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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51편)

by 【고동엽】 2022.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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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찾아온 벗 (눅11:1-13)

  이 간단한 비유는 기도하면 반드시 주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며, 이기적인 사람도 친구의 강청을 거절치 못하고 구한바를 주고 악한 인간도 사랑하는 자들의 구함을 준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의 간구를 안 들어 주시겠느냐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기전에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극히 양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신만을 보고 부끄러워 기도조차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기 “강청”이란 말은 파렴치란 뜻이다. 한밤중에 여간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면 떡을 빌리러 갈 수 없다. 그가 파렴치를 무릅쓰고 갈 수 있는 것은 그와의 관계 때문이다. 벗이란 관계, 충분히 파렴치한 행동도 이해하고 들어줄만한 관계이기 때문에 강청한 것이다.

  어떤 때는 우리 스스로 내가 구하는 것이 파렴치한 것이라 생각되어 간절히 구하지 못하는 때가 있으나 어차피 우리는 정당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 간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벗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게 된 것이지 우리 자신만 보면 하나님 앞에 파렴치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파렴치한 행동을 해도 좋다거나 계속 파렴치하게 하란 말은 아니다. 기도하는데 있어서 어떤 점에서는 파렴치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여 기도를 못하지 말고 파렴치할지라도 계속 기도해야 하겠다.

  주님이 가르치신 비유의 교훈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끈질기게 기도하란 말씀이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간절하게 드리는 것이다. 즉 기도의 대상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그분께 어떻게 구하여야하며 얼마나 간절히 구하여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잘못된 대상에게 간절히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창18장의 아브라함이나 마15:21 이하의 가나안 여인의 끈질김, 야곱의 얍복강변의 끈질긴 간구는 마침내 응답되었다.

 
 
 

        잔치비유 (눅14:15-24)

  이 비유는 15절에서 말한 사람에게 주는 특별한 교훈이다. 눅9:57의 경우 한 청년이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좆으리이다 할 때에 ...여우도 굴이 있고...라고 대답하셨는데 이 비유도 이 말에 대한 칭찬이나, 격려나, 동의를 해주는 대신 무섭도록 엄격한, 가장 강경한 말씀을 해 주셨다.

  분노와 심판, 비천한 운명으로 채워져 있는 이야기이다. 24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자에게나 아니면 어떤 강력범에게 혹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복음에 대한 신랄한 반대자에게 말씀이었다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해서 존경의 뜻으로 말했던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점이다.

  첫째,

  이들은 초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잔치가 시작될 때 하인을 시켜 안으로 모시려고 하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변명을 늘어 놓았다. 이들은 초청을 수락할 때 철저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결정하였던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막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답한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전반적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저항이나 부정이나 캐물어본 적이 없이 그냥 받아들인다.

  둘째,

  두번째 초청은 진정한 시험이 된다. 첫번 초청은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두번째 초청은 제한된 어떤 일을 하도록 강요한다. 가거나 가지 않거나 해야 한다.

  셋째,

  두번째 초청에 불응하고 변명한 것은 주인을 무시하고 모욕한 행위다. 그들은 다른 일이 없었다면 잔치에 참석했을 것이다. 다른 일이 있자 초청이 짐스러워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만을 우선시켰다. 우선의 원칙은 하나님께 적용해야 한다. 편의 위주의 원칙을 적용하면 가공스러운 잘못이 된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면서 그러기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복-신령, 육신-을 받기 원하면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죄를 지으면서, 자신들을 즐겁게 하면서, 이 세상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죄스럽게 되었노라고 말하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편의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오는 저지르지 말자.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천국의 일들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보임으로 입증해야 한다.

  * 이들의 변명은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어리석은 짓들이다. 밭이 갑자기 움직여 사라지기라도 하는가? 소들이 몇시간도 기다리지 못하는가? 평생동안 아내와 같이 살지 못할 것처럼 한 것은 무례 막급한 일이다.

  딛1:16. 입술로는 하나님을 선포하나 실 생활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호를 모독하는 일이다.

  하나님 보다 더 중요시 하는 것들을 보라. 돈, 성공, 인기, 욕망, 정욕. 주님을 믿노라 하고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다른 일을 그것에 우선시킨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므나 비유 (눅19:11-27)

  이 비유의 동기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림에 있어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함이며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떠나셔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긴 기간 즉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없는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실터인데 저희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위에 오르시고 능력과 권세로 로마의 세력을 꺾으시고 당장에 지상 천국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가르치시고 승천과 재림의 기간이 길게 될 것을 말씀하시며 그 기간이 의미없는 기간이 아니고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하여야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므나’ 희랍화폐단위 ?? 100데나리온이 1므나

  * 행1장을 보면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는 사도들의 질문에 너희들은 때와 기한에 관심을 두지 말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승천 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요구하심.

  *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가장 비극적이고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의무-즉 성도들의 의무는 무엇인가? 예배와 봉사와 거룩한 생활이다. 집회출석, 교회봉사, 생활의 거룩함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교회에서 맡은 직분에 충성, 책임감 있는 직분자들 되라.

  * 주님이 재림하실 때 충성여하에 따라 상급이 비례된다. 태만과 게으름은 있는 것도 빼앗긴다. 그리스도께서 왕됨을 원치 않는 자들은 무서운 진노로 죽인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 (눅16:1-13)

  비유해석에 주의할 점은 너무 세밀하게 분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자는 누구인가? 청지기는 누구인가? 소유를 허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직분을 빼앗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탕감하여 주는 것은 무엇인가?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것은 정당한가? 등등이다.

  (인간이 죄악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린 것을 비유하는 것이라고) 비트링가는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던 그때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잘못함으로 지도권을 잃어버린 것을 가리킨다고 함. 그러나 이렇게 해석할 경우 많은 문제가 뒤 따른다. 이 비유는 불의한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이 핵심이다.

  박윤선-불의한 재물은 재물을 맡은 자가 주인의 뜻대로 쓰지 않고 제뜻대로 씀.

  칼빈-재물자체가 불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물이란 사기, 폭력, 불법수단으로 얻는 경우가 많으며 재물을 많이 소유하면 자랑이나 사치, 타락된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재물이 우리에게 위험한 것이라는 것으로 여기게 하실 목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불의한 재물이라 하셨다.

  이 비유는 물질에 탐심을 가지지 말고 이웃과 친구를 위하여 선하게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이 비유가운데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청지기 직분을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우리 소유는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가지고 흩어 구제하고 , 이웃에게 선물을 주고 선하게 사용하라. 왜냐하면 재물이 없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재물이 없어질 때라는 의미보다 사람이 죽을 때로 해석.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쌓아올리려고 자신과 타인을 속이고 선히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오랜 인생을 계속할 것이라는 그릇된 희망으로 기만당하여 그리한다.

  그리스도인은 잠시 청지기로서 맡아있는 이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 영원한 재물 즉 영원한 처소 내세를 준비해야 한다. 마6:19-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좀, 동록, 도적이 해한다. 이런 것들이 해하지 못하는 하늘에 쌓아두라 없어지지 않는 재물은 남을 위하여 선하게 구제하는 것이다. 마25:31- 그렇게 함으로 천국을 얻는 것이란 의미는 아니다. 인간적 방법, 마치 친구들을 사귀는 부자가 불운에 처할 때 친구들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 처럼 우리의 친절한 행위는 때에 맞는 피난처가 될 것이다.

  돈뿐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것은 없어질 때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수 있도록 사용하여야 한다. 시간, 건강, 재능, 물질등을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고 준비하는데 목적을 두고 사용하는 것이 지혜롭다.

  이 비유는 불의하고 악하게라도 재물을 많이 모아 자선을 하거나 하나님께 드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에 대해서 지혜롭게 한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도 지혜를 배우라는 의미이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 (눅12:13-20)

  이 비유를 하시게 된 동기는 주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는 도중에 그 말씀을 가로막고 가족의 유산에 관한 논쟁의 중재자가 되어서 부당한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책망하시고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다고 가르치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이것을 모르고 비유에 나타난 부자와 같이 먹을 곡식만 많이 쌓아 놓으면 오랫동안 평안이 먹고 마시고 즐거웁게 살 줄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1.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비그리스도인들도 인명은 재천이라 했다) 마6:25~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기르신다. 사람은 더 귀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더 귀하다. 이 세상에서 죽음은 참으로 다양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일은 거의 없다. 굶어 죽는 것도 그 사람의 생명이 다돼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즉 기근, 흉년 등으로 죽게하는 것이다. 병으로 죽고 사고로 죽고 밥 잘먹고 갑자기 죽는 예도 허다하다. 없어서만 못먹는게 아니라 많이 쌓아두고도 못 먹고 죽는 예가 허다하다.

  결국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사는 것이지 소유가 많아서 사는 것은 아니다. 이 진리를 잘 깨달으면 탐심을 물리칠 수가 있다.

  2. 인생의 행복도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해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어도 행복하지 못한다.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 심령이 기쁨이 있고 평안해야지 다른 것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

  이 부자는 물질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 줄 알았으나 생명을 불러 가시니 그가 쌓아 놓은 것 누리지 못하고 말았다. 부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할 때는 부자만 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부자가 되면 가난할 때가 그래도 행복했다고들 깨닫는다. 부자가 건강을 잃을 수 있고 자녀들이 잘못되는 수도 많고 도덕적 타락도 많다. 인생을 바르게 살지 못하고 허영과 사치와 향락과 죄짓는 생활을 많이 할 수 있다.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

  ① 많은 재산관리 때문에 염려와 걱정을 가짐 17~19.

  ②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부에 의하여 잘 보전될 줄 알고 있는 점. 즉 자기 생 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점을 몰랐다는 것이 어리석은 점이다.

  ③ 재산을 믿고 안일한 생활의 확실성을 자신하는 망상. 19절.

  ④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점 ?? 자기 재물의 부요를 믿고 하나님께 의존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량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망각하고 애를 쓰면서 많은 재물을 모으고 그 재물만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땅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주님의 돌보심만 의지하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눅10:25-37)

  성경에 기록된 많은 비유들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지고 또 가장 많이 이용되는 비유가 탕자 비유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이다.

  이 비유를 하게 된 동기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예수님께서는 율법 이상의 것을 가르치거나 아니면 율법을 무시하고 어떤 구원을 가르치는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대강령임을 알고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들은 이웃이란 자기들에게 필요한 사람 즉 혈연, 지연, 친구, 동족으로 제한하여 다른 사람은 이웃으로 치지 않고 이방 사람은 원수로 대함. 그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내 이웃이 누구인가? 이웃의 범위 혹은 이웃은 어디까지 한계를 그어야하느냐 질문.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이 비유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으려면 율법을 완전히 행해야 한다거나 사람이 그 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잘못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편에 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율법을 뒤밀치고 내버리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도구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내 행위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영생이 있는 자가 한다. 적극적으로 율법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이를 행한다. (야고보가 가르치는 교훈)

  이웃은 범위고 모든 사람이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불타고 있었는가? 그런 사마리아 사람을 들어서 유대인의 이웃이 누구냐고 예수님은 묻는다. 제사장, 레위인 포함하여 그는 스스로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자라고.

  * 프란시스 베이콘 ?? 꿀벌, 개미, 거미. 있어야 할 사람, 있으나 없으나 무방한 사람, 없어야 할 사람. 이 비유를 가장 많이 풍유적으로 해석한다.

  상처받은 인간은 타락이후의 아담의 상태를 비유한다고. 인간성의 타락, 반죽음,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고 치유의 가능성 시사. 선을 행할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또 사마리아인을 그리스도로 본다. 포도주에 기름을 타 부어준 것은 우리를 회개와 은혜의 약속으로 주시기 때문이라고. 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장 회복시키시지 않고 주막집 즉 교회로 보내 점점 건강을 회복시키신다고. 예루살렘은 교회, 여리고는 세상, 강도는 마귀, 주막은 교회, 두 렙돈은 신구약 성경.

  칼빈은 헛소리를 꾸며대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잔소리꾼들의 조작이라는 점을 누구든지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

 
 
 

        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13:1-23)

  비유 παραβολη는 광의적으로는 속담, 수수께끼 같은 표현, 격언적인 교훈을 포함하여 말하나 협의로는 人生事나 自然現象 가운데서 뽑은 이야기로서 계시의 진리를 가르치려는 것을 뜻한다.

  비유는 한마디로 말하는 명유도 아니요 세부에 미치는 자세한 비교를 하는 풍유도 아니요 그것 자체로서 작은 이야기가 될만한 것으로서 각각 어떤 하나의 하나님 나라의 교훈과 경고와 위로와 정죄를 중립적으로 주는 교훈의 형식이다. 즉 비유는 하늘의 뜻을 가진 지상의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 즉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어려운 진리를 직설적으로 진술하기 보다 우선 잘아는 이야기로 즐겁고 쉽게 이해하여 전할 목적이 있으며 마13:13~ 또 다른 면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신다.

  비유를 해석하는데 주의할 점은 직설적으로 계시하신 다른 말씀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며 비유의 내용의 욧점을 파악하는 일이 긴요하다.

  다음으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다른 여러 비유가운데서 차지하는 위치 막4:13“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찐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이 말은 이 비유가 다른 비유보다 쉽다는 뜻이 아니라 기본이 되는 비유란 의미이다. 다른 비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비유의 이해를 위한 기초가 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해석을 해주시면서 공관복음에서 일련의 비유들의 선두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기본 성격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기본 성격은 말씀을 뿌리는 것. 복음전파는 중요한 천국의 현상이다. 그리고 천국은 씨뿌리는 단계가 있고 추수하는 단계가 있다.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지기만 하면 추수는 하게 된다. 그런데 뿌리기는 했는데 결실을 못해서 추수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다. 즉 천국 복음이 세상에 전파될 때 이러한 반응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 듣는자의 자세가 중요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경고한다. 눅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 까지 빼앗기리라.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주님은 네가지 듣는 자들을 열거하신다. 1/4만 결실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비유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관련되었다. “말씀을 듣고...” 교회출석 안하는 사람이 길가가 아니다. 성경을 않읽는 자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설교를 않듣는 자가 아니다. 주님은 원근 각처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 비유를 볼 때 참결실하는 신자가 소수일 것만은 틀림없다. 눅13장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참 적은데 들어가기를 구하는 자는 더 적고 그 적은 수 가운데서도 못 들어갈 자가 많다. 성경 읽고, 설교 듣고 하면서도 길가일 수 있다.

  길가의 씨는 새들이 주어 먹으니~ 단단한 길 위에 씨앗이 노출됨. 씨앗을 마음속에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씨를 뿌리면 새들이 떼지어 줏어 먹으려고 농부의 뒤를 따른다. 씨를 간직하지 않으면 빼앗기 위해 따라다니는 사탄이 있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는 경우도 있고 말씀을 듣고 잘간직하지 않으므로 빼앗긴다.

  공관복음 모두에 “빼앗나니” 안뺐기려면 잘간직하고 늘품고 있어야 한다. 마태는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이야기 한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관점대로 못 깨닫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도 성경에서 윤리를 발견하고, 교훈을 발견하고, 자기 생리에 맞는것 많이 찾아낸다. 그러나 계시를 모른다. 죄와 구속과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역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령한 것도 모른다.

  * 듣는 일은 결실을 위한 첫단계 ?? 진리는 같은 것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성의하게 듣는 자, 알아볼려는 관심이 없는 자, 비판하기 위하여 듣는 자, 자가중심주의, 자가 생리에 맞지 않으면 귀를 막는다. 새김질하고 재음미해보지 않고 무관심주의 깨닫지 못한다.

  * 비유는 영적 진리를 보다 더 쉽게 설명, 천국 진리를 인상깊게 간직할 목적-땅에서 되는 일로 시작하여 하늘로 인도, 볼 수 있는 일로 시작하여 보지 못하는 것 설명, 아는 것 가지고 알지 못하는 것 설명.

