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가기 |
전도 설교 요4:4~24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는 일이 흔히들 인륜지대사라고들 합니다. 인생 사는 데 있어서 큰 일이라는 의미죠. 그래서 결혼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참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혼을 하고 나서는 죽어서도 시집 사람이 되어야 하고 친정에는 좋은 일이 있을 때만 오라고 옛 어르신들은 조언해 주셨습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네 어머니들은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모릅니다. 시댁 식구들의 비위 맞추고 남편 내조하다 보면 속앓이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 여러분은 며느리 밥풀 꽃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동네에서 효자로 소문이 난 아들이 장가를 가게 되었는데 시어머니 마음에 아들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자꾸들어서 며느리를 쫓아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나 봅니다. 그러다가 며느리가 부엌에서 밥을 짓다가 뜸이 들었는지 보려고 주걱의 밥풀을 먹는 순간, 시어머니가 어른 먼저 드시기 해야지 버릇없이 며느리 먼저 먹는다며 몽둥이를 들어 두들기는 바람에 그만 며느리는 입가에 밥풀이 묻은 채로 죽고 말았고 후에 무덤에서 밥풀 모양의 꽃이 피는 식물을 며느리 밥풀 꽃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합니다.
자이언트와 젊은이의 양지로 일약 세계 스타가 되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기억하십니까?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그의 미모와 명성만큼이나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그녀는 7번의 이혼과 8번의 결혼으로 그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7번의 이혼과 8번의 결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삶 속에 진정한 만족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얻으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면 정말 행복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오히려 더 원하게 되고 더 많이 하고 싶은 일이 생기나 봅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8번이나 결혼을 했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보다는 좀 나은 편입니다. 왜냐하면 8번을 결혼해도 누구 하나 경멸의 눈빛으로 보거나 더럽다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유명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산다고 부러움 아닌 부러움을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5번의 결혼에 지금은 동거하는 하고 있는 상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녀가 살던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간음죄로 걸리면 재판 없이 그 자리에서 돌로 맞아 죽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5번의 결혼과 5번의 이혼을 한 이 여인은 남편과 사별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남편이 사별한 경우와 아내의 간음으로 인해 남편이 이혼 증서를 써주면 그걸로 이혼이 성립이 되는데 이 여인의 경우는 이혼 증서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즉 버림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이야 여성도 사회 생활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경제 생활을 할 수 있지만 이 시대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남편이 없는 여인의 삶은 그야 말로 구차하기 이를 때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눈입니다. 헨리 제임스의 주홍글씨라는 작품에서 간음한 여인에게 A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고 다니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가슴에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주홍 글씨를 달아주고 계속해서 비난의 눈길로, 조롱썩인 말투로 이 여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놓곤했습니다.
이 여인의 삶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보고 싶겠습니까? 동네 슈퍼에도 맘 놓고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사람들이 가지 않는 시간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 움직입니다. 말씀에서 보면 제 육시에 이 여인이 우물가에 나왔습니다. 이 시간은 이스라엘 땅이 너무도 더운 시간입니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사람들을 피해 우물가에 물을 길러온겁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이 여인은 물을 먹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기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우물가에 너무도 조심스럽게 그리고 불안하게 왔을 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해서 만나지는게 아닙니다. 알고 보면 우리를 만나시려고 무던히도 애쓰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이 말라서도 아니요 몸이 곤하여서도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사마리아길로 안오시고, 훨씬 시간이 절약되는 다른 길로 가셔도 되는 일부러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러 오신겁니다. 문제는 이 여인이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는게 아닙니다.왠 청년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 오니까 경계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 여인처럼 편견을 가지기 일수 입니다. 교회는 돈이 있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둥,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라는 둥, 심지어는 귀찮다라는 말까지도 하는 분을 보았습니다.이 여인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물어 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불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면 안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고 함께 더불어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거룩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여겼기에 상종을 않했습니다.
