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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도 시리즈 모음
제자의 도 ①
그리스도의 제자
마가복음 8장 27절 - 9장 1절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본문은 누가복음 14장 25 - 33절과 병행구입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인의 수가 천 만명, 혹은 천 오백 만 명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실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오늘 교회에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은 있으나 사랑이 없고 평화를 찾으나 의가 없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결국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사람, 열심은 있으나 희생이 없는 사람, 쌓아 놓은 것은 오직 바벨탑뿐인 사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거짓과 위선으로 할 뿐입니다.
1.누가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마태복음 28장 19 - 20절은 그리스도의 대명령입니다. 위의 말씀에서 “제자를 삼으라”가 본동사이고 나머지는 조동사입니다. 그러니까 오는 것도 제자를 삼기 위해서이고 세례를 주는 것도 제자를 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제자가 되는 것은 물론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제자’라는 명사가 264회가 나와 있고 동사형으로 나온 제자는 25회 나와 있습니다. 제자 중에는 바리새인의 제자도 있고 율법의 제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온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부름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자신의 인격과 예수님 자체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처럼 “주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게 되고 순종하며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인격적 교제를 하면서 그리스도를 닮게 되며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셨다면 우리는 행동과 사고와 가치관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이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요 1:37).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순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주님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 후에 그들은 예수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세상을 떠나야 하고 악을 떠나야 하며 무엇보다 자신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을 좇아야 합니다.
2.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져야 할 자세
(1)자기를 부인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기를 철저히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눅 14:26)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우선으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경우와 나를 사랑해야 할 경우가 대립이 될 때에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2)자기 십자가를 지라
십자가는 거절, 멸시, 천대, 억울함, 고난, 오해, 슬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 때문에 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눅 14:27).
예수님의 제자는 억울하고 멸시받고 천대를 받으며 죽음에 이르게 되더라도 그 모든 일들을 사랑으로 감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며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주님의 참 제자가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순종하도록 하며 회개하도록 하며 마침내는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몇 가지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는 먼저 섬기는 종이 됩니다. 이것은 그가 섬기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주님과 항상 함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삶을 삽니다. 그는 주님이 말씀하시면 전혀 의심하지 않고 단순한 마음으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참 제자는 고난으로 부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3.그리스도의 제자가 치러야 할 대가
그리스도의 제자는 지난 죄를 용서받고 현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며 미래에는 천국을 보장받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것을 위해 지불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망대를 세우는 자가 먼저 자기의 가진 것을 살펴보듯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자기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자의 도 2
그리스도의 동역자
빌립보서 2장 17 - 24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독처하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더불어 살고 더불어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동안 혼자 대속의 사역을 이루지 않으시고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그들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도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의 도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동역자로 바울과 디모데를 대표적인 인물로 들고 있습니다.
1. 바울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동역자라고 말하며 자신을 전제로 드리겠다고 했습니다(빌 2:17). 전제란 이방 종교의 제사법에서 나온 단어로 이방 사람들은 제물을 바칠 때 붓는 술을 말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이와 같은 제사의 방법을 알고있었습니다. 동물을 죽여서 단 위에 놓고 제물로 드릴 때 제물에 불을 붙이는데 거기에 술을 부으므로 술이 증발되면서 동물을 불사르는 것이 더욱 빨라지므로 제사를 완성시키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근심하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자신이 전제로 드리게 되더라도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봉사를 높이 칭찬하면서 그들이 드린 제물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은 희생 제물이 된다고 해도 그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본체는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분입니다. 바울 역시 전제로 제물 위에 부음을 입으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본받기 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희생의 제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희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희생은 자신의 노력과 인내와 양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희생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가능합니다. 가인과 아간은 불순종한 사람이었고 사울은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결국 불순종하는 사람과 교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도 되지 못하고 그를 따를 수도 없게 됩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제물 위에 전제로 부음을 받는 희생의 사람, 겸손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참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2. 디모데
바울에게는 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바울는 특별히 디모데를 사랑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의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만난 청년 디모데는 바울과 부자관계 같았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생각이 같고 목표와 방향과 뜻이 같았습니다(20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하고 복종하는 자세를 가진 것처럼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것을 보았습니다. 겸손과 복종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에 가장 기초가 되는 덕성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진실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둔 채 골짜기를 헤매는 목자의 심정이 바로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의 동역자는 항상 양의 형편을 알고 그에게 위로를 주어야 합니다(19절). 디모데는 다른 사람을 이렇게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고 살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동역자가 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일을 먼저 구했습니다(21절). 그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산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의 자신의 삶에 우선권 선정을 잘 해야 합니다.