 
 
 

        돌밭에 떨어진 씨 (마13:1-9)

  천국운동은 말씀운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씀 선포와 그리고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것과 그리고 들은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문제, 또 그 말씀을 깊이 뿌리를 내리는가 못 내리는가 하는 문제와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도 이 세상의 삶과 관련하여 침체되는 문제, 그리고 말씀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여 지킴으로 결실하는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 돌밭은 산밑의 큰 바위위에 토사로 얇게 덥혀 있는 땅. 여기에 씨가 떨어지면 싹은 나오나 결실한 열매는 얻을 수 없다. 바위가 차단하여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뿌리가 없어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면 말라버린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뿌리가 없는 문제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게 차단하고 막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바위)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먼저 결과를 살펴보자. 무엇인가 차단하여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씨는 즉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넘어지는 자요. 누가는 배반하는 자요. 말씀(혹 천국, 하나님 나라, 신앙) 때문에 어떤 손실이 올 경우 배반하는 자이다. 그러하다면 여기서 말하는 바위 즉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자명하다. 즉 自我이다. 자기라는 것이 도사리고 앉아 있어서 그 이상은 뻗어 내려가지 못하게 차단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도 종교를 필요로 하고 또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고, 감격도 하고, 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기엔 참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아무도 분간할 수 없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잘모른다. 말씀 때문에 큰 핍박과 환난이 일어나서 넘어지든지 배반할 때에야 돌밭임이 드러난다.

  그들이 종교를 필요로 하고 종교적 신앙을 가지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이다. 종교적 열정, 종교적 활동, 모든것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 어떤 가치, 어떤 위안, 어떤 만족을 주는가에 관심을 둔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자기 손실과 자기를 포기하고 내놓으라고 할 때 배반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람들도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다는 점을 주의하자.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자에게 만족을 줄만한 가르침을 주면 무척 기뻐한다. 그러면서도 그 말씀이 생명의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 수가 있다. 또한 종교적 감정과 열정이 감격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황홀한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자신들이 추구하고 요구하는 것을 얻을 때에 좋아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았다고 해서 길가나 가시떨기보다 나을바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이지 내가 중심이 되는것 아니다. 자신을 위한 모든 종교적 열정은 그것이 만족이나 위로를 주던지, 기쁨이나 감격을 주던지, 현실적으로 어떤 소득이 있던지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받을 분깃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릴 때에 차단하는 요소가 제거되어야 어떤 경우라도 깊숙이 뿌리를 박게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로울 때만 받아들이고 손실이 올 때는 막고 차단한다. 그것은 버린다. 어떤 결정적인 요구를 해올 때는 종교도 포기한다. 혹은 형식은 붙들고 있으나 적당히 타협한다. 신사참배~그렇게라도해야 문닫지 않는다고 논리전개.

  전폭을, 전부를, 전체를 드리지 않으면 결정적일 때 배반하거나 넘어진다. 이것은 평소부터 그속에 바위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 바위는 속에 들어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점이 없다.

 
 
 

 

        바위에 떨어진 씨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격하는 경멸자들이 여기에 언급되고 있지 않은 사실을 우리가 알 때 이 경고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비유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만 관련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중 대부분이 망한다면 구원의 설교를 공공연히 거절하는 세상에 속한 다른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이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 길가는 처음부터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 씨를 표면에 놔두지만 돌밭은 처음은 밭아들인다.

  * 종교를 왜 필요하게 생각하는가? 종교는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인생을 풍부하게 하려고 종교를 가지는데 행복은 고사하고 네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하면 믿겠는가? 궁극적인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일진대 나에게 손실과 손해가 있을 때 이런 것들도 궁극적인 자기 유익을 얻게 된다면 희생을 하고 손해도 봐가면서 더 큰 유익을 얻기 위하여 감수하겠지만 나 자신을 내놓으라, 네 목숨을 내놓으라 할 때는 넘어지고 배반하는 것이다.

  * 길가나 돌밭이 표면상으론 다르지만 사실상 뿌리가 깊이 뻗어 들어가지 못하는 점에서는 동일함.

  * 말씀의 씨가 속에 뿌리가 뻗어 나갈 수 없는 마음 자리가 있다. 처음에는 외부로 싹이 나서 가자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이나 뿌리가 뻗지 못하여 환난이 올 때 넘어진다. 뿌리가 없는 것이 가장 특성적인것. 뿌리가 있어야 햇빛에서 장성하고 열매를 맺을텐데 뿌리가 없어서 큰 손실이 그를 휩쓸 때 포기하는 것이다.

  * 넘어진다, 배반한다. - 교회를 떠난다거나 출석을 안한다거나 기독교를 포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 돌밭은 외부 사람은 물론 어떤 경우는 자기 자신도 모를 수가 있다. 왜냐하면 넘어지기 전까지는 그가 넘어질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전체 전부를 드려야지 부분을 드려가지고는 않된다. 신6:4, 마22: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

  * 돌밭은 참된 자와 서로 다를 것이 없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되,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생명의 도리로다. 종교적 요구에 만족할 수 있는 태도로 말씀을 받아들였다.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 (마13:1-23)

  주님은 말씀을 듣는자들 가운데서 세번째 부류로서 말씀이 싹이 돋아 올라와서 자랄 때에 그것이 잘자라 결실을 못하게 가시떨기가 그 기운을 막았다고 하신다. 가시떨기는 영적 생활을 침식시키는 큰 세력인데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욕심과, 또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쾌락이라는게 있어서 결실치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① 이생의 염려라는 것은 별다른 특수한 사람들이 가진 염려라든지 혹은 어떤 죄악적인 염려라는 것이 아니고 세상사람들이 아무라도 가질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염려 ?? 어떻게하면 살까?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이다. 사는 문제에 염려안할정도로 생활이 안정되면 어떻게 사람답게 살까? 출세하고 살까? 하는 마음의 요구로 나쁜 의미가 아님.

  ② 재물의 욕심 ?? 독특한 죄악이 아니고 세상사람들이 다 추구하고 나가는 것. 미묘한 관계가 있다. 저축이라는 것. 재물에 대한 표준 성경이 안 세워진 것 아니다. 자기가 표준을 세워. 얼마까지는 적당하고 그이상을 보고 나가면 욕심이다.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다. 마음 자리가 문제이다. 재리의 욕심이 큰 문제는 말씀의 씨에게 자기가 주어야 할 중요한 것들을 못 주고 있는 것.

  ③ 쾌락 ?? 행복추구도 ~다 변호될만하고. 이 세상 사람들은 부적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없다. 미국의 독립선언서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는 모든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권리다. 이런 것을 바라는 것은 사람의 기본권리다. 이런 것들이 왜나쁘냐?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선덕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어 가는 일을 저해하고 그것을 질식케해서 맘 기울임과 에너지와 정성을 그 선덕이라는 것 그유가치하다는 것 때문에 자기맘에 도사리고 앉아서 흡수해 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여야 할 자기의 정성이나 자기의 노력에는 시간이 없고 여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었던지 적게 벌었던지 그것이 최종의 문제가 아니라 이생의 염려, 행복추구에 주의를 기울이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지 못해서 열매를 못 맺는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만 이세상에서 중시되는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의 생활양식, 생활양태 그속에서 나타나는 까닭에 독특하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띠고 발휘되지 않으면, 이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활양태와 구별됨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다. 씨를 품은 사람은 많아도 열매맺는 사람은 적다. 마음만 가지고 있어선 하나님 나라가 형성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 백성들의 그러한 생활로 표현이 되서 사회를 형성해 나가는데 의미를 가진다.

  열매 안 맺어도 하나님 나라라고 집어 넣고 적당하게 내맘대로 교인생활 잘했으니까 그 사람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못하는 것이다. 그걸 보여준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렬하고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렬해도 마음과 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못한다.

  하나님 나라를 강렬하게 나타낼 수 있는 말씀의 사역이라는 것은, 즉 하나님 말씀에 정당한 장성과 그로 말미암은 결실이라는 것은 무엇을 요구하느냐하면 그 사람이 전생활과 생명을 오직 거기다가 기울이고 사는 것이다. 이세상에도 마음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마음을 주고 그렇게 해서는 열매를 못 맺는다. 아무 열매 맺어도 되는 것 아니다. 사5: 들포도. 세상 것은 조금만 저도 잘자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전정렬을 기울이지 않으면 자랄 수 없고 열매 맺을 수 없다.

 
 
 

 좋은 땅에 뿌리어진 씨 (마13:1-23)

 

  지금까지는 말 씀을 듣는 자들 중에서, 또는 듣고 어느 정도 깨닫고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결실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도 말씀을 들을려고 사모하고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고 천국말씀을 들었으나 여러 가지 저해요소가 있어서 마침내 결실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좋은 땅이다. 좋은 땅은 무엇인가? 풍성한 결실을 하는 땅이다.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으나 수량의 차이는 있다. 질은 똑같으나 정도의 차이는 있는 것이다. 다 100배가 아니고 30배나 60배도 있다. 30개 맺었다고 악한 열매나 못된 열매는 아니고 아름다운 열매이다.

  천국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는 사람은 좋은 땅과 같은 것이고 듣기는 했으나 열매를 못 맺는 사람은 좋은 땅이 못된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만큼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을 기울이고 힘을 쏟아야한다. 몇가지 단계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① 토질이 비옥해야 한다. 눅8:15, 착하고 좋은 마음. 본래부터 좋은 토질도 있으나  나쁜 땅을 개간하여 퇴비를 넣고 갈고 손질을 잘해서 좋은 땅을 만들기도 한다. 타락한 인생은 본래부터 착하고 좋은 마음은 없다. 황무지와 같고 우거진 가시밭과 같다. 묵은 땅과 같다. 호10:12, 렘4:3.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속에 파종하지 말라. 물론 우리 스스로 묵은 땅을 갈아 결실할 수 있는 좋은 땅을 만들 수는 없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결실할 수 있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열매는 우리가 맺어야하며 열매를 맺는 일에 우리의 책임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열매를 못 맺는 것은 하나님이 안해 주셔서가 아니라 우리의 무책임과 태만과 정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5:1- 심히 기름진 산,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 심고 망대를 세우고 술틀을 팠다. 4절을 보면 내가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그런데 들포도를 맺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파종이 필요하다. 씨도 뿌리지 않고 열매를 기대할 수는 없다. 즉 말씀을 뿌려야 하는데 이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밭일진데 말씀을 들어야 한다. 듣지도 않고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길가처럼 단단한 마음, 강퍅하고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마음을 갈아엎어 부드럽게 만들고 뿌리를 뻗지 못하게 차단하는 마음을 깨뜨리어 뿌리를 깊이 박을 수 있게 만들고 가시떨기도 뽑고 짤라내어 말씀이 싹이 나고 뿌리를 박고 줄기가 튼튼히 자라서 결실할 수 있도록하자. 우리의 상태를 숨김없이 들어내놓고 회개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 부단히, 끊임없이 결실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열매맺을 수 있는 여건을 구비하자.

  마19장의 부자 청년처럼 재물 때문에 포기하지 말자.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천국을 포기할 만큼 값지거나 귀한 것은 없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같이 이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천국의 그것과 비교하거나 견줄만한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것 포기하고 잃을지라도 전심을 다하고 전부를 다드려 결실하자. 열매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지키어 나가는 것이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열매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즉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당연히 그 나라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가라지 비유 (마13:24-43)

  이 비유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바로 뒤따라오며 비슷한 점이 많다. 여기서도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뿌리는 자는 인자로 분명하게 표시된다. 씨는 좋은 씨이고 그좋은 씨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고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토양이 아니라 원수다.

  어떤 사람들은 앞의 비유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도록 주님의 밭(교회)에는 외형적인 가짜 신자들(가라지)이 많이 있으니 주의하라고 하신 비유라고 생각하나 오히려 경건하고 참된 신자들이 좋은 것과 추악한 것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싫증이나 진저리를 느끼지 않도록 주로 경건한 신자들을 보호하시는데 이 비유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 비유가운데서 가라지를 뽑지말라는 이유를 생각해야한다. 가라지와 알곡을 분별하가 어려워서인가? 두가지가 서로 얽혀서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경건한 신자들을 보호하는데 역점이 주어지는데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가 복음전파로 실현되며 추수기는 아직 아니라는 사실이 계시 됐는데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는 악인의 심판이 따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천국이 왔다는 선언에는 심판과 세상끝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최종적인 심판과 세상끝은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있다는 것을 계시한다. 지금은 끝이 아니기 때문에 가라지가 섞여서 넘어지게 하며 불법을 행하고 있다. 천국이 왔는데도 이런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 이 비유의 목적이다.

  지금까지 계시의 내용으로서는 천국이 올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을 영원히 구분하시리라 하셨다. 이런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도래에는 두단계가 있고 최종으로 나타날 단계를 처음 단계에서 기대하지 말라는 경계로서 이런 계시를 주신다. 천국은 세상끝이 오지 않은 시기에서는 불완전한 상태를 포함하며 천국의 유형적 기관인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교회안에서 권징을 금하는 것도 아니다. 마18장에서 권징을 명하셨다.

  권징의 원칙은 선악의 절대적 분리를 꾀하라는 것도 아니고 천국의 최종상태의 순결을 이루라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신앙고백에 알맞는 거룩한 상태를 순결하게 유지하고 죄인을 고쳐 구원하려는 권징을 잘 수행하면서 이 비유에서 가르친 교훈을 가지고 교회가 완전히 순수하지 못하다고 실망하거나 교회를 떠나거나 손해보지 않아야 된다. 이 비유를 빙자하여 권징을 게을리 해도 안되고 이 비유의 경고를 무시하고 천국을 지금 당장 사람의 손으로 최종단계로 끌어 갈려고 해서도 안된다.

  교회가 흠이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로 성장하도록 절대적으로 순수함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것을 금하는 말씀은 아니다. 주님께서 세상끝에 최종적으로 분리하실 때까지 나쁘고 위선적인 자들이 섞여있게 될 것이나 지상에 있는 교회가 절대적으로 순수할 수 없으니 순수할려고 힘쓸 것도 없다는 논리는 성립이 안된다.

  * 파종자는 주님 홀로 이시다 - 사역자들은 그의 손과 같고 주님만이 주장자이시다. 가라지는 애초부터 종자가 다르다. 참신자가 어떻게 잘못해서 가라지가 되가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마귀가 심어놓은 것이다.

 
 
 

        종들과 회계하는 임금님 (마18:21-36)

  이 비유는 베드로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베드로의 질문은 앞에서 주님이 범죄자에 대한 교훈에 이어서 나왔다. 교회가 범죄자를 취급할 때 어떻게 해야할까를 교훈 하시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여기에 이어서 베드로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7번까지 하리이까? 주님은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이 비유를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욧점은 용서라는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는 용서하되 제한없이 용서하여야하며 용서를 하지 않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사실로 인해서 자신이 천국백성이 아닌 것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은 용서받은 사람만이 가는 나라이고 그 나라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어떻게 용서하시는가를 안다면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용서와 자비와 은총을 안다면 용서에 인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용서의 차원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형제의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일만달란트” 1달란트(헬라의 화폐단위)는 미화 960달러 - 한화 80억원 이상

  용서는 자비에 근거하고 나온다. 천국의 왕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시다. 채무자를 불쌍이 여겨서 채권까지 포기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셔서 의무 이행을 요구하신다면 용서받고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실 뿐만 아니라 용서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큰 희생을 치루셨다. 롬3:24(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

  엡4:32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5:1-2.

  27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은 30절에 같은 처지의 동관이 동일한 호소를 했을 때 허락하지 않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 33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천국은 자비하신 왕께서 다스리시며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은 그 나라 백성되기에 합당치 않다. 형제를 용서할 줄 모르는 잔인한 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의 혜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점을 부단히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큰 용서를 기억하고 형제를 용서하되 제한없이 용서하여야 한다.

 
 
 

        포도원의 품꾼들 (마20:1-16)

* 이 비유의 동기 : 베드로의 질문 - 젊은 관원의 사건과 근심하며 돌아간 젊은이...

  주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답변하셨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질문에서 매우 잘못되고 거짓된 어조를 탐지해 내셨다. 그래서 그를 꾸짖고 책망하고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해석의 열쇠는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먼저된 자가 누구인가? 질문자인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열성적이며 충성스런 중진 일군들, 그렇게 봉사하고 충성한 것이 잘못이고 나중되는 것이 좋은 것이란 의미가 아니다. 이런 먼저된 자들에게도 위험이 따른다는 의미이다. 이런 위험성이 없는 기독교인은 없다. 우리에게는 원수요 영혼의 대적자가 있기 때문이다. 초신자에게만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위험성이 항상 따른다.

* 이 비유중에 우리가 관심을 집중시켜야하는 원리가 하나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삶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은혜의 원리에 맨마지막에 온 자들도 처음부터 일한 자들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나이가 늙어 개종한 자들에게 종종 찾아드는 낙심, 너무 늦었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생의 늦부분에 개종한 사람들은 때때로 구원이 그에게 좀늦게 임하였고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을 미끼로 삼는 마귀의 유혹에 걸려들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님이 열한시에 그들을 불러 일터로 보낸 사실이 커다란 위로가 된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의 강조점은 오히려 먼저 온 사람들에게 있다. 이 비유의 중요한 목적은 먼저된 자들에게 교훈 하시고 엄숙한 경고를 하시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포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보냄을 받은 이 사람들은 왜 마지막에는 그렇게 슬픈 인물로 나타났습니까?

