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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강)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행 26:19-29)

by 【고동엽】 2022. 3. 11.

(제71강)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행 26:19-29)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부자 집에서 도둑을 지키려고 개를 길렀습니다. 그 집에 개와 닭이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닭이 하는 말이 '나는 새벽마다 울어야 하는데 탁상시계가 내대신 울고 있으니 나는 울 필요가 없어서 울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주인이 도적을 지키라고 값비싼 고기를 먹이며 기르는데 도둑이 들어와도 왜 짖지를 않느냐?'고 하니까 개가 하는 말이 '주인이 도둑인데 내가 누구를 보고 짖는다는 말이냐? 그래서 짖지 않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개도 짖지 않는 미쳐 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흔히들 하는 말을 빌리면 10대는 사랑에 미친다고 합니다. 20대는 야망에 미치고, 이상에 미친다고 합니다. 30대는 사업에, 소유하는데 미친다고 하고 40대는 정욕에 미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50대는 늙는데 미치고, 60대는 백발과 죽음에 미친다고 합니다.
사실 미쳤다는 말은 과히 좋은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석에 따라서는 적극적이라는 말의 표현도 됩니다. 미쳐도 잘 미친 사람이 있는가하면 미쳐도 더럽게 미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에 미치고, 노름에 미치고, 춤바람에 미치고, 봄바람에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주 정상적으로 미친 사람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에 미치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에 미쳐야 하고, 예술 하는 사람은 예술에 미쳐야 합니다. 철학 하는 사람은 철학에 미쳐야 합니다.
그 일에 집중할 때, 미친 사람이 되어 버리고 그 일에 빠져 들어갈 때 미친 사람같이 되어 집니다. 코카콜라 사랑은 내 혈관에 흐르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고 코카콜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사업에 푹 빠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현철이라는 가수를 잘 압니다. 그는 무명으로 30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굶기도 많이 굶고, 서럽고, 배고픔도, 갈 세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몇 년 전 KBS 방송 대상을 받을 때 기자의 인터뷰에서 '그 무명시절 30년도 어떻게 참고 보냈느냐?'고 묻자 '나는 인기와는 별개로 노래가 좋아서 노래에 미쳐서 이렇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노래에 미쳐서 출세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도 미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제목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입니다. 그럼 바울이 누구에게 미쳤습니까? 예수님께 미쳤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붙들려 가이샤라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죄명은 행24:5절에 나오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죄목입니다. 괴수는 '맨 앞장서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2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세 번 재판을 받는데 24장은 벨릭스 총독에게, 25장은 베스도 총독 앞에서, 26장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입니다.
베스도는 벨릭스의 후임으로 유대 총독에 부임한 사람이고 아그립바 왕은 베스도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것을 축하하려 자기 부인과 함께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25장에 보면 베스도가 자기를 축하하려 방문한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에 대한 유대인의 고소사건을 설명했습니다. 베스도는 전임자, 벨릭스부터 구금하여둔 한 사람의 고소 자를 인수받았는데 그들 간의 종교문제 뿐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아그립바 왕이 바울을 한번 만나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26장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위대한 신앙 간증을 하고 예수님을 전하는 장면을 봅니다.
유대 총독 베스도가 바울의 공소된 서류를 검사하면서 바울에게 질문하기를 '내가 보니 바울 당신은 예수 믿는 것만 아니면 로마 시민권 자요 당시 그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써 학벌로나 출신 신분으로나 경력으로 봐서 나무랄 때가 없는데 왜 저주의 십자가 위에서 사형수로 죽은 예수를 변호하고 응호하는 것이요! 참 답답한 친구'라고 소리쳤습니다. 물론 의역해 본 것입니다.
바울이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를 변호합니다. 먼저 자신은 엄격한 유대 주의자였으며 바리새파에 속해 있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서 없애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발견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일이 자기의 사명이요 천직인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완전히 뿌리뽑아 버리려고 각 회당마다 다니며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잡히는 데로 투옥시켰습니다.
그리고 직접 고문과 형벌을 가했습니다. 그는 믿는 자를 뿌리뽑기 위해 외국까지 가서도 핍박했으며 스데반을 죽게 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스데반이 죽는 것을 보고 어떤 살기의 쾌감까지 느끼며 그 날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대제사장의 신임장을 가슴에 안고 다메섹 도시까지 가는데 갑자기 이상한 빛이 비취며 눈이 부셔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광선에 사로잡혀서 땅에 엎드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주님의 이 한마디 음성에서 사울은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도 자랑스럽던 율법도 그 많은 지식과 학문도 또 자신이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특권의식도 모두 무너져 내렸습니다. 한마디도 주님의 빛이 사울의 옛사람은 죽인 것입니다. /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가 누구입니까? 빌라도가 죽이라고 사형선고를 내렸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음모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나사렛의 목수가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서 나를 부르시다니, '당신은 정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십니까?' 이런 독백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때부터 예수님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지함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내 잘못된 열심 때문에 목숨을 걸고 섬겨온 하나님을 내가 박해했구나!' 자기의 아버지인줄 모르고 자기의 아버지를 때린 불효자 같은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한 채, 하나님께 3일간을 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종 아나니아가 와서 그에게 안수기도를 해줄 때 빛을 받을 때 멀어졌던 두 눈이 다시 뜨게 되었고 아주 신비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성령님이 그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전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옛사람 사울은 죽어 버렸고, 죽음의 자리에서 새사람, 바울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예수님이 바로 선지자들과 모세가 예언한 메시아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이라고 외쳤습니다. ▶본문을 상고해 보자!