디모데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22절). 타인과 더불어 협력하여 일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각각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각각 다른 은사가 함쳐져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일을 이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내가 아니라 더불어 일하는 우리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다른 사람과 협력하여 더불어 일합니다. 자기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자기의 뜻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성숙한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협력하기 위해서는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하고 깨끗하게 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기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협력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부자처럼 친밀한 관계였으나 수평관계를 가지고 더불어 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대차이가 있었으므로 갈등도 있었겠으나 복음을 위하여 함께 더불어 일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자신을 버릴 수도 있고 양보할 수도 있으며 깨끗하게 질 줄도 압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에게만 붙여지는 대명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동역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고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구원 사역과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겸손과 순종의 도리를 다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자의 도 ③
영적 전투
에베소서 6장 10 - 20절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여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
우리 모두는 영적 전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영적 전투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1.영적으로 강건해야(10절)
그리스도의 제자는 영적으로 강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강건하다는 것은 병들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영적으로 시들지 않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강건한 사람은 주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주 안에서 살고 기도하며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또 영적으로 강건한 사람은 주의 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 중에 하나님 앞에 나와 앉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창세 전에 택함을 받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온 것도 정치가가 정치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덕택입니다.
심고 물을 주는 이가 각각 달라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기업이 번영을 이루고 자녀들이 창대케 되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곧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능력입니다.
2.적을 알아야(11절)
우리는 싸우기 전에 먼저 싸움의 대상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원수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전쟁에 나가서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사단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죽이려고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합니다. 복음은 옥토에 떨어져야 열매를 맺게 됩니다. 돌짝밭이나 가시밭, 혹은 길가에 뿌려지게 되면 새가 와서 쪼아먹거나 싹이 나기도 전에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마귀는 복음이 바로 이런 곳에 뿌려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 보다 힘이 세고 지혜가 높습니다. 그러나 마귀도 그리스도 예수만은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안에서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환난이 오고 손해가 와도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 안에서, 주님의 힘으로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십니다. 마귀가 아무리 간사하고 힘이 세도 예수님께는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힘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힘으로 마귀를 대적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됩니다.
3. 그리스도를 닮아야(12절)
제자는 선생님을 모방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주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고 그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원수를 대적할 때 혈과 육의 방법을 사용하면 안됩니다. 혈과 육을 사용하는 싸움은 목적이 어떤 것이든지 방법론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통치자란 세상을 주관하는 악마 사탄을 말합니다. 우리의 대적자는 이와 같은 악의 영들입니다.
4. 전신갑주를 취해야(13절)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진리를 말하며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진실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각각 크고 작은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큰 능력이 아니라 진실함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무장을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모든 일이 형통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진실함이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의의 호심경’(14절)을 붙이고 진실 되게 살아야 하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15절) 신을 신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화의 행동을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을 고쳐보겠다고 권면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고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를 위하여 기도할 뿐입니다. 평안의 복음이 그를 확실하게 고칠 것입니다.
5. 성령의 검을 가지고 기도에 힘써야(14 - 18절)
성령의 검은 우리의 골수를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16 - 17절).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씀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해야 합니다(18절).
기도의 내용을 영어로 사도행전(ACTS) 첫 자를 따라서 말합니다. 즉 Adoration(찬양), Confession(고백), Thanksgiving(감사), Supplication(간구)가 그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로 그리스도의 뜻을 이땅에 이루기 원하는 사람은 깨어 기도하되 무엇보다 성도를 위하여 쉼 없이 간구를 해야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19 - 20절)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19 - 20절).