  ① 2절 “저가 품꾼들과 약속하여...” 맨처음 사람들의 경우에만 되어진 것. 그들은 ㉠ 계약을 맺을려고 노력하는 경향 ㉡ 어떤 것들을 명문화 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 곧 그들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의식하고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일하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다.

  ② 그들이 자신의 일을 평가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역시 평가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간직하여 둔다. 그들은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 종일 더위와 수고를 견딘 것 - 을 간직한다. 이 사람들은 최초의 잘못된 태도 때문에 즉 그들이 은혜의 원리를 잊었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받을 것을 기대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더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은 완전히 논리적이었다. 그들은 더많이 받을 자격이 있고 더많이 받아야 한다는 감정을 갖고 더많은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더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③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은 다사라져버렸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기뻐하는 대신에 비참해지고 불평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모든 것은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실에서 결과되어진 것이다.

  ④ 결국 먼저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다른 사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질투도 포함된다. “나중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탕자비유중 맏아들의 경우. 이 경향은 충실하고 가장 훌륭한 일을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간교한 방법으로 들어와 시험한다. <다른 사람들을 많이 주는 것은 주는 자의 뜻인데> 내것이나 받으면 되었지 남을 간섭하고 질투하는가?

  ⑤ 가장 심각하고 무서운 일은 그들의 마음 속에 집주인이 불공평하다는 감정을 가진 점이다. “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세어보아라. 그런데 네가 얻은 것은 무엇이냐. 다른 친구들을 보아라. 그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그래도 그가 얻은 것을 보아라”라고 마귀가 유혹한다.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에게 한데나리온을 주다니 -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똑같이, 그래서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라고 느낀다.

* 이에 대한 치료책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배하는 원리를 이해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가 항상 알고 있는 것과 같지 않고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 인식이 필요. 과거의 생활 원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나의 모든 생각은 달라져야 한다. 나는 옛생각의 개념들을 가지고 다녀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매매나 권리의 개념을 가지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했다해서 나는 무엇인가 댓가로 받을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논쟁하는 것처럼 잘못된 영은 없다.

 {예} 자동판매기식. 내가 무엇을 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얻을 자격이 있다. 기도, 헌금, 봉사. 우리는 매매하는 정신에서 벗어납시다. “만일 내가 이것을 하면 그러면 저것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식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무슨 일이나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인식. 성경에는 상급에 대하여 가르친다. 상급조차도 은혜에 속한 것이다 - 주님은 그들에게 주어야할 필요는 없으시다.

* 하나님과 흥정하지 말자. 하나님과 약속을 맺으려한다면 그것밖에 더이상의 것을 얻을 수 없다. 나중온 자들은 약속하지 않았다. 상당하게 주리라. 그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면 우리가 생각해본적도 없는 많은 것을 틀림없이 받게 된다.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상을 이미 받았노라고 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졌다. 그것이 그들의 원하는 바였고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전부였으며 더이상 가질 수 없다.

* 우리는 나의 일에 대한 기록이나 계산을 하지 말자. 하나님으로 하여금 계산을 기록하도록 하자. 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자. 계산을 기록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계산방법은 우리들의 물질적인 전망과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나중된자... 모든 것이 뒤바뀐다. 전세계가 은혜로 인하여 뒤바뀌어진다. 연약한 가운데 강단으로 나아가나 능력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갔다가 바보와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러면 낙심된다.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일만 하라 기록은 하나님이 하신다. 마25장의 양과 염소 비유

 
 
 

        악한 농부 비유 (마21:33-46)

  악한 농부 비유는 앞에 나오는 두아들 비유에 이어서 주시는 비유로서 마태와 마가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즉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 무슨 권세로 하는 것이며 누구에게 그런 권세를 받았느냐고 질문한 것에 대하여 주시는 비유이다. 즉 이들의 이 질문은 그리스도의 그런 사역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가르치는 권세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이고 자신들의 허락과 인정 없이는 할 수 없는데 너는 어디서 누구에게 권세를 받아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게 되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포도원으로 비유된 것은 하나님 나라임이 틀림없다. 포도원의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친히 세우시고(33절) 농부들에게 세로주고 타국에 갔다. 사5:1- 포도원. 이스라엘이 들포도를 맺은데 문제가 있으나 여기 주님의 비유는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고 안 맺는데 문제를 집중하지 않고 포도원을 임대하고 임대조건을 이행해야할 이 농부들의 악한 행동에 집중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에 심고 온갖 조건을 다갖춘후에 지도자들에게 관리하도록 맡겼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게 된 것은 열매를 맺지 않은데 있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주인의 포도원에서 얻은 총수익에서 일부를 소작료로 내라는 것인데 그것을 주지 않고 거부할 뿐 아니라 악하게 주인이 보낸 종들과 아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와 농부들(유대의 지도자들)의 포악하고 극악한 죄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마태는 35절에서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고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막12:2. 한 종을 보내니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냈고 다른 종을 보내니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고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를 죽이고 그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렘25:3. 23년동안 부지런히 일렀으나... 4절 여호와께서 그 모든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시51:17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이다. 이 요구는 포기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요구하신다. 종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 결국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라도 기어코 받아내고야만다.

  이 악한 농부들(유대 지도자들, 바리새인들)은 아들까지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리고 상속자니 죽이고 우리가 차지하자 하였다. 주인은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에게 주리라. 시118:22,23 인용.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유대인들이 버린 그리스도께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로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그리스도께서 기초가 되신다. 교회의 일군은 사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은 멸망, 돌위에 떨어지는 자. 그리스도에게 부딪히는 자는 깨진다. 시2:12.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지라.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그 중심이 되시고 그 뜻이 실현됨 하나님께 열매를 드리지 못하면 그 나라를 빼앗긴다.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에게 국한된게 아니고 전 세계적임 - 하나님이 기이하게 하심.

 
 
 

        회개 (마21:28-32)

  회개란 자신들이 저질러온 어떤 일들에 대한 피상적 슬픔이나 뉘우침 정도나 죄를 짓고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죄를 짓고 다시 유감으로 여기는 일을 거듭 되풀이 한다.

  회개가 무엇인가? 정의하면 복음을 믿는 것이다. 믿음과 회개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어떤 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반성이나 어떤 악행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뉘우침과 괴로워하는 정도가 회개가 아니다. 그런 정도는 가룟유다도 행한바이다.

  본문에 나타난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명령, 즉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는 말씀을 실소이다하고 거부하였다. 그러나 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일하러 갔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원하시는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우리에게 하기를 바라시는가? 마7:21,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아니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시는가? 요6:29,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복음을 믿으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하신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싫소이다 거부한다. 이렇게 거부할 때는 그 요구가 부당하게 느껴지며 그 명령을 불쾌하게 느꼈기에 퉁명스럽게 싫소이다 했을 것이다. 복음을 믿으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부당하게 느껴지며 그 명령을 불쾌하게 여기며 거절하고 거부하는 자들 많다. 그런데 이 아들은 그후에 다시 뉘우치고 가서 일했다.

  무엇이 그로 마음을 돌이키게 하였는가? 다시 그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여보고 깊이 있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그 일을 저울질하고 살펴봤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았을 것이다.

  회개는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뉘우치고 복음을 믿는데까지 나가는 것이 참회개이다. 그러나 복음을 믿기까지는 자신이 잘못됨과 이제까지 지내온 것이 모두다 하나님께 잘못된 것과 현재 상태도 잘못된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만이 복음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순종할 수 있다. 눅15장의 탕자비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정당하다고 할 때 나는 잘못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부당하시다고 생각할 때 내가 옳고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회개할 수 없다. 예레미야 -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 부당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내가 불의하고 잘못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 생활이 우리자신에게조차 잘못되었을 진대 하나님께 대해서야 어찌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잘못을 저질러 왔다는 것을 알고 뉘우치는 일까지는 해도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회개는 바로 이곳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거절했던 것을 뉘우치고 다시 가서 행함으로 자신의 잘못과 죄스러움을 증명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회개하나로 만족하신다. 저질러왔던 모든 사항들에 보상을 요구하시거나 저질러 왔던 잘못들을 모두 원상회복하도록 요구받는다면 어쩌겠는가? 한번 회개함으로 전혀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은 것 처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왕의 아들의 혼인장치 (마22:1-14)

  이 비유는 천국을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잔치에 초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고 이들의 거부로 사거리 길에 나가서 만나는 대로 악한자나 선한자나 모두 데려다가 잔치에 가득하게 채운 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온 것을 보이며, 들어온 손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손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비유의 결론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이다.

  이 비유에서도 천국이 계시되는데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로 비유된다. 보통 사람들의 혼인 잔치도 풍성하고 즐거운데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는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4절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눅14:15 함께 먹는 자 중에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사람은 복되도다 하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셨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예하는 것이 얼마나 복되며 영광스러우며 모든 음식이 풍성한가? 잔치집은 먹을 것이 풍부하고 기쁨과 유쾌함이 있다. 이것은 천국이 인생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보다도 더 풍성한 하나님 나라임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복되고 영광스럽고 풍성한 잔치에 초청을 받고 한결같이 거부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더우기 3절에 오기를 싫어하고, 5절에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처로 갔고, 눅14:18에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고,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고, 장가들었으니 못가겠노라. 마22:6 심지어 심부름 온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사악함이 얼마나 깊은가를 볼 수 있다. 그토록 영광스럽고 복된 왕의 혼인 잔치에 청함 받은 그 영광을 그렇게 거부할 수 있는가? 그들의 핑계가 정당화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돌아보지도 않는 무관심과 무례를 행할 수 있겠는가? 청함을 거절한 것만도 왕을 경멸하는 태도인데 거기다 종들을 어쩌자고 능욕하고 죽이는가? 상식적으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부르심을 경멸하고 거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앞장의 악한 농부 비유)을 핍박하고 죽이고 했던 것이 역사적인 현실이다. 유대인 뿐만이 아니고 모든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역시 동일하게 천국의 부르심을 경멸히 여기던지 또는 무관심하고 어떤 자들은 모욕, 능욕하고 핍박하고 화를 내는게 사실이다.

  이 비유의 결론같이 택함을 입지 않고서는 복음의 부름에 순종하지 않게 되고 혹은 잔치집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택함을 입지 않은 자는 결박당하여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기인하나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은 스스로 은혜의 초대를 거부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참예함에 합당치 못하게 된 것이다.  

  인류가 끊임없이 구원의 초청을 거부하는 다양한 면이 본 비유 가운데 나타나는데

① 오기를 싫어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마음을 매혹하지 못했다.

② 돌아보지도 않았다. 무관심주의. 천국과 내세에 관심이 없는 자들.

③ 자기 밭으로 갔고

④ 자기 사업처로 갔다.

⑤ 장가들은 것 핑계. 토지, 사업 즉 소유물에 더 열정. 간접적 행복 추구.

  임금의 궁전으로 가지 않고 또 복음의 부르심 앞에 적의를 품고 노하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임금은 또다른 종을 보내며 반복하여 청한다. 왕의 호의와 은총을 거부한 것 만으로도 그들은 왕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멸시했으니 벌받아 마땅한데 종들을 죽이기 까지 한 것은 완전히 왕께 대한 반역이다. 여러분이 선택받은 자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렇게 대하지 않게 된다. 순종하는 것 같으면서도 예복을 입지 않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도 있으니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열처녀 비유 (마25:1-13)

  마25장에는 세가지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 즉 열처녀 비유와 달란트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이다. 이 세비유는 구원과 멸망의 분리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 마13장 천국 비유에서 천국은 뿌리는 단계와 거두는 단계, 그물로 각종 물고기를 끌어 모으는 단계와 강가에 앉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하는 단계가 있음을 보았다. 여기서는 분리하는 단계로서 무엇을 기준으로 구원과 멸망을 분리하는가를 보이고 있다.

  이 세가지 비유를 해석하면서 특히 주의할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했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당신도 구원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행위교리가 된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즉 그들의 이런 행위는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이 비유들은 특별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물안에 들어온 사람들이지 밖에 있는 자들이 아니다.

  열처녀 비유는 그 분리의 기준을 슬기있는 자와 미련한 자로 정한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으로 쉽게 판명된다. 슬기 있는 자는 항상 예비하였기 때문에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미련한 자들은 문이 닫힌 후에야 기름을 사러갔다. 이 비유의 욧점은 재림에 대한 준비이고 그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고 깨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림의 시기는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3절, 마24:50 생각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간, 마24:36, 살전5:1- 준비하고 깨어 있는 신자에게는 도적같이 이르지 않는다. 예비되어 있으므로.

 이 비유에서는 깨어있다는 것은 기름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인데 기름을 준비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나? 일반적으로 성령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기름이 무엇이든 간에 문제는 주님 재림시는 어두운 밤이라는 것과 주님을 맞이하여 들이는데 큰 장애가 어두움이니 그 장애를 제거하기 위하여 불꽃이 필요하고 불꽃이 계속 타오르기 위하여 기름이 마르지 않고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 뿐이다.

  신자가 주님 재림시(어려운 때인데)에 부족함이 없이 맞이하고 영접할 수 있는 신앙의 태도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 하기 때문에 성령이라고 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이런 성령의 은혜를 끊임없이 지속하고 공급받기 위한 신앙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기도와 말씀과 묵상으로 항상 각성하고  태만하고 나태하지 않고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유지해가야 한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외식하는 신자인데 자기 기만에 빠진 자들이다. 등은 준비했다. 어둠이 없고 불을 킬 필요가 없으면 똑같다. 겉으로 보기엔 같다. 그들이 기도하는 것 같고 열심 내는 것 같고 또 생활 마저도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는 것 같아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사이비 열매이다.

  이런 외식자들은 외무적으로 나타내기만 좋아하니 생활 이면에는 언제나 깊은 심령의 영적 샘이 마르고있다. 이런 자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거짓으로 발견된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이다. 짧은 기간에 불타는 열성은 거기에 장기간에 걸친 불요불굴의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 한 그것 자체로서는 충분하지 않다. 쉽게 신앙생활하려하지 말자. 다른 사람의 것 빌리려고 하지 말자. 깨어있어 항상 예비하자.

 
 
 

        달란트 비유 (마25:14-30) 

  이 비유도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심판의 단계를 계시하는데 앞의 열처녀 비유에서는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실는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 항상 깨어서주님 오실 때 맞이하고 영접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 비유는 주님 재림에 대한 예비 즉 깨어 있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것은 곧 주님께서 주신 직책대로, 혹은 재능대로 충성을 다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천국의 미묘한 성격을 예의 주시해야 하는데 순서도 주의하자. 열처녀 비유가 앞에 왔다. 여기서는 외식하는 신자들이 최종 분리하는 때에 어떻게 버림 받는가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행동보다 그들의 내면적인 상태가 중요하다. 마24:40,41 두여자가 매를 갈고 두사람이 밭에 있어도 분리된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같은 일을 해도. 왜 내면적인 문제이다. 즉 기름이 있었는가? 그들의 행위가, 그들의 삶의 원리가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무엇으로부터 그런 열매를 맺는가가 중요하다.

  육신으로 좇아오는 것은 그것이 선할지라도, 아름다운 덕목일지라도 쓸모 없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좇아 나타나는 열매이다.

  그 다음 달란트 비유는 좀 외형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다. 즉 기름을 준비한 자들의 불빛이 나타나는 결과요 열매다. 그들은 주님이 분부하시고 맡기신 사역에 충성하는 자들이다. 마땅히 할 일을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이 재림에 대한 준비요 기름준비한 깨어있는 생활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 한달란트 받은 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그래도 낭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주인께 받은 것 지킬려고 땅을 파고 묻어두어 감추어 두었다. 그러나 주인의 책망은 돈을 줄 때 묻어두라고 준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은행 이자라도 최소한 얻어야 할 것이다. 이 종은 다른 종보다 적게 주어 불만 때문에 묻어둔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사실은 적은 돈을 맡겼기에 충성하기가 훨씬 쉽다. 예수님께서는 책임이 가장 가벼운 사람의 예를 드신 것 뿐이다. 많은 달란트를 짐지웠다면 변명과 구실을 댔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이러하므로 그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은사는 어떻게 취급(은사 취급 방법이 틀렸다) 생산성 없는 땅속에 묻어둠. 결국 이종은 하나님의 은사를 전혀 원치 않았다. 맡겨주니 맡은 것 뿐이다. 그리고 맡기니 불평스런 마음을 가졌다. “심지 않은데서....” 당신은 당신의 종들의 노동을 통해서 많은 추수를 거둘 수 있기 위해 당신의 종들에게 파종을 시키고 당신의 종들에게 도리께 질을 시킨다. 주인을 무정하며(굳은사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완전히 몰두하는 자라고 생각, 그래서 잘못하여 맡긴 것 지키지 못하면 어쩔까 두려워하여 감추어 두었다. 잃을까 염려해서...

