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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삼상 16:6-13)

by 【고동엽】 2022. 3. 19.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삼상 16:6-13)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외모란 우리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외적인 요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외모를 보시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왕이 된 후에 교만해져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고 기념비를 세울 때 하나님은 그러한 사울의 모습을 보고 버리셨습니다.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은 대신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키가 작았습니다.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에게서는 장군감으로서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 중심이란 정직함이요 신앙적인 충성심입니다. 양떼를 충성스럽게 감당했듯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라면 충성을 다하여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충성을 다했습니다. 출세의 기회도 많이 있었지만 그 기회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시기와 질투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라의 문제나 자식의 문제 앞에서도 그는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이것이 책임입니다. /할/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여러 번 노린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내 생명이 위협을 당해도 하나님 앞에 진실한 다윗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윗은 많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인정하셨습니다. 그 중심이 바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도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사람을 보실 때에 그 깊은 곳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믿/아멘!/
  하나님이 사람을 골라 사용하시는 것을 보면 어쩌면 사람의 생각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도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하나님은 일등도 좋아하시지만 꼴찌도 예민하게 살피십니다.
  이것부터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일등을 선택하고 엘리트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등 하려고 일류가 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의 방법을 구사하십니다. 오히려 꼴찌와 실패자와 낙오자들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을 삼는데 이새의 집으로 가서 그 아들 중에서 기름 부어 왕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새의 집에 가 보니까 여섯 명의 아들들이 다 모였는데 모두 참 잘났습니다. 모두 키가 훤칠하고 생김새가 아주 준수했습니다. 그래서 6절에 '과연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실 자가 주님 앞에 있도다'하고 기름을 부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는 아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음 아들도 보니까 또 준수했습니다.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 하니까 또 '아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여섯 아들 모두를 거절하십니다. 이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또 없느냐'하니까 이새가 말하기를 '말 째가 하나 더 있기는 한대 그 아이는 지금 들에 있다'고 그럽니다. 그 말은 아버지도 그 막내아들은 좀 부족해서 기대도 안하고 그 날 그 자리에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그 막내아들을 불러다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할/
  여기서 보면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우선 잘 생긴 것을 따집니다. 그리고 1등을 좋아합니다. 우리나라는 2등은 모두 별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소수 외에는 모두 실망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회사에서 사원을 뽑을 때도 우선 학교를 보고 성적을 보고 생김새를 보고, 키를 보고 실력을 먼저 봅니다. 모두 외적인 조건을 우선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람됨의 진정한 가치는 내면에 있는 것인데 세상에서는 그것들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보고 택하시는 방법은 사람들과 다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1등한 사람보다, 엘리트보다 꼴찌를 생각하십니다. 1등 하는 사람도 엘리트도 유능하지만 꼴찌한 사람에게도 상당한 장점이 있습니다. 꼴찌는 공부는 좀 못해도 순박함이 있고 순수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정이 있고 마음에 여유가 있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할/
  하나님이 다윗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그 아버지도 그 아들이 왕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막내아들은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 형들이 훨씬 유능해서 자신 있게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막내아들을 불러다 그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외모를 보고 생김새를 보고 조건을 먼저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키를 보지 않으시고 그 마음과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아멘!/

 

