. 일단 정혼을 하면 법적으로는 부부가 됩니다. 그래서 19절에 요셉을 남편이라고 부르고 있고, 20절에는 마리아를 아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정혼 기간 내에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과부가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파혼을 원하면 정식 이혼증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정혼을 할 때, 신랑측에서는 신부측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되어 있고, 뒤에 신부집에서는 그것으로 결혼잔치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결혼잔치를 일주일 동안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일어났던 준비한 포도주가 동이 나는 일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정혼을 하고 나서 일 년 뒤에 결혼식을 올리는 이유는 그 기간 동안에 부부의 순결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부부가 동침을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간에 거의 접촉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만일 여자가 이 기간 동안에 아이를 낳거나 배었다면, 그 여자는 부정한 짓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 때는 파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동거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정혼 기간 중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기가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눅1:26-35절에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나사렛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고 하니 마리아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디 있느냐?'고 하자 천사가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느냐?'고 하자 천사가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도 전에, 아니 아직 잉태되시기도 전에, 천사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떠한 인물인가를 다섯 가지로 일러주셨습니다.
  ⑴'저가 큰 자가 되고'입니다. 예수님은 '큰 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삶이 온전하셨고, 가르치심도 온전하셨고, 행하심도 온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큰 자'로서 높고 위대하신 것처럼, 주님도 '큰 자'로서 높고 위대하십니다. /아멘!/
  ⑵'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입니다. 여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입니다. 그 뜻은 '최고로 높으신 존재'입니다. 사실 하나님보다 높고, 하나님보다 위대하고, 하나님보다 권세 있는 존재는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라고 불립니다.
  ⑶'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몸에서 날 자식, 곧 '다윗의 자손'을 왕으로 세워,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나라 위를 견고케 할 '다윗의 자손'을 계속해서 기다렸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의 칭호처럼 사용되었습니다.
  ⑷'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입니다. 여기 '야곱의 집'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야곱이 얍복강변에서 하나님과 밤이 새도록 씨름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야곱은 하나님에게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받았습니다.
  ⑸'그 나라가 무궁하리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무궁하지 못합니다. 바벨론도 무너졌고, 바사 제국도 무너졌습니다. 로마도 헬라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나라는 무궁합니다. 그 누구도 그 나라를 무너뜨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때,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그 때를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 언제나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눅1:38절에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 가니라" 마리아는 순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온전히 그 말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은 동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잉태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몹시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남편 요셉에게서 버림을 받을 수도 있었고, 부정한 여인이라고 사람들에게서는 오해를 받으며 심지어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송을 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신앙의 자세가 있기를 바랍니다.

  ②요셉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본문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는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요셉으로서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따라 살지 못한 부정한 여자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은 마리아를 그대로 데리고 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를 끊고자 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끊는다'는 말은 '결혼을 파기한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서 두 가지 방법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는 '공개적으로 끊어버리는 방법'입니다. 신22:23-24절에 나오는 계명으로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죽이는 처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만히 끊어버리는 방법'입니다(신24:1). 요셉은 마리아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일은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③천사가 요셉에게 알려준 비밀이 무엇인가? (20-21)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여기서 천사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기 위해서는 요셉이 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말입니다.
  요셉은 가만히 끊음으로서 파혼을 하려고 생각했는데 천사는 요셉에게 '무서워하지 말고 그의 아내 마리아를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리아가 '부정한 짓을 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눅1:35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할/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히브리식 이름인 '여호수아 또는 예수아'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바로 그 분이십니다. 우리는 행4:12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④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구약 성경의 예언이 성취입니다.(22-23).
  22절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는 사7:14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 시대적인 배경은 이러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 때 북 이스라엘의 왕 베가와 아람의 왕 르신이 연합해서 유다를 침공하려 들었습니다. 그 때 유다 왕 아하스는 다윗 왕조가 끊길 것을 우려해서,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유다를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나라에서 건져주실 것이니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아하스는 선지자 이사야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예언을 주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일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다가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나라를 막아내는 일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이길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⑤천사의 분부대로 순종하는 요셉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24-25).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첫째, 요셉은 자기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결혼식을 거행함으로서 정혼의 기간을 다 마치고, 결혼 절차를 완성한 것입니다.
  둘째, 요셉은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는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요셉은 마리아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했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자의 분부대로 모든 것을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6. 아기 예수 탄생하실 때 오신 곳이 곳 세 곳입니다. 영적인 의미를 알아보자!

 

  ①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오셨습니다(23). 동정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처녀란 순결의 상징입니다. 정절의 상징입니다.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순결한 처녀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람, 깨끗한 사람, 청순한 신앙인품의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과 함께 하시는 주님이심을 가리키는 교훈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모습에 대해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정결한 심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의 육신의 신분도 순결한 처녀였지만 그의 속 사람,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처녀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돌아보지 않았던 사람이 마리아입니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의 공통점이 이러한 믿음입니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던 아브라함, 생명을 걸고 골리앗과 싸웠던 다윗,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을 지켰던 다니엘과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등 모두가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②말구유에 오셨습니다(눅2: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님의 일생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영광이 가득한 하늘나라에서 추한 세상에 내려오시되 하려한 궁궐이나, 부자의 호화로운 저택을 택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요셉의 가정을 택하여 오셨고, 탄생은 말구유였습니다.
  이처럼 가장 비천한 곳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멸시받고 천대받는 가난한 사람, 죄인, 고아, 병든 사람의 벗이 되셨습니다.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하셨습니다.
  ③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마2:6).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시되 거룩한 땅 예루살렘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권력의 도시 로마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문화의 도시 아덴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유대 고을 가운데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즐겨 찾으시는 곳은 작은 곳입니다. 즉 스스로를 작게 여기는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2007년 12월 23일 대강절 예배)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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