  우리가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평할 근거가 되는가?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면 그럴 수 없다.

 
 
 

        문둥병자를 고치심 (막1:40-45)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은 난치병으로 알려진 문둥병을 말씀과 손길만으로 깨끗이 씻어 보인데서 훌륭하게 들어났다. 그러나 이 이적을 잘못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 레13: - 15:까지에서 문둥병에 관련하여 기록된 부정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레13:45-“문둥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있는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

  다른 병과 다른점 ①사람과 격리됨 - 그 병이 전염될까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와 접촉하면 종교적 의식적 부정 때문이다. 이 병의 특징은 초기에는 매우 약하게 그 증상을 보이며 매우 느리게 진전되지만 후기는 무섭게 양상이 일어나 얼굴이 놀랍게 이그러지고 신체의 각 부분이 썩어서 하나씩 떨어지며, 또 이치적인 병을 일으켜 생명이 끝나게 된다. 초기에는 매우 느리게 작용하며 그 기간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얻는 즐거움도 장애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병은 항상 신비로운 병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벌로 생각하였다. 미리암, 웃시야, 게하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미리암과 나아만 치료됨. 이 병은 죄와 하나님의 신성이 반대됨의 강한 상징, 그리고 사망 그자체의 상징이 되게 하였다.

  유대인 작가들 “산 송장”이라 묘사. ‘스펜서’ 걸어다니는 무덤. ‘칼빈’ 종교적 모임에서 금지된 문둥병자는 죽은 자로 여겨졌다. 다른 병은 고쳤다하나 문둥병은 깨끗하다, 씻는다. 정결예식 - 다 부정. 더러움의 상징.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심은 우리 죄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심.

  산상설교를 인치는 의미에서 몇가지 이적을 행하심으로 그의 말씀이 더욱 권위 있게 함. “절하고” 경배, ‘막’ 무릎을 꿇었다, ‘눅’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댐.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접근했는가? “주여”라는 명칭의 의미 - 높은 사람 공경.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한다. 문둥병을 고치고 안 고치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점을 말한다.

  신자들 중에는 주님의 권능을 믿노라고 하는 자들 많으나 주님의 거룩한 뜻에 자기를 맡기고 따르려는 자는 적다.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있어 참으로 신앙적이라면 먼저 주님의 뜻을 존중히 여기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 ①소극적 - 모든 죄악. ②성경을 묵상,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회고, 모본할만한 신자들과 함께 모여 의논. 그릇됨 - 직접계시, 꿈.

  * 손을 내밀어 대심 - 율법은 금했다.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될려면 손댈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이 손대었다고 부정해지지 않는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악 세상에 살면서도 조금도 더러워지지 않고 순결을 유지하셨다.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더러운 곳을 만지심은 가볍게 읽을 수 없다. 그분의 성결과 거룩함을 이해하라. 불결과 더러움을 어떻게 접촉하겠나? 주님께 나가지 못할 죄는 없다. 길이 열려졌다.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심은 죄인을 위하심이다.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초월하신다. 제사장에게 보내 증거케하고 말하지 말라. 공적 사역이 방해 - 즉 소문 듣고 허다한 무리가 모여 옴.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심. 막 - 다시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셨다. 맹목적인 경건이나 열심이 주님의 일을 방해한다.

 
 
 

        물위로 걸으신 예수님 (막6:45-52)

  주님께서는 이 이적을 행하시려고 제자들을 제촉하사 배를 타고 가게 하시고 예수님 자 산으로 가셨다. 왜 주님은 이 기적을 행하셨는가? 그대답은 막6:52에 있다. 저희가 그 떡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이 둔하여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앞의 기적을 통하여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시며 자기 백성들을 먹이시고 기르시는 목자로(시23편),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자로 자기를 계시하셨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기 때문에 어려울 때, 환난 때, 인생의 풍랑 때,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도우셔서 위로와 안심을 주시는 주님으로 알기를 원하셔서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훈련을 시켜주신 것이다. 더구나 마8:23- 에서는 낮에 주님 모시고 풍랑을 만났으나(그때도 주님을 의지 못함) 여기서는 밤에 주님 떠나서 물결에 괴로움을 당한 것 보면 장차 주님이 저희들 곁에서 떠나시고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의 성령으로 사역하실 때도 주님이 자기 백성들을 돌보실 것을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이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철저히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된다. 마28:19 -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창15:1 - 아브람아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 나는 네게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 시17:8 -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시편에 면면히 흐르는 사상은 하나님은 목자같이 자기 백성을 원수에게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라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말고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시3편의 다윗)  시50:15 -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주님은 자신을 계시하되 발전적으로 나타내시고 알리신다. 단순히 능력 있는 자만이 아니고 그 전능하신 능력을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베푸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신앙의 발전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병행한다. 하나님이, 주님이 이런 분이심을 알았으면 우리 생활에 적용하자. 주님은 우리의 믿음(용량)을 알아보시기 위해 창22장의 아브라함같이 때로 시련을 주신다. 그리고 영적(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훈련하신다.

  주님이 돌보시지 않는 것처럼(막6:48) ‘지나가시려고’ 어려움에 버려두는 대도 있다. 그때에 우리로 부르짖고 주님만 의지하시기를 바라신다. 시50:15. 이 사실을 깨달을 때 험하고 풍랑 많은, 질병, 고통, 사고, 위험 많은 세상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며 안심과 기쁨이 되겠는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조금씩 더 배워 나가자.

 
 
 

        예수님의 첫번째 이적 (요2:1-11)

  1절, 사흘 되던 날 - 1:43에서 계산된 날. 장소:갈릴리 가나. 같은 지명이 많음. 두로와 시돈 사이의 사렙다쪽에 있는 가나가 아니고 갈릴리 즉 스불론 지파에 속한 땅. 나사렛에서 가까운 거리. 예수님 어머니가 거기 계시고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청함을 받은 것 보니 친척중 하나같음.

  4절 -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과 이일에 있어서 자기 어머니의 제언에 따라서는 어떤 일도 행치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어머니를 거부하며 어머니란 칭호로 존대하지 않고 보통 여자의 위치에 놓고 있는가? 카토릭에서는 이 구절의 책망이나 비난의 그림자라도 벗기려고 무척 애를 썼다. 이 목적만을 위하여 완전한 논문들이 쓰여졌다. 칼빈 - 마리아를 미신적으로 끌어올려 하늘의 여왕과 세상의 소망과 생명, 구원의 여왕으로 받들어질 위험성 때문에 의도적으로 마리아의 부탁으로 이적을 행한 것 처럼 생각해서 마리아를 중보자로 추켜 세울 것에 대비해서  취하신 행동.

  “내 때가 아직”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적극적으로 일하지 않는 것은 부주의나 게으름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동시에 때가 오면 할 일을 할 것이란 암시. 그때는 아버지게서 그를 위해 정하신 때.

  6절, “돌 항아리” 하나님의 율법으로 부터 결례의식 행하매 물항아리 준비 - 그들이 받은 계율.

  7,8절. 예수님의 명령은 하인들에게 어이없게 들렸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용히 순종한 것 보면 주님의 위대한 권위와 명성을 볼 수 있다.

  11절, 첫번째 행한 이적 - 예수님의 유년기에 행하였다는 순전히 기괴하고 변덕스러운 이적들을 부정.

  *기적의 목적 : 주님께서 세상에 나타내시는 모든 표적은 그의 신기한 능력을 증거 한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게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모든 이적은 다 주님의 품격을 증거하고 신앙을 깨우치며 굳게하며 신앙이 가져오는 생의 변화를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잔치집의 곤경을 구해주셨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셨고 신랑에게 훌륭한 예물을 주셨다. 혼인은 기쁨을 상징 - 기독교 신앙이 우리 생의 기쁨을 뺏아가는 줄로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11절에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셨다. 궁극적 목적. 오늘날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우는 많은 표적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아무리 성장한 믿음이라도 어렸을 때가 있고 믿음이 완전하기 때문에 믿음의 진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기적은 믿음을 확증하고 믿음을 자라나게 하는데 있다.

  *리챠드-트랜취는 그리스도의 미래의 사역(구원사역)에 꼭맞는 기적이라고 했다. 평범한 것을 고상하게 하고 대단치 않은 것을 변화시켜주고 땅의 물을 하늘의 포도주로 바꾸었다. 이 이적을 통하여 ①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②신앙이 발전되기를 기대하며 ③그로 인한 생의 변화들을 확증시켜 준다.

 
 
 

        양과 염소의 비유 (마25:31-46)

  마태복음은 심판의 복음이라는 별명처럼 수많은 심판에 대한 비유 또는 설화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본 비유는 가장 엄숙하고 또 명백하게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비유의 형식을 빌린 직설적인 설화로서 자기 자신이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재림하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을 베푸시되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여 영벌과 영생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신다.

  이 비유도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이 현재 상상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계시하신다. 그들의 천국관은 자기 민족을 짓누르고 있는 여러 가지 불행에서 구원을 받는 현세적이며 지상주의 천국관,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적인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유대 민족을 뛰어넘어 세계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 앞에 모아 선악간에 심판하여 의인들만으로 구성되는 나라임을 보이고 있다. 이때에 이런 계시는 유대인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의 분리의 기준이 무엇인가? 표면상으로 볼 때는 선행의 보상으로 받는 것 처럼 되어 있으나 이점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선행의 보상으로 영생에 들어간 것이 아님은 34절에 내 아버지께 복받은 자들이여 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이 말씀은 그들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신 은총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셨다. 자신들의 선행의 공로로 이 나라를 성취했기 때문에 그들의 공로로 인하여 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받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창세전에 예비하신 나라이다.

  * 이 비유들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해서 영생을 상속하라고 교훈 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주님의 오랜 지연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주시는 말씀이다.

  35절, 카토릭 - 구원의 원인에 대한 논쟁. 영생이 선행의 공로 때문이라고 주장.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도는 제자들에게 선행을 격려하는데 있다. 이 선행은 영생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저 받는 것이다. 그 상은 입양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함께 후사가 됨으로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받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상은 당연한 몫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부여된 상이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믿음과 간구가 구제보다 더 가치가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잘 드러나 보이는 실례를 들어 보인다.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인간들에게 따스하게 대하는 구제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구제와 선행에다 의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명확히 보인다. 신실한 자들이란 입술로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봉사를 입증해야 한다. 자신들이 짜낸 선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명에서 이탈한 자들은 누가 네게 이것을 요구하였나 책망 받는다. 이 귀절을 핑계삼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영적인 일을 도외시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위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인이기에 나타내는 선행과 구제가 귀하다.

  40절 - 주의 백성에게 베푸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겨주신다. 그들이 무슨 보상을 기대하고 한 것이 아니고 거저 베푼 선행을 주님이 기뻐하신다. 아무리 비천해도 자신의 몸의 일부로 소중하게 보신다.

  44절 - 스스로 기만하는 헛된 속임수 - 이자들은 외식하는 그리스도인.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심 (요5:1-18)

  성경 기록의 목적 : 요5:39, 요20:30,31.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많지만 요20:30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도 많았고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세상에라도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고 표현. 요21:25에서 저자가 선별하여 기록한 것은 이 기록의 목적과 부합되는 것이고 그러기에 그 목적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고 이 내용을 접근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다.

  이 이적이 우리에게 주는 massage는 무엇일까? 저자가 무슨 의도로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선별했을까? 일차적으로 이점을 포착하고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성경을 볼 때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가 중요하다. 문학, 심리학, 교육학 ...  우리의 시선이 사람들이냐? 하나님이냐? 한국교회의 강단, 즉 설교의 가장 큰 오류와 위험은 성경을 읽고 사람에게 비춰서 해석하고 풀어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이적이 나타나고 병고침을 받으면 거기서 무엇을 보느냐하면 사람의 믿음을 먼저 보고 그 결과로 받게 된 축복들을 생각하여 당신들도 그런 믿음을 본받아 이런 축복을 받으시요 그러니 하나님은 숨겨지고 그리스도는 감추어지고 사람만 들어나고 노출된다. 인본주의에서 나온 산물이다.

  저자가 무엇을 밝혀주려고 의도하는가? 이 본문의 강조점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에게 믿음이 있었는가? 13절을 보라. 그러면 그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셨는가? 3절을 보라.예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시려고 고치셨나. 3절을 보라. 5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 사실이다. 병이 너무 오래므로 치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다른 환자들한테 경쟁에 지는 것은 그 병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준다.

  9절을 보라. 안식일인데 왜 병을 고치셨나? 16절을 보라. 유대인들의 반대와 핍박을 모르셨는가? 그러나 17, 18절을 보면 이렇게 하신 이유를 알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기적을 행하심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알리시기 위함이었다.

  5:1. 명절 때 예루살렘에 큰 무리가 운집. 그때 자신을 계시하심. 17절 ,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와 동등 됨을 선포. 그래서 유대인들이 더욱 죽이고자 함.

  * 안식일에 하심은 그 표적이 더욱 널리 알려지기 위함. 그러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필요. 그래야 놀라운 설교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짐. 많은 병자중에 가장 심각한 한사람 고침으로 충분. 자신이 일을 하심으로 하나님 되심을 증거. 왜 하나님이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히1:3 구원의 일을 하신다. 그 다음 설교가 살리신다. 생명을 얻게하신다.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원하여 생명을 주는 일을 계속하신다는 의미. 그리스도를 단순히 능력을 행하시는 분으로만 계시 하는가? 선생, 선지자 - 하나님이심을 증거 한다. 이런 말씀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어야한다.

 
 
 

두소경을 보게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심 (마9:27-34)

  이 이적은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들어내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사35:5-그때에... , 사61:1-눈먼 자에게 다시 봄을. 메시야의 사역가운데 나타나는 부분적 특징은 불구자를 완전케하여 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능력이 아무리 많으시고 무한하셔도 무차별하게 그 혜택이 돌아가거나 불구자가 다 고침을 받은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에 참여한 자이지만 그 은혜를 받는 조건으로 믿음과 순종이 요구된다.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27절 ‘거기서’ 야이로의 집을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 메시야의 칭호 곧 그리스도를 가리킴. 이 소경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게 된 것은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이 아니고 얻어 들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귀로 들은 말대로 믿고 순종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 복된 신자들과 같다. 요20:29-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도마) 듣기만 하고 믿는 믿음은 증인을 신임하고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보지 못할지라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증거를 받아야 믿음에 이른다. 아무도 예수님을 보고 믿지 않고 보지 않았으나 보았던 사도들의 증거로 말미암아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이 불행한 사람들에게 재빨리 도움을 베풀지 않으셨다. 길거리레서 예수님께 소리질렀으나 들은 척도 안하시고 집 문앞에 다다를 때 까지 따라오게 하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소견을 묻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신앙을 말과 행동으로 시험하셨다.

  주님은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기다리시고 모른척 하실 때가 있다. 이런 때엔 인내와 확신을 가지고 끈질긴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한다.

  * “네 믿음대로 되라”(29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에 있어서 신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실을 볼 수 있다. 믿음 그것이 홀로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도구와 같은 것이다.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받는 손과 같다고 하였고 신앙은 하나님의 주신 은혜의 깊은 샘물을 길을 수 있는 두레박이라고도 하였다.

  30절 - 인간들은 선을 은밀히 쌓아두려고 하지 않지만 사람에게 보이려고 나타내시지 않는 것이 그의 행동원리였다. 왜 이렇게 엄히 경계하셨는지 잘모르지만 이유가 있으셨다. 그런데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의 소문을 온땅에 전파하였다. 이것을 보면 이 이적이 얼마나 놀라왔던가를 알 수 있고 또하나는 그들은 좋은 의도로 소문을 퍼뜨렸지만 주님의 부탁대로 순종하지 않고 어겼다. 동기는 경건하고 열심은 좋으나 주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것은 죄악이다. 이런 탈선적인 경건이 무사기 하기는 하지만 이로 인하여 복음 운동에 손해도 있다. 지식이 없는 경건이나 열심은 경계하여야 한다.