  ②작은 겨자씨를 귀하게 보십니다.
  겨자씨는 작음의 상징입니다. 이 겨자씨의 중요성은 작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작은 겨자씨 안에 들어있는 생명력입니다. 그 생명력이 그 겨자씨가 지니고 있는 가치이고 중요성이고 생명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작지만 이것을 땅에 심으면 크게 자라서 새들이 깃들 만한 은신처가 되고 쉼터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양을 따지고 부피를 따지고 크기를 따집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크냐,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길고 높으냐' 하고 물량을 따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더 많이, 더 크게, 더 높게'를 지향합니다. 이사를 갔다 하면 몇 평이냐를 따집니다. 서로 크고 높은 것을 자랑합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더 커지고 많아지고 높아지고 유명해지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크고 높고 잘 생긴 것만 좋은 것은 아닙니다. 평생 풍부하게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살다보면 때로 한때 배가 고팠던 때가 있었던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되고 추억이고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경거망동은 하지 않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많고, 크고, 높고 긴 것만을 따지지 않습니다. 결코 잘생기고, 키 크고, 부하고, 많은 것만 선호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게 들어있는 생명력입니다. 내 안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정신이고 순전한 마음이고 신선한 생명력이고 맑고 깨끗한 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그것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신장이나 아름다움이나 준수한 외모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보신 것은 외모가 아니고 그의 중심이었고 마음이었고 생각이었고 그의 맑은 영과 삶의 책임감을 보신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그런 다윗에게 당신의 백성을 맡기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할/
  사람이 아무리 외모가 출중하고 조건이 좋고 배경이 좋아도 그에게 이 믿음이 없고 용기도 없고 거기에 생명력도 없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씨가 아무리 크고 실하다 해도 그 속에 생명력이 없다면 그 씨를 어디다 사용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겨자씨를 들고 비유로 교육하신 것입니다. 이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이 속에 강한 생명력이 들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런 생명력을 원하십니다. /할/

 

  ③버려진 돌멩이를 들어서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눅20:17절을 보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석수장이들이 버린 돌이 때로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세상에서 쓸모 없다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때로 하나님이 부르셔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된다는 말입니다. 그 경우가 모두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격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이 버리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불러내서 훈련시켜 큰 인물을 만드십니다.
  무디는 초등학교 밖에 공부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무디가 얼마나 무뎠는가 하면 요한복음을 찾으라면 창세기부터 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디는 어려서부터 왕따를 당합니다. 친구들이 너를 가까이 하는 것이 창피하다고 무시하고 따돌렸다고 합니다. 그 무디는 말하자면 버려진 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버려진 소금입니다. 그래서 이리 밟히고 저리 밟혔습니다. 이름도 좋아야 합니다. 그 이름이 무디입니다. 얼마나 사람이 무디게 생겼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한 시대에 하나님은 무디를 사용하셔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믿/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그 시대의 낙오자들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그 시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낙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도자 빌리 그래함도 전도사 때 교도소를 방문해서 설교를 하는데 얼마나 말주변이 없는지 재소자들로부터 '너는 전도사 하지말고 다른 일이나 하라'고 야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후에 세계적인 전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를 별과 같이 모래와 같이 자손을 번창하게 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불러내셨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시려면 젊은 사람들을 택하고 체형이 다산체형을 골라내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나이 75세 된 아브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때로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 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여러분은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꼴찌만 불러 사용하시는 것이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 없이 사람을 선택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골라내신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함이고 충성됨이고 부지런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장점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요소들입니다. 하나님은 유능성 보다는 진실을 보십니다. 재주보다는 진실함을 보십니다. 겸손함을 보십니다.
  엘리트들, 일류 자들, 1등한 사람들은 성적은 좋으나 대부분 교만합니다. 자만합니다. 자기 과신에 빠져 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리고 서로 융합을 잘 못합니다. 긍정적인 정신도 부족합니다. 수용력도 적습니다. 사람이 가져야 할 인간성은 1등한 사람이나 엘리트보다는 꼴찌가 훨씬 더 좋습니다.
  꼴찌에게는 책임감이 있고 열심히 있고 화합할 줄 알고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과 따뜻한 인간애가 있습니다. 그리고 꼴찌들에게는 교만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겸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런 마음을 높이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자만한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할/ 
  오늘 우리는 너무 배경을 따지고 학벌을 따지고 조건을 따지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외모나 생김새를 보신 것이 아니고 그 마음에 있는 생명력과 책임감과 영적 자질과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나라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맡겨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런 모습을 원하십니다. 그런 생각과 용기가 약동하는 생명력을 찾으십니다. 그 삶이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인 줄 믿습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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