 

▶19절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 무엇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의 계시를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생각과 철학, 자기의 주장을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가?' 여기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과 전 존재는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할 것인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말씀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르고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고난과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기쁨으로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전해 왔습니다. 자기가 사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고, 지금도 아그립바왕과 고관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20절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두 가지의 회개가 있습니다. 먼저 '생명을 얻는 회개'가 있습니다. 행11:18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도다'
이 회개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어떤 죄인이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방황하던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날 때 경험하는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분명히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에 그 자신을 맡기는 회개입니다.
이 회개를 하게 될 경우, 그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회개를 한 사람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심판 받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영원한 형벌에 던져질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 '구원을 얻은 자의 회개'가 있습니다. 만일 첫 번째 회개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이 두 번째 회개는 믿는 자들에게 필요한 회개입니다.
만일 성도들의 삶이 완전한 것이라면 회개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을 유혹하는 것이 많으며 그 유혹들 앞에 선 우리들은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넘어진 순간에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회개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회개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거룩한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성도들에게 선한 일을 맡기지도 않을 것이고, 그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주님으로부터 보상받을 좋은 기회들, 곧 선한 일에 참여할 기회들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무엇인가?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호11:8절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매 내 마음의 돌이킴이 한꺼번에 불같이 타오르는 도다.'
죄짓고자 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죄가 싫어지고 죄 아래 살기를 원치 않는 마음이 될 때, 그는 회개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새롭게 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 '뜻을 돌이키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입니다.
시135:14절 '이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판단하시며 자신의 종들에 대하여 친히 뜻을 돌이키심이니 이다'

 

▶21-22절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특히 40인의 특공대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심한 결사대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렇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40인의 결사대 앞에서도, 무능한 로마 관리 앞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순간, 순간 당신의 사도인 바울을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습니다. 로마의 천부장 루시아를 비롯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그들의 말을 엇듣게 한 바울의 조카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바울을 지켜 주셨습니까?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메시아임을 증거하라고 살려 주신 것입니다.


▶23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의 핵심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핵심과 주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 있습니다. 모든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빚진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롬1: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빚진 자는 자유 함이 없습니다. 빚을 갚기 전에는 마음이 평안치 못합니다. 이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바울은 이렇게 애쓰고 수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은 더 나가 고전 9:16절에 보면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심령이 우리들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믿/ ⇒이 복음을 받은 베스도의 반응이 24절에서 나옵니다.

 

▶24절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그는 바울이 심문받는 자리에서 너무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제 정신이 아닌 미친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오순절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으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새 술에 취했다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미쳤다는 말을 조금 고상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된 영적 체험의 이야기가 세속적인 생각과 삶을 살아가는 베스도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터무니없는 미친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2: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죽은 자의 부활을 이해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인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다'고 하자 그 소리에 기세가 꺾일 바울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히려 더욱더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25절을 보세요.

 

▶25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뭐라고 합니까? 표준 새 번역을 보면 '베스도 각하여,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맑은 정신으로 참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에 몰입했기 때문에 오해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 귀한 것을 받았기에 너무 귀한 은혜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 즐거움을 당신들이 알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 계속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26-27절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왕께서는 예언자들을 믿으시지요. 믿으시는 줄을 내가 압니다.' 아그립바 왕은 다른 왕들과는 달리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왕에게 바울은 나사렛에서 태어나신 만 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바른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왕도 총독도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이 담대하게 예수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죄수의 몸인데도 전도했습니다. 아무리 전도를 잘하고 전도에 열정적인 사람이라도 손에 쇠고랑을 차고서는 어렵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쇠고랑을 차고도 재판받은 죄수가 전도하다니 정말 미친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미친 사람입니다. 오직 주님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딤후4: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명령했습니다.
전도는 때나 상황을 가리지 말고 항상 하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전도가 최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선지자들이 오리라고 예언해 놓은 메시야를 당신이 알고 있지 않소?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를 믿어야 삽니다.' /할/
보통 사람들은 재판관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감히 고개도 못 드는데 바울은 당당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전도를 받은 아그립바 왕의 모습을 보십시다.