  37절 - 벙어리가 다 귀신들린 것은 아니나 이경우는 그 혀가 악령에 붙잡혀 말하지 못함. 이런 영광스러운 사실을 친히 보고도 소경된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고 한다. 메시야의 사역은 영적 소경과 벙어리를 회복하여 하나님을 뵙고 찬송하게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본다고 하나 사실은 소경이요 벙어리로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음.

 
 
 

        귀신들린 여자를 고치심 (눅13:10-17)

  이 기적도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특별히 자기 백성들을 사단의 매임에서 풀어주시는 주님으로 계시하신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때 사단을꺽고 그 세력에서 풀어놓아 주심으로서 시작하신다. 시작은 미미하나 하나님 나라가 점점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자기 백성들을 모든 원수의 세력에서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그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권능이 있으셔서 사단의 매임에서 자기 백성들을 풀어주신다.

  12절을 보면 이 여자가 요청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이 여자의 병은 귀신들려서 생긴 병이다. 18년동안이나 얽매어 있었던 여인을 네병에서 놓였다. 사단의 매임에서 해방시키는 능력이 자기 손에 있음을 권위 있게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기 위해서는 사단의 권세와 힘을 알아야 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말씀으로 쉽게 내쫒으심을 볼 때 얼마나 그 능력이 크신가를 알 수 있다. 마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세간을 늑탈하리라. 결박은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사단을 강한 자로 표현하셨다.

  출애굽에서 바로의 세력을 보라. 엡2:1-, 6:10- 정사, 권세, 어두움의 세상을 주관하는 자. 마12:28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귀신을 정복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

  눅13:18 “그러므로” 접속사로 앞의 내용과 연결. 하나님 나라가...  이것이 왜 겨자씨나 누룩과 같은가? 지금 불쌍한 한여인이 귀신들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을 사단의 매임에서 풀어주신 것은 미미하나 마침내 사단의 모든 세력에서 구원하실 것을 보이심. 특별히 소나 나귀를 비유해서 이 볼품없는 여인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외적으로 볼 때는 이렇게 무가치하게 보이는 여자이나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점이 안식일이지만 풀어주지 않을 수 없다.  회당장은 안식일 날이라고 병고치는 일을 직접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병고치는 일을 겨냥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딸을 사단의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다는 논리로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 한편손마른 사람을 고치신 일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합당한가 합당치 않는가? 안식일에 어떤 일이 옳고 합당한가? 병고치는 일, 구제, 선을 행하는 것, 부득이한 일. 이 여인의 경우 18년 동안이나 매여 있었으니 하루쯤 늦게 고쳐준들 문제가 아니었겠으나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돌보시는 일을 일초도 연기할 수 없다. 18년동안 매여 있는 것은 자기 백성을 불행에서 즉시 바꾸어 주시지는 않지만 18년이란 긴 기간을 절망하지 말아야 하며 때가 되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은 일초도 연기치 않으시고 급히 구원하여 주시는 주님이심을 볼 수 있다.

 
 
 

        열문둥이를 깨끗케 하심 (눅11:11-19)

  마8장에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전하여 준다. 누가는 유사한 기적이 열명의 문둥병자에게 행하여졌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가 전하여 주는 이야기의 목적은 단순한 문둥병을 고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만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구속역사에서 필요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이적이 그렇듯이 그리스도는 인생의 모든 죄와 죄의 결과로 부터 따라오는 모든 불행을 제거하시는 일을 크신 능력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행하시고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행위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은혜스러운 행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요 자유적이요,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자들은 마땅히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이 주님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특히 선민으로 자처하는 아홉 명의 유대인을 불치의 병인 문둥병을 은혜로 고쳐주셨으나 그 중에 한명도 감사하러 돌아오지 않았다. 그 중에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베푸신 은혜에 대하여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려 사례하였다. 여기에 유대인들의 그릇된 신관을 볼 수 있다. 오늘날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공급하시는 분으로 이해. 그래서 하나님을 내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하게 이용하려드는 사람이 많다. 병들면 고쳐주시기 바라고 고쳐주시면 그만이며 무엇이든지 없으면 달라고 요구하고 주시면 그것으로 끝난다. 이런 그릇된 신관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갈등을 가져오게 된다.

  인본주의 신앙이란 자기가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도 자신을 위한 필요한 도구로, 이용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자.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이용이나 당하시는 분이신가? 근본적인 이 사상을 바꾸어 놓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하심이다. 인생들에게 그 풍성한 선물을 값없이 은혜로 주심은 더많은 감사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은혜를  베푸시는 대도 감사할 둘 모르는 자들에게는 더큰 것을 주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더큰 것을 은혜로 주심은 더많은 감사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자에게는 더크고 귀한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 사마리아 사람은 병고침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까지 얻게 된 것이다. 이 사람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점에서 육신의 어떤 좋은 것을 얻은 것이 반드시 구원의 축복을 전한다고 생각 말자. 그것만 얻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자들이 많다. 하나님이 내병을 고쳐주셨으니 혹은 나에게 이런 좋은 것을 은혜로 주셨으니 나를 구원하심이라고 확신하다가 버림받을 수 있다. 육신의 좋은 것을 주셨으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을 위해서 바치고 사용할 때 구원받은 성도임이 확인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축복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사용할 때 본문에 나타난 아홉 사람과 같다.

  * 교만한 유대인들이 큰 은혜를 배은하고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사례하고 감사하여 구원받았다. 마8:11,12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나라의 본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창 병든 사람을 고치심 (눅14:1-6)

  이 이적의 경우 특별히 기억할만한 사실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다른 이적들에서 기록되었다. 다만 안식일에 대한 미신적 신앙에 대한 고쳐야할 점들을 에수님의 교훈을 통하여 찾아보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한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셨다. 그가 예수님을 초대했기 때문이다. 이 바리새인은 주님을 사랑으로 대접하기 위하여 초대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그는 보다 예수님을 가까이 보다 정확히 관찰해 보고자 의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창 병든 사람이 그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창 병든 사람이 우연히 식사 자리에 올 수 없었을 것이며 억지로 침입해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초대한 사람의 지위와 식사 자리의 성격이 그것을 용납치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이 고창 병든 사람을 데려다 놓아 예수님을 고소할 덪을 삼으려 했을 것이라는 해석을 밑밭침해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감지하시고 아셔서 3절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물으셨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경솔하게 아무 이적이라도 행하신다 거나 무슨 일이라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에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님을 정당화 하신다. 의사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병을 치료한다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을 도와주고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려는 한가지 의도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의 기술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치시는 것이니 정당하다는 주장은 아주 쉽다. 아들(어떤 사본에는 나귀)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안식일에 짐승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합당하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동일한 도움을 주는 것이 합당치 않겠는가?

  *주일날 갑자기 병이나 병원에 가는 것이나 약을 사먹는 것을 정죄할 것인가? 견딜만한데도 주일날 택하여 병원에 간다거나 약을 사먹는 것이 정당한가? 물에 빠져 죽어 가는데 안식일이라고 기다려야 하나? 화재가 났는데 주일이니 타라고 내버려 둬야하나? 사고로 생명이 위독한데 응급치료를 회피할 것인가? 대답은 자명하다. 안식일에 관한 율법은 자신들의 사적인 쉬라고 말한다. 그러나 율법은 그 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문자대로 어느 조항을 꼭꼭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마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않았을 것이라 말했다. 안식일 날 아무 일도 아니했을 지라도 왜그랬는가? 무슨 동기로, 무슨 목적으로 일하지 않았는가가 중요하다. 문자적으로 고집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 많겠는가? 얼마나 억지 같은 주장을 많이 할 것인가? 이런 미신적인 개념을 가져서는 안된다. 신앙생활은 조화와 자연스러움이 있어야 한다.

 
 
 

        중풍병자를 고치심 (마9:1-8, 눅5:17-26)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이적은 단순한 이적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보다 계시성이다. 그리고 오늘날 행하여지는 이적과 다른 점도 바로 이점이며 오늘의 이적은 기도의 응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병고치는 은사가 많은 사람도 누구나, 무슨 병이나 다고치는 것은 아니고 그런 은사가 없다고 해서 성도가 기도해도 도무지 하나님께서 병을 안고쳐주시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이적은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가장큰 목적이 있다.

  여기 나타난 이적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게시하는 큰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일반적인 교훈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고 유리의 유익을 위해서 이런 이적을 통해서 일반적인 교훈을 끌어내는 것 좋으나 우리의 시선이 순전히 병나은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그들에게 있었던 어떤 점들만 살피고 능력을 행하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가장 큰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一.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심을 계시하신다. 병자 일행의 마음 속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교권자들의 마음 속에 의논하는 악한 생각도 아셨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마음 속의 생각을 벌써 아시는 것은 그의 신성을 증명하는 무소부지의 성품이시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안다면 부끄러워 살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속마음을 아신다. 이것이 신구약성경에서 보여주는 진리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도 사람처럼 자신의 마음을 모를 줄 알고 위선하고 외식한다.

  二.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이심을 계시하신다. 서기관들은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들이 이 말씀을 하시는 이가 누구신줄 모르기 때문이다. 저들의 마음 속을 아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이 틀림없고 죄를 사할 수 있는 이도 하나님이심이 틀림없다. 하나님외에는 아무도 죄를 사할 수 없다. 에수님의 능력은 죄사함 주는 하나님이심을 입증한다. 에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도 대적하게 된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심으로 그리스도께 서 오신 목적은 이런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계시한다.

  *일반적 교훈 - 모든 주석가들 - 박윤선 - 저희 믿음 ① 예수님께서 그 병을 고쳐주실줄 아는 확실한 믿음 ②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한 믿음 ③ 모험한 믿음.

  리챠드 트렌취 - ① 장애물을 극복한 신앙 ② 어려움에 좌절되지 않은 신앙 ③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 ④ 믿음이 있는 자는 불쌍한 사람을 그리스도께 데려오는 일을 아무리 어려워도 감당한다.

  칼빈 - 저희 믿음 - 타인의 믿음이 어디까지 힘을 미치는가 - 아브라함 - 기도 - 조카 롯 구원. 우리의 믿음과 기도가 불신자들 회개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무효치 않다.

 
 
 

 혈루병든 여인을 고치심 (막5:25-34, 마9:20-22,눅8:43-48)

  이 이적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들어내는데 이적의 목적이 있다. 12년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 많은 의원을 찾아 다니며 치료해 보았고 그러다 보니 재산도 모두 탕진하여 더이상 치료책을 강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고 도리어 병증세가 더 중하여졌다. 이 불치의 병은 인간적인 수단, 의약, 의술로는 도무지 고칠 수가 없고, 노력할수록 더 많은 괴로움과 고통만 당하고 더 중하여져 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은 사람으로서 치료불가능한 불치의 병을 옷가에만 손을 대어도 고침을 받았다. 26절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욱 들어내기 위해서 복음서 기자가 기록하였다.

  주의할점은 오늘날도 무슨 병이 걸리면 병원, 의사, 약물치료는 아무 쓸데없고, 효험이 없고, 병만 더 중하여지고 괴로움 당하니 예수님만 믿으라고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는 자들이 있다. 간절한 신앙이 불치의 병을 고칠 수 있지만 불치의 병이 아닌 일반적인 모든 질병을 다른 방법의 치료를 거부하고 예수님 옷가만 만지려고 함은 잘못이다. 이점에서 우리가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을 할려고 노력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주님만 신뢰하고 의지하며 다른 방법도 궁극적으로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예) 죄, 구원 문제. 믿음으로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만 가능하다. 내가 처리해보려고 하면 할 수록 더 중한 자리에 빠지게 된다.

  지각없이 성자들을 흉내 낸답시고 놀아나는 미신의 횡포, 성경이 기록되었으니 이런 방법을 사용하자. 이런 특출한 사건을 하나님의 명령 없이 모방하려하는 자, 행19:11-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니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 병든 사람에게 얹은즉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감.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그리고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의 이름을 불러,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말하니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는 누구뇨하며 이들을 이김.

  이 여자의 행동에 잘못의 여지가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받아주시고 용서하여 주셨다. 이 여자가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루어진 모든 사실을 말한 것은 분명 잘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여자는 왜 그리스도께 직접 나서지 않았는가? 경외심 때문에 주저했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자비가 아닌 다른 무엇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은총을 받을 것을 확신하면서 누를 끼치지 않을까 겁을 먹고 있었는가?

  * 왜 예수님은 기어이 그를 찾으셨는가? 누가 손을 댔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말씀인가? 왕하5:25-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창3:9-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하심은 스스로 주님앞에 나오게 하셔서 주님과 접촉을 통하여 가장 좋은 축복을 주시고자 하심이다. 이 여자가 병고침을 받은 후 몰래 가버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님은 이 여자의 약한점, 잘못된 점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칭찬하셨다. 옷가에만 대도 고침 받을 줄 아는 믿음 . 우리의 믿음이 완전치 못해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도와 주시며 믿음을 더욱 크게 해주신다.

 
 
 

        벳세다 소경을 고치심 (막8:22-26)

  주님이 행하시는 일들은 어떤 일이든지 우발적인 것은 없다. 주님께서 눈먼 사람을 고치신 다른 예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이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할만한 특징을 갖고 있다. 주님은 눈을 떠라는 말씀 한마디로 즉시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의 손을 잡고 동네 밖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소경은 눈을 우러러 보며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고 대답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그 방법을 달리하실 때에는 그렇게 하시는데 대한 선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다른 어떤 곳에서 행하신 것보다 이곳에서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일을 점진적으로 고치신 것은 제자들의 상태와 오늘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깊은 교훈이 담겨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소경이 믿음이 없어서 한번의 완수로 완치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의 믿음 여하에 따라서 결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 소경은 사람들이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한 것 보아서 본인이 고침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거나 믿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점진적인 방법을 썼고 그 다음에 이 소경은 완전히 볼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할 경우 예수님의 능력의 약화와 우리 믿음 자체가 기적을 좌우하는 것으로 된다. 그보다는 예수님의 질문과 이 소경의 답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수님께서 이 소경이 만물을 밝히 보는 것을 모르실 리 없고 그러하다면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실 이유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소경의 대답을 유도하고 듣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 대답을 통하여 이 소경은 분명히 보는 사람이며 또 분명히 못 보는 사람임이 들어난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아직도 눈먼 사람이요 어떻게 보면 눈먼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이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의 상태가 이와 꼭같다고 말씀하신다. 5병이어로 5천명, 7병이어로 4천명. 12바구니, 일곱 광주리. 아직도 너희가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둔하냐? 떡한조각만 있음으로 염려하고 걱정하느냐? 어떻게 보면 알고 믿는 것 같으며 어떻게 보면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 대답하는 것 보면 잘안다. 하는 것 보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참 둔하다.

  오늘 우리의 상태도 그렇지 않은가? 말하는 것 보면 분명히 아는데 행하는 것 보면 분명히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하여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상태가 이런 과정을 겪는다. 낙심하지 말자.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 길어서는 안되겠다.

  예수님은 이 소경의 대답을 들으시고 즉시 고쳐주셨다. 그래서 만물을 밝히 보았다. 치료책은 주님의 물음에 솔직하고 정직해야 한다. 이 소경이 거짓 대답을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라 나무가 걸어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리석고 우스운 말이지만 자기의 현재 실상이 그렇기 때문에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 우리도 우리 상태에 대해 진실해야 되고 주님께 솔직한 대답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가? 내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진다. 물음을 외면 말고 직시하자. 절대적 정직함으로 대답하자. 주님은 가장 훌륭한 교사이시다. 사건으로, 실물로 가장 분명하게 제자들을 깨우치고 가르치신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 (막9:14-29)

  세 제자와 함께 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하여 황홀한 체험을 하는 동안 산 아래 남은 제자들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것은 벙어리 귀신들린 외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찾아온 아버지의 요구대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고 서기관들이 그런 제자들을 공격하여 큰무리 앞에서 비웃음을 받는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때마침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어 많은 무리가 둘러서 에워싸고 그 가운데서 변론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무엇을 서기관들과 변론하느냐고 물으셨다. 변론하는 당사자들인 서기관이나 제자들은 아무말도 대답하지 못했고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귀신들린 내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는데 선생님이 계시지 않아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셨다.