그리스도의 제자는 항상 기도하되 성도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었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검을 갖고 그 위에 기도로 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창세기 12장 1 - 9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같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아브라함은 위대한 신앙 인물입니다. 사도 바울, 다윗, 모세 등 신앙의 장부들도 한결같이 고백하기를 자신들의 믿음이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1.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아브라함
창세기 17장 4절은 아브라함을 열국의 조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와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이스마엘을 낳았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조상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오늘날에 와서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의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구원의 수단이 되는 하나님의 의가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적용이 된 것입니다(창 15:6).
아브라함은 메시아의 조상이 되기도 합니다(마 1:1, 눅 1:73).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응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결코 선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쩌면 그 자신도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태에 잉태되기 전,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택하셨습니다(신 7:7 - 8).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이며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 임한 것입니다(사 51:2).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신앙보다 앞서 있는 것입니다(요 6:65).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다음에는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는 아멘으로 대답하고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능력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2.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에게 아무 믿음이 없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불러주시고 축복하시겠다고 언약을 주셨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서 각각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을 때 그는 하란에서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시 그를 불러 가나안까지 가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약점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누구든지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신앙을 적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 대로 행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단순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꾸 따지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이 없이 믿는 것이고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증거를 주셨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방법대로 오늘도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고 소망이 없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낙심할 때에 두 번째 불러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자꾸만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믿지 못하면 이 세상을 살 수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큰 것입니다(요일 5:9).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그가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따라 부르심에 응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의 약속은 다 우리의 것이 됩니다.
3. 연약할 때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또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하란에서 머물고 있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시간 낭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또 한 번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다윗도 어느 순간에 간음을 하고 살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시 부르시어 성군 다윗이 되게 하셨습니다. 요나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도망을 하여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두 번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께 열 번, 혹은 스무 번 부름을 받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자를 반드시 불러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양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고도 하나님의 명령하신 바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부르신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항거하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마을의 다락방장으로, 전도인으로, 그리스도의 증거자로 보내소서”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입니다.
제자의 도 ⑤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
고린도후서 8장 1 - 5절, 9장 6 - 15절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 ”
구약 유대인들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 1년에 3차례씩 하나님 앞에 올라가 제물을 바치는 예식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출 34:20). 우리는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먼저 자신을 바치고 예물을 바치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바친 것을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 잘못된 헌금관
열납되지 않는 헌금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명예욕과 이기심에 근거한 헌금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밭을 팔아 그 일부를 바쳤습니다. 이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이에게 보이려고 사도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명예와 칭찬을 위해 위선의 헌금을 바치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자금 확보를 위한 헌금은 잘못된 것입니다. 혹 교회 건축 헌금을 위해 부흥회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흥회는 영적 부흥을 위한 것입니다.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나서 헌금을 작정하게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셋째, 헌금과 신앙을 동일시 하는 헌금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헌금으로 믿음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넷째, 기복사상에 근거한 헌금은 잘못된 것입니다. 복 받기 위해 드리는 헌금은 동기가 불순한 헌금입니다.
다섯째, 의무감으로 드리는 헌금은 잘못된 것입니다. 직분 때문에 희생이 없이 드리는 헌금은 바람직한 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여섯째, 잘못된 헌금 개발법이 있습니다. 이른바 소원 헌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없는 잘못된 헌금 제도입니다. 물론 그것이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바친 것이라면 얼마든지 좋습니다. 또 야곱이 팥죽을 만들어 바쳐 장자권을 얻었듯 별미헌금을 바치라는 경우나 특별 감사헌금이라는 이름으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헌금 제도입니다.
일곱째, 잘못 집행된 헌금관이 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사용해야 합니다.
2. 헌금의 기초
헌금의 기초는 십일조입니다. 어떤 것이 십일조입니까?
첫째, 감사 십일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 10분의 1을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바쳤습니다. 이것은 감사의 십일조입니다.
둘째, 자비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제사장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구제를 위해서도 십일조를 썼습니다(신14:28,29 ; 26:12).
셋째, 종교적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성전 관리를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민18:21, 26).
또,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해 십일조를 바치라고 합니다(신14:23).
십일조는 구약의 제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입니다(눅 18:12 , 마23:23, 눅11:42).