 

▶28절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보잘 것 없는 죄수가 재판관을 넘어지게 하려 한다고 어림도 없는 수작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왕의 그 위세에 찔끔하고 물러서기 예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29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29절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네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은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쉽게 풀어서 요약하면 '하나님! 저 왕도 나처럼 되게 하소서'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일개 죄수가 무명의 전도자인 주제에 감히 왕 앞에서 이 무슨 망발인가? '하나님 나도 저 왕처럼 되게 하소서!' 그래야 마땅한 것인데 바울은 '저 왕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에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외친 바울의 말속에는 저들도 나와 같이 예수님을 위해 미친 자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입니다. 오늘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씀 속에서 몇 가지 진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⑴바울이 가진 것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총독은 세상 보화를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늘의 보화를 가진 자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재물은 왔다 같다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보화는 보증수표입니다.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필요할 때 하나님께 청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백지수표를 주신 답니다. 이런 보화를 우리는 가진 자입니다. /아멘/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그들은 인간적인 세상 칭찬과 영예를 받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늘의 칭찬과 상을 받은 자입니다. 그들은 세상 적이요, 육적인 쾌락을 가진 자입니다만 그러나 바울은 하늘의 부요와 평화를 가진 자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관을 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늘의 관을 쓴 자입니다. 그들은 불안한 양심과 어두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중생 받은 새 양심으로 그 가슴이 항상 주의 빛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로마의 폭군 황제를 주인으로 모시고 삽니다만 바울은 사랑의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삽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바울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는 아그립바 왕이나 베스도가 가진 것보다 완전하고, 선하고, 좋은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당당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⑵나처럼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아그립바 왕도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도록 변화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 믿고 바울로 바꾸어졌습니다. 사울은 큰 자요, 바울은 작은 자입니다. 교만한 자가 겸손한 자로 바꿔졌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원수같이 여기던 자가 이제 오직 예수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롬14: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전2: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할/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혁명도 역사를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교육도 인간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새롭게 하다'는 히브리어의 '하다쉬'는 '새 것이 되다.'는 뜻입니다. 이 뜻은 사역동사로 사용하면 '다시 세우다, 수선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세우며 수선하시는 '하다쉬' 하나님이십니다. /믿/
성경을 보면 예수님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되었으며 38년 된 병자가 고침 받았고, 12년 된 혈루증 여인도 고침을 받았으며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죽은 자도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인생이 가치관이 새로워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치관이 추하면 사는 것도 추하고 가치관이 멋있으면 사는 것도 멋있게 삽니다.
돈도 직위도 많지만 존경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자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대접받으려는 삶이 대접하려는 삶을 이룬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하나님의 성업은 감당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변화됩니다. 바울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 것은 예수 믿고 변화 받아 새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⑶나처럼 인격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누가 감히 지체 높은 왕보고 '당신도 나처럼 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처럼 되라는 말은 대게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결박한 죄수의 몸으로 재판 받는 자리에서 재판장 되는 왕에게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왕보다 무엇이 잘났다고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죄수와 재판장, 죄수와 왕, 비교가 안 됩니다. 죄수가 왕을 본받아야지 어떻게 왕이 죄수를 본받아야 됩니까?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것을 깨뜨리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인격입니다.
▶불란서에서 반란군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 귀족들은 다 자기 성문의 빗장을 굳게 잠가 버렸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몽테뉴' 백작만은 폭도들이 날뛰는 판에 자기 성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그 당시 성문 빗장을 걸지 않은 유일한 귀족은 오직 그 한 사람 뿐입니다. 그의 빛나는 인격이 일개 기병부대보다 더 안전하게 그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인격은 총칼보다 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체력이 국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 없는 체력이 얼마나 무서운 악으로 오용되고 있습니까? 오래 전에 여의도 의사당에 국회 노동 위에서는 돈 봉투사건으로 떠들썩한 때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격이 국력입니다. 나라가 평안해지고 법질서가 유지되려면 정치가의 고상한 인격이 있어야 합니다.
인격 없는 정치 때문에 우리나라가 겪는 혼돈과 무질서 경제적 손실이 엄청납니다. 인간이 가진 힘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은 인격의 힘입니다. 개개인의 인격이 변화되지 않고서 진정한 개혁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양심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인격은 왕관보다 더 빛나는 권위였습니다. 왕관이 없으면 왕 노릇하지 못하는 졸장부 아그립바 왕에 비하면 왕관이 없어도 왕 이상으로 군림하는 바울의 인격은 위대한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너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할/
⑷나처럼 진정한 자유인이 되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누가 포로요, 누가 자유인입니까? 육안으로 볼 때는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결박당한 부자유한 몸이요, 재판관인 왕은 자유한 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그들을 부자유한 자로 보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죄의 포로자로 보았습니다. 아그립바왕이 누굽니까? 유대를 약 50년 간이나 통치한 헤롯 왕가의 마지막 왕으로써 그의 사생활이 죄 투성입니다. 지금 옆에 데리고 온 부인인 베니게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던 자기 누나라고 하는 학자도 있고 여동생이라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니게는 그 당시 이사람, 저 사람과 결혼한 요부입니다.
지금 아그립바 왕은 인륜의 죄와 불륜의 죄를 범하고 있는 자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유인이 되라는 것은 세상의 쾌락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죄는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어떠한 죄라도 예수님께 와서 자복하고 회개하면 우리 주님은 참 자유를 주십니다.
수가성의 여인도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도 예수님 안에서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부르십니다.
바울이 볼 때 아그립바 왕은 죄악의 포로가 된 불쌍한 자였습니다. 그런고로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 '당신도 이렇게 결박한 것 이외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주시는 참 자유가 있었기에 고후4:8-9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 안에서 참 자유를 소유한 자입니다. 그는 고후6:8-10절에서 자유의 대헌장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할/
예수님께 미친 사람은 신나는 삶을 영위합니다. 구약의 노아는 바닷가에서 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기를 120년 간이나 걸렸으니 사람들이 저 노인 미쳤다고 조롱을 받았으나 끝까지 믿음을 지켜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으며, 사렙다 과부는 가뭄으로 인해 다 굶어 죽어 가는 판에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자기에게 보내 주신 것이 감사해서 죽기 전에 선한 일 한 번 하려고 기쁜 마음으로 마지막 떡을 엘리야에게 대접했습니다.
그 역시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고 자기 아들에게까지도 미친 사람대접을 받았지만 그는 끝까지 신앙으로 대접했더니 3년 반 동안 가루 통에 가루가 마르지 않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바울처럼 예수께 미쳐 보십시오! 다른 것이 미치다가는 세상 끝장나지만 예수께 미치면 세상 시작이고 축복 시작입니다. /믿/
예수께 미친 사람이 예배자로 삽니다. 예수께 미친 사람이 기도합니다. 예수께 미친 사람이 전도합니다. 이런 사람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미쳐도 잘 미쳐야 합니다. 좋은 일에 미치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고후5:13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할/