  * 여기 너희는 누구를 가르키는가? 예수님의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오리겐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 하였고 칼빈은 서기관들에게 하신 책망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아이의 아버지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이모든 무리를 다향하여 책망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서기관들은 그리스도의 큰 능력을 보여주었던 그 수다한 기적들을 악의적으로 제거하고 그들 눈앞에 놓여진 빛을 한사코 꺼버리려 하였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아이를 고쳐줌으로써 가진 능력을 보이라고 압력을 가했고 제자들은 이 아이를 고쳐보려고 힘썼으나 실패하였고 그리하여 서기관들은 승리자로서 기뻐하고 있었으며 제자들을 야유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멸하였다.

  그들은 패역한 자들이며 진리를 거스리는 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상태를 보시고 탄식하며 책망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의 아버지도 22절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 이는 그리스도를 어떤 선지자로서의 능력이 한정되어 있는 듯이 말하고 있다. 그의 칭호만 봐도.(선생님이여!)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책망. 또 자신이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했는데 그도 믿음이 없는 세대였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마17:20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그들의 믿음의 수준은 이처럼 형편없었다. 여기에 대한 탄식과 함께 그들의 불신과 거스리는 패역을 책망하신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무한하심을 계시하신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주님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모자라서 못하시는 것은 없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혹은 믿음이 부족하고 적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능력을 행사하지 않으시는 것 뿐이다. 빌4:13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님께로부터 풍성한 축복이 흘러오지 않는다면 이는 주님의 잘못이 아니며 우리의 좁은 신앙 때문이다. 우리가 충분한 믿음의 분량을 가진다면 다함이 없는 능력이 솟아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강하고 사나운 귀신이라도 제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시다. 우리가 믿고 순종한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제어하시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에게도 완전한 신앙이란 없다. 우리도 부분적으로 불신앙자들임에 틀림없다. 이 아이의 아버지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부르짖자. 사도들이 왜 귀신을 쫓는 능력을 상실하였나. 그들의 태만이 능력을 상실. 기도로써 일깨워야하고 금식이 주는 도움으로 기도를 계속, 능력 회복.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치심 (마15:21-28)

  이 이야기는 막7:24-30에도 기록되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고 하였고 마가는 두로 지경으로 가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태는 가나안 여자라고 하고 마가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하였다. 모든 이방인들을 헬라인이라 칭하던 때이기 때문이다. 마가는 더러운 귀신들린 딸이라 했고 마태는 흉악한 귀신들렸다고 했다. 이런 여자가 예수께서 두로 지경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딸이 흉악한 귀신들렸나이다하고 소리를 지르나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도 안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지르오니 보내소서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셨다. 이 여인도 예수님의 거절하시는 이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와 그발앞에 엎드려 절하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쫒아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옳다고 인정하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자녀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씀드리며 계속 구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고쳐주셨다.

  *복음서 기자들이 이방 여인인 이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고 들어내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이 여자의 큰 믿음을 들어내기 위하여 지금까진 취하신 행동을 정당화하실 수 있다. 이 기적과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어떤 방법으로 이방인들에게 흘러가기 시작했는지를 배우게 된다. 마10:5,6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방 여인을 받으심은 정한 때가 아니었으나 언젠가는 온 땅에 내리실 은혜의 소나기중 몇개의 첫방울로 계시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도움을 구하며 찾아오는 어떤 사람도 물리치지 않으시는 분이심이 계시된다. 처음에 대답치 않으시고 그의 간구를 거절하는 것 같은 말씀을 하셨으나 사실은 물리치며 거절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도 믿음을 가지고 나아오는 자들에게 은혜 베푸심을 더욱 들어내시기 위함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오는데 여러 가지 벽이 있었다. 이방 여인이란 점. 주께서도 개들로 비유하심. 자신도 그것을 시인함. 그래도 그는 낙심치 않고 나아가 간구하였다. 카토릭은 제자들이 “우리 뒤에서 소리지르오니 보내소서” 하였다고 중보자 교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탁으로 무엇을 들어주신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많은 장벽과 장애물이 있어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물리치거나 거절하지 않으신다. 문제는 스스로 나오지 않고 스스로 거절하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끈질긴 인내와 정당한 논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눅18장 과부의 소원에서 항상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심. 우리의 기도가 논리적으로 정당한가 살펴보자. 무엇을 구하는가? 왜 그것을 구하는가?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주심이 왜 정당한가? 말도 되지 않게 구하든지,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도 이런 것이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기도의 목적과 내용이 확실해야 하고 영적 논리, 성경적 논리로 정당한 것을 구하자. 인간의 상식적 논리가 아니고 신령한 논리로...  상식도 못 미치는 기도가 있다.

  *주님은 큰 믿음을 기뻐하신다. 주님만 의지하고 신뢰하며 모든 것 주님께 맡기는 믿음을 기뻐하신다. 이 여인의 큰 믿음을 들어내는 것은 주님께서 그런 믿음을 기뻐하심을 계시하신다.

 
 
 

        물고기 입에서 한세겔을 얻게하심 (마17:24-27)

  이 이적의 이적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온갖 시도가 있어왔다. 합리주의자 파울루스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요구된 액수를 낼만큼 고기를 잡아 팔도록 하셨다고 해석. 바클레이 주석을 보면 물고기 입에 한세겔이 있다손치더라도 낚시를 무느라고 입을 벌리는 순간 한세겔은 입에서 빠져나갔을 것이라고 하면서 잡은 물고기를 팔아서 세금을 내라는 것이었고 베드로가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적이다. 복음서 기자가 이것을 기록한 것은 평범한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고 이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해 기록하였다.

  반세겔은 관세나 정세가 아닌 성전세이다. 출30:11-16 20세 이상된 자가 드리는 세금이다. 이 세는 생명의 속전, 생명을 속하기 위한 속전으로 생명의 가치는 동일하기 때문에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동일하게 반세겔을 내게 하고 그것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님게서는 반세겔을 내지 않아도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셨다. 왜냐하면 반세겔은 생명을 속하기 위한 속전으로 성전 봉사를 위해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주실(막10:45)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속할 의무도 없고 도 성전의 원형이시며 성전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실체이신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난 성전을 위하여 반세겔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성전의 실체되신 그리스도께 헌상함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시고 스스로 결론을 즉 해답을 끌어내셨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그러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주님께서는 일반적인 세금을 거부하시는 것이 아니다. 마22: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그리스도는 가이사의 아들은 아니었다. 반세겔 내는 자들에게 베드로가 내신다고 바로 대답한 것은 예수님께서 평상시 일반적인 세금을 거부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주님은 성전세는 안내도 된다. 그것을 베드로에게 깨닫게 해준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신다. 자신이 그렇게 증거하고 주장하신다. 그 주장을 확실하게 증거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하신다. 다른 방법으로도 반세겔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기적을 행하심은 재미로 하신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주장이(하나님의 아들, 성자) 참되는 보증으로 기적을 행하신다. 보통 일반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하는 오해를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내지 않으면 그들이 오해하여 시비가 일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방해받을 필요가 없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로 전지성이 계시된다. 베드로가 밖에서 세금문제로 내신다하고 들어오니까 베드로가 말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물고기중 한세겔을 입에 물은 고기를 아셨다. 그리고 그 고기가 베드로의 낚시를 물게하고 잡게하셨다. 전지전능하신 이가 아니고야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오해받지 않기 위해 정당한 권리도 포기한다. 세례, 할례도. 주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정당한 권리도 포기하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고기를 많이 잡게하심 (요21:1-14)

  물고기를 잡는 기적은 눅5:4-10에도 한번 기록되었는데 거기서는 제자들을 택하시는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 놀라워하게하는 즉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의미가 있었다. 마17:24에서는 반세겔 받는 자들에게 반세겔을 내기 위해서 베드로의 낚시에 먼저 오르는 고기에서 한세겔을 얻게하심. 그리고 요21장에서는 많은 고기를 잡게하셨다.

  눅5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초기사역중 부활이전에 행하신 이적이고 요21장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마치고 부활하신 이후에 하신 기적이다. 어거스틴은 눅5장에서는 천국의 첫단계로 긁어 모으는 단계이며 요21장은 마지막 단계, 추수 단계라고 함. 오른편에서 좋은 것만 잡음 153마리. 아무튼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는데 목적이 있었고 베드로의 소명을 일깨워 주는 것과 관련하여 이 기적이 선행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입증하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7제자 가운데 나타나셨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그 중에 도마도 끼어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도마를 존경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의 외고집, 불신앙에 비례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이 더욱 확실하게 믿을만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임.

  7제자가 디베랴 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사명을 망각한 것으로 보기 보단 아직 사도들이 새로운 능력으로 덧입혀지기까지 직분을 행사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고 공적 임무가 없어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밤새도록 헛수고를 하도록 섭리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더욱 돋보이게 하시려는 뜻에서 이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잡았더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밤새도록 헛수고를 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가득히 고기를 잡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신자들을 이같은 방법으로 연단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축복을 깨닫게 하시려는 뜻에서 이다. 우리가 손대는 일마다 성공한다면 자신의 일의 보상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돌리려하지 않고 각자의 근면성만 떠들어 대면서 자화자찬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온갖 수고를 다하고 진땀을 흘렸어도 아무런 결과가 없다가 그후에 일이 잘되어갈 경우 자신들의 성공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칭송하게될 것이다. 밤새도록 헛수고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시고 없나이다란 대답을 들으시고 배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들이 첫그물을 던지기전에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그처럼 쉽게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나 장시간에 걸친 헛수고 끝에 지쳐있었으므로 그 말을 잘들었다. 그들이 밤새껏 헛수고한 일을 동이튼 후에도 계속했다는 것은 여간한 인내가 아닐 수 없다.

  우리도 하나님의 축복의 소지가 있으면 끝까지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당장 일의 성과가 없어 보인다 해서 손을 놓고 마는 것 보다 더무분별한 짓도 없다. 우리들의 수고가 결실을 맺지 못한다해서 우리의 소명이 싫증나게 느껴질 경우가 있겠지만 그럴 때 일수록 꾸준히 견인 분발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결국에 가서는 행복한 결말이 없지 않을 것인데 그것은 적당한 시기에 가서 오고야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량의 고기를 잡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찢어질 그물이 찢어지지 않게 하신 점에서 자신의 능력을 나타냈다.

  10절 생선을 좀 가져오라. 이미 숯불에 고기와 떡을 구워놓고 있으면서 요구. 그것으로 그들에게 되돌려 주신다.

 
 
 

        물고기를 많이 잡은 이적 (눅5:1-11)

  이 이적은(마4: 막1: ) 네제자를 부르시는 것과 관련되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이 네사람들이 장차 할일의 성질이 어떠한 것과 그 사역에 큰 성공이 있을 것을 고기 잡는 이적을 가지고 가장 인상깊도록 실물교수로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려고 여러 지역에서 쏟아져 들어오므로 약간 육지에서 거리를 두고 그리스도는 시몬의 배에 오르신다음 이 무리를 상대로 가르치셨으며 이 가르치는 일을 마치고 나서는 자신의 신령한 능력의 단면을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셨다.

  5절, 선생이여...  그리스도께서 한교사의 임무를 띠고 있음을 알고 존경했다. 밤이 맞도록 헛수고로 지쳐있었는데도 그리스도의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선지자나 하나님의 아들로 알기 전에 그처럼 재빠르게 그의 명령을 순종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는다하면서도 우리의 임무에 대한 수없는 명령을 받고도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는다면 망신을 당해야 마땅하다. 눅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행치 않느냐.

  6절, ①기적의 특수한 목적을 베드로와 그동료들로하여금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아 그에게 제자로 머물러있게 하는데 있다. ②이 사건의 일반적인 교훈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권위에 따라 시키시는 일에 손을 댈 때 우리의 수고와 하나님의 축복 내지는 기대하는 성과가 일치할까 그렇지 않을까 망설이지 말라는데 있다.

  8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끝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면 두려움에 질려 공포와 겁으로 기절하기 마련이요 하나님께서 안심시켜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임재는 너무도 놀라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즉시 우리자신을 허무한 것으로 느끼며 얼마나 악으로 뒤집어 씌워져있는가 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람은 죽은 자 같이 되며 자신의 악을 깨닫고 입을 가릴 뿐이며 자기를 발견케 된다. 자기를 아는 지식은 하나님 앞에 서있을 때 뿐이다.

  성경을 보라.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경악하는 것은 우리모두가 타고난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상냥하고 친절한 대답으로 베드로의 믿음을 새롭게 하시면서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르신다.

  10절, 신앙에로의 부르심에 대한 일반적인 부르심이 아니고 특별한 임무를 위한 특수한 부르심이다. 이 임무를 수행케 하시려고 자기 옆에 두고 특별히 가르치셨다. 막3:14.

  *아무나 불러놓고 자기 부모 처자를 버리고 원시적인 생활모습 그대로 맨발로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부탁하시지 않는다. 공적 임무를 맡은 사람은  개인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요청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배우지 못한 어부들을 선택하신 일을 하나의 실례로 고집해서는 안된다. 바울의 입을 통해 딤전 3:2 가르치기에 적합한 자들을 선택. 자기들의 무지를 자화자찬하며 자기들이 책을 더멀리 한다고 해서 사도들에게 다 가깝다고 여기는 이들은 미친자이다. 맨처음 초라한 자들을 선택하셨던 것은 배우지 못한 자들에게 하늘 문이 닫혀진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콧대를 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후에 가서 꾸준히 교육받은 바울을 선택하셨다.

  11절,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리스도의 부르시는 음성의 강력한 호소력 순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

 
 
 

        왕의 신하에게 베푼 이적 (요4:44-56)

  왕은 헤롯 안디바. 갈릴리와 베뢰아 영토를 지배. ‘신하’ 헤롯궁에서 일하는 신하. 그 집이 가버나움에 있었다.

  병든 아이의 아버지는 가버나움에서 가나로 간후에 적어도 두가지 과오를 범했다.

  ①예수님의 능력이 시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여 먼저 공간적으로 덜어져 있기 때문에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 가셔야 하겠다는 점. 마8:5-13의 백부장의 신앙에 비하면 아주 형편없는 믿음. 그러나 아주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예수님께 찾아와 간구하는 신앙을 가졌다.

  ②시간적으로 죽은 다음에는 예수님께서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49절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죽음 건너편에까지 뻗치시리라는 것에 확신감을 갖지 못했다. 히11장 아브라함 - 다시 살릴 줄 믿음.

  *기적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믿음을 자라나게 한다고 가르침.

  ③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믿음이 가장 낮은 단계에 있음.이런 왕의 신하를 이적을 통하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시고 믿지 않던 그 가정의 식구들까지 모두 믿게 하였다.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약속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 표적에 의한 확증을 원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요구에 친절히 응해주심도 사실이다. 사38:7,8; 왕하20:8-11 해그림자가 십도 물러나는 징조; 요20: 도마; 삿6:17-; 출4:1-8.

  그러나 유대인들은 표적에 너무나 마음을 빼앗겨 있었기 때문에 말씀에 관심이 없다. 오늘날도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기적을 보여주시오 그러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그러나 표적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하나님이 산더미 같은 많은 이적을 보여준다해도 외부적으론 놀라움을 표시하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적의 목적을 분명히 알자. 한가지 이적을 보고도 만가지 말씀을 믿어야 한다. 이적을 통하여 말씀이 진리인줄 믿고 그 믿음이 확신을 얻고 자라나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고도 불신과 불순종했다.

  50절 “네 아들이 살았다” 이 구절에서 주님게서 원했던 것을 다들어 주시지는 않지만 그가 구했던 것보다 더많은 것을 주셨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하나님은 매사에 우리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시지만 더놀라운 것을 주신다.

  51,52절 아들이 낮기 시작한 때를 믿은 것은 표적의 진상이 보다 명확히 들어나기를 바람이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능력의 빛을 꺼버리려는 극히 악의적인 소욕을 가지고 있고 마귀는 갖가지 술책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도록 기만한다. 표적이 아주 분명히 확인됨으로 의심의 여지가 근절 되어야 한다.

  53절 자기와 그 온 집이 다믿었다. 병나은 기적만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음. 첫째 표적은 자연계에 대한 절대 지배. 둘째 표적은 지역상 거리가 능력을 나타내심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계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자기 백성의 마음 속에 믿음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사용. ①이적을 행하는 단순한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②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③인격을 믿는신앙으로. 어떻게 예수님 말씀 한마디를 듣고 갔겠는가?

 
 
 

        나사로를 살리심 (요11:1-46)

  이 이적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끝무렵에 행하여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초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점점 폭넓게 교훈과 이적을 통하여 계시하셨다(막1:-2:). 이제 머지않아 친히 죽음을 맛보시고 지상사역을 끝내실 무렵에 자신을 가장 영광스럽게 계시하셨다. 즉 이이적은 부활과 생명의 주로서 사망의 정복자 되심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데 목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한오리쯤 되는 유대지방의 작은 마을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오빠 나사로의 가정에서 된 일인데 예수님께서 자주 들리신 집이요, 눅10:41,42, 막11:11, 마21:17, 요11:3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음을 볼 수 있다.