십일조는 감사와 긍휼과 하나님 경외의 뜻으로 드리는 자기 헌신의 표시입니다(말3:10) .
3.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
우리는 어떤 제물을 어떻게 바쳐야 합니까?
첫째, 모든 것은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고후9:7). 이 작정은 믿음의 분량대로 하는 것입니다. 준비없는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말 1:7)
둘째, 자기 소득에서 얼마를 바칠 것인가 하는 기준은 “힘대로 하라”(고후 8:3)입니다. 신자의 기본 신앙의 표현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힘대로 못한 사람은 도적질한 것입니다(말3:8). 또 십일조와 헌물은 구별이 됩니다. 감사 헌물과 예배 헌물은 다른 것입니다.
셋째, 힘에 지나도록 하라(고후 8:3)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바치기 위해 더 일하고 힘에 지나는 일을 많이 해야 교회가 바로 세워집니다.
넷째, 헌금은 자원하는 심령으로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 고 합니다(고후 9:7). 인색함 즉 근심하면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헌금은 자원하는 심령으로 해야 합니다. 즐겨내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에게 드릴 때는 가장 좋은 것으로 바쳐야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께 자신을 먼저 드리고 물질을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에 앞서 우리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이 풍성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삼상 15:22).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의 헌금이 받으실 만하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우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고후 9:13). 헌금은 자기가 복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구제할 때에는 자기 이름을 내기보다 교회를 통해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 이 헌금은 놀라운 축복이 되고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귀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헌금은 은혜받은 사람이 합니다. 주는 것이 바로 심는 것입니다(고후 9:6). 하나를 심어 백을 얻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원리이며 축복입니다. 이 복을 누리고 늘 간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과 헌신을 다하는 하나님의 청지기, 그리스도의 제자가 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자의 도 ⑥
모범적인 가정을 세우는 사람
사도행전 21장 7 - 14절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훌륭한 가정은 좋은 사회와 아름다운 국가와 은혜스러운 교회의 기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과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는 불신자 보다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 제자는 모범적인 가정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과의 관계를 여러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한 가정으로부터 좋은 것을 취하기만 하고 가정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기여 하지 못하여 마치 기생충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둘째로 가정과 경쟁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셋째로, 가정과 교회가 상호의존적이며 서로 협력하여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가정, 가정을 든든히 하는 교회로서 이상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빌립의 가정을 통하여 우리들의 가정과 교회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모범적인 가정을 본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정
세상에는 자기의 의무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가정이 있는가 하면 의무에 충실한 것으로 만족하는 인색한 가정이 있고, 주어진 책임보다 훨씬 많은 봉사와 헌신과 희생을 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빌립은 집사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하였을 뿐 아니라 전도하는 일에도 전력하였고 다른 사람의 짐까지 져 줄 수 있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복음 전하는 일에 전심으로 봉사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가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의 집에 들어가 쉼을 얻고 복음을 전했습니다(8절). 빌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정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자신의 가정만을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가정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집사의 본질은 헌금관리 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 8절에는 빌립을 집사로 명명하지 않고 전도자라고 했습니다. 빌립은 전도를 많이 하여 집사의 책임보다 더 많은 것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시고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마다 기본적으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자녀를 잘 양육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나아가 마땅한 의무 이상의 높은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 가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자녀 양육에 성공한 가정
빌립의 집에는 네 딸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예언하는 자였습니다(9절).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결혼도 하지 않고 성직에 자신을 바친 빌립의 자녀들은 후일에 소아시아의 히에라볼리로 이주하여 초대교회의 중요한 인물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손에게 명예나 권력을 물려주고자 하는 것이 인생의 바램이요, 자녀에게 신앙을 계대해 주는 일에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빌립의 가정은 자손들에게 영적인 위대한 유산을 남겨준 본을 보였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즐겁게 해 주려는 노력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앙을 자손들에게 바르게 전수시켜주는 일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이를 위한 뜨거운 기도와 노력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모범적인 가정은 자녀에게 믿음을 바로 계대해 주는 가정입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5).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신만 헌신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온 가족이 함께 바쳐지는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집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와 다른 사람을 돌볼 자격이 없습니다.