 

▶30-31절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자기들끼리 나오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들어보니 아무 죄가 없구먼, 사형시킬 죄도, 결박할 죄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 만난 사건도, 그 예수를 믿고 행복하다는 것이 뭐가 죄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32절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뻔하였다 하니라"
바울이 상소만 하지 않았다면 그만 내주었으면 말썽 없이 되겠는데 덜컥 상소를 해 놓았으니 난처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이사에게 상소를 했는데 그 죄목이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상소문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 그들이 무능한 관리임이 들어나 정치생명이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민이 깊어만 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 자존심이 대단하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바울과 같은 자존심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국어사전에 자존심이라는 말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는 마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를 믿는 우리가 어떠한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까?
⑴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가진 것에 대한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요1:12).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이 권세는 세상에서 주는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의 자녀만 되어도 대단한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한낮 아버지 덕을 보고 사는 것인데도 대단한 자녀의 권세를 누리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인데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⑵성령의 사람이라는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⑶영생의 기쁨을 얻은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희희낙락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사는 기쁨을 잃어버렸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아그립바 왕처럼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해도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그의 인생은 실패작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서 영생의 기쁨을 소유한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⑷성도는 사명감의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사슬에 묶였으나 불의한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사도 바울에게 맡겨 주신 사명 때문임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유대 총독 베스도는 바울더러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에게 미쳤습니까? 예수님께 미쳤습니다. 잘 미친 것입니다. 이 미침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동력이 들어있습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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