  나사로가 병들매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전하였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하려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들으시고도 게신 것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다. 11, 12절을 보면 나사로가 이미 죽을 줄을 아셨다. 15절을 보면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거기 계셨으면 나사로를 병에서 고쳐주실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능력과 기적을 제자들이 못 보았을 것이기 때문임.

  이와 같이 나사로의 병과 죽음은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주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주님의 뜻이다. 마르다나 마리아는 주님이 같이 계셨으면하고 바랬으나 그것은 주님의 뜻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 나사로가 병이나 점점 중해져 죽는 것이 그들에게는 무척 슬프고 괴로운 일이었으나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되게 하시고 바로 그것이 주님의 뜻이었다.

  주님이 알지못해서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여야 되거나 곁에 계시지 않아 못 고치고 죽게 버려둔 것은 아니다. (11-14절을 보라) 15절 제자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과 생명의 주되심을 보여주어 믿게하려 하심이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마르다가 먼저 나왔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23절에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네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 때는 다시 살 줄을 아나이다. 25절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부활이시다. 그러기에 예수님만 믿으면 죽어도 산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그러기에 살아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다. 이 죽음은 육체적 죽음. 생명은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육체의 죽음마저도 예수님을 믿는  신자의 진짜 생명은 끄지 못한다. 오히려 육체의 죽음은 소득이 된다. 영생의 기쁨 속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를 말로만 해서는 잘 이해도 못하고 믿지도 못한다. 이제 이것이 사실임을 보이시기 위해서 주님은 실제적인 기적을 행하신다.

  39절은 이 이적의 심히 큰 것을 들어내기 위함이다. 4절의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은 40,41절의 나사로를 살리는 일이다. 기도하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은 자가 순종하여 나오는데 베로 동인 채 얼굴은 수건에 싸인 채 나옴.

  전능하심과 주님이 무엇하러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가를 보여 주셨다.

 
 
 

        각색병을 고치심 (눅4:38-44) 

  이 이야기는 마8:14-18과 막1:29-39에도 기록되어 있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심을 기록하고 마가는 특히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기록하였다. 마태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손을 만지셔서 고치셨고 마가와 누가는 사람들이 그 일로 예수께 구하여 고치신 것으로 기록하였으며 마태는 손을 만지시니 곧 일어났고 마가는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갔으며 누가는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갔다.

  눅4:40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들을 데려오매 일일이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 손도 얹으시고 병을 꾸짖으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누가는 중한 열병이라고 설명. 의사로서 병에 대하여 정확히 관찰.

  복음서 기자들이 이 기적을 강조해서 기록한 것은 이 기적이 다른 기적들과 특별히 구별된다거나 더 기억할만한 사건이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사역의 성격을 계시하기 위함이다.

  인류의 전체 역사 가운데 극히 짧은 시간에 전체 인류 가운데서 극히 적은 소수의 사람과 접촉하시면서 그들의 각색병을 고쳐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저주와 재앙을 제거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보이신 것이다. 이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권능이 무한하신 분으로서 그가 세우시는 나라는 능력의 나라가 될 것임을 보이신다. 결국 이런 병을 고치시는 일들도 다 구속이라는 큰 계시에 가지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였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

  사53장은 대속사상이 강한 내용. 죄의 결과로서 병, 슬픔, 고통을 제거하심을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이것은 일시적인 축복이 아니다. 영원한 영적 축복을 말해 준다. 눈먼 자에게 빛을 주신 것은 자신을 이 세상의 빛으로써, 죽은 자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신 것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모든 질병과 불구자들을 고치신 것은 이런 재앙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구주이심을 계시한다.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통하여 이런 것이 조금 나타났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히 제거될 것을 배울 수 있다. 주님은 그만한 능력이 있으시다. 사35:1- 우리가 영화롭게되어 그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으며 모든 원수의 세력을 짓밟고 영원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고치시는 방식은 다양하다. 주님은 말씀만 하셔도, 고개만 끄떡하셔도 되나 꾸짖었다고 할 때는 이런 질병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하나님 나라와 모순되는 실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과시하며 배후의 조종자를 굴복시키는 행위이시며 손을 얹으심은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귀신이 말하는 것 허락지 않으셨다. 자신의 증인으로 삼지 않으심.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막11:12-14, 20-24; 마21:18-22)

  이 이적은 고난주간의 월요일에 행하신 이적이다. 그리스도의 엄숙한 입성과 유월절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밤에는 베다니에서 지냈으나 낮에는 성전에 오셔서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들어오시면서 시장끼를 느끼시고 무화과 나무 있는 곳으로 다가서지만 거기에는 잎만 무성할 뿐 아무것도 열린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를 저주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 저주의 음성을 들은 나무는 곧 시들어 말라 버렸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양면을 본다. 시장기를 느끼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다. 그러나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을 때 곧 그 나무가 마른 것은 전능하신 창조주의 품격을 계시한다. 우리주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신비하게 한 인격안에 사람도 되시고 또 하나님도 되시는 분이심을 계시하여 준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난문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나무에서 열매를 그것도 열매가 맺는 시기도 아닌 때에 열매를 구하고 찾으셨는가? 열매 맺는 때가 아님을 모르셨단 말인가?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문줄 모르셨단 말인가? 그럴리야 없지 않은가? 또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없는 나무에게 도덕적 책임을 부여하여 분노하신 것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를 모르셨거나 열매가 없음을 모르셔서 접근하시고 저주하신 것이 아니고 고의적으로 특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리하셨다. “퓰러”는 많은 비유를 말씀하신 자가 여기서는 하나의 비유를 행하셨다고 하였다. 즉 유대인들의 그릇됨을 폭로하며 제자들을 교훈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나무를 통하여 위선자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상징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그들의 허식의 무의미와 무효성을 폭로하고 있다. 실행이 없고 외식만 일삼는 유대인을 상징적으로 책망하심이다. 이 나무는 아직 때도 아닌데 잎이 무성했다. 무화과 나무는 열매가 맺힌 후에야 잎이 무성한 법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기도 전에 열매없이 잎만 푸르렀다. 그것은 외식의 상징이다. 열매가 없으면서 열매가 있는 듯이 모양을 나타냄이다. 성전 안에도 없어야할 것만 무성했다. 그들이 그런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있어야 할 것도 소유했어야 했다.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열매를 요구하신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절단된다. 요15장. 라오디게아- 주님을 문밖에 세워둠.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안에 거해야 절로 과실을 맺는다. 주님과 유기적 연합이 없는 종교적 열매는 주님이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주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의 발휘로 맺는 열매를 하나님이 구하신다. 이런 것 아니면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라오디게아)

  *제자들에게는 믿음의 기도는 무엇이나 이룰 수 있다. 산같이 꽉막힌 중에서도 뚫고 나갈 수 있다.

 
 
 

        말고의 귀를 낫게하심 (눅22:47-51)

  선생님을 위하여 싸우려는 한제자의 일격이 네복음서에 다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제자의 칼에 맞아 떨어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낫게하신 기적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 이적은 독특하게 외부의 폭력으로 다친 것을 고쳐주신 이적이다. 누가와 마태와 마가 3제자들은 이렇게 칼로 내리쳐 말고의 귀를 떨어뜨린 자가 누구인지 침묵하고 있고 귀를 다친 대제사장의 종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 있지만 요18:10에서 사도요한이 그가 베드로라는 것과 귀를 다친 자가 말고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위한 충정과 열심으로(다른 제자들도 검으로 치리이까? 물음) 칼을 빼들고 덤볐으나 그들은 주님의 책망을 들었다. 마26:52 네검을 도로 꽂으라.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력이나 폭력으로 성취하시지 않는다.(마호멧교는 한손에 코란과 한손에 칼을 들고)  뿐만 아니라 어떤 목적을(그것이 선한 것이라도) 위해서라도 무력적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해방신학이나 혁명신학을 주장하여 폭력으로 혁신하려는 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보복은 보복을 가져와 마침내는 다망하게 된다. 악순환이 계속된다. 마26:53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도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줄 아느냐. 즉 내가 힘이 없어서 이들에게 붙잡히는 줄 아느냐? 이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막강한 천사들의 힘을 어느 때라도 사용할 수 있었으나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죄인을 구하려고 취하신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명확하게 계시하셨다.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열두 영도 더되는 천사에 관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마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요18:11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제자들의 이런 열심과 행동은 성경이 그렇게 되리라고 예언한 예언 성취를 자기들의 힘으로 막아보려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리하여 이것까지 참으라 눅22;에 말씀하시고 제자들의 무모한 행동을 막으셨다. 그리고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친 교훈을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마5:4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6:27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23:34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박는 원수들에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과 인자하심을 볼 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 (요6:1- )

  이 이적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다. 마14:15-21, 막6:34-44, 눅9:12-17, 요20:30을 근거로 이 기적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시는 의미가 있다. 다행히 그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았다. 요6:14-15. 그런 점으로 이 표적을 행하신 목적이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이 지식을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 적용하였다. 즉 억지로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왕은 사람들이 세울 자유가 없다. 시2:6내가 나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아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는가?그들은 지상 왕국을 상상했다. 어설픈 지식은 이런 우매와 위험이 따른다.

  *그들이 어떻게 이 이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신줄 알았을까? 단순한 표적이나 능력 때문이었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적인 메시야관 때문이다. 굶주릴 때 먹여주시는 즉 메시야가 오시면 부요하게 하실 것이라는 신앙 때문이다. 어디서 이런 근거를 가졌나? 14절을 보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신18:15-18, 시78:24, 출16:4-  여기에 근거하여 요6:31- .

  사도 요한의 특징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것을 생략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기적을 기록함은 6:26- 에서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도입으로 이 기적을 취급하고 있다. 이 설교 가운데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내린 참떡 또는 하나님의 떡,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이 바로 자신임을 주장하셨다. 35절을 보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떡으로서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찢기실 자신의 살이라 말씀하시고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한다고, 즉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고 죽은 만나와 같지않고 영원히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영혼의 양식, 생명을 공급하고 유지케하는 생명의 양식임을 계시하셨다. 우리 육신의 생명이 떡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그러나 떡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마4:4). 결국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으로만 살게 된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6:33).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마16:7-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막6:51,52 떡 떼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라.

  *마15;32  살기 위해서 양식이 필요. 양식(먹고 마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품는가? 그러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 눅12장 어리석은 부자.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먹여주셨다. 무엇을 먹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먹는가가 중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심 (요9:1- ) 

  주님은 이 사람이 태어난 이유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다. 어떤 사람은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이 한가지를 위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소경으로 있게 되었다. 우리도 수많은 일을 하고 산더미 같은 크고 굉장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우리를 통해서 혹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원하시는가 참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게 해야 한다. 행9:10-18 ‘아나니아’ 사울의 회심에 쓰임. 왕하9:1- 선지자의 생도중 하나.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노라.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무엇임을 계시하신다. 대부분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한 계시를 찾았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혹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또는 그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 가를 찾아보았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이 기적을 통하여 볼 수 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심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소경된 인생들에게 빛을 주어 보게하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태양이 우리의 눈에 지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과 하늘및 전 자연의 질서를 보게하여 주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서 그의 사역의 최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계시의 절정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다. 그리스도는 의로운 태양이시며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참빛이시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게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다. 실로암 못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이 가능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방식을 통해서 여러 가지 진리를 끌어낼 수 있는 일이 가능하나 우리는 방식에 생각을 두지 말자. 다만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하셨으며 누가 이 일을 하셨으며 무슨 목적인가를 찾아보자.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일이며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일을 하셨고 목적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계시이다. 주님은 이것을 보여주는 일을 위해서 오셨다. 그러므로 주님 자신이(성육신이) 최고의 계시이다. 히1:1- .

  요9:39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며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본다 보지 못한다 하는 것은 육안으로 세상 사물을 보고 못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해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보게하는 일이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진리에 대해서, 계시에 대해서 소경임을 깨닫고 겸손히 구하는 자들에게 보게 해 주심이다. 마11:25 그때에 예수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옵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요9:40- 바리새인 - 우리도 소경인가 -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보는 자”는 스스로 보는 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보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계시를 주시며 또 자신이 계시 자체이시나 스스로 자신들 속에 빛이 있다고 생각하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 빛을 즉 그리스도의 계시를 알지 못하고 암매 가운데 있게 되고 선천적으로, 애초부터, 날 때부터 소경 되어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주님의 계시를 바라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비추셔서 저들의 영안을 밝히시고 보게하신다. 이것을 들어내는 기적이다.

 
 
 

        한편 손마른 사람을 고치심 (눅6:6-11)

  이 기적도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었다. 마12:9-13, 막3:1-5. 이 이적은 안식일에 고치심으로서 주님의 대적들에게 가장 큰 반대와 악의를 불러 일으켰다. 다른 이적 가운데서도 안식일에 고치심으로 그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 기적은 특별히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 이삭을 잘라 먹음으로서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있었고 또 다른 안식일 날에 이 기적을 행한 것을 앞의 내용과 앞의 내용과 연결하여 기록한 것은 안식일 문제가 논란의 핵심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앞에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고 성전보다 더 큰이로서 구약성전의 원형이심을 보이시고 다윗과 제사장들을 실례로 들어 안식일 날도 그들이 일했을지라도 범한 것이 아님을 보임으로 제자들이 주님을 위하여 일하다가 시장하여 안식일 날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 범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신23:25.

  바리새인들은 악한 생각으로 안식일에 병고치는가 엿보았다. 눅, 막. 마태는 그들이 질문하고, 누가는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받아 다시 그들에게 질문하시고 고치셨음을 보인다. 마태는 양 한마리 비유 -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으나 마가와 누가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묻고 그들이 잠잠하니 - 마음의 완악함을 아시고 근심하고 노하심으로 고치셨다. 이것은 단순히 안식일 문제만이 아니고 율법에 대한 바리새인의 해석과 견해 혹은 적용이 잘못되어 있음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심이다. 즉 율법을 내신 이가 그 원리를 보여주심이다.

  창2:1-3 - 타락 전에 세우신 언약.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 창조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다 마친 날. 하나님께서 창조를 끝마치시고 쉬신 날.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복 주신 날.

  신5:12-15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다고 하신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원하신 표증으로 안식일을 지키라 하심.

  출20:8-11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나 제칠일은 아무일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창조를 마치시고 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쉬어야 한다.

  출31:12- 13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구속케하는 하나님, 너희를 구원하는 하나님) 나와 너 사이에 대대의 표징. 16절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음.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 나 여호와가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라.

  겔20:10-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이것을 목적으로 안식일 법을 줌. 20절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 하였었노라.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의 표이듯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표증이다. 안식일을 왜 지켜야 하는가? 왜 일을 않고 쉬어야 하는가? 어떻게 지키는 것이 정당한가? 안식일을 범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벌이 무섭다. 죽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그들을 영원한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멸절시키신다. 벌받을 것이 무서워서 지키는가? 하나님을 알고 그 마음을 헤아려 왜 안식일을 주셨고 자기 백성에게 지키라 명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바리새인들처럼 지키는 방법에만 신경 써서 어느 정도 지킬 것인가.

 
 
 

        사귀들린 자를 고치심 (막5:1-20)

  먼저 사귀들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도덕적 악과 부패를 상징 ②육체적, 정신적 질병, 정신 이상 상태. 그러나 사귀들린다는 것은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악한 사단이 사람의 몸과 정신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주관하는 것. 미친 사람이 아니라 사귀들린 자다. 그러면 사귀들리는 일이 오늘 날에도 생기는가? 의사와 선교사 - 같은 경우가 있다고 하기도하고 다른 연구가들은 그리스도 시대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성을 파괴하는 파괴적 세력은 오늘 날도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식욕, 색욕, 음주, 탐욕, 격정, 분노, 방탕등. 사람의 의지를 사로잡아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나와 부정과 죽음의 무서운 곳으로 몰아낸다.