3. 이웃에게 봉사하는 가정
빌립의 가정은 신앙적으로 이방인이 없는 믿음의 가정이요, 봉사에는 방관자가 없는 복음을 실천하는 일꾼의 가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핍박으로 유랑자처럼 피신해 다니는 수많은 믿음의 길손들의 피난처요 쉼을 얻을 수 있는 안식처였습니다. 저들의 빌립의 집에 거하는 동안에는 합심하여 기도했고 영과 육에 새 힘을 충전받아 새출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내 집만을 위하지 않고 할 수 있는대로 남을 공궤하되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더해야 합니다(갈6:10).남에게 봉사하려면 먼저 봉사할 마음과 신앙적 자세,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과 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은 있으나 힘이 없거나, 힘은 있지만 마음이 없다면 남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로서 영적 사역의 기초가 되는 곳이요, 복음에 합당한 인격을 수련하는 장이요, 복음 전도의 중요한 현장입니다.
우리의 모든 가정마다 빌립의 가정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진리이신 성경말씀에 기초를 두고 형제를 사랑하되 특히 믿음의 권속을 서로 돌아보면서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민족사회, 아름다은 지구촌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의도 7
하나님께서 “No”라고 대답하실 때
사무엘하 7장 18 - 29절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셨사오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지도자는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일을 생각하고 결정하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Yes’라고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No’라고 응답하십니다.
다윗 왕은 성전 짓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기도에 하나님의 긍정적인 응답을 받은 사람도 많이 있지만 부정적인 응답을 받은 사람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1.부정적인 응답을 받는 기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믿지도 않으면서 구하는 기도는 물리치십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믿음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라 할지라도 마음에 죄를 간직한 채 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물리치십니다(사 59:1 -2). 죄는 담이 되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품은 채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시 66:18). 죄를 그대로 둔 채 아무리 기도하고 금식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약 4:3).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구한 대로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은 무엇을 구하든지 그대로 받습니다.
2.다윗의 기도
다윗의 기도는 불신앙의 기도도 아니요 그 마음에 죄를 품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에게는 성전을 지으려는 순수한 동기가 있었고 바른 목표가 세워졌었고 영적인 상태는 최고에 달했었습니다.
다윗은 주위의 원수를 무찌르고 궁에서 평안히 거할 때에 성전을 짓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삼하 7:1). 이것은 책임 있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각을 어리석게 여기셨습니다. 다윗이 책임 있는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다윗은 또 깨끗한 기도를 했습니다. 궁궐을 확장하고 군대를 확장시킬 일을 걱정해야 할 그가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삼하 7:2)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영성이 있는 기도였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가서 하나님의 전을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신 12:10 - 12). 다윗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바 모세가 하지 못한 일을 자기가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와 같이 책임이 있고 깨끗하며 영성이 있는 기도를 했습니다만 하나님은 ‘No’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다윗의 기도가 거절당한 이유
다윗은 하나님께서 성전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역사하시는데 미물만도 못한 인간이 무엇을 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삼 7:7 - 8).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나 의지적인 결단이 없이도 당신이 원하시는 바는 반드시 이루십니다. 다윗의 결심과 동기가 아무리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못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리 열심을 내고 정성을 다해도 하나님 일은 이룰 수 없습니다(요 15:5).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밧세바와 더불어 간음을 했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다고 했으나 그가 성전을 건축하지 못함은 피 흘린 죄값 때문이었습니다(대상 22:7 - 8).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용사로 승리를 거듭하던 다윗에게 모든 목숨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이 단순히 전쟁을 하여 피를 많이 흘린 것은 성전 건축을 하는데 부적합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가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이유는 악한 일을 하다가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에 ‘No’라고 하신 것은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겠다고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삼하 7:11, 13, 16).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견고하게 세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셨습니다(삼하 7:12). 만일 다윗이 성전을 세우고 후손이 망하게 되면 그 성전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이 주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바른 것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No’라고 대답하실 때에는 더 크고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개인적인 것이 되도록 하나님의 언약을 찾는 기도를 쉼 없이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높은 신앙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자의 도 ⑧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
마가복음 11:12 - 25절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성경에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 항상 좋은 결과를 생각합니다만 본문에서의 기적은 오히려 저주가 일어난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줄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도 나타냅니다.
