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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쓰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마 21:1-9)

by 【고동엽】 2022. 3. 19.

주께 쓰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마 21:1-9)

 

  사람의 값은 우주보다 귀합니다. 그러나 그 값진 인간이 값을 다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비참해 지고 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했습니다. 왜 인간이 수에 칠 가치도 없을 만큼 될까요? 그것은 가치를 주신 창조자를 모를 때 가치를 잃게 됩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고 했습니다.
  또한 인간을 의지하는 삶은 가치를 잃게 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은 인간을 가리켜 안개, 나그네, 구름, 꽃, 풀 한 점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창조자밖에 있는 인간존재의 무상함을 그대로 정의한 말씀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의지하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정해집니다.
  여기 장난감을 선물로 받은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전 세계를 얻은 듯이 기뻤습니다. 밖에 나가 자랑했습니다. 얼마 후 그만 힘이 센 놈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는 온 세계를 잃어버린 듯이 울고 있습니다. 결국 그 아이의 기쁨과 가치의 근거는 장난감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른의 세계에서는 장난감 대신에 재산이나 명예나 인간이 가진 온갖 세상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것입니다. 인간 가치의 근거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가치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①주께 쓰임 받는 것은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쓰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은총이고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제자 둘을 건너편 마을로 보냈습니다. 얘들아 가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끌고 오너라. 만일 주인이 왜 나귀를 끌고 가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허락하리라. 제자들이 그 말씀대로 건너편 마을에 갔습니다. 주인은 쾌히 나귀를 제자들 앞에 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 와서 옷을 펴고 그 나귀새끼에 주님이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할 것으로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는 일에 사용된 나귀입니다.

 

  ②하나님은 준비된 자의 헌신을 받으십니다.
  이 주인은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집 이름도 없고 동네 이름도 없습니다. 건너편 마을이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귀가 주님 앞에 아주 값지게 사용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준비된 나귀입니다. 주님은 준비된 나귀를 사용하셨습니다. 집주인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고이 키워 놓은 그 나귀를 주님이 쓰시겠다 할 때 바쳐 드린 것입니다. 준비된 그것을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준비된 그것을 주께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만 주님이 쓰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귀 주인은 나귀를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주가 쓰시겠다 할 때 그 나귀를 기꺼이 내어 주었습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이 주님이 쓰실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살이와 옥살이하면서 적어도 세 개의 전공을 했습니다. 인사관리, 정치수업 그리고 신앙의 훈련입니다. 이와 같은 측면의 요셉은 준비된 사람입니다. 거저 제비를 잘 뽑아서 총리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13년 동안 준비시킨 것입니다. /할/

 

  ③그리고 준비된 우리의 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본문은 나귀 새끼를 예비하였다가 주께 드린 어느 마을의 한 숨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수중에 무엇이 있습니까? '내게는 주님이 쓰실만한 것이 별로 없다, 내가 주님 앞에 내어놓을 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욥의 신앙고백처럼 우리가 이 땅위에 올 때는 적신으로 왔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옷 하나도 내 옷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옷입니다. 내가 이 땅위에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누렸던 그 모든 육신의 것들은 다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앞에 쓰임 받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아주 값진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드릴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창조자의 은혜의 질서를 역행하는 불 신앙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이 많은 은혜와 축복의 은사는 주님 앞에서 아름다운 쓰임의 도구가 될 때만이 가치가 있습니다. /할/

 

  ④하나님은 두 부류의 인간형을 쓰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베드로형입니다. 베드로형은 별로 배운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베드로를 귀하게 썼습니다. 베드로에게 있는 특징적인 것은 열정과 행동입니다. 베드로는 어떤 제자들보다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제자들보다 행동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베드로를 썼습니다. '나는 남들 앞에 너무나 평범하다, 내게는 조금도 개성이 없다, 나는 배운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베드로형처럼 열정과 행동으로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런가 하면 바울 형으로 쓰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신약성경의 삼분의 일을 기록했던 바울과 같이 하나님은 바울 형으로 인간을 쓰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남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든지 남이 갖지 못한 어떤 테크닉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바울 형으로 쓰임 받을 조건이 됩니다. /아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쓰임 받는 실력으로 말해야 됩니다. 소유한 실력을 자랑하지 말고 쓰임 받는 실력으로 증명하기를 바랍니다. 음악가는 무대 위에서 실력을 증명해야 됩니다. 운동선수는 그라운드에서 실력발휘를 해야 됩니다. 문학가는 글로서 자기 실력을 표현해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삶의 실력을 증명하기를 바랍니다. /할/

 

  ⑤우리를 쓰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까?
  ⑴겸손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대명사입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는 '나귀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당시 나귀는 가장 천한 동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천한 동물들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겸손의 모습입니다. 또 예수님은 너무 초라하게 태어나셨습니다. 마구간에서 나시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한 것도 그 출신과 배경이 너무나 빈천했기 때문입니다.
  위인들의 전기를 보면 한결같이 어려서 평균 우수한 경우가 드물고 성적도 평균이하의 경우도 많습니다. 존 뉴턴은 초등학교 시절에 낙제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아인슈타인은 4살 때 비로소 말하기 시작했고, 7세 때 가서야 글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오늘 아이들은 모두 천재입니다. 톨스토이도 대학 때 낙제를 했고, 미사일을 발명한 브라운(Werner Von Braun)은 대학 다닐 때 수학공부에 낙제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그는 후에 미사일을 발명하게 됩니다. 
  '포춘'지에서 조사한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500개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어느 사장은 학창시절 성적이 평균 C 학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상원의원들 중 65%가 성적이 평균 이하였다고 하며 미국의 백만장자들 가운데 50%는 대학도 가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나중에 탁월한 성공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노력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류나 일등이 성공하는데 절대적인 기준은 아닙니다. /믿/ 
  ⑵예수님은 '평화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순전히 평화 때문입니다. 본문의 어린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한창 불화 중이었을 때입니다. 제사장을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통이 없을 때였습니다. 죄로 인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거리가 상당히 멀리 벌어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들이 지금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제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것이 참 큰 은혜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형제와 교우와 함께 살아갈 때가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평화는 함께 더불어 살아갈 때 찾아오는 평화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절대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웃과 떨어지고 가족과의 관계도 좋지 않으면 불화한 법인데 인간이 하나님과 불화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아멘!/
  ⑶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지독한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지독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 고난이 십자가를 지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고난을 아무 소리 없이 지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아멘!/
  ▶미국에서 한인 2세가 미국 명문대인 콜롬비아대학 의과대학에 지원서를 넣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수능시험 성적이 만점에 가까운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안 형편도 아주 부유해서 그 정도면 합격은 무난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이 안심하고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 불합격 사유가 이렇습니다. '성적은 우수하나 어디에도 헌혈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의사지망생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의 흔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다룰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이 지향하는 교육일 것입니다. 젊은이라면 그 청순한 정신을 가지고 스스로 봉사도 하고 수고도 하고 서로 돕는 삶을 체험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스스로 말입니다. 그것이 이를테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할/
  ⑷예수님은 '부활의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참으로 엄청난 아픔이었고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아픈 고난을 당하셨기에 부활이 주어졌습니다. 부활은 어쩌면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상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이 상급이 주어집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반드시 하늘은 상급을 주십니다. 그것이 100배의 결실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마침내 부활로서 보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질뿐 아니라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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