  본문 마8:28 귀신들린 자 둘- 막, 눅은 하나 - 어거스틴, 둘중 더 악독한 고통의 잔학성이 더 뛰어난 이 불행한 자가 기적의 주체가 된 것. (법과 공권력으로 제어 불가능)

  *이 이적의 목적도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뛰어남을 증거. 그래서 덜 악화된 사람을 제외. 3절 아무나 쇠사슬로도...  사람의 타고난 힘으로는 쇠고랑을 끊을 수 없다. 사단으로부터 이상한 힘이 주어져서 힘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세진 것이다. 쇠사슬과 쇠고랑을 깨버리고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었고. 마태는 아무도 그 길로 지날 수 없게 할만큼 힘이 세다고 말하였다. 밤낮 무덤 사이나 산에서 소리지르며 돌로 제몸을 상하고, 누가는 옷을 입고 있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사귀를 쫓아냈을 때 옷을 입고... 옷입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단에게 사로잡힌,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비참과 무서움을 그려놓고 있다. 얼마나 흉하고 얼마나 끔직하고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이며 또 그의 생긴 모습과 사단이 제공하는 가공할만한 힘으로 폭력적인 사나움을 볼 때 얼마나 무서운가?

  *폭력적인 힘 - 사나와 그 길로 지날 수 없게 함. 온전한 사람이 볼 때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가? 그러나 자신의 가련한 상태를 모르는데 큰 불행이 있다. 자신의 상태를 바로보고 바로 알면 소망이 있다. 계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사회적 : 민생치안, 부동산 투기-경제사범. 환경오염-과소비-향락-제어할 힘을 능가.

  개인적 : 이기주의, 마약, 음주. 자신과 타인을 파멸시키는 것을 억제할 억지력을 상실. 고장난 브레이크. 길고 급한 경사로를 질주하는 것 같은. 이것이다. 어두움과 악의 지배아래 있는 인생모습.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운줄 모르고 자해를 하면서 아픈줄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니 멀리서 달려와 절하며 부르짖는다. 귀신이 기쁨으로 예수님께 절하는 것 아니다. 이것은 사귀들의 자발적인 치사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숨은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시무시한 사단은 더큰 그리스도의 능력앞에 굴복하고만 것이다. 이점이 이 이적의 크라이막스다. 사단의 전체왕국은 그리스도의 명령아래 있다. 귀신들의 고백과 부르짖음은 원망과 불평의 부르짖음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피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연계를 지배하실 뿐만 아니라, 질병을 고칠 뿐만 아니라 영계, 영적 실존도 지배하시는 분임을 계시하신다. (그리스도의 임재-정신온전-옷입고)

  *이 이적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였으며 또 그리스도를 두려워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 이적을 보고 그리스도를 믿고 경배하며 영광을 돌려야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나가고 싶어 한다. 이적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믿음을 자라게 하고 확신을 주나 다른 사람들에겐 더 강퍅하게한다.

  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을까? 돼지를 상실해서. 재산상 피해 때문에- 한 사람이 사단으로부터 구원 받은 것은 싫어하고 재산을 잃은 것이 원인. 행16장 점하는 귀신들린 여인. 주인들이 이익이 끊어진 것 때문에 사도를 잡아 결박하고 때림. 어두움이 빛과 함께 있을 수 없어서- 죄가운데 있는 자들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주님을 용납할 수 없다. 두려워 멀리 있고 싶어 한다.

  *이들의 간구와 사단의 간구가 다 응답되었으나 그것은 그들에게 저주이다. 기도가 구한대로 응답되는 것이 다 유익하고 복된 일은 아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마8:5-13, 눅7:1-10)

  마태와 누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태는 백부장이 그리스도에게 나온 것으로, 누가는 유대인 장로 몇을 보낸 것으로. 누가는 오시는 도중에 벗들을 보내어 말을 전함. 마태는 백부장의 요구로 이루어진 일을 백부장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그릇되지 않고 올바른 처신이다. 누가는 역사가답게 이루어진 일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눅1:1-4, 누가복음 서문.

  이 이적의 큰 목적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중에서 탁월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과 그로 말미암아 신앙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천국백성이 되어서 하늘나라에 앉게 된다는 점과 오히려 이스라엘이 천국에서 쫒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야 되는 것이 아니고 이방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 것이다. 이 백부장처럼 믿으면 동서로 부터 많은 사람이 구원에 참여. 여기에 구원의 보편성. 믿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여기서도 고침 받은 종보다는 종을 위한 주인인 백부장의 사랑과 믿음과 간구가 돋보인다. 대부분 종들은 큰 대우를 받지 못하는게 관습인데 눅7:2에서 사랑하는 종이라 함. 노예를 위해서 이렇게 간절하게 예수님께 간구하고 유대인 장로들과 벗들을 동원하여 병으로 괴로워하는 종을 위하여 쏟는 정성은 대단하다.

  유대인 장로들의 말.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 이방인을 멸시하는 유대인의 선민의식 속에서도 지배자로서 피지배 민족을 사랑한 것. 회당을 짓는 것도 그들을 사랑함 때문이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아니면 이런 일은 불가능란 일이었다. 눅7:3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소문만 듣고도 이런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 예수님께 대한 그의 지식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그의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소문을 듣고이다. 그 소문이 그릇되거나 과장되었다면 그것을 믿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는 사실보다 약화시키면 어떠하겠는가? 전하는 자가 얼마나 사실을 정확하게, 진실하게 전해야 할 것인가를 배우자. 우리 하나님을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백부장처럼 바로 알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고 있는가? 소문을 전하여준 사람의 인격을 백부장은 신임하고 신뢰하였기에 예수님을 그렇게 바로 알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사실을 그는 알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렇게 겸손할 수가 있었다. 사람이라면 고급장교의 집에 모시기에 부족하겠는가? 사람이라면 자연계나 질병을 향하여 명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시공간 초월. 이렇게 말씀만 의뢰하는 경건한 신앙.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지만 우리는 큰 교훈으로 삼자.

 
 
 

가버나움 회당의 사귀들린 자를 고치심 (막1:23-27, 눅4:33-36) 

  이 이적은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시는 중 일어난 이적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보통 교훈적인 의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에 권세가 있어 듣는 이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셨다. ‘막’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의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눅’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 이러라.

  *여기에 나타난 이적은 주님의 말씀이 권세 있음을 증시하는 하나의 표적이다. 여기서 이적의 또하나의 중요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말씀이 뒤따르는 표적을 인하여 증시되는 것이다. 주님과 사도들의 경우에서. 이적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조역으로, 부수적인 도구로 필요성을 가진다. 그러니 병을 고치고 이적을 행하면서 복음 진리를 명확히 증거치 못하면 해를 가져오게 되고 또 사람들이 이적주의로 빠져서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데도 그것은 주의하며 귀 기울이지 않고 이적만 추구하고 나가면 아무 유익이 없다.

  어떤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 이적을 행했다면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종임을 인정하고 그를 통하여 증거되는 진리 즉 복음이 모두 참인줄 알고 가르침과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쉬운 것은 이적을 추구하고 따라다니는 성도들 가운데서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진리에 대해 어두워 아무것도 모르며 이적만 보려고 열심하는 자들이다.

  박윤선박사 - 이적은 희적이다. 그 이유는 이적은 많이 나타나지 않도록 된 것이 그 성격이기 때문이다. 이적이 많아지면 그것은 일종의 예사로운 일이 되어지고 경이를 일으키는 이적으로서 작용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권능으로 병을 고치셨으나 그 병고치는 일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나타나게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적을 남용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그는 이적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는 딴 생각을 가진 자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적은 주로 사람이 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을 고치셨다.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을 기도로 고쳤다면 이적이라기 보다는 기도 응답이다. 이것은 창조적 이적이 아니고 섭리적 이적이다. 하나님의 특별간섭이지만 다소 시간을 잡아 점차로 회복됨.

  *이 이적을 통한 교훈은 사귀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이를 받아드리시지 않는 주님의 태도에 있다. (행16:16-18의 바울의 경우)  사귀가 이같은 증거를 한 동기는 진리 자체가 거짓의 영에게서 증언을 얻음으로서 의혹과 불신을 얻도록 기대하고 주님은 꾸짖었다. 잠잠하라고. 마귀가 예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할 목적은 없다. ‘경련을 일으키고’ 눅, 넘어 뜨리고. 마귀가 나가는 과정이 난폭하다. 그러나 상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교훈이 권세 있음을 입증. 귀신이 명하매 순종하였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막5:21,22,35-43)

  공관복음 - 차이점 - 마태는 야이로란 이름을 밝히지 않으나 마가와 누가는 밝히고 있다. 또 마태는 자기 딸이 죽었다는 것으로 기록했으나 마가와 누가는 죽어 가는 위험한 지경에 있으며 그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는 도중에 그 아이가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다른 두 기자는 보다더 상세하게 사건을 기록하고 마태는 간략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야이로는 죽어 가는 딸을 두고 인간의 도움은 어떠한 것이라도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예수님 앞에 나와 절하고 - 하나님으로 경외한 것이 아니고 -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드리는 존경심.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 이방인 백부장의 경우보다 약한 믿음. 백부장의 탁월한 믿음은 주님께서 이스라엘가운데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 그렇게 급하면 말씀으로 살려 주시기를 구할 것인데 가는 시간에 조급해 안절부절하며, 오셔서 손을 얹으소서. 손을 얹어야 살 줄 아는 믿음. 이슬방울 같은 믿음.

  *그러나 주님은 아무리 작은 믿음이지만 많이 간구함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우리도 바라는 만큼 우리 신앙이 완전치 못해도 연약함 때문에 주저 앉거나 하나님의 도움을 포기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36절, 죽음을 알린 사자의 말을 듣고 실망한 것은 주님께서 직접 오셔서 병을 고쳐주시기만을 간구한 때문이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가 실망과 두려움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에게 소망과 믿음의 격려를 위한 말씀. 죽음도 은헤의 진로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없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우리의 믿음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 누가복음은 한 사람이 와서 - 한 사람이 전갈을 맡고 다른 이들이 따라왔다. 이들은 예수님이 꺼져가는 목숨의 마지막 불꽃을 붙일 수 있다고 믿으면서 죽은 다음에는 다시 살릴 수 있음을 믿는 강한 믿음은 없었다.

  37절, 세제자와 부모만 이 이적을 보고 증인이 될 수 있었고 따라온 다른 사람들은 시체로 놓여진 소녀에게 생명과 활기를 넣어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보여줌으로 족했다. 왜 허락치 않았나? 사람이 많아 이적을 행하시는데 소란을 원치 않으셨는가? 아니면 이 이적은 너무도 이상하고 신비로워 세제자외에는 기적의 증인이 될 자격이 없었는가?

  눅8:52, 복음서 기자들이 울며 헌화하며 통곡하는 것을 기록한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려는 뜻에서 이다. 피리부는 것도 죽었을 경우에 있었던 관습. 예수님께서 이 아이가 잔다했다해서 죽지 않고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요11장 나사로의 경우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죽은 것을 잠들다로 표현. 장차 우리 부활에 대한 좋은 시사이다.

  *울며 헌화하는 이들을 몰아내셨다. 주님은 슬픔과 비참, 불행을 몰아내시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공급하신다. 죽음을 몰아내시고 생명을 주신다. 이 이적은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관하시고 부활의 주님으로, 생명을 공급하시는 주님으로 계시. 얼마나 놀라운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 소문을 금지시킨 이유는 주님의 사역에 심각한 방해. 그리고 때가되지 않아서.

 
 
 

        풍랑을 잔잔케하신 이적 (막4:35-41)

  모든 이적이 목적이 있듯 이 이적도 예외는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의 목적이 자신의 신적 능력을 보여 주시므로 자기를 계시하며 택하신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자라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 이적이야말로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게 하시는 가장 훌륭한 이적이며 이로 인하여 제자들의 신앙이 한층더 자라게 하시는 중요한 이적임을 알 수 있다.

  *주님 자신이 신비한 인격을 보여준다. 피곤하여 기진맥진한 그래서 깊이 잠들어 계신 인성의 연약성을 보여주시고 (제자들은 주님게서 깨실까봐 조심하며 모시고 갈려고 했다) 그 무서운 광풍을 말씀으로 잔잔케하시는 신적 능력을 보이셔서 예수님께서 신성과 인성의 양성을 소유하셨음을 알게 된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았지만 그리스도의 새로운 면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우리도 주님을 아는 지식이 어떤 이적을 통해서 더깊어지고 자라나게 되는데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난 이적이 아닐지라도 성경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이적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더깊이 알게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더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과거도 현재도 미래에도 없고 다만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를 배워가는 것이다.

  그 다음 제자들의 믿음에 대한 문제를 취급하여 주신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신앙의 대상을 아는 것과 신앙과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아주 없다고 하시지 않았다. 마8:26,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8: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을 어디다 두었느냐. 왜 가진 믿음을 행사하지 않느냐? 제자들은 배가 뒤집힐 풍랑앞에 두려워하고 죽음의 공포속에 무서워 떨었다. 우리도 안 그렇겠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그런 공포와 두려움이 어떤 정당성도 갖지 못했다고 말씀하신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신뢰하지 않는구나.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데도 두려워하다니. 그러나 말만하고 구원치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이적을 행할 때 주님의 말씀이 확신 있게 들림.  책망부터 하지 않으시고 이적을 행하시고 그후에 책망하심. 믿음은 위기를 만나야 그 진위를 알 수 있다. 제자들은 믿음믿음이 있는줄 알았으나 위기를 만나니 믿음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발견.

  *신앙의 본질을 가르치심. 신앙이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나가는 것이지 내가 주님을 모시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광풍, 위기가 올 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란 자동판매기 식으로 저절로 만사형통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행사해야한다. 믿음을 어디다 두었느냐 ?

  일반적 교훈 ①주님을 모시고 가도 어려움이 온다는 점. ②풍랑가운데도 주무시는 주님. ③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배타지 않는 우리에겐 해당되지 않는가. 죽음의 그늘이 뒤덮이는 위험. 삶의 광풍

  기독교인도 동일한 세상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폭풍우를 허락, 위태함에 빠짐을 허락-기독교인의 생활이 마술적인 개념을 소유해서는 안된다.

  *믿음은 상황에 지배당하지 말아야 하며 믿음은 공포에 대한 일종의 거부이며 믿음은 불신앙을 맥못추게 억누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믿고 있으며 어떤 지경에 놓여있으며 주님께 능치못할 일이 있는가? 주님이 우리를 죽도록 내버려 두시겠는가? 이것이 신앙이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눅7:11-17)

  나인성은 나사렛에서 동남방 5마일 지점. 다볼산에서 남쪽으로 2마일 지점. 작은 동리로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버나움에서 하룻길쯤 되는 작은 허몬산 기슭에 있는 동네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고 그후에 제자들과 많은 무리가 따르는 가운데 나인이란 성에 이르셨다.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였다. 그 성의 많은 사람도 장례행렬과 함께 따라나왔다. 독자를 잃은 과부의 슬픔은 비통함이었고 따라나오는 많은 사람들도 슬픈 마음들이었다. 렘6:26, 독자를 잃음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지어다. 슬픔의 극치를 표현할 때 독자를 잃은 것으로 표현한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을 향하여 일어나라 명하심으로 죽은 자를 살려서 어미에게 주었다. 이 이적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하신 이적이다. 이 기적은 겉으로 보기에는 우연한 것 같이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 기적은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행하시기도 하셨지만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행하신적도 많다. 막1:40-문둥병자의 부르짖음. 민망히 여기사 고치심. 마20:29-여리고에 떠나 갈 때에 소경들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34절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사. 마14:13-5병2어 기적.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병인을 고치심.

  그리스도께서 이 청년을 일으키신 이유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신약과 구약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마9:13, 주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산더미 같은 제물보다 더 값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의식적인 제사행위가 의미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 대한 종교의식은 열심이나 불쌍한 형제에 대하여 자비와 긍휼이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레22:28,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라. 레22:26,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칠일동안 어미와 같이 있게하라. 팔일 이후로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면 열납되리라. 출23:19, 염소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라함은 하나님의 속성이 자비하심을 계시한다. 하나님이 자비하시니 그 백성들도 자비해야 한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18:21, 또한 우리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비참하고 슬픔의 자리에 떨어졌을 때에 낙심하지 말고 자비하신 주님께 부르짖자. 그런 때야말로 주님의 구원을 받을 가장 적절한 때이다.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이심을 다른 사건을  통해서 더 살펴보자. 눅10장 선한 사마리아 사람-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애3:19-낙심중에도 소망이 있음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슬픈 자 있는가, 고통당하는 자 있는가, 상심한 자 있는가? 모든 원인을 치료하사 기쁨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주님께 나아가자. 과부의 아들을 살려 어미에게 도로 줄 때 얼마나 기뻤겠는가? 기독교 신앙은 진정제나 흥분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해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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