1.위선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나무 가운데는 열매가 없는 것도 있고 열매를 맺지 않고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도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고 위선, 거짓, 외식을 나타냈기 때문에 저주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잎사귀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었다가 베다니로 가셔서 쉬시고 그 다음날 길거리에서 본 무화과나무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때가 유월절이 가까운 때라고 했으니 4월경이 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본래 6,7월경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보신 때는 열매를 맺기에는 아직 이른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때에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저주를 하셨습니다.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무화과는 잎사귀가 나기 전에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잎사귀가 있다는 말은 이미 열매가 맺혔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만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그 나무에 저주를 내리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마치 열매가 있는 듯한 잎사귀가 예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사람 가운데도 이와 같이 안과 겉이 다른 표리부동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먹으면서 약대는 통째로 삼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구제하고 금식하고 기도도 한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과 같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라고 칭하는 네가… ” 라고 하면서 저들을 저주하며 저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롬 2:17 이하).
선을 가장한 위선자, 악을 감춘 외식자들이 이 세상에 득실거릴 때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내리신 것처럼 이 사회에도 저주를 내리실 것입니다.
2.유명무실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사람이나 물건은 모두 자기의 이름 값을 해야 합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어야 하고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는 나무는 하나님의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름은 그럴듯한데 이름에 걸맞는 열매가 없다면 그 사람 또한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또한 자기의 자리 값을 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길가에 심기어져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자리에 어울리는 기대와 약속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민족, 국가, 사회, 가정, 교회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있는 자리의 자리 값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분한 자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로서 주어진 사명에 죽도록 충성하지 못한 것을 크게 회개해야 합니다. 충신은 항상 자신의 불충을 생각하지만 간신은 항상 자신이 충성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3.신앙의 능력과 기도의 능력
예수님의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는 뿌리로부터 말라서 죽어버렸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묻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며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믿고 기도하면 응답하시리라는 것은 누구나 논리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3절). 비록 자기에게 손해가 온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착실히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죄는 그대로 마음에 두고 아무리 큰 소리로 기도를 해봐야 하나님은 그 기도를 물리치십니다(사 1:15).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회개한 자의 깨끗한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따라서 하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사람의 안일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오늘도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를 할 때 산이 뽑혀서 바다에 던져지는 기적도 일어나게 됩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진실해야 합니다. 이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은 찾고 계십니다. 위선자는 득세하는 것 같으나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외식자는 무화과나무처럼 기적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유명무실한 자는 결국 밖에 던지어져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름에 합당한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구한 대로 받고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제자의 도 ⑨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에베소서 4장 1 - 3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질서와 조화가 있는 삶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질서와 조화가 있다는 것은 우주라는 개념과 같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혼돈한 사회 속에서 질서와 조화가 있는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창세기 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질서와 조화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인데 이것은 물질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영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과다한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균형 잡힌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소위 건강하다는 것은 균형이 잡힌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 점은 예외가 아닙니다.
정통 교리를 말하면서 바른 생활이 따르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정통이 됩니다. 또 생활은 강조하면서 교리가 흐트러져 있다면 그것은 부패한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에는 항상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1. 빛과 생명으로 부르심
우리에게는 무엇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광명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는 이와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진리로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고도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았던 어두움의 자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하나님은 광명으로 끌어내셨습니다.
빛의 세계로 오면 진리를 보게 되고 분별력을 갖게 되며 무엇보다 영생의 길을 찾게 되고 깨달아 구할 것을 구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므로 바른 예배를 드리게 되며 마땅히 해야 할 섬김의 도리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르셨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 - 5).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새 생명을 가진 중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부르심에 합당한 열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란 자기 위치에 부합한 가치 있는 삶을 말합니다. 성도는 성도의 이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절로 3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다섯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모습은,
첫째, ‘모든 겸손’의 모습입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로마인은 용기를, 영국 사람들은 신사의 도를, 프랑스 사람들은 미를 각각 자랑했습니다만 성도가 자랑해야 할 것은 ‘모든 겸손’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겸손은 기독교인의 제일 가는 덕성입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의 삼대 덕성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합니다. 사탄은 교만하다가 하나님 앞에 쫓겨난 존재입니다. 세상의 크고 작은 사람들이 실패한 대부분의 이유는 교만이었습니다.