흔히들 교회 다니면서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을 죄인 취급하며 자기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타인의 눈에 티를 보지 말고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말씀하시지요. 아무튼, 예수님을 처음 접하게 되면 온갖 이유를 달아서 피하고자 합니다. 교회에 가자고 하면, 못가겠다고 말할 이유가 없을까 한 참을 고민합니다. 그래서 전화가 오면 몸이 않좋아서, 손님이 와서,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핑계를 대다가 그래도 끝까지 교회 가자고 연락이 오면 이젠 아예 일요일날 아침 일찍 등산을 가든지, 낚시를 가든지 어디론가 나가버리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에 나간다는 자체가 두려운 겁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야지요,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설교 들어야 하지요,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에 어려운게 한 둘이 아니기에 피하고만 싶은 겁니다. 예수님이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 때 이 여인의 행동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 말은 들은 척도 안하고 물만 푸는 겁니다. 얼른 물을 떠서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은 겁니다. 만일 동네 사람들이 어떤 모르는 남자와 얘기하는걸 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생각만해도 끔찍하니까요..그 눈빛들, 조롱섞인 말들.. 교회에 처음 나오면 무척이나 긴장이 됩니다. 사람들이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내 옷차림새나 머리 모양을 보고 비웃지나 않을까? 진땀이 나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예수님이 갑자기 생수이야기를 하십니다. 한 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원한다면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누가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카드가 나에게 있는데 원하면 줄께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귀가 솔깃하지 않겠어요? 귀가 솔깃해진 이 여인이 그런게 있다면 달라고 갑자기 태도가 적극적으로 바뀝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딱 맞아떨어질 때 신기하게도 미워하던 사람도 좋아지게 되고, 무관심 했던 사람에게 언제 그랬냐는 듯 온 관심이 집중되기도 합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교회에서 하나님에게서 얻어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행하는게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 물을 어서 달라고, 그래서 동네 사람 눈치를 살피며 더 이상 오게 하지 않게 해달라고 조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엉뚱하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 남편이라는 단어가 이 여인의 귀를 거쳐 심장으로 빠르게 와서 꽂힙니다. 온 몸이 굳어버리고 가장 숨기고자했던 자신의 아픔이 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순식간에 머리까지 떠 오르자 멍하기까지 합니다. 첫 번째 남편의 모습에서 지금 동거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까지 모두 슬라이드를 보는 것처럼 스쳐가기 시작했고 그 때마다 겪었던 상처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이 여인의 입에서 죽기보다 하기 싫은 말... “남편이 없습니다”그리곤 아무말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내 마음을 알리가 없어, 내가 살아온 삶의 아픔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랴’이렇게 되뇌이면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물동이를 드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옳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아무도 몰랐던 얘기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말한 적도 없습니다. 구차한 자신의 인생을 알아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는 것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권도 넘을 거라고, 누가 내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냐고 한 숨 섞인 말로 인생의 역경을 표현합니다. 그리곤 더욱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면서 내가 이렇게 고생 고생 하면서 사니까, 술이 아니면 견딜 수가 없어, 이거라도 안하면 스트레스 쌓여서 어떻게 사냐고 말합니다. 교회가 밥먹여주냐고, 예수 믿으면 돈이 나오냐고, 떡이 나오냐고 말합니다. 돈 있어야 인생이 핀다고 말합니다. 돈 없으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지치고 힘이 드니 쉴 곳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각박한 세상에서 누가 나의 마음을 알아줄 이가 없냐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서 한 여인의 사무친 아픔을 위로 하십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안 아픈 척 합니다. 위로 안받아도 되는 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존심입니다. 내가 힘들고 지치고 외롭지만 남이 혹 힘이 들지 않냐고 위로해 보면 자기도 모르게 강한 척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안그런척해야 인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전혀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그 당시 가장 화제거리가 되었던 예배 장소 문제를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라고 답변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잘 살았는가, 얼마나 부자인가, 얼마나 학식이 있는가를 보지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 영혼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아픔을 살펴보시면서 그 여인의 마음이 온전히 치유되고 자유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셨습니다. 오직 이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그토록 먼길을 오셨고 앞으로 이 여인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이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에게 메시야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실 거라고 말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로라”
여인의 눈은 눈시울로 붉어집니다. 멈추지 않는 눈물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말할 수 없는 평강과 자유함이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문제 삼지 않으시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새롭게 변화되는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여인은 그 길로 곧장 마을로 달려 갑니다. 자신이 가장 있기 싫어 했던 곳, 가장 만나기 싫어 했던 사람들에게로 달려 갑니다. 내 삶의 부끄러움은 없어졌습니다. 이 여인의 삶에서 이제 정죄함이란 없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만났으니까요. 오히려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내 인생에서 필요 없다고 말하는 당신이 바로 가장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간절히 찾으시기 바랍니다. 약속대로 반드시 만나주실겁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년공동체에서 이성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0) | 2022.03.23 |
---|---|
포기하는 믿음 (0) | 2022.03.22 |
아버지의 마음(눅15:11~24절 ) (0) | 2022.03.22 |
양의 문 되신 예수/ 요 10: 1-10 (0) | 2022.03.22 |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 사도행전 5:30~32 (0) | 2022.03.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