둘째, ‘온유’의 모습입니다. 온유란 하나님께는 기쁘게 순종하고 이웃에게는 구원의 유익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했습니다(민 12:3).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기를 비난한 미리암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이와 같은 온유한 품성이 하나님의 일꾼이 가져야 할 품성입니다.
셋째 ‘오래 참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인내의 덕성을 배웁니다. 찌르는 가시가 있고 원통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끝까지 참는 사람이 오래 참는 사람입니다. 오래 참음은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가져야 할 마땅한 품성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고 계십니다.
넷째,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은 기독교인의 모든 덕성의 총체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불평 없이 참는 일도 사랑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사랑은 고통의 의미를 알게 하며 지혜도 갖게 됩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 됩니다. 교회는 죄인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어야 합니다.
다섯째, ‘연합’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연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합하지 않는 사람은 21세기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다른 성도와 교회와 연합을 잘 해야 합니다. 성도는 평안의 매는 줄로 화평을 이룰 때 피차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불의와 타협하고 악과 야합하라는 것이 아니고 진리 안에서 화평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유형과 무형 자산이 있습니다. 유형 자산이 물질이나 건강이라면 보이지 아니하는 신앙과 덕성이 무형 자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무형 자산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성도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과 화평을 이루는 무형 자산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무형 자산을 소유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자의 도 ⑩
영적 성숙
에베소서 4장 11 - 16절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로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각각 다른 직임으로 부르셨는데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와 성도는 교회를 세우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라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편지 역할을 감당하고 그리스도 분량에까지 자라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분량만큼 자란 사람이 성숙한 신자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1.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각각 다르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각각으로 두지 말고 그러한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맺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16절).
에베소서 2장 4 - 5절에는 일곱 가지로 성도가 하나 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지켜나가야 하며 이와 같은 노력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신자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하고 연합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21세기의 지도자는 연합하고 단결시키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이며 사람을 많이 모을 수 있는 사람은 실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가 하나가 되는 방법은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과 그를 아는 것입니다(13절). 본문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앞으로 얻어져야 할 일치를 말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교회가 영적 성숙을 이루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13절의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개인적 응답이며 아는 것은 하나님 자녀가 믿는 내용을 말씀합니다. 믿음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내용, 곧 믿음의 도를 말한다면 아는 것은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얻어진 그리스도의 경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적 신앙 내용이나 그를 만나는 인격적인 교제에서 성숙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함께 나오는 것이며 이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성숙하게 자라고, 성숙하게 자란 사람은 연합하는 일에 하나가 됩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연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연합해야 하는 이유는 불신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한 건물에 서너 개의 교회들이 함께 있다면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익한 일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연합해야 하며 개교회들도 각각 연합해야 합니다.
2.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란다는 것(15절)은 그리스도의 체험적 지식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와 인격적 교제를 통해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받게 됩니다.
이것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요구하십니다(갈 5:22 이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이른 성숙한 신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우리 각자가 성장해 나가야 할 방향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어두움의 자식들이 살고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 모든 개교회들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고 있는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우리 교회를 통해 주님의 성숙한 성품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교회의 일꾼으로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3.영적 성숙은 진리 안에 있어야 한다
성숙하지 못한 성도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14절). 어린 아이는 한 가지 장난감을 가지고 오래 놀지 않습니다. 계속 새로운 것을 찾고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또 어린 아이는 잘 속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어린 아이 속성은 성숙하지 못한 성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은 주님의 일꾼으로 합당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와 선지자와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를 언급할 때 분명하게 성숙한 신자를 요구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는 사랑 안에 있어야 하며 성숙한 교회는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 안에서 진리로 행동할 것을 말씀합니다(15절). 진리 없이는 교회가 교회일 수 없고, 사랑 없이는 교회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성숙한 성도는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몸 되신 교회를 온전히 이루고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할 수 있는 그 날까지 끊임없이 성장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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